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기가 마치 무지개 같았다.풍수살술 진법 중에 서 있는 권해철은 죽음의 기운을 느꼈다.그 검기 앞에서는 모든 것이 얇은 종이처럼 부질없을 것 같았다.권해철은 바짝 긴장했다. 체내의 진기가 미친 듯이 움직였고 세 개의 바다 요괴가 그의 앞에 나타나 진서준의 검을 막으려고 했다.쿠구궁...흰 안개 속에서 끊임없이 소리가 났고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애가 탔다.“언니, 진서준 씨 괜찮겠지...”허윤진의 목소리가 떨렸다.그녀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허성태를 제외하고 다른 남자를 이렇게 걱정한 적은 없었다.허사연 또한 초조해 보였다.“분명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허윤진을 위로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신을 위로하는 말이기도 했다.권해철은 너무 강했다. 그는 이미 인간의 범주를 벗어났다.멀지 않은 곳, 손승호와 공규석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진서준, 같잖은 놈. 넌 반드시 이곳에서 죽을 거야!”두 사람은 진서준의 시체가 호수로 쓰러진 걸 눈으로 보는 것만 같았다.그러나 다음 순간, 다들 깜짝 놀랐다.하늘과 땅을 울리는 검의 소리가 흰 안개 속에서 울려 퍼졌다.그 순간, 마치 미사일에 폭격당한 것처럼 만월호에 100미터 높이의 물보라가 일었다.그와 동시에 자욱하던 안개가 사라졌다.호수 위 두 사람이 다시금 사람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그중 한 명은 무릎을 반쯤 꿇고 있었다.진서준과 권해철 사이에 2미터 넓이에 20미터 깊이의 골짜기 생겼다. 양쪽에서 호숫물이 끊임없이 골짜기를 향해 흘러들었다.신선처럼 보이던 권해철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모습이었다.이 광경에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이럴 수가! 단칼에 권해철 씨의 풍수살술 진법을 파괴했어요!”“풍수살술 진법뿐만이 아니라 권해철 씨까지 다친 것 같아요!”“세상에, 정말 20대 초반이 맞을까요? 정말 말도 안 돼요!”진서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무인들은 갑자기 오한이 들었다.이렇
승복하지 못하겠다고 하면 당장 죽임당할 것 같았다.기개도 중요하지만 목숨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승복한다니 다행이네요. 죽이지는 않을게요. 대신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진서준이 평온하게 말했다.그러자 권해철은 정중하게 대답했다.“물어보세요.”“당신의 제자가 말하길, 당신은 영골이 어디 있는지 안다고 하던데 정말인가요?”진서준의 목소리가 엄숙해졌다.오늘 이 대결은 영골을 위해서였다.만약 권해철이 영골의 위치를 모른다면 모든 것이 수포가 될 것이다.권해철은 흠칫하더니 쓴웃음을 지었다.그의 표정을 본 진서준은 순간 기분이 가라앉았다.“영골의 위치는 알고 있지만...”“알고 있어요?”진서준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했다.“알긴 알지만 영골은 제 사문의 금지 구역에 있습니다. 영골을 얻으려면 우선 제 사문을 찾아가야 합니다.”권해철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솔직히 얘기하자면 제가 속세로 돌아온 이유가 어린 시절 사부님께 쫓겨났기 때문입니다.”진서준은 낙심해서 달갑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그렇다면 그곳이 어딘지 기억합니까?”“압니다. 하지만 저희 사문의 산 아래에는 산을 보호하는 각종 진법이 있습니다. 영패 없이 들어가는 건 하늘의 별 따기예요.”권해철은 한숨을 쉬었다.“전 천사 경지에 이른 다음날 그 산에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제 실력이라면 진법을 파괴하여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하마터면 그곳에서 목숨을 잃을 뻔했어요...”며칠 전 그 산에서 겪었던 일을 떠올린 권해철은 두려워졌다.권해철의 사부님은 그 산에 쳐진 진법은 500년 전 세 명의 영선 경지의 장로들이 연합해서 만든 것이라고 했었다.영선 경지는 천사 경지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경지였지만 둘의 실력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할 수 있었다.권해철의 설명을 들은 진서준은 눈살을 찌푸렸다.권해철에게 중상을 입힌 진법이라면 위력이 보통이 아닐 것이다.그러나 어머니의 다리를 치료하기 위해서라
주위는 온통 고요했다. 숨 쉬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다들 눈이 휘둥그레져서 호숫가에 갑자기 나타난 그를 바라보았다.그는 다름 아닌 모두가 두려워하는 유혁수였다.혈운 조직의 대성 종사인 그가 이때 갑자기 진서준을 기습할 줄은 몰랐다.유혁수를 데려온 공규석도 아주 의아한 얼굴이었다.그는 잠깐 당황했지만 이내 매우 흥분했다.진서준이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그는 혼자였다.권해철과의 싸움에서 그는 체력을 소진했을 것이다.그러니 지금은 진서준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한편, 유혁수는 세상에 이렇게 대단한 존재가 나타나는 걸 원하지 않았다.이런 천재가 자신의 손에 죽으면, 그는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을 느낄 것이다.“진서준 씨, 조심하세요!”권해철이 외쳤다.권해철은 진서준을 기습한 사람도 대성 종사임을 발견했다.대성 종사가 갑자기 상대를 기습하다니, 소문이라도 난다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유혁수는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진서준도 등 뒤에서 서늘한 살기를 느꼈다.“죽으려고!”진서준의 마음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몸을 홱 돌려서 들고 있던 천문검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휘둘렀다.실낱같은 검광이었다. 자세히 보지 않는다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이런 실낱같은 검광에 유혁수의 마음은 바닥으로 가라앉았다.“검의!”노련한 종사로서 유혁수는 당연히 대한민국의 무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무도에서 수련하기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검도였다.유혁수가 아는 정보에 따르면 진서준을 제외하고 가장 처음 검의를 깨달은 사람은 동북 조씨 가문의 천재였다.그러나 그 천재도 40대에 들어서야 검의를 깨달았다.눈앞의 진서준은 겨우 25살인데 대성 종사인 데다가 검의를 깨달았으며 술법 천사였다.세 개의 신분 중 어느 것이 알려지든 대한민국 무도계가 발칵 뒤집힐 것이다.“또 검을 휘두를 수는 없겠지!”노련한 종사 유혁수는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그의 눈동자가 섬뜩하게 번뜩였다. 곧이어 체내의 내력이 응집되어 강건한 기운이 되었
유혁수는 피를 뒤집어쓴 채로 호수 위에 서 있었는데 표정이 잔뜩 일그러진 것이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 같았다.진서준이 차갑게 말했다.“당신과 난 아무런 원한도 없을 텐데.”“그래. 그런데 내가 너 같은 천재를 죽이는 걸 좋아해서 말이야.”유혁수는 눈알이 벌게진 채로 미친 듯이 웃었다.“진서준, 오늘 넌 반드시 죽어야 해!”미친놈.정신이 나간 듯한 유혁수를 본 사람들의 머릿속에 미친놈 세 글자가 떠올랐다.아무런 원한도 없으면서 진서준을 죽이려 하는 이유는 그의 변태적인 취향 때문이었다.“누가 살고 누가 죽을지는 아무도 몰라.”진서준은 무덤덤한 눈빛으로 유혁수를 바라보았다.그에게 있어 유혁수는 이미 죽은 자와 다름없었다.비록 진서준은 체내의 영기를 꽤 많이 소모했지만 만월호의 영기가 워낙 왕성한 탓에 이런 자연적인 영기를 이용하여 유혁수를 죽일 수 있었다.진서준이 천문검을 거두어들이자 유혁수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스쳐 지나갔다.“투항하려는 건가? 투항한다고 해도 난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진서준이 덤덤히 말했다.“당신을 죽이는 데 검까지 필요 없어.”진서준의 비아냥에 유혁수는 냉소했다. 그는 두 다리를 힘껏 굴렀고, 그 순간 폭탄이 터진 듯 발아래 호숫물이 사방으로 튀었다.기세등등한 유혁수를 본 진서준은 두 손을 서서히 들었다.다음 순간, 호수 전체가 눈에 보이는 속도로 끓어오르기 시작했고 흰 안개가 진서준의 앞에 모였다.“농간을 부리는군!”유혁수가 차갑게 말했다.눈 깜짝할 사이, 유혁수가 진서준의 앞에 섰다.그는 가까이 다가가서 크게 소리를 지르며 두 주먹을 휘둘렀다.아무도 유혁수가 주먹을 몇 번 휘둘렀는지 보지 못했다. 강건한 기운들로 뭉친 매의 머리와 늑대의 머리가 진서준 앞의 흰 안개를 강타했다.공기가 찢어발겨지는 것 같았다. 무시무시한 장면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숨을 멈췄다.“이건 환기권이야!”무인들은 유혁수의 환기권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환기권은 유혁수가 20여 년간 열심히 연구하여 만든 권법인데,
호숫가에 서 있던 사람들은 수면이 잠잠해졌을 때야 정신을 차렸다.누군가는 유혁수가 떨어진 곳을 바라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끝난 거 아닐까요?”“대성 종사와 술법 천사가 번갈아 싸웠는데도 진서준 씨 상대가 되지 못했네요.”“진서준 씨 정말 대단하네요. 혼자서 둘을 상대했는데도 털끝조차 다치지 않았어요!”진서준의 신과 같은 모습을 바라보는 손승호의 눈동자에는 불만과 증오가 가득했다.“내 복수는 정말 가망이 없는 걸까?”대성 종사마저 진서준을 죽이지 못했으니 누가 그를 죽일 수 있겠는가?감옥에서 3년을 보낸 폐인에게 이런 큰 변화가 있다니, 설마 감옥에서 대단한 사람이라도 만난 걸까?달갑지 않아 하는 손승호와 달리 공규석은 두려움이 더 컸다.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유혁수와 공규석이 함께 온 걸 모두 보았다.유혁수가 진서준을 공격한 건 분명 공규석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도망가지 못하게 해!”하규천은 공규석이 도망가려고 하자 곧바로 자신이 데려온 무인들더러 공규석을 막게 했다.“뭐 하는 거예요? 이거 놔요!”두 무인에게 붙잡힌 공규석은 겁에 질려서 두 다리를 덜덜 떨었다.“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 혈운의 종사를 데려와서 진서준을 기습하다니, 오늘 넌 끝장이야!”하규천은 차가운 눈길로 공규석을 바라보았다. 마치 죽은 사람을 보듯 말이다.공규석이 낙담에 빠졌을 때 고요하던 호수에 갑자기 폭발이 일었다.“어떻게 된 거죠? 설마 유혁수 씨가 죽지 않은 걸까요?”“그럴 리가요. 조금 전 그가 떨어졌던 곳이 전부 빨간색으로 물들었는데 죽지 않았을 리가 있겠어요?”호수 위 진서준은 폭발한 곳을 바라보며 눈빛이 차가워졌다.“죽지 않은 건가?”유혁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가슴 쪽 상처에서 끊임없이 피가 흘렀다.그의 얼굴은 수척했고, 음산한 눈동자에는 핏발이 섰다.이때 유혁수는 거의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혈운의 대성 종사이자 종사 킬러이며 환기권을 창조한 그는, 사람들이 쳐다보는 가운데 자신이 패배했다는 걸 인정할 수가 없
진서준은 그 말을 듣고 덤덤히 웃었다.그의 머릿속에는 처방전이 셀 수 없이 많았다.그중 일부는 아무런 부정적인 영향 없이 단기간에 실력을 향상할 수 있었다.유혁수가 먹은 단약은 진서준에게 있어 가장 낮은 수준의 약이었다.진서준이 유혁수를 막을 생각이 없어 보이자 권해철은 조금 허무했다.“넌 죽었어!”폭원단을 먹은 유혁수는 상반신을 살짝 구부정하게 하고 야수처럼 으르렁거렸는데 그 모습이 마치 맹수 같았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는 사람을 불안케 했다.동시에 유혁수는 눈에 보이는 속도로 빠르게 늙어갔다. 검은 머리카락이 끊임없이 빠지면서 백발이 되었다.그러나 그의 기세는 예전보다 훨씬 더 강했다.예전의 유혁수는 그와 같은 경지에 있는 사람 중에서도 그와 대적할 사람이 많지 않았다.지금은 아마 일반적인 선천 대종사도 그를 제압하기 어려울 것이다.절망에 빠졌던 공규석은 그 광경을 보자 곧바로 폭소를 터뜨렸다.“유혁수 종사님은 죽지 않았어. 이거 놔. 진서준 저 자식이 죽으면 당신들이 다음 차례가 될 수도 있어.”하규천의 안색이 흐려졌다.호숫가에 있던 사람들은 호수 위 유혁수가 조금 전과 완전히 다르다는 걸 똑똑히 느꼈다.진서준에게 여력이 얼마나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우선 놔줘.”하규천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풀려난 공규석은 냉소했다.“진서준, 넌 오늘 틀림없이 죽을 거야!”짐승 같은 유혁수의 모습에도 진서준은 평온했다. 유혁수의 무시무시한 기세에 전혀 놀라지 않은 듯했다.“후!”유혁수는 소리를 지르더니 수면을 밟으며 활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이 빠르게 움직였다.그가 지나간 곳에는 20미터 높이의 물기둥이 솟구쳤다.진서준은 유혁수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그딴 약으로 날 죽이려 하다니, 날 너무 얕본 거 아니야?”유혁수가 다가오자 진서준은 천천히 오른손을 들었다.다음 순간, 진서준에게서 무지막지한 기세가 느껴졌다. 이때 권해철에게 진서준은 신처럼 보였다.진서준의 손바닥이 파랗게 변했고 자주색의 번개 빛이
진서준이 그렇게 말하자 하규천은 부하에게 공규석을 끌고 가라고 했다.애원하는 공규석을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승자만이 정의라는 말이 있듯이 말이다.만약 조금 전 유혁수가 습격에 성공했더라면 상황은 또 달랐을 것이다.“내가 걱정시켰네요.”진서준은 허사연에게로 다가가서 그녀의 보드라운 손을 잡았다.“서준 씨가 무사해서 다행이에요.”허사연은 애틋한 눈빛으로 진서준을 바라보았다.황보식은 허성태의 곁으로 걸어가더니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성태 씨, 성태 씨 딸 출세했네요.”허성태 또한 웃으며 말했다.“우리 사연이가 복이 많죠.”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이들도 진서준과 허사연을 칭찬했다.주위에 사람이 많다는 걸 깨달은 허사연은 순간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는 손을 거두어들일 생각이었지만 진서준은 그녀의 손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얼른 놔요. 보는 사람도 많은데!”허사연이 쑥스러운 듯 말했다.“왜 쑥스러워해요? 사연 씨는 내 여자 친구잖아요. 여자 친구 손 좀 잡는 게 뭐 어때서요?”진서준은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그러나 그와 반대로 허사연은 쑥스러움이 많은 성격이었다. 그래서 진서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공원 바깥쪽으로 향했다.진서준과 허사연이 손을 잡고 떠나자 다른 가문의 가주들은 허성태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축하드립니다, 허성태 씨. 정말 훌륭한 사위를 얻으셨네요!”“휴, 제 딸이 조금 더 일찍 진서준 씨를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요.”“앞으로 허씨 집안은 틀림없이 승승장구할 겁니다. 어쩌면 서울 최고의 가문이 될지도 몰라요!”누군가는 허성태를 부러워했고 누군가는 그를 질투했다.그러나 아무리 질투가 심해도 감히 허씨 일가 사업에 손을 댈 수는 없었다. 그저 최대한 허씨 일가와 협력하여 진서준 앞에서 좋은 얘기라도 몇 마디 해주기를 바랄 뿐이었다.그러면 앞으로 그들의 가문에 골치 아픈 일이 생길 때 진서준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이때 만월호는 아직도 기관에서 통제 중이라 누구도 함부로
“눈 똑바로 뜨고 봐요!”나지혜의 무례한 말투에 진서준과 허사연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사람이 참 무례하군요. 가정 교육을 어떻게 받은 거죠? 제가 그쪽 부모님 대신 예의가 뭔지 가르쳐줄까요?”나지혜는 팔짱을 두른 채로 같잖다는 듯이 진서준을 바라보았다.“날 가르치겠다고요?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요? 경고하는데 내 남자 친구는 아주 대단한 사람이에요!”옆에 있던 황성윤은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허사연을 훑어보았다.황성윤은 고등학교 때 가족들에 의해 해외로 보내졌고 귀국한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올해 해외에서 졸업하고 돌아온 지 한 달도 되지 않았기에, 아직 허사연을 알지 못했다.진서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려다.“당장 꺼져요. 지금은 기분이 좋으니까 그냥 봐주는 거예요.”“자기야, 저 사람 나한테 막 소리 질러. 심지어 나한테 꺼지라고 했어!”나지혜는 황성윤의 손을 잡더니 그의 팔에 자신의 가슴을 가져다 댔다.팔뚝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움에 정신을 차린 황성윤은 오만한 얼굴로 진서준을 바라보았다.“이 자식, 지금 당장 내 여자 친구에게 사과해. 그렇지 않으면 오늘 여기서 벗어나지 못할 줄 알아!”진서준은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쳤다.“여기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내 남자 친구가 전화 한 통 하면 경호원 몇십 명을 불러올 수 있거든요!”나지혜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지난번에 누군가 나지혜를 희롱했을 때, 황성윤은 전화 한 통으로 20여 명의 경호원을 불러왔다. 나지혜를 희롱한 그 남자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나지혜에게 사죄했다.진서준은 두 사람에게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모처럼 쉬는 날이었기에 허사연과 데이트할 생각이었다.두 사람은 놀이공원에 갔다가 저녁쯤 금영사에 가볼 생각이었다.허사연은 금영사에 아주 신통한 나무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나무에 대고 소원을 빌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고 한다.“두 가지 선택지를 주겠어요. 하나는 지금 당장 꺼지든가, 아니면 나한테 맞고 꺼지든가 해요.
“뭐라고? 불법적인 일이 우리 가게에서 일어난다고? 말도 안 돼.”성현도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넌 전신전 소속이잖아. 그런데 네 오빠인 내가 어떻게 법률을 어기는 일을 하겠어?”“그럼 이 사람들은 왜 부른 거야? 집단 폭력도 불법이거든.”성미영은 차가운 시선을 보이며 성현도와 따졌다.“미영아, 이건 내가 싸우려던 게 아니야. 저 녀석이 일부러 시비 걸러 온 거라고.”성현도는 진서준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이놈이 일부러 우리 찻집에 난입해 행패를 부리고 상철을 두들겨 패서 머리에 혹이 다 나버렸어. 난 단순히 정당방위를 위해 부른 거라고.”성미영이 등장하자 성현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솔직히 실력만 놓고 보면 성현도는 성미영보다 한참 부족했다.게다가 성미영은 전신전 소속인지라 저 남녀가 군부 조직인 전신전을 적으로 돌릴 리 없었다.군대를 건드리는 순간, 무조건 좋은 결과는 있을 수 없었다.“진서준, 도대체 무슨 일이야?”성미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라? 너희 둘이 아는 사이야?”성현도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방금 내려놨던 마음이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난 사람을 찾으러 왔어. 하씨 가문 하경범이 이 위층에 있다고 들었는데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어.”진서준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그리고 또 하나, 저 위에서 불법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도 하더군.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어.”이 말에 성현도의 표정이 단숨에 험악해졌고 즉시 반박에 나섰다.“헛소리 마. 우리 가게는 단순한 찻집이야. 불법적인 일 따윈 없어. 근거없는 소문을 왜 털어놓고 난리야?”“미영아, 저 녀석한테 속지 마. 난 네 사촌 오빠야. 내가 그런 불법적인 짓을 할 사람이겠어?”성미영이 곧바로 진서준에게 물었다.“진서준, 너 증거 있어?”“직접 올라가 보면 다 알게 될 거잖아?”진서준이 가볍게 말했다.“오빠, 위층으로 가자.”성미영이 단호하게 말했다.“그, 그건 좀 곤란해. 위층엔 귀
순간, 장내는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모든 시선이 진서준에게 쏠렸고 사람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다들 진서준을 그냥 얼굴만 반반한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진짜 고수였다.성현도의 부하 중 최고 실력자조차 상대가 되지 않았다.성현도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렸고 상철을 향해서 욕설을 날렸다.“쓰레기 자식, 이런 애송이 하나도 못 이겨?”부하가 지면 망신당하는 건 결국 성현도 자신이었다.이대로 체면을 구긴 채 끝낼 수는 없었다.이대로 넘어가면 앞으로 르벨 재벌 2세들 사이에서 조롱거리가 될 게 뻔했다.“이봐, 네 실력이 괜찮은 건 인정할게.”성현도가 싸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근데 너 혼자서 백 명을 상대할 수 있어? 천 명은? 잘 들어. 내 부하는 수도 없이 많아. 너 같은 놈 하나 처리하는 데 전화 한 통이면 충분해.”진서준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다시 말하지만 난 그냥 하경범을 찾으러 온 거야. 그 녀석만 넘기면 오늘 일은 없던 걸로 해주지.”“없던 걸로 한다고?”성현도가 그 말에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너 지금 누굴 상대로 협상하려 드는 거야? 난 성씨 가문의 직계야. 날 건드리면 상대해야 할 건 나 하나가 아니라 우리 가문 전체라고.”그때,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곧이어 검은색 전투복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이 남자들은 전부 성씨 가문의 경호원이었고 실력도 만만하지 않았다.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무려 50명 이상이었다.한순간에 텅 비어 있던 로비가 사람들로 꽉 찼다.“저 자식 끝났네. 이 정도 성씨 가문 인원이라면 아무리 강해도 버틸 수가 없지.”“그러게 말이야.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없잖아.”“왜 쓸데없이 성현도를 건드린 거지? 스스로 무덤을 판 거잖아.”구경꾼들은 이 광경에 각자 다른 감정을 보였다.누군가는 동정을, 누군가는 아쉬움을, 또 누군가는 짙은 흥미를 보였다.“사연아, 넌 좀 쉬어. 이놈들은 내가 처리할게.”진서준이 앞으로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키가 거의 2미터에 달하는 거구의 사내가 찻집 안으로 들어왔다.남자는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상철아, 저놈 다리 하나 부러뜨려서 내던져.”성현도가 진서준을 가리키며 명령했다.“알겠습니다.”상철은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진서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서준아, 내가 할게.”허사연의 눈에는 불꽃 같은 전투욕이 타올랐다.“조심해. 저 녀석은 횡련 종사야.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진서준이 조용히 귀띔했다.“알았어. 설령 못 이긴다고 해도 어차피 네가 있잖아?”허사연이 장난스럽게 웃었다.진서준이 곁에 있는 한, 허사연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이봐, 사내자식이 여자 뒤에 숨는 게 말이 돼?”상철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이봐, 껑충이. 여자를 얕보지 마. 일단 이기고 나서 말해.”허사연이 상철을 도발했다.“아가씨, 그런 기생오라비 말고 날 따르지 그래? 밤마다 널 천국으로 보내줄 수 있는데?”상철이 음흉하게 웃었다.“죽고 싶어 환장했구나.”얼굴이 싸늘해진 허사연이 주먹을 날렸다.강렬한 펀치가 공기를 가르며 폭발음을 일으켰고 그 위력은 철판도 뚫을 수 있을 정도였다.하지만 상철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내가 가만히 서 있어도 넌 날 어쩔 수 없어.”“닥쳐!”허사연이 분노에 차 주먹을 그대로 상철의 얼굴로 내리꽂았다.상철은 일부러 머리를 숙이며 대머리 정수리로 받아냈다.쿵!둔탁한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주먹이 상철의 머리를 강타했으나 대머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허사연이 몇 걸음 물러섰다.순간 손에 뜨거운 통증이 밀려왔고 뼈가 부서질 것 같았다.손을 확인하자 하얀 피부였던 손등이 새빨갛게 부어올랐다.상철은 자기 머리를 한번 쓸어내리더니 빙그레 웃었다.“아가씨, 이제 내 실력을 알겠지?”그 모습에 허사연의 승부욕이 다시 불타올랐고 콧방귀를 뀌며 다시 달려들었다.이번에는 다리를 높이 들어 올려 상철의 머리를 내려찍었다.‘머리가 단단하다고 자랑하
이렇게 예쁘고 섹시한 여자가 싸움 실력이 이렇게 대단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완전 여성판 이소룡이었다.“너, 너희들 정말 너무 대담한 거 아니야? 여기가 어디인지 알기나 해? 어디서 대놓고 싸움질이야?”종업원은 순간 놀란 뒤 분노에 찬 얼굴로 진서준와 허사연을 가리켰다.찻집이 문을 연 이후로 이렇게 난동을 부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진서준과 허사연이 첫 사례였다.주변의 구경꾼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싸움 좀 하면 뭐해? 여긴 성씨 가문의 구역이야. 성씨 가문에서 한마디만 하면 저 남녀는 오늘 밤중으로 사라지겠지.”“어휴, 저 여자 너무 아까워. 저렇게 예쁜데 왜 죽지 못해서 안달이지?”“여자는 살 수도 있겠지만 남자는 무조건 죽을걸.”사람들은 저마다 수군거리며 이미 진서준과 허사연의 결말을 예상하는 듯했다.“그럼 네 말대로라면 내가 널 때린다 해도 얌전히 맞고 있어야 한다는 거야?”허사연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종업원에게 다가갔다.“오지 마!”종업원은 겁에 질려 연신 뒷걸음질 쳤다.“어떤 미친놈이 내 구역에서 소란을 피우는 거야?”그 순간, 2층에서 한 사람이 내려왔다.모두가 일제히 시선을 돌려 그 사람을 확인하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성현도가 오늘 여기 있었네?”누군가 그 청년을 알아보았다.“저 둘 끝장났네. 성현도는 악명 높은 냉혈한이야.”그 청년은 바로 찻집의 사장인 성현도였다.성현도는 르벨 재벌 2세 사이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친구에게는 무조건 의리를 지키지만 적에게는 무자비했다.성현도의 고문 방법은 수도 없이 많았고 게다가 무인으로서 무공 실력도 상당했다.“사장님, 저 남녀가 와서 난동을 부렸어요.”종업원은 성현도를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장이 나온 걸 확인한 허사연은 주먹 한 방에 종업원을 기절시켜 버렸다.“뭐야?”성현도의 눈이 가늘어졌고 표정이 험악해졌다.자기 앞에서 대놓고 부하를 때리다니, 이건 너무나도 명백한 도발이었다.“아가씨, 우리 처음 보는 사이 맞지? 우리
그리고 오후 2시가 되자 진서준은 허사연을 데리고 조호가 말한 천국찻집으로 향했다.겉모습만 보면 이 찻집은 진짜 전통찻집 같았고 규모도 꽤 컸다.하지만 막상 안에 들어가 보니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1층과 2층까지는 정말 평범한 찻집처럼 꾸며져 있었고 누가 봐도 이상한 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하지만 3층으로 올라가려면 회원권이 있어야 하거나 사장이 직접 허락한 사람만 출입할 수 있었다.“손님, 아가씨, 이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진서준과 허사연이 차를 마시러 온 줄 안 종업원이 빠르게 달려와 안내하려 했다.“그럴 필요 없어. 난 하경범을 찾으러 왔거든.”진서준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네?”종업원이 순간 얼어붙었다.“혹시 하씨 가문의 하 도련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맞아.”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손님은 누구신지...”종업원이 신중하게 물었다.진서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냥 복수하러 왔다고 전해.”그놈 아버지라고 하는 건 자기를 모욕하는 것과 같았고 친구라고 하기도 기분이 더러웠다.그 말에 종업원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손님, 여기서 장난치지 마세요.”하경범은 르벨에서 유명한 재벌 2세였다.이 찻집의 사장과도 막역한 사이였고 여기서 일하는 직원이라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왜? 못 믿겠어?”진서준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손님, 하 도련님에게 복수하려던 사람은 단 하루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종업원이 경고하듯 말했다.“그런 농담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그 말을 듣자 진서준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이렇게 전해. 그 하경범이 두들겨 맞고 나자빠지게 했던 진서준이 왔으니 당장 기어 나오라고 말이야.”진서준의 뻔뻔한 태도에 종업원은 어이가 없었다.“좋습니다. 손님이 그렇게 죽고 싶다면 제가 기꺼이 도와드리죠.”종업원은 바로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문제 발생했습니다. 난동자가 있습니다.”쿵! 쿵!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건장한 남자 스무 명이 들이닥쳤다.전부 검은
진서준과 허사연은 차를 타고 조호의 회사로 향했다.이 회사는 그냥 겉치레일 뿐, 진짜 돈이 들어오는 곳은 유흥업소들이었다.유흥업소를 얕잡아보면 안 된다.운 좋게 돈 많은 도련님들이라도 걸리면 하룻밤에 수억 원이 순식간에 손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진서준 씨!”진서준이 들어서자 조호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조호는 진서준 옆에 있는 허사연을 힐끗 쳐다본 뒤 고개를 숙이고 감히 더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잡담은 그만하고 하경범을 잡아가는 제일 좋은 타이밍만 말해.”진서준이 직설적으로 물었다.이 말에 조호는 속으로 크게 놀랐다.“매일 오후마다 하경범은 천국찻집이라는 곳에 갑니다.”조호는 재빨리 대답했다.“보통은 경호원 몇 명만 데리고 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얼씨구? 저런 인간이 매일 차나 마시러 간다고?”진서준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그게... 진서준 씨, 사실 그곳은 이름만 찻집이지 실제로는...”조호는 옆에 여성이 있다는 걸 의식해서 말을 흐렸지만 진서준은 그 뜻을 단번에 알아챘다.“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차를 마시는 곳이 아니라 그냥 인기 많은 인터넷 셀럽이 가득한 고급 유흥업소일 것이다.“진서준 씨, 듣자 하니 그 찻집의 주인은 성씨 가문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진짜로 움직이실 거라면 하경범이 이동 중일 때를 노리는 게 좋을 겁니다.”조호가 조심스럽게 조언했다.“응? 성씨 가문이 이런 사업도 해?”진서준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진서준은 오영수에게서 성미영에 대한 정보를 들은 적이 있었다.정의로운 성격의 성미영이 자기 가문에서 이런 유흥업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네, 듣기로는 성씨 가문의 한 직계 후손이 운영한다고 합니다. 여자에 미쳐 있는 놈이라 르벨의 돈 많은 도련님들과 꽤 친분이 깊다고 하더군요.”조호는 본인이 아는 정보를 전부 쏟아냈다.“좋아, 대충 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조호의 회사를 나온
진서준이 허사연의 캐리어를 들어주며 옆방으로 걸어갔다.그 뒷모습을 보며 도지아는 부러움이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인간은 원래 모여서 사는 걸 선호하는 동물이다.사회를 벗어나서 혼자 살아가는 건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가족도 친구도 없이 너무 오래 지내다 보면 결국 감정 없는 시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그렇게 되면 사람과 짐승의 차이가 없어질 것이다.“어제 전화할 때 그랬었지? 이번에 너 자기 출신을 찾으러 온 거라고.”호텔 방으로 돌아온 후, 허사연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너 원래 경성 진씨 가문 사람이잖아?”“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어. 그런데 할아버지가 예전에 말해주셨어. 사실 우리 아버지는 어릴 때 길에서 주워 온 아이였다고.”진서준은 허사연에게 숨길 생각이 없었다.허사연은 진서준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허사연이라면 이 비밀을 절대 밖으로 흘리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뭐라고? 아버님이 주워 온 아이라고?”허사연이 깜짝 놀랐다.“그래.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건 나뿐이야. 가족 중에서도 할아버지가 나한테만 알려주셨지.”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전, 오영수가 내 등에 있는 용을 보고는 내가 용맥의 일족이라고 했어. 그래서 오영수를 따라 여기 와서 오영수 셋째 삼촌에게 내 출신에 관해 알아보려 했던 거야.”“네 등에 용이 있다고? 난 한 번도 본 적 없는데?”허사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동안 둘이 알몸으로 함께한 시간도 적지 않은데 허사연은 한 번도 본 기억이 없었다.“내가 체내 혈기를 모을 때만 그 용이 나타나거든.”진서준이 설명을 이어갔다.“그런데 오영수 삼촌이 아직 돌아오질 않아서 일단은 여기서 며칠 기다려야 해.”“아니, 그럼 오씨 가문에서 널 안 재워줬어?”허사연이 의아해했다.명문대가인 오씨 가문에 빈방이 없을 리가 없었다.“그날 오영수를 찾아갔는데 마침 오영수 할아버지가 위중했어. 그리고 그 집안엔 그 어르신을 그냥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지.”진서준이 담담하게
“진짜 예쁜 새색시 숨겨놓고 있었네?”허사연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누구라도 자기 남자 방에 예쁘고 몸매가 완벽한 여자 하나가 같이 있는 걸 보면 의심 안 할 수가 없었다.게다가 지금은 아침이었다.설마 이 여자가 아침에 막 찾아온 건 아니겠지?“사연아, 오해야. 내가 제대로 설명할게.”진서준은 머리가 띵해졌고 뇌가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아가씨, 오해하지 마세요. 어제 저랑 진서준이 같은 방에서 잔 건 맞지만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저 밤새 한숨도 못 잤다니까요?”도지아가 황급히 해명에 나섰다.“네? 밤새 안 자고도 아무 일 없었다고요?”허사연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되물었다.“설마 밤새 불태우느라 못 잔 건 아니겠죠?”허사연의 농담과 진담이 뒤섞인 말에 진서준은 헛웃음만 나왔다.“사연아, 이쪽은 도지아야. 우리 진짜 그냥 친구야. 일단 들어와. 천천히 설명할게.”허사연이 방에 들어오자 진서준은 서로에게 소개했다.그러고는 이 방에서 일어난 상황을 설명했다.“도지아는 황예은이 소개해 준 환자야. 다리 치료를 부탁받았거든. 종아리를 봐봐. 이틀 전에 내가 직접 발라준 연고가 있어.”허사연이 내려다보자 확실히 연고가 발라져 있었다.“그리고 도지아가 밤새 안 잔 건 원기를 수련하느라 그랬던 거야. 너도 예전에 수련한다고 며칠씩 안 잔 적 있잖아?”허사연은 오해가 풀리자 그제야 빙그레 웃었다.“내가 뭐 어쨌다고 그렇게 호들갑이야?”“혹시라도 오해할까 봐 그러는 거잖아.”진서준이 빠르게 대답했다.“뭐야? 내가 그렇게 의심 많고 질투 많은 여자로 보여?”허사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아, 아니지. 우리 사연은 누구보다 속이 넓은 부드러운 여자지.”진서준이 급히 정정했다.“됐어, 너 겁먹은 거 너무 귀엽다.”허사연이 피식 웃었다.“넌 여기 좀 쉬고 있어. 내가 방 하나 잡고 올게.”진서준은 더 머뭇거릴 틈도 없이 벌떡 일어나 나가 버렸다.진서준의 뒷모습을 보며 허사연은 그제야 웃음을 터뜨렸다.“도지아 씨, 진서준이
“내가 가면 안 돼?”사실 진서준은 거절하려 했었다.르벨은 안개가 짙게 깔린 늪지대 같은 곳이라 진서준조차도 어디에 함정이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그러니 허사연이 온다면 다칠 가능성이 컸다.하지만 거절하면 허사연이 상처받을 게 뻔했다.“당연히 되지. 지금 위치 보낼게.”진서준은 단호하게 말하며 위치를 보냈다.자기 여자를 지킬 자신도 없으면서 강자들을 상대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자기야, 잘 자.”허사연이 애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너도 일찍 자.”진서준이 다정하게 답했다.전화를 끊고 나니 진서준의 졸음이 싹 가셨다.진서준은 창가로 다가가 이 화려한 도시를 내려다봤다.“오씨 가문, 안씨 가문, 하씨 가문... 너희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든 난 전부 박살 낼 거야. 이번엔 반드시 나와 아버지의 정체를 밝혀내고 말겠어.”진서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그렇게 별다른 사건 없이 밤이 지나갔다.다음 날 아침.진서준이 막 눈을 뜨자마자 도지아의 흥분한 외침이 들려왔다.“진서준, 됐어. 나 생겼어!”도지아는 눈 밑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는데 밤새 잠을 자지 않은 게 분명했다.진서준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너 아직 처녀 아니었어? 대체 어떻게 임신한 거야?”“미친놈아, 임신은 개뿔, 무슨 헛소리야?”도지아는 얼굴이 빨개지며 진서준을 노려봤다.“그럼 왜 아침부터 난리야?”진서준이 되물었다.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아침부터 흥분해 날뛰지 않을 것이다.“어제 네가 준 수련법 기억나지? 나 벌써 원기를 형성할 수 있게 됐어.”자기가 대단하다고 여긴 도지아는 자랑스럽게 선언했다.고작 하룻밤 만에 원기를 형성한 건 확실히 대단한 일이었다.“뭐? 그렇게 빠르다고? 너 타고난 천재 맞네?”진서준이 다소 의아한 표정을 보였다.보통 무인은 원기를 익히는 데만 최소 1년이 걸리는데 그것도 매일 꾸준히 수련할 경우에만 발생하는 일이었다.심지어 재능 있는 자들도 한두 달은 족히 걸린다.그런데 도지아는 단 하룻밤에 이 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