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변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은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진서준이 정말 눈 깜빡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사람을 죽이는 살인마라면 국안부가 진서준을 살려둘 리가 없었을 것이다.장서안은 진서준의 해명을 듣고 즉시 심국도를 말렸다.“장관님, 진 교관님 말을 들으셨죠? 이 모든 일은 장관님 조카와 조카딸이 자초한 일입니다. 너무 고집부리지 마세요.”“너도 적당히 해. 오늘 네가 뭐라고 떠들어도 난 절대 저 녀석을 살아서 이곳에서 내보내지 않을 거야.”심국도는 잔인무도한 표정을 지으며 위협했다.그때, 호텔 아래에서 빠르게 돌아가는 요란한 바퀴 소리가 들려왔다.심국도는 허순재를 끌고 창문 앞으로 가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검은 차들이 호텔 앞에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고 수천 명의 병사들이 호텔을 완전히 둘러싸며 출입을 막고 있었다.본래 이곳에서 식사하려던 돈 많은 사람들은 이 장면을 보고 기겁하며 어쩔 바를 몰랐다.“이건... 이건 무슨 상황이야? 혹시 간첩 잡으러 온 거 아니야?”“얼른 도망쳐. 군대가 나왔다는 건 이 호텔에 뭐가 큰일 났다는 거야.”“국내에서 군대가 사람 잡으러 출동하는 건 정말 오랜만에 보는걸...”주변 사람들이 하나둘씩 100미터 이상 떨어져서 휴대폰을 꺼내 몰래 촬영하고 있었다.“우리 사람들 드디어 왔네.”심국도는 흥분된 표정으로 말했다.“진 교관, 먼저 가세요. 제가 저 병사들을 막아두겠습니다.”장서안이 급히 진서준에게 제안했다.“가긴 뭐 가?”진서준은 태연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넌 여기서 네 사모님을 잘 돌보고 있어. 난 잠깐 내려가 볼게.”진서준이 스스로 내려가겠다고 하자 심국도는 움찔하더니 이내 비아냥거렸다.“진서준, 네 실력이 대단하다는 걸 나도 알아. 하지만 네가 아무리 하늘을 나는 실력이 있다고 해도 군대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도 없을 거야.”“너 참 조잘대기 좋아하는구나. 성격이 원래 그래?”진서준은 심국도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심국도는 코웃음을 치며 조카 심도준의 시신을 들고 먼저
이 소동은 결국 심국도 형제가 군사 기지로 이송되며 끝을 맺었다.심씨 가문의 다른 직계들도 자연스레 전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수년 동안 동북에서 위세를 떨쳤던 심씨 가문은 이렇게 단 몇 시간 만에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일부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더욱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였다.군대의 부장급 고위 인사도 상대할 수 없다니, 용존의 실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정도였다.진서준은 허사연 자매를 먼저 조씨 가문에 보내고 동북 군구의 일인자와 또 다른 조용한 곳으로 가서 대화를 나누었다.“아직 이렇게 새파란 나이에 벌써 영웅급 실력이구먼.”최해준이 진서준을 보는 눈빛에는 칭찬과 감탄이 가득했다.스무 살 남짓한 아이에 벌써 이렇게 대단한 성과를 올리다니, 대한민국 전역에서도 이런 인물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최 수장님, 과찬입니다.”진서준은 미소를 지으며 겸손하게 말했다.탁자 위에 반짝이는 소장 계급 훈장이 햇빛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빛났다.진서준은 그 훈장을 흘끗 보고 나서 물었다.“최 수장님이 직접 오신 걸 보니 제게 단지 군대 계급 증서를 전해주시려는 것만은 아니죠?”“똑똑한 사람은 눈치가 빨라 참 좋아.”최해준은 웃으며 진서준을 칭찬했고 이어서 진지하게 말했다.“이번에 널 찾은 건 사실 네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야.”“설표 특전대 훈련을 맡으라는 겁니까?”“그것도 부탁 중의 하나긴 해. 네가 참 잘 훈련했던 것 같아. 설표 특전대 그 애들이 정말 눈에 띌 정도로 엄청난 변화가 생겼어.”설표 특전대의 변화는 최해준도 유심히 눈여겨보았기에 진서준에게 소장 계급 훈장이 내려진 것이다.“최 수장님, 이전에 소 사령관과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전 요즘 급히 해야 할 일이 었어서...”“네가 바쁜 건 나도 알아. 근데 이 일은 대한민국 전역에서도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최해준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우리는 최근에 정보를 하나 받았어. 며칠 후, 우리 내부에 숨어 있는 간첩이 명주시에서 유람선을 타는데 그 배에서 초아국 사람
“진서준 씨, 정말 그렇게 무정하신 건가요?”허순재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 진서준을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그 말을 들은 진서준은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무정하다고? 아까 호텔에서 내가 너희에게 기회를 안 줬어?”진서준은 여전히 차가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기회를 놓친 건 너희잖아. 지금 와서 날 탓한다고? 웃기지 마. 너희 집안이 이렇게 망한 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진서준이 감옥에서 막 나왔을 때, 허성태는 진서준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모든 걸 진서준에게 걸었다.허성태가 부유해진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진서준을 제대로 알아본 덕분이었다.사람 보는 눈이 예리하지 않다면 결국 눈앞의 허씨 가문처럼 가난과 몰락의 길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허씨 가문 사람들을 밀쳐내고 진서준은 냉랭한 표정을 유지한 채로 조씨 가문 저택으로 걸어갔다.“할아버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뭘 어떻게 하겠어? 당연히 집에 돌아가야지.”허순재가 이를 악물고 핀잔을 줬다.“쳇, 자기가 뭐 대단한 인물이라고 저렇게 싸가지 없게 굴어? 저 녀석 없어도 우리 허씨 가문은 무조건 부자가 될 수 있을 거야.”강정숙은 비굴하게 아첨하던 표정을 지우고 대신 경멸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비록 말은 그렇게 했지만 허씨 가문이 진짜 돈 많은 명문대가로 부상해 동북 지방 가문의 정점에 오르는 것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수준이었다.“진서준 오빠, 오늘 바로 떠나려는 건가요?”진서준이 오늘 오후에 떠난다는 말을 들은 조민영은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사실 조민영만 아쉬운 게 아니라 조태희도 진서준이 떠나는 게 아쉬운 듯했다.진서준이 여기에 있으면 조민영은 진서준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고 자연스레 조민영이 진서준과 감정을 발전시킬 기회가 생길 터였다.진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오늘 떠나야죠. 제가 동북에 있은 시간이 꽤 길었어요.”“그렇군요, 그럼 다음엔 언제 또 오시나요?”조민영이 또 질문을 던졌다.“그건 저도 잘 모르
늦은 밤에 진서준 일행은 비행기를 타고 서울시에 도착했다.오랫동안 진서준을 보지 못한 조희선 일행은 진서준이 갑자기 돌아온 것에 놀라며 기뻐했다.“서준아, 오기 전에 미리 말이라도 해주지 그랬어?”조희선은 무척 기뻐하며 진서준의 손을 잡고 소파에 앉혔다.“어머님, 서준이 어머님을 깜짝 놀라게 하려고 일부러 말하지 않고 온 거예요.”허사연이 웃으며 대신 대답했다.“사연아, 그동안 우리 아들 서준이를 잘 돌봐주느라 수고했어.”조희선은 허사연을 보며 환하게 웃으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아니에요, 저는 전혀 힘들지 않았어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어요.”허사연은 미소를 지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자 진서라도 허사연을 거들었다.“엄마, 그렇게 말하면 사연 언니가 너무 부담스러울 거잖아요.”“맞아, 그 말이 맞아. 엄마가 선 그은 것 같구나.”조희선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아참, 어머님, 이번에 동북에서 돌아오면서 작은 선물을 몇 개 준비했어요.”허윤진은 급히 가방에서 작은 상자 몇 개를 꺼냈다.상자 안에는 얼음 조각상이 들어 있었다.이 얼음 조각들은 조희선 일행의 모습을 본떠 만든 귀여운 캐릭터였다.얼음 조각은 고온에 노출되면 녹지만 진서준이 영기를 얼음 조각에 부여해 영기가 유지되는 한, 이 얼음 조각들이 녹을 일은 없었다.선물은 비싸고 싸고를 떠나 그 선물에 깃든 정성이 가장 중요한 법이다.이렇게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들을 보자 조희선 일행은 신나서 어쩔 바를 몰랐다.“어머님, 저랑 윤진은 먼저 집에 가볼게요. 내일 다시 뵐게요.”잠시 한담을 나눈 후, 허사연과 허윤진이 일어나 집에 돌아가려고 했다.“서준아, 사연 자매를 배웅해 줘야지.”조희선의 말에 진서준도 벌떡 일어났다.“알았어요.”진서준은 차를 몰고 허사연 자매를 허씨 가문 별장까지 데려다준 뒤, 다시 차를 돌려 집으로 돌아왔다.“서준아, 이번엔 집에 얼마나 있을 거야?”조심스레 묻는 조희선의 눈빛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조희선도 아들 진서준이 더
두 사람이 올라가자 김연아는 그제야 진서준을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아무 말 없이 눈빛 하나로 천 마디 말을 대신하는 듯했다.진서준도 결정적인 순간에 주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진서준은 앞으로 다가가 김연아를 품에 안고 그녀의 몸에서 나는 향기를 탐욕스럽게 들이켰다.“요 며칠 다치거나 아픈 데는 없었어?”김연아는 눈을 반쯤 감고 진서준의 따뜻한 품에 몸을 맡긴 채 물었다.잠시 후, 진서준이 입을 열었다.“다치긴 했어.”“응? 어디 다쳤어?”김연아는 깜짝 놀라며 진서준을 쳐다보았다.“네가 직접 확인해 볼래?”진서준은 김연아가 자기 말에 속았다는 걸 눈치채고 교활한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김연아는 말없이 진서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윗옷을 벗기고 나서 온몸을 훑어봤지만 이상하게도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위가 아니고 아래를 다친 거야?”김연아는 얼굴이 붉어졌다.“응, 아니면 방으로 가서 좀 더 자세히 확인해 볼래?”진서준의 숨결이 거칠어졌고 그의 손은 김연아의 부드러운 허리선 위를 가볍게 어루만지기 시작했다.그제야 김연아는 진서준의 의도를 파악했다.진서준은 사실 다치지 않았고 그저 김연아와 장난치려고 한 수작이었다.김연아가 고개를 숙이던 순간, 갑자기 그녀의 발밑에 하얀 작은 원숭이가 나타났다.“어머, 여기서 원숭이가 왜 나와?”김연아는 깜짝 놀라며 진서준의 품으로 뛰어들었다.“하얀아, 밖에 나가 누렁이랑 놀아.”진서준은 하얀이를 발로 가볍게 툭툭 쳤다.주인에게 발로 차인 하얀이는 화내지 않고 머리로 진서준의 바지를 비비더니 거실을 나갔다.“이제 괜찮지? 하얀이는 나갔어... 네가 걷기 불편하면 내가 안고 올라갈게.”진서준은 품속에 안긴 김연아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김연아의 하얀 목덜미는 이미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그녀가 이 상황이 얼마나 쑥스러운지 고스란히 드러났다.“대답하지 않으면 인정한 걸로 할게.”진서준은 김연아를 안고 자기 방으로 갔다.방문을 잠그고 진서준은 재빨리 남은 옷을 벗어 던졌다.
이른 아침, 첫 번째 햇살이 얇은 커튼을 통과해 진서준의 얼굴에 비쳤다.새로 떠오른 태양의 온도를 느끼며 진서준이 천천히 눈을 떴다.“연아아...”눈을 뜬 첫 번째 일이 바로 김연아를 찾는 거였지만 그녀가 옆에 없다는 걸 진서준은 이내 깨달았다.진서준이 깨어나기 전에 김연아는 이미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비록 조희선과 진서라가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었지만 김연아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가 진서준의 방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는 걸 원치 않았다.진서준은 찬물로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1층으로 내려갔다.“엄마, 서라야, 벌써 일어났네?”엄마와 여동생이 벌써 일어나서 주방에서 요리하는 모습을 본 진서준은 깜짝 놀랐다.“일찍 일어나는 게 습관이 됐어. 누워 있으면 오히려 불편해지더라.”조희선은 웃으며 대답하더니 이내 진서준에게 눈짓을 보냈다.“연아는 일어났어?”다른 사람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진서준도 그 말에 얼굴이 붉어졌다.“이미 자기 방으로 갔어요.”진서준은 말을 끝내고 바로 거실을 허겁지겁 빠져나갔다.“어머, 서준이 쑥스러워할 줄은 몰랐네.”진서준의 뒷모습을 보며 조희선은 빙그레 웃었다.“엄마, 오빠가 저렇게 하면 사연 언니가 뭐라고 안 할까요?”진서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그럴 리 없어, 사연은 똑똑한 아이야. 조금이라도 불만이 있었다면 연아가 집에 있을 수 없었을 거야. 대신 진서준이 이 여자애들에게 좀 미안한 게 많겠지.” 조희선은 한숨을 쉬며 자기 속내를 털어놨다.앞마당에 도착한 진서준은 그곳의 상황을 보고 깜짝 놀랐다.본래 거울처럼 깔끔하고 평평했던 잔디밭은 지금 구덩이들로 가득했고 흰색과 노란색 털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다.그 털들을 보자 진서준은 곧바로 누가 이곳에서 소란을 피웠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누렁이야, 하얀이야! 너희 둘, 얼른 이리 와!”진서준은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진서준의 목소리를 듣자 바닥에 엎드려 자던 둘은 즉시 일어나 벌벌 떨며 진서준에게 다가갔다.“이 구덩이들은 너희가
허사연 자매가 이렇게 화사하게 꾸민 이유는 바로 진서준을 위해서였다.“서준아, 왜 두 귀염둥이를 괴롭히고 있어?”누렁이와 하얀이가 일하는 모습을 보자 허사연이 웃으며 물었다.진서준은 그 질문에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난 지금 괴롭히는 게 아니야. 이 난장판은 이 두 녀석이 만들어낸 거야.”두 귀염둥이가 이 난장판을 만들었다는 소리를 듣자 허윤진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두 귀염둥이가 힘이 꽤 센가 보네.”허윤진의 지금 실력으로는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난장판을 만들 수 없을 것이다.“조기강도 하얀이 상대가 안 돼. 이 정도면 대충 얘네 실력이 짐작돼?”진서준이 웃으며 해명하자 이번에는 허사연도 깜짝 놀랐다.“뭐? 조기강도 하얀이 상대가 안 된다고?”조기강은 검존이라는 칭호를 얻은 인물로 그 실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그렇게 강력한 인물도 하얀이를 상대하지 못했는데 진서준은 도대체 어떻게 이 하얀이를 자기 애완동물로 길들인 걸까?그 순간, 허사연 자매가 진서준을 향한 경외심이 더 커졌다.“그냥 운이 좋았던 거야. 그때 이 녀석을 만났을 때 이 녀석도 다친 상태였어.”솔직하게 해명한 진서준이 화제를 돌렸다.“너희 둘은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아버님이랑 더 있지 그래?”“좀 부탁할 일이 있어서 왔어.”허사연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어젯밤 집에 돌아가자마자 허성태는 딸들을 붙잡고 한참 근황을 얘기한 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진서준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부탁했다.진서준은 그 말에 실실 웃으며 말했다.“한 집안 사람끼리 이렇게 격식 차리지 말고 편하게 말해.”그러자 허사연도 더는 숨기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부시장 서정훈을 기억해?”당시 진서준과 서정훈의 아들 서현욱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을 때, 그 시장은 의외로 자기 아들을 편들지 않았다.그 사람은 공적인 자리에서도 청렴하고 정직한 정치인으로 소문난 인물인지라 진서준이 진심으로 감탄하는 관료였다.“기억나,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진서준이
아침을 먹고 진서준과 허사연, 허윤진은 차를 타고 서정훈의 집으로 갔다.작년과 마찬가지로 집 앞에는 대문짝만한 설날 글귀 외에는 아무 장식도 없었다.“내가 문 두드릴게.”허사연이 바로 앞장서서 문을 두드렸다.똑똑...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집 안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구세요?”“사모님, 저예요!”허사연이 이내 대답했다.심해윤은 허사연의 목소리를 듣자 얼른 문을 열었다.“사연아, 왜 또 왔어?”심해윤은 문을 열고 의아한 얼굴로 허사연을 바라보았다.조금 전에 허사연 자매가 왔었고 이제 겨우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또 왔다니, 혹시 허씨 가문에 무슨 일이 생겨서 자기와 서정훈에게 부탁하러 온 걸까?심해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심해윤은 인사처의 처장이었고 서정훈은 서울시의 시장이었다.이런 높은 신분을 갖춘 부부였기에 매일 그들 부부에게 뭔가를 부탁하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서정훈이 공정하고 청렴한 인물이 아니었다면 벌써 수많은 사람들이 서씨 가문 문턱을 드나들며 닳았을 것이다.“사모님, 오늘 서현욱을 치료하려고 진서준을 데리고 왔어요.”허사연이 즉시 설명했다.“응? 진서준도 왔다고?”진서준을 발견하자 심해윤의 표정이 밝아졌지만 이내 눈빛에 걱정이 스쳤다.심해윤은 진서준의 의술 실력을 잘 알지만 진서준과 서현욱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현재 서현욱의 상태는 매우 불안정했고 이따가 두 사람이 재회해 서현욱이 다시 진서준을 욕하며 흥분한다면 큰일이었다.“사모님, 오랜만이에요.”진서준이 웃으며 선뜻 인사했다.“정말 오랜만이네. 얼른 들어와.”심해윤은 세 사람을 친절하게 집 안으로 안내했다.집 안에 들어간 진서준이 거실을 둘러보자 작년보다 더 간소하게 꾸며져 있는 걸 발견했다.이런 인테리어는 시장이 일상생활을 보내고 있을 집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편하게 앉아. 내가 물 좀 갖다줄게.”“그렇게 번거롭게 안 해도 돼요. 진서준이 서현욱 치료하는 게 더 빠를 거예요.” 허사연은
“뭐라고? 불법적인 일이 우리 가게에서 일어난다고? 말도 안 돼.”성현도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넌 전신전 소속이잖아. 그런데 네 오빠인 내가 어떻게 법률을 어기는 일을 하겠어?”“그럼 이 사람들은 왜 부른 거야? 집단 폭력도 불법이거든.”성미영은 차가운 시선을 보이며 성현도와 따졌다.“미영아, 이건 내가 싸우려던 게 아니야. 저 녀석이 일부러 시비 걸러 온 거라고.”성현도는 진서준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이놈이 일부러 우리 찻집에 난입해 행패를 부리고 상철을 두들겨 패서 머리에 혹이 다 나버렸어. 난 단순히 정당방위를 위해 부른 거라고.”성미영이 등장하자 성현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솔직히 실력만 놓고 보면 성현도는 성미영보다 한참 부족했다.게다가 성미영은 전신전 소속인지라 저 남녀가 군부 조직인 전신전을 적으로 돌릴 리 없었다.군대를 건드리는 순간, 무조건 좋은 결과는 있을 수 없었다.“진서준, 도대체 무슨 일이야?”성미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라? 너희 둘이 아는 사이야?”성현도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방금 내려놨던 마음이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난 사람을 찾으러 왔어. 하씨 가문 하경범이 이 위층에 있다고 들었는데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어.”진서준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그리고 또 하나, 저 위에서 불법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도 하더군.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어.”이 말에 성현도의 표정이 단숨에 험악해졌고 즉시 반박에 나섰다.“헛소리 마. 우리 가게는 단순한 찻집이야. 불법적인 일 따윈 없어. 근거없는 소문을 왜 털어놓고 난리야?”“미영아, 저 녀석한테 속지 마. 난 네 사촌 오빠야. 내가 그런 불법적인 짓을 할 사람이겠어?”성미영이 곧바로 진서준에게 물었다.“진서준, 너 증거 있어?”“직접 올라가 보면 다 알게 될 거잖아?”진서준이 가볍게 말했다.“오빠, 위층으로 가자.”성미영이 단호하게 말했다.“그, 그건 좀 곤란해. 위층엔 귀
순간, 장내는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모든 시선이 진서준에게 쏠렸고 사람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다들 진서준을 그냥 얼굴만 반반한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진짜 고수였다.성현도의 부하 중 최고 실력자조차 상대가 되지 않았다.성현도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렸고 상철을 향해서 욕설을 날렸다.“쓰레기 자식, 이런 애송이 하나도 못 이겨?”부하가 지면 망신당하는 건 결국 성현도 자신이었다.이대로 체면을 구긴 채 끝낼 수는 없었다.이대로 넘어가면 앞으로 르벨 재벌 2세들 사이에서 조롱거리가 될 게 뻔했다.“이봐, 네 실력이 괜찮은 건 인정할게.”성현도가 싸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근데 너 혼자서 백 명을 상대할 수 있어? 천 명은? 잘 들어. 내 부하는 수도 없이 많아. 너 같은 놈 하나 처리하는 데 전화 한 통이면 충분해.”진서준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다시 말하지만 난 그냥 하경범을 찾으러 온 거야. 그 녀석만 넘기면 오늘 일은 없던 걸로 해주지.”“없던 걸로 한다고?”성현도가 그 말에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너 지금 누굴 상대로 협상하려 드는 거야? 난 성씨 가문의 직계야. 날 건드리면 상대해야 할 건 나 하나가 아니라 우리 가문 전체라고.”그때,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곧이어 검은색 전투복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이 남자들은 전부 성씨 가문의 경호원이었고 실력도 만만하지 않았다.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무려 50명 이상이었다.한순간에 텅 비어 있던 로비가 사람들로 꽉 찼다.“저 자식 끝났네. 이 정도 성씨 가문 인원이라면 아무리 강해도 버틸 수가 없지.”“그러게 말이야.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없잖아.”“왜 쓸데없이 성현도를 건드린 거지? 스스로 무덤을 판 거잖아.”구경꾼들은 이 광경에 각자 다른 감정을 보였다.누군가는 동정을, 누군가는 아쉬움을, 또 누군가는 짙은 흥미를 보였다.“사연아, 넌 좀 쉬어. 이놈들은 내가 처리할게.”진서준이 앞으로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키가 거의 2미터에 달하는 거구의 사내가 찻집 안으로 들어왔다.남자는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상철아, 저놈 다리 하나 부러뜨려서 내던져.”성현도가 진서준을 가리키며 명령했다.“알겠습니다.”상철은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진서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서준아, 내가 할게.”허사연의 눈에는 불꽃 같은 전투욕이 타올랐다.“조심해. 저 녀석은 횡련 종사야.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진서준이 조용히 귀띔했다.“알았어. 설령 못 이긴다고 해도 어차피 네가 있잖아?”허사연이 장난스럽게 웃었다.진서준이 곁에 있는 한, 허사연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이봐, 사내자식이 여자 뒤에 숨는 게 말이 돼?”상철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이봐, 껑충이. 여자를 얕보지 마. 일단 이기고 나서 말해.”허사연이 상철을 도발했다.“아가씨, 그런 기생오라비 말고 날 따르지 그래? 밤마다 널 천국으로 보내줄 수 있는데?”상철이 음흉하게 웃었다.“죽고 싶어 환장했구나.”얼굴이 싸늘해진 허사연이 주먹을 날렸다.강렬한 펀치가 공기를 가르며 폭발음을 일으켰고 그 위력은 철판도 뚫을 수 있을 정도였다.하지만 상철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내가 가만히 서 있어도 넌 날 어쩔 수 없어.”“닥쳐!”허사연이 분노에 차 주먹을 그대로 상철의 얼굴로 내리꽂았다.상철은 일부러 머리를 숙이며 대머리 정수리로 받아냈다.쿵!둔탁한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주먹이 상철의 머리를 강타했으나 대머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허사연이 몇 걸음 물러섰다.순간 손에 뜨거운 통증이 밀려왔고 뼈가 부서질 것 같았다.손을 확인하자 하얀 피부였던 손등이 새빨갛게 부어올랐다.상철은 자기 머리를 한번 쓸어내리더니 빙그레 웃었다.“아가씨, 이제 내 실력을 알겠지?”그 모습에 허사연의 승부욕이 다시 불타올랐고 콧방귀를 뀌며 다시 달려들었다.이번에는 다리를 높이 들어 올려 상철의 머리를 내려찍었다.‘머리가 단단하다고 자랑하
이렇게 예쁘고 섹시한 여자가 싸움 실력이 이렇게 대단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완전 여성판 이소룡이었다.“너, 너희들 정말 너무 대담한 거 아니야? 여기가 어디인지 알기나 해? 어디서 대놓고 싸움질이야?”종업원은 순간 놀란 뒤 분노에 찬 얼굴로 진서준와 허사연을 가리켰다.찻집이 문을 연 이후로 이렇게 난동을 부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진서준과 허사연이 첫 사례였다.주변의 구경꾼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싸움 좀 하면 뭐해? 여긴 성씨 가문의 구역이야. 성씨 가문에서 한마디만 하면 저 남녀는 오늘 밤중으로 사라지겠지.”“어휴, 저 여자 너무 아까워. 저렇게 예쁜데 왜 죽지 못해서 안달이지?”“여자는 살 수도 있겠지만 남자는 무조건 죽을걸.”사람들은 저마다 수군거리며 이미 진서준과 허사연의 결말을 예상하는 듯했다.“그럼 네 말대로라면 내가 널 때린다 해도 얌전히 맞고 있어야 한다는 거야?”허사연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종업원에게 다가갔다.“오지 마!”종업원은 겁에 질려 연신 뒷걸음질 쳤다.“어떤 미친놈이 내 구역에서 소란을 피우는 거야?”그 순간, 2층에서 한 사람이 내려왔다.모두가 일제히 시선을 돌려 그 사람을 확인하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성현도가 오늘 여기 있었네?”누군가 그 청년을 알아보았다.“저 둘 끝장났네. 성현도는 악명 높은 냉혈한이야.”그 청년은 바로 찻집의 사장인 성현도였다.성현도는 르벨 재벌 2세 사이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친구에게는 무조건 의리를 지키지만 적에게는 무자비했다.성현도의 고문 방법은 수도 없이 많았고 게다가 무인으로서 무공 실력도 상당했다.“사장님, 저 남녀가 와서 난동을 부렸어요.”종업원은 성현도를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장이 나온 걸 확인한 허사연은 주먹 한 방에 종업원을 기절시켜 버렸다.“뭐야?”성현도의 눈이 가늘어졌고 표정이 험악해졌다.자기 앞에서 대놓고 부하를 때리다니, 이건 너무나도 명백한 도발이었다.“아가씨, 우리 처음 보는 사이 맞지? 우리
그리고 오후 2시가 되자 진서준은 허사연을 데리고 조호가 말한 천국찻집으로 향했다.겉모습만 보면 이 찻집은 진짜 전통찻집 같았고 규모도 꽤 컸다.하지만 막상 안에 들어가 보니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1층과 2층까지는 정말 평범한 찻집처럼 꾸며져 있었고 누가 봐도 이상한 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하지만 3층으로 올라가려면 회원권이 있어야 하거나 사장이 직접 허락한 사람만 출입할 수 있었다.“손님, 아가씨, 이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진서준과 허사연이 차를 마시러 온 줄 안 종업원이 빠르게 달려와 안내하려 했다.“그럴 필요 없어. 난 하경범을 찾으러 왔거든.”진서준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네?”종업원이 순간 얼어붙었다.“혹시 하씨 가문의 하 도련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맞아.”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손님은 누구신지...”종업원이 신중하게 물었다.진서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냥 복수하러 왔다고 전해.”그놈 아버지라고 하는 건 자기를 모욕하는 것과 같았고 친구라고 하기도 기분이 더러웠다.그 말에 종업원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손님, 여기서 장난치지 마세요.”하경범은 르벨에서 유명한 재벌 2세였다.이 찻집의 사장과도 막역한 사이였고 여기서 일하는 직원이라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왜? 못 믿겠어?”진서준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손님, 하 도련님에게 복수하려던 사람은 단 하루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종업원이 경고하듯 말했다.“그런 농담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그 말을 듣자 진서준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이렇게 전해. 그 하경범이 두들겨 맞고 나자빠지게 했던 진서준이 왔으니 당장 기어 나오라고 말이야.”진서준의 뻔뻔한 태도에 종업원은 어이가 없었다.“좋습니다. 손님이 그렇게 죽고 싶다면 제가 기꺼이 도와드리죠.”종업원은 바로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문제 발생했습니다. 난동자가 있습니다.”쿵! 쿵!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건장한 남자 스무 명이 들이닥쳤다.전부 검은
진서준과 허사연은 차를 타고 조호의 회사로 향했다.이 회사는 그냥 겉치레일 뿐, 진짜 돈이 들어오는 곳은 유흥업소들이었다.유흥업소를 얕잡아보면 안 된다.운 좋게 돈 많은 도련님들이라도 걸리면 하룻밤에 수억 원이 순식간에 손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진서준 씨!”진서준이 들어서자 조호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조호는 진서준 옆에 있는 허사연을 힐끗 쳐다본 뒤 고개를 숙이고 감히 더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잡담은 그만하고 하경범을 잡아가는 제일 좋은 타이밍만 말해.”진서준이 직설적으로 물었다.이 말에 조호는 속으로 크게 놀랐다.“매일 오후마다 하경범은 천국찻집이라는 곳에 갑니다.”조호는 재빨리 대답했다.“보통은 경호원 몇 명만 데리고 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얼씨구? 저런 인간이 매일 차나 마시러 간다고?”진서준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그게... 진서준 씨, 사실 그곳은 이름만 찻집이지 실제로는...”조호는 옆에 여성이 있다는 걸 의식해서 말을 흐렸지만 진서준은 그 뜻을 단번에 알아챘다.“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차를 마시는 곳이 아니라 그냥 인기 많은 인터넷 셀럽이 가득한 고급 유흥업소일 것이다.“진서준 씨, 듣자 하니 그 찻집의 주인은 성씨 가문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진짜로 움직이실 거라면 하경범이 이동 중일 때를 노리는 게 좋을 겁니다.”조호가 조심스럽게 조언했다.“응? 성씨 가문이 이런 사업도 해?”진서준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진서준은 오영수에게서 성미영에 대한 정보를 들은 적이 있었다.정의로운 성격의 성미영이 자기 가문에서 이런 유흥업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네, 듣기로는 성씨 가문의 한 직계 후손이 운영한다고 합니다. 여자에 미쳐 있는 놈이라 르벨의 돈 많은 도련님들과 꽤 친분이 깊다고 하더군요.”조호는 본인이 아는 정보를 전부 쏟아냈다.“좋아, 대충 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조호의 회사를 나온
진서준이 허사연의 캐리어를 들어주며 옆방으로 걸어갔다.그 뒷모습을 보며 도지아는 부러움이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인간은 원래 모여서 사는 걸 선호하는 동물이다.사회를 벗어나서 혼자 살아가는 건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가족도 친구도 없이 너무 오래 지내다 보면 결국 감정 없는 시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그렇게 되면 사람과 짐승의 차이가 없어질 것이다.“어제 전화할 때 그랬었지? 이번에 너 자기 출신을 찾으러 온 거라고.”호텔 방으로 돌아온 후, 허사연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너 원래 경성 진씨 가문 사람이잖아?”“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어. 그런데 할아버지가 예전에 말해주셨어. 사실 우리 아버지는 어릴 때 길에서 주워 온 아이였다고.”진서준은 허사연에게 숨길 생각이 없었다.허사연은 진서준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허사연이라면 이 비밀을 절대 밖으로 흘리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뭐라고? 아버님이 주워 온 아이라고?”허사연이 깜짝 놀랐다.“그래.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건 나뿐이야. 가족 중에서도 할아버지가 나한테만 알려주셨지.”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전, 오영수가 내 등에 있는 용을 보고는 내가 용맥의 일족이라고 했어. 그래서 오영수를 따라 여기 와서 오영수 셋째 삼촌에게 내 출신에 관해 알아보려 했던 거야.”“네 등에 용이 있다고? 난 한 번도 본 적 없는데?”허사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동안 둘이 알몸으로 함께한 시간도 적지 않은데 허사연은 한 번도 본 기억이 없었다.“내가 체내 혈기를 모을 때만 그 용이 나타나거든.”진서준이 설명을 이어갔다.“그런데 오영수 삼촌이 아직 돌아오질 않아서 일단은 여기서 며칠 기다려야 해.”“아니, 그럼 오씨 가문에서 널 안 재워줬어?”허사연이 의아해했다.명문대가인 오씨 가문에 빈방이 없을 리가 없었다.“그날 오영수를 찾아갔는데 마침 오영수 할아버지가 위중했어. 그리고 그 집안엔 그 어르신을 그냥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지.”진서준이 담담하게
“진짜 예쁜 새색시 숨겨놓고 있었네?”허사연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누구라도 자기 남자 방에 예쁘고 몸매가 완벽한 여자 하나가 같이 있는 걸 보면 의심 안 할 수가 없었다.게다가 지금은 아침이었다.설마 이 여자가 아침에 막 찾아온 건 아니겠지?“사연아, 오해야. 내가 제대로 설명할게.”진서준은 머리가 띵해졌고 뇌가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아가씨, 오해하지 마세요. 어제 저랑 진서준이 같은 방에서 잔 건 맞지만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저 밤새 한숨도 못 잤다니까요?”도지아가 황급히 해명에 나섰다.“네? 밤새 안 자고도 아무 일 없었다고요?”허사연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되물었다.“설마 밤새 불태우느라 못 잔 건 아니겠죠?”허사연의 농담과 진담이 뒤섞인 말에 진서준은 헛웃음만 나왔다.“사연아, 이쪽은 도지아야. 우리 진짜 그냥 친구야. 일단 들어와. 천천히 설명할게.”허사연이 방에 들어오자 진서준은 서로에게 소개했다.그러고는 이 방에서 일어난 상황을 설명했다.“도지아는 황예은이 소개해 준 환자야. 다리 치료를 부탁받았거든. 종아리를 봐봐. 이틀 전에 내가 직접 발라준 연고가 있어.”허사연이 내려다보자 확실히 연고가 발라져 있었다.“그리고 도지아가 밤새 안 잔 건 원기를 수련하느라 그랬던 거야. 너도 예전에 수련한다고 며칠씩 안 잔 적 있잖아?”허사연은 오해가 풀리자 그제야 빙그레 웃었다.“내가 뭐 어쨌다고 그렇게 호들갑이야?”“혹시라도 오해할까 봐 그러는 거잖아.”진서준이 빠르게 대답했다.“뭐야? 내가 그렇게 의심 많고 질투 많은 여자로 보여?”허사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아, 아니지. 우리 사연은 누구보다 속이 넓은 부드러운 여자지.”진서준이 급히 정정했다.“됐어, 너 겁먹은 거 너무 귀엽다.”허사연이 피식 웃었다.“넌 여기 좀 쉬고 있어. 내가 방 하나 잡고 올게.”진서준은 더 머뭇거릴 틈도 없이 벌떡 일어나 나가 버렸다.진서준의 뒷모습을 보며 허사연은 그제야 웃음을 터뜨렸다.“도지아 씨, 진서준이
“내가 가면 안 돼?”사실 진서준은 거절하려 했었다.르벨은 안개가 짙게 깔린 늪지대 같은 곳이라 진서준조차도 어디에 함정이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그러니 허사연이 온다면 다칠 가능성이 컸다.하지만 거절하면 허사연이 상처받을 게 뻔했다.“당연히 되지. 지금 위치 보낼게.”진서준은 단호하게 말하며 위치를 보냈다.자기 여자를 지킬 자신도 없으면서 강자들을 상대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자기야, 잘 자.”허사연이 애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너도 일찍 자.”진서준이 다정하게 답했다.전화를 끊고 나니 진서준의 졸음이 싹 가셨다.진서준은 창가로 다가가 이 화려한 도시를 내려다봤다.“오씨 가문, 안씨 가문, 하씨 가문... 너희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든 난 전부 박살 낼 거야. 이번엔 반드시 나와 아버지의 정체를 밝혀내고 말겠어.”진서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그렇게 별다른 사건 없이 밤이 지나갔다.다음 날 아침.진서준이 막 눈을 뜨자마자 도지아의 흥분한 외침이 들려왔다.“진서준, 됐어. 나 생겼어!”도지아는 눈 밑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는데 밤새 잠을 자지 않은 게 분명했다.진서준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너 아직 처녀 아니었어? 대체 어떻게 임신한 거야?”“미친놈아, 임신은 개뿔, 무슨 헛소리야?”도지아는 얼굴이 빨개지며 진서준을 노려봤다.“그럼 왜 아침부터 난리야?”진서준이 되물었다.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아침부터 흥분해 날뛰지 않을 것이다.“어제 네가 준 수련법 기억나지? 나 벌써 원기를 형성할 수 있게 됐어.”자기가 대단하다고 여긴 도지아는 자랑스럽게 선언했다.고작 하룻밤 만에 원기를 형성한 건 확실히 대단한 일이었다.“뭐? 그렇게 빠르다고? 너 타고난 천재 맞네?”진서준이 다소 의아한 표정을 보였다.보통 무인은 원기를 익히는 데만 최소 1년이 걸리는데 그것도 매일 꾸준히 수련할 경우에만 발생하는 일이었다.심지어 재능 있는 자들도 한두 달은 족히 걸린다.그런데 도지아는 단 하룻밤에 이 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