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수가 강용을 지하실에 가둔 이유는 단 하나, 그에게 작은 처벌을 안겨주기 위함이었다.저번 장소월이 실종되었을 때, 그녀의 셋방 건물 아래에 있던 그의 수하들은 모두 강용이 걸어 나오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싸우는 소리까지 들었다.일은 그의 상상만큼 간단하지 않았다. 장소월은 학교 부근의 셋방에 머무르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 제운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학생이 그곳에 드나들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강용을 제외하고는 그럴 만한 사람이 없다.강영수는 예전 장소월이 강용과 어떤 사이였든, 지금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병실 밖으로 나갔다가 줄지어 서 있는 정장 차림의 경호원을 본 은경애는 불길한 마음에 전화를 걸었다.하룻밤 함께 지내보니 저 사모님은 꽤 괜찮은 분인 것 같았다. 심유는 많진 않지만 하루 일당에 해당하는 수고비까지 그녀에게 쥐여주었다.장소월이 은경애의 전화를 받고 있을 때, 강만옥은 장소월의 병실에 찾아와 따뜻한 물을 그녀의 침대 옆에 놓아주고 있었다.“사람을 걱정시키는 데에 뭐가 있단 말이야. 별일 없어서 정말 다행이야. 시험은 이미 지나갔으니 너무 상심하지 마. 수능을 잘 보면 되잖아.”“네.”장소월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아직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푹 쉬어. 무슨 일 있으면 말해. 내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그럼 부탁할게요.”“가족끼리 부탁은 무슨.”확실히 가족이다. 저번 주 장해진과 강만옥은 혼인신고를 했으니 말이다.장해진은 고지식하고 보수적인 사람이다. 하여 재혼은 떠들썩하게 치르면 안 된다는 생각에 결혼식은 치르지 않았다.장소월은 베개 밑 핸드폰의 진동을 느꼈다.강만옥이 나간 뒤 핸드폰을 꺼내 보니 전화는 이미 꺼져있었다.발신자를 확인해보니 은경애였다.은경애는 그녀에게 음성메시지를 남겼다.「아가씨, 보살피라고 하셨던 그 사모님은 깨어나셨어요. 하지만... 강영수 도련님 정말 무서운 분이셨군요. 갑자기 온몸에 상처가 난 사람을 끌고 병실에
환자복을 입은 심유의 청초한 얼굴에서 두 갈래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가 침대를 잡고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영수야, 아줌마가 이렇게 부탁할게. 용이는 아직 철이 없어 아무것도 몰라.”강용이 붉어진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울부짖었다.“무릎 꿇지 말라고 했잖아요. 못 들었어요?”참으로 웃기고 어이없는 모자의 모습이다.당시 심유가 그의 가정을 깨뜨렸을 때, 오늘과 같은 날이 올 수 있다는 걸 예상했어야 했다. 이별을 선택했다면 멀리 떠날 것이지, 왜 근처에서 맴돌다가 강일주의 눈에 띈단 말인가!이게 다 그녀가 다른 남자를 만나지 않고 혼자 사생아를 낳아 키운 것 때문이다.강영수가 있는 한, 이 잡종은 영원히 강씨 가문의 인정을 받지 못할 것이다.바로 그때, 강영수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해보고는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조금 전 잔뜩 날이 세워져 있던 모습은 순식간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야?”전화를 건 사람은 장소월이었다.“지금 어디야?”강영수는 강용을 힐끗 보고는 오싹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병원에 있어.”상대방은 한동안 침묵했다. 이어 핸드폰 너머로 장소월의 허약하고도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나 학교 옆 가게 만두가 먹고 싶어. 사다 줄 수 있어? 파는 빼고.”“그래. 알았어. 금방 가져다줄게.”“응. 기다릴게.”강영수는 전화를 끊은 뒤 승리자의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서 차가운 눈빛으로 강용을 내려다보았다.“너한테 두 가지 선택지를 줄게. 하나는 서울에서 머물며 네 어머니가 죽어가는 걸 지켜보는 거야. 내가 알기로 네 어머니는 얼마 버티지 못해. 다른 하나는 해외에 나가 내가 허락하기 전까지 돌아오지 않는 거야. 하지만 난 매달 네 어머니의 병원비를 보내줄 거고 네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과 생활비도 책임질 거야.”강용의 눈에 시뻘건 핏줄이 줄기줄기 서렸다. 절대 굴복하지 않을 듯한 그의 날카로운 눈빛은 마치 길들이지 못하는 야생 동물과도 같았다.“이런 기
“당시 난 목숨을 끊는 것으로도 부모님의 사이를 되돌릴 수 없었을 거야. 하지만 그 자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어.”장소월은 무슨 말로 위로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서울의 피라미드 가장 높은 곳, 아무도 닿을 수 없는 위치에 강림해 있는 그에게 장소월과 같은 망가진 가정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두 사람은 그런 점에서 동병상련을 느끼고 있다. 불행해질수록 더더욱 안정된 가정을 갖고 싶었다.“하느님은 공평해. 너에게 재부를 줬으니 다른 것은 빼앗아간 거야.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과 비교하면 우린 운이 좋은 편이잖아.”장소월은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자유와 선택권만 갖는 것으로 충분했다.강영수의 크고 두꺼운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이제... 나한텐 너밖에 없어. 넌 영원히 내 곁에 있을 거야. 그렇지?”그 말에 장소월은 부담감에 숨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사실 그의 주변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녀 한 명뿐만은 아니다.장소월은 당시 깊은 지하의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강영수를 꺼내 그의 세상이 되어준 사람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김남주가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고 해도, 그를 구원해준 일은 결코 쉬이 잊혀지는 게 아니다. 때문에 그녀는 강영수를 이해할 수 있었다.강영수에게 있어 김남주는 단지 지나간 과거가 아니다. 그들 사이의 감정은 아무나 대체할 수 없다.김남주가 떠나가고 강영수가 다시 어둠에 자신을 가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한 순간, 장소월이 마침 그곳에 나타난 것뿐이다.그녀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 수 없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이제 김남주가 돌아왔으니 장소월은 본의 아니게 그들 세상의 제3자, 방해꾼이 되어버렸다.장소월은 강영수의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것만큼은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김남주 역시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세상은 두 사람 사이에 다른 누군가가 끼어드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장소월은 자신을 빨아들일 듯한 소용돌이가 일렁이는 그의 눈을 바라보
장해진이 화들짝 놀랐다.“걔가 어떻게 알아?”“소월이가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별다른 반응이 없더군요.”장해진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는 쓸모없는 존재라고 여기는 사람이다. 하지만 강영수가 그녀의 불임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집에 머물게 하는 걸 보니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럼 김남주는? 지금 어디에 있어?”“병원입니다. 잠시 강영수의 사람들이 보호해주고 있어요.”장해진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아무도 모르게 김남주를 깔끔하게 처리해. 소월이가 강씨 집안에 시집간다면 너와 나 모두에게 이득이 될 거야. 가봐.”“네, 의부님.”전연우가 서재에서 나왔을 때, 문 앞에서 닭 육수로 만든 국수 요리를 들고 온 강만옥과 마주쳤다.“자기야, 얘기 잘 끝났어?”전연우는 한 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냉담한 표정으로 그녀의 옆을 지나쳤다.강만옥은 피식 웃고는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장소월은 병원에서 한 주 동안 머물렀다. 그동안 강영수는 소규모로 사람들을 나누어 장소월의 병문안을 오게 했다. 이건 사람이 많은 것을 좋아하지 않는 장소월의 뜻이기도 했다.강영수는 줄곧 병실을 서재로 삼고 일을 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그녀와 함께했다. 항상 그녀의 시선 속에 머물렀고, 화장실에 갈 때까지도 그녀에게 보고했다.정말이지... 이렇게 할 필요까진 없다.장소월은 이제 걸을 수도 있고 퇴원해도 된다. 하지만 강영수는 여전히 마음을 놓지 못했다.“왜 그래? 심심해?”“지금까지 이곳에서 날 지켜줬으니까 이제 그만 김남주 씨한테 가봐. 오랫동안 인연을 이어오던 사람이잖아.”강영수는 그녀의 허리에 올렸던 손을 거두었다.“넌 TV를 보고 있어. 난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았어.”그의 태도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장소월은 그가 왜 이토록 화를 내는지 알 수 없었다.그녀는 창가 쪽으로 걸어가 책을 한 권 펼쳤다.그때 진봉이 들어왔다.“대표님,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진봉이 장소월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따사로운 햇
병원 건물 아래, 무성히 자라난 오동나무 가지에 참새 몇 마리가 지저귀고 있었다. 날씨가 추운 탓인지 모두 머리를 날개에 묻고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바깥 온도는 강영수가 발산하는 분위기와 똑같이 차가웠다.“난 헤어지는 것에 동의할 수 없어.”장소월이 팔짱을 끼고 시선을 거두었다.“내 말은 그 뜻이 아니야. 그저 시간을 갖자는 거야. 이번 일은 반드시 분명히 해야 하니까. 우리가 서로에게 정말 어울리는 사람인지도 생각해야 돼.”“감정이라는 것은 절대 제3자를 용납할 수 없어. 김남주 씨가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넌 그 사람을 구하러 가는 걸 선택했어. 난... 네가 아직 김남주 씨와 함께했던 시간을 놓지 못했다는 거 알고 있어.”“나도 감정이 없는 사람이 아니야. 너와 똑같아. 상대방의 눈에 자신만 담겨 있기를 바라지.”장소월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먼저 남주 씨한테 가서 물어봐. 대화를 나누면 네 마음속의 응어리가 풀어질 수도 있잖아. 어떻게 되든 우린 처음처럼 지낼 수 있을 거야.”그의 시선은 장소월에게 머무른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장소월 또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에 숨 막힐 듯한 침묵이 흘렀다.그녀의 말은 자신과 강영수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아직 감정이 깊어지기 전에 지나간 일을 말끔히 해결하는 것이 좋을 테니 말이다.김남주가 그들 사이에 끼어있으면 매일매일 불편할 것이고 장소월의 입장 또한 곤란해질 것이다.그녀를 좋아하는 동시에 김남주도 놓지 못한다면 바람을 피우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진봉이 무거운 분위기를 깨고 입을 열었다.“소월 아가씨, 그게 아닙니다. 대표님께선 지나간 일에 절대 고개를 돌리지 않습니다. 대표님을 믿으셔야 합니다.”“정말 그래요?”장소월의 그 한마디 말에 모든 것이 꿰똟어보일 듯한 맑은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전 다 알고 있어요. 설 연휴 급히 해외에 간 것, 깊은 밤에 김남주 씨를 찾아간 것, 이것들이 그분을 놓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
장소월은 장씨 저택에 돌아가지 않고 곧장 셋방으로 향했다.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풀냄새와 흙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베란다 창문이 열려있었다.장소월이 안으로 들어가 보니 베란다에 심어두었던 식물엔 이미 꽃이 피어나 있었다.방안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고 하늘색 소파 위엔 그녀의 것이 아닌 누군가의 교복이 놓여있었다.장소월이 강용을 떠올리며 교복을 들어 올렸다. 그는 지금 어떻게 됐을까.돌이켜보면 이곳엔 강용과의 기억이 가득했다. 그는 주방에서 요리를 했고 책상에서 공부를 했고, 피곤할 때면 소파에 누워 할아버지처럼 오후 첫 수업이 시작할 때까지 자곤 했다.눈 깜빡할 사이에 어느덧 한 주가 지났다.그동안 장소월은 핸드폰을 줄곧 꺼놓았다. 또한 집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않고 외부와 단절된 채 지냈다.그녀는 자신을 이 작은 방 안에 가두고 그림을 그리며 신경을 마비시켰다. 어떤 날엔 밤새 쉬지 않고 그리기도 했다.피곤하면 자고, 배가 고프면 대충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공부에 관한 건 손조차 대지 않았다.유리병을 들어보니 물을 다 마셔 비어있었다. 그녀는 소파를 짚고 일어서며 며칠 감지 않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평소엔 보기 힘든 꾀죄죄한 모습이었다.뜨거운 물을 끓인 뒤에야 약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 떠올랐다.밥상 위엔 절반가량 먹은 우울증 약봉지가 놓여있었다. 대체 언제 이 병이 낫는 걸까...자신을 포기한 걸까? 장소월 그녀 또한 알 수 없었다.쾅쾅쾅.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녀가 약을 입에 넣지도 못한 채 걸어가 문을 열었다.문밖에 서 있는 사람을 본 순간 약봉지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장소월은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약을 주운 뒤 물감이 가득 묻은 옷에 슥슥 닦고는 물과 함께 삼켰다.전연우가 안으로 들어간 뒤 문을 닫았다. 커튼이 닫혀 있는 데다 조명도 켜지 않아 어두운 방 안은 어지럽기까지 했다. 주방 싱크대엔 설거짓거리도 가득 쌓여있었다.평소 깔끔한 것을 좋아하던 장소월도 이렇게 지저분할 때가 있다니.전연우는
“앞으로 내 일에 간섭하지 마. 이렇게 찾아오지도 말고.”전연우의 시선이 붓이 꽂혀있는 필통으로 향했다. 안엔 핸드폰이 물에 잠겨 있었다.남자가 일어서 창가로 가 커튼을 열자 햇살이 안으로 들어왔다. 연속 며칠 동안 햇볕을 보지 못했던 장소월은 눈이 부셔 손으로 빛을 막았다.“뭐 하는 거야! 얼른 닫아!”그녀가 벌컥 화를 냈다.“한 시간 줄 테니까 깨끗이 정리하고 날 따라와. 집에 가자.”“전연우, 너 미친 거 아니야? 내가 거길 왜 가? 거기가 내 집이야? 너와 백윤서의 집이잖아. 내 생각이 맞다면 오 아주머니도 네 사람이지? 내가 먹는 우유에 아무도 모르게 약을 넣은 걸 보면 말이야.”그녀는 전연우만 보면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 떠올랐다. 장소월은 손에 들고 있던 붓을 던져버리고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그녀는 탁자 앞으로 걸어가 우울증약 몇 알을 삼키고는 새빨개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부탁할게. 다신 오지 마.”“난 널 증오해. 전연우! 증오한다고!”넌 내 모든 것을 망가뜨렸어. 대체 왜 날 이렇게까지 괴롭히는 거야.그녀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하고 닫아버렸다.전연우가 어두운 눈동자로 굳게 닫힌 방문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그의 마음속은 한데 엉켜버린 수만 갈래의 실처럼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장소월은 방으로 돌아가 이불 속에 숨어버렸다. 깊은 미로에라도 갇힌 듯 아무리 걸어도, 어떻게 걸어도 출구에 다다를 수가 없었다.예전엔 울다가 힘들어지면 잠을 청했다. 꿈에서 엄마를 만날 수도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지갑을 잃어버리고 사진이 없어진 뒤엔 엄마는 한 번도 그녀의 꿈속에 나타나지 않았다.장소월은 침대 옆에 놓아두었던 약 다섯 알을 삼켰다. 지금은 오로지 이런 방법을 사용해야만 고통을 견뎌낼 수 있다.오늘 그녀는 꿈속에서 엄마를 만난 것 같았다. 희미하지만 엄마의 목소리도 들었다.그녀는 하얀색 치마를 입고 우아하게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있었
“간이 배 밖으로 나왔네?”남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장소월은 가운데 처진 추한 것을 보지 않으려고 황급히 시선을 옮겼다.“옷 입고 나가.”전연우는 바닥에 놓은 시트를 주워 하반신을 감쌌다. 탄탄하고 완벽한 상체의 남자는 묵묵히 방을 나와 거실로 향했다.‘오늘 왜 이렇게 말을 잘 듣지?’장소월은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와 문을 잠그고 옷장으로 가서 자신의 옷을 챙겨입었다.그녀가 수면제를 먹고 약효가 발작한 순간, 전연우가 어떻게 자신을 침대에 올렸는지 거의 기억이 나지 않았다.그녀는 뭔가 떠올리더니 옷을 입은 후 거실로 가서 미완성 그림을 계속 그렸다.며칠 전, 그녀는 그림 대회 푸시 메시지를 보고 지원했다.오늘이 원고 마감일이었고, 저녁 7시에 주최 측에서 사람을 보내 그림을 가져갈 것이다.아직 1시간 30분이 남았다.전연우는 베란다에서 전화를 받고 있었고, 장소월은 그를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은 그녀는 옆에 있는 토스트를 먹었고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다행히 마지막 30분을 남겨 놓고 그녀의 그림은 완성되었다.창문 밖에서 연기가 날아들었다.전연우는 줄곧 그녀의 그림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림을 잘 이해하진 못하지만, 그녀의 그림이 햇빛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누군가 문을 두드렸고, 장소월은 주최 측 사람인 줄 알고 손으로 그림을 말린 후 조심스럽게 말았다.문을 열고 보니... 기성은이었다. 그는 손에 봉지를 들고 있었다.그녀를 본 기성은은 덤덤한 표정이었다.“아가씨, 안녕하세요.”“여긴 어쩐 일이세요?”“대표님 옷 가져다드리러 왔습니다.”“이리 주세요.”기성은은 미간을 살짝 치켜올렸다. 두 사람의 사이가 언제 또 가까워졌는지 의아했다.하지만, 역시나... 장소월은 옷을 받아들고 3층에서 바로 던져버렸다.기성은은 눈이 휘둥그레졌다.“아가씨...”장소월은 별말 없이 문 앞에 걸려 있는 열쇠를 들고 그림을 챙겨 그대로 떠났다.‘옷은 천천히 찾으라고 해.’마침 전연우가 나왔
배가 고픈 데다 아기들이 발길질까지 하니 더욱 아팠다. “아가들아, 제발 차지 마. 규영 언니랑 미진 언니가 곧 맛있는 거 가져다줄 거야.” 그녀가 배를 쓰다듬으며 아이들을 달랬다. 규영과 미진은 그녀의 애처로운 눈빛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뱃속 두 녀석들이 워낙 시끄럽게 움직이고 있으니 더는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알았어요, 아가씨. 간단히 드실 걸 가져다드릴게요. 여기 앉아서 절대 움직이지 마세요.” 그들은 걱정되는 마음에 거듭 당부했다. 소현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여기 이렇게 많은 언니들이 지켜보고 있잖아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절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게요.” 규영과 미진은 사람들에게 다시 신신당부한 뒤에야 먹을 것을 가지러 자리를 떴다. 지난번 일 이후로 다른 사람은 믿을 수 없게 되어 소현아의 음식은 반드시 그들이 직접 준비해야 했다.소현아는 혼자 소파에 앉아서 작게 아기들과 이야기했다. “아가들아, 소월 이모가 전연우 그 나쁜 놈한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내 전화를 왜 안 받은 거지?” “나 소월이가 너무 걱정돼. 근데 너희가 너무 무거워서 몰래 도망갈 수도 없어.” 그녀에게 돌아오는 답은 점점 잦아드는 태동뿐이었다. 소현아는 아기들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못마땅한 듯 입을 삐죽거렸다. 누군가 문을 열었는지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었다. 얇은 연노랑 잠옷만 입고 있던 소현아는 추위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곧이어 도우미들의 공손한 인사 소리가 들렸다. “효연 아가씨.” 천효연은 거만한 눈빛으로 그들을 훑어 보고는 곧장 위층으로 향했다. “여기 뒀던 내 꽃병은 어디 갔어?” 계단 모퉁이에 있던 꽃병이 사라진 걸 발견한 천효연이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현아 아가씨가 다치실까 봐 잠시 장식품들을 다 치웠습니다.” 소현아?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천효연의 눈동자에 냉기가 스쳤다. “그 바보는 지훈 씨가 방에 가둬놨잖아?” 도우미
엄마와 통화를 마친 뒤, 소현아는 장소월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전연우 그 나쁜 놈이 소월이를 괴롭히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혹시 소월이는 강용 소식을 알지 않을까... 소현아는 강지훈이 강용의 행방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장소월의 당부를 기억하며 감히 묻지 못했다. 통화음이 두 번 울린 뒤 전화가 연결되었다. 상대가 말하기도 전에 소현아는 흥분해서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소월아! 드디어 전화 받았네! 있잖아, 강지훈 그 나쁜 놈이 나 계속 방에 가둬놓고 문밖으로 못 나오게 했어. 나 진짜 답답해 미치겠어!” “널 여기 데려와 같이 놀려고 했는데, 강지훈의 말이 전연우 그 나쁜 놈이 너 안 보낸다고 하더라고. 둘 다 진짜 짜증 나! 내가 간신히 휴대폰 구해서 전화한 거야. 소월아, 그 나쁜 놈한테 말하고 이쪽으로 놀러 와줄 수 있어?” 한참을 떠들었을 때, 저쪽에서 낮고 위험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지훈이 내가 소월이를 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고? 언제 나한테 물어봤는데?” 소현아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몇 초 뒤에야 머뭇거리며 다시 말을 꺼냈다. “전... 전연우 씨? 왜 당신이 전화를 받아요?” 전연우가 차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쁜 놈이 전화를 받아서 많이 실망했나?” 소현아는 겁을 먹고 눈알만 뒤룩뒤룩 굴렸다. “저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잘못 들었어요! 소월이는요? 이거 소월이 폰이잖아요. 빨리 소월이한테 돌려줘요!” 전연우가 말했다. “소월이는 전화 안 받아. 다시 전화하지 마.” “소월이한테 나라고 말해줘요. 소월이가 제 전화 안 받을 리 없어요.”소현아는 다급함을 감추지 못했다. “앞으로 다시는 소월이 찾지 마. 바빠서 너랑 소꿉놀이할 시간 없으니까.” “그리고 강지훈한테 전해. 내게 터무니없는 누명 씌우지 말라고.” 전연우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소현아가 다시 걸어봤지만, 상대는 받지 않았다. “현아 아가씨, 이제 일어나서 운동할 시간이에요.” 규영과 미
소현아는 얼굴에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이빨 자국을 달고서 원망 어린 눈빛으로 강지훈을 바라보았다. 강지훈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내가 소월이한테 전화해도 돼요?” “그쪽에서 받기만 한다면야.” 소현아는 이제 아침에 있었던 불쾌한 일을 까맣게 잊은 듯했다. “저 밖에 나가서 놀고 싶어요!” 강지훈은 단칼에 거절했다. “안 돼.” 신이 나 붕방거리던 소현아는 김빠진 공처럼 순식간에 축 처져버렸다. “하지만 방에만 계속 있는 건 너무 따분하단 말이에요.” “절대 도망 안 갈게요. 여기 아기들도 있잖아요. 그냥 아래층에서 좀 돌아다니게만 해줘요, 네?” 그녀가 지금 머무는 방은 집에 있던 침실을 완벽하게 똑같이 복원한 곳이었다. 소현아는 이곳을 무척이나 좋아했었다.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최근 며칠 동안 줄곧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그녀는 방안을 끝없이 걷고 또 걸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방은 갑자기 창고로 변해버렸고, 아무리 깨려고 해도 도저히 깨어날 수가 없었다. 강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밥을 한입 삼키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연우 그 나쁜 놈도 소월이가 마당에서 그림 그리는 건 허락하던데... 강지훈 씨는 날 침실 밖에도 나가지 못하게 하네. 전연우보다도 더 나빠.” “...” “아래층에서만 놀아. 방을 나서면 규영과 미진이 따라갈 거야.”결국 강지훈이 한발 물러섰다. 소현아의 눈에 다시 별빛이 들어왔다. “음, 당신은 전연우 그 나쁜 놈보다 조금 나아요. 정말 아주 조금.” 아침을 먹고 난 뒤 소현아는 바로 휴대폰을 요구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거의 즉시 연결되었다. “현아니?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명세진의 목소리는 흥분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듯 조심스러웠다.오랜만에 엄마 목소리를 들으니 소현아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엄마,
강지훈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짙은 피비린내를 풍기며 돌아왔다.옆방에서 샤워를 마친 강지훈은 잠옷을 입고 소현아의 방으로 들어갔다.소현아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2.2미터나 되는 퀸사이즈 침대에서 편안하게 팔다리를 쭉 뻗은 채 말이다. 무슨 꿈을 꾸는지 웅얼거리며 입가에 흘린 침을 닦고 있었다.곤히 잠든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강지훈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침대 곁으로 다가간 그는 이불을 끌어다 그녀의 배를 덮어주고는 코를 꼬집었다.“윽...”잠시 후 소현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편한 듯 눈을 떴다.“강지훈 씨 너무 싫어요. 숨을 쉴 수가 없잖아요. 빨리 놔줘요.”침대 곁에 있는 사람을 본 소현아는 두 손으로 그의 손목을 잡고 떼어내려 했다.강지훈이 말했다. “말해 봐.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 제대로 말하면 놔줄게.”소현아는 씩씩거리며 눈을 감고 어쩔 수 없이 입으로 숨을 쉬었다. 가슴이 뻐끔뻐끔 부풀어 오르는 모습이 마치 복어 같았다.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입까지 막아버렸다.몇 초 지나지 않아 소현아는 다시 웅얼거리며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강지훈은 그저 잠시 그녀에게 장난을 치고 싶었을 뿐이지만, 한번 맛을 보니 멈출 수가 없었다.그는 손을 떼어 그녀의 허리에 얹고 반바지를 벗기려 했다.소현아는 필사적으로 바지를 붙잡고 엉덩이를 비틀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다.강지훈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손 놔. 살살할게.”“저 졸려요. 자고 싶으니까 강지훈 씨도 빨리 자요.”그녀는 강지훈이 또 키스하려 할까 봐 입술을 굳게 다물고 낑낑거리며 그를 밀치고는 죽은 척 눈을 감았다.강지훈이 어떻게 하든 소현아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정말로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곤히 잠든 그녀를 바라보는 강지훈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다음 날 아침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 꼭 안겨있었다. 그녀의 코끝에 그의 단단한 가슴이 닿아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어젯밤 일이 떠오른 소현아는 그의 가슴을 힘껏 깨물었다.곧이어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