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성은 분을 삭이지 못한 채 쏘아붙였다.“민여진, 이게 잘못했다는 태도야?”온몸이 떨릴 정도로 힘이 빠진 민여진은 더 이상 태도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한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숨을 고를 정도였던 그녀는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떼며 물었다.“그럼 어떻게 하라는 건데?”박진성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문채연이 그의 손을 잡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섰다.“진성 씨, 됐어요. 여진 씨도 이 정도면 충분히 고생했잖아요. 이제 그만 보내줘요.”그녀는 목소리를 한결 낮추며 덧붙였다.“그리고 진성 씨, 오늘 하루만 저랑 같이 있어 줄 수 있나요? 밤에도 가지 말고요. 병원 침대가 생각보다 넉넉하더라고요. 둘이 누워도 충분해요.”마지막 말은 살짝 작아지며 수줍은 듯한 기색이 스쳤다. 그 말이 귀에 닿자, 민여진은 순간적으로 통증조차 희미해지는 기분이었다.박진성은 본능적으로 거절하려 했으나, 문득 뭔가가 떠오른 듯 민여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그녀의 작은 표정 하나까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요하게 응시했다.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2년 넘게 함께한 세월과 그들의 사랑이 그렇게 쉽게 끝났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알겠어.”박진성은 갑자기 문채연의 부탁에 응하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어차피 그 별장엔 가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그리고 네 몸 상태도 아직 안 좋은데, 당연히 남아서 같이 있어 줘야지. 물론 한 침대에서.”그는 ‘한 침대에서’라는 말을 일부러 강조하며 민여진의 반응을 살폈다. 그러나 그녀는 미간 하나 찌푸리지 않은 채 조용히 돌아서서 복도를 따라 걸어 나갔다. 더 이상 그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였다.그 모습에 박진성의 가슴속 분노가 터질 듯이 차올라 그녀를 따라 나가려 했다.“진성 씨! 오늘 저랑 같이 있기로 했잖아요!”문채연은 다급한 목소리로 그를 붙잡으려 했고 얼굴은 순식간에 불안으로 물들었다.박진성은 주먹을 꽉 쥐고 한참을 참았다. 결국 그는 휴대폰을 꺼내 양경호에게 전화
“큰사모님 같은 시어머님은 정말 보기 드문 것 같습니다.”양경호의 말에 이정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무심코 그의 옆에 서 있는 민여진을 보며 물었다.“이분은 누구시지?”민여진은 그 말을 듣고 급히 고개를 숙였고 머릿속으로 혼란스러웠다.‘설마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이정화를 마주칠 줄이야. 그것도 이렇게 갑작스럽게...’하지만 고개를 숙이고 나서야 그녀의 얼굴은 이미 엉망이 되어 있었고 이정화는 지금의 그녀를 알아볼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채연 씨의 친구분입니다. 앞을 볼 수가 없으셔서 대표님께서 댁으로 모셔다드리라고 하셨습니다.”“앞을 볼 수가 없다고?”이정화는 안타까운 듯한 목소리로 되물으며, 이상하게도 민여진이 어딘가 낯설지 않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녀는 무심결에 손을 뻗어 민여진의 차가운 손끝을 잡았다.“어머, 손이 이렇게 차가워요? 이제 가을인데 얇게 입고 다니면 감기 들어요.”그녀는 곧 입고 있던 숄 머플러를 벗어 민여진의 어깨 위에 가볍게 덮어주었다.“오래 입어서 낡았을지 몰라도 따뜻해요. 일단 걸치고 있어요. 저는 볼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이정화는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손을 놓더니 병실 쪽으로 걸어갔다.민여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이윽고 이정화가 사라진 뒤, 양경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여진 씨, 이제 출발합시다.”“네...”나지막하게 대답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울음이 섞여 있었다.민여진이 고개를 들자, 얼굴은 이미 눈물로 범벅 졌고 엉망이 돼버린 얼굴도 그대로 드러났다.상처를 소독할 때도 울지 않았고 다리가 떨릴 정도로 무릎이 아팠을 때도 참고 버텼던 그녀가 결국 이정화의 따뜻한 한마디에 무너져 내린 모습에 양경호의 가슴이 순간 아릿하게 찔려왔다.그녀의 떨리는 입술에서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죄송해요. 우스운 모습 보여드렸네요.”잠시 후, 그녀는 힘없이 웃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요.”민여진을 별장에 데려다준 뒤,
박진성은 알 수 없는 짜증과 불쾌한 기분이 밀려왔다.“일단 집에 가서 쉬자. 채연이는 내일 보러 갈 거야.”예상치 못한 대답에 양경호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대표님, 제가 모셔다드릴까요?”“차 키 줘. 내가 직접 운전할 거니까.”박진성은 재킷을 벗어 손에 들고 서둘러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를 몰고 집으로 내달리는 동안 그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집에 도착해 거실을 바라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불쾌한 감정이 스쳤다. 그가 늦을 때면 희미하게 켜져 있던 거실 한쪽의 조명이 오늘은 꺼져있었다.박진성은 애써 실망을 외면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눈이 안 보이는데 굳이 불을 켤 필요는 없겠지. 그래도 소파에 앉아 날 기다리고 있을 거야. 언제나 그랬으니까.’박진성은 그렇게 생각하고 성큼성큼 거실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나 문을 열자마자 마주한 것은 텅 빈 소파와 적막만 감도는 거실이었다. 따뜻하게 데워진 야식도, 그를 반갑게 맞이하는 사람도 없었다.예전의 민여진이라면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밤새도록 그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가 들어오면 기뻐서 활짝 웃으면서도 어딘가 뾰로통한 얼굴로 다가와 ‘배고프지 않냐’고 묻곤 했었다.박진성의 가슴이 뻐근하게 조여오더니 이내 숨이 막힐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리고 이 모든 변화의 원인이 방현수라는 사실이 다시금 그를 자극했다.‘민여진, 그렇게 사랑한다고 하더니 결국 방현수에게 빠졌다는 거야? 겨우 그런 남자한테 진심을 다 갖다 바쳤다는 거냐고!’분노가 점점 더 거세지더니 걷잡을 수 없이 치솟았다. 그는 재킷을 거칠게 내던지고 계단을 올라갔다.박진성이 벌컥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자, 침대 위에 누운 민여진이 잠에서 깨어났다. 인기척에 그녀는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담요를 움켜쥐고 몸을 웅크렸고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한 표정이 서렸다.그 순간, 박진성의 남아 있던 이성마저 불길 속으로 타버렸다. 그는 그녀에게 성큼 다가가 침대에 짓누르더니 몸을 밀착시켰다.“박진성! 너 뭐 하는 거야!
“네가 말리는 걸 무시하고 그 아이를 낳으려 했던 게 그렇게 잘못이야?”민여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그 아이는 이미 죽었어. 난 감옥에서 1년을 보냈고, 이제 내겐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그런데 왜 아직도 날 놓아주지 않는 거야? 난 이미 후회했어. 네 아내로 남고 싶지 않아. 제발... 제발 날 놓아줘. 더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마지막 말을 내뱉자마자 그녀는 그대로 쓰러졌다.그제야 박진성은 그녀의 손을 놓았지만, 가슴 깊숙이 자리 잡은 묵직한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모든 것을 손아귀에 쥐고 있다고 믿었던 박진성은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답답한 가슴을 움켜쥔 그는 억눌린 심정을 달래려 베란다로 나갔다. 담배 한 개비를 물고 다 탈 때까지 연기를 들이마시며 머리를 식히려 했다.박진성은 민여진이 결국에는 그에게로 돌아와 예전처럼 매달릴 거라고 확신했다.지금의 민여진은 시력을 잃었고 얼굴도 망가졌으며 의지할 가족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방현수가 그녀를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결국 그것은 한순간의 감정일 뿐이고 시간이 지나면 끝이 보일 게 뻔하다고 생각했다.만약 민여진이 순순히 따라오기만 한다면 그는 그녀를 평생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방 안에서 갑자기 울린 휴대폰 벨소리에 민여진은 정신을 차렸다. 온몸이 쑤셨고 무의식적으로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그녀는 힘겹게 손을 뻗어 휴대폰을 집어 들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전화기에서 허스키하지만 힘 빠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누구세요?”“여진아, 나야!”익숙한 목소리에 그녀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현수 씨?”방현수의 목소리는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목소리가 왜 이래? 어디 아파?”박진성을 떠올리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표정이 굳어졌지만 손끝에 힘을 주고 애써 담담한 척 대답했다.“별일 없이 잘 지내고 있어요. 며칠
박진성은 갑자기 나타나 민여진의 손목을 잡아채더니, 뼈가 으스러질 듯한 힘으로 꽉 쥐었다.민여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박진성이 두 사람의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 그는 불길처럼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정말 대단하네. 민여진,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내 침대에 누워 있더니, 감히 다른 남자 앞에서 꼬리 치고 있어? 내가 조금만 더 늦었으면 너희 둘 호텔로 직행했겠네?”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현수의 주먹이 박진성의 얼굴을 세차게 강타했다.“박진성! 사람이 되어서 어쩜 매번 짐승만도 못한 말을 지껄여? 여진이를 어떻게 이런 식으로 모욕할 수 있어!”박진성은 날아오는 방현수의 주먹을 맞고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입가에서는 피가 흘렀다. 하지만 그는 반격하는 대신 입술을 비틀며 야비한 미소를 보였다.“방현수, 이러고도 네가 양성에서 그렇게 순탄하게 지낼 수 있을 거로 생각하는 모양이지?”그 말을 듣자, 민여진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안 돼!”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박진성에게 설명하려 했다.“오해야! 난 그냥 현수 씨에게 모든 걸 정리하려고 나온 것뿐이야. 우린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야...”“닥쳐!”박진성의 눈에는 불꽃이 튀었고, 그의 목소리는 살기를 띠고 있었다.“네가 눈이 멀었다고 해서 나도 그런 줄 알아? 네가 저 자식과 함께 도망치려고 한 거 다 알고 있어. 내가 했던 말들을 귓등으로도 안 들은 모양이네?”‘만약 내가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두 사람은 이미 해외로 도망쳤을 거야. 이 배은망덕한 년! 처음부터 관대하게 용서해 주지 말았어야 했어.’“아니야! 난 도망치려고 한 적 없어!”“아니라고? 나에게 말도 없이 여기까지 나와서 방현수를 만나고 있는데도 아니라고?”박진성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비웃음을 터뜨렸다.“어젯밤 내가 널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했나 보네. 그래서 이렇게 다른 남자한테 달려가야 할 만큼 간절했던 건가?”그는 민여진의 셔츠를 거칠게 잡아당겨 풀어헤쳤다. 그러자 목덜미 위
이어서 박진성은 다시 방현수를 노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방현수와는 아직 끝난 정산해야 할 것들이 남아 있지. 남의 여자를 탐내는 버릇을 확실히 고쳐주겠어.”민여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였다. 이대로 보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걸 직감한 그녀는 박진성의 팔을 필사적으로 부여잡고 애원했다.“박진성! 도대체 뭘 하려고 하는 거야? 이건 우리 둘만의 문제야. 나한테 화풀이하는 건 괜찮으니까 제발 남한테까지 피해주지 마! 현수 씨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 마!”박진성은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냉랭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남이라니?”그는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다.“방현수랑 끌어안고 도망치려고 할 때는 죽고 못 사는 연인 같더니, 이제 와서 남이라고?”그는 독하게 쏘아붙였다.“정말 피도 눈물도 없네. 저 녀석은 이런 널 보면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민여진의 눈가가 뜨거워졌다.‘피도 눈물도 없는 게 대체 누구지?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돼버린 거야...’그녀는 혼란스러웠다.'2년 전 자선행사장에서 누구보다 따뜻하게 웃던 그 남자는 어디로 간 걸까? 내가 첫눈에 반했던 박진성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사랑에 눈이 멀었던 걸까...'“내가 잘못했어... 진성 씨,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제발 용서해 줘. 다시는 그 사람과 만나지 않을게. 다시는 연락도 안 할게. 그러니까 제발 현수 씨만은 놔줘.”그녀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흐트러진 옷차림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울먹이며 머리를 조아렸다.방현수의 눈은 붉게 충혈되었다. 그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숨이 막혀 울부짖었다.“여진아! 일어나! 나 때문에 그 악마에게 무릎 꿇지 마! 그럴 필요 없어! 박진성은 네가 상대할 가치도 없는 놈이야!”박진성은 조용히 지켜보다가 천천히 손뼉을 쳤다.“참 보기 좋은 한 쌍이네. 내가 참 나쁜 놈이야, 그렇지? 이렇게 아름다운 한 쌍을 찢어놓은 거잖아.”그의 말에 민여진은 온몸이 얼어붙었다. 그가 이를 악물며
보디가드들의 차가운 조롱은 멈출 기미가 없었고, 민여진의 가슴속에서 분노와 절망이 소용돌이쳤다.‘왜 이렇게 냉정할 수 있지? 난 감정 없는 인형이 아니야. 왜 박진성의 뜻에 굴복해야 하지? 그와 결혼하겠다고 했던 과거가 지금의 나를 이렇게 무너뜨려야만 하는 거야?’고통은 극에 달했지만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두 눈은 점점 깊은 공허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머릿속을 스친 한 가지 생각이 그녀를 다시 깨웠다.‘현수 씨... 혹시 맞고 있는 건 아니겠지?’손끝이 떨리며 감각이 둔해졌지만, 그녀는 끝까지 집중했다. 본능적으로 좌석 밑에 손을 뻗어 상자를 꺼냈고, 안에 들어 있는 칼을 찾아 단단히 쥐었다.민여진의 손끝에서 미끄러진 칼은 이미 그녀의 목을 베고 있었고, 붉은 피가 셔츠를 물들이며 흘러내렸다. 그 광경을 본 두 명의 보디가드는 경악하며 외쳤다.“뭐 하는 겁니까! 당장 그 칼 버리세요!”그들은 서둘러 차 문을 열고 다가오려 했다.“오지 마!”민여진은 칼끝을 더 깊이 밀어 넣으며 경고했다. 칼날이 피부를 파고들자 피는 마치 값싼 물처럼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시력을 잃은 그녀였지만, 눈빛만큼은 절대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그들이 조금이라도 다가오기만 하면 바로 목숨을 끊겠다는 단호함이었다.좁은 차 안은 그녀에게 유리한 조건이었다. 보디가드들이 그녀에게 함부로 접근할 수 없었고, 그녀는 이를 알고 있었다.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만둬. 그를 놔주고 박진성을 데려와.”보디가드들은 당황해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좋아요, 알았어요! 제발 칼 놓지 마시고 가만히 계세요. 당장 박진성 대표님을 데려올게요!”그들은 급히 박진성을 부르러 달려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박진성은 서둘러 차에 다가왔다. 차창 너머로 보인 것은 목에 칼을 대고 있는 민여진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목에서 흐른 피가 셔츠를 이미 새빨갛게 물들였다. 박진성은 그 광경을 보고 폭발할 듯한 분노에 몸을 떨었다.“민여진! 죽고 싶어서 환장했냐!”그의 목소리는 분노와 두려움으
연락받고 도착한 응급차는 민여진의 상태가 위급해지자 비상등을 켜고 빠르게 이동했고, 병원에 도착한 후 의료진들은 모두 긴장 속에서 한순간의 실수도 없이 최선을 다했다.마침내 치료가 끝나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치료를 마친 후 민여진은 별장으로 옮겨졌다.‘옮겨졌다’는 표현이 그럴싸 보이지만, 사실상 그녀는 감금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박진성이 보낸 보디가드들에 의해 철저히 감시당하며 외출은커녕 바깥 공기를 마실 권리조차 없었다.며칠 동안 박진성은 마치 그녀의 세상에서 사라지기라도 한 듯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민여진이 보디가드들에게 몇 번이고 물어봐도 돌아오는 답변은 알 수 없다는 말뿐이었다.며칠 후, 민여진은 아래층으로 내려오면서 현관에서 보디가드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들었다.“대표님은 대체 이 못생긴 여자를 왜 데리고 사는 걸까? 요즘엔 채연 씨랑 해외여행 가셔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던데. 이 여자가 채연 씨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건 아니겠지?”“말도 안 되지. 대표님이 제일 신경 쓰는 건 당연히 채연 씨야. 채연 씨가 아프다고 한마디만 하면 회사 일도 다 내팽개치고 곧장 해외로 데리고 휴양을 가는 사람이잖아.”그제야 민여진은 상황을 이해했다. 박진성이 얼굴을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그녀에게 화가 난 것 때문이 아니라, 단지 문채연의 건강이 좋지 않아 그녀를 데리고 휴양지로 여행을 떠난 것 때문이었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입가를 올리고 싶어도 올라가지 않았다.그래도 다행이었다. 그의 관심이 문채연에게 쏠려 있다면, 방현수는 무사할 가능성이 높으니까.그러나 그녀의 휴대폰은 이미 박진성의 손에 박살 나서 방현수와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민여진은 계단 난간에 잠시 멍하니 기대어 있다가, 저편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고개를 돌렸다.“민여진 씨...”그 사람은 정기적으로 3일에 한 번씩 붕대를 갈아주러 오는 의사였다.의사는 목숨에는 지장이 없지만, 상처 부위의 염증이 심각하여 지속적인 치료가 필요하다고 했다.흉터를 최소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 망설이던 민여진은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현준 오빠, 임재윤은 좋은 사람이에요. 저는 그를 한번 믿어보고 싶어요. 임재윤이 저를 해치지만 않는다면, 진짜 신분이 뭐든 상관없어요.”조현준은 할 말을 잃은 듯 한참 후에야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여진아, 이 결정을 후회하지 않길 바란다.”‘이 결정을 왜 후회할 거로 생각하는 거지?’민여진은 이유 모를 불안감에 사로잡혔지만, 조현준은 이미 전화를 끊은 후였다.그녀는 이 복잡한 감정이 조현준의 배려를 거절한 데서 오는 미안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침대에 앉아 멍하니 있던 그 순간, 문밖에서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민여진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누구세요?”“민여진 씨, 저예요!”‘진시우?’흥분한 그의 목소리에 민여진은 당황하며 문을 열었다.“무슨 일이에요?”“임재윤한테 문제가 생겼대요. 지금 수술실로 들어갔다니까 우리 빨리 병원으로 가요.”민여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앞을 볼 수 있는 상황이었어도 눈앞이 아득해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허둥지둥 탁자 위에 걸쳐둔 코트를 더듬어 입으며 물었다.“우리가 병원에서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잖아요. 갑자기 어떻게 된 거예요?”평소 유머러스하던 진시우의 목소리에도 긴장감에 섞여 있었다.“저도 자세한 건 모르겠어요. 하지만 임재윤의 병은 원래 갑작스러운 상황이 올 수도 있는 병이었어요. 병원에서는 지금 수술 중이라고만 알려줘서 일단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아요.”걸어서 갈 여유가 없던 두 사람은 즉시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응급실 복도에 도착하자, 임재윤은 아직 수술 중이었다.진시우는 민여진을 자리에 앉히고 의사를 찾아갔다. 막막함과 불안함에 민여진은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수술실 앞에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민여진은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 이상 없어 보이던 사람이 왜 갑자기 위중한 상태로 수술실까지 들어간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순간 손끝에서 차가움이 느껴지더니
민여진도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배가 조금 고파서 호텔 레스토랑에서 뭐라도 먹어야겠어요.”진시우는 거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민여진이 문 앞까지 걸어갔을 때, 뒤에서 휴대전화 소리가 전해졌다.“여진아, 얘기 좀 할까?”민여진은 깜짝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무슨 얘기?”임재윤은 눈썹을 찌푸리며 휴대전화를 두드렸다.“네가 알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알고 싶은 게 없는데?”민여진은 자기 말이 너무 차갑게 들릴 것 같아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재윤아, 뭐 좀 먹으러 가는 거야. 곧 돌아올게. 그때 다시 얘기하자. 알았지?”임재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민여진은 진시우와 함께 병실을 나섰다.진시우는 무슨 재미있는 장면이라도 본 듯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없는 사이에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네요.”“별일 아니었어요. 그냥 대화를 조금 나눈 것뿐이에요.”민여진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말했다.“어서 가죠.”호텔 방으로 돌아오자, 서비스로 음식이 직접 배달되어 민여진은 레스토랑까지 내려갈 필요도 없었다. 진시우가 미리 말해둔 모양이었다.그녀는 조금씩 음식을 먹으며 생각에 잠겼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전화벨이 여러 번 울린 후였다. 급히 받아 들자, 조현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바빠?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아?”“아니요. 휴대전화를 멀리 두고 다른 테이블에서 밥을 먹고 있었어요.”“그랬구나.”조현준은 잠시 침묵하더니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여진아, 그 일은 확인했어?”“무슨 일이요?”잠시 멈칫하던 민여진은 이내 무슨 일인지 알아차리고 말을 이었다. 임재윤의 신분에 관한 이야기였다.“네. 확인했어요. 임재윤은 원래 진씨 가문 운전기사의 아들이었대요. 선천성 심장병에 말도 못 하니까 자주 외출하지 못했던 거고, 나중에 치료를 위해 아버지와 함께 독엔에 갔대요. 아마 그래서 현준 오빠가 못 찾았나 봐요.”조현준은 긴 침묵 끝에 다시 물었다.“너는 그 말을 얼마나 믿어?”모든 걸
임재윤이 직접 말하지 않아도 민여진은 느낄 수 있었다. 평소 감정 기복이 거의 없던 임재윤이 여자 친구라는 말이 나오기 바쁘게 마치 다른 사람처럼 분위가 달라졌다.그 여자는 임재윤의 기분을 좌우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마음속에 중요한 존재인 것 같았다.민여진이 화제를 바꾸려는데 임재윤이 다시 물었다.“정말 궁금해?”“아니.”민여진은 얼른 부인했다. 처음엔 그냥 할 말이 없어서 꺼냈던 말이었고 더불어 임재윤이 왜 자신에게 그런 감정을 품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반응에 민여진은 자신이 선을 넘었음을 알아차렸다.임재윤은 민여진한테 다가가려다 멈춰서더니 고개를 숙이고 타자를 했다.“미안해. 많이 놀랐어? 나는 그냥 과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서...”“괜찮아.”민여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남이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함부로 꺼내는 걸 싫어하는 건 당연한 거야. 오히려 선은 내가 넘었으니까 사과해도 내가 해야지.”임재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글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더니, 오랜 침묵 끝에 타자했다.“넌 남이 아니야.”민여진은 미소를 지었다.“그래. 알았어. 너무 신경 쓰지 마. 누구나 털어놓기 싫은 비밀과 건드리면 안 되는 선이 있는 법이니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돼. 네 선을 알았으니까 두 번 다시 넘지 않을게.”그녀는 급히 소파에서 일어났다.“배 안고파? 간호사에게 음식을 언제 가져오는지 물어볼게. 금방 돌아올 테니까 잠깐만 있어.”병실 문을 나서는 민여진의 표정은 왠지 어두워 보였다. 정확한 이유가 뭔지도 모르게 마음이 불편했고 복잡했다.어쩌면 처음 느껴보는 임재윤의 냉담함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여자가 임재윤의 아픔이었다는 진시우의 말 때문일 수도 있었다.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여자는 임재윤의 마음속에 중요한 사람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그럼... 나는 뭐지?’난데없이 튀어나온 생각에 민여진은 스스로에게 깜짝 놀라더니 마음을 다잡으며 중얼
임재윤은 민여진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물었다.“그냥 내가 아프기 때문이야? 만약 너 때문에 아픈 게 아니었다면, 아예 나를 보러 오지도 않았을 거야?”민여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다시 조용히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여진아, 인제 그만 돌아가. 진시우더러 돌아갈 차를 준비해달라고 할게. 지금쯤이면 안진 마을까지 가는 길도 뚫렸을 거야. 이모 집에서 편하게 지내. 병원에는 그만 오고.”“싫어.”민여진은 생각할 여유도 없이 말이 먼저 튀어 나갔다. 임재윤이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자, 민여진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이었다.“혼자 병실에 있으면 심심할 거 아니야. 게다가 수술 후 회복 기간도 긴데, 내가 옆에서 말동무가 되어주면 좋잖아.”민여진의 말에 임재윤은 천천히 타자했다.“괜찮아. 나는 늘 혼자였어. 이젠 익숙해.”늘 혼자였다는 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문득 자신의 과거가 떠올랐다.감옥에서, 박진성의 별장에서, 도망치던 차 안에서조차 그녀는 언제나 혼자였다.고독을 즐기려고 노력했지만 항상 두려웠고, 언제라도 사라질지 모를 관심에 더욱 불안해했다.‘임재윤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고백할 때 우리가 같은 종류의 사람이라고 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을까?’“수술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 지금 돌아가도 신경 쓰여서 편하게 못 있어. 어쨌든 네가 아픈 건 나와 연관되어 있잖아. 무엇보다 지금은 네 곁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하기도 하고.”민여진을 빤히 응시하던 임재윤은 그녀의 걱정과 고집에 표정이 차츰 누그러졌다.“여진아, 너 이렇게 착하면 누군가한테 이용만 당할 거야.”민여진이 웃으며 되물었다.“그럼 넌 나를 이용할 거야?”임재윤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답했다.“그럴 수도 있지.”예상치 못한 대답에 멈칫하던 민여진은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그때 휴대전화의 기계음이 다시 울려 퍼졌다.“나는 지금도 널 이용하고 있잖아. 내가 아픈 건 순전히 내 문제인데도 네 착한 마음을
‘마음속에 아직도 박진성이 있냐고?’민여진은 단지 자신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박진성을 산 채로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발라내고 싶었다.진시우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흐르고 분위기가 편안해지자 비로소 웃으며 말을 꺼냈다.“다행이네요. 난 임재윤이 마음에 다른 남자가 있는 여자와 함께하는 걸 원하지 않아요. 여진 씨가 박진성과 아무 관계도 없다면, 임재윤과 잘 시작해 봐요.”다시 임재윤의 이름이 나오자, 민여진은 표정이 달라졌다.“저와 임재윤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에요.”“어떤 사이인지 여진 씨가 저보다 더 잘 알겠죠.”진시우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여진 씨가 임재윤의 신분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것도 알아요. 이해해요. 박진성 일 이후로 경계심을 갖는 건 당연하죠. 하지만 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여진 씨도 잘 알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임재윤은 절대 여진 씨를 다치게 하지 않아요. 임재윤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민여진 씨가 아직도 경계를 못 풀겠다면 대체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요? 그렇다고 마음을 꺼내 보여줄 수도 없는 일인데.”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한 뒤, 민여진을 위해 마스크와 모자를 사러 갔다.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민여진은 진시우의 말이 계속 맴돌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박진성은 차갑고 독단적이며, 항상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타인을 해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다. 반면 임재윤은 부드럽고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방면에서 민여진을 먼저 배려해 줬고, 아픈 몸으로도 민여진이 추울까 옷까지 벗어주는 사람이었다.성향이 이렇게나 상반된 두 사람인데, 왜 민여진은 자꾸만 임재윤이 박진성이라는 착각을 하고 의심하는 건지 본인조차 이해되지 않았다.‘나 왜 이러지? 박진성이 같은 병원에 있다는 말만 듣고 이렇게 의심하다니.’민여진은 머리가 아파 눈을 질끈 감았다. 이때 물건을 사
진시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민여진 씨를 위해 싫어하는 걸 참고 먹다니, 정말 진심으로 좋아하는 모양이네요.”예전이었다면 진시우의 말을 그저 농담으로 넘길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당황스럽기만 했다. 민여진은 한참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화제를 돌렸다.“진시우 씨, 임재윤하고 어릴 적부터 함께 지냈죠?”“네? 그렇다고도 할 수 없어요.”진시우는 과거를 회상하며 말했다.“재윤이가 한동안 독엔에 가 있어서 떨어져 지내다가 나중에야 다시 연락이 닿은 거예요. 왜요?”“궁금해서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별로 없었나요? 아니면...”아니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에게 마음을 줄 수 있겠냐는 뜻이었다.진시우는 웃으며 말했다.“오해하고 있네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임재윤을 좋아하는 여자도 적지 않았어요. 요즘 여자들은 차가운 이미지를 가진 남자를 좋아하잖아요. 임재윤은 말이 없으니까 딱 그런 이미지였고 성격도 세심하기까지 해서 더 인기가 많았죠.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는...”진시우는 이 주제가 적절하지 않음을 깨달은 듯 급하게 화제를 바꾸었다.“어쨌든 외로워서 민여진 씨에게 관심을 가진 건 아니에요. 임재윤은 진심으로 민여진 씨를 좋아하는 거예요.”하지만 민여진은 다른 말이 더 궁금했다.“임재윤에게 여자 친구가 있었어요?”“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요.”“그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어요?”진시우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여진 씨, 제가 이 질문에 꼭 대답해야 하나요? 궁금하면 임재윤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요? 친구의 아픈 기억을 꺼내고 싶지 않아서요.”‘아픈 기억? 임재윤의 전 여자 친구는 그에게 아픔으로 남은 건가?’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민여진은 그 안에 수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음을 깨달았다.식사를 마치고 민여진은 진시우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길을 가던 중, 민여진은 어제 박진성을 우연히 마주친 일이 떠올라 걸음을 멈췄다.“진시우 씨, 돈을 좀 빌려주실래요? 모자랑 마스크를 사려고요.
민여진의 얼굴을 본 문채연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여기 왜 나타난 거지? 누구 때문에 이 병원까지 온 거야?’답은 너무 뻔했다. 이제 겨우 박진성과의 관계가 돈독해지고 있는 시점에 민여진이 나타나자, 화가 치밀어 오른 문채연은 이를 악물었다.‘쓰레기 같은 년! 죽은 척 도망쳐놓고 이제 와서 후회라도 하는 거야? 다시 박진성 앞에 나타나서 그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을 생각이라면 꿈 깨! 일 초도 못 나타나게 할 거니까.’문채연의 눈에는 독기가 서렸다....민여진은 침대에 누웠지만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임재윤이 어떻게 나를 좋아할 수 있지? 내가 뭐라고? 말을 못 하는 그와 같이 나도 앞을 못 보는 장애인이라서? 그런 거라면 너무 경솔한 결정 아닌가? 그리고 시각장애인도 많이 봤을 텐데 왜 하필...’어찌 되었든 민여진은 갑작스러운 그의 마음이 선뜻 받아들여 지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조현준도 그렇고 이제 민여진은 누구한테 마음을 줄 용기가 없었다.박진성이라는 사람 때문에 받았던 그 수많은 상처는 이미 그녀의 마음을 무너지게 했다.민여진은 억지로 눈을 감고 겨우 잠에 들었지만, 악몽을 꾸었다.병원에서 박진성을 마주치는 꿈이었다. 박진성은 그녀의 저항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시켜 그녀를 묶은 채 양성으로 끌고 갔다.잠에서 깬 민여진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박진성의 강압적인 태도와 차가운 얼굴이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정신을 차리자,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민여진이 문을 열자, 이번에는 직원이 아니라 진시우였다. 그는 웃으며 물었다.“민여진 씨, 혹시 제가 휴식을 방해한 건 아니죠?”“아니요. 방금 막 일어났는데, 마침 잘 왔어요.”“다행이네요. 같이 식사하러 갈래요? 병원도 가야 하고. 그런데 임재윤은 오늘 이상하게 문자를 여러 번 보내네요. 민여진 씨 상태를 계속 물어보던데, 혹시 싸우셨어요?”싸운 건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어색한 상황이었다. 민여진은 설명하기 어려워 웃으며
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뭐라고?”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지만, 임재윤은 단호하게 대답했다.“너를 좋아해. 첫눈에 반했어.”임재윤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사실 병이 발작하지 않았다면 엊그제쯤에 이미 말했을 거야. 그때 너랑 만나자고 약속했던 이유가 널 좋아한다고 고백할 생각이었거든.”“나를 왜?”민여진은 머리가 멍해졌다.‘임재윤이 나를 좋아한다고? 어떻게? 이게 말이 돼?’“왜라니?”임재윤은 담담한 표정으로 반문했다.“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너여야만 한다는 느낌이 들었어. 이건 지난 20여 년 동안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야. 아마 이런 걸 첫눈에 반했다고 하겠지?”민여진은 주체할 수 없이 빨리 뛰는 심장에 호흡이 거칠어졌다.‘임재윤이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너무 터무니없는 말이잖아.’“이런 내 모습에 반했다고? 너 같은 조건이면 더 좋은 여자를 만날 수도 있잖아.”“외모만으로 첫눈에 반했다면, 그건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모욕하는 거야.”임재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타자를 이었다.“널 처음 본 순간 그런 느낌이 들었어. 어쩌면 우린 같은 종류의 사람이겠구나. 교회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줄곧 너를 지켜봤거든. 주변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네 모습이 좋았고 그럼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네가 예뻐 보였어.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 시선은 온통 너한테 가 있더라. 여진아, 만약 네가 앞이 안 보이고 내가 말을 못하는 게 하늘이 정해준 거라면, 하늘은 아마도 나를 네 눈이 되게 하고 너를 내 목소리가 되게 하려고 그랬던 게 아닐까? 우린 아마 천생연분일지도 몰라.”차가운 기계음이 내뱉은 그 말은 왠지 모르게 뜨겁게 전해져 민여진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그녀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임재윤, 농담하지 마.”임재윤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민여진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 앞에 다가갔다. 뜨거운 그의 입술이 그녀의 얼굴
“넌 안 피곤해?”“아까 푹 쉬어서 괜찮아.”임재윤은 무언가 말하려다 멈추고는 간단히 알겠다고 답한 뒤 침대에 누웠다.이어서 민여진은 불을 껐고 깊은 밤이 되자, 병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민여진은 임재윤의 호흡이 평온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가 깊이 잠든 걸 확인하고 소파에서 일어나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방 안은 캄캄했지만, 그녀에게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던지라 호흡소리만으로도 임재윤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정신을 가다듬은 민여진은 임재윤한테 다가가 조용히 손을 뻗어 손끝으로 천천히 그의 눈썹과 눈을 쓰다듬었다.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만져봤다. 넓은 이마, 높고 곧은 코.민여진이 눈을 뜬 채 손가락을 입술 근처까지 가져가려던 찰나 임재윤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어둠 속에서 민여진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임재윤의 시선이 느껴졌다.손에 힘을 주던 임재윤은 민여진임을 알아차리고는 이내 힘을 풀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바닥에 글자를 썼다.[뭐 하는 거야?]민여진은 호흡을 가다듬었지만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임재윤, 너 도대체 누구야?”그녀는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임재윤은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휴대전화를 꺼내 물었다.“여진아, 그게 지금 무슨 말이야?”민여진은 더 이상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는 듯 마음을 다잡으며 차분하게 말했다.“현준 오빠가 지금 동진에 있어. 오빠한테 너에 대해서 조사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었거든. 그런데 동진에는 임재윤이라는 사람이 없대. 그러니까 너 대체 누구냐고.”임재윤은 한참 침묵하다 다시 타자를 했다.“조현준의 말은 믿으면서 나는 안 믿는구나.”“너를 어떻게 믿어?”민여진은 혼란스러웠다.“임재윤, 난 너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신분이 뭔지, 집은 어디인지, 가족은 몇 명인지 심지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몰라.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건, 나 같은 여자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거야. 다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