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드디어 아파트 단지에 도착하자 소예지는 짐가방을 끌며 김경환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감사해요, 김 비서님.”김경환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감사할 사람은 따로 있죠. 고 대표님 덕분입니다.”그 말에 소예지는 잠시 걸음을 멈칫하더니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단지 안으로 들어갔다.집에 도착하자 양희순이 반갑게 그녀를 맞으며 따뜻한 국수 한 그릇을 내어왔다.비행기 안에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탓에 소예지는 말없이 젓가락을 들어 국수를 떠먹었다.그때, 휴대전화가 조용히 울렸다.[2층에 불이 켜진 걸 봤어요. 돌아온 거죠?]보낸 사람은 윤하준이었다.소예지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하준 씨... 산책 중인가?’[방금 도착했어요.]잠시 후, 다시 메시지가 도착했다.[잘 쉬세요. 방해 안 할게요.]그 짧은 문장을 바라보던 소예지는 화면을 껐다.샤워를 마친 뒤, 그녀는 곧장 서재로 들어가 밀린 실험 데이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이번 출장이 길어졌던 탓에 손대지 못한 자료가 생각보다 많이 쌓여 있었다.소예지는 앞으로 특별한 일이 없다면 당분간은 출장을 줄이고 연구에 집중하자고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그 생각의 끝에는 늘 딸이 있었다. 이 시간쯤이면 이미 잠자리에 들었을 터라 괜히 잠을 깨울까 싶어 일부러 연락하지 않았다.밤이 깊어지고 침대에 누운 그녀는 문득 오늘 비행기에서의 순간을 떠올렸다. 기체가 거칠게 요동치던 그 찰나,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던 짧은 순간에 오직 딸아이의 얼굴만이 머릿속을 스쳤다.‘만약... 그 비행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더라면 하슬이는 어떻게 되었을까.’그 순간만큼은 생사도 원한도, 지나온 감정들조차 모두 무의미해졌다. 그저 살아남고 싶다는 생각뿐이었고 그것은 오직 딸을 위해서였다.소예지는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다음 날 아침.눈을 뜨자마자 그녀는 곧장 실험실로 향했다.아직 이른 시각이었지만 소예지는 언제나 이렇게 조용한 아침 시간에 연구하는 걸 좋아했다.그녀를 본 강준석이 놀란
“놓으라고 했잖아!”소예지는 그의 품 안에서 몸을 비틀며 거칠게 밀쳐냈다.그러나 바로 그 순간,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한 여성이 안전벨트를 제대로 매지 못한 채 복도 쪽으로 튕겨 나가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고이한의 팔이 더 단단해졌다.철벽처럼 단단한 두 팔이 소예지의 허리를 감싸안았고 다른 한 손은 그녀의 머리를 보호하듯 감쌌다.소예지는 담요 속에서 마치 모든 감각이 봉인된 사람처럼 그의 가슴팍에 파묻혀 있었다.“놓으라고...”그녀는 담요 안에서 손을 뻗어 그를 밀어내려 했다.“움직이지 마.”고이한의 저음이 명령처럼 내려앉았다.그 목소리에 두려움으로 굳어 있던 소예지는 더 이상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비명과 흔들림, 불안한 기류가 뒤엉킨 소용돌이 속에서 그녀는 눈을 꼭 감은 채 숨을 죽였다.심장은 미친 듯 뛰고 있었고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깊은 두려움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기류가 잦아들자 승무원들이 분주히 통로를 오가며 승객들을 안심시켰다.객실 곳곳에서 억눌렸던 숨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소예지는 정신을 수습하자마자 고이한을 밀쳐냈지만 고이한은 억지로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그녀를 놓는 순간에도, 그의 시선은 여전히 그녀의 얼굴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소예지의 얼굴은 잿빛처럼 창백했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눈가를 덮고 있었다.아까의 거센 흔들림이 그녀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는 분명했다.“괜찮아?”고이한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려 했다.소예지는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쳐냈다.“손대지 마.”그럼에도 고이한의 얼굴에는 분노도 억지스러움도 없었다. 이제 그는 그녀를 억누르려 하지 않았다. 승무원들이 객실을 돌며 다친 승객이 없는지 확인하기 시작했고 다행히 이후 비행은 비교적 안정적으로 이어졌다.승객들도 다시 자리에 앉아 조금씩 숨을 고르기 시작했고 창밖으로는 점차 A시의 야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많은 불빛이 반짝이며 천천히 다가오는 가운데 소예지는 마
임현욱은 한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탑승 게이트 안으로 사라진 소예지의 뒷모습을 마치 무언가 아쉬움이 남은 사람처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그제야 고이한이 발걸음을 옮기자 곁에 서 있던 공항 직원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고이한은 시선을 거두고 감정이 비워진 얼굴로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소예지는 좌석에 앉아 옆자리를 힐끗 바라봤지만 아직 아무도 앉지 않은 빈자리였다.‘이 옆자리는 비어 있는 건가?’그렇게 생각한 바로 그 순간, 기내 앞쪽에서 스튜어디스의 밝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어서 오십시오. 편안한 비행 되시길 바랍니다.”소예지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고, 그 순간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저 사람이 왜 여기에...’고이한이 여유롭고 묵직한 걸음으로 기내에 들어섰다.단정하게 떨어지는 수트와 길게 뻗은 다리 그리고 날 선 옆선까지, 그의 존재만으로도 몇몇 승무원의 시선이 저절로 따라붙었다. 그러나 그는 자리를 찾느라 머뭇거리는 대신 곧장 소예지의 옆자리로 걸어와 앉았다.“이런 우연도 있네?”짧은 인사를 건네고는 고이한은 천천히 재킷의 단추를 풀고 다리를 뻗은 뒤, 침착하게 안전벨트를 맸다. 소예지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피했다. 지금이라도 자리를 바꿀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지만 이미 만석이라는 사실은 탑승할 때 확인한 뒤였다. 그는 그녀의 뺨 너머로 창밖을 바라본 채,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윽고 비행기는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했다.회색빛 하늘은 점점 어두워졌고 빗방울이 유리창을 촘촘히 두드렸다. 꽤 거친 날씨였다.비행기가 힘차게 이륙을 시작하자 소예지는 본능적으로 좌석 팔걸이를 꽉 움켜쥐었다.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본 고이한이 낮게 말했다.“겁낼 거 없어.”소예지는 잠시 그를 흘깃 바라보다가 아무 대답 없이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폭우를 뚫고 고도를 올린 비행기는 이내 평형을 되찾았다.잠시 후, 스튜어디스가 음료를 나누기 시작했다.고이한이 먼저 물었다.“뭐 마실래?”“됐어.”소
잠시 후, 방송국 전용 차량이 도착해 고이한을 픽업했다.오늘은 개인 재정 인터뷰 촬영 일정이 잡혀 있었다.그로부터 약 30분 뒤, 임현욱은 소예지를 조용히 호텔까지 데려다주었다.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 소예지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비행기까지 세 시간 남았어요. 조금 쉬었다가 택시 타고 갈게요.”임현욱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마음이 놓이지 않아요. 제가 직접 모셔다드릴게요.”“하지만 괜히 번거롭게 해드리는 것 같아서요...”“전 그게 좋아요.”임현욱은 부드럽게 웃었다.“어차피 곧 군에 들어가면 이렇게 귀찮게 해줄 기회도 별로 없을 거니까요.”소예지도 그 말에 따라 웃었다.“다음에 A시에 오시면 제가 꼭 밥 살게요.”“좋죠.”그녀는 오늘 그의 아버지 부탁을 들어주었고 임현욱 역시 끝까지 예의를 다하고 싶었다.같은 시각,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고이한의 인터뷰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진행자가 질문을 던졌다.“고 대표님, 생명과학 회사를 창업하셨지만 아직 상장을 하지 않으셨죠.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고이한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카메라를 응시했다.“저는 단순히 회사를 만들고 자본을 회수하는 데에서 멈추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건 인류를 위해 의미 있는 무언가를 남기는 일입니다.”그는 말을 이으며 차분히 설명했다.“의료 산업은 다른 산업과 다릅니다. 신약 하나를 개발하는 데는 10년이 넘는 시간이 걸리기도 하죠. 자본 수익만을 좇는다면 더 빠른 길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와 제 팀은 정말 병을 고치고 생명을 살리는 약을 만들고 싶습니다.”진행자의 눈빛에 존경의 빛이 스쳤다.“고 대표님의 전 부인이신 소예지 박사님도 이 분야의 전문가라고 들었습니다.”그 말에 고이한의 눈빛이 순간 부드러워졌다.“맞습니다. 그분은 백혈병 연구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를 낸 연구자입니다.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습니다.”이후에도 몇 가지 전문적인 질문이 이어졌고 고이한은 침착하고 매끄럽게 답을 이어갔다.
“아저씨께서 예지 씨를 꼭 잘 챙기라고 하셨으니 대충 넘어갈 순 없죠.”임현욱이 웃으며 말했다.한편, 주차장 맞은편.심유빈은 차 안에 먼저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고이한은 차 밖에서 통화 중이었다.아이러니하게도 임현욱의 차량은 바로 그 맞은편에 주차되어 있었다.고이한이 전화를 끊는 순간, 마침 임현욱이 조수석 문을 열어 소예지를 차에 태우는 장면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임현욱은 고개를 들어 예의 바르게 손을 흔들었고 고이한은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바라봤다.그 차는 곧 서서히 주차장을 빠져나갔다.심유빈은 차 안에서 그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임현욱...’조금 전 들었던 이름을 그녀는 머릿속에서 천천히 굴려 보았다.‘군인이라 들었지만 계급이야 기껏해야 대위쯤 되겠지.’소예지가 그런 군인과 다시 결혼한다면 나름대로 복이 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심유빈이 진짜로 바라는 건 단 하나, 소예지가 A시를 떠나는 것이었다.더욱이 임현욱 같은 군인과 결혼해 군부대를 따라 지방에서 살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심유빈의 시선이 다시 고이한에게 옮겨졌다.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멀어져 가는 차량을 바라보다 이윽고 조수석에 앉은 심유빈을 향해 말했다.“호텔로 데려다줄게.”“오늘 하 대표랑 점심 약속 아니었어?”심유빈이 물었다.“일 있어.”단호한 어조였다.심유빈은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일 봐. 나 혼자서도 괜찮아.”호텔에 도착하자 하종호가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심유빈이 내리는 순간, 조수석 창문이 내려가며 고이한의 얼굴이 드러났다.“점심 같이 안 먹을래?”하종호가 물었다.“아니, 인터뷰 약속 있어.”고이한은 짧게 대답했다.“그래. 그럼 내가 유빈 씨 잘 챙길게.”하종호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고이한은 고개를 끄덕인 뒤 차량을 몰아 자리를 떠났다.그때 심유빈은 갑자기 팔꿈치를 움켜쥐며 낮게 신음을 내뱉었다.“아...”“왜요? 어디 다쳤어요?”하종호가 다급히 물었다.“아니에요. 그냥... 피를 너
심유빈은 고이한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하자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잠시 화면을 바라보던 그녀는 곧바로 짧은 답장을 보냈다.[좋아. 내일 데리러 와.]다음 날 아침.소예지는 임현욱과 오전 8시에 병원으로 출발하기로 약속돼 있었다.외투를 걸치고 방에서 나오자 호텔 1층 로비 소파에 앉아 있던 임현욱이 그녀를 발견하고 반갑게 자리에서 일어섰다.“왔어요.”“아침은 드셨어요?”“네, 일찍 먹었어요. 예지 씨는요?”“저도요.”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며 주차장으로 향했고 임현욱은 차를 몰아 군의대 부속 병원으로 출발했다.병원에 도착하자 소예지는 곧장 환자 가족들과 함께 주치의의 사무실로 들어갔다.그녀는 환자의 현재 상태를 세심하게 확인하며 담당 의료진과 직접 의견을 나누고 치료 방향을 조율했다.사무실 밖 복도에 서 있던 임현욱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안쪽의 소예지에게로 향했다.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전문가들이 귀를 기울였고 그 자리에 있던 이들 모두가 그녀의 의견을 진중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진료를 마치고 복도로 나온 소예지가 의자에 앉아 쉬고 있던 임현욱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제 가도 될 것 같아요.”그때, 한 중년 남성이 다가와 임현욱을 불렀다.“현욱아, 소 박사님께 꼭 잘 인사드려.”“아저씨, 걱정하지 마세요. 소 박사는 제가 잘 모실게요.”임현욱이 예의 바르게 대답하자 소예지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어머님 상태는 오늘 안으로 다시 정리해서 공유해 드릴게요.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정말 감사합니다.”남자는 깊이 허리를 숙였다.두 사람은 병원 본관을 빠져나와 로비 쪽으로 향했다.그리고 그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안에서 두 사람이 동시에 모습을 드러냈다.소예지의 발걸음이 멈췄다.얼굴에 걸려 있던 잔잔한 미소가 한순간에 굳어버렸다.엘리베이터에서 나온 건 고이한과 심유빈이었다.심유빈은 어딘지 모르게 창백해 보였고 곧 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