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이번이 살면서 두 번째로 겪는 큰 굴욕이었다.“범아, 우리 그냥 이렇게 가는 거야?”황현호는 은범을 노려보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따졌다.은범은 황현호를 무심하게 쳐다보며 냉랭하게 웃으며 되물었다.“왜? 더 맞아야 속이 후련하겠어? 아니면 아예 못 나가길 원해? 널 때린 건 저 남자잖아. 화가 나면 저 남자한테 풀어야지 왜 나한테 소리 지르고 난리야?”황현호는 은범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화을 식이지 못해 씩씩대던 황현호는 이를 악물며 중얼댔다.“난 저 남자가 날 죽일 거라고 믿지 않아. 이래 봬도 난 황경영의 아들이란 말이야!”“여기선 네가 누구 아들이든 상관없어. 저 남자가 널 죽인다 해도 네 집안이 어쩌겠어?”은범이 가소롭다는 듯 황현호를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저 남자를 찾아 보복할 거야? 아니면 어쩔 거야? 설령 복수를 한다고 해도 무슨 의미가 있어? 넌 이미 죽었을 거잖아. 저런 사람하고 목숨을 맞바꾸는 게 너한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이 말에 황현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목숨을 맞바꾸는 짓은 생명이 별 가치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지, 돈 많은 사람들은 자기 목숨을 끔찍하게 아끼는 법이다.“네 말이 맞아. 저런 놈하고 목숨을 맞바꿀 필요는 없지.”황현호는 이내 침착해졌고 바닥에 침을 뱉으며 말했다.“제기랄, 이제 기회만 있으면 저 녀석 뼈를 전부 박살 내고 말겠어. 참, 저 녀석 이름이 뭔지도 모르잖아. 잠깐 기다려 봐.”황현호는 말을 마치고 다시 호텔로 달려갔다.진서준과 조민영은 그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영감, 네 이름 감히 밝힐 수 있어?”황현호는 진서준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구경거리가 사라져 떠나려 하던 사람들도 그 소리에 다들 멈춰 섰다. 사람들은 황경영의 아들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중년 남자가 누구인지 몹시 궁금했다.“김평안.”진서준이 조용히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호텔 전체에 들리기에 충분했다.“김평안?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인
진서준은 한 번도 직접적으로 조기강이 싸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조기강이 검존이라는 봉호를 얻을 정도라면 그 실력은 분명히 대단한 수준일 것이다.게다가 검도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은 편인 자기와 달리 조기강은 검술에 있어 확실히 뛰어났다.사실 진서준이 가장 자신 있다고 생각하는 분야는 도술과 체수였다.검을 쓰는 이유도 단지 사람을 처리하기에 편리하기 때문일 뿐이었다.이번에 김평안이라는 가명을 쓰기로 한 만큼 진서준은 단지 검만 사용하고 도술이나 체수는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아니에요, 아저씨는 절대 그냥 시골 사람 정도가 아니에요. 제 추측이 맞다면 아저씨는 우리 삼촌보다 훨씬 강할 거예요.”조민영은 사뭇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우리 삼촌은 단지 검의 통달 정도지만 아저씨는 이미 검세를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잖아요.”진서준은 뜻밖의 단어를 듣고 깜짝 놀랐다.“민영 씨, 검세까지 알고 있는 거예요?”조민영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삼촌께서 저에게 말씀해 주신 적 있거든요. 검수는 검광, 검의, 검세, 검진 그리고 검도까지 총 여섯 가지 경지가 있다고요.”일반적인 검수를 놓고 볼 때, 10년 넘게 수련해서 검광을 익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하지만 검의를 익히는 것은 단지 노력뿐 아니라 천부적인 재능도 요구된다.대종사 경지에 이른 검수 중에서도 일부만이 기초적인 검의만 익혔을 뿐, 완벽한 검의를 익힌 자는 극히 드물었다.조기강처럼 검의 통달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대한민국 무도계 전체를 통틀어도 겨우 열 명 남짓이었다.게다가 검세를 터득한 이는 더더욱 드물어 용과 봉황처럼 희귀해서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정도였다.검진과 검도는 더욱 전설적인 경지라 심지어 창욱 어르신조차도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고 들었다.하지만 예전에 창욱 어르신은 진서준에게 검도에 대한 타고난 재능이 있으니 피나는 노력만 퍼붓는다면 검도의 일부를 깨우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생각보다 민영 씨가 알고 있는 게 많네요.”진서준이 미
신농산은 한없이 넓었고 관광 개발 정도는 5%도 채 되지 않았다.나머지 20만 제곱킬로미터는 전부 원시림이라 길이 없어서 일반인들은 탐험할 엄두도 못 냈다.진서준과 조민영은 이 무인 무리 뒤를 따라 신농산 깊숙이 들어갔다.가끔 호랑이의 울음소리와 늑대가 짖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고 보기 흔하지 않은 귀중한 약초도 발견할 수 있었다.약 두 시간 정도의 행진 끝에 두 사람은 탁 트인 넓은 평지에 도착했다.이 평지 앞에는 거의 10미터에 이르는 돌기둥 두 개가 우뚝 서 있었다.“여기가 목적지인 것 같아요.”진서준이 눈앞의 돌기둥을 보며 말했다.“끝내 도착했네요. 다리가 부러질 것 같아요.”조민영은 숨을 크게 내쉬며 큰 바위에 앉아 다리를 가볍게 두드렸다.제아무리 내공 무인이라고 해도 두 시간의 산길을 걷고 나면 몸이 힘들어지는 건 마찬가지였다.진서준은 사실 조민영의 피로를 덜어주기 위해 영기를 쓰고 싶었지만 자기 정체가 드러날 것 같아 참았다.진서준이 주변을 살펴보니 점점 더 짙어지는 영기를 느낄 수 있었다.‘신농산 안에도 영맥이 있구나. 여기 영맥은 운대산 영맥보다도 강력하네.’진서준은 속으로 운대산 영맥과 비교해 봤다.그 후, 거의 천 명에 이르는 무인들이 여기에서 신농 종문의 사람들을 기다리기 시작했다.하지만 해가 지고 하루가 다 지나가는데도 신농 사람들은 오지 않았다.“무슨 일이지? 온종일 기다렸는데도 신농 사람들은 왜 안 오는 거야?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지?”“조급해하지 마, 이제 막 저녁이 시작된 거잖아. 지난번 신농에 갔던 무인들한테 들었는데, 그 무인들은 거의 사흘이나 기다렸대.”“뭐라고? 사흘이나 기다렸다고? 신농 사람들은 정말 거만하기 짝이 없구나.”“그래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네 개 은세 종문 중 하나잖아. 심지어 국안부도 신농과 충돌하기 꺼린다는 소문도 있어.”대다수 무인은 마음속으로 불만이 넘쳐나긴 했지만 신농의 세력과 실력을 고려해 조용히 투덜대며 불만을 토로할 뿐이었다.“일단 식사부터 하죠.
나무 위로 올라가는 사람도 있었고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홀로 있는 사람도 있었으며 심지어 나무를 베어 임시 침대를 만든 사람도 있었다.황현호와 은범 역시 이 무인들 사이에 있었다.두 사람은 밀려오는 졸음을 참지 못해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고 언제든 잠이 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범... 범아, 우리 그냥 돌아가자. 신농 사람들이 코빼기도 내밀지 않잖아.”황현호는 두꺼운 외투를 몸에 꼭 붙이며 극심한 추위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이미 겨울을 지나 3월에 들어섰지만 북쪽 지역은 여전히 쌀쌀했다.특히 산속은 낮과 밤의 온도는 무려 10도 이상 차이가 났다.현재 신농산의 온도는 영하 10도 정도였다.아침에 은범이 외투를 입으라고 귀띔하지 않았더라면 황현호는 지금쯤 벌써 얼어 기절했을 것이다.“돌아간다고? 이 늦은 시간에 너 혼자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은범은 황현호를 냉랭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사람들과 같이 가지 않으면 너 혼자 돌아가다 길에서 얼어 죽을 수도 있어.”신농산은 굉장히 넓고 대부분이 원시림으로 되어 있어 길을 모르는 사람이 무작정 들어가면 금세 길을 잃어버리게 된다.“신농 사람들은 왜 아직도 안 나오는 거야? 우리를 여기서 얼어 죽게 하려는 거 아니야?”황현호는 거의 울먹이듯이 말하며 은범을 따라온 걸 죽도록 후회하고 있었다.그냥 명주로 돌아가 집안의 대종사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진서준에게 복수하면 이런 고생도 할 필요가 없었다.“그만 투덜대고 얼른 자자. 내일 아침이면 신농 사람들이 올 수도 있어.”은범은 황현호에 비해 꽤 차분한 편이었다.비록 그는 신농 제자 선발에 처음 참가했지만 신농의 선발 기준이 매우 까다롭다는 소문을 예전부터 쭉 들어왔다.은범은 이 정도의 작은 시련쯤은 충분히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밤이 지나고 해가 떠오르자 진서준은 조민영을 깨웠다.“어머. 벌써 아침이네요. 아저씨, 왜 밤중에 저를 안 깨우셨어요? 아저씨도 쉬셔야죠.”조민영은 진서준을
태양보다 더 눈부신 한 줄기 빛이 갑자기 돌기둥에서 뿜어져 나오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그 빛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어서 즉시 고개를 돌렸다.진서준마저도 손으로 눈을 가려야만 할 정도였다.곧이어 둔탁한 소리가 귓가에 울리더니 그와 동시에 강렬한 빛이 점차 사라졌다.진서준을 포함한 사람들이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기세등등하던 유자성은 이미 온몸이 피투성이인 채로 반 미터 깊이의 큰 구덩이에 누워있었다.유씨 가문의 천재로 불리던 유자성의 비참한 모습에 모두 놀라서 어리둥절했다.사실 그는 스물여섯 살에 횡련 종사의 정점에 오를 정도로 무서운 실력을 갖춘 데다가 현장에 있던 사람 중 그를 때려눕힐 수 있는 사람은 10명도 넘지 않았다.고개를 돌린 찰나에 유자성을 처참하게 만든 것이 대체 누구의 소행인지 궁금하던 무렵, 갑자기 하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대단한 배짱이군! 감히 우리 신농의 물건을 함부로 건드리다니 살고 싶지 않은가 보네!”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사람들은 얼굴빛이 변한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 멀리서 작고 검은 그림자가 천천히 땅으로 내려오고 있었다.점점 가까워지는 검은 그림자의 정체를 확인한 사람들은 전부 아연실색했다. 그것은 사람의 그림자였다.“어머나! 하늘에서 내려오는 걸 보면 신선이 아닐까요?”“신농산에 특유의 선법이 있다더니 정말인가 보네요!”“이 신농산에 무조건 가봐야겠어요!”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내 신농에 대한 원한은 사라졌고 오히려 경배의 눈빛으로 신농산의 사자를 바라봤다.그도 그럴 것이, 선법을 배우는 것은 그들 모두의 목표였기 때문이었다.조민영은 입을 딱 벌린 다른 사람들과 달리 마치 신농사자가 어떻게 했는지 아는 것처럼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는 진서준을 바라보면서 말했다.“아저씨는 놀랍지 않나 봐요.”진서준은 곧장 싱긋 웃으며 말했다.“놀랄 게 뭐가 있죠? 조금 전, 사람들이 신농산에 특유의 선법이 있다고 했는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걸 보고 놀랄 필요가 있을까요?”조민영은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곧이어 다들 황급히 몸을 숙여 용전에게 절을 올렸다.“용전님을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용전은 이들의 공손한 태도에 극도로 만족한 표정을 짓다가 두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내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그 두 사람은 다름 아닌 진서준과 조민영이었다.진서준은 용전이 절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신농의 사람들이 자신의 아버지를 가둔 것도 모자라 어머니까지 신농산으로 끌고 갔기에, 진서준은 그들에게 처음부터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조민영도 용전이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에 절을 하지 않았다.그녀는 용전의 차가운 시선에 놀라 진서준의 뒤에 숨으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아저씨, 저 사람의 눈빛이 너무 무서워요...”사람들은 용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서로 눈치를 보며 슬쩍 진서준을 살폈다.그제서야 진서준이 절을 올리지 않은 것을 알아챘고 그에게 큰 불행이 닥칠 거라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용전의 위엄을 도발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곧이어 진서준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혹시라도 자기한테 불똥이 튈까 봐 두려워 황급히 사방으로 흩어졌다.이때 용전이 진서준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이름이 뭐지?”진서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담담한 말투로 답했다.“김평안입니다.”뭇사람들은 머릿속에서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했지만, 대한민국에서 처음 듣는 이름이 분명했다.용전은 이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면서 희롱하는 눈빛으로 말했다.“당신을 기억하지, 시험에 무사히 합격하길 바랄게.”“걱정하지 마십시오. 무조건 합격할 겁니다.”진서준의 담담한 말투 속에 내비친 자신감에 용전은 더욱 차가운 냉소를 지었다.진정한 괴롭힘의 시작은 이번 심사를 통과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신농에 갓 입문한 무인들은 처음 일 년 동안 수련하는 대신 성격을 단련하기 위해 장작을 패거나 물을 끓이는 등 막노동해야만 했다.그렇게 일 년이 지나면, 신농의 천교들이 이들과 대결을 펼치면서 목숨만 붙어 있을 정도까
결국 그 누구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했기에 서로 피 터지게 싸우는 건 필연적이었다.용전은 진서준을 보고 냉소를 지으면서 말했다.“다른 사람과 싸우는 게 싫다면 떠나도 좋아. 우리도 비겁한 쓰레기와 혈기가 없는 사람은 필요 없어.”진서준의 입에서 탈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용전은 즉시 무례한 태도를 보인 그를 죽일 생각이었다.용전은 사부님이 이 일을 아신다고 해도 자기를 탓하지 않을 거로 굳게 믿었다.신농은 문파 종주부터 장로 제자까지 세상에 지지 않을 법한 오만함을 가지고 있었기에 다른 사람들을 얕보는 경향이 있었다.그 순간, 다들 진서준을 쳐다보면서 비아냥거렸다.“당신 같은 멍청이는 꺼지는 게 좋아. 그렇지 않으면 목숨도 건지지 못할 거야.”“이 정도 배짱으로 감히 신농 제자 선발에 응모했다고? 정말 웃긴 녀석이네!”“이런 자리에 여동생까지 끌고 오다니, 이놈 좀 즐길 줄 아는데!”사람을 죽여본 적 없는 사람들도 신농에 합류하기 위해서는 앞뒤를 가리지 않았다.조민영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진서준의 손을 꼭 잡으면서 말했다.“아저씨, 이 사람들 너무 무서워요. 우리 이만 가요...”그녀는 사실 신농에 합류해 더욱 강인해지고 싶었지만, 오만하기 그지없는 용전을 보니 제자를 가르친 사부의 인품이 얼마나 좋겠냐는 생각에 차라리 집에 돌아가서 넷째 삼촌을 따라 검술이 배우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그러나 진서준은 신농에 들어가서 부모님을 구출해야 했기에 확고한 태도로 말했다.“민영 씨는 가봐요, 난 안 갈 거예요.”조민영은 이를 갈며 말했다.“아저씨가 안 가면 나도 안 갈래요...”이때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용전은 또다시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이제부터 신농 제자 선발을 시작하도록 하지!”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람들은 하나같이 동쪽으로 돌진했고 암기로 몰래 다른 무사들을 공격하는 이들도 있었다.퍽퍽퍽...음해가 계속되었고, 바닥에 누워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이 늘어만 갔다.이를 본 진서준의 안색이 매우
황현호는 멀지 않은 앞에 진서준이 있는 걸 발견하고는 즉시 목소리를 낮췄다.“어젯밤 김평안을 건드렸는데 설마 기회를 타서 우리를 죽이지는 않겠지?”은범이는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답했다.“네가 건드린 거지, 난 안 건드렸어.”황현호는 곧장 눈이 휘둥그레져서 은범이를 노려봤다.“너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는 의형제를 맺은 사이잖아! 같은 날 태어난 걸 바라지 않아도 같이 죽기로 약속했으니까, 너도 날 두고 혼자 살아남을 생각하지 마!”그동안 함께 지내던 두 사람은 결국 어느 하루는 머리를 맞대면서 의형제를 맺기로 했다.그 이후로 은범이는 술에 취해 소란을 피웠을 뿐이라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황현호는 계속 그를 제일 좋은 형제로 생각했다.곧이어 은범이는 어린애처럼 의형제를 거론하는 황현호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화를 풀어주려고 애썼다.“나 농담한 거니까 화내지 마!”그러나 그는 마음속으로 황현호가 팔려 가도 다른 사람에게 돈을 쥐여줄 정도로 지능이 떨어진 재벌 2세일 뿐이라면서 무시했다.사실 은범이도 황현호와 마찬가지로 재벌 2세였지만, 그보다 조금 더 똑똑하고 상황 판단을 잘할 뿐이었다.두 사람이 한창 대화를 나누고 있을 무렵, 종사 경지의 무인이 두 사람의 앞을 막아섰다.그들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곧이어 황현호가 벌벌 떨면서 말을 건넸다.“당신... 왜 우리를 막아요? 우리는 종사도 아닌데...”그 종사는 자기의 앞에서 반격할 용기조차 없는 두 사람을 보고 담담하게 웃었다.“당신들이 종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은범이도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그런데 왜 우리 앞을 막아서는 거죠?”“난 두 사람의 정체를 알고 있지. 갑부의 아들과 은씨 일가의 직계 혈통이잖아.”중년 종사가 두 사람의 정체를 아는 것이 대단한 것처럼 말했지만, 그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놀랄 일이 아니었다.사실 황현호는 텔레비전에 얼굴을 자주 드러냈기에 그를 아는 사람이 많았고, 은범이도 경성에서 알아주는 유명한 인물이었다.곧이어
“뭐라고? 불법적인 일이 우리 가게에서 일어난다고? 말도 안 돼.”성현도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넌 전신전 소속이잖아. 그런데 네 오빠인 내가 어떻게 법률을 어기는 일을 하겠어?”“그럼 이 사람들은 왜 부른 거야? 집단 폭력도 불법이거든.”성미영은 차가운 시선을 보이며 성현도와 따졌다.“미영아, 이건 내가 싸우려던 게 아니야. 저 녀석이 일부러 시비 걸러 온 거라고.”성현도는 진서준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이놈이 일부러 우리 찻집에 난입해 행패를 부리고 상철을 두들겨 패서 머리에 혹이 다 나버렸어. 난 단순히 정당방위를 위해 부른 거라고.”성미영이 등장하자 성현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솔직히 실력만 놓고 보면 성현도는 성미영보다 한참 부족했다.게다가 성미영은 전신전 소속인지라 저 남녀가 군부 조직인 전신전을 적으로 돌릴 리 없었다.군대를 건드리는 순간, 무조건 좋은 결과는 있을 수 없었다.“진서준, 도대체 무슨 일이야?”성미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라? 너희 둘이 아는 사이야?”성현도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방금 내려놨던 마음이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난 사람을 찾으러 왔어. 하씨 가문 하경범이 이 위층에 있다고 들었는데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어.”진서준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그리고 또 하나, 저 위에서 불법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도 하더군.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어.”이 말에 성현도의 표정이 단숨에 험악해졌고 즉시 반박에 나섰다.“헛소리 마. 우리 가게는 단순한 찻집이야. 불법적인 일 따윈 없어. 근거없는 소문을 왜 털어놓고 난리야?”“미영아, 저 녀석한테 속지 마. 난 네 사촌 오빠야. 내가 그런 불법적인 짓을 할 사람이겠어?”성미영이 곧바로 진서준에게 물었다.“진서준, 너 증거 있어?”“직접 올라가 보면 다 알게 될 거잖아?”진서준이 가볍게 말했다.“오빠, 위층으로 가자.”성미영이 단호하게 말했다.“그, 그건 좀 곤란해. 위층엔 귀
순간, 장내는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모든 시선이 진서준에게 쏠렸고 사람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다들 진서준을 그냥 얼굴만 반반한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진짜 고수였다.성현도의 부하 중 최고 실력자조차 상대가 되지 않았다.성현도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렸고 상철을 향해서 욕설을 날렸다.“쓰레기 자식, 이런 애송이 하나도 못 이겨?”부하가 지면 망신당하는 건 결국 성현도 자신이었다.이대로 체면을 구긴 채 끝낼 수는 없었다.이대로 넘어가면 앞으로 르벨 재벌 2세들 사이에서 조롱거리가 될 게 뻔했다.“이봐, 네 실력이 괜찮은 건 인정할게.”성현도가 싸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근데 너 혼자서 백 명을 상대할 수 있어? 천 명은? 잘 들어. 내 부하는 수도 없이 많아. 너 같은 놈 하나 처리하는 데 전화 한 통이면 충분해.”진서준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다시 말하지만 난 그냥 하경범을 찾으러 온 거야. 그 녀석만 넘기면 오늘 일은 없던 걸로 해주지.”“없던 걸로 한다고?”성현도가 그 말에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너 지금 누굴 상대로 협상하려 드는 거야? 난 성씨 가문의 직계야. 날 건드리면 상대해야 할 건 나 하나가 아니라 우리 가문 전체라고.”그때,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곧이어 검은색 전투복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이 남자들은 전부 성씨 가문의 경호원이었고 실력도 만만하지 않았다.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무려 50명 이상이었다.한순간에 텅 비어 있던 로비가 사람들로 꽉 찼다.“저 자식 끝났네. 이 정도 성씨 가문 인원이라면 아무리 강해도 버틸 수가 없지.”“그러게 말이야.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없잖아.”“왜 쓸데없이 성현도를 건드린 거지? 스스로 무덤을 판 거잖아.”구경꾼들은 이 광경에 각자 다른 감정을 보였다.누군가는 동정을, 누군가는 아쉬움을, 또 누군가는 짙은 흥미를 보였다.“사연아, 넌 좀 쉬어. 이놈들은 내가 처리할게.”진서준이 앞으로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키가 거의 2미터에 달하는 거구의 사내가 찻집 안으로 들어왔다.남자는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상철아, 저놈 다리 하나 부러뜨려서 내던져.”성현도가 진서준을 가리키며 명령했다.“알겠습니다.”상철은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진서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서준아, 내가 할게.”허사연의 눈에는 불꽃 같은 전투욕이 타올랐다.“조심해. 저 녀석은 횡련 종사야.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진서준이 조용히 귀띔했다.“알았어. 설령 못 이긴다고 해도 어차피 네가 있잖아?”허사연이 장난스럽게 웃었다.진서준이 곁에 있는 한, 허사연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이봐, 사내자식이 여자 뒤에 숨는 게 말이 돼?”상철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이봐, 껑충이. 여자를 얕보지 마. 일단 이기고 나서 말해.”허사연이 상철을 도발했다.“아가씨, 그런 기생오라비 말고 날 따르지 그래? 밤마다 널 천국으로 보내줄 수 있는데?”상철이 음흉하게 웃었다.“죽고 싶어 환장했구나.”얼굴이 싸늘해진 허사연이 주먹을 날렸다.강렬한 펀치가 공기를 가르며 폭발음을 일으켰고 그 위력은 철판도 뚫을 수 있을 정도였다.하지만 상철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내가 가만히 서 있어도 넌 날 어쩔 수 없어.”“닥쳐!”허사연이 분노에 차 주먹을 그대로 상철의 얼굴로 내리꽂았다.상철은 일부러 머리를 숙이며 대머리 정수리로 받아냈다.쿵!둔탁한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주먹이 상철의 머리를 강타했으나 대머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허사연이 몇 걸음 물러섰다.순간 손에 뜨거운 통증이 밀려왔고 뼈가 부서질 것 같았다.손을 확인하자 하얀 피부였던 손등이 새빨갛게 부어올랐다.상철은 자기 머리를 한번 쓸어내리더니 빙그레 웃었다.“아가씨, 이제 내 실력을 알겠지?”그 모습에 허사연의 승부욕이 다시 불타올랐고 콧방귀를 뀌며 다시 달려들었다.이번에는 다리를 높이 들어 올려 상철의 머리를 내려찍었다.‘머리가 단단하다고 자랑하
이렇게 예쁘고 섹시한 여자가 싸움 실력이 이렇게 대단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완전 여성판 이소룡이었다.“너, 너희들 정말 너무 대담한 거 아니야? 여기가 어디인지 알기나 해? 어디서 대놓고 싸움질이야?”종업원은 순간 놀란 뒤 분노에 찬 얼굴로 진서준와 허사연을 가리켰다.찻집이 문을 연 이후로 이렇게 난동을 부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진서준과 허사연이 첫 사례였다.주변의 구경꾼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싸움 좀 하면 뭐해? 여긴 성씨 가문의 구역이야. 성씨 가문에서 한마디만 하면 저 남녀는 오늘 밤중으로 사라지겠지.”“어휴, 저 여자 너무 아까워. 저렇게 예쁜데 왜 죽지 못해서 안달이지?”“여자는 살 수도 있겠지만 남자는 무조건 죽을걸.”사람들은 저마다 수군거리며 이미 진서준과 허사연의 결말을 예상하는 듯했다.“그럼 네 말대로라면 내가 널 때린다 해도 얌전히 맞고 있어야 한다는 거야?”허사연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종업원에게 다가갔다.“오지 마!”종업원은 겁에 질려 연신 뒷걸음질 쳤다.“어떤 미친놈이 내 구역에서 소란을 피우는 거야?”그 순간, 2층에서 한 사람이 내려왔다.모두가 일제히 시선을 돌려 그 사람을 확인하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성현도가 오늘 여기 있었네?”누군가 그 청년을 알아보았다.“저 둘 끝장났네. 성현도는 악명 높은 냉혈한이야.”그 청년은 바로 찻집의 사장인 성현도였다.성현도는 르벨 재벌 2세 사이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친구에게는 무조건 의리를 지키지만 적에게는 무자비했다.성현도의 고문 방법은 수도 없이 많았고 게다가 무인으로서 무공 실력도 상당했다.“사장님, 저 남녀가 와서 난동을 부렸어요.”종업원은 성현도를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장이 나온 걸 확인한 허사연은 주먹 한 방에 종업원을 기절시켜 버렸다.“뭐야?”성현도의 눈이 가늘어졌고 표정이 험악해졌다.자기 앞에서 대놓고 부하를 때리다니, 이건 너무나도 명백한 도발이었다.“아가씨, 우리 처음 보는 사이 맞지? 우리
그리고 오후 2시가 되자 진서준은 허사연을 데리고 조호가 말한 천국찻집으로 향했다.겉모습만 보면 이 찻집은 진짜 전통찻집 같았고 규모도 꽤 컸다.하지만 막상 안에 들어가 보니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1층과 2층까지는 정말 평범한 찻집처럼 꾸며져 있었고 누가 봐도 이상한 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하지만 3층으로 올라가려면 회원권이 있어야 하거나 사장이 직접 허락한 사람만 출입할 수 있었다.“손님, 아가씨, 이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진서준과 허사연이 차를 마시러 온 줄 안 종업원이 빠르게 달려와 안내하려 했다.“그럴 필요 없어. 난 하경범을 찾으러 왔거든.”진서준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네?”종업원이 순간 얼어붙었다.“혹시 하씨 가문의 하 도련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맞아.”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손님은 누구신지...”종업원이 신중하게 물었다.진서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냥 복수하러 왔다고 전해.”그놈 아버지라고 하는 건 자기를 모욕하는 것과 같았고 친구라고 하기도 기분이 더러웠다.그 말에 종업원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손님, 여기서 장난치지 마세요.”하경범은 르벨에서 유명한 재벌 2세였다.이 찻집의 사장과도 막역한 사이였고 여기서 일하는 직원이라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왜? 못 믿겠어?”진서준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손님, 하 도련님에게 복수하려던 사람은 단 하루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종업원이 경고하듯 말했다.“그런 농담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그 말을 듣자 진서준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이렇게 전해. 그 하경범이 두들겨 맞고 나자빠지게 했던 진서준이 왔으니 당장 기어 나오라고 말이야.”진서준의 뻔뻔한 태도에 종업원은 어이가 없었다.“좋습니다. 손님이 그렇게 죽고 싶다면 제가 기꺼이 도와드리죠.”종업원은 바로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문제 발생했습니다. 난동자가 있습니다.”쿵! 쿵!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건장한 남자 스무 명이 들이닥쳤다.전부 검은
진서준과 허사연은 차를 타고 조호의 회사로 향했다.이 회사는 그냥 겉치레일 뿐, 진짜 돈이 들어오는 곳은 유흥업소들이었다.유흥업소를 얕잡아보면 안 된다.운 좋게 돈 많은 도련님들이라도 걸리면 하룻밤에 수억 원이 순식간에 손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진서준 씨!”진서준이 들어서자 조호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조호는 진서준 옆에 있는 허사연을 힐끗 쳐다본 뒤 고개를 숙이고 감히 더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잡담은 그만하고 하경범을 잡아가는 제일 좋은 타이밍만 말해.”진서준이 직설적으로 물었다.이 말에 조호는 속으로 크게 놀랐다.“매일 오후마다 하경범은 천국찻집이라는 곳에 갑니다.”조호는 재빨리 대답했다.“보통은 경호원 몇 명만 데리고 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얼씨구? 저런 인간이 매일 차나 마시러 간다고?”진서준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그게... 진서준 씨, 사실 그곳은 이름만 찻집이지 실제로는...”조호는 옆에 여성이 있다는 걸 의식해서 말을 흐렸지만 진서준은 그 뜻을 단번에 알아챘다.“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차를 마시는 곳이 아니라 그냥 인기 많은 인터넷 셀럽이 가득한 고급 유흥업소일 것이다.“진서준 씨, 듣자 하니 그 찻집의 주인은 성씨 가문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진짜로 움직이실 거라면 하경범이 이동 중일 때를 노리는 게 좋을 겁니다.”조호가 조심스럽게 조언했다.“응? 성씨 가문이 이런 사업도 해?”진서준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진서준은 오영수에게서 성미영에 대한 정보를 들은 적이 있었다.정의로운 성격의 성미영이 자기 가문에서 이런 유흥업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네, 듣기로는 성씨 가문의 한 직계 후손이 운영한다고 합니다. 여자에 미쳐 있는 놈이라 르벨의 돈 많은 도련님들과 꽤 친분이 깊다고 하더군요.”조호는 본인이 아는 정보를 전부 쏟아냈다.“좋아, 대충 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조호의 회사를 나온
진서준이 허사연의 캐리어를 들어주며 옆방으로 걸어갔다.그 뒷모습을 보며 도지아는 부러움이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인간은 원래 모여서 사는 걸 선호하는 동물이다.사회를 벗어나서 혼자 살아가는 건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가족도 친구도 없이 너무 오래 지내다 보면 결국 감정 없는 시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그렇게 되면 사람과 짐승의 차이가 없어질 것이다.“어제 전화할 때 그랬었지? 이번에 너 자기 출신을 찾으러 온 거라고.”호텔 방으로 돌아온 후, 허사연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너 원래 경성 진씨 가문 사람이잖아?”“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어. 그런데 할아버지가 예전에 말해주셨어. 사실 우리 아버지는 어릴 때 길에서 주워 온 아이였다고.”진서준은 허사연에게 숨길 생각이 없었다.허사연은 진서준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허사연이라면 이 비밀을 절대 밖으로 흘리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뭐라고? 아버님이 주워 온 아이라고?”허사연이 깜짝 놀랐다.“그래.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건 나뿐이야. 가족 중에서도 할아버지가 나한테만 알려주셨지.”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전, 오영수가 내 등에 있는 용을 보고는 내가 용맥의 일족이라고 했어. 그래서 오영수를 따라 여기 와서 오영수 셋째 삼촌에게 내 출신에 관해 알아보려 했던 거야.”“네 등에 용이 있다고? 난 한 번도 본 적 없는데?”허사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동안 둘이 알몸으로 함께한 시간도 적지 않은데 허사연은 한 번도 본 기억이 없었다.“내가 체내 혈기를 모을 때만 그 용이 나타나거든.”진서준이 설명을 이어갔다.“그런데 오영수 삼촌이 아직 돌아오질 않아서 일단은 여기서 며칠 기다려야 해.”“아니, 그럼 오씨 가문에서 널 안 재워줬어?”허사연이 의아해했다.명문대가인 오씨 가문에 빈방이 없을 리가 없었다.“그날 오영수를 찾아갔는데 마침 오영수 할아버지가 위중했어. 그리고 그 집안엔 그 어르신을 그냥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지.”진서준이 담담하게
“진짜 예쁜 새색시 숨겨놓고 있었네?”허사연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누구라도 자기 남자 방에 예쁘고 몸매가 완벽한 여자 하나가 같이 있는 걸 보면 의심 안 할 수가 없었다.게다가 지금은 아침이었다.설마 이 여자가 아침에 막 찾아온 건 아니겠지?“사연아, 오해야. 내가 제대로 설명할게.”진서준은 머리가 띵해졌고 뇌가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아가씨, 오해하지 마세요. 어제 저랑 진서준이 같은 방에서 잔 건 맞지만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저 밤새 한숨도 못 잤다니까요?”도지아가 황급히 해명에 나섰다.“네? 밤새 안 자고도 아무 일 없었다고요?”허사연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되물었다.“설마 밤새 불태우느라 못 잔 건 아니겠죠?”허사연의 농담과 진담이 뒤섞인 말에 진서준은 헛웃음만 나왔다.“사연아, 이쪽은 도지아야. 우리 진짜 그냥 친구야. 일단 들어와. 천천히 설명할게.”허사연이 방에 들어오자 진서준은 서로에게 소개했다.그러고는 이 방에서 일어난 상황을 설명했다.“도지아는 황예은이 소개해 준 환자야. 다리 치료를 부탁받았거든. 종아리를 봐봐. 이틀 전에 내가 직접 발라준 연고가 있어.”허사연이 내려다보자 확실히 연고가 발라져 있었다.“그리고 도지아가 밤새 안 잔 건 원기를 수련하느라 그랬던 거야. 너도 예전에 수련한다고 며칠씩 안 잔 적 있잖아?”허사연은 오해가 풀리자 그제야 빙그레 웃었다.“내가 뭐 어쨌다고 그렇게 호들갑이야?”“혹시라도 오해할까 봐 그러는 거잖아.”진서준이 빠르게 대답했다.“뭐야? 내가 그렇게 의심 많고 질투 많은 여자로 보여?”허사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아, 아니지. 우리 사연은 누구보다 속이 넓은 부드러운 여자지.”진서준이 급히 정정했다.“됐어, 너 겁먹은 거 너무 귀엽다.”허사연이 피식 웃었다.“넌 여기 좀 쉬고 있어. 내가 방 하나 잡고 올게.”진서준은 더 머뭇거릴 틈도 없이 벌떡 일어나 나가 버렸다.진서준의 뒷모습을 보며 허사연은 그제야 웃음을 터뜨렸다.“도지아 씨, 진서준이
“내가 가면 안 돼?”사실 진서준은 거절하려 했었다.르벨은 안개가 짙게 깔린 늪지대 같은 곳이라 진서준조차도 어디에 함정이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그러니 허사연이 온다면 다칠 가능성이 컸다.하지만 거절하면 허사연이 상처받을 게 뻔했다.“당연히 되지. 지금 위치 보낼게.”진서준은 단호하게 말하며 위치를 보냈다.자기 여자를 지킬 자신도 없으면서 강자들을 상대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자기야, 잘 자.”허사연이 애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너도 일찍 자.”진서준이 다정하게 답했다.전화를 끊고 나니 진서준의 졸음이 싹 가셨다.진서준은 창가로 다가가 이 화려한 도시를 내려다봤다.“오씨 가문, 안씨 가문, 하씨 가문... 너희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든 난 전부 박살 낼 거야. 이번엔 반드시 나와 아버지의 정체를 밝혀내고 말겠어.”진서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그렇게 별다른 사건 없이 밤이 지나갔다.다음 날 아침.진서준이 막 눈을 뜨자마자 도지아의 흥분한 외침이 들려왔다.“진서준, 됐어. 나 생겼어!”도지아는 눈 밑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는데 밤새 잠을 자지 않은 게 분명했다.진서준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너 아직 처녀 아니었어? 대체 어떻게 임신한 거야?”“미친놈아, 임신은 개뿔, 무슨 헛소리야?”도지아는 얼굴이 빨개지며 진서준을 노려봤다.“그럼 왜 아침부터 난리야?”진서준이 되물었다.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아침부터 흥분해 날뛰지 않을 것이다.“어제 네가 준 수련법 기억나지? 나 벌써 원기를 형성할 수 있게 됐어.”자기가 대단하다고 여긴 도지아는 자랑스럽게 선언했다.고작 하룻밤 만에 원기를 형성한 건 확실히 대단한 일이었다.“뭐? 그렇게 빠르다고? 너 타고난 천재 맞네?”진서준이 다소 의아한 표정을 보였다.보통 무인은 원기를 익히는 데만 최소 1년이 걸리는데 그것도 매일 꾸준히 수련할 경우에만 발생하는 일이었다.심지어 재능 있는 자들도 한두 달은 족히 걸린다.그런데 도지아는 단 하룻밤에 이 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