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소현은 꽁꽁 싸맨 채 뽀얗고 말간 얼굴만 드러내놓고 박민정이 걸어 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봤다.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 특히나 정성스레 그려진 듯한 눈매와 눈동자를 가진 박민정은 그녀가 봐도 미인임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많이 챙겨입었어도 볼륨감 있는 몸매가 감춰지지 않았다.자신도 뒤처지지는 않는다는 걸 물론 알고 있지만 뭔지 모르게 박민정보다 조금 부족한 것만 같았다.“그딴 걸 보낸다고 내가 졸 줄 알았어? 그런 건 나한테 아무런 소용 없어. 그러니까 힘 그만 빼.”이럴 땐 기선 제압이 중요하다고 윤소현은 생각했다.박민정은 속으로 콧방귀를 꼈다. 두려울 거 없는데 왜 일찌감치 여기 와서 앉아 있는건지. 하나 굳이 까발리지 않고 그녀 앞에 친자확인 서류를 내밀었다.의심스러운 눈길로 그 서류를 열어보던 윤소현의 눈동자에는 알지 못할 빛이 스쳤다.“나 뒷조사하고 있었어?”친자확인서를 들고 있는 윤소현의 첫마디가 친자관계 여부에 관한 질문이 아니라 뒷조사를 한 것에 대한 비난이자 박민정은 순식간에 멍해졌다.“한수민 씨의 딸이라는 걸 알고 있었네요.”그녀는 물음이 아니라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그러자 이 사실을 정수미한테 알릴까 봐 두려운 윤소현은 대뜸 해명했다.“나도 어제 금방 들어서 알게 된 거야, 네가 내 이부동생이라는 거.”윤소현은 손을 뻗어 박민정의 손을 꼭 잡았다.“진작에 알았다면 널 해치려고 안 했어. 우린 자매잖아. 난 박민호랑은 달라.”하지만 박민정은 손을 빼내며 냉담한 눈매로 그녀를 쳐다봤다. 참말이지, 윤소현의 연기 실력은 이지원의 발밑도 못 따라간다. 이지원한테서 하도 많이 당해, 이 정도는 눈을 감고도 진심인지 아닌지 변별해 낼 수 있었다.“오늘 여기 가족 상봉하러 온 게 아니에요. 경고하는 데, 이런 일이 또 있는 날엔 저도 가만히 안 있어요.”그 말에 윤소현은 얼굴이 굳어버렸다.박민정은 일어서며 또 한마디 남겼다.“윤씨 집안 아가씨가 무슨 벼슬이라도 되는 줄 아나 본데, 그 집안 재산은 모두
거실 안에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예전의 집안에서 부리던 가정부 따위가 감히 자신한테 이런 말을 할 줄 몰랐던 한수민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은정숙을 때리려고 손을 들었다. 그러자 간병인이 앞으로 나서서 말렸다.“이보세요, 사모님. 저희 집 어르신이 몸도 안 좋으신데 이러시면 곤란해요. 제가 경찰부를 수도 있어요.”한수민은 손을 허공에 든 채로 간병인의 말을 듣더니 입가에 냉소를 흘렸다.“어르신은 무슨. 저거 그냥 데려가는 남자 하나 없는 궁상맞은 여편네일 뿐이야. 운 좋게 내 딸을 좀 돌봐줬다고 지금 이런 호사를 누리고 있는 거고. 내 딸이랑 사위가 능력이 있어서 집에 모시고 있으니까, 진짜로 무슨 귀부인이나 되는 줄 아나 보지?”간병인은 조금 의아했다. 줄곧 은정숙이 박민정의 친척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고, 심지어 눈앞에 있는 이 사모님이 박민정의 친어머니였다.자세히 보니 확실히 좀 비슷하게 생겼긴 하였지만, 성격과 인품이 어찌 이리 다르단 말인가. 말투 또한 신랄하고 각박하기만 하다.하지만 고용주의 친어머니라는 생각에 뭐라고 할 수도 없어, 한쪽에 물러서서 일단 지켜보기로 하였다.은정숙은 한수민의 비꼬는 말에 대꾸했다.“난 아무리 가난해도 남자한테 의지 안 하고 제힘으로 꿋꿋이 잘 살아왔어요. 누구처럼 자식의 피까지 빨아먹는 짓은 절대 안 해요.”박민정의 성질머리가 누구를 닮았는지 한수민은 이제야 깨달았다. 모두 이 은정숙이란 여자한테서 배운 것이었다.화가 치밀어 오른 그녀는 다시 손을 들어 간병인이 채 반응하기도 전에 은정숙의 뺨을세게 내리쳐 바닥에 쓰러뜨렸다.“콜록콜록...”워낙에 몸이 안 좋은 은정숙은 바닥에 쓰러지자 격렬하게 기침 하기 시작했다.간병인은 황급히 그녀를 부축하며 물었다.“어르신, 괜찮아요?”연거푸 나오는 기침 때문에 은정숙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그 모습을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며 한수민은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은정숙이 점점 힘들어하며 숨이 넘어갈 것처럼 보이자, 박민정한테 전화를 걸어 한
“그래요, 누굴 만나실 건데요? 저랑 같이 가요.”박민정은 즉시 대답했다. 지금은 은정숙이 자신의 시야에서 잠시도 떨어지게 하면 안 될 것 같았다.“그냥 옆 마을 영천댁에 갔다 오려는 거야. 그 집 며느리가 손자를 낳았다는데 내가 한번 가보려고. 넌 집에서 곡이나 써, 나랑 같이 갈 거 없어.”은정숙이 부드럽게 말하자 박민정은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의사가 지금 푹 쉬셔야 한다고 했단 말이에요.”“바보야, 난 정말 괜찮다니까? 전에 그 전문가가 사오 년 사는 건 문제 없다고 했던 거 기억 안 나?”박민정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은정숙은 또 거짓말을 했다.“너 영천댁 기억 안 나니? 그 여편네는 다른 사람이 있는 걸 싫어해. 평생 친구라고는 나밖에 없어. 네가 가면 우린 얘기도 편하게 나누지 못해.”박민정은 은정숙이 요즘 종일 집에만 있다 보니 친구도 만나지 못하고 적적하셨을 거라 생각되어, 조금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그럼 그 댁까지 제가 모셔다드릴게요.”“그래.”약속을 한 후에야 박민정은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집에 돌아온 윤우는 은정숙이 다쳤다는 걸 알고 조용히 간병인한테 자초지종을 물었다.쓰레기 외할머니가 집에 왔을 뿐만 아니라 은정숙을 때려 다치게까지 했다는 걸 듣자 바로 예찬이한테 전화를 걸었다.“박예찬! 그 나쁜 여자, 아직도 혼을 안 낸 거야?”나쁜 여자?예찬이는 얼떨떨해서 물었다.“누굴 말하는 거야?”“그 늑대 외할멈 있잖아!”예찬이는 이제야 그 나쁜 여자가 누굴 가리키는지 알았다.늑대 외할멈이라는 단어는 처음 듣지만 또 왠지 잘 어울리는 호칭이었다.“한수민 계좌에는 돈이 없어. 돈은 다 그 여자 남편 윤석후가 갖고 있어. 그래서 요즘에 밤마다 윤석후 회사 시스템을 뚫고 있어.”그 말을 들은 윤우는 엄지를 내보이며 예찬이를 칭찬했다.“형, 진짜 짱이야!”예찬이는 어이가 없어 속으로 구시렁 거렸다.‘쓸모없을 땐 박예찬, 쓸모가 생기면 형이구나?’“됐어, 별일
목에 닿은 차가운 금속의 촉감이 느껴지자 한수민은 동공이 움츠러들며 손에 쥔 잔을 바닥에 떨어뜨렸다.“뭐... 뭐 하는 거야?!”은정숙은 손에 든 칼을 꽉 쥐고는 더 가까이 들이댔다.“민정이한테 돈 돌려줘요!”“돈... 돈은 다 우리 남편한테 줬는데 무슨 돈을 달라는 거야. 얼른 칼 내려놔, 아니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한수민은 애써 침착하게 대처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녀의 협박에 은정숙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가만두지 않으면 어쩔 건데? 평생 손에 핸드백보다 더 무거운 걸 들어본 적도 없는 사모님께서 무슨 힘으로 날 가만두지 않겠다는 건지 참 궁금하네요.”한수민은 목이 조금 아파지는 것이 느껴졌다. 칼끝에 베여 피가 나는 것만 같았다.“진정해. 원하는 거 돈이잖아. 내가 줄게.”죽음 앞에서는 역시 잘난 인간은 따로 없었다.한수민이 죽는 걸 두려워할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은정숙이 오늘 죽이려는 건 그녀가 아니었다.“엄마, 문은 왜 닫고 있어요? 나 엄마한테 볼일 있으니까 문 열어봐요.”이때 방문 밖에서 갑자기 박민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러자 은정숙은 일부러 당황한 듯 조급한 말투로 말했다.“당신 죽여버릴 거야. 민정이 대신해 복수 할 거야!”잔뜩 겁이 난 한수민은 황급히 그녀의 손에 든 칼을 빼앗으려고 잡았다. 바로 그때, 은정숙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 칼끝을 자신한테 겨눠 힘껏 찔렀다.“아!”순간 한수민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새빨갛게 물든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이렇듯 피가 흥건했지만 그녀는 왠지 전혀 아프지 않았다. 다시 보니 은정숙이 그녀의 손을 잡고 칼로 자신의 배를 찌른 것이었다.“뭐... 뭐야!”충격으로 말을 제대로 잇지도 못한 채 서둘러 칼은 쥔 손을 놓자 은정숙이 쿵, 하며 바닥에 쓰러져서는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당신네처럼 돈 있고 힘 있는 사람을 내가 상대할 수는 없겠죠. 하지만 한가지는 할 수 있어요. 내 목숨으로... 당신을 평생... 불안하
”말하지 마요, 아줌마. 의사가 치료할 수 있다고 했으니까 힘을 아껴요.”목소리가 벌써 잠겨버린 박민정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로 얼굴이 범벅이 되었다. “응...”은정숙은 억지로 웃음을 내보이며 그녀 얼굴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지만 도저히 손을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미세한 움직임으로부터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린 박민정은 그녀의 손을 자신의 볼에 갖다 대었다.“아줌마...”“그래... 민정아... 울지 마, 울지 마...”너무 울어서 눈두덩이가 벌겋게 부어오른 박민정은 흐느끼며 대답했다.“네, 저 안 울어요. 아줌마는 괜찮아질 거예요. 꼭 괜찮을 거예요.”은정숙의 아직 남아있는 기운은 분명 회광반조로 인한 것이었다. 그녀의 눈길은 천천히 창밖으로 향해 하얀 바깥세상을 눈동자에 담았다.“이제... 곧 새해구나... 설날이야...”설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박민정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나지막이 말했다.“네, 맞아요.”“우리 집에 가자꾸나.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아.”“네, 그래요. 우리 집에 가요.”박민정은 두 팔을 뻗어 은정숙을 안았다. 마르다 못해 뼈밖에 없는 은정숙은 별로 힘이 없는 박민정도 거뜬히 안아 들 수가 있었다.은정숙을 안고 긴 복도를 따라 밖으로 나가면서, 그녀가 갑자기 떠나갈까 봐 박민정은그녀한테 계속하여 말을 걸었다.“지금 바로 집에 갈 거예요. 설이 되면 떡국도 먹고 만두도 빚어요, 우리. 설이니까 물론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겠죠? 윤우랑 예찬이가 세배도 하고, 세뱃돈도 주셔야죠.”은정숙은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멀게 느껴지고 눈앞도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박민정도 품 안에 있는 사람의 숨소리가 점점 가벼워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엄마. 엄마... 가면 안 돼요. 제발... 저랑 계속 같이 있기로 약속했잖아요...”박민정은 진작에 은정숙을 자신의 엄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친엄마보다 더 친한 엄마였다.그녀가 엄마라고 부르는 걸 들은 은정숙은 마지막 힘을 다 해 두 글자를 뱉었다.“그
시간은 소리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다 박민정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남준 씨, 곧 설날이에요.”“응, 맞아.”“이제 아줌마는 여기 없네요.”박민정은 유남준의 옷을 꽉 붙들며 슬픔을 참아보려 했다. 유남준은 위로의 말 대신 그녀를 꼭 껴안으며 이마에 다정한 뽀뽀를 남겼다.그 순간, 이미 흘릴 만큼 흘려 말라버린 줄만 알았던 눈가에 또 눈물이 차올라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다 제 탓이에요. 나 때문이 아니면 한수민을 찾아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되지도 않았을 건데...”“아주머니가 너한테 남긴 편지가 있어. 영천댁이 아주머니의 심부름을 받고 그 편지를 가져왔어.”그녀의 자책을 끊어내며 유남준이 말했다. 박민정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얼굴을 들고 그를 보며 물었다.“어디 있어요, 편지?”유남준은 몸을 일으켜 협탁 서랍을 열고 그 안에서 편지를 꺼내 박민정에게 건넸다.박민정이 서둘러 그 편지를 열어 보니 은정숙이 쓴 몇 구절 글씨가 눈 안에 들어왔다.“민정아. 아마 네가 이 편지를 보게 됐을 때는 난 이미 세상에 없을 거야. 너무 슬퍼하지 마. 이건 다 엄마의 팔자고 운명이야.”“엄마가 너한테 했던 얘기 기억하니? 사람이 늙으면 결국 다 죽는 거야. 그래서 엄마는 두렵지 않아. 그저 죽기 전에 널 위해서 뭔가를 해주고 싶을 뿐이야.”“의사 말로는 엄마가 이제 살날이 며칠 안 남았대. 나도 한수민을 어찌 못할 거란 걸 잘 알아. 어리석은 방법이긴 하지만, 이렇게라도 그 여자를 감옥에 보내면 다신 널 괴롭히지 못할 거야.”“끝으로, 너의 엄마라고 자칭한 걸 탓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난 정말로 널 내 친딸로 생각해 왔어. 이번 한 번만 염치 불문하고 싶구나. 다음 생엔 우리 꼭 친 모녀로 태어나자. 나랑 약속할래?”편지를 읽고 또 읽으면서 박민정은 마음이 찢겨나가는 듯이 아팠다.“그런 거였구나...”그녀는 은정숙이 무슨 마음으로 이 편지를 남겼는지 알 것만 같았다. 사건의 진실을 알려주려는 것이었다. 만약 그녀가 한수민이
유남우는 그녀한테 쌓인 눈을 털어주려고 하였지만 박민정은 무의식에 몸을 피했다.“도련님이 여긴 어쩐 일이에요?”도련님이라는 호칭에 유남우는 손을 뻗은 채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가 뒤늦게야 거둬들였다.“뉴스를 보고 아주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걸 알게 됐어. 전에 나한테 아주머니는 네 친어머니만큼 중요하다고 했었잖아. 그런 분이 돌아가셨으니 네가 많이 슬퍼할 거 같아, 걱정돼서 보러 왔어.”말을 마치고 유남우는 은정숙의 묘비를 향해 절을 했다.그가 어린 시절의 일을 아직도 그렇게 똑똑히 기억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박민정은 입꼬리를 어색하게 끌어당기며 말했다.“고마워요... 괜찮아요, 전.”추위로 얼굴이 퍼레진 박민정은 눈시울이 빨갛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 앞에서는 강한 척, 괜찮은 척 안 해도 돼. 내가 얘기했잖아, 난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거라고.”박민정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그한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그렇게 오랜 침묵이 흐른 뒤, 그녀는 끝내 입을 열었다.“전 이제 돌아가야겠어요.”“데려다줄게.”그가 데려다주겠다는 말에 박민정은 바로 거절했다.“아뇨, 차를 근처에 주차했어요.”“너 지금 이 상태로 어떻게 운전하려고 그래?”유남우의 책망하는 말투에는 관심이 듬뿍 담겨있었다.“내 차로 가.”더는 거절하기가 어려운 박민정은 그를 따라 차로 향했다.유남우는 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며 여느 때와 같은 자상한 모습을 보였다.“눈 좀 털어. 아니면 이따 감기 걸릴 수도 있어.”“고마워요.”수건을 받아 몸에 있는 눈을 털고 나서 차에 올라타자 유남우가 운전석에서 히터를 켜고 그녀가 어릴 때 가장 좋아하던 노래를 틀었다.순간 박민정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이 노래를 여기서 다시 듣게 될 줄 몰랐네요. 저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해외에서 치료받을 때 자주 들었었어.”유남우의 말을 듣고 박민정은 저도 모르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동안 해외에서 잘
은정숙의 묘 앞에서 절을 올리고 난 조하랑과 예찬이는 박민정과 함께 돌아가기로 했다. 유남우의 차가 하도 커서 네 명이 탔는데도 전혀 비좁지 않았다.고급 차라면 조하랑도 꽤 많이 타봤다. 특히 최근에는 예찬이 덕분에 고급 차 구경을 더 많이 해보긴 하였지만, 차 내에 각종 의료 장비와 의사까지 갖춰져 있는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차에서 바로 치료하면 될 것 같았다.세 사람을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 박민정과 작별하고 난 뒤 유남우는 기사에게 돌아가자고 했다.그의 차가 떠나는 걸 보며 조하랑은 박민정한테 물었다.“남준 씨는 어디 갔어?”“내가 먼저 윤우랑 같이 돌아가라고 했어.”“아아...”조하랑은 또 박민정의 옷이 일부 젖어있는 것을 보고 한숨을 쉬며 유남준을 나무랐다.“그런다고 그냥 돌아가? 곁에서 널 지키지도 않고. 우산이라도 씌워주든가 해야지.”절친으로서 조하랑은 박민정이 그녀한테 잘 해주는 좋은 남자를 만났으면 했다.“내가 혼자 조용히 있고 싶어서 그런 거야. 들어가자, 춥다. 너랑 예찬이 감기 걸리겠어.”“어, 그래.”조하랑은 예찬이를 데리고 박민정의 뒤를 따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밖이 추워서 그런지 집안은 유난히 따뜻했다.유남준과 윤우는 이미 요리사한테 부탁하여 박민정이 평소 즐겨 먹는 음식으로 한 상 푸짐하게 차려 놓았다. 윤우는 조하랑과 예찬이를 보고 좀 의아해했다.“이모, 형. 여긴 어떻게 왔어?”“좀 늦었는데 같이 식사해도 괜찮겠지?”조하랑이 오자 집안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물론이지.”조하랑은 두 아이와 함께 주방에서 일을 거들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도 왠지 텅 빈 것 같은 느낌에 박민정은 별로 밥맛이 없었다.유남우가 그녀의 곁으로 걸어와 물었다.“괜찮아?”그는 유남우처럼 따뜻한 말로 남을 위로해 주는 말재주가 없었다.“네.”박민정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배고플 텐데 얼른 식사부터 해요. 난 배가 안 고파요.”“안 고파도 먹어야 해.”은정숙한테 일이 생기고 나서부터
“엄마, 아빠랑 이혼 잘하셨어요.”유남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유남준 앞을 지나치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내가 능력이 없어서 이번에도 졌네.”유남준은 그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째려봤다.유남우는 사실 그가 어떻게 반격할지 걱정되기보다 이번에도 졌다는 게 더 분통했다.밖으로 나온 뒤 그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라도 걸고 싶었지만 딱히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연락처를 훑어보다가 홍주영에서 멈칫하더니 결국에는 통화버튼을 누르지도 못한 채 핸드폰을 다시 꺼야 했다.실내 안.거실은 유난히 조용했고 유지욱은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남우가 왜 저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어. 예전에는 말도 잘 듣고 착한 아이였는데.”고영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그가 말하는 ‘예전’이 정확하게 언제인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고영란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모습에 유지욱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아니에요.”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시 말을 이었다.“이번 달은 될수록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요. 그리고 이혼 숙려기간이 끝나는 대로 다시 가서 마무리 지으면 될 것 같아요.”고영란은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이혼하고 싶은데 지금 이혼하려면 한 달씩이나 기다려야 했다.그리고 위층으로 올라가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리고 이 한 달 동안에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이 뭔지 좀 생각해 보고요.”말을 마친 뒤 유지욱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한편.박씨 가문의 옛 저택.박민정은 유남준이 너무 걱정되어 한걸음에 집으로 돌아왔다.비록 서다희가 괜찮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이때, 밖에서 들리는 차 소리에 박민정이 다급히 차창 밖을 내다보니 유남준의 차도 마침 도착해 있었다.박민정은 빠르게 차에서 내린 뒤 유남준에게 달려가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괜찮아요?”그러자 유남준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당연하지, 다희가 나 괜찮을 거라고 알려줬잖아.”박민정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
유석진의 입에서 갑자기 자기 둘째 아들의 이름이 거론되자 고영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또한 왜 두 아들 사이에 지금 저런 모순이 생긴 건지 알 수 없었다.유남준도 괜히 고영란이 중간에서 난처하게 된 것 같아 일부러 유남우를 빤히 바라보며 유석진에게 말했다.“이번 일은 사과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에요. 큰아빠가 아무리 남우랑 같이 벌인 일이라고 해도 이번만큼은 가만있지 않겠습니다.”별로 무겁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 위협감이 느껴졌다.순간 유석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이때, 그의 며느리인 최현아가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끼어들었다.“남준 씨, 그래도 한 가족인데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그러자 유성혁도 한마디 거들었다.“남준아, 우리도 잘못했단 걸 알고 있어. 아버지가 이제 연세도 많아서 상황판단이 안 될 때가 많아.”유석진도 사실 지금 자존심을 부려서 될 일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지금 네가 원하는 게 뭔데? 말해주면 내가 다 들어줄게.”사실 유남준은 이 말만을 기다렸다.“금방 인수한 시내 중심에 있는 그 건물을 저한테 넘겨주세요.”그 땅은 유명훈의 땅이고 죽기 전 유석진에게 물려준 유산인데 지금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값이 올랐다.유석진이 이 땅의 주인이 됨으로써 그곳의 상권을 손에 쥔 거나 다름없었는데 나중에 아무 건축물을 세워 올려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건 안되지!”역시나 유석진이 단번에 거절했다.그가 오랫동안 눈독 들였던 땅이었는데 유명훈이 죽어도 물려주지 않으려 해서 여태껏 애를 먹고 있었다가 이제 겨우 손에 들어온 땅이고 또 자기만의 계획이 따로 있었다.“그러면 조만간 IM 그룹의 변호사를 만나셔야겠네요.”유남준은 더 이상 그와 얘기하고 싶지 않았고 유석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집안 도우미에게 외쳤다.“모셔다드려!”그렇게 도우미들은 그들을 전부 밖으로 내보냈고 거실에는 유남준 가족들만이 남게 되었다.유지욱과 고영란은 눈앞의 두 아들에게 뭐라고 말했으면 좋을지
유남준이 잡혀갔다는 소식에 유석진 가족들은 조용히 자축하고 있었다.최현아도 너무 기뻐했지만 유독 유성혁만 우울한 얼굴로 그들에게 물었다.“아빠, 그래도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인데 꼭 이래야 할까요? 남준이가 잡혀가도 우리한테 아무런 이득도 없잖아요. 그리고 만약 다시 풀려나서 우리가 한 짓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요.”그러자 유석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답했다.“왜 쓸데없는 일을 벌써 걱정하고 그래? 간이 그리도 콩알만 해서 큰일 하겠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유성혁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다만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유지훈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저는 할아버지가 한 행동이 맞다고 봐요.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러자 유석진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껄껄거리며 웃었다.“하하, 역시 우리 손자가 똑똑하다니까. 네 말이 맞아. 사람은 무조건 자기가 일 순위여야 해. 절대 네 바보 같은 아빠를 닮아서는 안 된다.”그러자 유지훈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할아버지, 저도 알고 있어요.”그리고 유석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그들은 너무 일찍 기뻐했던 게 오후가 되자마자 유남준은 바로 풀려났다.그길로 옛 저택으로 오게 되었고 동시에 유석진네 식구들과 유남우를 전부 집으로 불러 모았다.이 시각, 유지욱도 마침 그곳에 있다가 눈앞의 상황에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남준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아빠, 제가 지금부터 저 사람들의 실체에 대해 다 밝히려고요.”그리고 서다희가 한 무더기의 자료와 증명서를 건네주자마자 그는 유석진네 식구들에게 뿌려줬다.종이들이 공중에서 흩날리다가 전부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유석진은 그중 한 장을 주워 읽어보고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코웃음을 치며 그에게 말했다.“남준아, 다 오해야.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하겠니?”그러자 유남준이 눈살을 찌푸리고 그에게 되물었다.“우리 회사에 심어둔 사람들을 제가 다 데려올까
유남준은 사실 진작에 유남우와 유석진 쪽에 사람들을 붙여서 그들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파악하고 있었지만 도대체 무얼 하려는지 궁금해서 일단 내버려두고 있었다.이튿날, IM 그룹으로 세무국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러자 서다희가 눈살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대표님을 감옥에 보내려고 아주 별짓을 다 하네요. 이런다고 그 사람들한테 득이 되는 게 뭔지 정말 모르겠어요.”특히 유남우는 왜 자기 친형을 왜 이렇게까지 괴롭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조사해 보니 역시나 회사 장부에 문제가 있었고 회사 자금을 불법으로 돌렸다는 증거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그러나 이 모든 게 다 그들이 일부러 만들어낸 가짜 장부들이었다.그렇다고 해도 유남준은 회사 법인으로서 조사를 받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연행되었다.가면서도 서다희에게 당부했다.“민정이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줘.”서다희는 한껏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굳이 말하지 않아도 뉴스에서 하루 종일 보도될 예정이라 아마 얼마 안 돼서 알게 될 것이다.역시나 박민정은 출근길에 그에 관한 뉴스 기사를 보게 되었다.“어떻게 이럴 수가?”이때, 고영란도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민정아, 남준이한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그러나 박민정도 아직 무슨 상황인지 모르고 있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저도 방금 기사를 봐서 잘 모르겠어요. 제가 지금 당장 다희 씨한테 전화해 볼 테니까 어머님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그래.”고영란은 착잡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유지욱과 이혼하겠다고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들한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서다희는 빠르게 박민정에게 전화해서 유남준이 시킨 대로 알려줬고 모든 일은 다 대비되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박민정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이때 서다희가 한마디 더 했다.“그런데 이 일은 절대 고영란 사모님한테 말하지 말아 주세요.”“알겠어요.”어쩌면 유남우 귀에도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