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남우는 차 안에서 홍주영이 낯선 남자와 함께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그는 사람을 시켜 사진을 찍게 한 후 그 남자의 신원을 조사하도록 지시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조사원이 전화를 걸어왔다.“도련님, 저 남자는 하민재라고 합니다. 하씨 집안의 장남이자 연지석의 친구입니다.”하민재?유남우는 순간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깨달았다.‘어쩐지 어디선가 본 얼굴 같더니 정말 아는 사람이었군.’홍주영의 가정환경을 이미 알고 있던 유남우는 그녀가 하씨 집안 사람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그녀의 집안은 그저 평범한 가정이었으니까.유남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문득 홍주영이 하민재의 정체를 알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어졌다.그는 차 안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그리고 두 사람이 식사를 마치고 나오려 할 때쯤 운전기사에게 차를 몰고 떠나라고 지시했다.식사 후 홍주영은 원래 식사 값을 내려고 했으나 하민재가 이미 계산을 끝낸 상태인 것을 발견하고는 당황스러워하며 말했다.“얼마였어요? 제가 송금할게요.”비서의 월급으로 식사비를 감당할 수는 있었지만 오늘 식사는 그녀의 한 달 월급에 가까운 금액이었다.하민재는 그녀의 솔직한 태도에 약간 놀라며 미소 지었다.“괜찮아요. 다음에 밥 먹을 때 사면 돼요. 이제 나한테 두 끼 빚진 거네요.”홍주영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연애 경험이 전무한 그녀는 하민재의 말 속에 담긴 의미를 전혀 눈치채지 못 한 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겠어요. 다음번엔 꼭 제가 살게요.”“좋아요.”하민재는 그녀가 이렇게 진지하게 답하는 모습에 다소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그는 그녀를 차에 태워 보낸 후에야 자신의 전용 차량을 불렀다.하민재는 결혼할 나이에 접어들었고 그의 할머니가 추천한 사람이 바로 홍주영이었다.“이 여자는 참 괜찮다. 전혀 속물적이지 않아.”할머니의 말이 떠올랐다.하민재는 오늘 평범한 옷차림으로 나왔는데 그녀를 테스트하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이 간단한 테스트는
에리는 연지석을 노려보며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이 눈에 거슬리는 사람을 당장 쫓아내고 악보를 되찾아야겠어.’“연 사장님이 곡을 쓴 적이 있던가요?”에리가 비꼬듯 물었으나 연지석은 여유롭게 웃으며 답했다.“곡을 쓸 줄 몰라도 볼 줄은 알지 않을까요?”그는 에리의 악보를 흘깃 보더니 말했다.“내가 보기에 이 곡은 엉망이네요. 민정이 시간 좀 낭비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그 말에 이어 연지석은 박민정에게 부드럽게 말했다.“민정아, 인하 씨도 이제 퇴근할 시간이 됐을 거야. 찾아가 봐.”뜻밖의 구원에 박민정은 감사한 눈길을 연지석에게 보냈고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사실 박민정은 에리의 과한 열정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악보를 보여주겠다며 다가오더니 갑자기 자신의 복근 여덟 개를 자랑하겠다고 나섰던 그였다.‘내가 이런 활기 넘치는 사람을 어떻게 알게 된 거지?’박민정은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그녀가 떠난 뒤 에리는 얼굴에서 웃음을 싹 거둔 채 연지석을 노려보았다.“뭐예요, 사장님은 유 대표한테 직접 맞서지도 못하면서 저까지 막으려는 거예요?”과거 같았으면 연지석은 그의 도발에 휘둘렸을 것이지만 이제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난 내 얼굴이 이미 충분히 두껍다고 생각했는데 에리 씨가 더하군요.”연지석이 태연하게 말하자 에리는 코웃음을 치며 맞받아쳤다.“이건 얼굴이 두꺼운 게 아니라 내 행복을 추구하는 거예요. 뭐가 문제인데요? 난 민정이를 좋아해요. 예전부터 좋아했고요. 사장님처럼 좋아하면서도 표현하지 못하는 건 아니라고요.”에리는 연지석을 경쟁 상대로 여겨왔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은 듯 했다.연지석은 그의 말에 일절 반응하지 않고 사무실로 돌아가 퇴근 준비를 했다.설인하는 그의 옆에서 퇴근을 도왔다.“사장님, 이번 계약도 성공적으로 성사되었습니다.”“잘했어요.”연지석이 칭찬하자 설인하는 머쓱한 듯 말했다.“다 사장님의 훌륭한 지도 덕분이에요.”연지석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지금처럼 혼자서 일을 잘 해내지 못
방성원이 별장에 도착하자 집 안은 더더욱 활기가 넘쳤다.그는 유남준 앞에서 자신의 아이를 자랑하기 바빴다. 오늘은 김인우도 찾아와 두 친구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에 잠겼다. 한 명은 아들이 있고 다른 한 명은 딸이 있는데 자신은 아무것도 없었다.김인우는 문득 할아버지가 말했던 ‘고독한 인생’ 이라는 말이 떠올랐다.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아이들과 어울리고 있는 조하랑에게 향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에서 묘한 감정이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하지만 김인우는 곧 머리를 흔들며 중얼거렸다.“딩크족으로 사는 게 나은 거지.”유남준은 그의 혼잣말을 듣지 못한 채 서류를 한 장 꺼내 김인우에게 건넸다.“이 안에 있는 걸 철저히 조사해 봐.”그것은 몇 가지 약물 목록이었다.김인우는 즉시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설마 이게 민정이가 복용했던 약이야?”유남준이 고개를 끄덕였다.“맞아.”“그래. 바로 조사할게.”이 약물 리스트는 유남준이 박민정을 몰래 다른 병원으로 데려갔을 때 따로 사람을 시켜 확인한 결과였다.김인우는 약물 목록을 사진으로 찍어 부하에게 전송했다.“민정이는 요즘 상태가 좀 나아졌어?” 친구의 물음에 유남준은 고개를 저었다.“아니.”박민정은 여전히 기억을 되찾지 못했고 오히려 자신을 피하고 화를 내는 상황이었다.오늘도 함께 식사를 마친 뒤 그녀는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며 자신을 완전히 외면했다.김인우는 그의 우울한 얼굴을 보고 위로했다.“인생사 뜻대로 되는 일이 몇이나 있겠어. 너무 마음 쓰지 마.”그러나 유남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금 그의 바람은 단 하나였다. 박민정이 기억을 되찾고 무엇보다 건강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이었다.시간이 늦어졌지만 김인우와 방성원은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유남준은 차갑게 말했다.“이제 밤도 깊었으니 돌아가야 하지 않겠어.”김인우는 상황 파악을 못 한 채 대답했다.“아니, 이제 겨우 열 시인데 뭘. 천천히 가도 돼.”열 시인데도 느긋하다니, 유남준은 점점 인내심
유남준은 방성원의 말을 듣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의 동생은 정말 한시도 조용히 있질 못했다.유남준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알겠어. 계속 철저히 감시해.”“그래.”방성원과 유남준은 중요한 이야기를 마친 뒤 자연스레 집안 사정을 화제로 삼았다.방성원의 상황은 유남준보다 훨씬 심각했다.설인하가 이혼을 요구하며 딸까지 데려가겠다고 나선 상태였다.“남준아, 정말 모르겠어. 내가 인하한테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 떠나려고 하는 걸까?”유남준은 그의 질문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결국 간단히 말했다.“무슨 일이든 분명히 설명하고 넘어가. 후회만 남기지 않도록 해.”유남준은 과거 자신과 박민정 사이의 오해로 인해 얼마나 많은 갈등과 상처가 생겼는지 잘 알고 있었다.그때 미리 솔직히 대화했더라면 그토록 많은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한편, 객실에서는 박민정과 조하랑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조하랑은 참지 못하고 박민정의 팔을 꼭 끌어안았다.“민정아, 네가 돌아와서 얼마나 좋은지 알아? 계속 돌아오지 않았다면 난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았을 거야.”그녀가 말하는 죄책감은 예전에 병원에 너무 늦게 도착한 탓에 박민정이 실종된 일을 가리켰다.박민정은 그녀의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바보야,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러니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박민정이 그렇게 말했지만 조하랑은 여전히 가슴 한구석이 아리며 지난 1년 동안의 괴로움을 떠올렸다.“응, 이제부터는 정말 무사하게 지내야 해.”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물었다.“하랑아, 넌 내가 남준 씨를 믿어야 한다고 생각해?”조하랑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왜 그런 질문을 해?”“그냥... 예전에 속은 적이 있어서 그런지 이제는 쉽게 믿기가 힘들어졌어.”박민정은 쓴웃음을 지었고 조하랑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솔직히 나도 네가 남준 씨를 믿어야 할지 확신은 없지만 한 가지는 알고 있어. 만약 네가 기억을 잃지 않았다면 네 선택은 분명 그 사람을 믿는 거였을 거
박민정은 에리가 여기까지 온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남이 보여준 호의를 거절하기도 어려워 그녀는 에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도 않아 갑자기 유남준이 그녀의 손을 꽉 붙잡았다.박민정은 본능적으로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유남준은 오히려 더 강하게 그녀의 손을 움켜쥐며 은근히 자신의 주권을 과시했다.박민정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멈췄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남준 씨...”‘자중하세요’라는 말을 끝내기 전에 유남준은 재빨리 손을 놓았고 박민정은 그의 곁에서 서둘러 거리를 벌렸다.그녀는 비록 유남준을 조금은 신뢰하게 되었지만 감정 문제만큼은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손이 텅 빈 유남준은 속으로 답답함이 가득했다.왜 방금 박민정을 그렇게 무서워했던 걸까?박민정은 빠르게 그의 옆을 지나가 모두가 모인 자리로 향했고 그때 에리가 그녀를 향해 환히 웃으며 손짓했다.“여기, 내 옆에 앉아.”박민정은 그의 옆에 앉기가 민망해 망설이고 있던 찰나 다행히 아들 박윤우과 박예찬이 이 어색한 분위기를 끝냈다.“엄마, 여기로 오세요! 우리 쪽엔 자리가 넉넉해요.”박민정은 그제야 에리에게 미안한 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미안해. 난 아이들 옆에 앉을게.”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서둘러 아이들 쪽으로 향했으나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에리가 뻔뻔하게 따라오며 말했다.“여기 공간이 정말 넓네. 나도 여기 앉아야겠다.”그는 바로 자리를 잡고 앉았지만 곧 뒤에서 드리운 거대한 그림자에 빛이 가려졌다.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유남준의 깊고 어두운 눈빛과 마주쳤다.박윤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에리 아저씨, 여긴 우리 가족 자리예요. 다른 데 가서 앉아 주실래요?”박윤우는 에리를 좋아하긴 했지만 그래도 부모님이 빨리 화해하고 가족이 화목해지기를 더 바랐다.“윤우야, 너도 참 매정하구나. 예전에 해외에서 넌 날 보고 ‘에리 아빠’라고 불렀잖아. 그런데 이제 아저씨라니?”에리는 장난스레 대꾸했다.“에리 아빠
역시 맞아보지 않으니 고통이 뭔지 모르는 법이다.세 명의 남자들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에리를 노려보고 있었다.에리는 늘 사람들에게 떠받들리며 살아왔고 남자들의 질투 어린 시선에도 익숙했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눈길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도대체 누가 저 녀석을 초대한 거야?” 방성원이 묻자 서다희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에리 씨가 꼭 와야 한다고 수아가 거듭 강조를 하면서 주소도 줬어요.”김인우는 그 말을 듣고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그건 집에 늑대를 들인 거나 마찬가지예요. 다음번에도 이런 일이 생기면 서 비서 아내랑만 놀게 해요. 우리까지 끌어들이지 말고.”방성원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자 서다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닫았다.에리가 이번에 온 이유는 분명했다. 바로 박민정을 보기 위해서였다.그는 틈만 나면 박민정에게 물을 건네주고 음식을 가져다주며 그녀를 극진히 챙겼다.유남준도 박민정을 잘 챙겨주고 싶었지만 매번 에리보다 한발 늦었다.이를 지켜보던 박윤우가 다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아빠, 이렇게 해서 엄마 마음을 얻을 순 없어요.”유남준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박윤우는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여자들은 꽃과 예쁜 장신구, 옷 같은 선물을 좋아해요. 그런 걸 많이 준비해 보세요.”사실 박민정의 집에는 이미 꽃이 가득했고 장신구나 옷도 놓을 데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유남준은 망설임 없이 전화를 들어 준비를 지시했다.그날 모임은 늦게까지 이어졌고 끝날 무렵 에리는 박민정과 함께 집으로 가겠다며 따라가려고 했지만 유남준은 강제로 그를 차에서 내리게 했다.에리는 개의치 않고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민정아, 다음 주에 봐.”“응, 다음 주에 봐.” 박민정은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에리를 보내고 나서야 유남준의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그는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부하에게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물었다.잠시 후 부하에게서 답변이 왔다.“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유남준은
서다희도 속수무책이었다.“이건 다 돈으로 만든 거니까 돈에 현혹되면 안 돼.”“흥!”민수아는 콧방귀를 뀌더니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솔직히 서다희는 사장과 함께 일하기 싫었다.박민정과 친구가 된 후, 서다희가 사장처럼 돈을 많이 쓰기를 민수아는 바랐지만, 그것은 허황한 꿈에 불과했다.비록 유남준의 전담 비서였던 서다희가 돈이 부족하지 않다지만 그렇다고 돈을 물 쓰듯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조하랑이 김인우에게 말했다.“전 개인적으로 꽃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 꽃은 그래도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하네요. 김씨 가문에 이 꽃을 좀 심어줄 수 있나요?”그러자 김인우가 말했다.“저는 그럴 시간이 없으니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세요.”“알았어요. 제가 직접 심을게요.”조하랑은 불쾌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지만, 그녀가 모르게 김인우는 사람들을 보내 꽃을 심게 했다.하지만 김인우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유남준이 꽃을 거의 다 꺾어 박씨 가문의 별장에 심은 탓에 꽃이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한쪽에서 설인하가 딸을 안고 꽃을 꺾고 있었다.방성원이 그 모습을 보고 집에다 꽃을 심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아내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는 시간과 돈을 아낄 필요가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꽃 감상을 마친 후, 하나둘씩 별장 안으로 들어섰다.유남준은 박민정에게 조용히 말했다.“우리 방에도 뭐가 있으니 들어가서 볼래?”“뭐가 있는데요?”박민정은 의아해했다.“가보면 알아.”유남준의 말에 홀려 박민정은 위층으로 올라갔다.방에 들어가자, 온갖 종류의 선물이 쌓여 있는 것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박민정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이게 다 뭐예요?”“널 위해 산 것이니 어서 열어 봐.”평소 박민정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어서 유남준이 사람 시켜 선물을 준비하게 했던 것이었다.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란 사실을 박민정은 그제야 깨달았다.하지만 그녀는 선물을 열어보지 않았다.“고맙긴 한데 이렇게 많은 선물을 받을 수 없어요.”아무
박민정은 꽉 깨물었던 유남준의 팔을 놓아주며 말했다.“남준 씨, 제발 놓아주세요. 과거에 우리의 사이가 좋았다고 해도 이러면 안 되죠.”그녀는 당황하고 혼란스러웠다.“안 놓아주면 화낼 거예요.”자신이 내뱉은 말이 아무 의미 없겠다고 박민정은 생각했다.그녀의 안색이 어두워진 것을 보고 유남준은 마지못해 그녀를 놓아주었다.“알았으니까 화내지 마.”박민정은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자리를 뜨려고 재빨리 문 입구로 다가갔다.문을 여는 순간, 문 입구에서 엿듣고 있던 두 아이를 발견했다.“윤우와 예찬이 엿듣고 있었던 거야?”박민정의 얼굴이 빨개진 것을 본 박예찬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엄마, 오해하지 마. 우연히 이 앞을 지나가던 중이었어.”박윤우도 따라 말했다.“맞아. 쓰레기 아빠가 엄마를 껴안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몰라.”“…”그녀는 애들과 승강이하고 싶지 않았다.“둘 다 얌전히 있어야 해.”말을 마친 후 박민정은 거실로 내려갔다.조하랑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왜 이렇게 늦게 내려왔느냐고 묻자, 박민정은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말을 더듬으며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았다.“이제 가야 하니 일 있으면 전화해.”조하랑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사람들을 하나둘씩 떠나보낸 후, 박민정과 진서연만 남게 되었다.유남준이 내려올 때 박민정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마음이 착잡한 것을 뒤로 하고 유남준이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은 채 박민정의 옆에 앉으려 하자, 박민정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나 졸리니까 먼저 잘 게.”“네. 그러세요.”진서연이 말했다.방으로 돌아온 박민정은 문부터 잠갔다.씻고 침대에 누우니 유남준이 자신을 껴안고 있던 모습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잠을 이루지 못했던 박민정은 최근에 있었던 사건들을 보고 싶어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인터넷에는 자신에 관한 뉴스가 많이 올라와 있었다.박민정은 하나하나 확인하며 기억을 떠올리려고 노력했지만, 여전히 가물가물했다.무의식적으로 잠이 든 박민정은 한수민의 꿈을
“엄마, 아빠랑 이혼 잘하셨어요.”유남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유남준 앞을 지나치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내가 능력이 없어서 이번에도 졌네.”유남준은 그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째려봤다.유남우는 사실 그가 어떻게 반격할지 걱정되기보다 이번에도 졌다는 게 더 분통했다.밖으로 나온 뒤 그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라도 걸고 싶었지만 딱히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연락처를 훑어보다가 홍주영에서 멈칫하더니 결국에는 통화버튼을 누르지도 못한 채 핸드폰을 다시 꺼야 했다.실내 안.거실은 유난히 조용했고 유지욱은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남우가 왜 저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어. 예전에는 말도 잘 듣고 착한 아이였는데.”고영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그가 말하는 ‘예전’이 정확하게 언제인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고영란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모습에 유지욱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아니에요.”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시 말을 이었다.“이번 달은 될수록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요. 그리고 이혼 숙려기간이 끝나는 대로 다시 가서 마무리 지으면 될 것 같아요.”고영란은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이혼하고 싶은데 지금 이혼하려면 한 달씩이나 기다려야 했다.그리고 위층으로 올라가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리고 이 한 달 동안에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이 뭔지 좀 생각해 보고요.”말을 마친 뒤 유지욱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한편.박씨 가문의 옛 저택.박민정은 유남준이 너무 걱정되어 한걸음에 집으로 돌아왔다.비록 서다희가 괜찮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이때, 밖에서 들리는 차 소리에 박민정이 다급히 차창 밖을 내다보니 유남준의 차도 마침 도착해 있었다.박민정은 빠르게 차에서 내린 뒤 유남준에게 달려가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괜찮아요?”그러자 유남준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당연하지, 다희가 나 괜찮을 거라고 알려줬잖아.”박민정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
유석진의 입에서 갑자기 자기 둘째 아들의 이름이 거론되자 고영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또한 왜 두 아들 사이에 지금 저런 모순이 생긴 건지 알 수 없었다.유남준도 괜히 고영란이 중간에서 난처하게 된 것 같아 일부러 유남우를 빤히 바라보며 유석진에게 말했다.“이번 일은 사과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에요. 큰아빠가 아무리 남우랑 같이 벌인 일이라고 해도 이번만큼은 가만있지 않겠습니다.”별로 무겁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 위협감이 느껴졌다.순간 유석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이때, 그의 며느리인 최현아가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끼어들었다.“남준 씨, 그래도 한 가족인데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그러자 유성혁도 한마디 거들었다.“남준아, 우리도 잘못했단 걸 알고 있어. 아버지가 이제 연세도 많아서 상황판단이 안 될 때가 많아.”유석진도 사실 지금 자존심을 부려서 될 일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지금 네가 원하는 게 뭔데? 말해주면 내가 다 들어줄게.”사실 유남준은 이 말만을 기다렸다.“금방 인수한 시내 중심에 있는 그 건물을 저한테 넘겨주세요.”그 땅은 유명훈의 땅이고 죽기 전 유석진에게 물려준 유산인데 지금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값이 올랐다.유석진이 이 땅의 주인이 됨으로써 그곳의 상권을 손에 쥔 거나 다름없었는데 나중에 아무 건축물을 세워 올려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건 안되지!”역시나 유석진이 단번에 거절했다.그가 오랫동안 눈독 들였던 땅이었는데 유명훈이 죽어도 물려주지 않으려 해서 여태껏 애를 먹고 있었다가 이제 겨우 손에 들어온 땅이고 또 자기만의 계획이 따로 있었다.“그러면 조만간 IM 그룹의 변호사를 만나셔야겠네요.”유남준은 더 이상 그와 얘기하고 싶지 않았고 유석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집안 도우미에게 외쳤다.“모셔다드려!”그렇게 도우미들은 그들을 전부 밖으로 내보냈고 거실에는 유남준 가족들만이 남게 되었다.유지욱과 고영란은 눈앞의 두 아들에게 뭐라고 말했으면 좋을지
유남준이 잡혀갔다는 소식에 유석진 가족들은 조용히 자축하고 있었다.최현아도 너무 기뻐했지만 유독 유성혁만 우울한 얼굴로 그들에게 물었다.“아빠, 그래도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인데 꼭 이래야 할까요? 남준이가 잡혀가도 우리한테 아무런 이득도 없잖아요. 그리고 만약 다시 풀려나서 우리가 한 짓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요.”그러자 유석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답했다.“왜 쓸데없는 일을 벌써 걱정하고 그래? 간이 그리도 콩알만 해서 큰일 하겠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유성혁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다만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유지훈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저는 할아버지가 한 행동이 맞다고 봐요.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러자 유석진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껄껄거리며 웃었다.“하하, 역시 우리 손자가 똑똑하다니까. 네 말이 맞아. 사람은 무조건 자기가 일 순위여야 해. 절대 네 바보 같은 아빠를 닮아서는 안 된다.”그러자 유지훈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할아버지, 저도 알고 있어요.”그리고 유석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그들은 너무 일찍 기뻐했던 게 오후가 되자마자 유남준은 바로 풀려났다.그길로 옛 저택으로 오게 되었고 동시에 유석진네 식구들과 유남우를 전부 집으로 불러 모았다.이 시각, 유지욱도 마침 그곳에 있다가 눈앞의 상황에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남준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아빠, 제가 지금부터 저 사람들의 실체에 대해 다 밝히려고요.”그리고 서다희가 한 무더기의 자료와 증명서를 건네주자마자 그는 유석진네 식구들에게 뿌려줬다.종이들이 공중에서 흩날리다가 전부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유석진은 그중 한 장을 주워 읽어보고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코웃음을 치며 그에게 말했다.“남준아, 다 오해야.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하겠니?”그러자 유남준이 눈살을 찌푸리고 그에게 되물었다.“우리 회사에 심어둔 사람들을 제가 다 데려올까
유남준은 사실 진작에 유남우와 유석진 쪽에 사람들을 붙여서 그들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파악하고 있었지만 도대체 무얼 하려는지 궁금해서 일단 내버려두고 있었다.이튿날, IM 그룹으로 세무국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러자 서다희가 눈살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대표님을 감옥에 보내려고 아주 별짓을 다 하네요. 이런다고 그 사람들한테 득이 되는 게 뭔지 정말 모르겠어요.”특히 유남우는 왜 자기 친형을 왜 이렇게까지 괴롭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조사해 보니 역시나 회사 장부에 문제가 있었고 회사 자금을 불법으로 돌렸다는 증거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그러나 이 모든 게 다 그들이 일부러 만들어낸 가짜 장부들이었다.그렇다고 해도 유남준은 회사 법인으로서 조사를 받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연행되었다.가면서도 서다희에게 당부했다.“민정이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줘.”서다희는 한껏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굳이 말하지 않아도 뉴스에서 하루 종일 보도될 예정이라 아마 얼마 안 돼서 알게 될 것이다.역시나 박민정은 출근길에 그에 관한 뉴스 기사를 보게 되었다.“어떻게 이럴 수가?”이때, 고영란도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민정아, 남준이한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그러나 박민정도 아직 무슨 상황인지 모르고 있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저도 방금 기사를 봐서 잘 모르겠어요. 제가 지금 당장 다희 씨한테 전화해 볼 테니까 어머님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그래.”고영란은 착잡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유지욱과 이혼하겠다고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들한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서다희는 빠르게 박민정에게 전화해서 유남준이 시킨 대로 알려줬고 모든 일은 다 대비되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박민정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이때 서다희가 한마디 더 했다.“그런데 이 일은 절대 고영란 사모님한테 말하지 말아 주세요.”“알겠어요.”어쩌면 유남우 귀에도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