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월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미세한 곡선을 그렸다.“민아 씨... 난 민아 씨가 그들의 희생품이 되는 걸 원하지 않아요. 민아 씨는 정말 착하고 귀한 사람이에요. 내 말 들어요... 성세 그룹을 떠나야 해요. 기성은이 놓아주지 않는다면 내가 전연우에게 말해볼게요. 기성은보단... 신이랑 씨가 민아 씨와 더 잘 어울려요.”소민아는 순진한 사람이다. 장소월 역시 직장 내 암투를 경험한 적은 없지만 소민아는 그들이 권력 다툼을 하는 데에 쓰이는 도구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기성은과 소민아의 스캔들이 전해진 그 순간부터 전연우와 송시아의 싸움이 정식으로 시작된 것이다.지금 상황에서 소민아에게 가장 최선의 선택은 바로 떠나는 것이다.장소월은 그녀에게 연고를 다 발라준 뒤 소염제를 손에 올려주었다.“몸 관리 잘해야 해요.”장소월의 시야에 머지않은 곳에서 달려오고 있는 벤틀리가 들어왔다.그녀는 그렇게 전연우와 함께 떠났다.소민아는 줄곧 그녀가 했던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장소월이 뒷좌석에 올라타자 전연우는 들고 있던 담요를 그녀 다리에 덮어주었다.“아무한테나 다 잘해주면서 나한테만 쌀쌀맞지.”장소월이 차갑게 말했다.“네 말 한마디면 곧이곧대로 복종할 사람 줄 섰잖아.”전연우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왜 또 화가 난 거야. 하루 24시간 내가 네 옆에 있잖아. 그거로도 부족해?”장소월은 가감 없이 솔직하게 그에게 말했다.“난 민아 씨가 너와 송시아 두 사람의 싸움에 피해받는 희생품이 되게 하고 싶지 않아.”전연우가 어두워진 눈동자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장소월도 똑바로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송시아의 목적이 뭔지 너도 알고 있잖아. 널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이야말로 성세 그룹 안주인에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고 싶어 해. 너희 두 사람이 피 터지는 싸움 끝에 갈라섰을 때 영향받는 건 너희뿐만이 아니야! 지금의 넌 예전과는 달라, 전연우...”“수많은 사람들이 성세 그룹에서 일하며 가족들을 지키고 있어.
사무실엔 아무도 없었다. 하여 그녀는 위층 회의실로 뛰어 올라갔다. 회사 직원들 모두가 소란을 떨고 있는 그녀를 보았지만 아무도 감히 뭐라고는 하지 못했다. 성세 그룹 안주인이라는 뒷배를 갖고 있는 그녀를 누가 건드리겠는가.저번 사모님이 직접 비서실로 걸음해 기 비서를 호되게 꾸짖었다는 소문이 회사에 자자했다. 대표님이 수십 년을 함께 해온 비서를 해고한다는 말도 함께 돌고 있었다.이후 소문은 점점 더 부풀어 올라 소민아가 강제로 결혼한다고까지 했다.소민아는 99층에서 마침 대표 사무실에서 나오는 기성은과 마주쳤다. 기성은은 서류를 들고 그녀를 못 본 척 지나가 버렸다. 소민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날 무시해?’소민아는 돌연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기성은의 넥타이를 움켜쥐었다.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동료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도 않은 채 말이다.기성은은 그녀가 회사에서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행동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조용한 복도, 센서등이 켜졌다가 몇 초 뒤 다시 꺼졌다. 비상구 표지판만 희미한 초록색 불빛을 내뿜는 어둠 속에서 소민아는 고개를 들고 빛나는 남자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기성은의 경고 어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요?”소민아는 차가운 그 목소리를 들으니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기성은 씨, 나 이제 다 알겠어요... 당신이 내가 뭘 하길 원하는지 알겠다고요. 아니, 아직은 모른다고 해도 앞으로는 분명 알게 되겠죠. 지금은 때가 아니라면요.”“이거 놔요!”기성은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일갈했다.소민아는 바로 손을 내렸다. 그의 목소리에 꺼졌던 센서등이 다시 켜졌고 기성은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었다. 그의 눈동자는 조금의 감정도 없는 기계 사람처럼 텅 비어 있었다. 정말...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던 말인가?“그럼 이렇게 하죠! 제가 회사에 계속 남아서 당신들이 하라는 대로 할게요.”소민아 역시 자신은 이용당하는 도구에 적합한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로울 것 하나 없는 이
소민아는 어쩔 수 없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길명자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아주머니, 이런 우연이... 여기에 계셨네요!”소민아와 기성은의 일은 순식간에 일파만파 퍼져버렸다.소민아가 사무실에 돌아와 보니 책상 위에 간식과 선물들이 가득 놓여 있었다. 그녀는 책상 위의 사원증을 목에 걸었다. 등 뒤에서 전해져오는 자신을 향한 수많은 시선을 느낀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다들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소민아는 당연히 이 선물들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 돈을 쓴 것도 아닌 공짜 선물이니 말이다.오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선 아무도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소민아에게 대표님의 와이프라는 거대한 뒷배가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대표님이 사모님을 얼마나 아끼시는지는 회사 전체를 통틀어 모르는 사람이 없다.회사 직원들은 처음엔 그저 꽃뱀이 조강지처를 밀어내고 안주인 자리를 꿰찼다고 생각해 뒤에서 장소월을 욕하고 조롱했었다. 대표님은 그 사실을 알고는 소문을 퍼뜨린 사람들을 모조리 해고해버렸다. 그들이 얼마나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고 있는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말이다.대표님은 사모님에 관한 일에만 대면하면 정서가 불안정해지고 이성을 잃는다.남천 그룹 옛직원들이 회사에 들어와 알려줘서야 그들은 깨달았다. 장소월은 대표님과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라온 죽마고우라는 걸... 또 전연우는 장소월의 아버지가 입양한 양자라는 걸...두 사람에게 이토록 깊은 역사가 있다는 걸 알았으니... 제아무리 배짱 있는 사람이라도 혀를 함부로 놀릴 수는 없다.또한... 그들은 대표님이 장소월을 얻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애쓰셨는지도 알고 있다. 대표님이 어쩔 수 없이 인씨 가문 딸과 결혼했을 때 장소월은 괴로워 서울을 떠나 4년 동안이나 실종된 상태로 지냈다. 그녀가 다시 돌아오고 나서야 두 사람 사이는 겨우 회복되었다.인시윤과 장소월을 대하는 전연우의 태도는 정말이지 비교할 가치조차 없다. 대표님은 정말 진심을 다해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오늘 아침 6시
은경애는 그릇을 들고 의문스러운 얼굴로 계단을 향해 걸어가는 장소월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왜 얼굴색이 저토록 어두워진단 말인가!그 날짜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계단에 발을 내디딘 순간, 등 뒤에서 돌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결혼식장 마음에 드는지 봐봐.”장소월은 왼손으로 난간을 꽉 잡았다. 너무 힘준 나머지 곱게 다듬은 손톱이 손바닥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마음대로 해.”말을 마친 그녀는 한 걸음 한 걸음 맥없이 올라갔다. 몸에 남아있는 힘을 모두 쥐어짜서야 간신히 위층까지 도착했다.결혼식장 인테리어를 선택한 뒤 전연우가 뒤돌아 그녀를 쳐다보았다.매니저가 말했다.“대표님, 걱정 마세요. 사모님께선 절대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꽃은 반드시 아이보리색 장미로 준비하겠습니다.”장소월은 화실에 들어가 또다시 안에서 잠가 버리고는 정신을 잃은 듯 멍하니 의자에 앉아있었다.전연우는 계단을 오를 때 이미 그녀가 화실에 있을 거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그가 들어가려 문고리를 잡아당겼지만, 문을 열리지 않았다.전연우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소월이한테 뭐라고 말한 거예요?”은경애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저는 별말 안 했어요! 그냥 결혼식 날짜가 2월 14일로 정해졌다고 말했을 뿐인데... 아가씨 얼굴이 바로 어두워졌어요.”그 눈빛은 마치 누군가의 사망 소식이라도 들은 듯 서글펐다.“열쇠 가져와요.”은경애는 재빨리 비상용 열쇠를 가져왔다. 전연우가 문을 열어보니 눈앞엔 평소와 똑같은 듯한 모습의 장소월이 앉아있었다. 하지만 그림판에 떨어지는 붓의 움직임을 보니 한눈에 그녀의 불편한 마음을 알 수 있었다.전연우가 다가갔지만, 장소월은 자신의 세계에 빠져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전연우가 허리를 굽히고 팔을 뻗어 붓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아까... 무슨 생각 했어?”“다음 달로 잡았다는 그 결혼식 날짜... 내 친구 기일이야.”“...”왜 그에게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전생의 2월 14일이 그와 송시아의 결혼
장소월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그럼 그날로 해.”‘전연우... 내 기일 날 모든 것을 완전히 끝내줄게.’오후 여섯 시, 퇴근까지 아직 30분이 남았다.소민아는 얼굴에 난 상처를 만지작거렸다. 소피아도 참 독한 사람이다. 하마터면 그녀의 예쁜 얼굴을 완전히 망가뜨릴 뻔하지 않았는가.백혜진이 부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민아 씨, 이 약 정말 사모님께서 사준 거예요?”소민아가 득의양양한 얼굴로 말했다.“당연하죠. 소월 언니가 얼굴에 연고도 발라줬어요. 그건 왜 물어요? 그냥 약일 뿐이잖아요.”백혜진이 코에 걸쳐있는 안경을 밀어 올리고는 조심스레 가까이 다가갔다.“사모님이 민아 씨 편을 들어줄 때 직원들의 후회막심한 얼굴을 민아 씨가 봤어야 해요. 민아 씨한테 그렇게 든든한 지원군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거예요. 참, 민아 씨, 물어볼 게 하나 더 있는데...”“뭔데요? 말해요.”백혜진이 물었다.“대표님이 정말 사모님을 무서워하는 거 맞아요? 회사 모든 일은 대표님 뜻대로 결정하시잖아요. 오늘 다른 비서님에게 들었는데 인사팀에서 민아 씨한테 내리려던 처벌 사모님께서 다 막아주셨대요. 하지만 소피아 씨는 아니에요. 회사에서 소란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경고 처분을 받았어요. 이번 달 보너스도 취소됐고요.”“그리고 작년에 갓 들어온 인턴들 보너스가 500만 원 정도 되잖아요. 예전 남천 그룹에 있다가 우리 회사로 넘어온 직원들은 듣기론 3000만 원도 넘는다고 하더라고요. 기술팀 고 사원은 작년에 차도 한 대 뽑았대요. 그리고... 남천 그룹 직원 복지도 저희보다 훨씬 더 좋은 것 같아요.”“남천 그룹, 성세 그룹 모두 대표님이 관리하는 회사인데 그쪽 연봉이 우리보다 다섯 배는 더 많아요. 지금 들어갈래야 들어갈 수도 없죠.”“대체 그 이유가 뭐예요?”소민아는 어리둥절해졌다.“그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그녀도 조용히 백혜진에게 조금 알려주었다.“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말아요. 소월 언니와 대표님의 관계는 조금 특별해
회사 모든 부문에서 손을 잡고 서로 은애하는 한 쌍의 부부의 모습을 만들어내고 있었다.더욱 무서운 건 강씨 저택이 경매에 나온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이제 인터넷에선 강씨 가문에 관한 소식은 좀처럼 찾아볼 수가 없다.예전 강씨 가문은 그야말로 진정한 명문가 집안이었다. 서울에서 뿌리박고 몇백 년을 강림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애석하게도 강씨 가문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다.소민아는 늘 그게 아쉬웠다...그녀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생각하고 있었다. 강씨 가문이 무너진 것과... 전연우 사이엔 연관이 있을 거라고.몇 명의 직원들이 소민아에게 사과하기 위해 물건을 들고 다가왔다. 디저트와 액세서리, 심지어 버블티까지 있었다.소민아는 늘 그랬듯 사양 없이 모두 받았다.소민아는 버블티를 마시며 바깥에서 사무실로 들어오고 있는 기성은을 쳐다보았다. 보아하니 갓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것 같았다.소민아가 일어선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 고정되었다. 소민아는 버블티 한 잔을 들고 바로 기성은의 사무실에 들어갔다.기성은이 말했다.“아직 처분 결정이 내려오지 않았어요. 와서 날 꼬드기면 해결될 것 같아요?”소민아가 버블티를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꼬드기다니요. 비서님에게 맞춰 연기하는 거잖아요! 회사 모든 사람들이 우리 사이를 알았는데 여자친구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은 해야죠.”“언제 퇴근해요? 같이 나가죠! 남자친구분!”기성은은 메일을 열어 고위급 임원이 보내온 재무 보고서를 살펴보며 그녀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가져가요. 난 이런 거 안 마셔요. 퇴근은 알아서 해요. 나한텐 아무 영향 없으니까.”소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그럼 저 먼저 갈게요. 마침 볼 일도 있고요.”사무실에서 나가니 퇴근 시간까지 2분밖에 남지 않았다. 그녀는 책상 위 물건들을 가방에 정리해 넣었다.그녀가 사무실에서 나서려는 순간...신이랑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여섯 시 반에 촬영이 있는데 찾지 못
촬영팀 직원들은 8층에서 바삐 돌아치고 있었다. 소민아와 신이랑이 올라갔을 때 그들은 이미 세트 준비를 마치고 그들이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었다.신이랑이 그녀 얼굴 상처를 가리켰다.“얼굴이 왜...”소민아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강아지가 할퀸 거예요. 걱정할 필요 없어요.”누군가 카메라를 들고 와 그들의 대화를 끊었다.“민아 씨, 대단해요. 기 비서님과 사귄다면서요. 역시 민아 씨가 손이 빨라요. 더군다나 민아 씨한테는 든든한 뒷배도 있잖아요. 그거 알아요? 마케팅팀 팀장이 두 사람이 사귄다는 소식을 듣고 밤새 술을 퍼마셨다는 거. 취해서 야밤에 기 비서님한테 전화했다가 오늘 아침 된통 혼났어요. 아직도 마음 아파하고 있어요.”평소 핸드폰을 잘 갖고 나가지도 않는 기성은이 지금은 고개를 숙이고 문자를 보내고 있다고 한다.소민아가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저희 기 비서님이 절 너무 좋아해서 그런 걸 어쩌겠어요. 그리고 기 비서님 성격을 감당할 수 있는 건 저밖에 없어요. 다른 사람이 절대 끼어들 수 없죠.”촬영팀 책임자가 신이랑에게 말했다.“작가님, 조금 기다리셔야 할 것 같아요.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 여우림 씨와 상의해야 해서요.”“저희가 두 분을 위해 휴게실을 마련했습니다. 안에 과일과 간식들도 있어요. 곧 준비가 될 거예요.”신이랑이 고개를 끄덕였다.“네.”소민아는 핸드폰으로 회사 어플에 접속해 출근 도장을 찍었다. 이것도 야근에 속하니 말이다.그녀는 신이랑과 함께 휴게실에 들어갔다. 정성스럽게 준비된 체리 등 과일을 보니 소민아는 감동에 눈물까지 나올 것 같았다.그녀가 몰래 체리 한 알 입에 넣었다.“이랑 씨, 그 편집장님은 오늘 왜 함께 오지 않은 거예요? 다행히 제가 퇴근하기 전에 만났으니 망정이니 아니면 어쩔 뻔했어요.”“오늘 무슨 촬영해요?”신이랑이 고개를 저었다.“기다려봐요.”소민아가 체리를 그에게 건네주었다.“먹을래요?”신이랑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민아 씨가 다 먹어요.”소
여우림의 눈에 불편함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들고 있던 서류를 신이랑에게 건넸다.“일단 이 구절들 외워두세요. 촬영할 때 필요할 거예요.”소민아는 과일을 먹으며 여우림이 신이랑의 옷을 정리해주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촬영 시작하면 긴장하지 말아요. 제가 옆에 있으니까 문제 있으면 수시로 얘기하고요.”“그래요.”신이랑은 고개를 숙이고 자료를 읽었다.“먼저 옷 갈아입어요.”신이랑이 탈의실에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간 뒤, 소민아가 고개를 돌려보니 몇 명의 직원이 더 와있었다.“소민아 씨, 촬영팀 일도 하는 거예요?”소민아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아니에요! 퇴근하는 길에 궁금해서 와본 거예요.”여우림은 입을 다문 채 팔짱을 끼고 탈의실 쪽을 지켜보다가 잠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랑 씨가 민아 씨와 있었던 일 말해줬어요. 두 사람 선봤다면서요.”“예전엔 항상 소개팅을 원하지 않아서 제가 대신 거절했었거든요.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달랐어요. 민아 씨가 이랑 씨 어머니 친구 딸이라서요.”“지금까지 이랑 씨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늘 가장 처음으로 절 찾아 털어놓았어요. 이랑 씨가 민아 씨한테 많은 도움을 줄 테니까 민아 씨도 계속 노력하세요. 이번 일이 잘 성사되면 집에서 평생 놀고먹어도 될 거예요.”소민아는 고개를 숙이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꽤 긴 시간 비서로 일해온 경력이 있기 때문에 여우림의 행동과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똑똑히 알 수 있었다.조롱과 비난이 은은하게 담겨있는 말이었다. 회사가 아니었다면 일찌감치 욕설을 퍼부었을 것이다.“여우림 씨, 자신의 위치를 명확히 하세요. 우림 씨는 이랑 씨의 편집장일 뿐, 집사가 아니에요. 저와 이랑 씨의 관계가 어떻든, 발전할 희망이 있든 없든, 우림 씨는 왈가왈부할 자격 없어요. 우림 씨도 이제 서른 살이 훌쩍 넘은 어른이잖아요. 저희 젊은 사람들의 일엔 자꾸 관심 둘 필요 없어요.”소민아는 그녀에게 눈을 까뒤집어 보이고는 아예 체리 접시를 들고 자리를 옮겨버렸다.“
배가 고픈 데다 아기들이 발길질까지 하니 더욱 아팠다. “아가들아, 제발 차지 마. 규영 언니랑 미진 언니가 곧 맛있는 거 가져다줄 거야.” 그녀가 배를 쓰다듬으며 아이들을 달랬다. 규영과 미진은 그녀의 애처로운 눈빛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뱃속 두 녀석들이 워낙 시끄럽게 움직이고 있으니 더는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알았어요, 아가씨. 간단히 드실 걸 가져다드릴게요. 여기 앉아서 절대 움직이지 마세요.” 그들은 걱정되는 마음에 거듭 당부했다. 소현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여기 이렇게 많은 언니들이 지켜보고 있잖아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절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게요.” 규영과 미진은 사람들에게 다시 신신당부한 뒤에야 먹을 것을 가지러 자리를 떴다. 지난번 일 이후로 다른 사람은 믿을 수 없게 되어 소현아의 음식은 반드시 그들이 직접 준비해야 했다.소현아는 혼자 소파에 앉아서 작게 아기들과 이야기했다. “아가들아, 소월 이모가 전연우 그 나쁜 놈한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내 전화를 왜 안 받은 거지?” “나 소월이가 너무 걱정돼. 근데 너희가 너무 무거워서 몰래 도망갈 수도 없어.” 그녀에게 돌아오는 답은 점점 잦아드는 태동뿐이었다. 소현아는 아기들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못마땅한 듯 입을 삐죽거렸다. 누군가 문을 열었는지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었다. 얇은 연노랑 잠옷만 입고 있던 소현아는 추위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곧이어 도우미들의 공손한 인사 소리가 들렸다. “효연 아가씨.” 천효연은 거만한 눈빛으로 그들을 훑어 보고는 곧장 위층으로 향했다. “여기 뒀던 내 꽃병은 어디 갔어?” 계단 모퉁이에 있던 꽃병이 사라진 걸 발견한 천효연이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현아 아가씨가 다치실까 봐 잠시 장식품들을 다 치웠습니다.” 소현아?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천효연의 눈동자에 냉기가 스쳤다. “그 바보는 지훈 씨가 방에 가둬놨잖아?” 도우미
엄마와 통화를 마친 뒤, 소현아는 장소월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전연우 그 나쁜 놈이 소월이를 괴롭히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혹시 소월이는 강용 소식을 알지 않을까... 소현아는 강지훈이 강용의 행방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장소월의 당부를 기억하며 감히 묻지 못했다. 통화음이 두 번 울린 뒤 전화가 연결되었다. 상대가 말하기도 전에 소현아는 흥분해서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소월아! 드디어 전화 받았네! 있잖아, 강지훈 그 나쁜 놈이 나 계속 방에 가둬놓고 문밖으로 못 나오게 했어. 나 진짜 답답해 미치겠어!” “널 여기 데려와 같이 놀려고 했는데, 강지훈의 말이 전연우 그 나쁜 놈이 너 안 보낸다고 하더라고. 둘 다 진짜 짜증 나! 내가 간신히 휴대폰 구해서 전화한 거야. 소월아, 그 나쁜 놈한테 말하고 이쪽으로 놀러 와줄 수 있어?” 한참을 떠들었을 때, 저쪽에서 낮고 위험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지훈이 내가 소월이를 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고? 언제 나한테 물어봤는데?” 소현아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몇 초 뒤에야 머뭇거리며 다시 말을 꺼냈다. “전... 전연우 씨? 왜 당신이 전화를 받아요?” 전연우가 차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쁜 놈이 전화를 받아서 많이 실망했나?” 소현아는 겁을 먹고 눈알만 뒤룩뒤룩 굴렸다. “저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잘못 들었어요! 소월이는요? 이거 소월이 폰이잖아요. 빨리 소월이한테 돌려줘요!” 전연우가 말했다. “소월이는 전화 안 받아. 다시 전화하지 마.” “소월이한테 나라고 말해줘요. 소월이가 제 전화 안 받을 리 없어요.”소현아는 다급함을 감추지 못했다. “앞으로 다시는 소월이 찾지 마. 바빠서 너랑 소꿉놀이할 시간 없으니까.” “그리고 강지훈한테 전해. 내게 터무니없는 누명 씌우지 말라고.” 전연우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소현아가 다시 걸어봤지만, 상대는 받지 않았다. “현아 아가씨, 이제 일어나서 운동할 시간이에요.” 규영과 미
소현아는 얼굴에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이빨 자국을 달고서 원망 어린 눈빛으로 강지훈을 바라보았다. 강지훈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내가 소월이한테 전화해도 돼요?” “그쪽에서 받기만 한다면야.” 소현아는 이제 아침에 있었던 불쾌한 일을 까맣게 잊은 듯했다. “저 밖에 나가서 놀고 싶어요!” 강지훈은 단칼에 거절했다. “안 돼.” 신이 나 붕방거리던 소현아는 김빠진 공처럼 순식간에 축 처져버렸다. “하지만 방에만 계속 있는 건 너무 따분하단 말이에요.” “절대 도망 안 갈게요. 여기 아기들도 있잖아요. 그냥 아래층에서 좀 돌아다니게만 해줘요, 네?” 그녀가 지금 머무는 방은 집에 있던 침실을 완벽하게 똑같이 복원한 곳이었다. 소현아는 이곳을 무척이나 좋아했었다.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최근 며칠 동안 줄곧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그녀는 방안을 끝없이 걷고 또 걸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방은 갑자기 창고로 변해버렸고, 아무리 깨려고 해도 도저히 깨어날 수가 없었다. 강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밥을 한입 삼키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연우 그 나쁜 놈도 소월이가 마당에서 그림 그리는 건 허락하던데... 강지훈 씨는 날 침실 밖에도 나가지 못하게 하네. 전연우보다도 더 나빠.” “...” “아래층에서만 놀아. 방을 나서면 규영과 미진이 따라갈 거야.”결국 강지훈이 한발 물러섰다. 소현아의 눈에 다시 별빛이 들어왔다. “음, 당신은 전연우 그 나쁜 놈보다 조금 나아요. 정말 아주 조금.” 아침을 먹고 난 뒤 소현아는 바로 휴대폰을 요구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거의 즉시 연결되었다. “현아니?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명세진의 목소리는 흥분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듯 조심스러웠다.오랜만에 엄마 목소리를 들으니 소현아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엄마,
강지훈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짙은 피비린내를 풍기며 돌아왔다.옆방에서 샤워를 마친 강지훈은 잠옷을 입고 소현아의 방으로 들어갔다.소현아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2.2미터나 되는 퀸사이즈 침대에서 편안하게 팔다리를 쭉 뻗은 채 말이다. 무슨 꿈을 꾸는지 웅얼거리며 입가에 흘린 침을 닦고 있었다.곤히 잠든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강지훈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침대 곁으로 다가간 그는 이불을 끌어다 그녀의 배를 덮어주고는 코를 꼬집었다.“윽...”잠시 후 소현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편한 듯 눈을 떴다.“강지훈 씨 너무 싫어요. 숨을 쉴 수가 없잖아요. 빨리 놔줘요.”침대 곁에 있는 사람을 본 소현아는 두 손으로 그의 손목을 잡고 떼어내려 했다.강지훈이 말했다. “말해 봐.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 제대로 말하면 놔줄게.”소현아는 씩씩거리며 눈을 감고 어쩔 수 없이 입으로 숨을 쉬었다. 가슴이 뻐끔뻐끔 부풀어 오르는 모습이 마치 복어 같았다.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입까지 막아버렸다.몇 초 지나지 않아 소현아는 다시 웅얼거리며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강지훈은 그저 잠시 그녀에게 장난을 치고 싶었을 뿐이지만, 한번 맛을 보니 멈출 수가 없었다.그는 손을 떼어 그녀의 허리에 얹고 반바지를 벗기려 했다.소현아는 필사적으로 바지를 붙잡고 엉덩이를 비틀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다.강지훈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손 놔. 살살할게.”“저 졸려요. 자고 싶으니까 강지훈 씨도 빨리 자요.”그녀는 강지훈이 또 키스하려 할까 봐 입술을 굳게 다물고 낑낑거리며 그를 밀치고는 죽은 척 눈을 감았다.강지훈이 어떻게 하든 소현아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정말로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곤히 잠든 그녀를 바라보는 강지훈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다음 날 아침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 꼭 안겨있었다. 그녀의 코끝에 그의 단단한 가슴이 닿아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어젯밤 일이 떠오른 소현아는 그의 가슴을 힘껏 깨물었다.곧이어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