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은 가장 중요한 기관이자 가장 약한 기관이었다.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심장이 견디지 못할 수 있었다.서정훈의 심장은 원래도 문제가 있었기에 빠르게 수술을 진행하지 않는다면 서정훈이 수술대 위에서 숨을 거둘 수도 있었다.서정훈의 상황이 심각해진 건 진서준이 예상한 일이었다.하지만 최문혁 등 사람들은 당황했다. 수술이 이제 막 시작되었는데 벌써 견디지 못한다면, 반쯤 진행되었을 때 서정훈은 틀림없이 죽을 터였다.“얼른 응급조치를 취해. 일단 환자 상태부터 안정시켜야 해!”최문혁은 전문가였기에 곧바로 침착함을 되찾고 부하에게 응급조치를 하라고 명령했다.“그렇게 해봤자 못 구해요. 그냥 시간 낭비일 뿐이죠.”옆에 있던 진서준이 갑자기 말했다.현재 서정훈의 상태를 보면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응급조치를 할 겨를조차 없었다.유일한 방법은 일반적인 방법이 아니라 특별한 방법으로 최선을 다해 심장을 치료하는 것이었다.“입 닥쳐요. 환자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다 당신 탓이에요!”최문혁은 문득 자신이 환자를 구하지 못해도 모든 책임을 진서준에게 돌리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무려 부시장인 서정훈이 죽게 된다면, 이렇게 큰 의료 사고를 최문혁은 감당할 수 없었다.하지만 다행히도 대신 책임을 져 줄 사람이 있었다.그런 생각이 들자 최문혁은 부담감이 줄어들어 응급조치를 취하는 속도로 늦어졌다.진서준은 그 모든 걸 지켜보면서 속으로 냉소했다.최문혁처럼 인품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의사가 될 자격이 없었다.그러나 진서준은 대놓고 얘기하지 않고 최문혁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봤다.약 10분간 응급조치를 취했지만 약간의 기복이 있던 심전도가 완전히 직선이 되었다.다들 서정훈이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나가죠. 환자는 가망이 없어요.”최문혁은 한숨을 쉬면서 제일 처음 수술실을 떠났다.다른 조수들도 최문혁을 뒤따랐다. 아무도 진서준을 신경 쓰지 않았다.진서준은 최문혁 팀이 전부 나가고 나서야 은침과 메스를 들고 서정훈의 옆에 섰다.다른 사람은 서
우성환과 반재윤은 심해윤이 화를 내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우성환은 곧바로 앞으로 나서면서 심해윤에게 말했다.“심해윤 씨, 화를 푸세요. 진 선생님 인품은 제가 장담합니다. 진 선생님은 절대 그런 짓을 할 분이 아닙니다.”최문혁 조수는 그 말을 듣고 냉소했다.“그 말은 제가 거짓말했다는 건가요?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구경하던 그 사람이 우리의 수술을 방해했다는 걸 증언할 수 있어요. 그 사람이 자꾸만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이미 환자를 치료했을 겁니다.”수술하러 들어간 사람들은 전부 최문혁의 사람이었기에 당연히 그의 편을 들었다.다들 진서준이 문제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반재윤 씨, 뭐 더 할 말 있어요?”심해윤은 반재윤을 향해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20대 청년을 데려와서 신의라고 하다니, 내가 바보 같아 보였나요? 오늘 제 남편의 죽음은 안에 있는 그 사람뿐만 아니라 당신도 책임져야 해요!”옆에 이던 공윤석은 그 말을 듣자 무척 기뻤다. 동시에 그는 자기 친구 최문혁을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공윤석은 심해윤이 혹시라도 잘못을 따질까 봐 걱정했었는데 이제 심해윤의 이목은 전부 반재윤에로 향했다.반재윤은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수술실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그 사람은요? 당장 나오라고 해요!”최문혁은 곧바로 사람을 데리고 수술실 안으로 들어갔다.수술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최문혁 등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그들은 진서준이 은침을 들고 서정훈의 몸을 찌르는 걸 보았다.“이 자식, 뭐 하는 거야? 어떻게 죽은 사람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최문혁은 정신을 차린 뒤 화를 내며 고함을 지르더니 곧바로 부하에게 진서준을 끌어내라고 했다.그런데 진서준에게 가까워지자마자 다들 진서준의 영기에 부딪혀 날아갔다.밖에 있던 심해윤 등 사람들은 수술실에서 소리가 들리자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뭐 하는 거예요?”심해윤이 화가 난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심해윤 씨, 저 사람이 지금 은침으로 죽은 부시장님의 몸
진서준의 가뿐한 두 마디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고 반박할 용기조차 없었다.특히 최문혁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반평생 의사 노릇을 해왔지만 심장에 문제가 있는 데다 심장이 이미 박동을 멈춘 환자를 살려내는 것은 처음 봤기 때문이다.제일 놀라운 것은, 사람을 살린 것이 20대 초반의 청년이다.그가 직접 목격하지 않았다면 아예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심해윤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방금까지 진서준을 잡아가라고 떠들었는데 결국 서정훈을 살린 사람이 진서준이었으니까!“진 신의님, 서 부시장님은 괜찮으신가요?”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반재윤이 들뜬 표정으로 물었다.이 30분 동안 반재윤은 자신의 인생이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느껴졌다. 조금 전의 최저점에서 지금 최고점에 도달했으니까!“괜찮습니다. 의외의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 한 사오십 년은 더 살 수 있습니다.”진서준이 덤덤하게 말했다.서정훈의 나이가 곧 50세인데, 사오십 년 더 산다면 100세까지 산다는 것이다.“심 처장님, 제가 진 선생님의 의술과 인품을 믿으라고 했잖아요.”반재윤의 말에 심해윤이 겸연쩍은 표정을 짓고 진서준에게 다가갔다.“죄송합니다, 진 선생님. 아까는 너무 조급해서 그랬습니다. 저의 무례한 행동을 용서해 주십시오.”부시장의 부인인 심해윤이 진서준이라는 청년에게 직접 사과하는 모습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진서준도 심해윤이 사람들 앞에서 사과할 만큼 패기가 있을 줄은 몰랐다.“사과는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아까 제가 사람을 구할 때 누군가가 저를 모함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진서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방금 그에게 책임을 떠넘긴 최문혁의 조수를 바라보았다.진서준의 매서운 눈빛을 마주한 조수는 놀라서 덜덜 떨었다.“그게... 최 선생님이 그렇게 말하라고 시켰습니다.”조수는 거짓말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최문혁을 불고 말았다.“너 헛소리하지 마! 나는 그렇게 시킨 적이 없어.”최문혁이 난처한 나머지 얼굴이 벌게지며 화를 벌컥 냈다.
최문혁이 끌려간 후 진서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간호사한테 환자가 반나절 동안 안정을 취해야 하니 병실로 옮기라고 하세요.”우성환은 즉시 간호사를 불러 서정훈을 중환자실로 옮겼다.“진 선생님, 제 남편이 언제 깨어날 수 있어요?”심해윤이 진서준을 따라다니며 긴장된 표정으로 물었다.“잠시 후면 깨어나실 겁니다. 하지만 몸이 허약해서 말을 많이 하지 말고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진서준이 당부했다.그가 장청의 힘과 기사회생침으로 서정훈을 살려내긴 했지만 몸이 너무 허약해서 많은 휴식과 영양 보충이 필요하다.“네네, 진 선생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현재의 심해윤은 진서준이 무슨 말을 하든 다 받아들였고, 감히 반박하지 못했다.심해윤이 초등학생처럼 진서준을 졸졸 따라다니는 것을 본 사람들은 경탄을 금치 못했다.공윤석은 앞길이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현재로서는 자기 아들을 너그러이 용서하고 놓아달라고 진서준에게 빌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공수철은 10년 이상 안에서 썩어야 할 것이다.아들이라고는 공수철 하나뿐인 공윤석은 그가 공씨 가문의 대를 잇기를 바라고 있다.“사람을 살려냈으니 별일 없으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진서준이 심해윤에게 말했다.“진 선생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남편이 깨어나면 직접 감사 인사를 드려야죠.”심해윤은 진서준이 이렇게 빨리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서정훈에게 생명의 은인을 보여주고 싶은 것도 있지만 진서준이 떠난 후 서정훈에게 또 무슨 상황이 나타날까 봐 걱정됐다.“감사 인사는 필요 없습니다.”진서준은 손을 내젓더니, 뒤이어 한마디 보탰다.“아드님이 여기저기서 말썽을 일으키지 않게 잘 단속하기만 하면 됩니다.”진서준의 말에 심해윤은 깜짝 놀라며 급히 물었다.“그 망나니 자식이 진 선생님을 건드렸나요?”“어제 한 번 봤습니다.”진서준이 말끝을 흐렸지만, 심해윤은 이내 무슨 뜻인지 알았다.“그 자식, 제가 지금 당장 전화해서 기어와 사과하라고 할게요.”화가 잔뜩 난 심해윤은 즉시 휴대폰을
얘기를 다 들은 후 화가 나서 얼굴이 시뻘게진 심해윤은 오가는 의료진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서현욱을 발로 걷어찼다.평소에 자기를 애지중지하던 어머니가 자기를 발로 걷어찰 줄 몰랐던 서현욱은 순간 균형을 잃고 바닥에 엎어졌다.“이놈 자식이 아빠가 요즘 편찮으신 줄 뻔히 알면서 계속 말썽을 피워!”심해윤은 때리고 욕하고, 마치 분노의 폭주 기관차 같았다.심해윤의 성격을 잘 아는 비서도 깜짝 놀랐다. 심해윤의 곁에 오래 있었지만 이렇게 화내는 것은 처음 본다.그녀의 아들이었으니 이 정도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아마 진작에 끝장났을 것이다.“어머니, 왜 때려요? 제가 아들이 맞긴 맞아요? 어제 괴롭힘을 당한 사람은 저였다고요.”서현욱도 화가 나서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심해윤에게 발로 차이고 두들겨 맞고 했으니,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다.“네가 내 아들이 아니었다면 열 번도 더 죽었을 거야!”심해윤은 치를 떨며 말했다.“그동안 네가 한 짓들은 모두 눈감아 줬지만, 진 선생님은 더 이상 건드리지 마.”“진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너는 네 아빠를 다시 보지 못할 뻔했어.”심해윤의 말에 서현욱은 어리둥절했다.“어머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못 알아듣겠어요.”서현욱은 자기 나이 또래의 그 청년이 뭐가 무섭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오늘 아침 진서준이 네 아빠 목숨을 살렸어.”“말도 안 돼요. 스무 살 남짓한 애송이가 어떻게 아빠를 살릴 수 있어요?”서현욱은 생각도 안 하고 직접 반박했다.진서준의 나이는 서현욱과 비슷했다. 서현욱은 자기와 같은 연령대의 사람이 진짜 실력이 있을 거라고 믿지 않았다.서현욱의 친구들도 모두 20대지만 거의 다 먹고 마시고 놀 줄만 아는 부잣집 자제들이기 때문이다.진서준같이 젊고 유능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서현욱은 아예 믿지 않았다.“내가 직접 봤는데, 거짓말이겠니?”심해윤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내 말 명심해. 다시는 진 선생님을 귀찮게 하지 말고, 만나면
서현욱은 코웃음을 쳤다.“나한테 대도시 친구가 없는 줄 알아요?”“그럼, 도련님께서 누굴 찾으실 생각인지 물어봐도 될까요?”강성철이 또 한 마디 물었다.“고양시에 사는 강은우라고 들어보셨어요?”서현욱이 경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고양시는 도청 소재지로, 규모가 대단히 큰 도시다.강은우는 얼마 전 진서준에게 혼나고 기가 죽어 서울시를 떠난 사람이다.강성철은 강은우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당연히 들어봤죠. 근데 강은우는 어떻게 아는 사이예요?”강성철이 궁금해하며 물었다.고양시가 본진인 강은우는 서현욱과 교집합이 있을 수 없다.“그의 아들 강백산이 내 동창인데, 내 한마디면 그 자식은 물불을 안 가려요.”서현욱이 허풍을 떨었다.어쨌든 그와 강백산의 관계가 실제로 어떤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그럼, 도련님의 성공을 빕니다. 저는 일이 있어서 이만 끊겠습니다.”염탐이 끝났으니 강성철은 서현욱과 더 이상 쓸데없는 소리할 생각이 없었다.“쳇, 잘난 척은. 내가 경찰서에 들어가면 당신부터 잡을 거야.”서현욱은 입을 삐죽거리더니 주소록을 열어 연적이라고 표시된 번호를 찾은 후 전화를 걸었다.사실 서현욱과 강백산은 연적의 관계였다.대학 시절 서현욱과 강백산은 모두 허사연을 쫓아다녔지만 허사연은 두 사람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강백산이 졸업한 후, 그의 아버지 강은우는 그의 신변을 걱정하여 무조건 고양시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렸다.지금 심해윤이 진서준을 보호하고 있으니 서현욱은 진서준을 혼내는 데에 감히 부모의 공직을 이용하지 못한다.“얼씨구, 서현욱 도련님 아니신가? 어쩐 일로 나한테 전화를 다 하고?”강백산은 전화를 받자마자 빈정거렸다.“잔말 말고, 나랑 함께 누군가를 혼내지 않을래?”강백산과 입씨름할 기분이 아닌 서현욱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나랑 손잡는다고? 어디 보자.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나.”전화기 저편의 강백산도 놀랐다.두 사람은 대학교에서 4년 동안 싸웠지만 서로 승복한 적이 없다.그
“진서준, 네가 왜 여기 있어?”그녀는 놀라움에 약간의 경멸과 무시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마치 진서준은 이 쇼핑몰에 나타나면 절대 안 되는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진서준은 허윤진의 체면을 깎지 않으려고 특별히 국제 유명 브랜드 매장을 찾았다. 여기 옷들은 모두 명품이라 코트를 아무거나 집어 들어도 가격이 수백만원대다.이 가격이 일반인에게는 영락없는 사치품이고, 과거의 진서준에게도 근처도 못 갈 물건들이었다.고개를 돌린 진서준은 목소리의 주인을 보고 잠시 멍해 있었다.그가 아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친척이었기 때문이다.여인의 이름은 정란, 진서준의 둘째 이모 딸이다. 촌수를 따지면 그의 외사촌 여동생일 것이다.놀라긴 했지만 진서준은 이 둘째 이모에게 아무런 호감도 없다.둘째 이모는 조희선과 친자매였지만 조희선 일가가 곤경에 처했을 때 한 번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을 정도로 낯선 사람보다 더 냉혹했다.“란아, 이분은 누구야?”정란 곁에 있던 청년이 웃으며 물었다.“우리 큰이모 아들이에요. 감옥 갔다고 들었는데, 벌써 나온 줄 몰랐네요.”정란이 웃으며 설명했다.감옥 갔었다는 소리에 청년의 눈빛도 호기심과 경멸로 바뀌었다.“진서준, 나왔으면 취직해서 새출발해. 하루 종일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지 말고.”정란이 진서준을 바라보며 잘난 체했다.진서준은 뼛속까지 우월감으로 뭉친 정란의 모습이 역겨웠다.“너랑 상관없어!”진서준이 쌀쌀맞게 말했다.“너 사람이 왜 그래?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잖아. 남의 호의도 몰라주고.”정란은 진서준이 반격하자 즉시 화를 냈다.“란아, 그만해. 요즘 젊은이들은 성격이 다 이래. 자기를 위해서 하는 말도 나쁘게 해석해서 듣지.”정란 곁에 있던 청년이 웃으며 그녀를 말렸다.이어서 청년은 진서준에게 자신을 소개했다.“저는 공민찬이라고 해요. 란이 남자친구이고 지금 인사처에서 근무하고 있어요.”인사처는 내부 부서 중 가장 핫한 부서로, 많은 사람이 비집고 들어가려고 애쓴다.공민찬은 나이가 진서준
오션호텔은 서울시의 오래된 5성급 호텔로, 허씨 가문이 기업주다.“알았어. 점심에 꼭 갈게.”진서준도 마침 자기 가족이 그들의 도움 없이도 잘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그럼 여기서 부자들이 입는 옷을 구경하고 있어.”말을 마친 정란은 공민찬의 팔짱을 끼고 좀 저렴한 매장으로 향했다.공민찬은 인사처에 들어가긴 했지만 집에 돈이 많지 않아 명품 매장은 반년에 한 번 오는 것도 쉽지 않았다.정란은 얼굴이 좀 반반한 것을 빼면 아무 실력도 없었고, 지금 60만 원 좀 넘는 월급을 받으면서 사기업에서 일하고 있다.그녀는 체면을 세우기 위해 고급 모조품 가방을 들고 다녔다.진서준은 신사복 코너에서 몇 벌을 고른 후 판매원에게 짙은 회색 양복을 가져오라고 했다.“고객님, 이 양복은 가격이 좀 비싼데, 다른 것도 좀 보실래요?”판매원은 진서준이 부자로 보이지 않아 친절하게 귀띔했다.“가격은 문제가 아니고, 맞으면 됩니다.”진서준이 덤덤하게 말했다.“네, 그럼 이쪽으로 와서 입어보세요.”판매원이 진서준을 탈의실로 안내했다.진서준은 값비싼 양복으로 갈아입은 후 더 멋있어졌다.판매원도 홀딱 빠진 듯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이 옷이 고객님의 얼굴이나 분위기와 너무 잘 어울립니다.”진서준은 거울을 본 후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이걸로 할게요.”평소에 진서준은 정장을 입기 싫어하고, 캐주얼하고 편안한 옷을 좋아한다.이런 정장을 입은 횟수는 손꼽아 헤아릴 수 있을 정도다.“이 양복의 가격은 3,000만 원입니다. 카드로 하시겠습니까?”여자 판매원이 물었다.“카드로 할게요.”진서준이 은행카드를 꺼내 판매원에게 건넸다.“잠시만요.”잠시 후 여자 판매원이 카드와 계산서를 가지고 왔다. 그녀는 꿀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진서준을 바라보았고 끌리는 마음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이렇게 돈이 많고 잘생긴 청년은 지금 이 사회에서 보기 드물다.그녀와 같은 여자 판매원은 돈 많은 남자를 하나만 꼬셔도 평생 돈 걱정 없을 것이다.“어머
“뭐라고? 불법적인 일이 우리 가게에서 일어난다고? 말도 안 돼.”성현도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넌 전신전 소속이잖아. 그런데 네 오빠인 내가 어떻게 법률을 어기는 일을 하겠어?”“그럼 이 사람들은 왜 부른 거야? 집단 폭력도 불법이거든.”성미영은 차가운 시선을 보이며 성현도와 따졌다.“미영아, 이건 내가 싸우려던 게 아니야. 저 녀석이 일부러 시비 걸러 온 거라고.”성현도는 진서준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이놈이 일부러 우리 찻집에 난입해 행패를 부리고 상철을 두들겨 패서 머리에 혹이 다 나버렸어. 난 단순히 정당방위를 위해 부른 거라고.”성미영이 등장하자 성현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솔직히 실력만 놓고 보면 성현도는 성미영보다 한참 부족했다.게다가 성미영은 전신전 소속인지라 저 남녀가 군부 조직인 전신전을 적으로 돌릴 리 없었다.군대를 건드리는 순간, 무조건 좋은 결과는 있을 수 없었다.“진서준, 도대체 무슨 일이야?”성미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라? 너희 둘이 아는 사이야?”성현도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방금 내려놨던 마음이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난 사람을 찾으러 왔어. 하씨 가문 하경범이 이 위층에 있다고 들었는데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어.”진서준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그리고 또 하나, 저 위에서 불법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도 하더군.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어.”이 말에 성현도의 표정이 단숨에 험악해졌고 즉시 반박에 나섰다.“헛소리 마. 우리 가게는 단순한 찻집이야. 불법적인 일 따윈 없어. 근거없는 소문을 왜 털어놓고 난리야?”“미영아, 저 녀석한테 속지 마. 난 네 사촌 오빠야. 내가 그런 불법적인 짓을 할 사람이겠어?”성미영이 곧바로 진서준에게 물었다.“진서준, 너 증거 있어?”“직접 올라가 보면 다 알게 될 거잖아?”진서준이 가볍게 말했다.“오빠, 위층으로 가자.”성미영이 단호하게 말했다.“그, 그건 좀 곤란해. 위층엔 귀
순간, 장내는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모든 시선이 진서준에게 쏠렸고 사람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다들 진서준을 그냥 얼굴만 반반한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진짜 고수였다.성현도의 부하 중 최고 실력자조차 상대가 되지 않았다.성현도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렸고 상철을 향해서 욕설을 날렸다.“쓰레기 자식, 이런 애송이 하나도 못 이겨?”부하가 지면 망신당하는 건 결국 성현도 자신이었다.이대로 체면을 구긴 채 끝낼 수는 없었다.이대로 넘어가면 앞으로 르벨 재벌 2세들 사이에서 조롱거리가 될 게 뻔했다.“이봐, 네 실력이 괜찮은 건 인정할게.”성현도가 싸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근데 너 혼자서 백 명을 상대할 수 있어? 천 명은? 잘 들어. 내 부하는 수도 없이 많아. 너 같은 놈 하나 처리하는 데 전화 한 통이면 충분해.”진서준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다시 말하지만 난 그냥 하경범을 찾으러 온 거야. 그 녀석만 넘기면 오늘 일은 없던 걸로 해주지.”“없던 걸로 한다고?”성현도가 그 말에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너 지금 누굴 상대로 협상하려 드는 거야? 난 성씨 가문의 직계야. 날 건드리면 상대해야 할 건 나 하나가 아니라 우리 가문 전체라고.”그때,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곧이어 검은색 전투복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이 남자들은 전부 성씨 가문의 경호원이었고 실력도 만만하지 않았다.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무려 50명 이상이었다.한순간에 텅 비어 있던 로비가 사람들로 꽉 찼다.“저 자식 끝났네. 이 정도 성씨 가문 인원이라면 아무리 강해도 버틸 수가 없지.”“그러게 말이야.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없잖아.”“왜 쓸데없이 성현도를 건드린 거지? 스스로 무덤을 판 거잖아.”구경꾼들은 이 광경에 각자 다른 감정을 보였다.누군가는 동정을, 누군가는 아쉬움을, 또 누군가는 짙은 흥미를 보였다.“사연아, 넌 좀 쉬어. 이놈들은 내가 처리할게.”진서준이 앞으로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키가 거의 2미터에 달하는 거구의 사내가 찻집 안으로 들어왔다.남자는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상철아, 저놈 다리 하나 부러뜨려서 내던져.”성현도가 진서준을 가리키며 명령했다.“알겠습니다.”상철은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진서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서준아, 내가 할게.”허사연의 눈에는 불꽃 같은 전투욕이 타올랐다.“조심해. 저 녀석은 횡련 종사야.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진서준이 조용히 귀띔했다.“알았어. 설령 못 이긴다고 해도 어차피 네가 있잖아?”허사연이 장난스럽게 웃었다.진서준이 곁에 있는 한, 허사연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이봐, 사내자식이 여자 뒤에 숨는 게 말이 돼?”상철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이봐, 껑충이. 여자를 얕보지 마. 일단 이기고 나서 말해.”허사연이 상철을 도발했다.“아가씨, 그런 기생오라비 말고 날 따르지 그래? 밤마다 널 천국으로 보내줄 수 있는데?”상철이 음흉하게 웃었다.“죽고 싶어 환장했구나.”얼굴이 싸늘해진 허사연이 주먹을 날렸다.강렬한 펀치가 공기를 가르며 폭발음을 일으켰고 그 위력은 철판도 뚫을 수 있을 정도였다.하지만 상철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내가 가만히 서 있어도 넌 날 어쩔 수 없어.”“닥쳐!”허사연이 분노에 차 주먹을 그대로 상철의 얼굴로 내리꽂았다.상철은 일부러 머리를 숙이며 대머리 정수리로 받아냈다.쿵!둔탁한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주먹이 상철의 머리를 강타했으나 대머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허사연이 몇 걸음 물러섰다.순간 손에 뜨거운 통증이 밀려왔고 뼈가 부서질 것 같았다.손을 확인하자 하얀 피부였던 손등이 새빨갛게 부어올랐다.상철은 자기 머리를 한번 쓸어내리더니 빙그레 웃었다.“아가씨, 이제 내 실력을 알겠지?”그 모습에 허사연의 승부욕이 다시 불타올랐고 콧방귀를 뀌며 다시 달려들었다.이번에는 다리를 높이 들어 올려 상철의 머리를 내려찍었다.‘머리가 단단하다고 자랑하
이렇게 예쁘고 섹시한 여자가 싸움 실력이 이렇게 대단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완전 여성판 이소룡이었다.“너, 너희들 정말 너무 대담한 거 아니야? 여기가 어디인지 알기나 해? 어디서 대놓고 싸움질이야?”종업원은 순간 놀란 뒤 분노에 찬 얼굴로 진서준와 허사연을 가리켰다.찻집이 문을 연 이후로 이렇게 난동을 부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진서준과 허사연이 첫 사례였다.주변의 구경꾼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싸움 좀 하면 뭐해? 여긴 성씨 가문의 구역이야. 성씨 가문에서 한마디만 하면 저 남녀는 오늘 밤중으로 사라지겠지.”“어휴, 저 여자 너무 아까워. 저렇게 예쁜데 왜 죽지 못해서 안달이지?”“여자는 살 수도 있겠지만 남자는 무조건 죽을걸.”사람들은 저마다 수군거리며 이미 진서준과 허사연의 결말을 예상하는 듯했다.“그럼 네 말대로라면 내가 널 때린다 해도 얌전히 맞고 있어야 한다는 거야?”허사연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종업원에게 다가갔다.“오지 마!”종업원은 겁에 질려 연신 뒷걸음질 쳤다.“어떤 미친놈이 내 구역에서 소란을 피우는 거야?”그 순간, 2층에서 한 사람이 내려왔다.모두가 일제히 시선을 돌려 그 사람을 확인하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성현도가 오늘 여기 있었네?”누군가 그 청년을 알아보았다.“저 둘 끝장났네. 성현도는 악명 높은 냉혈한이야.”그 청년은 바로 찻집의 사장인 성현도였다.성현도는 르벨 재벌 2세 사이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친구에게는 무조건 의리를 지키지만 적에게는 무자비했다.성현도의 고문 방법은 수도 없이 많았고 게다가 무인으로서 무공 실력도 상당했다.“사장님, 저 남녀가 와서 난동을 부렸어요.”종업원은 성현도를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장이 나온 걸 확인한 허사연은 주먹 한 방에 종업원을 기절시켜 버렸다.“뭐야?”성현도의 눈이 가늘어졌고 표정이 험악해졌다.자기 앞에서 대놓고 부하를 때리다니, 이건 너무나도 명백한 도발이었다.“아가씨, 우리 처음 보는 사이 맞지? 우리
그리고 오후 2시가 되자 진서준은 허사연을 데리고 조호가 말한 천국찻집으로 향했다.겉모습만 보면 이 찻집은 진짜 전통찻집 같았고 규모도 꽤 컸다.하지만 막상 안에 들어가 보니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1층과 2층까지는 정말 평범한 찻집처럼 꾸며져 있었고 누가 봐도 이상한 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하지만 3층으로 올라가려면 회원권이 있어야 하거나 사장이 직접 허락한 사람만 출입할 수 있었다.“손님, 아가씨, 이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진서준과 허사연이 차를 마시러 온 줄 안 종업원이 빠르게 달려와 안내하려 했다.“그럴 필요 없어. 난 하경범을 찾으러 왔거든.”진서준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네?”종업원이 순간 얼어붙었다.“혹시 하씨 가문의 하 도련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맞아.”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손님은 누구신지...”종업원이 신중하게 물었다.진서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냥 복수하러 왔다고 전해.”그놈 아버지라고 하는 건 자기를 모욕하는 것과 같았고 친구라고 하기도 기분이 더러웠다.그 말에 종업원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손님, 여기서 장난치지 마세요.”하경범은 르벨에서 유명한 재벌 2세였다.이 찻집의 사장과도 막역한 사이였고 여기서 일하는 직원이라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왜? 못 믿겠어?”진서준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손님, 하 도련님에게 복수하려던 사람은 단 하루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종업원이 경고하듯 말했다.“그런 농담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그 말을 듣자 진서준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이렇게 전해. 그 하경범이 두들겨 맞고 나자빠지게 했던 진서준이 왔으니 당장 기어 나오라고 말이야.”진서준의 뻔뻔한 태도에 종업원은 어이가 없었다.“좋습니다. 손님이 그렇게 죽고 싶다면 제가 기꺼이 도와드리죠.”종업원은 바로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문제 발생했습니다. 난동자가 있습니다.”쿵! 쿵!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건장한 남자 스무 명이 들이닥쳤다.전부 검은
진서준과 허사연은 차를 타고 조호의 회사로 향했다.이 회사는 그냥 겉치레일 뿐, 진짜 돈이 들어오는 곳은 유흥업소들이었다.유흥업소를 얕잡아보면 안 된다.운 좋게 돈 많은 도련님들이라도 걸리면 하룻밤에 수억 원이 순식간에 손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진서준 씨!”진서준이 들어서자 조호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조호는 진서준 옆에 있는 허사연을 힐끗 쳐다본 뒤 고개를 숙이고 감히 더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잡담은 그만하고 하경범을 잡아가는 제일 좋은 타이밍만 말해.”진서준이 직설적으로 물었다.이 말에 조호는 속으로 크게 놀랐다.“매일 오후마다 하경범은 천국찻집이라는 곳에 갑니다.”조호는 재빨리 대답했다.“보통은 경호원 몇 명만 데리고 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얼씨구? 저런 인간이 매일 차나 마시러 간다고?”진서준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그게... 진서준 씨, 사실 그곳은 이름만 찻집이지 실제로는...”조호는 옆에 여성이 있다는 걸 의식해서 말을 흐렸지만 진서준은 그 뜻을 단번에 알아챘다.“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차를 마시는 곳이 아니라 그냥 인기 많은 인터넷 셀럽이 가득한 고급 유흥업소일 것이다.“진서준 씨, 듣자 하니 그 찻집의 주인은 성씨 가문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진짜로 움직이실 거라면 하경범이 이동 중일 때를 노리는 게 좋을 겁니다.”조호가 조심스럽게 조언했다.“응? 성씨 가문이 이런 사업도 해?”진서준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진서준은 오영수에게서 성미영에 대한 정보를 들은 적이 있었다.정의로운 성격의 성미영이 자기 가문에서 이런 유흥업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네, 듣기로는 성씨 가문의 한 직계 후손이 운영한다고 합니다. 여자에 미쳐 있는 놈이라 르벨의 돈 많은 도련님들과 꽤 친분이 깊다고 하더군요.”조호는 본인이 아는 정보를 전부 쏟아냈다.“좋아, 대충 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조호의 회사를 나온
진서준이 허사연의 캐리어를 들어주며 옆방으로 걸어갔다.그 뒷모습을 보며 도지아는 부러움이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인간은 원래 모여서 사는 걸 선호하는 동물이다.사회를 벗어나서 혼자 살아가는 건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가족도 친구도 없이 너무 오래 지내다 보면 결국 감정 없는 시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그렇게 되면 사람과 짐승의 차이가 없어질 것이다.“어제 전화할 때 그랬었지? 이번에 너 자기 출신을 찾으러 온 거라고.”호텔 방으로 돌아온 후, 허사연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너 원래 경성 진씨 가문 사람이잖아?”“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어. 그런데 할아버지가 예전에 말해주셨어. 사실 우리 아버지는 어릴 때 길에서 주워 온 아이였다고.”진서준은 허사연에게 숨길 생각이 없었다.허사연은 진서준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허사연이라면 이 비밀을 절대 밖으로 흘리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뭐라고? 아버님이 주워 온 아이라고?”허사연이 깜짝 놀랐다.“그래.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건 나뿐이야. 가족 중에서도 할아버지가 나한테만 알려주셨지.”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전, 오영수가 내 등에 있는 용을 보고는 내가 용맥의 일족이라고 했어. 그래서 오영수를 따라 여기 와서 오영수 셋째 삼촌에게 내 출신에 관해 알아보려 했던 거야.”“네 등에 용이 있다고? 난 한 번도 본 적 없는데?”허사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동안 둘이 알몸으로 함께한 시간도 적지 않은데 허사연은 한 번도 본 기억이 없었다.“내가 체내 혈기를 모을 때만 그 용이 나타나거든.”진서준이 설명을 이어갔다.“그런데 오영수 삼촌이 아직 돌아오질 않아서 일단은 여기서 며칠 기다려야 해.”“아니, 그럼 오씨 가문에서 널 안 재워줬어?”허사연이 의아해했다.명문대가인 오씨 가문에 빈방이 없을 리가 없었다.“그날 오영수를 찾아갔는데 마침 오영수 할아버지가 위중했어. 그리고 그 집안엔 그 어르신을 그냥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지.”진서준이 담담하게
“진짜 예쁜 새색시 숨겨놓고 있었네?”허사연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누구라도 자기 남자 방에 예쁘고 몸매가 완벽한 여자 하나가 같이 있는 걸 보면 의심 안 할 수가 없었다.게다가 지금은 아침이었다.설마 이 여자가 아침에 막 찾아온 건 아니겠지?“사연아, 오해야. 내가 제대로 설명할게.”진서준은 머리가 띵해졌고 뇌가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아가씨, 오해하지 마세요. 어제 저랑 진서준이 같은 방에서 잔 건 맞지만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저 밤새 한숨도 못 잤다니까요?”도지아가 황급히 해명에 나섰다.“네? 밤새 안 자고도 아무 일 없었다고요?”허사연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되물었다.“설마 밤새 불태우느라 못 잔 건 아니겠죠?”허사연의 농담과 진담이 뒤섞인 말에 진서준은 헛웃음만 나왔다.“사연아, 이쪽은 도지아야. 우리 진짜 그냥 친구야. 일단 들어와. 천천히 설명할게.”허사연이 방에 들어오자 진서준은 서로에게 소개했다.그러고는 이 방에서 일어난 상황을 설명했다.“도지아는 황예은이 소개해 준 환자야. 다리 치료를 부탁받았거든. 종아리를 봐봐. 이틀 전에 내가 직접 발라준 연고가 있어.”허사연이 내려다보자 확실히 연고가 발라져 있었다.“그리고 도지아가 밤새 안 잔 건 원기를 수련하느라 그랬던 거야. 너도 예전에 수련한다고 며칠씩 안 잔 적 있잖아?”허사연은 오해가 풀리자 그제야 빙그레 웃었다.“내가 뭐 어쨌다고 그렇게 호들갑이야?”“혹시라도 오해할까 봐 그러는 거잖아.”진서준이 빠르게 대답했다.“뭐야? 내가 그렇게 의심 많고 질투 많은 여자로 보여?”허사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아, 아니지. 우리 사연은 누구보다 속이 넓은 부드러운 여자지.”진서준이 급히 정정했다.“됐어, 너 겁먹은 거 너무 귀엽다.”허사연이 피식 웃었다.“넌 여기 좀 쉬고 있어. 내가 방 하나 잡고 올게.”진서준은 더 머뭇거릴 틈도 없이 벌떡 일어나 나가 버렸다.진서준의 뒷모습을 보며 허사연은 그제야 웃음을 터뜨렸다.“도지아 씨, 진서준이
“내가 가면 안 돼?”사실 진서준은 거절하려 했었다.르벨은 안개가 짙게 깔린 늪지대 같은 곳이라 진서준조차도 어디에 함정이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그러니 허사연이 온다면 다칠 가능성이 컸다.하지만 거절하면 허사연이 상처받을 게 뻔했다.“당연히 되지. 지금 위치 보낼게.”진서준은 단호하게 말하며 위치를 보냈다.자기 여자를 지킬 자신도 없으면서 강자들을 상대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자기야, 잘 자.”허사연이 애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너도 일찍 자.”진서준이 다정하게 답했다.전화를 끊고 나니 진서준의 졸음이 싹 가셨다.진서준은 창가로 다가가 이 화려한 도시를 내려다봤다.“오씨 가문, 안씨 가문, 하씨 가문... 너희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든 난 전부 박살 낼 거야. 이번엔 반드시 나와 아버지의 정체를 밝혀내고 말겠어.”진서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그렇게 별다른 사건 없이 밤이 지나갔다.다음 날 아침.진서준이 막 눈을 뜨자마자 도지아의 흥분한 외침이 들려왔다.“진서준, 됐어. 나 생겼어!”도지아는 눈 밑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는데 밤새 잠을 자지 않은 게 분명했다.진서준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너 아직 처녀 아니었어? 대체 어떻게 임신한 거야?”“미친놈아, 임신은 개뿔, 무슨 헛소리야?”도지아는 얼굴이 빨개지며 진서준을 노려봤다.“그럼 왜 아침부터 난리야?”진서준이 되물었다.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아침부터 흥분해 날뛰지 않을 것이다.“어제 네가 준 수련법 기억나지? 나 벌써 원기를 형성할 수 있게 됐어.”자기가 대단하다고 여긴 도지아는 자랑스럽게 선언했다.고작 하룻밤 만에 원기를 형성한 건 확실히 대단한 일이었다.“뭐? 그렇게 빠르다고? 너 타고난 천재 맞네?”진서준이 다소 의아한 표정을 보였다.보통 무인은 원기를 익히는 데만 최소 1년이 걸리는데 그것도 매일 꾸준히 수련할 경우에만 발생하는 일이었다.심지어 재능 있는 자들도 한두 달은 족히 걸린다.그런데 도지아는 단 하룻밤에 이 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