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하나 없이, 하루 열두 시진 내내 칠흑 같은 어두운 밀실.한아름은 누더기 같은 옷을 입은 채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여기는 방 안 다른 곳보다 끔찍한 소리가 조금은 덜 들리는 자리였다.그녀가 삼백 일밤을 견디며 몸소 찾아낸 것이었다.끼이익.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햇빛 한 줄기가 어둠을 가르며 쏟아졌다.그녀는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그 빛을 가리려 했지만, 이내 멈추고 급히 팔을 내렸다. 웅크린 자세를 바꿔 무릎을 꿇고 허리를 곧게 폈다. 그리고 두 손을 포개고 이마를 손등에 댔다. 햇살이 날카롭게 내리쬐는
부준서의 날카로운 시선이 한아름 쪽을 스치듯 바라보고는,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이번에는 남순왕을 조사하기 위함이니 경성엔 분명 움직임이 있을 것이다. 소식이 들리는 즉시 서신으로 보고하거라.”“명 받들겠습니다.”부준서는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인물로 이십 대 초반에 이미 전전 지휘사 자리에 올랐다. 조정의 문무백관 중 유일하게 검을 찬 이로 그가 용좌 아래 서면 모든 대신들이 숨을 죽였다. 부준서 자체로 한 자루의 명검이었다. 오직 황제만을 위한 검으로 그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았고 문무백관 모두가 그의 조사
말을 타고 달려온 이는 다름 아닌 한아름의 둘째 오라버니, 소씨 가문의 둘째이자 태자의 책동무로 명성이 자자한 경성 최고의 재능을 지닌 자, 소형준이었다.말에서 내린 소형준은 바닥에 꿇고 있는 한아름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곧장 다가가 손을 뻗었다.“아름아, 왜 이러고 있는 것이냐? 어서 일어나거라.”소형준이 그녀의 오른팔을 덥석 잡았다.그러자 밀려오는 극심한 고통에 한아름은 낮게 신음을 내뱉으며 본능적으로 몸을 틀어 그를 밀쳐냈다. 소형준의 놀란 눈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아름아, 너 지금…?”어렵게 다시 찾
한아름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그녀 눈동자 속에 번진 감정의 균열은 방금 전의 차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그걸 확인한 소형민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무릎 꿇는 거 좋아하는 것 아니었느냐? 어디 실컷 꿇어보거라.”소 부인의 눈물이 툭 떨어졌다. 그녀가 당장 말리려던 그때, 소미진이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며 두 손으로 무릎을 감싸더니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소 부인이 급히 다가가 물었다. “또 무릎이 아픈 것이냐?”소형민과 소형준도 급히 그녀 곁으로 달려갔다.그 사이 한아름은 이미 수하들에게 둘러싸여 그대로 사당으로
한아름은 무릎 방석 위에 쓰러져 몸을 웅크린 채로 눈을 반쯤 감고 연신 입술에 침을 바르고 있었다.너무 지치고, 너무 배가 고팠다. 전날부터 지금까지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한 상태였다.그러다 문득, 우르르 몰려오는 발소리와 점점 가까워지는 말소리에 한아름은 화들짝 놀라 깨어났고, 거의 반사적으로 무릎을 세우고 양손을 모아 머리를 조아렸다.소 부인은 그녀의 모습에 곧장 눈시울이 붉혔다.“아름아, 대체 왜 이러는…”오 마마가 소 부인을 부축하며 탄식했다. “아씨, 부인께서 얼마나 걱정하시는지 아시면서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소형준이 문을 박차고 들어서자, 차가운 기운이 방 안 가득 번졌다.그는 한아름이 처음 집에 돌아왔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준비한 옷을 입고 얼마나 기뻐하던지, 작은 손으로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리며 눈웃음 짓던 그 모습에 그는 온 경성의 예쁜 옷을 모두 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하지만 지금 그녀의 표정은 차갑기만 했다. “황후께서 하사한 옷이야말로 귀한 것이고 어머니께서 준비하는 것은 시시해졌겠지. 겨우 1년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어찌 이리 허영심만 가득해졌느냐!”그러나 소 부인은 조용히 타일렀다.“형민아, 너
“괜찮습니다.”소미진의 물건엔 손대고 싶지 않았다. 감히 이들과 엮일 수 없었으니 말이다.잠시 멈칫하던 소미진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혹시 나를 원망하고 있느냐?”“그럴 리 없습니다.” 한아름은 그녀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고 덧붙였다. “제 것이 편한 것뿐입니다.”소 부인은 즉시 하인에게 한아름이 머물던 거처에서 그녀의 옷가지를 가져오게 했다.한아름은 안방에서 옷을 갈아입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밖에 나가 있었다. 소형준은 크게 숨을 내쉬었지만 여전히 가라앉지 않는 마음에 답답함을 토해냈다. “어쩌다 저리된 거
한아름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는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한때는 혈육들을 만날 생각에 마음이 들떴던 적도 있었지만,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렸다.그나마 유일하게 품고 있던 작은 기대는 오 할머니가 무릎을 꿇는 순간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오 할머니는 예전부터 다리가 불편했다. 비가 오거나 겨울이 되면 늘 시큰거리고 퉁퉁 부어 한아름이 산에서 캔 약초로 며칠동안 치료해야만 겨우 천천히 걸을 수 있었다.며칠 전에도 경성엔 장대비가 쏟아졌었다. 오명순는 어떻게 견뎠던 걸까?한아름이 막 오
소형준의 눈빛에는 분노가 소용돌이였다. 당장이라도 한아름을 삼켜버릴 듯했다. 잿빛으로 굳어버린 얼굴에서 한기가 뿜어져 촛불조차 소용이 없었다."그거 하나로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힐 셈이냐? 그러다 결국 온 가족이 너 때문에 무너져야 속이 만족할 테냐?"한아름은 더 이상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신분 같은 건 상관없다고, 처음 돌아왔을 때부터 말해왔다. 그저 가족이 함께 있기를 바랐을 뿐이었다.하지만 그때 했던 말들을 이제는 차마 입에 올릴 수 없었다. 너무 허무한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신분에 신경 쓴 건,
"깼느냐?" 촉촉히 젖은 한아름의 눈동자에 소형준은 가슴이 아파왔다. "오라버니가 약을 떠먹여 줄까?" ‘오라버니’라는 말에 한아름은 현실로 돌아왔다. 손을 들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자, 방금 전의 연약한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폐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약을 젓던 소형준의 손이 멈췄다. 촛불 빛에 그의 얼굴은 한결 부드러웠다."약을 먹어야 빨리 낫는단다. 너무 써서 괴롭겠지만 네가 좋아하는 밀감 절편도 준비했단다." 몸이 약한 탓에, 처음 왔을 때는 무슨 이유인지 자주 앓아눕곤 했다.소형민은
한아름은 그만 병상에 드러눕고 말았다. 주옥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눈물을 삼켰다.한아름은 고열로 목소리마저 갈라진 상태였다."속히 내 불길한 운명에 대해 소문을 퍼뜨리거라." 그러자 주옥미가 눈물을 흘리며 말렸다. "어찌 그런 일을 부추기는 겁니까? 여인은 명예가 가장 중요한 법인데요." 세상은 여인에게 너무나 가혹했다. 성심도 고와야 했고 심지어 타고나는 운명에도 허점 하나 용납하지 않았다. 곁을 지키던 김주희가 주먹을 꼭 쥐며 이를 악물었다."원치 않으면 하지 마시지 왜 이리 자신을 괴롭히시는 겁니
문채가 출중하고, 품격이 있는 그는 여전히 태자 곁에서 배우고 있었다. 그는 늘 소씨 가문의 자랑이었다.머지않은 미래에 태자가 순조롭게 즉위한다면, 소형준은 아마 가장 젊은 내각 대신이 될 것이다."형준이가 좋아하는 차를 준비하거라." 휘장을 걷어들고 들어와 예를 올린 소형준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할머니, 아름이의 혼사에 대해서..." 박말금의 미소가 조금 굳어졌다. "여직 심씨 가문을 잊지 못한 것이냐? 너까지 나서다니, 정말 대단하구나. 하지만 그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고 나는 다른 사람을 이미 정해두었
심태준의 눈동자에 경멸이 가득 어렸다. 하지만 그가 다시 입을 열려는 그때 소형준이 먼저 선수 쳤다. “설이를 묻고 뜰을 깨끗이 청소하거라. 그리고 아름이는 돌아가 쉬도록 하여라.” 그리고 덧붙였다. “방안에만 처박혀 있거라.” 한아름은 비몽사몽한 채로 한발 다가서며 물었다.“세자의 혼인이 저와 무슨 상관이죠?” 그녀는 온몸이 얼어붙은 듯했다.얼마 남지 않은 열기 마저 심태준의 그 한마디에 급격히 식어가고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 오명순과 함께 소씨 가문을 떠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평생을 보내는 것이 이
소형준은 손을 뻗어 백옥 토끼를 거칠게 낚아채더니, 힘껏 바닥에 내리쳤다.빠직!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백옥 토끼는 산산조각이 났다."소아름, 너 따위가 요구를 할 자격은 없다."소형준은 그녀의 데인 손을 힐끔 보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내밀며 말했다."내놔."한아름은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은비녀를 꼭 움켜쥐고 있었다.한편, 소미진은 입술을 깨문 채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어릴 때부터 무공을 익혀온 덕에 소형준이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고 일부러 그렇게 질문했던 것이다. "내놓으라고 했다.""겨우 비녀 하나로 이렇
한아름은 고개를 번쩍 들고 아무렇지 않게 화로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것은 오명순이 그녀의 성년식을 맞아 축복의 말을 전하며 직접 꽂아준 것이었다.“아가씨!” 화들짝 놀란 주옥미가 외쳤지만, 한아름은 못 들은 척을 하며 잿더미 속을 계속해서 헤집고 있었다. 밤새 종이를 태운 탓에, 잿더미 속에는 아직 불꽃이 남아 있었다.백옥같이 고왔던 한아름의 손끝에 순식간에 물집이 생겼다. 하지만 그녀는 아픈 줄도 모르고 비녀를 찾았다. 그러다 끝내 찾은 비녀를 손에 움켜쥐었다. 그러자 유겸이 미간을 찌푸렸다.“그건 설이를
한아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녀더러 개 따위를 위해 밤샘 제사를 지내라고 하고 있었다.소 부인도 그를 다급히 꾸짖었다.“형준이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어떻게 동생에게 개를 위해 제사를 지내란 그딴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냐?” 하지만 소형준은 차분한 목소리로 응수했다. “설이는 심태준이 미진에게 선물한 것이고 전장에서 적군의 장수를 물어 죽인 명견의 후손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만약 심씨 가문에서 이 일을 알게 된다면 뭐라 해명할 것입니까?” 소 부인은 잠시 멈칫했다.그러다
한아름은 망토에 묻은 피가 오명순 할머니의 것임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망토를 입고 할머니를 만나러 갔을 때는 심태준이 설이를 데려오기도 전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할까? 중요하지 않았다. 한아름이 여홍을 바라보자,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며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마치 온갖 고통을 견디고 있는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 뜰을 분주히 오가는 불빛들이 한아름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었다. 그 얼굴은 깨지기 쉬운 도자기마냥 위태로워 보였다.모두의 시선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녀의 마음을 가르며, 한 번, 또 한 번 그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