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아름은 가짜 친딸에게 자리를 빼앗긴 채 13년을 떠돌다, 마침내 장군부로 돌아왔다. 가족들과 다시 만날 것을 기대했지만, 정작 그녀에게 주어진 신분은 ‘외가 쪽 사촌’이라는 애매한 자리였다. 소씨 가문의 ‘공주님’ 이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하자, 가족들은 그녀더러 ‘예법을 익혀야 한다’며 희생양으로 내몰았다. 첫째 오라버니는 그녀의 팔을 직접 부러뜨렸고, 둘째 오라버니는 서슴없이 채찍을 들었다. 어머니라는 분은 말리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큰절을 올리며 황송하다고 했다. 한아름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였다. 가족이라 불리는 그들은 누구 하나 망설이지도 않았다. ‘예법을 익히는’ 1년 동안, 지옥이 나을 법한 곳에서 삼백여일을 견디고 보니 자신은 처음부터 혼자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그 순간, 그녀의 마음은 완전히 식어버렸다. 그리고 1년 후, 한여름이 아픈 몸을 이끌고 장군부로 돌아오자, 친모는 참회하는 듯한 얼굴로 이제는 아껴주리라며 용서를 빌었고,무장으로 살생을 주저하지 않던 소씨가문 첫째 오라버니는 손수 만든 활을 내밀며 직접 만든 것이라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태자의 벗으로 늘 당당했던 둘째 오라버니는 허리를 숙이며 무릎을 꿇고 한다는 말이 명예따위는 중요치 않다고, 그녀만 있으면 뭐든 상관없다였다. 그러나 한아름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저는 소씨가 아니고 한씨 인데 누구시죠? 저는 장군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녀의 미소는 세상을 뒤흔들 수 있는 힘을 지녔다. 그러나 그 웃음은 그녀에게만 한없이 부드러운 그를 마주했을 때만 환하게 빛났다. “널 해친 자들이 다시는 얼씬거리지도 못하도록 할 것이다.” 한아름은 원수의 피를 닦으며 차분히 대답했다. “그래요.”
더 보기소형준의 눈빛에는 분노가 소용돌이였다. 당장이라도 한아름을 삼켜버릴 듯했다. 잿빛으로 굳어버린 얼굴에서 한기가 뿜어져 촛불조차 소용이 없었다."그거 하나로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힐 셈이냐? 그러다 결국 온 가족이 너 때문에 무너져야 속이 만족할 테냐?"한아름은 더 이상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신분 같은 건 상관없다고, 처음 돌아왔을 때부터 말해왔다. 그저 가족이 함께 있기를 바랐을 뿐이었다.하지만 그때 했던 말들을 이제는 차마 입에 올릴 수 없었다. 너무 허무한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신분에 신경 쓴 건,
"깼느냐?" 촉촉히 젖은 한아름의 눈동자에 소형준은 가슴이 아파왔다. "오라버니가 약을 떠먹여 줄까?" ‘오라버니’라는 말에 한아름은 현실로 돌아왔다. 손을 들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자, 방금 전의 연약한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폐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약을 젓던 소형준의 손이 멈췄다. 촛불 빛에 그의 얼굴은 한결 부드러웠다."약을 먹어야 빨리 낫는단다. 너무 써서 괴롭겠지만 네가 좋아하는 밀감 절편도 준비했단다." 몸이 약한 탓에, 처음 왔을 때는 무슨 이유인지 자주 앓아눕곤 했다.소형민은
한아름은 그만 병상에 드러눕고 말았다. 주옥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눈물을 삼켰다.한아름은 고열로 목소리마저 갈라진 상태였다."속히 내 불길한 운명에 대해 소문을 퍼뜨리거라." 그러자 주옥미가 눈물을 흘리며 말렸다. "어찌 그런 일을 부추기는 겁니까? 여인은 명예가 가장 중요한 법인데요." 세상은 여인에게 너무나 가혹했다. 성심도 고와야 했고 심지어 타고나는 운명에도 허점 하나 용납하지 않았다. 곁을 지키던 김주희가 주먹을 꼭 쥐며 이를 악물었다."원치 않으면 하지 마시지 왜 이리 자신을 괴롭히시는 겁니
문채가 출중하고, 품격이 있는 그는 여전히 태자 곁에서 배우고 있었다. 그는 늘 소씨 가문의 자랑이었다.머지않은 미래에 태자가 순조롭게 즉위한다면, 소형준은 아마 가장 젊은 내각 대신이 될 것이다."형준이가 좋아하는 차를 준비하거라." 휘장을 걷어들고 들어와 예를 올린 소형준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할머니, 아름이의 혼사에 대해서..." 박말금의 미소가 조금 굳어졌다. "여직 심씨 가문을 잊지 못한 것이냐? 너까지 나서다니, 정말 대단하구나. 하지만 그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고 나는 다른 사람을 이미 정해두었
심태준의 눈동자에 경멸이 가득 어렸다. 하지만 그가 다시 입을 열려는 그때 소형준이 먼저 선수 쳤다. “설이를 묻고 뜰을 깨끗이 청소하거라. 그리고 아름이는 돌아가 쉬도록 하여라.” 그리고 덧붙였다. “방안에만 처박혀 있거라.” 한아름은 비몽사몽한 채로 한발 다가서며 물었다.“세자의 혼인이 저와 무슨 상관이죠?” 그녀는 온몸이 얼어붙은 듯했다.얼마 남지 않은 열기 마저 심태준의 그 한마디에 급격히 식어가고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 오명순과 함께 소씨 가문을 떠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평생을 보내는 것이 이
소형준은 손을 뻗어 백옥 토끼를 거칠게 낚아채더니, 힘껏 바닥에 내리쳤다.빠직!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백옥 토끼는 산산조각이 났다."소아름, 너 따위가 요구를 할 자격은 없다."소형준은 그녀의 데인 손을 힐끔 보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내밀며 말했다."내놔."한아름은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은비녀를 꼭 움켜쥐고 있었다.한편, 소미진은 입술을 깨문 채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어릴 때부터 무공을 익혀온 덕에 소형준이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고 일부러 그렇게 질문했던 것이다. "내놓으라고 했다.""겨우 비녀 하나로 이렇
한아름은 고개를 번쩍 들고 아무렇지 않게 화로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것은 오명순이 그녀의 성년식을 맞아 축복의 말을 전하며 직접 꽂아준 것이었다.“아가씨!” 화들짝 놀란 주옥미가 외쳤지만, 한아름은 못 들은 척을 하며 잿더미 속을 계속해서 헤집고 있었다. 밤새 종이를 태운 탓에, 잿더미 속에는 아직 불꽃이 남아 있었다.백옥같이 고왔던 한아름의 손끝에 순식간에 물집이 생겼다. 하지만 그녀는 아픈 줄도 모르고 비녀를 찾았다. 그러다 끝내 찾은 비녀를 손에 움켜쥐었다. 그러자 유겸이 미간을 찌푸렸다.“그건 설이를
한아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녀더러 개 따위를 위해 밤샘 제사를 지내라고 하고 있었다.소 부인도 그를 다급히 꾸짖었다.“형준이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어떻게 동생에게 개를 위해 제사를 지내란 그딴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냐?” 하지만 소형준은 차분한 목소리로 응수했다. “설이는 심태준이 미진에게 선물한 것이고 전장에서 적군의 장수를 물어 죽인 명견의 후손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만약 심씨 가문에서 이 일을 알게 된다면 뭐라 해명할 것입니까?” 소 부인은 잠시 멈칫했다.그러다
한아름은 망토에 묻은 피가 오명순 할머니의 것임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망토를 입고 할머니를 만나러 갔을 때는 심태준이 설이를 데려오기도 전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할까? 중요하지 않았다. 한아름이 여홍을 바라보자,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며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마치 온갖 고통을 견디고 있는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 뜰을 분주히 오가는 불빛들이 한아름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었다. 그 얼굴은 깨지기 쉬운 도자기마냥 위태로워 보였다.모두의 시선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녀의 마음을 가르며, 한 번, 또 한 번 그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