“괜찮습니다.”소미진의 물건엔 손대고 싶지 않았다. 감히 이들과 엮일 수 없었으니 말이다.잠시 멈칫하던 소미진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혹시 나를 원망하고 있느냐?”“그럴 리 없습니다.” 한아름은 그녀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고 덧붙였다. “제 것이 편한 것뿐입니다.”소 부인은 즉시 하인에게 한아름이 머물던 거처에서 그녀의 옷가지를 가져오게 했다.한아름은 안방에서 옷을 갈아입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밖에 나가 있었다. 소형준은 크게 숨을 내쉬었지만 여전히 가라앉지 않는 마음에 답답함을 토해냈다. “어쩌다 저리된 거
한아름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는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한때는 혈육들을 만날 생각에 마음이 들떴던 적도 있었지만,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렸다.그나마 유일하게 품고 있던 작은 기대는 오 할머니가 무릎을 꿇는 순간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오 할머니는 예전부터 다리가 불편했다. 비가 오거나 겨울이 되면 늘 시큰거리고 퉁퉁 부어 한아름이 산에서 캔 약초로 며칠동안 치료해야만 겨우 천천히 걸을 수 있었다.며칠 전에도 경성엔 장대비가 쏟아졌었다. 오명순는 어떻게 견뎠던 걸까?한아름이 막 오
“악!” 소미진이 비명을 질럿다.식탁에 둘러앉은 이들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바뀌더니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 틈을 비집고 한아름은 오 할머니에게로 달려갔다.“괜찮으세요?”오명순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이 장면을 본 소형준은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의 착한 여동생은, 가족이 아닌 시골에서 온 저 늙인이게만 애정을 쏟고 있었다. 성큼성큼 다가간 그가 손을 들어올린 순간, 한아름이 오명순 앞을 막아섰다.“비키거라.”한아름의 얇은 다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나이가 많으십니다. 일부
그녀는 오명순을 한 번 흘끗 보더니 한아름에게 시선을 돌렸다.“소씨 가문의 피가 밖에서 떠도는 일은 없다. 고작 몇 마디로 구슬려 데려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라.” 그녀의 눈빛은 마치 칼처럼 날이 서 있었다. “우리 집안에는 그리도 천한 뼈대를 가진 이는 없다.”‘구슬리다’, ‘천한 뼈대’단 몇 마디였지만 두 사람의 존재를 단번에 규정해 버렸다. 그녀가 계속 고집을 부린다면, 그건 곧 오명순에게 속아 넘어갔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었다. 동시에 오명순에게는 나쁜 마음을 먹고 접근한 죄로 목숨마저 부지 할 수 없을 것이
여홍의 비아냥도 무시한 채 한아름은 빠르게 밖으로 달려갔다.등 뒤에서은 여전히 여홍이 콧방귀를 뀌고 있었다.그리고 덜거덕거리는 발소리 하나가 급하게 그녀를 따라붙었다. “아가씨! 잠시만요!” 주옥미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지금 가셔봤자 아무 소용 없습니다. 오히려 그분만 더 고생하게 될 겁니다.” 그제야 한아름은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주옥미는 기이한 자세로 오른쪽 다리를 바닥에 짚고 서 있었다.한아름은 순간 목이 메어왔고 무의식중에 주먹을 꼭 쥐었다. 그러나 힘이 서서히 빠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조 마마는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가법에 따라 도둑질은 곤장 삼십 대다.” “쳐라!” 체격이 건장한 하녀 2명이 오명순의 어깨를 잡고 계단 아래로 질질 끌고 갔다. 한아름은 속이 타들어 갔다. 방금 전까지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곤장 삼십 대라니, 그 몸으로 절대 버틸 수 없었다.“잠깐!” 한아름은 급히 계단을 내려가며 말했다. “간식은 내가 어르신께 부탁한 것이다. 배가 너무 고파서 할머니 방에 있던 간식이 맛있어 보였거든. 할머니께서 나를 아끼시니 이 정도론 꾸짖지 않으실 것
주옥미는 한아름을 꼭 붙잡고 놔주질 않았다.“이 노비의 다리는 군주께서 부러뜨린 것입니다. 장군부에서 이 천한 몸을 써주려는 이가 없었는데, 오직 아가씨만 마다하지 않으셨지요. 저는 이제 아가씨 사람입니다.” 주옥미는 눈물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아가씨 자신을 위해서도, 저 어르신을 위해서도 절대 충동적으로 굴지 말아주십시오.” 한아름은 몸이 순간 떨렸다.그녀는 주옥미를 그저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큰 그림을 보셔야 합니다!” 한아름은 눈을 잠시 감았다. 큰 그림을 위해 그녀는 기필코 견뎌야 한다.그래야만
하지만 한아름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괜찮습니다.” 그녀는 두 손을 가리런히 모은 채로 단정하게 서 있었다. 소미진의 시선이 그녀의 손에 닿았다. 참으로 매끈하면서도 대파의 속살처럼 희고 고운 손이었다. 처음 보았던 그 손은 매우 거칠었고, 손톱은 몇 개나 부러져 있었다. 하여 소미진은 여러 번 향고를 선물했고 2년이 지나서야 마침내 여느 부잣집 딸이라 불릴 만한 고운 손으로 가꿔냈다.별원에 일 년을 있으면서도 다행히 그 손만은 그대로였다.하지만 오른판은 여전히 부러져있었다. 그것은 소형민이 직접을 손을 댄 것이
소형준의 눈빛에는 분노가 소용돌이였다. 당장이라도 한아름을 삼켜버릴 듯했다. 잿빛으로 굳어버린 얼굴에서 한기가 뿜어져 촛불조차 소용이 없었다."그거 하나로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힐 셈이냐? 그러다 결국 온 가족이 너 때문에 무너져야 속이 만족할 테냐?"한아름은 더 이상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신분 같은 건 상관없다고, 처음 돌아왔을 때부터 말해왔다. 그저 가족이 함께 있기를 바랐을 뿐이었다.하지만 그때 했던 말들을 이제는 차마 입에 올릴 수 없었다. 너무 허무한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신분에 신경 쓴 건,
"깼느냐?" 촉촉히 젖은 한아름의 눈동자에 소형준은 가슴이 아파왔다. "오라버니가 약을 떠먹여 줄까?" ‘오라버니’라는 말에 한아름은 현실로 돌아왔다. 손을 들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자, 방금 전의 연약한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폐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약을 젓던 소형준의 손이 멈췄다. 촛불 빛에 그의 얼굴은 한결 부드러웠다."약을 먹어야 빨리 낫는단다. 너무 써서 괴롭겠지만 네가 좋아하는 밀감 절편도 준비했단다." 몸이 약한 탓에, 처음 왔을 때는 무슨 이유인지 자주 앓아눕곤 했다.소형민은
한아름은 그만 병상에 드러눕고 말았다. 주옥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눈물을 삼켰다.한아름은 고열로 목소리마저 갈라진 상태였다."속히 내 불길한 운명에 대해 소문을 퍼뜨리거라." 그러자 주옥미가 눈물을 흘리며 말렸다. "어찌 그런 일을 부추기는 겁니까? 여인은 명예가 가장 중요한 법인데요." 세상은 여인에게 너무나 가혹했다. 성심도 고와야 했고 심지어 타고나는 운명에도 허점 하나 용납하지 않았다. 곁을 지키던 김주희가 주먹을 꼭 쥐며 이를 악물었다."원치 않으면 하지 마시지 왜 이리 자신을 괴롭히시는 겁니
문채가 출중하고, 품격이 있는 그는 여전히 태자 곁에서 배우고 있었다. 그는 늘 소씨 가문의 자랑이었다.머지않은 미래에 태자가 순조롭게 즉위한다면, 소형준은 아마 가장 젊은 내각 대신이 될 것이다."형준이가 좋아하는 차를 준비하거라." 휘장을 걷어들고 들어와 예를 올린 소형준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할머니, 아름이의 혼사에 대해서..." 박말금의 미소가 조금 굳어졌다. "여직 심씨 가문을 잊지 못한 것이냐? 너까지 나서다니, 정말 대단하구나. 하지만 그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고 나는 다른 사람을 이미 정해두었
심태준의 눈동자에 경멸이 가득 어렸다. 하지만 그가 다시 입을 열려는 그때 소형준이 먼저 선수 쳤다. “설이를 묻고 뜰을 깨끗이 청소하거라. 그리고 아름이는 돌아가 쉬도록 하여라.” 그리고 덧붙였다. “방안에만 처박혀 있거라.” 한아름은 비몽사몽한 채로 한발 다가서며 물었다.“세자의 혼인이 저와 무슨 상관이죠?” 그녀는 온몸이 얼어붙은 듯했다.얼마 남지 않은 열기 마저 심태준의 그 한마디에 급격히 식어가고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 오명순과 함께 소씨 가문을 떠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평생을 보내는 것이 이
소형준은 손을 뻗어 백옥 토끼를 거칠게 낚아채더니, 힘껏 바닥에 내리쳤다.빠직!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백옥 토끼는 산산조각이 났다."소아름, 너 따위가 요구를 할 자격은 없다."소형준은 그녀의 데인 손을 힐끔 보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내밀며 말했다."내놔."한아름은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은비녀를 꼭 움켜쥐고 있었다.한편, 소미진은 입술을 깨문 채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어릴 때부터 무공을 익혀온 덕에 소형준이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고 일부러 그렇게 질문했던 것이다. "내놓으라고 했다.""겨우 비녀 하나로 이렇
한아름은 고개를 번쩍 들고 아무렇지 않게 화로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것은 오명순이 그녀의 성년식을 맞아 축복의 말을 전하며 직접 꽂아준 것이었다.“아가씨!” 화들짝 놀란 주옥미가 외쳤지만, 한아름은 못 들은 척을 하며 잿더미 속을 계속해서 헤집고 있었다. 밤새 종이를 태운 탓에, 잿더미 속에는 아직 불꽃이 남아 있었다.백옥같이 고왔던 한아름의 손끝에 순식간에 물집이 생겼다. 하지만 그녀는 아픈 줄도 모르고 비녀를 찾았다. 그러다 끝내 찾은 비녀를 손에 움켜쥐었다. 그러자 유겸이 미간을 찌푸렸다.“그건 설이를
한아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녀더러 개 따위를 위해 밤샘 제사를 지내라고 하고 있었다.소 부인도 그를 다급히 꾸짖었다.“형준이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어떻게 동생에게 개를 위해 제사를 지내란 그딴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냐?” 하지만 소형준은 차분한 목소리로 응수했다. “설이는 심태준이 미진에게 선물한 것이고 전장에서 적군의 장수를 물어 죽인 명견의 후손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만약 심씨 가문에서 이 일을 알게 된다면 뭐라 해명할 것입니까?” 소 부인은 잠시 멈칫했다.그러다
한아름은 망토에 묻은 피가 오명순 할머니의 것임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망토를 입고 할머니를 만나러 갔을 때는 심태준이 설이를 데려오기도 전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할까? 중요하지 않았다. 한아름이 여홍을 바라보자,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며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마치 온갖 고통을 견디고 있는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 뜰을 분주히 오가는 불빛들이 한아름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었다. 그 얼굴은 깨지기 쉬운 도자기마냥 위태로워 보였다.모두의 시선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녀의 마음을 가르며, 한 번, 또 한 번 그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