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씨 가문의 어느 한 빌딩에서.유남준과 유남우 두 형제가 날카롭게 맞서고 있다.“권해신의 모든 행위에 대해 넌 이미 알고 있었지?”유남준이 물었다.여유로운 모습으로 난간에 기대고 있는 유남우, 그는 우중충한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대답했다.“이번 일은 끼어들지 않았어.”이러한 대답은 간접적으로 인정한 셈이기도 하다.유남준은 자기 동생이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따뜻하고 상냥한 사람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었다.하지만 아직도 자기한테 칼을 겨누고 있는 유남우의 모든 행위가 믿어지지 않았다.“호산 그룹도 네 손에 넣었잖아. 근데 뭐가 아직도 불만이야?”‘그걸 말이라고 묻는 거야?’유남우는 웃으면서 대답했다.“따지고 보면 많은데, 그중에서 가장 불만인 건 네가 내 여자를 아내로 맞이했다는 거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랑 결혼까지 해놓고서도 나한테 전혀 미안해하지 않고 빚지지 않은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네가 재수 없고 역겨워!”그 말을 듣게 된 유남준은 더 이상 참지 않았다.유남우의 멱살을 한 방에 잡고서 힘을 가득 주었다.두 사람은 체형이, 어릴 적부터 몸이 허약하고 아팠던 유남우는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설령 눈이 먼 유남준이라고 하더라도.멀리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홍주영은 그 광경을 보고서 바로 달려가려고 했다.그러나 그때 옆에 있던 서다희가 그녀를 말렸다.“홍 비서님, 우리가 가히 간섭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아요.”멱살을 단단히 잡힌 유남우는 서서히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하지만 일말의 두려움도 느끼지 않은 채 오히려 밀어붙였다.“죽여! 어디 한 번 죽여봐! 근데 똑바로 기억해! 민정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야! 처음부터 끝까지 민정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라고!”“만약 내가 죽게 되잖아? 그럼, 민정이는 널 평생 원수로 생각하면서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잘생긴 얼굴이 험상궂어 보일 정도로 일그러지는 순간이었다.유남준은 무거운 소리로 엄숙하게 말했다.“앞으로 이상한 놈들이랑 엮이지 마. 아니면 너까지 죽
마침 권진하의 행방에 대해 알리려고 했던 서다희였다.“지금 두원 별장 문 앞에 무릎 꿇고 있습니다.”“사모님을 납치한 일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면서 권해신 스스로 벌인 일이라고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대표님께서 이번 한 번만 봐주시면 앞으로 충성을 다하겠다고 덧붙이기도 했습니다.”역시나 단순한 일이 아니라는 직감이 확신되는 순간이었다.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별다른 내용을 알아넬 수 없는 상황이다.“권해신은 나한테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것 같아. 너도 더 이상 묻지 않아도 돼.”“네, 알겠습니다.”유남준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서다희다.권해신을 더 이상 남길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권진하는 어떻게 할까요?”권씨 형제를 단번에 처리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하물며 권진하는 담도 적고 여자한테만 관심을 보이고 있는 약하디약한 사람이다.“일단 남겨둬.”“네.”...두원 별장.소파에서 쉬고 있던 박민정은 추경은한테서 듣게 되었다.권씨 가문 셋째 도련님인 권진하가 지금 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고.추경은이 박민정에게 물었다.“이지원은 잡았어요?”이지원이 하이힐로 다친 다리를 무자비하게 찍었던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는 추경은이다.추경은의 질문에 박민정은 눈을 살짝 뜨고 대답했다.“잡히지 않았을걸요? 내가 경찰도 아닌데 어떻게 알겠어요.”진정성이라곤 일도 없는 박민정의 대답에 추경은은 순간 불쾌해졌다.“좀 분명하게 대답해 줬으면 좋겠네요.”추경은은 일부러 일을 크게 벌이려고 했다.“새언니랑 이지원, 서로 라이벌 사이 아니에요? 우리 납치당했을 때 그년이 얼마나 기고만장했는지 다 까먹은 거예요?”박민정은 추경은을 흘겨보면서 대답했다.“아니요. 기억하고 있어요.”“하지만 기억하고 있다고 한들 뭘 어떻게 하겠어요?”말 문이 턱 막힌 추경은은 바로 정신을 차리면서 밀어붙였다.“남준 오빠한테 본때를 보여주라고 해야죠!”박민정은 일부러 거절하는 척을 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우리를 헤치려고 했던 사람도 권씨 가문 형제 같아요.
“사모님 택배 하나 있습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경비원이 박민정에게 말했다.“네, 감사합니다.”‘뭘 보내신 거지?’택배가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서 방에서 박윤우가 뛰쳐나왔다.택배는 언제나 설레는 법, 두 사람은 함께 택배를 확인하기 시작했다.내용물을 확인하는 순간 두 사람은 동시에 얼어붙고 말았다.박스 안에는 여자아이의 장난감과 일상용품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장난감과 일부 용품은 하도 낡아서 누렇게 변하기도 했다.내용물을 보자마자 박민정은 단번에 어릴 적 자기가 사용했던 물건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박민호와 한수민은 전에 박씨 가문 옛 저택을 법원에 공탁으로 넘겼었다.그 옛 저택을 이지원이 먼저 사들였고 나중에 유남준이 소유권을 차지하면서 박민정의 손으로 들어가게 되었었다.다시 박씨 가문 옛 저택으로 들어갔을 때 박민정은 어릴 적 자기가 사용했었던 물건을 단 하나도 보지 못했었다.“한수민이 이 모든 걸 챙기고 있었다는 말이야?”박민정은 당연히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다. 한수민이 챙겼을 리가 없다면서.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박윤우는 내용물을 확인하자마자 두 눈에 호기심이 가득해졌다.“엄마, 여기 안에 있는 거 다 엄마 것이야? 엄마가 어릴 적에 썼었던 물건들이야?”단번에 확신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박민정의 일기장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일기장 위에는 ‘박민정’이라고 떡 하니 쓰여 있었다.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그래. 학교 다닐 때 썼던 물건들이야.”이윽고 박민정은 누렇게 바래버린 일기장을 한 페이지씩 넘기었다.첫 페이지에는 진주시 유씨 가문으로 처음 왔을 때의 심정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8월22일, 날씨 맑음. 드디어 아빠와 엄마를 만나게 되었다. 나에게도 인제 아빠와 엄마가 있다. 너무 좋고 행복하다.][8월23일, 날씨 흐림. 엄마가 나를 싫어하는 것 같다. 그 이유는 나에게 있는 것 같다. 나만 잘하면 아빠도 엄마도 나를 좋아할 것이라고 아줌마께서 말씀해 주셨다. 내가 아직 여러모로 부족하여 두
‘쓰레기?’한수민의 말을 듣고서도 박민정은 예전처럼 슬프거나 화나지 않았다.“그럼, 감사히 잘 받을게요.”“한 여사님, 앞으로 부디 천국으로 가시길 바랄게요.”말을 마치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이내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던 박민정이었다.하지만 갑자기 어린 시절을 다시 떠올리게 되면서 서서히 흔들리고 말았다.한수민에게 잘 보이려고 갖은 애를 썼었던 자신을 떠올리면서, 한수민을 친엄마로 생각하면서 살아왔던 자신을 떠올리면서, 매번 상처받고서도 괜찮은 척했었던 자신을 떠올리면서 조금씩 무너졌다.한편, 병원 안에서.끊긴 전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한수민은 박민정이 마지막으로 했던 그 말을 끊임없이 되새겼다.“한 여사님, 앞으로 부디 천국으로 가시길 바랄게요.”‘천국?’‘지옥으로 떨어지게 될 건데... 천국은 무슨...’한숨을 내쉬면서 한수민은 앨범을 열어 보았다.그 안에는 어린 시절 박민정이 썼었던 그 일기들이 저장되어 있었다.실은 금고를 되찾고 그 안에 들어 있던 물건들을 한수민이 먼저 확인했었다.박민정의 일기장을 한번 또 한 번 자세히 들여다본 한수민이다.만약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살 수만 있다면 박민정을 끔찍이 여기면서 살 것이라고 후회를 금치 못했다.간병인 역시 진심으로 후회하고 한수민의 모습을 알게 되었다.하지만 후회한다고 한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사모님, 제가 로펌에 문의를 해보았는데, 그쪽에서 의뢰 사안을 접수할 수 있다고 했어요. 다만 지금 사모님께서 금전적으로 넉넉한 편이 아닌 점을 고려하여 벤처 소송을 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어요. 패소하게 되면 변호사 수임료를 지급하지 않으셔도 되고 만약 승소하게 된다면 10%를 변호사 수임료로 지급해야 할 거예요.”거동이 불편한 한수민은 윤석후와의 이혼 소송 문의를 간병인에게 부탁했었다.만약 승소하게 된다면 한수민이 받게 될 모든 재산의 10%를 변호사 수임료로 반드시 지급해야 한다.그와 반대로 만약 패소하게 된다면 단 한 푼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
문적 박대를 당한 추경은은 아랑곳하지 않고 문에 귀를 기울였다.뭐라도 듣고 싶어서 이내 안달 난 모습으로 말이다.다행히도 방음 효과가 꽤 뛰어났고 베란다에서 얘기하고 있었으므로 추경은은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뻔뻔할 수 있어? 꽉 막힌 공간에 남녀 단둘이 들어가다니!”일그러진 얼굴로 추경은이 내내 중얼거렸다.옆에 박윤우가 와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한참 박민정을 욕하고 있을 때, 갑자기 다리 쪽이 젖어 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긴가민가하면서 고개를 숙인 추경은은 액체 같은 것을 들고 있는 박윤우를 보게 되었다.박윤우는 추경은의 다리에 그 액체를 붓고 있었고 그 냄새는 유난히 지독했다.“아! 박윤우! 뭐 하는 짓이야!”세상 순수한 눈빛으로 박윤우가 대답했다.“경은 이모, 이건 제가 아줌마한테서 가지고 온 거예요. 꽃에 주는 비료라고 하던데, 이거 이렇게 많이 뿌리면 꽃이 빠르게 자란다고 했었어요.”“경은 이모 다리가 하도 낫지를 않아서 이렇게라도 하면 좀 빨리 낫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비료 주고 있는 거예요.”그 말을 듣고서 추경은은 바로 사색이 되어버렸다.이윽고 비명과 함께 미친 듯이 욕실로 뛰어갔다.허겁지겁 달려가는 그 모습을 보고서 박윤우는 자기도 모르게 손뼉까지 쳤다.“흥! 감히 우리 엄마를 욕하다니!”같은 시각, 방안에서.베란다에서 한창 얘기를 하고 있던 박민정과 정민기는 밖의 상황을 알 리가 없었다.“민정 씨, 제가 알아본 것에 따르면 그때 이지원은 진주시를 떠나지 않고 권진하를 찾아가서 그와 사적으로 만남을 유지했다고 했어요. 나중에는 권진하가 이지원에게 특별히 집까지 마련해줬다고 해요.”정민기의 말을 듣고 난 박민정은 조금 믿어지지 않았다.“네? 제 기억으로는 권진하에게 따로 약혼녀가 있었던 것 같은데요? 이지원의 친한 친구인 하예솔이 권진하의 약혼녀였던 것 같은데요?”정민기는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하예솔도 지금까지 속고 있는 것 같아요. 만약 알게 된다면 권진하와 결
얼마 지나지 않아 하예솔을 비롯한 10명 이상의 동창생이 모임에 참가하겠다고 했다.박민정은 자기만 모임에 참가하겠다고 하면 하예솔도 반드시 참가할 것이라고 이미 예상하였다.내일이면 휴가철 마지막 날이다.과 반장은 내일 저녁 8시에 만나자면서 레스토랑 위치를 채팅방에 올렸다.하예솔은 더욱더 정확한 소식을 얻고자 바로 이지원에게 전화를 걸었다.“지원아, 너 대학교 채팅방 봤어?”보지 못했을 리가 없는 이지원이다.내내 박민정으로부터 답장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이지원은 지난번 일이 자기한테 파급될까 봐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박민정의 답장을 따로 받지 못했다.모임에 참가하겠다고 올린 답장 외에는...“봤어. 근데 왜?”이지원은 애써 덤덤한 척을 했다.“같이 가자. 박민정 걔가 지금 어떤 꼴로 살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하예솔 역시 박민정이 유명한 작곡가 민 선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지가 아무리 잘나 봤자 박민정이지!’하지만 이지원은 살짝 망설였다.“그냥 안 갈래. 나 지금 걔 때문에 숨어 살고 있어. 모임에 갔다가 도려 당하게 될지도 몰라.”그 말을 듣고서 하예솔이 오히려 발끈했다.“안 돼! 너 꼭 와! 걔가 아무리 잘나가는 작곡가라고 하더라도 제삼자인 사실은 절대 바뀌지 않아. 제삼자는 이유가 어찌 됐든 세상 제일 나쁜 년이고 욕을 아무리 먹어도 싸!”그렇다, 하예솔은 아직도 박민정이 이지원과 유남준의 사이를 갈라놓았다고 생각하고 있다.“하지만...”“그만하고 너도 간다고 반장한테 말할게.”하예솔은 이지원의 동의도 없이 바로 채팅방에 글을 올렸다.[우리 이지원 스타님도 가실 거야. 그러니 끼지 말아야 할 사람은 알아서 끼지 않은 게 좋을 거야.]채팅방을 확인한 이지원은 바로 머리가 굴러가기 시작했다.먼저 하예솔이 박민정에게 미움을 사게 하고 자기가 나서서 두 사람 사이를 풀어주면 된다고 생각했다.이내 마음이 약한 박민정이므로 하예솔과의 ‘싸움’에서 박
유남준은 달갑지 않아 하면서 다시 박민정을 끌어안았다.그러자 박민정은 손을 뿌리치는 것만으로 부족하여 옆으로 몸을 옮겼다.“내 몸에 손대지 마요.”나지막한 소리로 ‘경고’까지 하면서 말이다.박민정의 말과 행동에 지금 몹시나 답답한 유남준이다.불과 이틀 전까지만 해도 다친 유남준을 위해 눈물을 뚝뚝 흘렸던 박민정이기 때문이다.유남준이 괜찮아진 것을 보고 난 뒤,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그럼, 네가 내 몸에 손대.”박민정의 손을 덥석 잡고서 유남준은 자기 가슴 위에 놓았다.졸음이 밀려온 박민정은 이내 귀찮아하면서 그 손을 뿌리쳐버렸다.유남준은 달갑지 않아 하면서 오기라도 발동한 듯이 또 손을 덥석 잡아 가슴에 놓았다.임신한 박민정은 지금 호르몬 분비 변화로 감정 기복이 심한 편이다.그만 참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린 채 소리까지 치고 말았다.“언제까지 이럴 거예요! 짜증 난다고요!”말을 마치고 이불을 돌돌 말고서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멍해진 유남준만 침대 중간에 덩그러니 남겨 둔 채 박민정은 바로 꿀잠에 들었다.유남준에게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씩이나 큰 소리로 말하고 심지어 손찌검까지 하는 사람은 오직 박민정 한 명뿐일 것이다.그렇게 유남준은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이튿날 아침, 유남준은 어두운 얼굴로 차에 올랐다.주위 공기마저 무거워지는 것이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가 범상치 않았다.숨 막히는 듯한 상황에 서다희는 자기도 모르게 유남준과 ‘안전거리’를 유지하게 되었다.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도저히 보고를 올릴 수 없었으니 말이다.유남준의 이성을 잃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박민정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서다희는 별로 깊이 생각하지도 않았다.“대표님, 윤석후 회사에 관한 사안은 마무리 단계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사모님께 말씀해 드릴까요?”박민정에게 알려주면 반드시 기뻐할 것으로 생각이 들었다.유남준은 무려 시장 최저 가격으로 윤석후의 회사를 인수한 것이다.하지만 어젯밤 박민정에게 하대를 당한 것을
오늘 이지원은 예전과 달리 메이크업에도 옷에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얼굴도 약간 창백한 것이 수심에 잔뜩 녹아내린 모습이었다.박민정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도 예를 갖춘 채 먼저 눈웃음을 건넸다.며칠 전과 180도 달라진 모습으로 기고만장함이라곤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자리를 찾아 앉은 박민정은 따뜻한 물부터 한 모금 마셨다.거의 다 모이게 되자, 과 반장이 나서서 바삐 돌기 시작했다.“자, 다들 얼른 자리 찾아 앉아. 이렇게 다시 모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더욱 즐겁게 지내도록 하자.”박민정 곁에 앉은 누군가가 그만 참지 못하고 물었다.“민정아, 얼마 전에 기사에서 그러던데, 네가 바로 그 유명한 작곡가 민 선생이라면서? 그게 사실이야?”“맞아. 그게 나야.”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 소리를 듣고서 다른 사람들도 모두 박민정에게 시선을 쏠리게 되었다.저마다 다양한 시선과 표정으로 말이다.“민정아, 너 진짜 성공했구나!”“너 난청 환자라고 하지 않았어? 우리보다 몇 배는 더 노력해서 배워야 한다고 선생님이 그러셨던 게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 같은데.”“그러게 말이야! 민정이 네가 작곡가로 성공하다니 너무 놀랍고 대단한 것 같아!”“...”다들 한마디씩 주고받으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재수 없어.’계속 듣기에 거북했던 하예솔이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그딴 곡 몇 개 쓴 거 가지고 유난은...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그러는 거야 다들? 완전히 들리지 않는 것도 아니잖아.”하예솔의 말에 조금 전까지 박민정에게 칭찬하고 있던 사람들은 바로 합죽이가 되어 버렸다.절대로 말려들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말이다.그러나 오히려 예상치 못한 사람인 이지원이 박민정의 손을 잡고서 연기를 펼치기 시작했다.“민정아, 마음에 담아주지 마. 예솔이 여기로 오기 전에 술 좀 마셨거든 아마 취한 김에 하는 소리일 거야.”“지원아!”하예솔은 이지원을 부를 때 음을 길게 뺐다.“그게 무슨 헛소리야! 나 술 마시고 온 거 아니야. 취할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
김인우는 유남준의 마지막 한마디까지 다 듣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그러면 지금 하랑 씨가 형수님이랑 같이 있다는 거지?”“응.”김인우가 왠지 자신이 방금 했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것 같아 유남준은 다시 한번 주의를 줬다.“결혼 전에는 아무 여자나 끼고 놀아도 상관없겠지만 지금은 결혼도 했고 아이까지 있는 마당에 좀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김인우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황당하다는 듯이 그에게 답했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버릇 고친지가 언젠데, 예전의 내가 아니야.”“응, 그러면 다행이고.”“그러면 지금 하랑 씨는 병원에 있는 거야?”“응.”유남준은 대답하자마자 전화를 끊었는데 보아하니 오늘에도 독수공방해야 할 것 같았다.김인우는 그길로 빠르게 조하랑 보러 병원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가는 길에 방금 유남준이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설마 하랑 씨가 오해한 건가?’그러다가 눈이 번쩍 뜨이더니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자기 머리를 퍽퍽 내리쳤다.“이 멍청한 놈, 그때 통화하는 걸 분명 옆에서 다 들었던 거야!”그는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이지원의 영상을 자기한테 보내라고 했다.드디어 병원에 도착했다.조하랑이 막 잠들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누구세요?”박민정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간호사인가? 내가 가볼게.”“응.”박민정이 슬리퍼를 신고 문어구에 다가가 문을 열어보니 눈앞에 김인우가 서 있었다.“형수님, 하랑 씨 여기에 있나요?”김인우는 다급하게 물었다.박민정은 그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해 살짝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네.”“제가 들어가도 될까요?”그러나 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조하랑은 김인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빠르게 다가와 차갑게 말했다.“아니요. 민정아, 너는 일단 먼저 자. 내가 나가서 말할게.”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를 한번 쏘아보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갔고 김인우도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하랑 씨, 진짜 오해예요.”그러나 조랑
김인우는 집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조하랑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식은땀이 맺힌 채로 급히 박예찬과 김훈에게 달려가 물었다.하지만 김훈은 일부러 모른 척하며 그가 이번 기회에 정신 좀 차리길 바랐다.“나도 몰라. 하랑이가 방에 없다고? 화장실 간 거 아니야? 화장실은 찾아봤어?” 김훈이 일부러 태연하게 말하자 김인우는 인상을 찌푸렸다.“거기도 없어요.”“그거 참 이상하네.”김훈은 걱정스러운 척하며 말했다.“그럼 멀뚱멀뚱 서서 뭐 하는 거냐? 어서 찾아봐야지. 지금 임신 중이잖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박예찬도 거들었다.“오늘 아줌마가 좀 안 좋아 보이긴 했어요. 혹시 가출하신 거 아니에요?”그 말에 김인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는 곧장 조하랑을 찾아 나섰다.한편, 조하랑은 이미 병원에 도착해 있었다. 박민정이 곁을 지키고 있었고 둘은 정수미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 병실로 들어가 조용히 대화를 이어갔다.“하랑아, 너 그냥 이렇게 온 거야? 가족한테는 말 안 했어?”조하랑은 고개를 저었다.“응. 그냥 조용히 나왔어. 지금은 누구 얼굴도 보기 싫어.”“그래도 집에 한 통은 전화해. 안 그러면 걱정하실 텐데.”박민정이 말했다.“괜찮아. 다들 내가 자는 줄 알 거야. 내일 아침에 슬쩍 들어가면 돼.”조하랑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임신 후로 김인우와는 방도 따로 쓰고 있었기에 자신이 방에 없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알겠어.”박민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조심스레 물었다.“그런데, 하랑아. 너 아까 말한 그 여자, 혹시 누군지 짐작은 가?”조하랑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난 김인우 주변 사람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박민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내가 남준 씨한테 한 번 물어볼게. 혹시 오해일 수도 있으니까.”“응, 좋아.”조하랑도 더 큰 싸움으로 번지는 건 원치 않았다.박민정은 조하랑 앞에서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유남준도 막
조하랑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걱정 마, 민정아. 나 그냥 좀 화가 났을 뿐이야. 아직은 냉정해.”그리고는 씁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기분이 나빠서 그래. 내가 지금 그 사람 아이까지 품고 있는데 저렇게 행동하면 기분이 어떻게 안 상하겠어.”박민정은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잠시 후, 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민정아, 나 네가 있는 곳으로 가도 될까?”“당연하지. 내가 데리러 갈게.”박민정은 임신한 친구의 감정이 요동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걱정된 마음에 바로 나섰다.하지만 조하랑은 코끝이 붉어진 채 대답했다.“아냐, 이미 차 탔어. 지금 가는 중이야.”그녀는 더 이상 그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김인우가 눈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둘 수가 없었다.박민정은 그녀가 이렇게 단호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던 지라 속으로 적지 않게 놀랐다.“알겠어. 그럼 내가 문 앞에서 기다릴게.”“응, 고마워.”...한편, 김인우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길가에 있는 꽃집을 발견했다.그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게 하고는 직접 차에서 내려갔다. 잠시 후, 그는 품에 형형색색의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돌아왔다.차에 다시 올라타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가자. 좀 빨리 가 줘.”예전에도 김인우는 여자를 위해 꽃을 보낸 적이 있었지만 그건 대부분 비서가 대충 주문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꽃다발은 그가 직접 고르고 색을 맞춰 정성껏 고른 것이었다.운전기사도 그의 얼굴에서 어쩔 수 없이 번지는 미소를 보고는 감탄하듯 말했다.“사모님은 참 복도 많으시네요. 이사님께서 뭐든 다 챙기시니.”김인우는 입꼬리를 높이 올리며 웃었다.“당연하지. 내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사람이잖아. 그 정도는 해야지. 사실 하랑 씨가 임신하지 않았더라도 난 여전히...”하지만 마지막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그는 조하랑을 보기 위해 한 걸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