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저녁 식사, 그리고 다가오는 폭풍의 전조
최세연이 저녁 식사를 제안한 다음 날, 강지훈의 하루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분주하게 시작되었다.
오전에는 K 퍼포먼스 랩에서 윤태웅의 재활 훈련을, 오후에는 최강 라이온즈 선수단의 비시즌 훈련 프로그램을 원격으로 지휘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각기 다른 선수들의 신체 데이터와 운동 역학, 그리고 그들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분주함 속에서도, 그의 마음 한편에는 저녁에 있을 ‘약속’이 희미한 파문처럼 번지고 있었다. 스물아홉.
선수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오직 타인의 성공을 위해 달려온 지난 몇 년간, 그의 인생에서 ‘사적인 약속’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늘 누군가의 코치, 디렉터, 혹은 해결사였을 뿐, 온전한 강지훈 개인으로서 누군가를 만나는 것은 너무
[“활시위는 당기는데, 마지막 순간에 손가락에서 힘이 빠져버린다는 거야. 국가대표 선발전이 3주 앞으로 다가왔는데, 이대로라면 선수 생명이 끝날 판이야. 양궁 협회는 발칵 뒤집혔고 우리 그룹 이미지에도 타격이 크지.”]최 회장은 지훈에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 혹은 명령을 내렸다.[“고쳐내게. 3주 안에. 자네가 정말 진짜라면, 내게 결과로 증명해 보여. 성공한다면, 자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지원해주지. 하지만 실패한다면….”]그는 말을 맺지 않았지만, 그 안에 담긴 서늘한 의미는 충분히 전달되었다.지훈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야구, 유도, 골프에 이어… 양궁. 완전히 새로운 영역, 그리고 3주라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간. 하지만 그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알겠습니다, 회장님. 제가 한번… 들여다보겠습니다.”[“좋아. 그 배포가 마음에 들어. 결과 기대하고 있겠네.”]전화가 끊겼다. 최세연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훈을 바라봤다.“괜찮으시겠어요? 저희 할아버지는… 한번 물면 절대 놓지 않는 분이세요.”“괜찮습니다. 오히려… 재미있어지기 시작했으니까요.”지훈의 눈이, 새로운 사냥감을 발견한 사냥꾼처럼 번뜩였다.식사를 마치고 레스토랑을 나서는 길. 밤공기가 제법 차가웠다. 지훈은 자신의 외투를 벗어, 자연스럽게 최세연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그녀는 놀라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그의 배려에 뺨을 붉히며 작게 고개를 숙였다.“고마워요.”“별말씀을요.”&nbs
* 저녁 식사, 그리고 다가오는 폭풍의 전조최세연이 저녁 식사를 제안한 다음 날, 강지훈의 하루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분주하게 시작되었다.오전에는 K 퍼포먼스 랩에서 윤태웅의 재활 훈련을, 오후에는 최강 라이온즈 선수단의 비시즌 훈련 프로그램을 원격으로 지휘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각기 다른 선수들의 신체 데이터와 운동 역학, 그리고 그들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으로 가득 차 있었다.하지만 그 모든 분주함 속에서도, 그의 마음 한편에는 저녁에 있을 ‘약속’이 희미한 파문처럼 번지고 있었다. 스물아홉.선수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오직 타인의 성공을 위해 달려온 지난 몇 년간, 그의 인생에서 ‘사적인 약속’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늘 누군가의 코치, 디렉터, 혹은 해결사였을 뿐, 온전한 강지훈 개인으로서 누군가를 만나는 것은 너무나 낯선 일이었다.그는 자신도 모르게,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옷장의 옷들을 몇 번이고 들춰보았다.같은 시각,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고급 레지던스. 최세연 역시 지훈 못지않은 설렘과 긴장 속에서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드레스룸을 가득 채운 화려한 옷들 앞에서, 그녀는 한참을 망설였다. JK 그룹의 손녀 ‘최세연’이 아닌, 다시 꿈을 꾸기 시작한 골퍼 ‘최세연’으로서 그를 만나고 싶었다.그녀는 결국, 화려한 드레스 대신 단정한 블라우스와 편안한 슬랙스를 선택했다.거울 앞에 선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난 3년간, 체념과 무력감으로 그늘져 있던 얼굴에, 아주 희미하게 생기가 돌고 있었다. 강지훈. 그 남자를 만난 이후로, 멈춰있던 그녀의 세상이 아주 조금씩,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호텔 출입 기록, 차량 블랙박스, 통화 내역… 뭐든 좋아. ‘연인 관계’로 엮을 수 있는 건덕지를 찾아내.”그는 강지훈 개인뿐만 아니라, 그의 가장 소중한 관계까지 파괴하여 그를 사회적으로 완벽하게 고립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적의 거미줄이, 지훈의 주변을 서서히 옥죄어오고 있었다.지훈은 자신을 향한 위협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 채, 새로운 프로젝트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는 우선, 윤태웅의 재활에 집중하기로 했다. 모든 기적의 시작은 결국 ‘증명’에서 비롯되기 때문이었다.K 퍼포먼스 랩.한 달간의 기초 재활을 마친 윤태웅의 몸은 놀랍도록 변해 있었다. 지훈이 설계한 정밀한 재활 프로그램을 통해, 그의 몸을 짓누르던 통증은 거의 사라졌고 근육 위축으로 비대칭이 심했던 상체는 다시 균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무엇보다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공허함과 절망 대신, 목표를 향한 뜨거운 의지가 담겨 있었다.“오늘부터는 다시 ‘잡는’ 훈련을 시작하겠습니다.”지훈이 선언하자, 윤태웅의 눈이 커졌다. 그는 지난 한 달간, 자신의 영혼과도 같았던 유도복 깃을 단 한 번도 잡아보지 못했다.지훈은 유도복 대신, 천장에 매달린 굵은 로프를 가리켰다.“하지만 아직 유도복을 잡을 단계는 아닙니다. 우리는 먼저, 당신의 뇌에 각인된 ‘잡는 행위 = 통증’이라는 공포의 공식을 깨뜨려야 합니다.”지훈은 시스템을 통해 그의 신경 반응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며, 가장 안전하고 효율적인 방법을 제시했다.
“나는 평생을 사업만 해온 사람이야. 내 눈에 사람은 둘 중 하나지. 쓸모 있는 인재, 아니면 쓸모 없는 인재. 자네는 아주 쓸모가 많은 인재 같더군. 그래서 궁금해졌어.”그의 눈이 번뜩였다.“자네의 그 기적, 값은 얼마인가? 내 손녀를 다시 필드 위에 세워주는 대가로, 자네가 원하는 게 대체 무엇이지? 돈? 명예? 아니면… 우리 JK 그룹의 후광이라도 필요한 건가?”그것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었다. 지훈의 속내와 그릇의 크기를 떠보려는 노회한 승부사의 시험이었다.지훈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똑바로 최 회장을 응시하며 대답했다.“제가 원하는 것은 회장님께서 주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최 회장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지훈은 방 한쪽에 놓인, 수억 원을 호가하는 달항아리 백자를 가리켰다.“저 백자는 완벽하기에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저기에 작은 실금이 하나 가 있다면, 그 가치는 땅에 떨어지겠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금을 감추거나, 아예 도자기를 버릴 겁니다.”그의 시선이 다시 최 회장에게 향했다.“하지만 저는 다릅니다. 저는 그 금이 간 부분에 옻칠과 금가루를 이용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새로운 무늬를 만들어냅니다. 상처를 약점으로 가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것. 그것이 저의 방식입니다.”그는 최세연을 잠시 바라보고는 말을 이었다.“제가 원하는 대가는 금이 간 백자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재탄생하는 그 순간을 지켜보는 것. 오직 그것뿐입니다. 하지만…”지훈의 눈빛
병원 복도에서, 지훈은 자신의 마지막 시즌을 화려하게 불태우고 은퇴를 결정한 ‘노장’ 박건우와 마주쳤다.“강 디렉터. 덕분에… 내 야구 인생, 가장 행복한 마지막 페이지를 쓸 수 있었네. 정말 고맙네.”박건우는 진심을 담아 악수를 청했다. 지훈은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한 시대의 영웅이, 새로운 시대의 영웅에게 감사를 표하는 조용하지만 묵직한 세대교체의 순간이었다.모든 축제가 끝나고 야구계가 비시즌의 휴식기에 접어들었을 때, 강지훈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K 퍼포먼스 랩. 그곳에서 그는 또 다른 천재의 무너진 세상을 재건하는 작업에 돌입했다.“호흡이 너무 얕습니다, 윤태웅 선수. 어깨로 숨 쉬지 마시고 배꼽 아래 단전에 공기를 채운다는 느낌으로. 그렇죠. 아주 좋습니다.”지훈은 바닥에 누운 윤태웅의 자세를 교정해주며, 차분하게 지시했다. 유도 세계선수권 챔피언에게, 유도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보이는 호흡 훈련과 명상, 그리고 아주 미세한 근육을 깨우는 정적인 운동만을 반복시키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었다.하지만 윤태웅은 단 한 번의 불평도 없이, 그 모든 과정을 스펀지처럼 흡수했다.그는 매일 아침, 자신의 팔에 아주 조금씩 온기가 돌아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지훈의 진단대로, 신경을 압박하던 주변 근육들이 이완되면서, 막혔던 혈관과 신경에 다시 생명의 신호가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그날은 처음으로 가벼운 근력 운동을 시작하기로 한 날이었다. 지훈은 그에게 1kg짜리 작은 아령을 쥐여주었다.“이걸 들고 제가 알려드리는 각도대로만 팔을 움직이십시오. 단 1cm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요. 우리는 지금 근육을 키우는 게 아니라, 뇌에게 ‘이 움직
지훈의 인이어에서 마지막 지시가 흘러 나왔다.[“마지막 공입니다. 최고의 무기. 슬라이더로 가시죠.”]이현성은 숨을 골랐다. 그의 팔꿈치에서는 이미 비명과도 같은 통증이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모든 고통을 잊고 자신의 손끝에 마지막 영혼을 실었다.그의 손을 떠난 공이, 마지막 불꽃처럼 타오르며 홈플레이트를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완벽한 궤적을 그리며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을 꿰뚫었다. 빅토르의 배트는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스트라이크 아웃.4이닝 무실점. 50구. 완벽한 임무 완수.그 순간, 류승환 감독이 직접 마운드로 걸어 나왔다. 그는 말없이 이현성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의 손에서 공을 건네받았다. 교체였다.이현성이 마운드를 내려오는 순간, 잠실야구장의 모든 관중들이 기립했다.라이온즈의 팬도, 바이퍼스의 팬도 없었다. 그들은 오직,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팀을 위기에서 구해낸 한 위대한 영웅의 투혼에 아낌없는 박수와 찬사를 보낼 뿐이었다.그의 희생은 잠자던 사자들을 깨웠다.5회 말, 이현성의 투혼에 자극받은 라이온즈 타선이 폭발했다. 이하준이 주자 두 명을 두고 바이퍼스의 구원 투수를 상대로 거대한 스리런 홈런을 터뜨렸다. 스코어는 4:0. 승부의 추는 완전히 기울었다.이후 경기는 라이온즈의 일방적인 흐름으로 진행되었다. 박건우의 쐐기 타점까지 터지며, 스코어는 7:0까지 벌어졌다.그리고 마침내, 9회 말 투 아웃.마지막 타자의 공이 유격수 땅볼로 굴러갔다. 1루로 송구.아웃.경기 종료.최강 라이온즈. 시리즈 전적 4승 0패.10년 만의 한국시리즈 우승.선수들이 모두 그라운드로 뛰쳐나와 서로를 부둥켜안고 오열했다. 헹가래의 중심에는 팔에 두꺼운 아이싱을 한 채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이현성이 있었다.지훈은 분석실 유리창 너머로, 그 모든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만들어낸 기적의 마침표가 화려하게 찍히는 순간이었다.그날 밤, 축제가 끝난 후.한 인터넷 언론사를 통해, 대한유도협회와 윤태웅 선수의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