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답은 거의 선명하게 민여진의 뇌리에 새겨졌다.그렇지 않고서는 그녀는 임재윤이 왜 그녀에게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타로 떡을 가져갔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만약 그가 박진성이라면, 왜 낯선 사람처럼 그녀 곁을 지키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까...그녀는 다시 몇 번이나 손을 씻었다. 겨우 진정되었지만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벽을 짚고 밖으로 나가자 뒤에서도 누군가 화장실에서 나왔다.“여진아?”민여진은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마을의 이장이었다.“여진아, 왜 나와 있어?”“바람 좀 쐬러 나왔어요.”“그래?”이장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마침 잘 됐네. 방에 있으면 따로 어떻게 이야기할지 고민하고 있었거든.”이장의 말투에 민여진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그녀는 잠시 멈칫하다 물었다.“무슨 일 있으세요?”“오늘 오후에 장미자 할머니랑 싸웠다면서?”민여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설명하려 했다.“그게...”“여진아, 나는 이유는 알고 싶지 않아. 너도 알다시피, 진시우 대표님이 우리 뒷산에 그 땅을 좋게 봐서 리조트로 개발하고 싶어 하잖아. 그게 우리한테는 좋은 기회인데, 네가 일을 일으키면 마을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칠까 걱정돼. 장미자 할머니 건강도 안 좋으신데 혹시 화나셔서 어디가 잘못된 게 개발업자 귀에라도 들어가면...”민여진은 침묵했다.이장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이런 일은 좀 조심하는 게 좋겠다. 그럼 먼저 가 볼게.”주변이 조용해지자 민여진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바람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녀는 손으로 벽을 짚었다. 마음은 차갑게 식어갔다.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이장이 나선 것은 아마 그가 장미자 할머니와 친척 관계이기 때문일 것이다. 편드는 것은 당연했지만, 완전히 납득하기는 어려웠다.경수의 일은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그녀는 뻣뻣하게 서 있었다. 그때, 앞에서 누군가 다가와 그녀 앞에 멈춰 섰다. 그 후 민여진은 휴대전화의 기계음을 들었다.“왜 밖에 있어요.”임재윤이
그녀는 앞을 볼 수 없고, 임재윤은 말을 못 하니,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 판단할 수는 없었다. 돌아온 후, 민여진은 갑자기 조인화에게 물었다. "이모, 임재윤 씨는 어떻게 생겼어요?""왜?"조인화는 깜짝 놀라며 마치 며느리를 빼앗길까 봐 경계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체념한 듯 한숨을 쉬었다."됐어. 네가 정말 임재윤 씨랑 만나고 싶다면 나도 막을 수 없지. 네가 아깝긴 하지만, 오늘 보니 그 사람은 진심으로 널 아끼는 것 같더라.""아니에요."민여진은 조인화가 오해할 줄은 몰랐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설명했다."그분이 제 옛날 지인이랑 너무 닮았어요.""옛날 지인?"조인화는 이불을 펴면서 되물었다."무슨 뜻이야? 아는 사람이라면 왜 너한테 아는 척 안 해?""아마 너무 오래돼서 그 사람도 잊어버렸을 거예요. 하지만 제가 그분께 빚진 게 있어서, 본인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어요.""그렇구나."조인화는 민여진을 늘 착한 아이로 여겼기에, 그녀가 거짓말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과정을 단순화해서 말하는 거라고 여기고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진지하게 임재윤을 어떻게 묘사해야 할지 고민했다."사람 외모를 나한테 물어보면, 내가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꽤 잘생겼어. 아주 훤칠한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마침 텔레비전에서 인기 가수가 노래하는 장면이 나왔다. 조인화는 말했다. "저 가수보다 훨씬 더 잘생겼어."민여진은 멍해졌다가,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박진성의 외모에 대해서는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첫눈에 반했을까?그녀는 진심으로 박진성의 그 얼굴에 홀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때문에 뒤이어 일어난 일련의 비극들, 심지어 자신의 어머니를 죽게 만든 일까지 벌어졌던 것이다.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녀의 눈가는 이미 눈물로 촉촉해져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그녀는 물었다."이모, 스마트폰 있으세요?""있지. 지금 내가 쓰는 게 스마트폰이야."조인화는 자랑스
“어떻게 이럴 수가...” 조인화는 여전히 의아한 얼굴이었다. “여진아, 너 뭔가 착각한 거 아니야? 혹시 임재윤을 박진성이랑 착각한 건 아니겠지? 말도 안 돼. 아무리 임재윤이 대단해도 박진성은 어디 사람이야. 양성 박씨 가문의 기업 대표잖아. 수백 개 회사를 거느린 사람이 어떻게 이런 시골까지 와서 휴양지 프로젝트 하나 때문에 오래 머물겠어?”민여진은 모든 기운이 빠져나간 듯 힘없이 서 있었다.뒤늦게 깨닫고 나니 정말 말이 안 됐다.그래 박진성이었다면 진작에 그녀를 데리고 이곳을 떠났을 것이다.그가 여기에 머물 이유도 자신 곁에 머물 이유도 없었다.“그러게요. 제가 괜히 착각했나 봐요.” 그녀는 힘없이 입꼬리를 올렸다.“착각한 정도가 아니라 스스로 가슴에 돌을 쑤셔 넣는 거지.” 조인화는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말하더니 문득 걸음을 멈췄다. “맞아. 너 전에 임재윤이 네가 아는 한 사람이랑 닮았다고 했잖아. 그 사람이 혹시 박진성이라는 건 아니지?”민여진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박진성의 사진은 공개된 게 거의 없었지만 자기 얼굴은 혹시 뉴스에 떠올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랐다. 처음엔 조인화가 알아보지 못했을지 몰라도 혹시 기억이라도 한다면...민여진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설마요. 제가 무슨 수로 박진성 같은 사람을 만나겠어요. 그냥 제가 알고 있던 사람이 임재윤과 좀 닮아서요.”“아휴, 왜 그래... 박진성이 아무리 대단해도 무슨 판다도 아니고... 동물원을 가도 돈만 내면 판다도 볼 수 있잖아?” 민여진은 그 말에 피식 웃었고 표정이 조금 풀렸다.조인화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며 말했다.“그래도 웃으니까 낫네. 너 오늘 밖에서 돌아와서는 얼굴이 완전 창백해서 나 진짜 임재윤한테 과자 뺏긴 것 때문에 기겁한 줄 알았잖아.”“좀 그랬죠...”거짓말로 일관하기도 애매했던 민여진은 조용히 답했다.“그런 행동이 이해가 안 가서요.”“이해 안 가면 직접 물어봐. 벙어리
“사과요?” 민여진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고 멍하니 되물었다. “그럴 리가...”조인화도 여전히 의아한 얼굴이었다. “나도 아까 그 생각했어. 장미자 할머니의 성격에 이렇게 조용히 넘어가는 것만 해도 기적인데 사과까지 하다니 말이야. 그것도 대추 한 자루까지 들고 와서 말이야. 본인 입으로 직접 사과하고 싶다길래 네가 바쁘다고 말하고 그냥 돌려보냈어.” 민여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외엔 아무 말도 안 했어요?”“응, 딱히. 내가 나중에 나가서 다시 물어보긴 해야지.” 조인화는 그 대추를 주방으로 들고 가며 말했다. “근데 이 타이밍이 딱 좋긴 하네. 오늘은 대추 넣고 죽이나 좀 끓여줄게.” “좋아요.”민여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으로 들어가 씻고 이불도 정리했다.다시 나왔을 땐 조인화는 이미 나간 뒤였고 주방엔 죽이 은근한 불 위에서 끓고 있었다.달큰한 냄새가 공기 가득 퍼져 있었고 민여진은 조심스레 손으로 불 조절기를 찾아 불을 껐다.그때 문밖에서 조인화가 숨을 헐떡이며 뛰어 들어왔다. “여진아, 나 지금 무슨 소식 듣고 온 줄 알아?”“무슨 일이에요?”“장미자 할머니 말이야! 왜 갑자기 사과하러 온 건지 너도 궁금했지?” 조인화는 흥분해서 목소리까지 높아졌다.민여진은 잠시 멈칫하다 물었다. “왜요?”“진시우 때문이래. 휴양지 사업 시작되면 우리 마을 집들도 리모델링 들어가잖아. 근데 그 양반이 갑자기 마을 이장한테 뭐라 했는지 알아? 장미자 할머니가 너한테 사과 안 하면 공사 혜택에서 그 집은 빼고, 나중에 이익 분배도 못 받게 하겠다고 했대. 그래서 그렇게 다급하게 달려온 거였어.”그 말을 들은 민여진은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조인화는 속이 다 시원하다는 듯 웃었지만 그녀는 조금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고 오히려 가슴속이 더 조여왔다. “왜죠?”한참을 멈춰 서 있던 그녀는 이내 조용히 물었다.“진시우 씨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요?”그는 자신을 도울 이유가 없었고 상식적으로도 그는 사업
임재윤의 검은 눈동자가 민여진의 얼굴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오랜 길을 걸어온 그녀의 코끝은 추위에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조금 전 진시우의 말을 들으면서 민여진은 문득 임재윤이 가까이 와 있다는 걸 알아챘다.왜인지 모르게 공기 안에 어색함이 흘렀다.어쩌면 어제 그녀의 태도가 너무 냉정했던 탓일 수도 있고 아니면 여전히 임재윤이 정말 누구인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일지도 몰랐다.어느 쪽이든, 예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웃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잠시 후, 임재윤의 휴대폰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밖이 너무 춥네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민여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벽을 더듬어 손을 뻗었다.그 손을 임재윤이 살며시 받아 올렸고 그녀의 손은 그의 소매 위에 얹혔다.“따라오세요.”“네.”머리를 숙인 채 걸어가면서 두 사람은 몇몇 사람들과 스쳤다.개발업자, 현장 직원들 그리고 마을 주민들도 있었다.임재윤을 아는 몇몇 사람들은 벌써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임 대표 뒤에 따라오는 분은 딱 새댁 분위기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개팅 절대 안 하신다더니 여자 친구가 따로 계셨구먼...” “앞뒤로 나란히 걷는 게 은근히 잘 어울리네요.”민여진은 얼굴이 화끈해져 손을 뿌리려 했지만 차가운 손끝이 뜨겁고 단단한 손바닥에 감싸이는 순간 그가 오히려 더 단단히 이끌었다.잠시 후, 그들은 어느 조용한 문 앞에 멈춰 섰고 임재윤은 휴대폰으로 문자를 입력해 보여주었다.“여긴 진시우 씨와 제 휴게실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거의 안 들어오고요. 난로도 있으니 춥지 않을 거예요.”“네.”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다시 타자를 했다.“아까 그 사람들 말은 신경 쓰지 마세요. 누구한테든 장난치는 사람들이에요. 앞으로는 좀 조심하라고 하겠습니다.”“괜찮아요.”민여진은 민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그저 농담일 뿐이고 딱히 불쾌한 말도 아니었는데 괜히 예민하게 반응하면 더 어색할 수 있었다.임재윤은 그녀를 한 번 바라보더니 다시 물었다.“그럼 계속 그렇게들 오해하
민여진은 자신이 누군가를 사로잡을 만큼 특별한 매력을 가진 사람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재윤 씨, 어제 저녁 식사 때 기억하시죠? 제가 옆에 앉아 있었고 접시에서 과자를 하나 집었는데... 재윤 씨가 그걸 갑자기 치우셨잖아요. 아예 접시째로 다 가져가셨고요. 그거... 왜 그러신 건가요? 혹시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그러자 임재윤은 아무 말도, 움직임도 없었고 더 이상 휴대폰의 기계음도 들리지 않았다.민여진은 점점 불안해져 미간을 찌푸렸다.“재윤 씨?”그제야 그는 잠시 뜸을 들인 뒤 핸드폰에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꼭 말해야 하나요?” “네, 꼭 듣고 싶어요.”민여진은 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그녀는 이 일 하나로 밤새 뒤척였고 도무지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고 결국 이렇게까지 와서 답을 들으려 했다.임재윤은 마치 한숨을 쉬듯 조용히 입김을 내뱉었다.그 소리는 그녀에겐 조금 무겁게 들렸다.그리고 그는 휴대폰으로 문장을 입력하기 시작했다.“그 과자는 남은 거였습니다.”“네?”민여진은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고 임재윤은 이어서 타자를 했다. “식당 직원이 다른 방에서 치운 잔반을 들고 가는 걸 봤어요. 그런데 그 접시가 다시 우리 테이블에 올라왔더라고요. 호텔 측이 남은 음식을 재활용해서 서빙한 겁니다. 그래서 제가 접시를 가져가 따로 처리하려던 거였어요. 식당은 진시우 씨와 제가 예약한 곳이라 민망해서 말하지 못했습니다.”민여진의 머릿속이 순간 하얘졌고 이유를 상상하며 밤새 괴로워했던 자신이 한순간 부끄러워졌다. “아니요... 과자는 다 비슷하게 생겼잖아요. 그게 진짜 남은 음식인지 어떻게 아셨어요?”“접시에 있던 과자 종류는 두 가지였어요. 갓 만든 건 색이 연하고 남은 건 색이 더 짙어요. 비교해 보면 티가 나요. 다른 사람이 남긴 음식을 드시게 할 순 없어서 바로 치운 겁니다.”임재윤의 말은 단호했고 논리도 분명했다.민여진은 입술을 깨물었다.그럼
임재윤은 더 이상 휴대폰으로 타자를 하지 않았고 대신 조용히 민여진의 손을 붙잡았다.그의 손은 크고 따뜻했고 그 사람이 지니던 차가운 손과는 전혀 달랐다. 임재윤의 손은 피부가 델 듯한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 뜨거웠다.민여진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살짝 떨었고 임재윤은 천천히 그녀의 손을 자신의 몸쪽으로 이끌었다.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그가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그리고 그의 손이 그녀의 손을 가슴과 복부 사이 어디쯤 조심스럽게 얹었다.마침 그 자리는 심장이 뛰는 곳이었고 손등 너머로 전해지는 맥박은 뜨겁고 강했다. 그 울림에 민여진은 마치 전신이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민여진은 반사적으로 손을 빼려 했지만 임재윤이 더욱 단단히 그녀의 손을 잡고는 아래로 이끌었다.그의 허리로 내려간 손끝에는 단단하고 잘 단련된 근육의 감촉이 그대로 전해졌다. 압도적인 힘과 긴장감과 폭발적인 에너지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잠시 후, 임재윤은 그녀의 손을 놓았고 옷을 더 걷어 올렸다.그건 마치 마음껏 확인해도 된다는 무언의 허락이었다.민여진의 얼굴은 이미 새빨갛게 달아올랐다.피가 터질 것처럼 귀 끝까지 달아올랐지만 그녀는 필사적으로 자신에게 되뇌었다. ‘이건 그저 확인일 뿐이야. 그 사람인지 아닌지만 알아보면 되는 거야.’하지만 시야가 보이지 않는 만큼 감각은 모든 걸 더욱 생생히 느꼈다.그의 숨소리 피부에서 나는 미묘한 향기 손끝에 닿는 근육의 결까지도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그녀는 예전에 박진성과 수없이 많은 밤을 함께 했지만 이렇게 집중해서 그의 몸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그들은 서로의 몸만 공유한 낯선 사이였을 뿐이다.감정도 사랑도 없었다.감옥에 들어가기 전에도 나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임재윤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고 그제야 민여진도 정신을 차리고 저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죄송해요.”그러고는 손을 그의 왼쪽 허리로 옮겼다.그녀는 눈을 꼭 감고 과거를 떠올렸다. 그날 그녀가 칼을 찔렀
임재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민여진에게 물었다.“됐어요?”그의 가슴은 여전히 드러난 채 있었고, 귀가 달아오른 민여진은 보이지 않음에도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리며 대답했다.“네.”임재윤은 다시 옷을 내려 입고 단추를 채운 뒤, 천천히 글을 썼다.“당신 마음속에 있다는 그 사람, 저와 매우 비슷한가요?”민여진은 잠깐 멈칫하더니 어두운 눈빛으로 말했다.“아마... 조금은요. 하지만 많이 닮진 않았어요.”“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어요?”‘어떤 사람이냐고? 독단적이고 냉혈 하면서도 무자비한 사람.’민여진의 머릿속에 떠오른 박진성의 모습은 항상 높은 곳에서 누군가를 내려다보는 살얼음처럼 차가운 모습뿐이었다.자세히 생각해 보면, 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정반대의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무슨 황당한 생각으로 두 사람을 겹쳐 본 걸까?“잊어버렸어요.”민여진은 박진성이라는 사람에 대해 더는 생각하기 싫어 잠시 멍하니 있다가 대답했다.“너무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잘 안 나요.”어쩌면 이건 민여진의 바람이기도 했다. 언젠가는 박진성이라는 이름조차 잊고 아픈 과거를 모두 떨쳐내고 새로 시작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임재윤은 눈치껏 화제를 바꿨다.“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민여진은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교회 내부 구조를 잘 모르는 한 시각장애인이 스스로 길을 찾아 나가기 어렵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수고해 줘요.”임재윤은 잠시 침묵했다. 약간 불쾌해 보이긴 했지만 크게 드러내지 않고 민여진의 손목을 잡은 채 밖으로 이끌었다.들어올 때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나가보니 땅에는 얇게 눈이 쌓여 있었다.민여진이 손을 내밀자, 눈이 손바닥에 닿아 차갑게 녹아내렸다.“집까지 데려다줄게요.”임재윤이 휴대전화로 글을 썼다.“괜찮아요.”민여진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아니에요. 안진 마을에 오신 것도 일 보러 오신 거잖아요. 저 때문에 이미 시간을 많이 낭비하셨는데 일 보러 가세요. 여기서부터는 길을 아니까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 망설이던 민여진은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현준 오빠, 임재윤은 좋은 사람이에요. 저는 그를 한번 믿어보고 싶어요. 임재윤이 저를 해치지만 않는다면, 진짜 신분이 뭐든 상관없어요.”조현준은 할 말을 잃은 듯 한참 후에야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여진아, 이 결정을 후회하지 않길 바란다.”‘이 결정을 왜 후회할 거로 생각하는 거지?’민여진은 이유 모를 불안감에 사로잡혔지만, 조현준은 이미 전화를 끊은 후였다.그녀는 이 복잡한 감정이 조현준의 배려를 거절한 데서 오는 미안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침대에 앉아 멍하니 있던 그 순간, 문밖에서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민여진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누구세요?”“민여진 씨, 저예요!”‘진시우?’흥분한 그의 목소리에 민여진은 당황하며 문을 열었다.“무슨 일이에요?”“임재윤한테 문제가 생겼대요. 지금 수술실로 들어갔다니까 우리 빨리 병원으로 가요.”민여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앞을 볼 수 있는 상황이었어도 눈앞이 아득해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허둥지둥 탁자 위에 걸쳐둔 코트를 더듬어 입으며 물었다.“우리가 병원에서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잖아요. 갑자기 어떻게 된 거예요?”평소 유머러스하던 진시우의 목소리에도 긴장감에 섞여 있었다.“저도 자세한 건 모르겠어요. 하지만 임재윤의 병은 원래 갑작스러운 상황이 올 수도 있는 병이었어요. 병원에서는 지금 수술 중이라고만 알려줘서 일단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아요.”걸어서 갈 여유가 없던 두 사람은 즉시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응급실 복도에 도착하자, 임재윤은 아직 수술 중이었다.진시우는 민여진을 자리에 앉히고 의사를 찾아갔다. 막막함과 불안함에 민여진은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수술실 앞에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민여진은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 이상 없어 보이던 사람이 왜 갑자기 위중한 상태로 수술실까지 들어간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순간 손끝에서 차가움이 느껴지더니
민여진도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배가 조금 고파서 호텔 레스토랑에서 뭐라도 먹어야겠어요.”진시우는 거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민여진이 문 앞까지 걸어갔을 때, 뒤에서 휴대전화 소리가 전해졌다.“여진아, 얘기 좀 할까?”민여진은 깜짝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무슨 얘기?”임재윤은 눈썹을 찌푸리며 휴대전화를 두드렸다.“네가 알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알고 싶은 게 없는데?”민여진은 자기 말이 너무 차갑게 들릴 것 같아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재윤아, 뭐 좀 먹으러 가는 거야. 곧 돌아올게. 그때 다시 얘기하자. 알았지?”임재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민여진은 진시우와 함께 병실을 나섰다.진시우는 무슨 재미있는 장면이라도 본 듯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없는 사이에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네요.”“별일 아니었어요. 그냥 대화를 조금 나눈 것뿐이에요.”민여진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말했다.“어서 가죠.”호텔 방으로 돌아오자, 서비스로 음식이 직접 배달되어 민여진은 레스토랑까지 내려갈 필요도 없었다. 진시우가 미리 말해둔 모양이었다.그녀는 조금씩 음식을 먹으며 생각에 잠겼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전화벨이 여러 번 울린 후였다. 급히 받아 들자, 조현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바빠?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아?”“아니요. 휴대전화를 멀리 두고 다른 테이블에서 밥을 먹고 있었어요.”“그랬구나.”조현준은 잠시 침묵하더니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여진아, 그 일은 확인했어?”“무슨 일이요?”잠시 멈칫하던 민여진은 이내 무슨 일인지 알아차리고 말을 이었다. 임재윤의 신분에 관한 이야기였다.“네. 확인했어요. 임재윤은 원래 진씨 가문 운전기사의 아들이었대요. 선천성 심장병에 말도 못 하니까 자주 외출하지 못했던 거고, 나중에 치료를 위해 아버지와 함께 독엔에 갔대요. 아마 그래서 현준 오빠가 못 찾았나 봐요.”조현준은 긴 침묵 끝에 다시 물었다.“너는 그 말을 얼마나 믿어?”모든 걸
임재윤이 직접 말하지 않아도 민여진은 느낄 수 있었다. 평소 감정 기복이 거의 없던 임재윤이 여자 친구라는 말이 나오기 바쁘게 마치 다른 사람처럼 분위가 달라졌다.그 여자는 임재윤의 기분을 좌우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마음속에 중요한 존재인 것 같았다.민여진이 화제를 바꾸려는데 임재윤이 다시 물었다.“정말 궁금해?”“아니.”민여진은 얼른 부인했다. 처음엔 그냥 할 말이 없어서 꺼냈던 말이었고 더불어 임재윤이 왜 자신에게 그런 감정을 품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반응에 민여진은 자신이 선을 넘었음을 알아차렸다.임재윤은 민여진한테 다가가려다 멈춰서더니 고개를 숙이고 타자를 했다.“미안해. 많이 놀랐어? 나는 그냥 과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서...”“괜찮아.”민여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남이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함부로 꺼내는 걸 싫어하는 건 당연한 거야. 오히려 선은 내가 넘었으니까 사과해도 내가 해야지.”임재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글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더니, 오랜 침묵 끝에 타자했다.“넌 남이 아니야.”민여진은 미소를 지었다.“그래. 알았어. 너무 신경 쓰지 마. 누구나 털어놓기 싫은 비밀과 건드리면 안 되는 선이 있는 법이니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돼. 네 선을 알았으니까 두 번 다시 넘지 않을게.”그녀는 급히 소파에서 일어났다.“배 안고파? 간호사에게 음식을 언제 가져오는지 물어볼게. 금방 돌아올 테니까 잠깐만 있어.”병실 문을 나서는 민여진의 표정은 왠지 어두워 보였다. 정확한 이유가 뭔지도 모르게 마음이 불편했고 복잡했다.어쩌면 처음 느껴보는 임재윤의 냉담함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여자가 임재윤의 아픔이었다는 진시우의 말 때문일 수도 있었다.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여자는 임재윤의 마음속에 중요한 사람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그럼... 나는 뭐지?’난데없이 튀어나온 생각에 민여진은 스스로에게 깜짝 놀라더니 마음을 다잡으며 중얼
임재윤은 민여진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물었다.“그냥 내가 아프기 때문이야? 만약 너 때문에 아픈 게 아니었다면, 아예 나를 보러 오지도 않았을 거야?”민여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다시 조용히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여진아, 인제 그만 돌아가. 진시우더러 돌아갈 차를 준비해달라고 할게. 지금쯤이면 안진 마을까지 가는 길도 뚫렸을 거야. 이모 집에서 편하게 지내. 병원에는 그만 오고.”“싫어.”민여진은 생각할 여유도 없이 말이 먼저 튀어 나갔다. 임재윤이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자, 민여진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이었다.“혼자 병실에 있으면 심심할 거 아니야. 게다가 수술 후 회복 기간도 긴데, 내가 옆에서 말동무가 되어주면 좋잖아.”민여진의 말에 임재윤은 천천히 타자했다.“괜찮아. 나는 늘 혼자였어. 이젠 익숙해.”늘 혼자였다는 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문득 자신의 과거가 떠올랐다.감옥에서, 박진성의 별장에서, 도망치던 차 안에서조차 그녀는 언제나 혼자였다.고독을 즐기려고 노력했지만 항상 두려웠고, 언제라도 사라질지 모를 관심에 더욱 불안해했다.‘임재윤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고백할 때 우리가 같은 종류의 사람이라고 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을까?’“수술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 지금 돌아가도 신경 쓰여서 편하게 못 있어. 어쨌든 네가 아픈 건 나와 연관되어 있잖아. 무엇보다 지금은 네 곁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하기도 하고.”민여진을 빤히 응시하던 임재윤은 그녀의 걱정과 고집에 표정이 차츰 누그러졌다.“여진아, 너 이렇게 착하면 누군가한테 이용만 당할 거야.”민여진이 웃으며 되물었다.“그럼 넌 나를 이용할 거야?”임재윤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답했다.“그럴 수도 있지.”예상치 못한 대답에 멈칫하던 민여진은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그때 휴대전화의 기계음이 다시 울려 퍼졌다.“나는 지금도 널 이용하고 있잖아. 내가 아픈 건 순전히 내 문제인데도 네 착한 마음을
‘마음속에 아직도 박진성이 있냐고?’민여진은 단지 자신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박진성을 산 채로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발라내고 싶었다.진시우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흐르고 분위기가 편안해지자 비로소 웃으며 말을 꺼냈다.“다행이네요. 난 임재윤이 마음에 다른 남자가 있는 여자와 함께하는 걸 원하지 않아요. 여진 씨가 박진성과 아무 관계도 없다면, 임재윤과 잘 시작해 봐요.”다시 임재윤의 이름이 나오자, 민여진은 표정이 달라졌다.“저와 임재윤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에요.”“어떤 사이인지 여진 씨가 저보다 더 잘 알겠죠.”진시우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여진 씨가 임재윤의 신분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것도 알아요. 이해해요. 박진성 일 이후로 경계심을 갖는 건 당연하죠. 하지만 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여진 씨도 잘 알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임재윤은 절대 여진 씨를 다치게 하지 않아요. 임재윤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민여진 씨가 아직도 경계를 못 풀겠다면 대체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요? 그렇다고 마음을 꺼내 보여줄 수도 없는 일인데.”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한 뒤, 민여진을 위해 마스크와 모자를 사러 갔다.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민여진은 진시우의 말이 계속 맴돌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박진성은 차갑고 독단적이며, 항상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타인을 해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다. 반면 임재윤은 부드럽고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방면에서 민여진을 먼저 배려해 줬고, 아픈 몸으로도 민여진이 추울까 옷까지 벗어주는 사람이었다.성향이 이렇게나 상반된 두 사람인데, 왜 민여진은 자꾸만 임재윤이 박진성이라는 착각을 하고 의심하는 건지 본인조차 이해되지 않았다.‘나 왜 이러지? 박진성이 같은 병원에 있다는 말만 듣고 이렇게 의심하다니.’민여진은 머리가 아파 눈을 질끈 감았다. 이때 물건을 사
진시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민여진 씨를 위해 싫어하는 걸 참고 먹다니, 정말 진심으로 좋아하는 모양이네요.”예전이었다면 진시우의 말을 그저 농담으로 넘길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당황스럽기만 했다. 민여진은 한참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화제를 돌렸다.“진시우 씨, 임재윤하고 어릴 적부터 함께 지냈죠?”“네? 그렇다고도 할 수 없어요.”진시우는 과거를 회상하며 말했다.“재윤이가 한동안 독엔에 가 있어서 떨어져 지내다가 나중에야 다시 연락이 닿은 거예요. 왜요?”“궁금해서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별로 없었나요? 아니면...”아니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에게 마음을 줄 수 있겠냐는 뜻이었다.진시우는 웃으며 말했다.“오해하고 있네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임재윤을 좋아하는 여자도 적지 않았어요. 요즘 여자들은 차가운 이미지를 가진 남자를 좋아하잖아요. 임재윤은 말이 없으니까 딱 그런 이미지였고 성격도 세심하기까지 해서 더 인기가 많았죠.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는...”진시우는 이 주제가 적절하지 않음을 깨달은 듯 급하게 화제를 바꾸었다.“어쨌든 외로워서 민여진 씨에게 관심을 가진 건 아니에요. 임재윤은 진심으로 민여진 씨를 좋아하는 거예요.”하지만 민여진은 다른 말이 더 궁금했다.“임재윤에게 여자 친구가 있었어요?”“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요.”“그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어요?”진시우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여진 씨, 제가 이 질문에 꼭 대답해야 하나요? 궁금하면 임재윤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요? 친구의 아픈 기억을 꺼내고 싶지 않아서요.”‘아픈 기억? 임재윤의 전 여자 친구는 그에게 아픔으로 남은 건가?’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민여진은 그 안에 수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음을 깨달았다.식사를 마치고 민여진은 진시우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길을 가던 중, 민여진은 어제 박진성을 우연히 마주친 일이 떠올라 걸음을 멈췄다.“진시우 씨, 돈을 좀 빌려주실래요? 모자랑 마스크를 사려고요.
민여진의 얼굴을 본 문채연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여기 왜 나타난 거지? 누구 때문에 이 병원까지 온 거야?’답은 너무 뻔했다. 이제 겨우 박진성과의 관계가 돈독해지고 있는 시점에 민여진이 나타나자, 화가 치밀어 오른 문채연은 이를 악물었다.‘쓰레기 같은 년! 죽은 척 도망쳐놓고 이제 와서 후회라도 하는 거야? 다시 박진성 앞에 나타나서 그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을 생각이라면 꿈 깨! 일 초도 못 나타나게 할 거니까.’문채연의 눈에는 독기가 서렸다....민여진은 침대에 누웠지만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임재윤이 어떻게 나를 좋아할 수 있지? 내가 뭐라고? 말을 못 하는 그와 같이 나도 앞을 못 보는 장애인이라서? 그런 거라면 너무 경솔한 결정 아닌가? 그리고 시각장애인도 많이 봤을 텐데 왜 하필...’어찌 되었든 민여진은 갑작스러운 그의 마음이 선뜻 받아들여 지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조현준도 그렇고 이제 민여진은 누구한테 마음을 줄 용기가 없었다.박진성이라는 사람 때문에 받았던 그 수많은 상처는 이미 그녀의 마음을 무너지게 했다.민여진은 억지로 눈을 감고 겨우 잠에 들었지만, 악몽을 꾸었다.병원에서 박진성을 마주치는 꿈이었다. 박진성은 그녀의 저항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시켜 그녀를 묶은 채 양성으로 끌고 갔다.잠에서 깬 민여진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박진성의 강압적인 태도와 차가운 얼굴이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정신을 차리자,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민여진이 문을 열자, 이번에는 직원이 아니라 진시우였다. 그는 웃으며 물었다.“민여진 씨, 혹시 제가 휴식을 방해한 건 아니죠?”“아니요. 방금 막 일어났는데, 마침 잘 왔어요.”“다행이네요. 같이 식사하러 갈래요? 병원도 가야 하고. 그런데 임재윤은 오늘 이상하게 문자를 여러 번 보내네요. 민여진 씨 상태를 계속 물어보던데, 혹시 싸우셨어요?”싸운 건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어색한 상황이었다. 민여진은 설명하기 어려워 웃으며
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뭐라고?”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지만, 임재윤은 단호하게 대답했다.“너를 좋아해. 첫눈에 반했어.”임재윤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사실 병이 발작하지 않았다면 엊그제쯤에 이미 말했을 거야. 그때 너랑 만나자고 약속했던 이유가 널 좋아한다고 고백할 생각이었거든.”“나를 왜?”민여진은 머리가 멍해졌다.‘임재윤이 나를 좋아한다고? 어떻게? 이게 말이 돼?’“왜라니?”임재윤은 담담한 표정으로 반문했다.“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너여야만 한다는 느낌이 들었어. 이건 지난 20여 년 동안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야. 아마 이런 걸 첫눈에 반했다고 하겠지?”민여진은 주체할 수 없이 빨리 뛰는 심장에 호흡이 거칠어졌다.‘임재윤이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너무 터무니없는 말이잖아.’“이런 내 모습에 반했다고? 너 같은 조건이면 더 좋은 여자를 만날 수도 있잖아.”“외모만으로 첫눈에 반했다면, 그건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모욕하는 거야.”임재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타자를 이었다.“널 처음 본 순간 그런 느낌이 들었어. 어쩌면 우린 같은 종류의 사람이겠구나. 교회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줄곧 너를 지켜봤거든. 주변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네 모습이 좋았고 그럼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네가 예뻐 보였어.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 시선은 온통 너한테 가 있더라. 여진아, 만약 네가 앞이 안 보이고 내가 말을 못하는 게 하늘이 정해준 거라면, 하늘은 아마도 나를 네 눈이 되게 하고 너를 내 목소리가 되게 하려고 그랬던 게 아닐까? 우린 아마 천생연분일지도 몰라.”차가운 기계음이 내뱉은 그 말은 왠지 모르게 뜨겁게 전해져 민여진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그녀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임재윤, 농담하지 마.”임재윤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민여진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 앞에 다가갔다. 뜨거운 그의 입술이 그녀의 얼굴
“넌 안 피곤해?”“아까 푹 쉬어서 괜찮아.”임재윤은 무언가 말하려다 멈추고는 간단히 알겠다고 답한 뒤 침대에 누웠다.이어서 민여진은 불을 껐고 깊은 밤이 되자, 병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민여진은 임재윤의 호흡이 평온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가 깊이 잠든 걸 확인하고 소파에서 일어나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방 안은 캄캄했지만, 그녀에게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던지라 호흡소리만으로도 임재윤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정신을 가다듬은 민여진은 임재윤한테 다가가 조용히 손을 뻗어 손끝으로 천천히 그의 눈썹과 눈을 쓰다듬었다.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만져봤다. 넓은 이마, 높고 곧은 코.민여진이 눈을 뜬 채 손가락을 입술 근처까지 가져가려던 찰나 임재윤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어둠 속에서 민여진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임재윤의 시선이 느껴졌다.손에 힘을 주던 임재윤은 민여진임을 알아차리고는 이내 힘을 풀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바닥에 글자를 썼다.[뭐 하는 거야?]민여진은 호흡을 가다듬었지만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임재윤, 너 도대체 누구야?”그녀는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임재윤은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휴대전화를 꺼내 물었다.“여진아, 그게 지금 무슨 말이야?”민여진은 더 이상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는 듯 마음을 다잡으며 차분하게 말했다.“현준 오빠가 지금 동진에 있어. 오빠한테 너에 대해서 조사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었거든. 그런데 동진에는 임재윤이라는 사람이 없대. 그러니까 너 대체 누구냐고.”임재윤은 한참 침묵하다 다시 타자를 했다.“조현준의 말은 믿으면서 나는 안 믿는구나.”“너를 어떻게 믿어?”민여진은 혼란스러웠다.“임재윤, 난 너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신분이 뭔지, 집은 어디인지, 가족은 몇 명인지 심지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몰라.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건, 나 같은 여자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거야. 다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