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 은정숙의 말을 잘 들었던 박민정은 심지어 지금 은정숙이 아픈 상태였기 때문에 그녀의 뜻을 거스를 수 없어 일어나서 유남준을 방으로 데려가 옷을 입어보도록 도와주었다.박민정이 유남준을 위해 사준 옷은 대부분 캐주얼한 옷이라 입기 편했다.“옷 벗어요.”박민정은 이렇게 말한 후 새로 산 옷들을 모두 꺼내서 옆에 정리했다.준비를 마치고 유남준에게 가져다주려고 돌아서는 순간 온몸이 굳어버리며 동공이 커졌다.“왜, 왜 옷을 다, 다 벗었어요?”그런데 눈앞에 있는 남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다. 완벽한 비율의 몸매에 탄탄한 근육, 에잇팩 복근까지, 그리고…박민정은 당황한 나머지 얼굴에 불이 붙은 것 같은 느낌에 시선을 피했다.비록 예찬이와 윤우를 낳고 유남준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지만 두 사람이 관계를 맺은 횟수는 많지 않았다.이번에 돌아와서 유남준의 핏줄을 위해 능숙한 척 행동했지만 정작 본론으로 들어갔을 땐 유남준이 적극적으로 리드했다.유남준은 항상 자신의 몸에 만족하고 있었기에 잘생긴 얼굴에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안에 입을 옷도 있지 않아?”박민정은 감히 그를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내가 속옷 사준 것도 아니잖아요. 얼, 얼른 속옷 입어요.”그런데 유남준은 이렇게 말했다.“너무 급하게 벗어서 어디에 뒀는지 깜빡했는데 좀 찾아줄 수 있어?”박민정은 그가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았지만 빨리 끝내야겠다는 생각에 그가 옷을 놓아둔 곳을 찾으러 갔다.하지만 속옷을 찾기도 전에 유남준이 뒤로 다가왔고 박민정의 몸이 굳어버렸다.그 순간 유남준은 온몸의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박민정은 그의 물건이 닿는 것을 느끼며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뭐 하는 거예요?”유남준은 곧바로 한발 물러섰다.“네가 못 찾는 것 같아서 내가 직접 찾으려고.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말을 하던 그는 목에 불이 붙은 것 같았고 귓불이 뜨거웠다.박민정은 재빨리 옷을 뒤지다가 겨우 옷을 찾아 그에게 건넸다.“빨리 입어요!”유남준이
유남준은 그녀를 품에 더 으스러지게 안고 싶었다.박민정이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자신을 가둔 그의 단단한 팔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온몸이 뜨거워지는 동시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남준 씨, 이거 놔요!”목구멍이 꽉 멘 유남준은 이대로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오늘 밤 우리 같이 자자.”그의 뜨거운 입김이 귓속을 파고들자 박민정은 귓불이 빨개졌다.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벌써 두 팔로 그녀를 손쉽게 들어 올려 침대 위에 살포시 눕혔다.“이러지 마요...”거부하려고 하는 순간, 문밖에서 윤우가 다급하게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엄마...”그 소리에 유남준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민정은 일어나려고 하였으나 그는 큰 바윗덩어리처럼 아무리 밀어도 미동조차 없었다.“남준 씨, 비켜요, 얼른.”목소리를 낮춰 다그쳤지만 그는 역시나 아랑곳하지 않고 문 쪽으로 향해 눈길을 돌렸다.“엄마가 자니까 내일 다시 찾아.”윤우는 문밖에서 그 말을 듣고 잠시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코앞에서 쓰레기 아빠가 엄마를 괴롭히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윤우는 이내 더 세게 문을 두드리며 소리 질렀다.“아저씨 나쁜 사람이야. 빨리 우리 엄마 내보내요! 엉엉... 우리 엄마 내놔... 엉엉... 엄마, 엄마...”윤우의 울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간할 수 없는 박민정은 너무 급한 나머지 유남준의 다부진 어깨를 덥석 깨물었다. 그 바람에 유남준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지만 여전히 끄떡도 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를 더 꽉 껴안았다.“민정아, 제발. 오늘은 나랑 같이 있어. 앞으로 네가 뭐라고 하든 다 네 뜻대로 할게.”박민정은 순순히 그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더 세게 깨물었다. 그러자 유남준의 잇새에서 아픔을 참는 나지막한 신음이 흘러나왔다.문밖에서 윤우는 아직도 쉴 새 없이 큰 소리로 떠들고 있었다.“나쁜 놈, 엄마 안 내놓으면 나 경찰에 신고할 거야!”박민정은 입에서 피비린내가 나는 것을 느끼고서야 잠시
그녀의 이부언니, 윤소현!이 답을 듣게 되는 순간 박민정은 약간 얼떨떨해졌으나, 귓가에서는 정민기의 목소리가 계속하여 들려왔다.“어제 그 일을 뒤처리하면서 그놈들한테서 들었는데, 계획대로라면 민정 씨를 잡아가서... 성폭행할 예정이었다고 하네요.”정민기는 입에 담기 어려운 듯 조금 경직된 말투로 그 세 글자를 내뱉었다.그의 말을 들은 박민정은 저도 몰래 주먹을 쥐었다.“알겠어요.”전화를 끊은 후 박민정은 생각에 빠졌다. 윤소현이 자신을 그 정도로 미워할 이유가 대체 뭘까...유일하게 미움을 살만한 일이라면 아마 유남우에 관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자신은 유남우와 아무런 관계도 아니지 않은가.생각 끝에 그녀는 비서 진서연한테 연락해 윤소현의 연락처를 보내달라고 했다. 전에 협력한 적이 있었으므로 진서연은 윤소현의 연락처를 갖고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소현의 전화번호가 찍힌 문자가 도착했다.진서연은 이어서 물었다.“보스, 윤소현과 또다시 협력하려고 그러시는 거예요? 제가 미처 얘기 드리지 못한게 있는데 며칠 전에 저한테 연락이 왔었어요. 보스님의 곡을 또 사고 싶다고 하더라고요.”박민정은 그녀한테 답장했다.“아니야. 사적인 일이야.”“아... 그러시구나.”진서연은 문득 또 다른 일이 생각나 박민정에게 말했다.“참, 보스. 최근에 누가 저희 해외에 등록한 유령 작업실을 몰래 조사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작업실은 박민정이 돌아온 후 만들어낸 대외용 멘트일 뿐이다.진서연의 말을 들자 그녀는 진주시의 누군가가 조사하고 있음을 바로 알아챘다.“넌 신경 쓰지 말고 네 일에 집중해.”“오케이.”만약 누가 감히 함부로 덤빈다면 혼쭐을 내주리라 진서연은 생각했다.귀엽고 온순한 외모와는 달리 진서연은 산타 국제전 여자 조에서 챔피언을 따낸 프로 선수급 유단자로서 보통 남자들은 전혀 그녀의 상대가 될 수 없다. 하나 이편에 있는 박민정은 그들이 누구인지 관심이 없었다. 유령 작업실을 등록 한 건자신이 하는 일을 유남준한테 들키지
윤소현은 꽁꽁 싸맨 채 뽀얗고 말간 얼굴만 드러내놓고 박민정이 걸어 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봤다.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 특히나 정성스레 그려진 듯한 눈매와 눈동자를 가진 박민정은 그녀가 봐도 미인임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많이 챙겨입었어도 볼륨감 있는 몸매가 감춰지지 않았다.자신도 뒤처지지는 않는다는 걸 물론 알고 있지만 뭔지 모르게 박민정보다 조금 부족한 것만 같았다.“그딴 걸 보낸다고 내가 졸 줄 알았어? 그런 건 나한테 아무런 소용 없어. 그러니까 힘 그만 빼.”이럴 땐 기선 제압이 중요하다고 윤소현은 생각했다.박민정은 속으로 콧방귀를 꼈다. 두려울 거 없는데 왜 일찌감치 여기 와서 앉아 있는건지. 하나 굳이 까발리지 않고 그녀 앞에 친자확인 서류를 내밀었다.의심스러운 눈길로 그 서류를 열어보던 윤소현의 눈동자에는 알지 못할 빛이 스쳤다.“나 뒷조사하고 있었어?”친자확인서를 들고 있는 윤소현의 첫마디가 친자관계 여부에 관한 질문이 아니라 뒷조사를 한 것에 대한 비난이자 박민정은 순식간에 멍해졌다.“한수민 씨의 딸이라는 걸 알고 있었네요.”그녀는 물음이 아니라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그러자 이 사실을 정수미한테 알릴까 봐 두려운 윤소현은 대뜸 해명했다.“나도 어제 금방 들어서 알게 된 거야, 네가 내 이부동생이라는 거.”윤소현은 손을 뻗어 박민정의 손을 꼭 잡았다.“진작에 알았다면 널 해치려고 안 했어. 우린 자매잖아. 난 박민호랑은 달라.”하지만 박민정은 손을 빼내며 냉담한 눈매로 그녀를 쳐다봤다. 참말이지, 윤소현의 연기 실력은 이지원의 발밑도 못 따라간다. 이지원한테서 하도 많이 당해, 이 정도는 눈을 감고도 진심인지 아닌지 변별해 낼 수 있었다.“오늘 여기 가족 상봉하러 온 게 아니에요. 경고하는 데, 이런 일이 또 있는 날엔 저도 가만히 안 있어요.”그 말에 윤소현은 얼굴이 굳어버렸다.박민정은 일어서며 또 한마디 남겼다.“윤씨 집안 아가씨가 무슨 벼슬이라도 되는 줄 아나 본데, 그 집안 재산은 모두
거실 안에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예전의 집안에서 부리던 가정부 따위가 감히 자신한테 이런 말을 할 줄 몰랐던 한수민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은정숙을 때리려고 손을 들었다. 그러자 간병인이 앞으로 나서서 말렸다.“이보세요, 사모님. 저희 집 어르신이 몸도 안 좋으신데 이러시면 곤란해요. 제가 경찰부를 수도 있어요.”한수민은 손을 허공에 든 채로 간병인의 말을 듣더니 입가에 냉소를 흘렸다.“어르신은 무슨. 저거 그냥 데려가는 남자 하나 없는 궁상맞은 여편네일 뿐이야. 운 좋게 내 딸을 좀 돌봐줬다고 지금 이런 호사를 누리고 있는 거고. 내 딸이랑 사위가 능력이 있어서 집에 모시고 있으니까, 진짜로 무슨 귀부인이나 되는 줄 아나 보지?”간병인은 조금 의아했다. 줄곧 은정숙이 박민정의 친척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고, 심지어 눈앞에 있는 이 사모님이 박민정의 친어머니였다.자세히 보니 확실히 좀 비슷하게 생겼긴 하였지만, 성격과 인품이 어찌 이리 다르단 말인가. 말투 또한 신랄하고 각박하기만 하다.하지만 고용주의 친어머니라는 생각에 뭐라고 할 수도 없어, 한쪽에 물러서서 일단 지켜보기로 하였다.은정숙은 한수민의 비꼬는 말에 대꾸했다.“난 아무리 가난해도 남자한테 의지 안 하고 제힘으로 꿋꿋이 잘 살아왔어요. 누구처럼 자식의 피까지 빨아먹는 짓은 절대 안 해요.”박민정의 성질머리가 누구를 닮았는지 한수민은 이제야 깨달았다. 모두 이 은정숙이란 여자한테서 배운 것이었다.화가 치밀어 오른 그녀는 다시 손을 들어 간병인이 채 반응하기도 전에 은정숙의 뺨을세게 내리쳐 바닥에 쓰러뜨렸다.“콜록콜록...”워낙에 몸이 안 좋은 은정숙은 바닥에 쓰러지자 격렬하게 기침 하기 시작했다.간병인은 황급히 그녀를 부축하며 물었다.“어르신, 괜찮아요?”연거푸 나오는 기침 때문에 은정숙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그 모습을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며 한수민은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은정숙이 점점 힘들어하며 숨이 넘어갈 것처럼 보이자, 박민정한테 전화를 걸어 한
“그래요, 누굴 만나실 건데요? 저랑 같이 가요.”박민정은 즉시 대답했다. 지금은 은정숙이 자신의 시야에서 잠시도 떨어지게 하면 안 될 것 같았다.“그냥 옆 마을 영천댁에 갔다 오려는 거야. 그 집 며느리가 손자를 낳았다는데 내가 한번 가보려고. 넌 집에서 곡이나 써, 나랑 같이 갈 거 없어.”은정숙이 부드럽게 말하자 박민정은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의사가 지금 푹 쉬셔야 한다고 했단 말이에요.”“바보야, 난 정말 괜찮다니까? 전에 그 전문가가 사오 년 사는 건 문제 없다고 했던 거 기억 안 나?”박민정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은정숙은 또 거짓말을 했다.“너 영천댁 기억 안 나니? 그 여편네는 다른 사람이 있는 걸 싫어해. 평생 친구라고는 나밖에 없어. 네가 가면 우린 얘기도 편하게 나누지 못해.”박민정은 은정숙이 요즘 종일 집에만 있다 보니 친구도 만나지 못하고 적적하셨을 거라 생각되어, 조금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그럼 그 댁까지 제가 모셔다드릴게요.”“그래.”약속을 한 후에야 박민정은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집에 돌아온 윤우는 은정숙이 다쳤다는 걸 알고 조용히 간병인한테 자초지종을 물었다.쓰레기 외할머니가 집에 왔을 뿐만 아니라 은정숙을 때려 다치게까지 했다는 걸 듣자 바로 예찬이한테 전화를 걸었다.“박예찬! 그 나쁜 여자, 아직도 혼을 안 낸 거야?”나쁜 여자?예찬이는 얼떨떨해서 물었다.“누굴 말하는 거야?”“그 늑대 외할멈 있잖아!”예찬이는 이제야 그 나쁜 여자가 누굴 가리키는지 알았다.늑대 외할멈이라는 단어는 처음 듣지만 또 왠지 잘 어울리는 호칭이었다.“한수민 계좌에는 돈이 없어. 돈은 다 그 여자 남편 윤석후가 갖고 있어. 그래서 요즘에 밤마다 윤석후 회사 시스템을 뚫고 있어.”그 말을 들은 윤우는 엄지를 내보이며 예찬이를 칭찬했다.“형, 진짜 짱이야!”예찬이는 어이가 없어 속으로 구시렁 거렸다.‘쓸모없을 땐 박예찬, 쓸모가 생기면 형이구나?’“됐어, 별일
목에 닿은 차가운 금속의 촉감이 느껴지자 한수민은 동공이 움츠러들며 손에 쥔 잔을 바닥에 떨어뜨렸다.“뭐... 뭐 하는 거야?!”은정숙은 손에 든 칼을 꽉 쥐고는 더 가까이 들이댔다.“민정이한테 돈 돌려줘요!”“돈... 돈은 다 우리 남편한테 줬는데 무슨 돈을 달라는 거야. 얼른 칼 내려놔, 아니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한수민은 애써 침착하게 대처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녀의 협박에 은정숙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가만두지 않으면 어쩔 건데? 평생 손에 핸드백보다 더 무거운 걸 들어본 적도 없는 사모님께서 무슨 힘으로 날 가만두지 않겠다는 건지 참 궁금하네요.”한수민은 목이 조금 아파지는 것이 느껴졌다. 칼끝에 베여 피가 나는 것만 같았다.“진정해. 원하는 거 돈이잖아. 내가 줄게.”죽음 앞에서는 역시 잘난 인간은 따로 없었다.한수민이 죽는 걸 두려워할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은정숙이 오늘 죽이려는 건 그녀가 아니었다.“엄마, 문은 왜 닫고 있어요? 나 엄마한테 볼일 있으니까 문 열어봐요.”이때 방문 밖에서 갑자기 박민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러자 은정숙은 일부러 당황한 듯 조급한 말투로 말했다.“당신 죽여버릴 거야. 민정이 대신해 복수 할 거야!”잔뜩 겁이 난 한수민은 황급히 그녀의 손에 든 칼을 빼앗으려고 잡았다. 바로 그때, 은정숙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 칼끝을 자신한테 겨눠 힘껏 찔렀다.“아!”순간 한수민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새빨갛게 물든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이렇듯 피가 흥건했지만 그녀는 왠지 전혀 아프지 않았다. 다시 보니 은정숙이 그녀의 손을 잡고 칼로 자신의 배를 찌른 것이었다.“뭐... 뭐야!”충격으로 말을 제대로 잇지도 못한 채 서둘러 칼은 쥔 손을 놓자 은정숙이 쿵, 하며 바닥에 쓰러져서는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당신네처럼 돈 있고 힘 있는 사람을 내가 상대할 수는 없겠죠. 하지만 한가지는 할 수 있어요. 내 목숨으로... 당신을 평생... 불안하
”말하지 마요, 아줌마. 의사가 치료할 수 있다고 했으니까 힘을 아껴요.”목소리가 벌써 잠겨버린 박민정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로 얼굴이 범벅이 되었다. “응...”은정숙은 억지로 웃음을 내보이며 그녀 얼굴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지만 도저히 손을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미세한 움직임으로부터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린 박민정은 그녀의 손을 자신의 볼에 갖다 대었다.“아줌마...”“그래... 민정아... 울지 마, 울지 마...”너무 울어서 눈두덩이가 벌겋게 부어오른 박민정은 흐느끼며 대답했다.“네, 저 안 울어요. 아줌마는 괜찮아질 거예요. 꼭 괜찮을 거예요.”은정숙의 아직 남아있는 기운은 분명 회광반조로 인한 것이었다. 그녀의 눈길은 천천히 창밖으로 향해 하얀 바깥세상을 눈동자에 담았다.“이제... 곧 새해구나... 설날이야...”설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박민정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나지막이 말했다.“네, 맞아요.”“우리 집에 가자꾸나.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아.”“네, 그래요. 우리 집에 가요.”박민정은 두 팔을 뻗어 은정숙을 안았다. 마르다 못해 뼈밖에 없는 은정숙은 별로 힘이 없는 박민정도 거뜬히 안아 들 수가 있었다.은정숙을 안고 긴 복도를 따라 밖으로 나가면서, 그녀가 갑자기 떠나갈까 봐 박민정은그녀한테 계속하여 말을 걸었다.“지금 바로 집에 갈 거예요. 설이 되면 떡국도 먹고 만두도 빚어요, 우리. 설이니까 물론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겠죠? 윤우랑 예찬이가 세배도 하고, 세뱃돈도 주셔야죠.”은정숙은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멀게 느껴지고 눈앞도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박민정도 품 안에 있는 사람의 숨소리가 점점 가벼워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엄마. 엄마... 가면 안 돼요. 제발... 저랑 계속 같이 있기로 약속했잖아요...”박민정은 진작에 은정숙을 자신의 엄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친엄마보다 더 친한 엄마였다.그녀가 엄마라고 부르는 걸 들은 은정숙은 마지막 힘을 다 해 두 글자를 뱉었다.“그
유남준은 그제야 진정하고 서둘러 밖으로 나온 뒤 그녀의 머리를 다시 살펴봤다.그러자 박민정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나도 안 아프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리고 제정신이 아닌 사람을 굳이 상대해서 뭐 해요?”“그래.”유남준은 담담하게 답했지만 속으로는 당장에라도 이지원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사실 박민정도 애써 쿨한 척 괜찮다고는 했지만 방금 눈앞에서 본 이지원의 모습은 어딘가 이상했다.그런 눈빛은 진짜로 미친 사람 외에는 절대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될 만큼 충격적이었다.박민정은 돌아가기 전 원장에게 물었다.“혹시 이지원 씨는 평소에도 많이 폭력적이었나요?”그러자 원장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아니요. 여기에 온 이후로는 말도 잘 듣고 다른 환자분들과도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만약 그런 환자가 들어오면 오히려 자발적으로 피하더라고요.”박민정은 그제야 뭔가 알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아닙니다. 설마 방금 사모님께 손을 댔나요?”그의 물음에 박민정은 굳이 숨길 필요가 없을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네, 안정이 필요해 보이더라고요.”“알겠습니다.”원장은 재빨리 간호사에게 알렸다.“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제 지인도 이쪽 분야의 전문가 의사인데 이런 환자한테는 같은 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곁에 있으면 좋다고 했거든요.”사실 원장도 진작에 김인우를 통해 이지원이 저질렀던 악행들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하여 박민정의 말이 끝나자마자 빠르게 답했다.“저희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두 사람은 그제야 그곳을 빠져나왔고 원장은 그들이 떠나가자마자 이지원의 병실에 비교적 폭력 성향이 센 환자를 안배해 뒀다.박민정이 차에 올라타자 유남준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에게 물었다.“어때 보였어? 이지원이 진짜로 정신이 이상해진 것 같았어?”그러나 박민정은 대답 대신 그를 한참 동안 빤히 바라보다 되물었다.“남준 씨는 어땠는데요? 뭔가 이상한 점 못 느꼈어요?”그러자 유남준
간호사가 문을 열고 대기실 안으로 들어오더니 원장한테 말했다.“원장님, 이지원 씨를 데려왔습니다.”그러자 원장은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에서 일어서며 박민정에게 최대한 공손하게 말했다.“저는 이만 나가볼 테니까 편하게 말씀 나누세요.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저를 불러주시면 되겠습니다.”“감사합니다.”그렇게 대기실 안에는 세 사람만이 남게 되었고 유남준과 박민정은 말없이 이지원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지원은 아직 두 사람을 보지 못한 듯 그저 고개를 수그린 채 자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입으로 계속 뭔가를 중얼거렸다.“오빠, 진짜 나랑 결혼할 거야? 민정이가 알고 날 괴롭히면 어떻게 해?”박민정은 너무 어이가 없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이지원!”이지원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눈앞의 그녀를 바라보았는데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누구세요?”“내가 누구인지 기억 안 나? 나야, 민정이.”그녀의 이름이 들리는 순간 이지원은 순간 겁을 먹은 얼굴로 빌기 시작했다.“민정아,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그런 실수하지 않을게. 나도 많이 반성했으니까 한 번만 봐주라. 더 이상 거짓말도 하지 않을게... 우리 한때는 친구였잖아?”그리고 박민정의 손을 잡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난 윤소현 씨처럼 감옥에 들어가기 싫어.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살고 싶지도 않고. 이제부터 정신 차리고 연예계에서만 활동하면서 살 테니까 제발 나 한 번만 살려줘.”그녀의 간절한 애원에도 박민정의 얼굴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아직 덜 미쳤나 보네!”이지원은 순간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듯 갑자기 표정이 돌변하더니 박민정을 매섭게 쏘아보며 말했다.“아니야! 넌 지금 나한테 거짓말을 하고 있어. 내가 진짜 박민정이라고!”박민정의 미간이 순간 찌푸려졌다.그러자 이지원은 차갑게 웃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네가 그 피도 눈물도 없는 이지원이잖아!”그리고 당장에라도 눈앞의 박민정을 때리려고 했다.“빌어먹을 X, 널 죽여버릴 거야!”다행히 옆에
이지원이 정신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들은 유남준은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더니 역시나 믿지 못하는 얼굴이었다.워낙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여자라 분명 이번에도 쇼한다고 생각했다.특히 이런 병은 정확하게 진단해 내기 어렵다.“그래, 같이 가자.”유남준이 단번에 가겠다고 하자 박민정은 순간 장난기가 발동해 그에게 슬쩍 물어봤다.“이지원 씨가 신경 쓰여요?”순간 유남준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에게 되물었다.“뭐라고?”“남준 씨 첫사랑이었잖아요. 바로 가겠다는 걸 보니까 신경 쓰이는 게 아니면 걱정하는 건가?”말하다 보니 박민정도 슬슬 질투가 났다.그러자 유남준은 어이없다는 듯이 그녀의 볼을 꼬집으며 답했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예전에도 말했잖아, 난 그 여자한테 아무런 감정도 없다고. 그런데 왜 신경이 쓰이고 걱정해?”박민정은 그의 단호한 발언에 그제야 마음이 살짝 놓였다가 다시 물었다.“그런데 왜 저랑 같이 가보려고 해요?”“단순 호기심.”그가 이런 일로 호기심이 생길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박민정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러고 보니 그녀도 궁금하긴 했다.“빨리 먹고 가요.”“그래.”그렇게 박민정은 아침밥을 다 먹은 뒤 유남준이 운전하는 차에 올라탔다.비록 집에 운전기사가 있지만 유남준은 박민정과 단둘이 드라이브하는 걸 좋아했다.이지원이 지금 입원해 있다는 병원은 집과 살짝 멀었는데 차로 대략 한 시간 정도 걸렸다.얼마간 달리다 보니 박민정은 저 멀리 하얀색 건물과 울타리 안에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이 햇볕을 쬐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그리고 가까이 다가가서야 사람들 속에서 익숙한 한 여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이지원도 흰색 환자복을 입고 있었고 긴 머리는 헝클어진 채 한눈에 봐도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이때 옆에 있던 환자가 갑자기 그녀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자 이지원은 뭐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으나 거리가 너무 멀어 정확하게 뭐라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입구에 도착해보니 병원 원장이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
이튿날, 아침 여덟 시쯤.박민정이 침대에서 일어나려 하자 유남준은 다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품 안에 가뒀다.“왜 벌써 깼어?”유남준의 나른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지자 박민정은 난감한 얼굴로 그의 팔을 풀려고 했지만 역시나 어림도 없었다.하여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다시 누워 그에게 말했다.“출근해야 하니까 빨리 이것 좀 풀어요.”그러자 유남준은 그녀를 더욱 세게 안았다.“더 자도 돼.”회사 대표가 굳이 제시간에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박민정이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잠이 안 와요.”순간 유남준의 눈이 갑자기 번쩍 뜨이더니 벌떡 일어나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채 물었다.“그러면 우리 재밌는 놀이나 더 할까?”그의 말에 깜짝 놀란 박민정은 빠르게 다시 눈을 감았다.“아, 아니요. 그냥 잠이나 계속 자요.”그러자 유남준도 싱긋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다시 누웠다.솔직히 오랜만에 이토록 개운하게 잤다.박민정은 그의 품 안에서 갇혀있는 상태로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지만 유남준이 원하니 어쩔 수 없이 불편해도 참아야 했다.아홉 시 반쯤 되자 박민정은 더는 누워있기 힘들어 유남준에게 거짓말했다.“남준 씨, 나 배고파요.”그러자 유남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그러면 아침밥부터 먹자.”“네.”그제야 자유로운 몸이 된 박민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침밥을 먹으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남준네 셰프는 요리 솜씨가 아주 훌륭했고 아침부터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었다.박예찬, 박윤우는 이미 학교에 갔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출근했다.박민정이 내려오는 모습을 본 셰프는 재빨리 그들이 먹을 아침밥을 다시 데워줬다.유남준은 그녀가 허겁지겁 맛있게 밥 먹는 모습을 한껏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마디 했다.“체하지 않게 천천히 먹어.”“네.”한창 맛있게 먹고 있던 이때, 갑자기 박민정의 핸드폰이 울렸다.화면에 ‘김인우’라는 이름을 본 유남준은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설마 재검사받아야 하는 건가?’박민정은
“엄마, 아빠랑 이혼 잘하셨어요.”유남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유남준 앞을 지나치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내가 능력이 없어서 이번에도 졌네.”유남준은 그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째려봤다.유남우는 사실 그가 어떻게 반격할지 걱정되기보다 이번에도 졌다는 게 더 분통했다.밖으로 나온 뒤 그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라도 걸고 싶었지만 딱히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연락처를 훑어보다가 홍주영에서 멈칫하더니 결국에는 통화버튼을 누르지도 못한 채 핸드폰을 다시 꺼야 했다.실내 안.거실은 유난히 조용했고 유지욱은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남우가 왜 저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어. 예전에는 말도 잘 듣고 착한 아이였는데.”고영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그가 말하는 ‘예전’이 정확하게 언제인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고영란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모습에 유지욱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아니에요.”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시 말을 이었다.“이번 달은 될수록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요. 그리고 이혼 숙려기간이 끝나는 대로 다시 가서 마무리 지으면 될 것 같아요.”고영란은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이혼하고 싶은데 지금 이혼하려면 한 달씩이나 기다려야 했다.그리고 위층으로 올라가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리고 이 한 달 동안에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이 뭔지 좀 생각해 보고요.”말을 마친 뒤 유지욱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한편.박씨 가문의 옛 저택.박민정은 유남준이 너무 걱정되어 한걸음에 집으로 돌아왔다.비록 서다희가 괜찮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이때, 밖에서 들리는 차 소리에 박민정이 다급히 차창 밖을 내다보니 유남준의 차도 마침 도착해 있었다.박민정은 빠르게 차에서 내린 뒤 유남준에게 달려가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괜찮아요?”그러자 유남준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당연하지, 다희가 나 괜찮을 거라고 알려줬잖아.”박민정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
유석진의 입에서 갑자기 자기 둘째 아들의 이름이 거론되자 고영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또한 왜 두 아들 사이에 지금 저런 모순이 생긴 건지 알 수 없었다.유남준도 괜히 고영란이 중간에서 난처하게 된 것 같아 일부러 유남우를 빤히 바라보며 유석진에게 말했다.“이번 일은 사과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에요. 큰아빠가 아무리 남우랑 같이 벌인 일이라고 해도 이번만큼은 가만있지 않겠습니다.”별로 무겁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 위협감이 느껴졌다.순간 유석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이때, 그의 며느리인 최현아가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끼어들었다.“남준 씨, 그래도 한 가족인데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그러자 유성혁도 한마디 거들었다.“남준아, 우리도 잘못했단 걸 알고 있어. 아버지가 이제 연세도 많아서 상황판단이 안 될 때가 많아.”유석진도 사실 지금 자존심을 부려서 될 일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지금 네가 원하는 게 뭔데? 말해주면 내가 다 들어줄게.”사실 유남준은 이 말만을 기다렸다.“금방 인수한 시내 중심에 있는 그 건물을 저한테 넘겨주세요.”그 땅은 유명훈의 땅이고 죽기 전 유석진에게 물려준 유산인데 지금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값이 올랐다.유석진이 이 땅의 주인이 됨으로써 그곳의 상권을 손에 쥔 거나 다름없었는데 나중에 아무 건축물을 세워 올려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건 안되지!”역시나 유석진이 단번에 거절했다.그가 오랫동안 눈독 들였던 땅이었는데 유명훈이 죽어도 물려주지 않으려 해서 여태껏 애를 먹고 있었다가 이제 겨우 손에 들어온 땅이고 또 자기만의 계획이 따로 있었다.“그러면 조만간 IM 그룹의 변호사를 만나셔야겠네요.”유남준은 더 이상 그와 얘기하고 싶지 않았고 유석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집안 도우미에게 외쳤다.“모셔다드려!”그렇게 도우미들은 그들을 전부 밖으로 내보냈고 거실에는 유남준 가족들만이 남게 되었다.유지욱과 고영란은 눈앞의 두 아들에게 뭐라고 말했으면 좋을지
유남준이 잡혀갔다는 소식에 유석진 가족들은 조용히 자축하고 있었다.최현아도 너무 기뻐했지만 유독 유성혁만 우울한 얼굴로 그들에게 물었다.“아빠, 그래도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인데 꼭 이래야 할까요? 남준이가 잡혀가도 우리한테 아무런 이득도 없잖아요. 그리고 만약 다시 풀려나서 우리가 한 짓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요.”그러자 유석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답했다.“왜 쓸데없는 일을 벌써 걱정하고 그래? 간이 그리도 콩알만 해서 큰일 하겠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유성혁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다만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유지훈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저는 할아버지가 한 행동이 맞다고 봐요.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러자 유석진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껄껄거리며 웃었다.“하하, 역시 우리 손자가 똑똑하다니까. 네 말이 맞아. 사람은 무조건 자기가 일 순위여야 해. 절대 네 바보 같은 아빠를 닮아서는 안 된다.”그러자 유지훈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할아버지, 저도 알고 있어요.”그리고 유석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그들은 너무 일찍 기뻐했던 게 오후가 되자마자 유남준은 바로 풀려났다.그길로 옛 저택으로 오게 되었고 동시에 유석진네 식구들과 유남우를 전부 집으로 불러 모았다.이 시각, 유지욱도 마침 그곳에 있다가 눈앞의 상황에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남준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아빠, 제가 지금부터 저 사람들의 실체에 대해 다 밝히려고요.”그리고 서다희가 한 무더기의 자료와 증명서를 건네주자마자 그는 유석진네 식구들에게 뿌려줬다.종이들이 공중에서 흩날리다가 전부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유석진은 그중 한 장을 주워 읽어보고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코웃음을 치며 그에게 말했다.“남준아, 다 오해야.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하겠니?”그러자 유남준이 눈살을 찌푸리고 그에게 되물었다.“우리 회사에 심어둔 사람들을 제가 다 데려올까
유남준은 사실 진작에 유남우와 유석진 쪽에 사람들을 붙여서 그들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파악하고 있었지만 도대체 무얼 하려는지 궁금해서 일단 내버려두고 있었다.이튿날, IM 그룹으로 세무국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러자 서다희가 눈살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대표님을 감옥에 보내려고 아주 별짓을 다 하네요. 이런다고 그 사람들한테 득이 되는 게 뭔지 정말 모르겠어요.”특히 유남우는 왜 자기 친형을 왜 이렇게까지 괴롭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조사해 보니 역시나 회사 장부에 문제가 있었고 회사 자금을 불법으로 돌렸다는 증거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그러나 이 모든 게 다 그들이 일부러 만들어낸 가짜 장부들이었다.그렇다고 해도 유남준은 회사 법인으로서 조사를 받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연행되었다.가면서도 서다희에게 당부했다.“민정이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줘.”서다희는 한껏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굳이 말하지 않아도 뉴스에서 하루 종일 보도될 예정이라 아마 얼마 안 돼서 알게 될 것이다.역시나 박민정은 출근길에 그에 관한 뉴스 기사를 보게 되었다.“어떻게 이럴 수가?”이때, 고영란도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민정아, 남준이한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그러나 박민정도 아직 무슨 상황인지 모르고 있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저도 방금 기사를 봐서 잘 모르겠어요. 제가 지금 당장 다희 씨한테 전화해 볼 테니까 어머님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그래.”고영란은 착잡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유지욱과 이혼하겠다고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들한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서다희는 빠르게 박민정에게 전화해서 유남준이 시킨 대로 알려줬고 모든 일은 다 대비되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박민정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이때 서다희가 한마디 더 했다.“그런데 이 일은 절대 고영란 사모님한테 말하지 말아 주세요.”“알겠어요.”어쩌면 유남우 귀에도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