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아니에요, 어머니. 이안이 며칠 전에 조금 아팠는데, 지금은 완전히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그 말을 듣자 도순희는 비로소 숨을 고르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래? 그럼 됐다. 이안이 괜찮다니까 이제 마음이 놓이네. 너도 얼른 가서 애 좀 봐. 여긴 간병인도 있으니까 나 걱정하지 말고.”윤제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그 역시 마음 한구석이 불안했다.“그럼... 잠시 다녀올게요, 어머니. 금방 올게요.”간병인에게 어머니를 잘 부탁한 뒤, 윤제는 병실 문을 조용히 닫고 이안이 있는 병동으로 향했다.복도 끝, 하얀 문 앞에서 한 번 더 숨을 고르며 손잡이를 잡았다.병실 안에는 하얀 침대에 누워 있는 이안과 그 곁을 지키고 있던 건우가 있었다.아이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조금씩 혈색이 돌고 있었다.건우는 윤제를 보자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수술은 잘 됐어. 완전 성공이야. 다만 마취가 아직 덜 풀려서 좀 더 지켜봐야 해. 조금 있으면 깰 거야.”윤제는 고개를 깊게 숙이며 조용히 답했다.“고마워.”건우는 잠시 윤제를 바라보다가 친구의 눈 밑이 시커멓게 다크 서클이 내려 앉은 걸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그가 윤제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요즘 진짜 고생 많다. 잠깐이라도 좀 쉬어. 난 바로 옆 사무실에 있을 테니까,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그래, 고맙다.”건우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 병실엔 정적이 흘렀다.윤제는 천천히 아이의 곁으로 다가갔다.이안의 작고 하얀 손이 침대 위에 놓여 있었다.그 손을 조심스레 잡자, 미약하지만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윤제는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끝내 눈시울이 붉어졌다.손끝이 떨리면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이게 다 내 잘못이야.’그는 속으로 되뇌었다.‘내가 욕심을 부리지 않았더라면... 예진이와 이혼하지만 않았더라면...’‘아린이를 선택하지만 않았더라면... 우리 집안이 이렇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거야.’윤제의 눈에서 눈물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침대의 아이는 아무
윤제는 조심스럽게 도순희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어머니, 이제 그만 우세요. 다 지난 일이잖아요. 의사 말로는 지금 회복 단계인데 이렇게 울면 몸에 안 좋대요.”아들의 목소리는 최대한 부드러웠지만, 도순희는 윤제의 손을 꼭 붙잡은 채 고개를 저었다.“아들아... 엄마,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참 많이 생각했어. 결국 다 엄마 잘못이야.”윤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무슨 말씀이세요, 어머니.”도순희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진지한 눈빛으로 윤제를 바라봤다.“그땐 예진이가 마음에 안 들었어. 괜히 차분하고 얌전한 게 싱거워 보였거든. 근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 아이만큼 좋은 며느리가 어디 있겠어?”“나한테도 싫은 소리 한 번 안 하고, 너한텐 헌신적이었어. 아이한텐 정말 세상에서 제일 좋은 엄마였잖아.”그 말을 듣자 윤제의 가슴이 순간 철렁 내려앉았다.‘그래, 결국 나도 예진이를 생각하고 있었어.’‘인정하기 싫었을 뿐이지.’‘예진이가 내 곁에 있었을 때는 그 모든 게 당연한 줄 알았는데...’‘이젠 그 당연함이 가장 그리운 게 되어 버렸네.’그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조용히 어머니의 어깨를 토닥였다.“어머니, 이제 그런 얘기는 하지 마세요. 이미 다 끝난 일이에요. 저랑 예진이... 그건 제 잘못이었어요. 지금 예진이는 자기 삶을 잘 살고 있어요.”“제가 무슨 낯으로 다시 찾아가서 말을 하겠어요. 이젠... 다신 돌아올 수 없어요.”도순희는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침묵했다. 그러다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얘야, 엄마가 그땐 눈이 멀었지. 예진이 같은 애를 두고도, 그걸 몰랐던 게 내 죄야. 그 아이는 정말 좋은 애야. 아내로도 며느리로도 엄마로도 완벽했지. 너랑 이안이를 위해서라면 뭐든 다 했잖아.”도순희의 눈가에 또다시 눈물이 맺혔다.“윤제야, 부탁이야. 예진이 꼭 다시 데려와. 그 아이가 널 얼마나 좋아했는데, 그 마음이 그렇게 쉽게 사라지겠니? 그땐 우리가 예진이한테 잘못했어.”“이젠 우리가 먼
정말 아이러니했다.아린이 한때 가장 무시하던 사람... 그 진문호가 결국엔 자신에게 가장 진심이었던 사람이라는 사실.그리고 아린이 평생 쫓아온 게... 결국 자신을 가장 깊은 나락으로 떨어뜨리게 되었다.그 순간, 아린은 문득 생각했다.‘처음부터 내가 다 잘못된 길로 들어선 건 아닐까...’...윤제는 아린을 지하실에 가뒀다.그리고 진문호는 법의 심판을 받았다.모든 걸 정리한 뒤에도 윤제에게는 슬퍼할 시간조차 없었다.그는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이번에는 방심하지 않았다.도순희와 이안의 주치의, 간호 인력까지 모두 건우에게 직접 맡겨서 철저하게 관리하게 했다.진문호가 주입하던 약물이 사라지자, 도순희의 상태는 빠르게 호전됐다.이안의 수술 일정도 이미 잡혀 있었고, 수술 당일에는 도순희가 마침내 눈을 떴다.윤제는 원래 수술실 앞에서 이안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깨어났다는 말을 듣는 순간 걱정이 앞섰다.‘지금 어머니 몸 상태로 이안 얘기를 들으면... 충격이 너무 크실 거야.’윤제는 건우에게 수술실 앞을 지키라고 하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면서 바로 연락하라 당부했다.그리고 아무 일도 없는 듯 평정한 얼굴로 도순희의 병실 문을 열었다.도순희는 평소엔 늘 목소리 톤이 높아서, 남들이 꼼짝 못 하던 여자였다.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병실 불빛 아래서 그녀는 너무나 초라해 보였다.윤제를 보자마자 도순희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우리 아들... 우리 착한 아들... 엄마는 이제 다시는 못 볼 줄 알았어...”그녀가 눈물을 흘리면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윤제가 재빨리 다가가 어머니의 어깨를 붙잡았다.“어머니, 의사가 아직 무리하시면 안 된다고 했어요. 지금은 그냥 누워 계세요.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만 하세요. 제가 다 해 드릴게요.”도순희는 다시 천천히 누웠지만, 눈물은 멈출 줄 몰랐다.그 눈물에는 두려움과 안도감, 그리고 참을 수 없는 억울함이 뒤섞여 있었다.“우리 아들... 엄마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너
아린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슬적 입꼬리를 올렸다.“대단하다고? 후후... 지금 세상에 의지할 사람 하나 없는 내가 조금이라도 냉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남겠어? ‘안 그러면 내가 잡아먹히는 쪽이 되잖아.’”윤제는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표정은 이미 잔뜩 굳어 있었다.윤제의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만 맴돌았다.‘부씨 집안이 널 거둬줬고 공부도 시키고 지켜줬는데...’‘그게 아니었다면 넌 지금까지 제대로 살아가지도 못했을 거야.’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말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더 이상 대화라 부를 만한 게 남아 있지 않았다.아린은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 어떤 후회도 하지 않았다.윤제 또한 용서란 단어를 꺼낼 수 없었다.그는 잠시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만약 내가 조금만 늦게 눈치챘다면...’‘어머니도, 이안이도 지금쯤 차가운 시체로 변해 있었을 거야.’‘그리고 나는 그 살인자 옆에서 사랑을 믿었다고 착각하고 있었겠지.’그 생각만으로도 윤제는 등골이 서늘해졌다.잠시의 침묵이 흐른 뒤, 아린이 코웃음을 치면서 고개를 들었다.“난 잘못했다고 생각 안 해. 사람은 돈 때문에 죽고, 새는 먹이 때문에 죽는다잖아. 난 그저 내 인생, 내 노후를 위해 움직였을 뿐이야.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건, 천천히 죽는 거나 마찬가지잖아.’”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묘하게 단호했다.“그래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이번엔 내가 졌어. 더 이상 변명할 말도 없어. 내가 한 일은 나 자신이 제일 잘 알아. 날 죽이든 감옥에 넣든, 네 마음대로 해. 이 세상은 어차피 승자와 패자뿐이니까.”윤제는 그 말을 들으며 잠시 숨이 멎는 듯했다.그는 처음으로 아린의 얼굴에서 낯선 ‘결기’를 보았다.그건 마치 세상의 모든 부당함에 맞서면서 끝까지 발버둥 치려는 인간의 마지막 표정 같았다.‘다른 상황이었다면... 난 이 여자의 이런 강단을 존중했을지도 모르지.’하지만 지금 그는 더 이상 그런 감정을 품을 자격조
“내가 좀 묻고 싶네. 이렇게 오래 같이 있었는데, 우리 사이에 진짜 감정은 단 한순간도 없었던 거야? 넌 날 그저 이용만 한 거야? 돈 계산만 있었던 거야? 한 번도 진심이었던 적 없어?”아린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그 웃음은 비웃음에 가까웠다.“감정? 난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어. ‘감정은 세상에서 제일 값싼 거’라는 걸. 그건 날 약하게 만들 뿐,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못해.”“내 기준은 단순해. 누가 나한테 도움이 되면, 그 사람한테 감정을 쓸 수 있어.”윤제가 그녀에게 도움이 될 때, 아린은 온 마음을 다해 윤제에게 집중했다.하지만 윤제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그녀는 주저 없이 다른 사람에게 몸을 기댔다.그게 진문호였다.‘좋아했냐고? 말도 안 되지.’좋아한 적은 없었다.그저 필요했을 뿐이다.진문호가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는 걸 알았기에, 아린은 그 앞에서 진심처럼 보이는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그녀는 연기를 했고, 그 연기 속에서조차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잠시 후, 아린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오래 두르고 있던 갑옷을 벗어 던진 사람처럼 그 얼굴엔 이상할 만큼의 평온함이 깃들었다.“오빠, 사실이 뭔지 알아? 내가 국내 돌아오고 나서 계속 생각했어. 오빠는 사랑을 말하지만, 진짜 사랑을 보여준 사람은 고예진이야.”“오빠가 다쳤을 때, 그 여자는 하루도 빠짐없이 병원에 있었잖아. 재활도 옆에서 도와주고, 결국 오빠 다시 걷게 됐고...”“심지어 위험한 출산까지 감수하면서 오빠 아이를 낳았지. 시어머니한테도 항상 웃으면서 순종했어.”“근데 그 결과가 뭐야? 얻은 게 아무것도 없잖아. 결국 모든 걸 잃었어. 사랑까지도.”아린의 눈빛이 차갑게 흔들렸다.“사람들이 말하잖아. 돈 있는 사람을 택하면 최소한 돈은 남고, 권력 있는 사람을 택하면 최소한 보호는 받는다고. 근데 사랑을 택하면... 남는 게 없어. 정말 아무것도.”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그러니 난 틀리지 않았어. 사람은 누구나 원하는 게 있잖아. 난 내가
그 말을 듣자, 미간을 깊게 찌푸린 윤제의 눈빛에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그 시선을 마주한 순간, 아린은 확신했다. 윤제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역시 그렇지.’‘부윤그룹 대표라는 사람이... 세상 돌아가는 걸 이렇게 단순하게만 생각하다니.’그녀는 비웃음이 섞인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바닥에서 일어났다.휘청거리며 윤제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예전에 우리 엄마하고 어머니는 제일 친한 친구였어.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지.”“우리 집 형편은 안 좋았지만, 엄마는 사랑 하나만 믿고 아빠한테 시집갔어. 반면에 어머니는 좀 더 현실적이었지. 오빠 아버지의 가능성을 보고 결혼을 선택했으니까.”아린의 입꼬리가 비틀렸다.“결과는 뻔하잖아. 사랑을 믿고 도박을 했던 사람은 결국 다 잃게 돼. 우리 엄마는 완전히 무너졌어. 자기 인생도, 내 인생도 같이 망가졌지. 아빠는 술에 빠지고, 도박까지 손댔고.”“근데 오빠 어머니는 달랐어. 진짜로 ‘이겼다’고 해야 하나? 오빠 아버지는 결국 부윤그룹을 세웠고, 오빠 집은 하루가 다르게 잘 살게 됐지. 반면 우리 집은 하루하루 바닥으로 떨어졌어.”“사람들이 그러잖아. ‘돈 보고 결혼한 여자는 자식한테 부를 남기지만, 사랑 보고 결혼한 여자는 자식한테 고생만 남긴다’고. 진짜 틀린 말 하나도 없어. 그래도 우리 엄마는 버텼어. 힘들어도, 그래도 평범하게 살고 있었어.”아린의 목소리가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그날, 오빠 어머니가 우리 엄마한테 연락을 했어. 도시에 일자리가 있다면서.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없을 거야’ 하면서 계속 재촉했대. 그래서 우리 엄마는 부랴부랴 집을 나섰고... 그 길에 사고가 난 거야.”윤제는 눈썹을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래도 그걸 우리 어머니 탓으로 돌릴 순 없잖아. 우리 어머니는 그냥 친구로서 도와주고 싶었던 거야. 너희 아빠 같은 인간 밑에서 벗어나게 해주려고.”탁!아린이 책상을 세게 내리쳤다.그녀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그래, 맞아. 오빠 어머니는 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