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못된 놈!”이정화는 오늘 들어 처음으로 분노를 드러냈다. 그녀는 차갑게 눈을 부라리며 박진성을 노려봤다.“너는 네가 지은 죄가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해?”박진성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많죠. 그래서 전 민여진을 찾아야 해요. 제가 저지른 모든 걸 하나하나 갚아야 하니까요.”“네가 갚고 싶다고 그 애가 받아들이기라도 할까?”이정화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박진성은 가슴이 쿡 하고 찢어지는 것 같아 손바닥이 저절로 움켜쥐어졌다. 그는 낮은 목소리도 단호하게 말했다.“민여진이 거절해도 받아들일 때까지 전 끝까지 빌 거예요.”이정화는 두 손을 모아 불상 앞에 합장을 올리며 말했다.“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 애가 떠난 건 내가 시켜서가 아니야. 그 애가 널 증오했기 때문이지. 널 벗어나고 싶어 했고 다시는 널 보고 싶지 않았던 거야. 정말 그 애를 위하는 마음이 있다면 전부 내려놔. 가볍고 평온한 삶을 살아. 그리고 그냥... 그 애가 죽은 셈 쳐.”“그럴 수 없습니다.”박진성은 망설임 없이 단칼에 잘랐다.그는 창백한 얼굴에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다시 똑같이 물었다.“어머니, 민여진을 어디에 숨기셨습니까?”이정화는 대답하지 않았다.박진성은 격렬하게 기침하며 몸을 떨었고 계단을 비틀비틀 올라가려다 겨우 두 걸음 만에 바닥에 쓰러졌다.“진성 씨!”문채연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달려가 그를 붙들려 했다.그러나 박진성은 차갑게 그녀의 손을 뿌리쳤고 표정엔 아무런 온기도 없었다. 그는 여전히 그날의 사건을 문채연 탓으로 여기고 있었다.문채연은 이를 꽉 깨물었다. 민여진이 죽지 않았고 그 사실을 박진성이 알아버렸다는 게 그녀는 도저히 용서되지 않았다.박진성은 병 때문에 안색이 형편없었지만 바로 2층으로 올라가 구석구석 모든 방을 다 뒤졌다.그제야 이정화가 못 참겠다는 듯 소리쳤다.“너 정말 미쳤구나! 지금 여기 채연이도 있고 너희는 약혼을 앞두고 있어. 곧 결혼도 할 거고. 그런데 넌 채연이 앞에서 다른 여자를 찾겠다고 이
박진성의 입술은 새하얗게 바랬고 얼굴도 병든 사람처럼 창백했다.하지만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엔 힘이 있었다.“죽기 전엔 반드시 찾아낼 겁니다.”그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고 이어지는 기침에 온몸이 떨렸다.그래도 그는 참고 또 참으며 눈 내리는 바깥으로 나아가려 했다.“그만해!”이정화가 분노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고함을 질렀다.“너 지금 목숨 걸고 나를 협박하는 거야? 내가 그 애가 어디 있는지 말 안 하면 저 추운 밖에 나가 죽을 거란 말이지? 너 그렇게까지 엄마를 몰아붙이고 싶어?”박진성은 문가에 멈춰 섰다.밖에서 미친 듯이 눈이 내렸고 거센 바람이 그의 어깨를 파고들었지만 그의 뒷모습은 단호했다.“어머니, 전 협박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어머니가 저보다 더 후회하는 일을 막고 싶은 겁니다.”“그게 무슨 뜻이야?”“민여진이 죽게 된다면 2년 동안 어머니 곁을 지킨 사람도 같이 사라지게 되는 거죠. 그건 어머니 스스로 만든 일이에요. 정말 후회 안 하시겠습니까?”이정화의 얼굴이 삽시간에 핏기를 잃었다. 그녀는 멍하니 박진성을 바라보았다.문채연 역시 충격에 휩싸였다.“진성 씨! 지금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그녀는 더 이상 이성을 붙잡지 못했다.박진성이 민여진을 위해 과거의 모든 진실을 밝히려 하다니?‘어떻게 그럴 수 있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하지만 박진성은 차분했다.“원래 민여진의 것들이었던 걸 이젠 돌려줘야죠.”문채연의 얼굴이 잿빛이 되었다.이정화는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채 점점 짙어지는 불안을 안고 박진성에게 다그쳤다.“진성아,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 2년 동안 날 곁에서 돌봐준 사람이 민여진이었다는 거야? 그 애가 언제 내 곁에 있었단 말이야?”“어머니, 민여진을 처음 봤을 때 익숙하다는 생각 안 드셨습니까?”그 말에 이정화의 신경이 순간 확 당겨졌다.그녀는 민여진을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느낌과 묘한 감정이 들었지만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았
“그럼 지금 여기 있는 채연이는... 누구야?”박진성은 주먹을 꽉 쥔 채 말했다.“어머니가 저희 결혼을 반대했었던 그해에 채연이가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그 일로 식물인간이 되었고 의식이 돌아올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죠. 어머니가 그 사실을 아셨다면 식물인간 상태인 사람과 결혼하게 두지 않으셨을 거예요. 그래서 저는 누군가를 시켜 채연이를 대신하게 했고 그 사람이 민여진이었습니다.”박진성이 문채연을 처음 박씨 가문에 데려왔을 때 이정화는 그녀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사람 보는 눈이 정확한 그녀는 문채연의 눈에 자리 잡은 야망과 욕심을 단번에 읽어냈다. 딱 봐도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그래서 이 결혼은 이정화의 거센 반대를 맞았지만 어느 날 문채연이 변한 것이다. 이해타산만 따지던 여자는 이정화가 심장 발작을 일으킨 그날 이를 악문 채 그녀를 등에 업고 눈 속을 걸어 병원까지 갔다.그리고 며칠을 밤새 간병했고 이정화가 정신을 차린 후엔 쑥스럽고 진심 어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게다가 공을 세우려 하지도 않았고 고열에도 묵묵히 약 몇 알로 견뎠다.며느리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며 그렇게 묵묵히 이정화의 곁을 지켰다.그런 하나하나가 이정화의 마음을 서서히 열게 만들었다.하지만 지금 박진성은 기억 속의 그 문채연이 사실은 민여진이었다고 말하고 있다.이정화는 눈앞이 아찔했다. 그동안 민여진에게 퍼부었던 차가운 말들이 머릿속을 쿵쿵 울렸다. 가슴이 뻐근해져 주머니에서 약을 꺼내 삼켰지만 손이 멈추지 않고 계속 떨렸다.“왜... 왜 그때 나한테 말 안 했니?”박진성은 눈을 내리깔았다.왜 말하지 않았냐고? 그건 그땐 그에게 민여진이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단지 ‘문채연’이란 이름을 지켜주기 위한 대체물일 뿐이었다. 그런 존재에 대해 굳이 입을 열 이유가 없었다.이정화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오랜 침묵 끝에 펜을 들어 종이에 주소 하나를 적었다.“여진이가 지금도 그곳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긴 그 애가 꼭 가보고 싶다고 했던
“현준 오빠가 돌아온다고요?”민여진은 의아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왜요? 아직 시간 좀 남지 않았어요?”조인화가 웃으며 대답했다.“얼마 전에 현준이한테서 전화 왔거든. 얘기하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네 얘기가 나왔었는데, 회사에 휴가 내고 바로 오겠다더라. 말로는 오랜만에 내가 보고 싶어서 온다고는 하는데, 내가 봤을 때는 너 보러 오는 것 같아.”“저 보러 온다고요?”수건을 비틀어 물을 짜던 민여진이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저를 왜요?”“이 녀석이, 정말 몰라서 물어?”조인화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우리 현준이, 어릴 때부터 너 좋아했었는데. 몰랐어?”물을 마시던 민여진은 그 말에 그만 사레가 들려버리고 말았다.조인화는 급히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겨우 기침을 멈추고 진정한 민여진은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민여진은 조현준을 이때까지 계속 친한 오빠로만 여겨왔다. 이곳을 떠나기 직전까지 둘 사이에 애매한 기류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게다가 조현준은 고등학교 때부터 다른 지역에서 학교를 다니며 집에 돌아온 적도 거의 없었다.그런 조현준이 자신을 좋아해 왔을 줄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민여진은 민망한 마음에 말했다.“이모, 장난 좀 치지 마요.”“얘가, 내가 너한테 이런 거짓말을 왜 하겠니? 현준이가 중학교 때 쓴 일기 보니까 온통 네 얘기밖에 없더라. 못 믿겠으면 지금이라도 그때 일기장 꺼내서 읽어줄까?”“아, 아니요... 됐어요...”당황한 민여진이 손사래 쳤다.“다 지난 일이잖아요.”“지난 일이면 어때? 우리 현준이는 아직 너 못 놔준 것 같은데. 너한테 관심 없었으면 그 귀한 휴가까지 먼저 내가면서 이렇게 급하게 돌아오지도 않았을 거야.”조인화는 민여진의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아예 그냥 여기서 살래? 우리 집안 며느리 하면 딱 좋을 것 같은데.”민여진은 잠시 멍해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급히 손을 뺐다.조인화도 그녀의 반응을 눈치챘는지 다시 물었다.
민여진은 자조적인 미소를 흘렸다.잠이 오지 않아 다시 몸을 일으켰다. 옷장을 더듬다가 손끝에 만져지는 외투를 꺼내 몸에 두르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거실문 앞에 다다랐을 즈음, 조인화가 마당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밖으로 나와 있는 민여진을 발견하자마자 다급히 다가와 말했다.“왜 밖에 나와 있어, 안에서 기다리지. 지금 얼마나 추운 줄 알아?”조인화가 민여진에게 걸어오며 중얼거렸다.“날도 추운데 처음 보는 사람이 찾아왔더라고. 이런 날씨에 도대체 뭘 하겠다고 여기까지 온 건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 차림에, 외제 차까지 타고 왔더라고. 생긴 건 또 무지하게 잘생겼어. 동네 사람들 다 나와서 구경하고 있다니까.”“처음 보는 사람이요?”민여진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래. 누굴 찾는 것 같은데 계속 안 가고 기다리고 있더라. 방금도 나 보자마자 이것저것 캐묻고.”“뭘 물어봤는데요?”민여진이 다급히 물었다.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잠시 당황한 듯 멈칫한 조인화가 대답해 주었다.“별거 안 물었어. 그냥 우리 마을은 어떻게 살고 있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집은 있나 정도로만 물어보더라. 이상하긴 했어. 여기가 외부인 접근이 쉬운 곳도 아니고, 이렇게 외딴 산간 마을에 외부인이 찾아오는 건 거의 6개월 만이잖아.”민여진이 주먹을 꽉 쥐었다.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고 숨소리가 점점 가빠졌다. 그녀는 가빠진 숨을 억지로 고르며 자신을 진정시키려 애썼다.‘아니야, 아닐 거야... 이런 우연이 있을 수도 있나?’그들에게 민여진은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박진성이 무슨 수로 여기까지 찾아올까? 더군다나 이정화가 민여진의 행방을 누설할 리도 없었다.“왜 그래, 여진아?”조인화는 어딘가 이상해 보이는 민여진의 반응에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져주며 물었다.“갑자기 안색이 안 좋아 보이네. 어디 아파서 그래?”“아니요...”민여진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려 힘겹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그게 정말이야? 너무 잘됐다!”조인화는 해맑게 웃으며 기뻐했다.“이제는 여진이 너도 굳이 마을을 떠나지 않아도 되겠네. 그냥 여기서 사는 게 어때? 마을에서 살면 돈도 벌고, 내가 옆에서 널 챙겨줄 수도 있잖아. 미영이가 떠난 후로 네가 다시 상처받는 걸 보고 싶지 않아. 나중에 내가 미영이 얼굴을 어떻게 보니.”조인화는 덤덤한 말투로 말했지만 민여진의 눈시울은 어느새 한껏 빨개져 있었다. 그녀는 조인화가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아껴주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민여진이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자 조인화는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여진아, 차라리 우리 집안 며느리로 들어오는 게 어때? 난 네가 정말 마음에 들어서 그래. 우리 현준이도 그럴 거고.”이제는 민여진도 딱 잘라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우선 현준 오빠 생각부터 들어봐야겠죠.”조인화는 그 말을 듣자마자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환히 웃었다.“그래! 그놈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나중에 보면 되겠지. 현준이도 네가 마음에 든다고 하면, 나는 절대 너 못 놔줄 것 같아.”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조현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이미 마을 어귀에 다 왔다는 연락이었다.조인화는 민여진의 손을 꼭 잡고 마을 어귀까지 마중 나갔다. 멀리서 조현준이 보이자 조인화는 해맑게 웃으며 민여진에게 장난스레 말했다.“저 녀석 좀 봐. 명절 때도 양복 한 번 제대로 입고 온 적 없었으면서 오늘은 머리까지 말끔하게 세팅하고 왔네.”민여진도 그 말에 덩달아 웃어 보였지만 마음속은 씁쓸하기 그지없었다.박진성 덕분에 앞이 보이지 않게 되었으니 말이다.물론 조현준이 그렇게 단정하게 차려입은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만에 하나 정말 그렇다고 해도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본 이상 마음을 접을 게 분명했다.“현준아, 여기야!”조인화는 아들에게 손을 흔들며 큰소리로 외쳤다.캐리어를 끌고 마을 안으로 걸어들어오던 조현준은 조인화를 발견하자마자 빠른 걸
“그래.”조인화는 민여진이 말한 식재료를 갖다 주었다.조현준도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나도 도와줄게.”민여진은 말없이 수긍했다. 그녀는 조용히 밀가루에 물을 조금씩 넣어가며 손을 움직여 반죽에 집중했다. 고개를 숙이자 옆머리가 귀 옆을 타고 흘러내려 눈가를 가렸다.조현준은 그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었다.민여진은 익숙하지 않은 기류에 반사적으로 한발 물러서며 경계심을 드러냈다. 그 반응에 잠시 멈칫한 조현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머리카락이 자꾸 얼굴에 닿는 것 같길래 묶어주려고.”“아, 그래요...”순간적으로 민망함이 밀려왔다. 박진성 탓에 사람을 쉽게 믿지 못하게 된 건 맞지만 조현준은 조금 달랐다. 어릴 때부터 도움을 받아온 이웃 오빠였으니 믿음이 갔다.“미안해요. 너무 갑자기 얼굴 근처에서 뭔가가 느껴져서, 놀란 거예요.”“괜찮아.”조현준이 부드럽게 웃었다.“앞이 안 보이니까 조심하는 건 당연하지. 오히려 잘된 일이야. 예전처럼 모든 사람들한테 다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보다는 이게 낫지. 안 그랬으면 나는 아직도 네 걱정 하면서 살았을걸.”조현준의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진심이 묻어나왔다. 그 진심에 민여진은 계속 얼빠진 표정을 짓다가 애써 화제를 돌려보려 했다.“오빠는 여자친구 없어요?”“응.”조현준이 밀가루에 물을 부어주며 웃었다.“왜? 의외야?”“네.”민여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오빠 인기 많았잖아요. 키도 크고 잘생겨서, 벌써 결혼했을 줄 알았는데. 혹시 눈이 너무 높아서 그런 건 아니에요?”“아니.”조현준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한참이나 민여진을 바라보던 조현준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그냥 아직... 마음에 드는 사람을 못 만나서 그래. 가정을 꾸리는 일인데 아무나 만나는 건 상대한테도 예의가 아니잖아. 그러니까 나는 아직도 기다리는 중이야. 내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사람이 다시 내 앞에 나타나 주길 말이야.”‘다시?’민여진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
먼저는 방현수였고 그다음은 서원, 그리고 이제는 조현준이었다. 민여진을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래서 미련 하나 없이 그렇게 모든 걸 버리고 떠날 수 있었던 걸까.“대표님...”문 앞에 서 있던 남자가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표정으로 링거 관에 가득 들어찬 피를 발견하고 다급히 말했다.“의사 선생님 불러오겠습니다.”“됐어.”박진성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자신의 팔에 꽂혀있던 링거 바늘을 뜯어냈다. 피가 팔을 타고 내려와 손끝으로 뚝뚝 떨어졌지만 지금 박진성의 정신은 다른 곳에 팔려 있었다.“티켓 사 놔, 지금 당장 안진으로 가야겠으니까. 빨리!”“대표님! 대표님 몸 상태로는 아직...”남자가 급히 박진성을 말려보려 했지만 그의 살기 어린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지만 남자는 굴하지 않고 다시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여진 씨를 찾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확히 안진에 정착할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표님이 갑자기 나타난다면, 여진 씨한테는 또 다른 상처가 될 겁니다.”“대표님, 또 여진 씨 놓치실 겁니까? 우선 몸부터 회복하시고, 여진 씨도 어느 정도 마음을 가라앉힌 뒤에 직접 데려오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박진성은 계속해서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어디에 해소해야 좋을지 몰라 답답했다. 남자의 말에 틀린 게 하나도 없어서 더욱 화가 났다. 직접 민여진을 만난다면 소유욕 넘치는 박진성의 성격상 할 수 있는 짓은 감금뿐이었다.민여진은 박진성의 것이었다.지금 박진성에게 가장 괴로운 사실은 민여진이 자신을 증오한다는 것이었다.이 사실은 언제나 반박할 수 없는 명확한 팩트였다.박진성을 너무 증오했던 탓에 이정화와 따로 거래까지 하며 이름을 숨기고 안진으로 도망쳤던 것이다.남자가 조심스레 덧붙였다.“저희 쪽에서 확인한 바로는 동진에서 그 지역을 재개발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여진 씨도 아마 그 일
임재윤이 직접 말하지 않아도 민여진은 느낄 수 있었다. 평소 감정 기복이 거의 없던 임재윤이 여자 친구라는 말이 나오기 바쁘게 마치 다른 사람처럼 분위가 달라졌다.그 여자는 임재윤의 기분을 좌우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마음속에 중요한 존재인 것 같았다.민여진이 화제를 바꾸려는데 임재윤이 다시 물었다.“정말 궁금해?”“아니.”민여진은 얼른 부인했다. 처음엔 그냥 할 말이 없어서 꺼냈던 말이었고 더불어 임재윤이 왜 자신에게 그런 감정을 품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반응에 민여진은 자신이 선을 넘었음을 알아차렸다.임재윤은 민여진한테 다가가려다 멈춰서더니 고개를 숙이고 타자를 했다.“미안해. 많이 놀랐어? 나는 그냥 과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서...”“괜찮아.”민여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남이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함부로 꺼내는 걸 싫어하는 건 당연한 거야. 오히려 선은 내가 넘었으니까 사과해도 내가 해야지.”임재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글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더니, 오랜 침묵 끝에 타자했다.“넌 남이 아니야.”민여진은 미소를 지었다.“그래. 알았어. 너무 신경 쓰지 마. 누구나 털어놓기 싫은 비밀과 건드리면 안 되는 선이 있는 법이니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돼. 네 선을 알았으니까 두 번 다시 넘지 않을게.”그녀는 급히 소파에서 일어났다.“배 안고파? 간호사에게 음식을 언제 가져오는지 물어볼게. 금방 돌아올 테니까 잠깐만 있어.”병실 문을 나서는 민여진의 표정은 왠지 어두워 보였다. 정확한 이유가 뭔지도 모르게 마음이 불편했고 복잡했다.어쩌면 처음 느껴보는 임재윤의 냉담함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여자가 임재윤의 아픔이었다는 진시우의 말 때문일 수도 있었다.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여자는 임재윤의 마음속에 중요한 사람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그럼... 나는 뭐지?’난데없이 튀어나온 생각에 민여진은 스스로에게 깜짝 놀라더니 마음을 다잡으며 중얼
임재윤은 민여진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물었다.“그냥 내가 아프기 때문이야? 만약 너 때문에 아픈 게 아니었다면, 아예 나를 보러 오지도 않았을 거야?”민여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다시 조용히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여진아, 인제 그만 돌아가. 진시우더러 돌아갈 차를 준비해달라고 할게. 지금쯤이면 안진 마을까지 가는 길도 뚫렸을 거야. 이모 집에서 편하게 지내. 병원에는 그만 오고.”“싫어.”민여진은 생각할 여유도 없이 말이 먼저 튀어 나갔다. 임재윤이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자, 민여진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이었다.“혼자 병실에 있으면 심심할 거 아니야. 게다가 수술 후 회복 기간도 긴데, 내가 옆에서 말동무가 되어주면 좋잖아.”민여진의 말에 임재윤은 천천히 타자했다.“괜찮아. 나는 늘 혼자였어. 이젠 익숙해.”늘 혼자였다는 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문득 자신의 과거가 떠올랐다.감옥에서, 박진성의 별장에서, 도망치던 차 안에서조차 그녀는 언제나 혼자였다.고독을 즐기려고 노력했지만 항상 두려웠고, 언제라도 사라질지 모를 관심에 더욱 불안해했다.‘임재윤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고백할 때 우리가 같은 종류의 사람이라고 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을까?’“수술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 지금 돌아가도 신경 쓰여서 편하게 못 있어. 어쨌든 네가 아픈 건 나와 연관되어 있잖아. 무엇보다 지금은 네 곁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하기도 하고.”민여진을 빤히 응시하던 임재윤은 그녀의 걱정과 고집에 표정이 차츰 누그러졌다.“여진아, 너 이렇게 착하면 누군가한테 이용만 당할 거야.”민여진이 웃으며 되물었다.“그럼 넌 나를 이용할 거야?”임재윤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답했다.“그럴 수도 있지.”예상치 못한 대답에 멈칫하던 민여진은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그때 휴대전화의 기계음이 다시 울려 퍼졌다.“나는 지금도 널 이용하고 있잖아. 내가 아픈 건 순전히 내 문제인데도 네 착한 마음을
‘마음속에 아직도 박진성이 있냐고?’민여진은 단지 자신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박진성을 산 채로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발라내고 싶었다.진시우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흐르고 분위기가 편안해지자 비로소 웃으며 말을 꺼냈다.“다행이네요. 난 임재윤이 마음에 다른 남자가 있는 여자와 함께하는 걸 원하지 않아요. 여진 씨가 박진성과 아무 관계도 없다면, 임재윤과 잘 시작해 봐요.”다시 임재윤의 이름이 나오자, 민여진은 표정이 달라졌다.“저와 임재윤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에요.”“어떤 사이인지 여진 씨가 저보다 더 잘 알겠죠.”진시우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여진 씨가 임재윤의 신분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것도 알아요. 이해해요. 박진성 일 이후로 경계심을 갖는 건 당연하죠. 하지만 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여진 씨도 잘 알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임재윤은 절대 여진 씨를 다치게 하지 않아요. 임재윤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민여진 씨가 아직도 경계를 못 풀겠다면 대체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요? 그렇다고 마음을 꺼내 보여줄 수도 없는 일인데.”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한 뒤, 민여진을 위해 마스크와 모자를 사러 갔다.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민여진은 진시우의 말이 계속 맴돌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박진성은 차갑고 독단적이며, 항상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타인을 해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다. 반면 임재윤은 부드럽고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방면에서 민여진을 먼저 배려해 줬고, 아픈 몸으로도 민여진이 추울까 옷까지 벗어주는 사람이었다.성향이 이렇게나 상반된 두 사람인데, 왜 민여진은 자꾸만 임재윤이 박진성이라는 착각을 하고 의심하는 건지 본인조차 이해되지 않았다.‘나 왜 이러지? 박진성이 같은 병원에 있다는 말만 듣고 이렇게 의심하다니.’민여진은 머리가 아파 눈을 질끈 감았다. 이때 물건을 사
진시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민여진 씨를 위해 싫어하는 걸 참고 먹다니, 정말 진심으로 좋아하는 모양이네요.”예전이었다면 진시우의 말을 그저 농담으로 넘길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당황스럽기만 했다. 민여진은 한참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화제를 돌렸다.“진시우 씨, 임재윤하고 어릴 적부터 함께 지냈죠?”“네? 그렇다고도 할 수 없어요.”진시우는 과거를 회상하며 말했다.“재윤이가 한동안 독엔에 가 있어서 떨어져 지내다가 나중에야 다시 연락이 닿은 거예요. 왜요?”“궁금해서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별로 없었나요? 아니면...”아니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에게 마음을 줄 수 있겠냐는 뜻이었다.진시우는 웃으며 말했다.“오해하고 있네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임재윤을 좋아하는 여자도 적지 않았어요. 요즘 여자들은 차가운 이미지를 가진 남자를 좋아하잖아요. 임재윤은 말이 없으니까 딱 그런 이미지였고 성격도 세심하기까지 해서 더 인기가 많았죠.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는...”진시우는 이 주제가 적절하지 않음을 깨달은 듯 급하게 화제를 바꾸었다.“어쨌든 외로워서 민여진 씨에게 관심을 가진 건 아니에요. 임재윤은 진심으로 민여진 씨를 좋아하는 거예요.”하지만 민여진은 다른 말이 더 궁금했다.“임재윤에게 여자 친구가 있었어요?”“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요.”“그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어요?”진시우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여진 씨, 제가 이 질문에 꼭 대답해야 하나요? 궁금하면 임재윤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요? 친구의 아픈 기억을 꺼내고 싶지 않아서요.”‘아픈 기억? 임재윤의 전 여자 친구는 그에게 아픔으로 남은 건가?’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민여진은 그 안에 수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음을 깨달았다.식사를 마치고 민여진은 진시우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길을 가던 중, 민여진은 어제 박진성을 우연히 마주친 일이 떠올라 걸음을 멈췄다.“진시우 씨, 돈을 좀 빌려주실래요? 모자랑 마스크를 사려고요.
민여진의 얼굴을 본 문채연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여기 왜 나타난 거지? 누구 때문에 이 병원까지 온 거야?’답은 너무 뻔했다. 이제 겨우 박진성과의 관계가 돈독해지고 있는 시점에 민여진이 나타나자, 화가 치밀어 오른 문채연은 이를 악물었다.‘쓰레기 같은 년! 죽은 척 도망쳐놓고 이제 와서 후회라도 하는 거야? 다시 박진성 앞에 나타나서 그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을 생각이라면 꿈 깨! 일 초도 못 나타나게 할 거니까.’문채연의 눈에는 독기가 서렸다....민여진은 침대에 누웠지만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임재윤이 어떻게 나를 좋아할 수 있지? 내가 뭐라고? 말을 못 하는 그와 같이 나도 앞을 못 보는 장애인이라서? 그런 거라면 너무 경솔한 결정 아닌가? 그리고 시각장애인도 많이 봤을 텐데 왜 하필...’어찌 되었든 민여진은 갑작스러운 그의 마음이 선뜻 받아들여 지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조현준도 그렇고 이제 민여진은 누구한테 마음을 줄 용기가 없었다.박진성이라는 사람 때문에 받았던 그 수많은 상처는 이미 그녀의 마음을 무너지게 했다.민여진은 억지로 눈을 감고 겨우 잠에 들었지만, 악몽을 꾸었다.병원에서 박진성을 마주치는 꿈이었다. 박진성은 그녀의 저항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시켜 그녀를 묶은 채 양성으로 끌고 갔다.잠에서 깬 민여진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박진성의 강압적인 태도와 차가운 얼굴이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정신을 차리자,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민여진이 문을 열자, 이번에는 직원이 아니라 진시우였다. 그는 웃으며 물었다.“민여진 씨, 혹시 제가 휴식을 방해한 건 아니죠?”“아니요. 방금 막 일어났는데, 마침 잘 왔어요.”“다행이네요. 같이 식사하러 갈래요? 병원도 가야 하고. 그런데 임재윤은 오늘 이상하게 문자를 여러 번 보내네요. 민여진 씨 상태를 계속 물어보던데, 혹시 싸우셨어요?”싸운 건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어색한 상황이었다. 민여진은 설명하기 어려워 웃으며
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뭐라고?”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지만, 임재윤은 단호하게 대답했다.“너를 좋아해. 첫눈에 반했어.”임재윤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사실 병이 발작하지 않았다면 엊그제쯤에 이미 말했을 거야. 그때 너랑 만나자고 약속했던 이유가 널 좋아한다고 고백할 생각이었거든.”“나를 왜?”민여진은 머리가 멍해졌다.‘임재윤이 나를 좋아한다고? 어떻게? 이게 말이 돼?’“왜라니?”임재윤은 담담한 표정으로 반문했다.“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너여야만 한다는 느낌이 들었어. 이건 지난 20여 년 동안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야. 아마 이런 걸 첫눈에 반했다고 하겠지?”민여진은 주체할 수 없이 빨리 뛰는 심장에 호흡이 거칠어졌다.‘임재윤이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너무 터무니없는 말이잖아.’“이런 내 모습에 반했다고? 너 같은 조건이면 더 좋은 여자를 만날 수도 있잖아.”“외모만으로 첫눈에 반했다면, 그건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모욕하는 거야.”임재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타자를 이었다.“널 처음 본 순간 그런 느낌이 들었어. 어쩌면 우린 같은 종류의 사람이겠구나. 교회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줄곧 너를 지켜봤거든. 주변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네 모습이 좋았고 그럼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네가 예뻐 보였어.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 시선은 온통 너한테 가 있더라. 여진아, 만약 네가 앞이 안 보이고 내가 말을 못하는 게 하늘이 정해준 거라면, 하늘은 아마도 나를 네 눈이 되게 하고 너를 내 목소리가 되게 하려고 그랬던 게 아닐까? 우린 아마 천생연분일지도 몰라.”차가운 기계음이 내뱉은 그 말은 왠지 모르게 뜨겁게 전해져 민여진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그녀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임재윤, 농담하지 마.”임재윤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민여진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 앞에 다가갔다. 뜨거운 그의 입술이 그녀의 얼굴
“넌 안 피곤해?”“아까 푹 쉬어서 괜찮아.”임재윤은 무언가 말하려다 멈추고는 간단히 알겠다고 답한 뒤 침대에 누웠다.이어서 민여진은 불을 껐고 깊은 밤이 되자, 병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민여진은 임재윤의 호흡이 평온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가 깊이 잠든 걸 확인하고 소파에서 일어나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방 안은 캄캄했지만, 그녀에게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던지라 호흡소리만으로도 임재윤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정신을 가다듬은 민여진은 임재윤한테 다가가 조용히 손을 뻗어 손끝으로 천천히 그의 눈썹과 눈을 쓰다듬었다.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만져봤다. 넓은 이마, 높고 곧은 코.민여진이 눈을 뜬 채 손가락을 입술 근처까지 가져가려던 찰나 임재윤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어둠 속에서 민여진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임재윤의 시선이 느껴졌다.손에 힘을 주던 임재윤은 민여진임을 알아차리고는 이내 힘을 풀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바닥에 글자를 썼다.[뭐 하는 거야?]민여진은 호흡을 가다듬었지만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임재윤, 너 도대체 누구야?”그녀는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임재윤은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휴대전화를 꺼내 물었다.“여진아, 그게 지금 무슨 말이야?”민여진은 더 이상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는 듯 마음을 다잡으며 차분하게 말했다.“현준 오빠가 지금 동진에 있어. 오빠한테 너에 대해서 조사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었거든. 그런데 동진에는 임재윤이라는 사람이 없대. 그러니까 너 대체 누구냐고.”임재윤은 한참 침묵하다 다시 타자를 했다.“조현준의 말은 믿으면서 나는 안 믿는구나.”“너를 어떻게 믿어?”민여진은 혼란스러웠다.“임재윤, 난 너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신분이 뭔지, 집은 어디인지, 가족은 몇 명인지 심지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몰라.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건, 나 같은 여자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거야. 다른
“그들한테 친구는 서로 사탕을 나눠 먹으면서 웃어주는 그런 사이가 아니야. 태어날 때부터 인맥을 쌓고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한 수단이지. 만약 임재윤이 아무런 신분도 없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진시우와 함께 할 수 있겠어? 네가 말한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진씨 가문 막내아들과 어울리는 사람은 재력가 아니면 권력가일 텐데, 둘이 함께 다닌다면 절대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어. 너, 혹시 속은 거 아니야?”조현준은 더 충격적인 사실을 털어놓았다.“그러고 무엇보다 동진에는 임씨 성을 가진 재력가가 없어.”순간 머릿속이 하얘진 민여진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분명 진시우는 임재윤이 어릴 때부터 함께 해오던 친구라고 했는데, 조현준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런 사람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니. 그는 마치 공중에서 나타난 사람 같았다.도대체 임재윤은 어떤 신분을 가진 사람인지 그의 모든 것이 민여진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한참 생각하던 민여진은 입술을 깨물고 물었다.“그런데 현준 오빠, 만약 저를 속인 거라면 도대체 진시우와 임재윤은 왜 저를 속이는 걸까요?”조현준은 한숨을 내쉬었다.“나도 이해가 안 가. 네게서 얻을 게 뭐가 있다고 그들이 가짜 신분까지 만들어가며 속이려 드는지. 아니면 무슨 오해가 있는 거 아니야?”“현준 오빠, 일단 쉬세요.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나머지는 제가 처리할게요.”“그래.”조현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무슨 일이 있든 나와 엄마는 항상 네 곁에 있을 거야.”민여진은 웃음을 지었지만, 마음은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처럼 무거웠다. 전화를 끊고 병실로 들어간 그녀의 모습은 마치 혼이 나간 사람처럼 멍해져 있었다.이상함을 눈치챈 임재윤은 민여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복잡한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두드렸다.“무슨 일이에요? 왜 매번 조현준이랑 통화할 때마다 기분이 가라앉는 거예요? 조현준이 무슨 말을 했어요?”“아니요.”민여진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의자
임재윤이 헐떡거리며 문을 박차고 들어오자, 민여진은 정신을 가다듬고 고개를 들며 물었다.“검사 다 끝났어요?”임재윤은 말없이 다가와 있는 힘껏 그녀를 품속에 꽉 끌어안았다.그의 옷에서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지만, 희미하게 전해지는 그의 숨결에 왠지 마음이 안정된 민여진은 농담을 건넸다.“전면 검사가 원래 이렇게 오래 걸려요? 혹시 잠들었던 거 아니에요?”그제야 임재윤은 민여진을 품에서 놓고 휴대전화를 꺼냈다.“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기계에 문제가 생겨서 좀 기다리느라 시간이 걸렸어요. 진시우 한테서 민여진 씨가 병실에 와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달려왔는데.”민여진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하지만 그녀의 손을 잡던 임재윤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차가움에 눈살을 찌푸리더니 망설임 없이 자기 외투를 벗어 민여진에게 걸쳐주었다.민여진은 깜짝 놀라 외투를 밀어내며 말했다.“안 돼요. 임재윤 씨! 지난번에도 나한테 옷을 벗어주는 바람에 감기까지 걸리고 이제는 수술까지 하게 생겼잖아요. 이번에 또 이러다가 몸이 더 나빠지면 저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살아야 해요.”임재윤은 저항하지 않고 휴대전화를 두드렸다.“저는 방금 뛰어오느라 땀나서 괜찮아요. 민여진 씨는 계속 소파에만 있었을 거 아니에요. 민여진 씨까지 감기 걸리면 머리 아픈 건 진시우예요. 그러니까 그냥 걸치고 있어요.”타자를 끝낸 뒤 임재윤은 휴대전화를 침대에 던지고 민여진에게 옷을 걸쳐준 뒤 창문을 꼭 닫았다.따뜻하게 전해지는 온기에 민여진은 가만히 있다가, 문득 뭔가 생각나 소파에서 일어섰다.“아, 맞다. 식사는 했어요? 배고프지 않아요? 레스토랑에서 포장해 온 디저트가 있는데 이거라도 드세요.”임재윤이 소파에서 봉투를 집어 들자, 포장이 찌그러져 크림이 새어 나와 있었다.민여진은 비록 보이지는 않았지만, 상황을 짐작할 수는 있었다. 아마도 아까 박진성을 피해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면서 케이크가 망가진 모양이었다.“혹시 케이크가 망가졌어요? 그러면 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