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미는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박민정의 용서를 얻고 싶었던 그녀는 심지어 자신의 자존심마저도 내려놓을 각오를 했다.이 메시지를 보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던 박민정은 결국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조하랑이 일전에 말한 적이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이렇게 된 건 정수미가 윤소현을 감싸다가 벌어진 일이었다고.정수미는 박민정에게서 오는 답장을 오랜 시간 기다렸지만 끝내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마음은 더 깊이 무너져 내렸고 가슴은 마치 수많은 바늘로 찔리는 듯 아팠다.“민정아, 내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정수미는 계속 메시지를 보내면 박민정이 완전히 자신을 무시할까 두려웠다. 그래서 더 보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휴대전화를 손에 꼭 쥔 그녀는 비서에게 돌아오라고 지시했다.“그리고 전에 청각 회복을 전문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전문가를 찾으라고 부탁했잖아? 그 일은 어떻게 됐어?”“찾고 있는 중입니다.” 비서는 답한 뒤 잠시 머뭇거리더니 솔직하게 덧붙였다.“대표님, 사실 유 대표도 분명 좋은 의사를 많이 구했을 겁니다. 작은 아가씨를 아끼는 분이잖아요.”“알아. 하지만 난 민정이를 위해 더 이상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정수미는 한숨을 내쉬었다.지금의 박민정은 부족한 게 없는 상태였다.“내 개인 변호사를 불러와 줘.”비서는 놀란 듯 멈칫했다. “왜 그러십니까?”“가서 불러와.”정수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이를 본 비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가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장 변호사가 오자 윤소현 쪽도 곧바로 소식을 들었다.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정수미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 중 한 명인 장 변호사가 이 시점에 찾아왔다는 건 단 한 가지 이유뿐이었다. 바로 유언장과 관련된 일이었다!정수미는 오래전 신체적으로 큰 상처를 입어 지금도 자주 병원 신세를 졌다. 그래서 일찍이 유언장을 작성해 두었다.정수미는 출산 능력을 잃은 이후 대부분의 재산을 윤소현에게 남기기로 했었다. 그런데 이제 변호사
“네, 알겠습니다.”장 변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이 정도의 편애는 변호사로서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다.심지어 정수미가 모든 재산을 박민정에게 물려준다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장 변호사는 정수미가 제시한 모든 내용을 확인한 후, 서류가방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대표님, 곧바로 초안을 작성하고 이틀 안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좋아, 수고해.”정수미는 그가 떠나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장 변호사가 로펌으로 돌아가던 길에 갑자기 한 차량이 그의 차를 막아섰다.그는 약간 의아해하며 차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차에서 누군가 내려왔는데 바로 윤소현이었다.윤소현은 손을 들어 그의 창문을 두드렸다.“장 변호사님, 정말 오랜만이에요.”장 변호사는 그녀를 보자마자 무슨 상황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피식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오랜만입니다, 큰 아가씨. 무슨 용건이라도 있으신지요?”그가 겉으로는 모르는 척하며 묻자 윤소현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무슨 일이겠어요? 오늘 제 어머니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는지 궁금해서요. 대표실에서 그렇게 오래 이야기하셨더라고요.”어릴 적부터 애지중지 자라서인지 그녀는 원체 겁이 없었다.장 변호사의 미소가 순간 굳어졌다. 윤소현이 이렇게 돌직구로 물어올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그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별일 아닙니다. 그냥 최근 회사의 몇몇 건에 대해 논의했을 뿐입니다.”정수미의 개인 변호사로서 그는 눈치가 제법 빨랐는데 무엇을 말해야 하고 무엇을 말해서는 안 되는지 명확히 알고 있었다.하지만 윤소현은 그의 거짓말을 눈치채고 곧장 물었다.“회사의 일만이 아니잖아요. 유언장에 대한 얘기도 있었죠? 어머니가 제 동생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주려고 하는 거 아닌가요?”장 변호사의 얼굴이 점점 더 굳어졌다.“큰 아가씨, 그런 일은 대표님께 직접 물어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저는 그저 고용된 변호사일 뿐이라 비밀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비밀이요?”윤소현은 냉소를 띠
요즘 유남준은 정신없이 바빴다.유석진이 여러 사람들과 손잡고 IM을 견제하려고 가짜 소문을 퍼뜨리는 등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유남준은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에서 보냈지만 아무리 늦어도 여전히 시간을 내어 박민정과 아이를 보러 집에 들렀다.박민정도 이곳 생활에 완전히 녹아들었고 더 이상 어색함을 느끼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상태는 여전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 돌아온 지 이렇게 오래되었지만 가끔 꿈을 꾸거나 떠오르는 몇 가지 단편적인 기억을 제외하고는 과거를 거의 떠올릴 수 없었다.“생각나지 않으면 억지로 생각하지 마. 앞으로의 날들을 잘 살다 보면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기억이 돌아올 거야.”설인하가 위로하며 말하자 진서연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보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몸 상태를 회복하는 거예요. 조급해하지 마세요.”박민정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의 말을 받아들였다.오늘 민수아를 제외한 이들은 주방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민수아는 서다희와 함께 결혼식을 준비하러 갔고 얼마 전 박민정과 다른 사람들에게 웨딩 사진 몇 장을 보내왔다.“정말 예쁘네요, 웨딩 사진.”진서연이 감탄하며 말하자 설인하도 맞장구쳤다.“네, 정말 예뻐요.”그러다 진서연은 설인하와 박민정을 보며 장난스럽게 물었다.“보스, 두 사람도 결혼할 때 웨딩 사진 찍었어요? 저 정말 보고 싶어요!”이 말에 두 사람 모두 순간 멈칫했고 잠시 후 박민정이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글쎄... 기억이 안 나네.”아마 찍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찍었다면 빌라 어딘가에 걸려 있을 게 분명했다.설인하도 고개를 저었다.“없어요. 그 사람하고는 찍고 싶지 않았거든요.”이제는 방성원의 이름조차 입에 올리기 싫어하는 그녀였다.진서연은 분위기가 미묘해진 걸 깨닫고 어쩔 줄 몰라 했다.“아... 미안해요. 몰랐어요...”“괜찮아요.”설인하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말했다.“다 지나간 일이에요. 지금은 정말 너무 행복하고 아주
두 사람이 업무적인 이야기를 나누다 정민기가 떠나려던 순간, 박민정은 문득 진서연이 떠올라 그를 불렀다.“아까 부엌에서 우리가 서연이랑 장난 삼아 농담을 좀 했거든요. 서연이는 조금 수줍음이 많아요.”박민정은 혹시 정민기가 진서연을 오해할까 봐 조심스럽게 말했다.정민기는 그녀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네.”그의 담담한 태도를 보며 박민정은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민기 씨, 저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서연이 좋아해요?”박민정은 진서연을 아끼는 마음에 물은 것이었다. 진서연은 순수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런 진서연이 괜히 감정적으로 상처받지 않았으면 했으니까.정민기는 매번 말수가 적고 무뚝뚝했기에 그가 정말 진서연을 좋아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긴 침묵 끝에 정민기가 답을 내놓았다.“전 서연 씨를 항상 친구로 여겨왔어요.”“친구요?”박민정의 입가가 약간 떨렸다.“그럼 민기 씨 말은... 서연이를 남녀 간의 그런 의미로 좋아하는 건 아니라는 거죠?”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진서연에게 빨리 알려줘야 했다. 그녀가 너무 깊이 빠지기 전에.그런데 정민기가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그냥 친구는 아니에요.”“...”박민정은 어이없어졌다.이 남자도 참 부끄러움이 많았다.“진짜 사람 놀래키는 재주가 대단하네여. 나는 민기 씨가 서연이한테 아무런 감정도 없는 줄 알았잖아요.”박민정이 웃으며 말했다.“근데 잘됐네요. 민기 씨도 마음이 있고 서연도 마음이 있으면 이왕 이렇게 된 거 더 적극적으로 나서 봐요. 여자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리지만 말고 빨리 마음을 터놓으라고요.”정민기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그의 대답을 들은 박민정은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흥얼거리며 돌아갔다.집 안에서는 진서연이 초조한 모습으로 서성이고 있었다.그녀는 혹시나 자신의 말 때문에 정민기가 정말로 자신을 친구로만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박민정이 돌아오자 진서연은 재빨리 그녀에
“인하 씨도 칠순 노인 아니잖아요. 서연이보다 고작 한두 살 많을 뿐인데요.”박민정이 웃으며 말하자 설인하는 박민정의 어깨를 툭툭 치며 대꾸했다.“그래도 우리는 애 있는 사람이잖아요.”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설인하는 바로 전화를 받으러 가더니 화면을 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잠시 후, 그녀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대체 무슨 일이길래 전화를 한 거야? 내가 영상 통화 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어?”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누구인지 뻔했다.방성원이었다.방성원은 설인하의 화난 목소리를 들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영상 통화를 안 하면 내가 어떻게 은정이를 보겠어?”‘은정이’라는 말이 나오자 설인하의 태도가 조금 부드러워졌다.“어제 봤잖아.”“어제 봤다고 오늘은 못 봐?”방성원이 반문하니 설인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성원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결국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휴대폰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방 안에서는 방은정이 보모와 함께 놀고 있었다. 휴대폰에 비친 방성원의 얼굴을 본 방은정은 환하게 웃으며 외쳤다.“아빠!”“은정아, 밥은 먹었어?”방성원은 딸 앞에서 목소리가 한없이 부드러워졌다.방은정은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대답했다.“먹었어요! 아빠도 밥 먹었어요?”“응, 아빠도 먹었어. 아빠는 지금 은정이를 꼭 안아주고 싶네.”방성원이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하니 방은정은 영상 속의 아빠에게 뽀뽀를 보냈다.“뽀뽀!”부녀의 다정한 모습을 지켜보던 설인하는 살짝 질투가 났다. 하지만 곧 아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아빠, 나 아빠 보고 싶어요.”“그럼 아빠가 당장 은정이 보러 갈게.”방성원이 약속하자 방은정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전화가 끊겼는데도 휴대폰을 놓지 않은 아이를 보고 설인하는 다가가 몸을 낮추며 말했다.“은정아, 휴대폰 엄마한테 줘야지.”“싫어요! 저 아빠랑 있을 거예요!”방은정의 눈가가 붉어지기 시작한 것을
박민정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성원 씨가 매일 오니 애가 아빠랑 더 친한 건 당연하죠. 아빠가 옆에 있길 바라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고요.”“알아요. 그런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계속 이렇게 놔둘 순 없잖아요.”설인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아이가 좀 더 크면 괜찮아질 거예요.”박민정의 위로는 진심이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설인하가 왜 방성원과 이혼하려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네, 저 씻고 올게요.”설인하는 박민정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알기에 더 이상 그녀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세면을 마친 뒤 방으로 돌아온 설인하는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잠든 방성원과 방은정을 보았다.그녀는 조심스레 다가가 방성원을 살짝 건드렸다.잠시 후,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왜?”“은정이가 자고 있으니 이제 돌아가.”설인하가 단호하고 냉정한 어조로 말하자 방성원의 입꼬리가 살짝 떨렸다.“정말 매정하네, 설인하.”설인하는 전혀 기죽지 않고 맞받아쳤다.“우린 이미 별거 중이잖아. 널 붙잡을 이유가 없지.”방성원은 말문이 막혔다. 잠시 침묵하더니 그는 냉소적으로 말했다.“그래?”그는 침대에서 일어났지만 문으로 향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설인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설인하는 당황했다.“뭐 하는 거야? 당장 나가!”방성원의 눈가가 붉어졌다.“설인하, 내가 얼마나 더 설명해야 믿어줄 거야? 방씨 집안 일은 나랑 아무 상관없다고 몇 번을 말해야 돼? 왜 날 믿지 못하는 거야? 대체 왜?”그는 그녀의 어깨를 두 손으로 꽉 붙잡고 애타게 말했다.“내가 어떻게 해야 널 설득할 수 있겠어? 심장을 꺼내서 보여줘?”설인하는 그의 손을 떼어내며 단호히 외쳤다.“그럴듯한 말로 불쌍한 척하지 마. 아빠가 직접 말했어. 네가 우리 집안을 망하게 만든 장본인이라고. 너 전에 뭐라고 말했는지 잊었어?”설인하의 목소리가 격앙되었다.“장래의 사위로서 장인어른의 재산을 물려받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했잖아!”
이 말에 박민정은 바로 상황을 파악했다.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고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라 마치 끓는 물에 덴 듯이 화끈거렸다.“하지만 인하 씨도 그 사람과 따로 산 지 한참 됐잖아요. 설마 그러겠어요?”“한때 연인이었고 부부였던 사이인데 불가능하다고 단정 짓진 마.”유남준은 그렇게 말하며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박민정은 그가 옷깃을 푸는 것을 보자 아까 그 말이 떠올랐고 순간 겁이 덜컥 났다.“당신 옷은 왜 벗어요?”유남준은 외투를 벗어놓으며 그녀의 반응을 보고 장난칠까 하다가 오해할까 봐 더 놀리지 않기로 했다.“샤워하려고. 같이 할래?”“난 됐어요! 아까 씻었거든요.”박민정은 그렇게 말하고는 방금 자신이 한 말을 곱씹으며 속으로 자책했다. 차라리 스스로를 한 대 치고 싶을 지경이었다.유남준이 욕실로 들어가고 그녀도 곧장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요즘 들어 유남준은 매일 차가운 물로 샤워를 했다.박민정을 놀리는 걸로 그럭저럭 하루를 버티고 있긴 했지만 사실은 그조차도 겨우 참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도 그녀 덕분에 웃을 일이 많아져서 그것만으로도 견딜 만했다.한편, 설인하와 방성원의 대치 상황은 결국 설인하의 승리로 끝났다.그녀는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방성원의 몸 이곳저곳을 할퀴었다. 그리고는 경계 어린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마치 작은 고양이처럼 이를 악물었다.“더 이상 다가오지 마! 안 그러면 정말 네 앞에서 죽어버릴 거야!”애초에 그녀는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라고 말하려 했지만 방성원은 아예 아픔을 느끼지도 않는 듯했다. 결국, 위협의 방식이라도 바꿔야 했다.방성원은 그녀의 눈빛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더는 다가가지 않았다.“내일 다시 너랑 은정이를 보러 올게.”“오지 마!”설인하가 단호하게 거절하자 방성원이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오고 싶으면 오는 거야.”그는 그렇게 말하고 성큼성큼 방을 나섰다.설인하는 그제야 깊게 숨을 내쉬었다. 곧바로 그녀는 욕실로 들어가 씻고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한밤중이 되도록 뒤척이기
김인우는 문 구멍을 통해 바깥을 살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할아버지의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잠이나 푹 자라. 뭐 하고 있는 거냐?”“할아버지, 안 주무세요?”“이 늙은이는 여섯 시간만 자면 충분해. 밤에도 자고 낮에도 자고 아무 때나 잘 수 있어.”김훈의 목소리는 힘이 넘쳤는데 병에 걸렸다는 사람 같지가 않았다.김인우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됐어, 한숨 쉬지 말고 하랑이랑 같이 침대에서 자라. 바닥에서 자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이 말에 조하랑과 김인우 둘 다 당황했다.조하랑이 먼저 입을 열었다.“할아버지, 또 이러시면 저 할아버지 안 볼 거예요.”김인우도 맞장구쳤다.“맞아요, 우리 둘 다 할아버지랑 안 놀아줄 거예요.”정말이지, 나이가 들면 철든다더니, 이 할아버지는 정반대였다. 이렇게 사람을 들들 볶다니.김훈은 이 말을 듣고는 일부러 슬픈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아휴, 늙으니 손자한테까지 미움받네... 참, 세월이 야속하다...”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는데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그 쓸쓸한 목소리를 듣고 마음이 편치 않았던 조하랑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할아버지를 따라가 위로해드리려 했다.하지만 김인우가 그녀를 막아서며 말했다.“또 마음 약해지지 마요. 우리 할아버지 성격 몰라요? 다 일부러 저러는 거예요.”최근 김인우는 할아버지가 말한 병들이 모두 꾸며낸 거짓말이었다는 걸 알아냈다.조하랑은 발걸음을 멈췄다.“생각해보니 맞네요. 할아버지는 진짜 연기 대장이세요.”그녀는 다시 침대로 돌아왔지만 바닥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김인우를 보고 마음이 쓰였다.“인우 씨도 침대에서 자요. 우리 각자 한쪽씩 쓰면 되잖아요.”그도 그럴 것이, 방 안 난방이 끊겨 지금은 초봄이라 꽤 쌀쌀했다. 김인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괜찮긴 한데, 또 나 때리는 거 아니에요?”예전에 김인우가 잠결에 조하랑을 안았고 그녀가 그걸 발견고는 제대로 혼내준 적이 있었다.조하랑은
“엄마, 아빠랑 이혼 잘하셨어요.”유남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유남준 앞을 지나치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내가 능력이 없어서 이번에도 졌네.”유남준은 그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째려봤다.유남우는 사실 그가 어떻게 반격할지 걱정되기보다 이번에도 졌다는 게 더 분통했다.밖으로 나온 뒤 그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라도 걸고 싶었지만 딱히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연락처를 훑어보다가 홍주영에서 멈칫하더니 결국에는 통화버튼을 누르지도 못한 채 핸드폰을 다시 꺼야 했다.실내 안.거실은 유난히 조용했고 유지욱은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남우가 왜 저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어. 예전에는 말도 잘 듣고 착한 아이였는데.”고영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그가 말하는 ‘예전’이 정확하게 언제인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고영란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모습에 유지욱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아니에요.”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시 말을 이었다.“이번 달은 될수록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요. 그리고 이혼 숙려기간이 끝나는 대로 다시 가서 마무리 지으면 될 것 같아요.”고영란은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이혼하고 싶은데 지금 이혼하려면 한 달씩이나 기다려야 했다.그리고 위층으로 올라가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리고 이 한 달 동안에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이 뭔지 좀 생각해 보고요.”말을 마친 뒤 유지욱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한편.박씨 가문의 옛 저택.박민정은 유남준이 너무 걱정되어 한걸음에 집으로 돌아왔다.비록 서다희가 괜찮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이때, 밖에서 들리는 차 소리에 박민정이 다급히 차창 밖을 내다보니 유남준의 차도 마침 도착해 있었다.박민정은 빠르게 차에서 내린 뒤 유남준에게 달려가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괜찮아요?”그러자 유남준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당연하지, 다희가 나 괜찮을 거라고 알려줬잖아.”박민정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
유석진의 입에서 갑자기 자기 둘째 아들의 이름이 거론되자 고영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또한 왜 두 아들 사이에 지금 저런 모순이 생긴 건지 알 수 없었다.유남준도 괜히 고영란이 중간에서 난처하게 된 것 같아 일부러 유남우를 빤히 바라보며 유석진에게 말했다.“이번 일은 사과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에요. 큰아빠가 아무리 남우랑 같이 벌인 일이라고 해도 이번만큼은 가만있지 않겠습니다.”별로 무겁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 위협감이 느껴졌다.순간 유석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이때, 그의 며느리인 최현아가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끼어들었다.“남준 씨, 그래도 한 가족인데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그러자 유성혁도 한마디 거들었다.“남준아, 우리도 잘못했단 걸 알고 있어. 아버지가 이제 연세도 많아서 상황판단이 안 될 때가 많아.”유석진도 사실 지금 자존심을 부려서 될 일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지금 네가 원하는 게 뭔데? 말해주면 내가 다 들어줄게.”사실 유남준은 이 말만을 기다렸다.“금방 인수한 시내 중심에 있는 그 건물을 저한테 넘겨주세요.”그 땅은 유명훈의 땅이고 죽기 전 유석진에게 물려준 유산인데 지금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값이 올랐다.유석진이 이 땅의 주인이 됨으로써 그곳의 상권을 손에 쥔 거나 다름없었는데 나중에 아무 건축물을 세워 올려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건 안되지!”역시나 유석진이 단번에 거절했다.그가 오랫동안 눈독 들였던 땅이었는데 유명훈이 죽어도 물려주지 않으려 해서 여태껏 애를 먹고 있었다가 이제 겨우 손에 들어온 땅이고 또 자기만의 계획이 따로 있었다.“그러면 조만간 IM 그룹의 변호사를 만나셔야겠네요.”유남준은 더 이상 그와 얘기하고 싶지 않았고 유석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집안 도우미에게 외쳤다.“모셔다드려!”그렇게 도우미들은 그들을 전부 밖으로 내보냈고 거실에는 유남준 가족들만이 남게 되었다.유지욱과 고영란은 눈앞의 두 아들에게 뭐라고 말했으면 좋을지
유남준이 잡혀갔다는 소식에 유석진 가족들은 조용히 자축하고 있었다.최현아도 너무 기뻐했지만 유독 유성혁만 우울한 얼굴로 그들에게 물었다.“아빠, 그래도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인데 꼭 이래야 할까요? 남준이가 잡혀가도 우리한테 아무런 이득도 없잖아요. 그리고 만약 다시 풀려나서 우리가 한 짓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요.”그러자 유석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답했다.“왜 쓸데없는 일을 벌써 걱정하고 그래? 간이 그리도 콩알만 해서 큰일 하겠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유성혁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다만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유지훈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저는 할아버지가 한 행동이 맞다고 봐요.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러자 유석진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껄껄거리며 웃었다.“하하, 역시 우리 손자가 똑똑하다니까. 네 말이 맞아. 사람은 무조건 자기가 일 순위여야 해. 절대 네 바보 같은 아빠를 닮아서는 안 된다.”그러자 유지훈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할아버지, 저도 알고 있어요.”그리고 유석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그들은 너무 일찍 기뻐했던 게 오후가 되자마자 유남준은 바로 풀려났다.그길로 옛 저택으로 오게 되었고 동시에 유석진네 식구들과 유남우를 전부 집으로 불러 모았다.이 시각, 유지욱도 마침 그곳에 있다가 눈앞의 상황에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남준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아빠, 제가 지금부터 저 사람들의 실체에 대해 다 밝히려고요.”그리고 서다희가 한 무더기의 자료와 증명서를 건네주자마자 그는 유석진네 식구들에게 뿌려줬다.종이들이 공중에서 흩날리다가 전부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유석진은 그중 한 장을 주워 읽어보고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코웃음을 치며 그에게 말했다.“남준아, 다 오해야.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하겠니?”그러자 유남준이 눈살을 찌푸리고 그에게 되물었다.“우리 회사에 심어둔 사람들을 제가 다 데려올까
유남준은 사실 진작에 유남우와 유석진 쪽에 사람들을 붙여서 그들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파악하고 있었지만 도대체 무얼 하려는지 궁금해서 일단 내버려두고 있었다.이튿날, IM 그룹으로 세무국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러자 서다희가 눈살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대표님을 감옥에 보내려고 아주 별짓을 다 하네요. 이런다고 그 사람들한테 득이 되는 게 뭔지 정말 모르겠어요.”특히 유남우는 왜 자기 친형을 왜 이렇게까지 괴롭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조사해 보니 역시나 회사 장부에 문제가 있었고 회사 자금을 불법으로 돌렸다는 증거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그러나 이 모든 게 다 그들이 일부러 만들어낸 가짜 장부들이었다.그렇다고 해도 유남준은 회사 법인으로서 조사를 받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연행되었다.가면서도 서다희에게 당부했다.“민정이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줘.”서다희는 한껏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굳이 말하지 않아도 뉴스에서 하루 종일 보도될 예정이라 아마 얼마 안 돼서 알게 될 것이다.역시나 박민정은 출근길에 그에 관한 뉴스 기사를 보게 되었다.“어떻게 이럴 수가?”이때, 고영란도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민정아, 남준이한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그러나 박민정도 아직 무슨 상황인지 모르고 있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저도 방금 기사를 봐서 잘 모르겠어요. 제가 지금 당장 다희 씨한테 전화해 볼 테니까 어머님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그래.”고영란은 착잡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유지욱과 이혼하겠다고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들한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서다희는 빠르게 박민정에게 전화해서 유남준이 시킨 대로 알려줬고 모든 일은 다 대비되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박민정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이때 서다희가 한마디 더 했다.“그런데 이 일은 절대 고영란 사모님한테 말하지 말아 주세요.”“알겠어요.”어쩌면 유남우 귀에도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