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와.”공항 입구에서 허사연이 직접 차를 몰고 와 진서준을 마중했다.다른 사람들은 오늘 따라오지 않았는데 그들 두 사람만의 시간을 갖게 하기 위해서였다.비록 며칠 만에 만났지만 진서준은 몇 년 만에 만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진서준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허사연을 꽉 안았다.“사연아, 너무 보고 싶었어.”“나도 보고 싶었어.”허사연은 진서준을 안으며 진서준의 향기를 천천히 음미했다.공항을 오가는 사람들은 다들 갈 길이 바쁜지 진서준과 허사연을 주목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잠시 떨어져 있던 연인은 새로 사귄 연인보다 더 달콤한 법이다.두 사람은 오랫동안 안고 있다가 진서준이 허사연을 내려놓았다.“전화로 들었는데, 서라를 치료할 마지막 약초를 구했다면서?”차에 탄 후, 허사연이 진서준을 바라보며 물었다.“응, 천년병제련을 구했어. 이제 돌아가면 서라 체내의 독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을 거야.”진서준이 웃으며 말했다.“참 다행이야.”허사연도 기쁜 미소를 지었다.“그리고 한 가지 더 있어.”진서준은 허사연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허사연은 조용히 진서준의 얘기를 기다렸다.“누군가가 우리 아버지를 신농 금지 구역에서 밖으로 데려갔는데 정확히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어.”진서준이 눈살을 찌푸리며 힘들게 얘기를 꺼냈다.아버지가 신농 금지구역에 계셨다면 진서준은 자기 실력을 키우기만 하면 됐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아버지의 행방이 묘연해졌다.그러니 지금은 일단 구지범이 아버지를 어디로 데려갔는지 찾아야 했다.“뭐라고? 누군가가 아버님을 빼돌렸다고?”허사연이 깜짝 놀랐다.“응, 근데 그 사람이 언젠가 날 직접 찾아올 거야. 난 이렇게 당하기만 싫어. 그래서 그 사람이 날 찾아오기 전에 아버지를 먼저 찾고 싶어.”진서준이 계획을 털어놨다.이렇게 누군가에게 휘둘리는 느낌은 너무 괴로웠다.하지만 아버지의 은신처를 찾는 게 그렇게 쉬울 리가 없었다.구지범 그 자식은 계획이 너무 치밀해서 당장은 찾기 어려울
조수석에는 피투성이가 된 어린 소녀가 누워 있었다.일곱 살 정도로 보이는 소녀는 딱 봐도 심하게 다친 것 같았다.“딸!”노란색 옷의 여성이 소녀를 보자 더욱 목 놓아 울부짖었다.이 교통사고에서 여자도 똑같은 피해자였다.“얼른 구급차를 불러요.”그 말에 주변 사람들이 서둘러 구급차를 부르려고 했다.“안 돼요, 구급차가 오기 전에 이 소녀는 과다 출혈로 목숨을 잃을 겁니다.”진서준이 방금 소녀의 상처를 검사하자 여러 동맥이 손상되어 피가 멈추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냈다.노란색 옷의 여성은 그 말을 듣자 기절할 뻔했다.“혹시 여기 의사 없나요?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우리 딸을 구해주세요.”노란색 옷의 여성은 거의 통곡에 가까운 소리로 부탁했다.하지만 사람들은 안타깝기만 할 뿐,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몸을 쓰는 힘든 일은 도울 수 있지만 죽어가는 사람을 구하는 일은 어쩔 수 없었다.“일단 진정하세요. 제가 의사입니다. 당신 딸을 구할 수 있어요.”진서준이 위로했다.“정말요? 의사님, 감사합니다.”노란색 옷의 여성이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했다.상황이 급박해서 여자는 진서준이 청년인지 아닌지 따질 여유가 없었다.진서준은 주머니에서 작은 병을 꺼냈고 병 안에는 지혈할 수 있고 흉터도 없애는 약 가루가 들어 있었다.진서준은 영기로 상처 입은 동맥 주변의 혈관을 막고 약 가루를 조심스럽게 뿌렸다.진서준이 사람을 구하는 동안 역주행하던 고급 차에서 한 모녀가 내렸다.모녀는 금은보화를 잔뜩 차려입고 있어서 한눈에 부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너희 눈멀었어? 운전할 줄 알아, 몰라? 내 차가 달려오는 거 못 봤어? 비켜줄 줄 몰라?”유옥순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욕을 퍼부었고 이 여자의 말은 순간 현장 사람들의 불만을 샀다.“자기가 역주행해 놓고 사과는커녕 오히려 여기서 언성을 높이고 난리야?”누군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유옥순이 부자인지라 아무도 공개적으로 대들지 못했다.부자를 건드리면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날 때리겠다고? 한번 해봐.”허사연은 유옥순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네가 역주행해서 사고를 내고 이 어린 소녀를 중상으로 만들었잖아. 이제 와서 모든 죄를 피해자에게 뒤집어씌우다니, 너 인간 맞아? 네 딸 그 상처도 다친 거라고 호들갑을 떨어? 검지에 살짝 긁힌 상처면 반창고로 붙이면 될 일을 의사를 찾아달라고 울부짖다니, 네 딸은 뭐 금은보화만 먹고 자랐어? 모르는 사람이 보면 다리가 부러진 줄 알겠네.”허사연의 일갈에 현장 사람들은 다들 통쾌한 표정을 지으며 공감했다.“잘 말했어, 조금 전부터 저 둘이 거슬렸어.”“그러게, 분명 자기 잘못인데 방귀 낀 놈이 화낸다고 저렇게 건방지다니.”“긴말 필요 없어. 바로 경찰에 신고해.”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유옥순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무례할 뿐만 아니라 어린 소녀의 생명을 무시하다니, 이건 누가 봐도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기막힌 일이었다.“닥쳐! 다들 닥치라고!”유옥순이 사납게 소리쳤다.“너희들 내가 누군지 알기나 해? 난 샛터 사람이야, 남편은 조 단위 자산을 자랑하는 부자야. 너희 시장도 날 깍듯하게 모시는데 너희가 뭔데 감히 내게 손가락질이야? 계속 함부로 지껄이면 전화해서 너희를 전부 감옥에 잡아넣을 거야.”이 말이 떨어지자 떠들썩하던 현장이 조금 조용해졌다.이 여자가 금은보화로 가뜩 치장한 모습을 보니 거짓말 같지 않았다.샛터라는 나라는 거지도 한 달에 수천만 원을 버는 곳인데 현지 부자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엄마, 이 쓰레기들하고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얼른 의사 불러서 제 상처 치료하게 해요.”노아연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들었어? 당장 우리 딸 상처 치료해.”유옥순이 다짜고짜 진서준에게 명령했다.오만방자한 모습에 사람들은 분노에 치를 떨었다.호족이 세력을 믿고 깡패짓하니 평범한 백성들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꿈 깨.”허사연이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유옥순과 눈을 마주쳤다.“젠장, 어디서 굴러온 천한 년이 이렇게 나대?”유옥순은 화가 나
방금 허사연과 유옥순의 대화를 진서준은 전부 들었다.“우리 사이의 일은 뭔 소리야?”유옥순이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유옥순이 진서준과 허사연의 관계를 몰랐기 때문이다.“네가 내 여자친구를 대놓고 욕했잖아.”진서준의 냉랭한 말에 유옥순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오호라, 너랑 이 년이 한패였구나.”말이 떨어지자 진서준은 손을 들어 거침없이 따귀를 날렸다.짝!따귀 소리가 울리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환호했다.유옥순은 그 따귀를 맞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사고할 수 없었다.“네가 역주행해서 사고를 내고도 반성은커녕 오히려 내가 사람을 구하는 걸 방해하려고 했어.”짝!“네 딸이 상처 같지도 않은 상처를 입었다고 고통을 호소하면서도 그 어린 소녀가 동맥이 터져 대출혈을 한 건 못 봤어?”짝!“그리고 이 한 대는 네가 내 여자친구를 욕한 대가야.”짝!“이 한 대는 네게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르쳐 주는 거야. 외국에 시집갔으면 외국에서나 허풍을 떨어. 우리 대한민국에서 깡패짓하지 마. 우리 대한민국은 너 같은 쓰레기를 환영하지 않아.”진서준의 따귀를 여러 대 맞자 유옥순의 얼굴은 돼지머리처럼 부풀어 올랐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 장면을 보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이런 여자는 제대로 된 참교육을 받아야 했다.“엄마! 감히 우리 엄마를 때려? 너 오늘 여기서 무사하게 떠날 생각 하지 마!”노아연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자 진서준이 냉정하게 받아쳤다.“큰일 날 사람은 이 여자야. 네 엄마는 불치병에 걸려 오래 살지 못할 거야.”“개소리하지 마. 우리 엄마는 이렇게 정정하신데 불치병 같은 헛소리를 지껄여?”노아연은 예상치 못한 화제에 분노를 터뜨렸다.“네가 감히 우리 엄마를 저주해?”“너희가 매일 진수성찬을 먹으며 폭식해서 영양 과다로 불치병이 생긴 거야.”진서준은 쌀쌀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믿지 않겠으면 이따가 병원에 가서 검사해 봐.”진서준이 농담하는 것 같지 않자 노아연과 유옥순은 마음이 조마조마했다.설마
진서준과 허사연은 차를 타고 유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아들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본 조희선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서라야, 네 독을 치료할 약재를 전부 찾았어. 오늘 네 체내 독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을 거야.”진서준이 미소를 지으며 희소식을 털어놨다.“오빠, 그동안 절 위해 정말 고생했어요.”진서라는 그 말에 눈가가 붉어졌다.요 몇 년 동안 진서준은 진서라 체내의 독을 치료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 쉬지 않고 약재를 찾았다.진서준은 그 말을 듣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이건 오빠가 응당 해야 할 일이야. 내 동생이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걸 가만히 지켜볼 수는 없지. 일단 먼저 얘기들 해. 난 약을 달이러 갈게.”몇 마디를 나눈 후, 진서준은 준비한 약재를 들고 유씨 가문의 약방으로 향했다.이 약재들은 전부 최고급 약재였기에 제조할 때 매우 조심해야 했다.한 번 실수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될 수 있었다.진서준은 문 앞에 출입 금지 표지를 걸어 놓아 다른 사람들이 방해하지 못하게 했다.진서준이 약을 달이는 동안, 유기태가 돌아왔다.“진서준은 이미 돌아왔어?”유기태의 질문에 허사연이 차를 따라주며 대답했다.“네, 지금 서라를 위해 약을 달이고 있어요. 삼촌, 서준을 찾으시는 건가요?”“고마워.”유기태는 차를 받고 자리에 앉았다.“우리 집에 친척이 하나 왔는데 집에 오기도 전에 누군가가 때려 병원에 입원했어.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보니 불치병에 걸렸다고 하더라고. 몸이 점점 안 좋아지는데 병원 의사들도 어쩌지 못했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진서준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온 거야.”이 말을 듣자 허사연은 순간 멈칫했다.방금 허사연과 진서준이 혼뜨검을 낸 유옥순과 너무 비슷했기 때문이다.하지만 허사연은 두 사람을 연관 짓지 않았다.유옥순은 거칠고 오만했지만 유기명과 유기태는 전부 교양이 있고 점잖은 사람이었다.정말 한 가족이라면 어떻게 이렇게 큰 차이가 날 수 있겠는가?“삼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진서준이 약을 다
침대에 누워 있던 유옥순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이 바로 일그러졌다.“너 바로 아빠에게 전화해 여기 오라고 해.”힘이 넘치는 말투만 보면 전혀 위독한 환자 같지 않았다.“아빠, 빨리 대한민국 금도로 오세요. 엄마가 누군가에게 맞아 위독해요. 금도에 있는 삼촌은 우리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아요. 빨리 오세요. 늦으면 엄마 마지막 얼굴도 못 볼 거예요.”노아연은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했는데 그 모습은 유옥순이 정말 임종을 앞둔 사람인 것 같았다.하지만 유옥순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엄지를 척 내밀어 딸의 연기를 칭찬했다.“내일 아침에 온다고요? 알았어요, 우리 기다릴게요.”노아연은 전화를 끊고 매우 흥분했다.“아빠가 내일 온대요. 이제 아빠가 오면 반드시 삼촌에게 사과를 받아내야 해요. 엄마가 불치병에 걸렸는데도 명의를 데리고 오지 않다니, 이런 가족이 어디 있어요?”노아연의 말투는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그러게 말이야. 난 우리 오빠 친동생인데, 너무 오래 만나지 않아서 정이 다 식었나 봐.”유옥순은 한숨을 쉬며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유옥순은 자기 잘못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모든 문제를 남의 탓으로 돌렸다.이런 사람은 전형적인 자기가 세계 중심에 선 듯한 이기적인 부류의 사람이었다.자기가 태양이 아닌데도 억지로 태양이 되려고 하니, 곁에 있는 사람들이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정오가 거의 다 되어서야 진서준이 약방에서 나왔다.진서준의 손에는 뜨거운 청색 턍약이 담긴 그릇이 들려 있었다.거실에 들어서자 강력한 약기운이 순간 퍼져 나갔다.“향기롭네.”허윤진이 코를 킁킁거렸다.“서라야, 어서 이 탕약을 마셔.”“알았어, 오빠.”진서라는 탕약을 받아 온도를 확인한 후, 한입에 마셨다.순간 편안하고 따뜻한 기운이 진서준의 사지로 퍼져 나갔다.체내에 있던 독도 이 따뜻한 기운에 휩쓸려 마지막에는 위장에 모였다.“나... 화장실 좀 갈게.”진서라는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바로 화장실로 달려갔다.“서라는 이제 괜찮아진 거야?”조희선
“네가 왜 거기서 나와?”진서준이 온 것을 본 유옥순과 노아연 모녀는 깜짝 놀라더니 이내 분노가 치밀었다.“삼촌, 엄마 얼굴에 난 상처가 바로 이 녀석이 한 짓이에요. 그때 제가 치료해 달라고 했는데 이 녀석이 절 외면했어요.”노아연이 먼저 진서준에게 누명을 씌웠다.“뭐야? 너희들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유기태는 노아연이 이상한 얘기를 꺼내자 어리둥절해졌다.진서준은 노아연의 말에 순간 얼굴이 어두워졌다.“네가 치료해야 할 사람인 줄 알았으면 안 왔을 텐데, 시간만 낭비했네.”“오빠가 초청한 사람이 너인 줄 알았으면 죽어도 너한테 치료받지 않았을 거야.”유옥순이 당당하게 맞받아쳤다.“잠깐만, 서준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유기태가 급히 진서준을 말렸다.“이 사람이 삼촌 동생인가요?”진서준이 유옥순을 가리키며 물었다.“맞아, 내 친동생이야. 20년 전에 샛터로 시집갔고 그사이 한 번도 돌아오지 않았어.”유기태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오늘 아침 사연이 저를 데리러 가던 길에 이 사람 차와 부딪힐 뻔했습니다. 이 사람이 역주행해서 말이죠.”진서준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근데 우리 뒤에 있던 차는 그렇게 운이 좋지 않았죠. 이 사람 차에 부딪혀 그 자리에서 전복한 겁니다. 그 사고로 어린 소녀가 죽을 뻔했는데 그때 이 여자가 제가 소녀를 구하는 걸 제지하려고 했죠. 태도가 오만할뿐더러 샛터 부자니, 뭐니 하면서 배경까지 꺼내서 깡패짓하더라고요.”그 말을 듣자 유기태는 얼굴이 새파래졌다.유기태는 동생이 변한 걸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변화가 클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진서준이 사람을 구하는 걸 제지하려 했다니, 이게 사람이 할 짓인가?“너... 너 거짓말하지 마!”유옥순은 팩트 폭격을 맞고 순간 당황했다.“난 역주행한 적 없어. 역주행한 건 너희야.”진서준은 그 말이 우스워 냉소를 지었다.“대한민국 교통은 오른쪽 통행이야, 너희 해외처럼 왼쪽 통행이 아니라고. 어느 쪽으로 운전해야 하는지도 모르면
“왜, 너도 맞고 싶어?”진서준이 눈살을 찌푸렸다.노아연은 그 말에 움찔했지만 여전히 강경하게 말했다.“잘 들어, 우리 아빠가 내일 아침에 여기로 올 거야. 그때 골치 아픈 문제를 일으키기 싫으면 당장 우리 엄마에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내일 아침이 오는 순간 넌 끝장이야.”진서준은 눈빛이 싸늘해졌다.“네 아빠가 내일 아침에 오면 그때 말하자.”말을 마치자 진서준은 강하게 노아연을 밀치고 유정과 함께 떠났다.“개자식들, 두고 보자.”노아연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거칠게 벽을 쳤다.하지만 주먹이 아파서 소리 지를 수밖에 없었다.노아연은 피부가 보들보들하고 부드러운지라 벽을 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사람을 때려도 오히려 자기가 아팠다.“엄마, 이 모욕은 반드시 저놈들에게 돌려줘야 해요.”노아연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내일 네 아빠가 오면 우리가 직접 오빠 집에 가서 제대로 된 해명을 얻어내자.”유옥순도 분노를 참을 길 없었다.자기 친오빠가 자기 편이 되어주는 대신 외부인의 편을 드는 건 정말 분한 일이었다.“왜 이렇게 빨리 돌아왔어?”진서준이 돌아온 것을 본 허사연은 약간 의아해했다.“상대가 누군지 한번 맞혀봐.”진서준이 일부러 신비로운 태도로 물었다.“누구지?”허사연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되물었다.“설마 오늘 아침에 만난 그 두 사람은 아니겠지?”그 두 사람 외에는 허사연이 의심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맞아, 바로 그 둘이야.”진서준이 고개를 저으며 코웃음을 쳤다.“방금 병원에서 내일 아침에 자기 남편이 귀국해서 나와 따지겠다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더라고.”“어휴, 우리 유씨 가문은 도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던 건지 모르겠어.”유기태가 연신 한숨을 쉬었다.조상을 팔아먹은 대가로 부귀영화를 꿈꾸던 셋째 동생도 있었는데 이제는 오만하고 까다롭기 짝이 없는 넷째 동생이 불현듯 나타난 것이다.다행히 넷째 동생이 막내인지라 더 이상 골치 아픈 동생은 없었다.동생이 더 있었더라면 또 무슨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질
“뭐라고? 불법적인 일이 우리 가게에서 일어난다고? 말도 안 돼.”성현도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넌 전신전 소속이잖아. 그런데 네 오빠인 내가 어떻게 법률을 어기는 일을 하겠어?”“그럼 이 사람들은 왜 부른 거야? 집단 폭력도 불법이거든.”성미영은 차가운 시선을 보이며 성현도와 따졌다.“미영아, 이건 내가 싸우려던 게 아니야. 저 녀석이 일부러 시비 걸러 온 거라고.”성현도는 진서준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이놈이 일부러 우리 찻집에 난입해 행패를 부리고 상철을 두들겨 패서 머리에 혹이 다 나버렸어. 난 단순히 정당방위를 위해 부른 거라고.”성미영이 등장하자 성현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솔직히 실력만 놓고 보면 성현도는 성미영보다 한참 부족했다.게다가 성미영은 전신전 소속인지라 저 남녀가 군부 조직인 전신전을 적으로 돌릴 리 없었다.군대를 건드리는 순간, 무조건 좋은 결과는 있을 수 없었다.“진서준, 도대체 무슨 일이야?”성미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라? 너희 둘이 아는 사이야?”성현도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방금 내려놨던 마음이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난 사람을 찾으러 왔어. 하씨 가문 하경범이 이 위층에 있다고 들었는데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어.”진서준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그리고 또 하나, 저 위에서 불법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도 하더군.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어.”이 말에 성현도의 표정이 단숨에 험악해졌고 즉시 반박에 나섰다.“헛소리 마. 우리 가게는 단순한 찻집이야. 불법적인 일 따윈 없어. 근거없는 소문을 왜 털어놓고 난리야?”“미영아, 저 녀석한테 속지 마. 난 네 사촌 오빠야. 내가 그런 불법적인 짓을 할 사람이겠어?”성미영이 곧바로 진서준에게 물었다.“진서준, 너 증거 있어?”“직접 올라가 보면 다 알게 될 거잖아?”진서준이 가볍게 말했다.“오빠, 위층으로 가자.”성미영이 단호하게 말했다.“그, 그건 좀 곤란해. 위층엔 귀
순간, 장내는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모든 시선이 진서준에게 쏠렸고 사람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다들 진서준을 그냥 얼굴만 반반한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진짜 고수였다.성현도의 부하 중 최고 실력자조차 상대가 되지 않았다.성현도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렸고 상철을 향해서 욕설을 날렸다.“쓰레기 자식, 이런 애송이 하나도 못 이겨?”부하가 지면 망신당하는 건 결국 성현도 자신이었다.이대로 체면을 구긴 채 끝낼 수는 없었다.이대로 넘어가면 앞으로 르벨 재벌 2세들 사이에서 조롱거리가 될 게 뻔했다.“이봐, 네 실력이 괜찮은 건 인정할게.”성현도가 싸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근데 너 혼자서 백 명을 상대할 수 있어? 천 명은? 잘 들어. 내 부하는 수도 없이 많아. 너 같은 놈 하나 처리하는 데 전화 한 통이면 충분해.”진서준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다시 말하지만 난 그냥 하경범을 찾으러 온 거야. 그 녀석만 넘기면 오늘 일은 없던 걸로 해주지.”“없던 걸로 한다고?”성현도가 그 말에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너 지금 누굴 상대로 협상하려 드는 거야? 난 성씨 가문의 직계야. 날 건드리면 상대해야 할 건 나 하나가 아니라 우리 가문 전체라고.”그때,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곧이어 검은색 전투복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이 남자들은 전부 성씨 가문의 경호원이었고 실력도 만만하지 않았다.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무려 50명 이상이었다.한순간에 텅 비어 있던 로비가 사람들로 꽉 찼다.“저 자식 끝났네. 이 정도 성씨 가문 인원이라면 아무리 강해도 버틸 수가 없지.”“그러게 말이야.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없잖아.”“왜 쓸데없이 성현도를 건드린 거지? 스스로 무덤을 판 거잖아.”구경꾼들은 이 광경에 각자 다른 감정을 보였다.누군가는 동정을, 누군가는 아쉬움을, 또 누군가는 짙은 흥미를 보였다.“사연아, 넌 좀 쉬어. 이놈들은 내가 처리할게.”진서준이 앞으로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키가 거의 2미터에 달하는 거구의 사내가 찻집 안으로 들어왔다.남자는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상철아, 저놈 다리 하나 부러뜨려서 내던져.”성현도가 진서준을 가리키며 명령했다.“알겠습니다.”상철은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진서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서준아, 내가 할게.”허사연의 눈에는 불꽃 같은 전투욕이 타올랐다.“조심해. 저 녀석은 횡련 종사야.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진서준이 조용히 귀띔했다.“알았어. 설령 못 이긴다고 해도 어차피 네가 있잖아?”허사연이 장난스럽게 웃었다.진서준이 곁에 있는 한, 허사연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이봐, 사내자식이 여자 뒤에 숨는 게 말이 돼?”상철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이봐, 껑충이. 여자를 얕보지 마. 일단 이기고 나서 말해.”허사연이 상철을 도발했다.“아가씨, 그런 기생오라비 말고 날 따르지 그래? 밤마다 널 천국으로 보내줄 수 있는데?”상철이 음흉하게 웃었다.“죽고 싶어 환장했구나.”얼굴이 싸늘해진 허사연이 주먹을 날렸다.강렬한 펀치가 공기를 가르며 폭발음을 일으켰고 그 위력은 철판도 뚫을 수 있을 정도였다.하지만 상철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내가 가만히 서 있어도 넌 날 어쩔 수 없어.”“닥쳐!”허사연이 분노에 차 주먹을 그대로 상철의 얼굴로 내리꽂았다.상철은 일부러 머리를 숙이며 대머리 정수리로 받아냈다.쿵!둔탁한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주먹이 상철의 머리를 강타했으나 대머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허사연이 몇 걸음 물러섰다.순간 손에 뜨거운 통증이 밀려왔고 뼈가 부서질 것 같았다.손을 확인하자 하얀 피부였던 손등이 새빨갛게 부어올랐다.상철은 자기 머리를 한번 쓸어내리더니 빙그레 웃었다.“아가씨, 이제 내 실력을 알겠지?”그 모습에 허사연의 승부욕이 다시 불타올랐고 콧방귀를 뀌며 다시 달려들었다.이번에는 다리를 높이 들어 올려 상철의 머리를 내려찍었다.‘머리가 단단하다고 자랑하
이렇게 예쁘고 섹시한 여자가 싸움 실력이 이렇게 대단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완전 여성판 이소룡이었다.“너, 너희들 정말 너무 대담한 거 아니야? 여기가 어디인지 알기나 해? 어디서 대놓고 싸움질이야?”종업원은 순간 놀란 뒤 분노에 찬 얼굴로 진서준와 허사연을 가리켰다.찻집이 문을 연 이후로 이렇게 난동을 부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진서준과 허사연이 첫 사례였다.주변의 구경꾼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싸움 좀 하면 뭐해? 여긴 성씨 가문의 구역이야. 성씨 가문에서 한마디만 하면 저 남녀는 오늘 밤중으로 사라지겠지.”“어휴, 저 여자 너무 아까워. 저렇게 예쁜데 왜 죽지 못해서 안달이지?”“여자는 살 수도 있겠지만 남자는 무조건 죽을걸.”사람들은 저마다 수군거리며 이미 진서준과 허사연의 결말을 예상하는 듯했다.“그럼 네 말대로라면 내가 널 때린다 해도 얌전히 맞고 있어야 한다는 거야?”허사연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종업원에게 다가갔다.“오지 마!”종업원은 겁에 질려 연신 뒷걸음질 쳤다.“어떤 미친놈이 내 구역에서 소란을 피우는 거야?”그 순간, 2층에서 한 사람이 내려왔다.모두가 일제히 시선을 돌려 그 사람을 확인하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성현도가 오늘 여기 있었네?”누군가 그 청년을 알아보았다.“저 둘 끝장났네. 성현도는 악명 높은 냉혈한이야.”그 청년은 바로 찻집의 사장인 성현도였다.성현도는 르벨 재벌 2세 사이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친구에게는 무조건 의리를 지키지만 적에게는 무자비했다.성현도의 고문 방법은 수도 없이 많았고 게다가 무인으로서 무공 실력도 상당했다.“사장님, 저 남녀가 와서 난동을 부렸어요.”종업원은 성현도를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장이 나온 걸 확인한 허사연은 주먹 한 방에 종업원을 기절시켜 버렸다.“뭐야?”성현도의 눈이 가늘어졌고 표정이 험악해졌다.자기 앞에서 대놓고 부하를 때리다니, 이건 너무나도 명백한 도발이었다.“아가씨, 우리 처음 보는 사이 맞지? 우리
그리고 오후 2시가 되자 진서준은 허사연을 데리고 조호가 말한 천국찻집으로 향했다.겉모습만 보면 이 찻집은 진짜 전통찻집 같았고 규모도 꽤 컸다.하지만 막상 안에 들어가 보니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1층과 2층까지는 정말 평범한 찻집처럼 꾸며져 있었고 누가 봐도 이상한 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하지만 3층으로 올라가려면 회원권이 있어야 하거나 사장이 직접 허락한 사람만 출입할 수 있었다.“손님, 아가씨, 이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진서준과 허사연이 차를 마시러 온 줄 안 종업원이 빠르게 달려와 안내하려 했다.“그럴 필요 없어. 난 하경범을 찾으러 왔거든.”진서준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네?”종업원이 순간 얼어붙었다.“혹시 하씨 가문의 하 도련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맞아.”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손님은 누구신지...”종업원이 신중하게 물었다.진서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냥 복수하러 왔다고 전해.”그놈 아버지라고 하는 건 자기를 모욕하는 것과 같았고 친구라고 하기도 기분이 더러웠다.그 말에 종업원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손님, 여기서 장난치지 마세요.”하경범은 르벨에서 유명한 재벌 2세였다.이 찻집의 사장과도 막역한 사이였고 여기서 일하는 직원이라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왜? 못 믿겠어?”진서준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손님, 하 도련님에게 복수하려던 사람은 단 하루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종업원이 경고하듯 말했다.“그런 농담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그 말을 듣자 진서준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이렇게 전해. 그 하경범이 두들겨 맞고 나자빠지게 했던 진서준이 왔으니 당장 기어 나오라고 말이야.”진서준의 뻔뻔한 태도에 종업원은 어이가 없었다.“좋습니다. 손님이 그렇게 죽고 싶다면 제가 기꺼이 도와드리죠.”종업원은 바로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문제 발생했습니다. 난동자가 있습니다.”쿵! 쿵!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건장한 남자 스무 명이 들이닥쳤다.전부 검은
진서준과 허사연은 차를 타고 조호의 회사로 향했다.이 회사는 그냥 겉치레일 뿐, 진짜 돈이 들어오는 곳은 유흥업소들이었다.유흥업소를 얕잡아보면 안 된다.운 좋게 돈 많은 도련님들이라도 걸리면 하룻밤에 수억 원이 순식간에 손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진서준 씨!”진서준이 들어서자 조호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조호는 진서준 옆에 있는 허사연을 힐끗 쳐다본 뒤 고개를 숙이고 감히 더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잡담은 그만하고 하경범을 잡아가는 제일 좋은 타이밍만 말해.”진서준이 직설적으로 물었다.이 말에 조호는 속으로 크게 놀랐다.“매일 오후마다 하경범은 천국찻집이라는 곳에 갑니다.”조호는 재빨리 대답했다.“보통은 경호원 몇 명만 데리고 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얼씨구? 저런 인간이 매일 차나 마시러 간다고?”진서준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그게... 진서준 씨, 사실 그곳은 이름만 찻집이지 실제로는...”조호는 옆에 여성이 있다는 걸 의식해서 말을 흐렸지만 진서준은 그 뜻을 단번에 알아챘다.“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차를 마시는 곳이 아니라 그냥 인기 많은 인터넷 셀럽이 가득한 고급 유흥업소일 것이다.“진서준 씨, 듣자 하니 그 찻집의 주인은 성씨 가문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진짜로 움직이실 거라면 하경범이 이동 중일 때를 노리는 게 좋을 겁니다.”조호가 조심스럽게 조언했다.“응? 성씨 가문이 이런 사업도 해?”진서준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진서준은 오영수에게서 성미영에 대한 정보를 들은 적이 있었다.정의로운 성격의 성미영이 자기 가문에서 이런 유흥업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네, 듣기로는 성씨 가문의 한 직계 후손이 운영한다고 합니다. 여자에 미쳐 있는 놈이라 르벨의 돈 많은 도련님들과 꽤 친분이 깊다고 하더군요.”조호는 본인이 아는 정보를 전부 쏟아냈다.“좋아, 대충 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조호의 회사를 나온
진서준이 허사연의 캐리어를 들어주며 옆방으로 걸어갔다.그 뒷모습을 보며 도지아는 부러움이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인간은 원래 모여서 사는 걸 선호하는 동물이다.사회를 벗어나서 혼자 살아가는 건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가족도 친구도 없이 너무 오래 지내다 보면 결국 감정 없는 시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그렇게 되면 사람과 짐승의 차이가 없어질 것이다.“어제 전화할 때 그랬었지? 이번에 너 자기 출신을 찾으러 온 거라고.”호텔 방으로 돌아온 후, 허사연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너 원래 경성 진씨 가문 사람이잖아?”“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어. 그런데 할아버지가 예전에 말해주셨어. 사실 우리 아버지는 어릴 때 길에서 주워 온 아이였다고.”진서준은 허사연에게 숨길 생각이 없었다.허사연은 진서준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허사연이라면 이 비밀을 절대 밖으로 흘리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뭐라고? 아버님이 주워 온 아이라고?”허사연이 깜짝 놀랐다.“그래.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건 나뿐이야. 가족 중에서도 할아버지가 나한테만 알려주셨지.”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전, 오영수가 내 등에 있는 용을 보고는 내가 용맥의 일족이라고 했어. 그래서 오영수를 따라 여기 와서 오영수 셋째 삼촌에게 내 출신에 관해 알아보려 했던 거야.”“네 등에 용이 있다고? 난 한 번도 본 적 없는데?”허사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동안 둘이 알몸으로 함께한 시간도 적지 않은데 허사연은 한 번도 본 기억이 없었다.“내가 체내 혈기를 모을 때만 그 용이 나타나거든.”진서준이 설명을 이어갔다.“그런데 오영수 삼촌이 아직 돌아오질 않아서 일단은 여기서 며칠 기다려야 해.”“아니, 그럼 오씨 가문에서 널 안 재워줬어?”허사연이 의아해했다.명문대가인 오씨 가문에 빈방이 없을 리가 없었다.“그날 오영수를 찾아갔는데 마침 오영수 할아버지가 위중했어. 그리고 그 집안엔 그 어르신을 그냥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지.”진서준이 담담하게
“진짜 예쁜 새색시 숨겨놓고 있었네?”허사연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누구라도 자기 남자 방에 예쁘고 몸매가 완벽한 여자 하나가 같이 있는 걸 보면 의심 안 할 수가 없었다.게다가 지금은 아침이었다.설마 이 여자가 아침에 막 찾아온 건 아니겠지?“사연아, 오해야. 내가 제대로 설명할게.”진서준은 머리가 띵해졌고 뇌가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아가씨, 오해하지 마세요. 어제 저랑 진서준이 같은 방에서 잔 건 맞지만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저 밤새 한숨도 못 잤다니까요?”도지아가 황급히 해명에 나섰다.“네? 밤새 안 자고도 아무 일 없었다고요?”허사연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되물었다.“설마 밤새 불태우느라 못 잔 건 아니겠죠?”허사연의 농담과 진담이 뒤섞인 말에 진서준은 헛웃음만 나왔다.“사연아, 이쪽은 도지아야. 우리 진짜 그냥 친구야. 일단 들어와. 천천히 설명할게.”허사연이 방에 들어오자 진서준은 서로에게 소개했다.그러고는 이 방에서 일어난 상황을 설명했다.“도지아는 황예은이 소개해 준 환자야. 다리 치료를 부탁받았거든. 종아리를 봐봐. 이틀 전에 내가 직접 발라준 연고가 있어.”허사연이 내려다보자 확실히 연고가 발라져 있었다.“그리고 도지아가 밤새 안 잔 건 원기를 수련하느라 그랬던 거야. 너도 예전에 수련한다고 며칠씩 안 잔 적 있잖아?”허사연은 오해가 풀리자 그제야 빙그레 웃었다.“내가 뭐 어쨌다고 그렇게 호들갑이야?”“혹시라도 오해할까 봐 그러는 거잖아.”진서준이 빠르게 대답했다.“뭐야? 내가 그렇게 의심 많고 질투 많은 여자로 보여?”허사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아, 아니지. 우리 사연은 누구보다 속이 넓은 부드러운 여자지.”진서준이 급히 정정했다.“됐어, 너 겁먹은 거 너무 귀엽다.”허사연이 피식 웃었다.“넌 여기 좀 쉬고 있어. 내가 방 하나 잡고 올게.”진서준은 더 머뭇거릴 틈도 없이 벌떡 일어나 나가 버렸다.진서준의 뒷모습을 보며 허사연은 그제야 웃음을 터뜨렸다.“도지아 씨, 진서준이
“내가 가면 안 돼?”사실 진서준은 거절하려 했었다.르벨은 안개가 짙게 깔린 늪지대 같은 곳이라 진서준조차도 어디에 함정이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그러니 허사연이 온다면 다칠 가능성이 컸다.하지만 거절하면 허사연이 상처받을 게 뻔했다.“당연히 되지. 지금 위치 보낼게.”진서준은 단호하게 말하며 위치를 보냈다.자기 여자를 지킬 자신도 없으면서 강자들을 상대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자기야, 잘 자.”허사연이 애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너도 일찍 자.”진서준이 다정하게 답했다.전화를 끊고 나니 진서준의 졸음이 싹 가셨다.진서준은 창가로 다가가 이 화려한 도시를 내려다봤다.“오씨 가문, 안씨 가문, 하씨 가문... 너희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든 난 전부 박살 낼 거야. 이번엔 반드시 나와 아버지의 정체를 밝혀내고 말겠어.”진서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그렇게 별다른 사건 없이 밤이 지나갔다.다음 날 아침.진서준이 막 눈을 뜨자마자 도지아의 흥분한 외침이 들려왔다.“진서준, 됐어. 나 생겼어!”도지아는 눈 밑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는데 밤새 잠을 자지 않은 게 분명했다.진서준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너 아직 처녀 아니었어? 대체 어떻게 임신한 거야?”“미친놈아, 임신은 개뿔, 무슨 헛소리야?”도지아는 얼굴이 빨개지며 진서준을 노려봤다.“그럼 왜 아침부터 난리야?”진서준이 되물었다.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아침부터 흥분해 날뛰지 않을 것이다.“어제 네가 준 수련법 기억나지? 나 벌써 원기를 형성할 수 있게 됐어.”자기가 대단하다고 여긴 도지아는 자랑스럽게 선언했다.고작 하룻밤 만에 원기를 형성한 건 확실히 대단한 일이었다.“뭐? 그렇게 빠르다고? 너 타고난 천재 맞네?”진서준이 다소 의아한 표정을 보였다.보통 무인은 원기를 익히는 데만 최소 1년이 걸리는데 그것도 매일 꾸준히 수련할 경우에만 발생하는 일이었다.심지어 재능 있는 자들도 한두 달은 족히 걸린다.그런데 도지아는 단 하룻밤에 이 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