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훈은 시윤을 도와 몇 가지 테스트를 진행하고는 시윤의 요구대로 다음 날 아침 8시로 시간을 정하고 웃으며 말했다.“아직도 조금 더 지나야 민 사장님을 만나려 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빠르네요.”시윤은 눈을 내리깔았다.“우리 아들과 빨리 만나고 싶어요.”석훈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모성애의 잠재력은 늘 대단하긴 하죠. 심지어 가끔은 심리학과 과학의 범주를 뛰어넘을 때도 있으니까요.”“그럴지도 모르죠.”시윤은 창밖을 내다보며 대답했다.밖은 어느새 또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그동안 치료를 잘 받은 덕에 시윤은 소극적인 생각을 던져버리고 도윤을 제대로 마주했다. 물론 도윤이 이 세상에 어떻게 태어났든 간에, 본인과 피로 맺어진 천륜이기에 도윤을 사랑하고 낳은 걸 후회하지 않았다.때문에 도윤을 위해서든, 본인을 위해서든 시윤은 물러날 수 없었다.다음날.아침 7시 50분, 석훈은 시윤을 데리고 병원 아래의 공원으로 향했다.물론 아직 조금 쌀쌀하긴 했지만 햇빛은 따스했다.석훈은 시윤과 나란히 벤치에 앉더니 넌지시 말을 건넸다.“여기는 밀폐된 공간이 아니라, 마음이 비교적 편할 겁니다. 그리고 민 사장님과 대화할 때, 시윤 씨가 멈추라고 하면 저희가 개입해 바로 대화를 중단할 거고요.”다들 제 병이 발병될까 봐 걱정한다는 걸 알았기에 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러자 석훈은 시윤의 뒤쪽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석훈이 떠남과 동시에 낙엽을 밟으며 다가오는 발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분명 고개를 돌리지 않았지만 몸 안의 모든 세포가 도준이 왔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늦겨울이 가고 초봄에 들어서 여전히 외투를 입고 있었지만 두꺼운 외투마저 남자의 압도하는 분위기를 억누르지는 못했고, 검은 눈동자는 이른 아침의 안개를 뚫고 주먹만 한 여자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남자는 그렇게 시윤의 볼을 바라보며 천천히 다가갔다.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시윤은 옷소매 안의 손을 꽉 그러쥐었다. 그러다
시윤은 환청이라도 들은 줄 알고 믿지 않았다.“뭐라고요?”그러나 그때 도준이 이혼합의서를 내밀었다.“이거 이혼 합의서야. 난 이미 사인했어.”시윤은 [이혼합의서]라는 커다란 글자를 보고 나서야 눈앞의 사실이 진짜라는 걸 발견했다.‘도준 씨가 정말 나랑 이혼하려 하는 건가?’순간 마음이 허전하여 짐을 덜어낸 것 때문에 가벼워서인지, 아니면 괴로워서인지 알 수 없었다.“왜요?”시윤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리자 도준은 싱긋 웃었다. 하지만 서리가 한 층 낀 것 같은 두 눈에서 진심이 무엇인지 좀처럼 보아낼 수 없었다.“자유를 준다는데 왜냐니? 바보야? 자기 이제 자유야.”도준은 시윤의 손에 있는 서류를 펼쳐 내용을 확인시켜 주었다.“봐 봐, 마음에 들어?”흰 종이에 찍힌 검은 글자를 확인한 지 한참이 지나서야 시윤은 안에 적힌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백제 그룹의 지분을 모두 자기한테 넘겨준다는 조항을 보자 시윤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이건 받을 수 없어요. 전 도윤이만 원해요.”시윤은 도준이 거절할까 봐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그 말에 도준은 시윤의 머리를 뒤로 넘겨주며 가볍게 대답했다.“다 자기 거야. 난 기르기 귀찮아.”그제야 시윤은 마음속 돌멩이가 사라진 듯 홀가분해졌다. 아이를 빼앗기는 악몽에 수없이 시달려 느꼈던 공포가 도준의 한마디에 순간 사라져 버렸다.시윤은 도준을 복잡한 눈으로 바라봤다.“도준 씨가 안 놓아줄 줄 알았어요.”“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어.”“그런데 왜...”서로 눈길이 마주친 순간 시윤은 도준의 눈동자 속에 비친 저를 발견했다. 그녀의 그림자는 마치 도준의 동공 깊숙히이 박혀 있는 것만 같았다.시윤이 멍하니 있을 때 도준이 또박또박 대답했다.“자기한테 선택권을 주려고. 앞으로 나랑 같이 있을지 말지는 자기가 선택해.”“...”이 순간, 도준은 자기가 갖고 있던 바둑알을 판에서 모두 치워 시윤을 궁지로 몰아넣었던 돌을 걷어내고 자진해서 패배자가 되었다.시윤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제 무릎
퇴원하기 전, 시윤은 병실로 돌아가 짐을 정리했다. 그러다 이혼 합의서가 적힌 봉투를 보자 귓가에 석훈의 말이 맴돌았다.시윤은 다시 한번 이혼 합의서를 꺼내 확인했지만 사인은 하지 않았다. 전에는 조건이 너무 터무니없어 사인할 수 없다고 본인을 설득했지만, 솔직한 심정은 사인하고 싶지 않았다.왜냐하면 아직 정확한 답을 찾지 못했으니까.아직 직접 확인해 봐야 할 일이 남아 있으니까....퇴원 당일 양현숙은 도윤을 품에 안은 채 시윤을 데리러 왔다. 도윤은 시윤을 보자마자 입으로 옹알이를 해대며 짧은 다리를 마구 굴렀다.도윤의 새하얀 손을 꼭 잡고 얼굴에 갖다 댄 순간, 시윤의 얼굴에는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미소가 피어올랐다.도윤이 태어난 뒤로 빌라는 예전처럼 정갈하지 않고 곳곳에 젖병과 장난감이 널려 있었고, 베란다에는 침대 시트와 소독한 옷들이 널려 있었다.양현숙은 슴슴하고 담백한 음식을 위주로 준비하고 몸에 좋은 보신탕까지 끓여 식탁 위에 올려 놓았다.그러고는 시윤이 식사하는 걸 보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그걸 본 시윤은 이내 숟가락을 내려놓고 난감한 듯 말했다.“엄마,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제가 퇴원한 게 아니라 출옥한 줄 알겠어요.”양현숙은 시윤의 농담에 피식 웃으며 이내 눈물을 닦았다.“너도 참. 그래도 네가 웃으니까 나도 한시름 놨다. 지난 1달 동안 네가 고생하는 것만 보면 엄마가 얼마나...”말을 채 잇지 못하고 또 울먹이는 양현숙을 보자 시윤은 얼른 위로했다.“괜찮아요, 다 지난 일이에요.”“그래, 다 지났어.”식사하는 동안 양현숙은 도준의 소식을 몇 번이고 물어보려 했지만 결국은 다시 목구멍으로 삼키기를 반복했다.그도 그럴 게, 말을 꺼냈다가 겨우 회복한 시윤을 또 자극하기라도 할까 봐 두려웠으니.사실 지금의 시윤은 양현숙이 생각한 것만큼 나약하지 않다. 하지만 저와 도준이 어떻게 될지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기에 시윤도 도준의 얘기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시윤은 스스로 폭발 사고의 진실을 알아내고 나서 이혼
시윤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시영 언니한테 말했어요. 민씨 집안 쪽은 시영 언니가 알아서 전달할 테니 여기 쪽만 신경 쓰라던데요.”그 말에 양현숙은 헛웃음을 지었다.“그럼 다행이고.”하지만 봉투에 인장을 찍고 있던 시윤의 생각은 진작 딴 데로 샜다.시윤은 양현숙이 물어보는 게 민씨 집안 식구가 아니라 도준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지난 반년 동안 진태섭과 정은숙 부부는 그나마 선물이라도 보내왔지만 도준은 아무 소식도 없었으니까.일상적인 소식도 없을 뿐만 아니라 뉴스, 심지어 가십 기사에조차 도준에 관한 소식은 실리지 않았다....돌잔치 전날, 시윤은 잠을 설쳐 밤새도록 몸을 뒤척였다.심지어 본인이 대체 도준을 부르고 싶은지 아니면 부르기 싫은지조차 알지 못했다.그렇게 깊은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도윤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시윤은 소리를 듣자마자 달려가 벌떡 일어나 분유를 풀고는 맛나게 먹는 도윤을 보자 화가 나는 듯 배를 콕콕 찔러댔다.“이게 다 너 때문이야. 사건을 조사하러 가지도 못하고 네 아빠도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고.”도윤은 아직 복잡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여 그저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뿐이었다.그 천진한 모습을 보자 시윤은 또 이내 화가 사르르 풀려 도윤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됐어. 내가 낳았는데 어쩌겠어. 용서해야지.”...돌잔치 당일 현장은 매우 시끌벅적했다. 특히 이제는 짧은 거리를 걸을 수 있게 된 도윤의 귀여운 모습이 사라들의 이목을 끌었다.진태섭과 정은숙 부부는 호텔 청소부보다도 빨리 도착해 도윤의 사지만 몇백장을 찍어댔고, 시영은 시윤을 도와 손님들을 접대했고 수아는 윤영미와 함께 도윤과 장난을 쳐댔다.“여기 봐, 도윤아.”그리고 소혜는 카펫 위를 어렵게 걷는 도윤이 힘겨워 보여 부축하려고 다가갔다. 하지만 힘 조절을 잘못하는 바람에 도윤은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다행히 평소 잘 울지 않는 도윤은 넘어졌으면서도 눈만 깜빡이며 저를 넘어뜨린 소혜를 보더니 미안하다는 사과를 받아내자 그제야 만
도준을 설득하지 못한 시영은 결국 할 수 없이 연회장 안으로 돌아갔다.그러면서 문을 닫으면서 밖을 한 번 더 힐끗거렸다.사실 도준을 막고 있는 건 문이 아니라 시윤의 병이다.시윤이 고생하는 걸 원하지 않기는 도준은 시윤의 병이 발작하는 걸 더 두고 볼 리 없다.‘둘째 오빠도 이젠 점점 인간미가 느껴지네. 물론 형수 한정이지만. 어쩜 아들한테도 무뚝뚝할 수가 있지?’...진태섭과 정은숙 부부는 오랫동안 손주를 보지 못한 터라 서로 안으려고 투덕거리기까지 했다. 그러다 시윤이 아이에게 우유를 먹이러 가야 할 시간이 되자 그제야 놓아주었다.시윤이 도윤을 안고 복도로 나왔을 때, 시영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윤이 씨, 그쪽 해 등진 곳이라 도윤이 추워할지도 몰라요. 저쪽 휴게실로 가 봐요.”시윤은 별생각 없이 시영이 안내한 방향으로 걸어갔다.아까까지만 해도 배고프다고 찡얼대던 도윤은 휴게실에 도착하자 이상하게도 바로 울음을 멈췄다. 오히려 동그란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시윤은 안쪽을 보지 않고 시선을 오롯이 도윤에게 두고 있었다.“어딜 그렇게 보는 거야? 뭘 알고 보는 거야?”도윤은 시윤의 무시에 불만이라도 내비치는 듯 입을 뻐끔거리더니 갑자기 눈을 굴리며 한쪽을 가리켰다.“아- 야- 야-”도윤이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돌린 시윤은 다음 순간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반년 동안 소식도 없던 남자가 이 순간 그녀의 시선에 들어왔다.도준은 외투를 입지 않고 있었고, 얇은 셔츠만 입고 있었는데 가슴근육이 팽팽하게 드러난 데다 대충 걷어 올린 소매 아래로 핏줄이 튀어나온 팔이 훤히 보였다. 게다가 이 시각 도준은 팔짱을 낀 채로 벽에 기대 시윤을 보고 있었다.한참 뒤에야 반응한 시윤은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여...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요?”도준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그건 내가 물어야 할 것 같은데? 내 방엔 어떻게 들어왔어?”그제야 시윤은 방금 시영이 일부러 저를 도준이 있는 곳으로 안내
시윤은 벌써 아이의 엄마가 되었지만 여전히 도준의 장난기 섞인 말에 당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윽고 그게 억울하고 화가 났는지 삐진 듯 투덜댔다.“벌써 도준 씨를 잊었는데 어떻게 보고 싶을 수가 있어요?”도준은 몇 번 웃더니 시윤에게 바싹 다가갔다.“도윤이 엄마도 나 안 잊었는데, 도윤이가 어떻게 날 잊어? 그거 뭐였더라? 모전자전이란 말도 있잖아.”말로는 한 번도 도준을 이긴 적 없는 시윤은 아예 그를 무시했다.그때 도준이 도윤을 품에 안은 채로 시윤을 빤히 바라봤다.“아직도 약 먹고 있어?”시윤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이제 끊었어요. 나 쌤이 두 달 전에 이제 상태가 안정됐다고 하더라고요. 이제 먹을 필요 없어요.”사실 이 모든 걸 도준은 진작 석훈한테서 전해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시윤한테서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었다.그도 그럴 게, 시윤이 그렇게 미쳐 있는 모습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으니까.도준의 관심에 시윤도 예의상 반문했다.“요즘 잘 지내요? 소식도 없던데.”“응. 자기랑 우리 아들 위해 일하느라 바빠.”도준은 그룹 지분을 모두 시윤에게 넘겼기에 이 말도 어찌 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하지만 시윤은 그 말이 불편했는지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아직 이혼 서류에 사인도 안 하는데, 저를 위해 일한다고 할 순 없죠.”말을 마친 순간 공기가 이상하리만치 조용해져 시윤은 무의식적으로 도준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마침 그때, 도준의 뜨거운 눈빛과 마주치고 말았다.그제야 시윤은 방금 제가 한 말이 화해하려는 뉘앙스를 풍긴다는 걸 인지하고 바로 설명했다.“전 그런 뜻이 아니라...”“쉿.”도준은 손가락으로 입을 막으며 조용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나 지금 무척 기뻐. 자기가 설명하고 나면 나 기분 안 좋아질 수 있으니까 설명하지 마.”그 말에 시윤은 눈살을 찌푸렸다.“사람이 왜 이래요? 어떻게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 해요?”도준은 시윤의 성화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우리 아들 태어난 데 나도 한몫했잖아
시윤은 이번에 교훈을 삼았는지 빠른 속도로 손을 넣어 단번에 물건을 꺼내 들었다.하지만 손에 쥐어진 물건을 본 순간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이거 뭐예요?”시윤이 꺼낸 물건은 다름 아닌 작은 시계였다. 물론 정교한 디자인이긴 했지만 여주 여성스러워 도윤이 하기에는 조금 어색할 수 있었다.결국 그 선물에 시윤은 실망하고 말았다.‘아무리 도윤한테 감정이 별로 없다고 해도 그렇지, 그래도 본인 지식인데. 첫돌 생일 선물을 어쩜 이렇게 대충 고를 수 있지?’잔뜩 찌푸린 시윤의 표정만 봐도 그녀가 적잖게 화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윤의 괴상야릇한 목소리가 이내 들려왔다.“고마워요. 도윤이한테 어울리지 않는 것 빼고는 괜찮네요.”그 말에 도준은 피식 웃더니 조금도 미안한 기색 없이 대답했다.“응. 원래 도윤이 거 아니야.”“그럼 누구 건데요?”“자기 거.”시윤은 잠깐 어리둥절했다.“저요? 오늘 도윤이 생일인데.”“자기가 도윤이 낳은 날이기도 하잖아.”도윤은 시윤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도윤이는 선물 많이 받았는데 자기만 못 받았잖아.”왠지 모르겠지만 분명 특별할 것 없는 말이었지만 시윤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도윤이 아들이라 시윤은 당연히 아들한테서 선물을 뺏을 리는 없다. 하지만 이 특별한 날 선물 하나는 저한테 차려진다는 게 왠지 대접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시윤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자 도준은 유혹하듯 속삭였다.“열어 봐.”시윤은 고분고분 시계 뚜껑을 열었다. 시계 안쪽에 그들 세 식구의 사진이 찍혀 있었는데 복잡하지는 않았지만 생동감이 넘쳤다.도준은 도윤을 한 순으로 안아 들고 시윤의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이 시계는 도윤이가 태어나던 날 만들어진 거라 도윤이랑 동갑이야.”“정말요?”“응, 정말.”시계는 원래도 가치를 매길 수 없을 정도로 비싸지만 가격이 이런 특별한 의미보다 중요할 리는 없었다.사람은 물론 시간을 멈출 수는 없지만 기록할 수는 있다. 시윤도 도윤의 엄마가 된
도준의 허스키한 목소리에 시윤은 등골이 오싹해 피하는 것조차 잊었다.그동안 참아 온 도준은 코끝을 시윤의 몸에 대고 향기를 맡더니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려 했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시윤은 다급히 도준을 밀어냈다.“안 돼요. 저 아직 결정 내리지 않았어요.”입가에 있던 고기가 도망치자 도준은 아쉽다는 듯 혀끝으로 뺨을 꾹 밀며 욕망을 애써 억눌렀다.“그래, 결정할 때까지 기다릴게.”도준의 의외의 대답에 시윤은 놀랍기만 했다. 시윤의 인상 속에 도준은 항상 횡포하고 막무가내라 절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다.시윤은 의아한 듯 도준을 바라보며 속으로는 그가 무슨 여지를 남겨 두었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러자 도준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계속 나 그렇게 보면 유혹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그제야 고개를 숙인 시윤은 도윤을 안아오려고 팔을 내밀었다. 그제야 도윤이 벌써 잠들었다는 걸 발견하였다.잠이 든 도윤은 아기 천사처럼 보는 사람의 마음마저 따뜻하게 했다.그걸 본 시윤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짓더니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이리 줘요, 살살.”도준은 고분고분 도윤을 넘기자 시윤은 조심히 받아 안았다. 지난 1년 동안 도윤을 기르다 보니 이제는 아이 안는 자세가 제법 익숙해졌다. 등을 토닥여주고 아이가 깊은 잠에 빠지자 시윤은 도윤을 침대에 내려놓고 옆에 있는 담요로 주위를 둘러 작은 ‘둥지’를 만들어 주었다.그러고 나서 도윤에게 이불을 덮어주자 곧바로 뒤에서 도준이 시윤을 안았다.조금 높은 남자의 체온이 등 뒤에서 느껴지더니 익숙하고도 힘 있는 팔이 시윤의 허리를 감쌌다.익숙한 온기에 시윤은 머리털이 쭈뼛 곤두서 말까지 더듬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도준은 귀까지 빨개진 시윤을 보며 등 뒤에서 피식 웃더니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아들 보고 있어.”하지만 그걸 믿을 시윤이 아니었다.“아들 보는데 나는 왜 안고 그래요?”도준은 허리를 숙여 시윤에게 꼭 붙더니 입술로 시윤의 귀를 스치며 말했다.“도윤이 깰까 봐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