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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화

Author: 아리토끼
6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 서연후를 위해, 뚱이랑 돌이 앞장서서 환영회 술자리를 열어 줬다.

둘이 여기저기 전화 돌려 친구들을 불러 모으니, 13번 구역 구석구석에서 여덟 명쯤 되는 남자들이 뭘 한가득 들고 후다닥 몰려왔다.

예전에는 죄다 서연후의 뒤에 붙어서 사고만 치고 다니던 꼬맹이들이었는데, 지금은 하나같이 사람 구실은 하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선생님 단성현의 집 마당에 상 두 개를 붙여 길게 놓고, 고기랑 술을 잔뜩 올려 둘러앉았다.

뚱이 맥주를 들이키고는 투덜거렸다.

“아깝다, 진짜. 오늘 애들까지 다 모였으면 더 재밌었을 텐데. 대영이 놈까지 있었으면 완전 난리였지.”

“다들 잘 지내?”

서연후가 물었다.

돌은 고기 꼬치를 이로 훑어 떼어먹으면서 중얼중얼 말했다.

“잘 지내. 대영이 그놈은 몇 년 전에 10번 구역으로 일하러 갔어. 어디 자동차 공장인가 뭔가에서 일한다더라. 일이 좀 더럽고 힘들긴 한데, 돈은 꽤 주나 봐. 돈을 찔끔찔끔 모아서 장가갈 거라고 하던데, 진짜 웃기지 않냐. 평생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꼴 처음 본다니까!”

“내가 보기에는 남들 다 결혼해서 애 낳는 거 보고 갑자기 불안해진 거지 뭐!”

“뚱아, 돌아. 남 욕만 하지 말고 너희 꼴도 좀 봐라. 우리 중에 아직도 장가 안 간 놈이 너희 둘이랑 대영이 셋뿐이거든? 슬슬 좀 서둘러야 하는 거 아니냐?”

“치, 그게 뭐 어때서. 우리 넷은 빛이 나는 솔로라고. 알겠어?”

뚱이 서연후의 목을 팔로 끌어안았다.

“우리 연후 형도 아직 장가 안 갔잖아. 형도 안 급한데 우리가 뭘 급해. 안 그래, 연후 형?”

서연후는 잠깐 굳었다.

맥주잔을 쥔 손에 힘이 저도 모르게 들어갔다. 그러고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그러네.”

“너희가 연후 형이랑 어떻게 비교가 되냐. 형이 마음만 먹으면 상대 고르는 건 너희보다 백 배는 쉽겠다, 진짜! 너희 둘은 하나는 찐빵, 하나는 개구리잖아, 개구리. 하하하!”

“꺼져! 죽을래?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서연후는 조용히 눈앞에 앉아 있는 익숙한 얼굴들을 바라봤다. 예전 그대로이면서도 어딘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예전처럼 시끄럽고 한곳에 모이면 금세 하늘이 떠나가라 떠들어댔다. 그런데 눈빛이며 얼굴이 모두 철이 들었다. 애들이 아니라 어엿한 어른이 되어 있었다.

6년이라는 시간이란 정말 너무 길었다.

“선생님! 빨리 나와서 같이 드세요. 뭐 하신다고 그렇게 바쁘게 돌아다니세요?”

돌이 집 안을 향해 소리쳤다.

“안 나오면 뚱이 이놈이 고기 다 먹어버릴 거예요!”

“간다.”

단성현이 접시 두 개를 들고 집 안에서 나왔다.

한 접시는 갓 볶은 채소, 다른 한 접시는 잘라 둔 과일이었다.

그는 접시를 상 위에 내려놓고, 서연후의 옆자리에 비워진 자리를 보고는 자연스럽게 앉았다.

“너희 고기만 먹지 말고 채소도 좀 먹어.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술 섞어 마시지 말라고 했지? 속 뒤집어지면 집에는 어떻게 가려고 그래.”

단성현은 원래부터 남 걱정을 달고 사는 사람이었다. 상에 앉자마자 이래라저래라 잔소리가 줄줄 흘러나왔다.

“알았어요, 알았어.”

마당에 둘러앉은 몇 명은 이미 익숙한지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들 대부분은 다 그의 잔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서연후도 그중 하나였다.

단성현은 그들의 선생님이었다. 물론 서연후에게는 그 이상의 존재였다.

거리에서 떠돌며 집도 없이 살던 어린 시절, 서연후를 거둬 먹이고 입혀 준 사람이 단성현이었다.

그는 글을 가르쳐 주고, 세상을 읽는 법을 알려줬다. 아버지 같기도 하고, 형 같기도 한 사람이었다. 세상에서 유일한 가족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잔소리를 한 바퀴 돌고 난 뒤, 단성현은 어디선가 씻어 둔 딸기가 들어 있는 작은 상자를 꺼내 서연후의 앞으로 밀어 두었다.

“너 먹으려고 산 거야. 먹어 봐.”

서연후가 딸기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걸 보자 단성현이 한 번 더 말했다.

“왜 안 먹어. 달더라.”

옆에서 그걸 지켜보던 뚱이 씩 웃으며 나섰다.

“선생님 진짜 편애하신다니까요. 왜 우리한테는 딸기 안 주세요?”

옆에서 누가 바로 거들었다.

“그러니까요! 우리는 겨우 참외랑 포도만 주는 거예요?”

입으로는 뭐라고 투덜대면서도, 아무도 서연후 앞에 놓인 딸기에 손대지는 않았다.

13번 구역에서는 딸기가 무척 비쌌다. 그만큼 또 아주 달았다.

예전에 설날만 되면 단성현은 새해니까 딱 한 번만 사는 거라고 말하며 딸기 한 상자를 사 와, 자기 집에 모여 있는 새끼 새들 같은 애들에게 한 알씩 나눠 주고는 했다.

서연후는 딸기를 무척 좋아했다. 한 알만 입에 넣어도 아주 오래오래 맛을 곱씹었다.

6년 전, 그가 집을 떠나던 날에도 단성현은 딸기 한 상자를 사 주었다.

알이 크고 탐스러운 딸기들이 작은 산처럼 수북이 쌓여 있었는데, 서연후는 그 상자에서 단 한 알도 입에 넣어 보지 못한 채 그대로 잃어버렸다.

억지로 눌러 뭉갠 그 아쉬움이 그를 6년 내내 괴롭혔다. 그 짐을 이제야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연후는 딸기 하나를 집어 한입 베어 물었다. 기억 속과 똑같은 단맛이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한 알 한 알 천천히, 상자 안의 딸기를 끝까지 다 먹어 치웠다. 단성현은 그의 옆에 앉아 웃으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낡고 허름하며 시끄럽기까지 한 이 마당 안에서, 서연후는 잃어버린 어떤 것을 겨우 다시 되찾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목 안이 갑자기 뭔가에 막힌 것처럼 답답해졌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다가 눈가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는 울음이 터지기 직전에 푹 하고 단성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어릴 때처럼 칭얼댔다.

“아빠, 고마워요.”

“헛소리하지 마.”

단성현이 말했다.

“그럼 엄마.”

그가 한 마디를 내뱉자 아이들은 전부 따라 하기 시작했다. ‘엄마’와 ‘아빠’를 번갈아 부르며 단성현을 놀려대니 금세 정신이 하나도 없어졌다.

단성현은 하는 수 없다는 듯 서연후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 튕겼다.

“봐. 너만 오면 얘들도 이 모양이다.”

술이 세 바퀴쯤 돌자 다들 얼추 취기가 올랐다.

단성현 마당에는 쓰러지다시피 드러누운 사람이 널브러졌다.

단성현은 이 꼴을 보니 오늘은 전부 집에 보내지 못하겠다고 판단하고, 담요를 들고나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덮어 주기 시작했다.

서연후도 꽤 많이 마셨다. 게다가 돌아오는 길에 제대로 쉬지도 못한 탓에, 술기운이 확 올라오자 마침내 상 위에 고개를 떨구고 잠들어 버렸다.

단성현이 그의 뒤로 돌아가, 뭐라도 하나 걸쳐 주려고 옷자락을 들추다 말고 동작이 멈췄다. 입가에 떠 있던 웃음기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는 서연후의 옷깃 뒤쪽에서 작은 네모 모서리 하나가 살짝 튀어나와 있는 걸 보았다.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이 순식간에 그의 가슴팍을 기어올랐다.

떨리는 손끝으로, 단성현은 살며시 서연후의 옷깃을 젖혔다. 그리고 그 안을 본 순간 눈이 크게 뜨였다.

서연후의 목덜미에는 얇은 억제제가 붙어 있었다. 그건 오메가만 쓰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서연후는, 서연후는 분명...

서연후는 깊이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목덜미에 닿는 낯선 촉감을 느끼는 순간, 뼛속 깊이 새겨진 그 통증이 다시 한꺼번에 밀려 들어왔다.

그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손을 번쩍 들어 자신의 목덜미를 꽉 막고, 벌떡 일어나 버렸다. 표정에는 전혀 숨기지 못한 공포와 경악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당장이라도 무슨 일을 당할 것처럼 예민하게 경계하는 얼굴이었다. 마치 이런 일을 이미 수없이 겪어 온 사람처럼, 몸이 먼저 움직인 완벽한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단성현의 놀란 눈과 시선이 맞닿고서야, 서연후는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이미 돌아왔다. 그 모든 악몽은 이제 과거였다.

하지만 단성현이 알아버렸다.

집에 돌아온 뒤 서연후가 일부러 목이 가려지는 옷으로 갈아입은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억제제를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특히 단성현에게만큼은.

“...”

한참이 지나서야 단성현은 서연후의 반응에서 뭔가 이상함을 제대로 느꼈다. 입술이 몇 번 들썩이다 겨우 입이 떨어졌다.

“무슨 일이야? 연후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너 왜... 이런 걸...”

서연후는 이를 꽉 문 채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단성현은 그의 축 늘어진 왼손을 흘깃 보다가, 그 손가락에서 뭔가를 보았다. 순간 귀에서 웅 하는 소리가 울렸다.

서연후의 왼손 약지 밑에는 주위 피부보다 살짝 옅은 피부 자국이 있었다. 오래도록 반지를 끼고 있던 사람에게만 남는 반지 자국이었다.

서연후는 조용히 손을 뒤로 빼 허리 뒤로 숨겼다.

단성현의 목덜미가 파르르 떨렸다. 머릿속에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추측이 번개처럼 튀었다.

“너... 너 그때 6년 동안 수도에서 일했다는 거, 설마 거짓말한 거야?”

서연후는 대답하지 않았다. 눈을 피하면서 시선조차 맞추지 못했다. 그의 표정만으로도 단성현은 그가 사실상 인정했다는 걸 깨달았다.

단성현은 숨이 차오르며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를 더 물으려다가 마당 한가운데 널브러져 코 고는 애들을 보고는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여기는 이런 이야기를 할 장소가 아니었다.

그는 허둥지둥 서연후를 끌고 마당 담장 쪽으로 갔다. 이곳이라면 둘의 대화를 다른 아무도 듣지 못할 것이다.

“솔직히 말해.”

그는 서연후의 어깨를 꽉 붙잡고 다급하게 말했다.

“단현시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대답해, 연후야. 제발 나한테 말해 줘. 나를 평생 이렇게 불안하게 만들 셈이야? ...서연후!”

서연후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단성현의 거듭된 재촉 끝에 결국 마음을 다잡은 것이다.

서연후는 돌의자에 걸터앉아 고개를 떨구고 목뒤의 억제제를 뜯어냈다.

그의 목덜미가 고스란히 단성현의 눈에 드러났다.

단성현은 그걸 똑똑히 보는 순간 동공이 조여드는 걸 느꼈다.

원래 매끈했던 목덜미에는 작게 부풀어 오른 붉은 자국이 도드라져 있었다.

거기에는 원래 알파와 오메가에게만 생기는 페로몬 샘이 자라 있었고, 그 위에는 여러 줄의 서로 겹쳐 있는 깊은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문신처럼 패인 그 흔적들은, 물어뜯은 사람이 얼마나 힘을 줬는지 적나라하게 말해 주고 있었다.

동일한 자리를 집요할 정도로 반복해서, 또 반복해서 물어뜯은 흔적이었다. 마치 살갗 밑에 박힌 이 페로몬 샘을 통째로 씹어 뽑아 버리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단성현의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그는 견디지 못하고 서연후 맞은편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둘은 그대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서연후는 말없이 다시 억제제를 꺼내 목덜미 위에 붙였다.

밤바람 사이로 멀리 논바닥에서 개구리 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길가의 나뭇잎도 사락사락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귀를 긁는 매미 소리가 섞여 들어와 단성현의 이미 팽팽하게 당겨진 신경을 계속 잡아당겼다.

길게 이어진 침묵 끝에, 단성현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누가 한 짓이냐.”

“...”

서연후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지 않았다.

단성현은 두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숨이 쥐어짜듯이 겨우 나왔다.

페로몬 샘이 없는 베타는 아무리 물어뜯어도 각인될 일이 없다. 상대의 페로몬에도 휘둘리지 않고, 알파나 오메가로 변할 수도 없다.

하지만 서연후는 평범한 베타와는 달랐다.

서연후의 목덜미 안에는 오래전에 말라버린 페로몬 샘이 하나 있었다. 어릴 적 몸 안의 페로몬 샘이 자라나기도 전에, 그 샘은 이미 시들어 버렸다.

뿌리째 망가져 죽어 버린 씨앗이라고 볼 수 있었다. 아무리 물을 주고, 아무리 거름을 뿌려도, 다시 싹이 돋아날 가능성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그래서일까.

목덜미에 이빨 자국을 남긴 사람이, 상처를 저 정도로 깊게 파놨다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그 사람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여러 번 실패하고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채. 미친 듯이 같은 자리를 물어뜯어 결국 자신의 뜻대로 만들어 버렸을 것이다.

이건 웬만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짓이 아니었다.

베타였던 서연후를 강제로 오메가로 끌어내린 사람. 서연후를 이 꼴로 만든 그 알파는 최소한 S급 알파일 것이다. 아니면 그보다 더 잔인한, 어디에도 알려지지 않은 방법을 더했을지도 모른다.

단현시가 그렇게 큰데, 그 안에 알파가 얼마나 많은지 단성현도 일일이 알 수 없었다. 누군지 알고 싶어도 서연후가 입을 열지 않는 한, 이건 평생 본인 가슴에 묻은 채 끝나 버릴 것이다.

그 생각에 닿자 단성현의 가슴이 쿡쿡 쑤셨다.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 채, 6년 동안이나 서연후를 그 지옥 같은 곳에 혼자 내버려둔 셈이었다.

단성현은 그를 꼭 끌어안았다. 그의 손이 한 번 목덜미 쪽으로 올라갔다가 닿기도 전에 힘없이 내려왔다. 섣불리 건드릴 수가 없었다.

“돌아온 건, 그 일 때문이야?”

서연후는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저었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어요. 그건... 그중 하나고요.”

그는 말했다.

“선생님,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요.”

단성현의 가슴은 칼로 도려낸 듯 아팠다.

그는 천천히 서연후의 등을 토닥이며 달랬다.

“그래. 알았다.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분노가 섞인 자책이 마음을 긁어냈다. 자신도 베타고, 마당에 널브러져 자는 애들도 죄다 베타였다.

페로몬 냄새를 맡을 수 없으니, 서연후가 돌아온 순간부터 이미 달라진 걸 눈치채지 못했다.

단성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사람, 이미 널 각인했니?”

만약 서연후가 각인까지 당했다면, 그는 평생 그 알파에게 묶인 채 살아야 한다. 자신을 상처 입힌 사람 곁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건 서연후에게 치욕적인 일이었다. 그 사람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는 걸 보면 그건 거의 확실했다.

단성현은 그 사람에게서 서연후를 빼내야 했다.

서연후가 원한다면 각인을 지우는 수술이라도 알아볼 생각이었다. 돈이 얼마나 들든, 어떻게든 마련할 것이다. 누구도 서연후의 자유를 가둘 수 없게.

그런데 서연후는 예상 밖의 말을 내뱉었다.

“그 사람은 저를 각인할 수 없어요.”

“...뭐?”

“저랑 그 사람 매칭도, 겨우 43.2%거든요.”

서연후는 웃었다.

어딘가 통쾌하기까지 한 어조였다.

“완전히 서로를 밀어내는 두 개의 페로몬이에요.”

그는 낮게 말했다.

“그 사람은 제 페로몬 냄새 맡기만 해도 죽을 맛일걸요.”

서연후는 단성현의 옷자락 끝을 부여잡았다. 손가락이 파고들 정도로 꼭 쥐었다.

눈빛 속에는 오랫동안 눌러 왔던 살기와 증오가 가득했다.

“제가 그런 사람을 다시 받아들일 것 같아요? 그 사람한테 각인 당하게 내버려둘 것 같냐고요. 이제는 그 사람 냄새만 맡아도 역겨워요.”

그토록 공들여 집착하던 모든 짓이 알고 보니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었다.

지태경이 그동안 한 짓은 결국 자신만 기만한 집착에 불과했다.

서연후는 단성현에게 거짓말을 한 게 맞다. 그가 단현시에서 보낸 6년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결혼’을 해서였다.

6년 전, 그는 지태경과 함께 꽃도 없고, 박수도 없고, 햇빛도 허락되지 않는 결혼식을 올렸다. 그게 과연 결혼식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너무 길고 복잡했다.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조차 막막할 만큼.

한때는 지금처럼 망가진 관계가 아니었다. 서로 조용히 끝낼 수 있었다면, 적어도 예쁘게 마무리된 추억 하나쯤은 남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연후에게 너무도 소중했던 그 추억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태경 혼자 짠 ‘거짓말’이었다.

잠깐의 행복에 취해 눈이 멀고,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빠져나오지 못한 건 서연후 자신이었다.

그는 결국, 그 사람 손바닥 위에서 빙빙 돌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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