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경애는 실망감이 역력한 얼굴로 보는 눈 없는 이 남자를 쳐다보았다.‘저런 간단한 이간계도 보아내지 못한다고? 저 여자 딱 봐도 악의를 갖고 도발한 거잖아?’은경애가 한숨을 내쉬었다.“대표님, 아가씨는 안 그래도 대표님에게 원망의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여자를 데리고 집에 들어오면 당연히 기분이 좋지 않죠. 그렇게 심한 말을 하셨으니 아가씨를 다시 돌아오게 하는 건 아마 힘들 겁니다. 아가씨는 확실히 이 아이와의 접촉을 꺼립니다. 계속 시간을 보내다 정이 들면 이후 떠나기 힘들 테니까요. 이제 보니... 아가씨의 마음속에는 대표님에 대한 실망감밖에 없는 것 같네요. 그래서 더더욱 미련 없이 떠난 거고요.”부부가 다투면 결국 상처받는 건 아이뿐이다.아가씨는 겉으론 아이를 아끼는 것 같아 보이지만, 종래로 자신의 아이라 인정한 적이 없다.별이가 아무리 말을 잘 듣고, 엄마라고 부른다고 해도 절대 이 이상의 감정을 갖지 않았다. 떠날 기회가 왔을 때 망설임 없이 떠나야 하기 때문이었다.은경애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두 사람이 아이를 관여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녀는 그럴 수 없다. 받은 돈이 있으니 해야 할 일은 마땅히 해야 한다.이제 거실엔 송시아와 전연우 두 사람만 남았다.“연우 씨, 설마 정말 장소월에게 마음을 주기라도 한 거예요?”송시아가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모든 것을 손에 넣고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이 저렇게까지 이상을 잃다니.“정말이에요? 하... 연우 씨, 난 그냥 장난감처럼 갖고 노는 줄 알았어요!”“연우 씨와 장소월은 혈연관계 남매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돼요...”그녀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전연우가 분노로 새빨개진 눈으로 노려보며 그녀의 목을 움켜쥐고는 몇 미터 뒤에 있는 벽에 밀쳐버렸다.그 순간 전연우는 마치 오랜 시간을 어둠 속에 갇혀있다가 뛰쳐나온 공포스러운 맹수와도 같았다...“죽고 싶으면 계속 말해!”...장소월은 곧바로 터미널로 향했다.매표소 직원이 말했다.“죄송합니다, 아가씨. 표를 사려면 주민등록증이
장소월이 작업실에 나타나다니, 박원근에게도 참으로 의외인 일이었다.작업실 직원들은 모두 넋을 잃고 갑자기 등장한 여자의 미모를 감상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듯 천성적으로 고급스러움을 타고난다. 그 신비로운 분위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게 만들곤 한다.박원근과 주시윤이 회의실에서 걸어 나올 때, 프런트 직원이 장소월을 막으려 일어섰다. 박원근이 얼른 그를 막아 세웠다.“괜찮아. 내가 아는 사람이야.”장소월이 안으로 들어가자 주시윤이 물 한 컵을 따라 그녀에게 건넸다.“난 네가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어.”박원근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장소월의 옆에 앉았다. 그녀가 사무실을 둘러보며 말했다.“저 스승님의 제자잖아요. 선배님들도 있는데 제가 왜 못 오겠어요. 스승님은요?”박원근이 안경을 슥 올리며 말했다.“허 교수님께선 여전히 예전처럼 학교에서 수업하고 계셔. 오랫동안 오지 않았으니 넌 지금 이 작업실을 맡은 새로운 책임자가 누구인지 모를 테고 예상도 하지 못할 거야.”장소월은 유리창 밖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음을 느꼈다. 그녀의 시선을 포착한 주시윤은 탁자 위에 놓인 리모컨으로 커튼을 닫았다.“작업실에서 2, 3년 정도 일한 후배들이야. 어떤 후배들은 졸업한 지 1년밖에 안 됐어.”장소월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시간이 이렇게나 빨리 지날 줄 몰랐어요. 눈 깜짝할 사이에 4년이 지나다니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일 어린 후배가 저였는데... 사무실이 많이 성장했나 봐요. 사람들이 이렇게 많으니 선배님들의 부담도 줄어들겠어요.”박원근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저 애들이 하는 일은 별로 없어. 대부분 너한테 의지하는 거지 뭐. 네가 줄곧 도와주지 않았다면 골치 아픈 의뢰인들의 요구를 만족해주지 못해 속 꽤나 태웠을 거야.”주시윤도 말을 보탰다.“맞아! 처음엔 3, 4명 밖에 안 되는 작은 팀으로 시작했는데 이젠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스튜디오가 됐네. 솔직히 좀... 감동이긴 해!”장소월이 물었다
장소월이 고개를 돌려보니 박원근이 음식을 들고 들어오고 있었다. 이어 주시윤도 맥주 한 병을 들고 들어왔다.“후배님이 왔는데 내가 빠져서야 되겠어?”장소월이 물었다.“야근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술 마셔도 돼요?”주시윤이 박원근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요즘 나랑 원근이는 사무실에서 지내고 있어. 의뢰인 쪽에서 연말에 게임을 출시해야 한다고 해서 힘들더라도 매일 야근하고 있어. 그럼 편하게 새해를 맞이할 수도 있고 돈도 벌 수 있잖아. 지금 집값도 말도 안 되게 치솟아서 돈 없으면 장가도 못 가.”장소월은 종래로 경제적인 고민은 해본 적이 없다. 아무리 써도 줄어들지 않는 재산에 남들은 평생 벌어도 엄두도 내지 못하는 서울시 중심 지대 집들을 마음만 먹으면 살 수 있다. 그들은 그런 장소월의 우월한 가정환경이 부러웠다.하지만 그저 그녀의 화려한 껍데기만 봤을 뿐, 속이 얼마나 아프게 곪아 터져 있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다.장소월은 그들과 함께 있으니 보통 사람들의 삶을 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최소한... 그들에겐 자신만의 목표가 있으니까.장소월은 줄곧 흐릿한 정신으로 정처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다.예전 세계를 여행하고 싶어 했던 꿈은 이루었다. 요즘은 그 어떤 것에도 욕망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이렇게 하루하루 허무하게 살고 있을 뿐이다.장소월은 알코올 알레르기가 있어 술을 마시지 않았다. 박원근과 주시윤은 술에 취해 해롱해롱한 상태로 사무실로 돌아가 잠시 눈을 붙였다.요즘은 밤이 참 긴 계절이다. 돌연 사무실에 남겨두었던 머플러가 생각나 목에 두르고 아래로 내려갔다.작업실 아래는 크나큰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장소월은 베이지색 실 원피스를 입고 코트를 걸친 채 조명 아래 벤치에 앉았다.그녀가 손을 뻗어 밤하늘에서 내려오는 눈송이를 받았다. 눈송이는 손바닥에서 빠르게 녹아내렸다.“강영수, 눈이 오고 있어...”그는 전연우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그녀의 마음을 움직인 사람이다.두 번의 인생에서 전연우로 인해 수많은 아픔을 겪은
시간이 꽤나 흘렀는데도 아가씨는 여전히 강영수를 놓지 못하고 있다!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살아있는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마음에 남는 법이니.장소월도 만만치 않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기성은은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어느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다. 어젯밤 송시아가 대표님과 함께 남원 별장에 들어갔으니 난리가 났겠지... 다만 쫓겨난 사람이 장소월일 거라는 건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전연우는 빨간색 다이아몬드 반지를 꽉 움켜쥐었다. 보석 날카로운 부분이 전연우의 채 아물지 않은 상처에 닿아 붕대로 또다시 피가 스며들었다.기성은이 말했다.“대표님, 사람을 보내 아가씨를 모셔올까요?”그 순간 장소월의 다리에 담요를 덮어주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박원근이 장소월의 옆에 걸터앉으며 말했다.“난 네가 집에 돌아간 줄 알았어.”술에 취했던 박원근은 실은 그녀가 밖에 나가자마자 깨어나 3층에서 한동안 그녀를 지켜보았었다. 한 폭의 그림처럼 떨어지는 눈송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는 듯했다.장소월은 차가워진 손을 말아쥐고 고개를 들어 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저 이제 집 없어요. 유일한 가족이 몇 개월 전에 돌아가셔서 저 혼자 남았거든요.”박원근은 자신이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다는 생각에 당황스러움이 역력한 얼굴로 말했다.“미안해. 일부러 마음 아픈 일을 끄집어내려 했던 건 아니야. 정말 미안해.”장소월이 의연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미안해할 것 없어요. 사람은 언젠간 다 떠나가게 돼 있잖아요. 저 혼자서도... 나쁠 것 없어요.”사실 장소월은 주변 사람들에게 힘든 말을 하지 않는다. 부정적인 기분이 그들에게도 전해질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었다.장소월은 다시 한번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다리에 덮여있는 담요를 들고 몸에 걸쳤다.“돌아가서 일해요. 처음으로 선배님들과 야근하는 건데 열심히 해야죠.”박원근은 고개를 끄덕이고 난 뒤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그때 강렬한 차 상향등이 박원근의 몸에
“송시아는 아직 쓸모가 있어서 옆에 두는 거야. 다시는 네 눈앞에 나타나지 않게 할게.”장소월은 고개를 쳐들고 그의 날카로운 눈빛을 응시했다.“... 나랑은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야! 그 여자를 해외로 보내든 집에 들이든 난 관심 없어.”“오늘 일은 이미 다 잊어버렸어. 이제 와 다시 거론하는 건 의미 없어.”“그 별장은 애초부터 네 소유고 난 그저 얹혀살았던 거뿐이잖아.”“내일 경애 아주머니한테 별장에 있는 내 물건 가져다 달라고 할게.”기성은이 자리에서 일어나 경고하듯 그녀를 노려보았다.“아가씨, 대표님에겐 거부하기 힘든 자리라는 게 있습니다. 송시아 씨는 성세 그룹의 부대표이기 때문에 두 분이 함께 나가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대표님의 위장병은 오래전부터 반복적으로 재발하고 있습니다. 어젯밤에도 그랬고요. 아가씨께서 뛰쳐나가는 바람에 지금까지도 물 한 방울 입에 대지 않으셨습니다...”“됐어요!”장소월이 돌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 바람에 귀를 찢을 듯한 마찰음이 작업실에 울려 퍼졌다. 그녀가 눈을 내리뜨리고 서늘하게 그를 쳐다보았다.“네가 이룬 건 다 네 능력 덕분이고, 너 때문에 죽은 사람들은 그냥 재수 없는 운명 탓이라고 생각하겠지! 여자들이 집에 드나드는 거 전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개가 똥을 못 끊는 법이잖아. 넌 종래로 너한테 오는 여자 막지 않으니까.”“너한테서 쫓겨난다고 해도 괜찮아. 내가 떠난 이유는 너같이 역겨운 사람과 단 한순간도 함께 있고 싶지 않기 때문이거든.”“오늘 또 강제로 날 데려가려고 왔다는 거 알아. 날 협박하는 것 외에 네가 할 줄 아는 게 도대체 뭐야?”“전연우, 네가 얼마나 높은 위치에 올라가든 영원히 그 사람 발꿈치도 따라가지 못해.”“네가 외부에 온갖 위선을 다 떨어서 다른 사람들은 잊어버렸을지도 몰라. 하지만 난 네가 얼마나 더러운 쓰레기인지 절대 잊지 못해!”전연우가 말했다.“욕 다 했어? 그래도 화가 안 풀리면 다른 방법 써도 돼. 화 다 풀리면 나랑 집에 가자.”장
이미 일어난 일을 어떻게 하루아침에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지낼 수 있겠는가?“전연우, 네가 뱉은 말 후회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장소월은 순간 손에 쥐고 있던 과도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성은이 깜짝 놀라며 빠르게 그녀의 손목을 잡았지만 이미 한발 늦어버린 뒤였다. 그녀는 이미 날카로운 과도를 전연우의 목에 찔러넣은 상태였다.살을 찢는 고통이 밀려왔다. 목에서 뜨거운 액체가 느껴져 손으로 만져보니 손톱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이깟 아픔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더더욱 아픈 건 바로 마음이었다.그녀는 정말 그를 죽이려 했다!“대표님!”기성은이 곧바로 장소월의 손에서 과도를 빼앗아 던져버렸다.전연우는 손을 들어 괜찮다는 뜻을 표했다.작지도, 그리 깊지도 않은 상처였다.전연우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장소월보다 훨씬 더 솟아오른 몸집에서 차가운 위압감이 풍겨 나왔다.장소월의 손은 저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두려움을 들키지 않기 위해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음산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던 그가 돌연 한 걸음 앞으로 내딛자 장소월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여기로 도망 오면 내가 널 어떻게 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어? 난 너한테 그토록 많은 기회를 줬는데 넌 번번이 내 인내심의 한계를 건드리고 있어. 이제는... 날 죽이려고까지 해?”“장소월... 너 정말 미쳤구나!”장소월이 곧바로 그의 말에 맞받아쳤다.“이 모든 것은 다 네가 날 궁지로 내몰았기 때문이야. 남원 별장에서 꺼지라고 네가 직접 말했잖아. 왜 또 날 찾아온 건데? 전연우, 우린 원수지간이야. 넌 강영수를 죽였고, 강씨 노부인을 죽였어. 그러면서 왜 난 널 죽이지 못할 거라 생각한 거야? 넌 그저 극악무도한 살인자일 뿐이잖아!”“너만 죽으면 아무도 날 강제로 네 그 역겨운 얼굴 보게 하지 않을 거야!”“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병에 걸려 죽는 게 나을 뻔했어. 다시 한번 죽는 거 별로 두렵지도 않아!”그녀가 마지막 글자를 내뱉은 순간, 전
“강지훈 손에 들어간 사람은 단 한 명도 북경 감옥에서 걸어 나오지 못했어. 생각 잘 해보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결정해. 강지훈으로부터 소현아를 구해낼 사람은 이 세상에 나밖에 없어.”장소월 또한 북경 감옥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곳인지 잘 알고 있었다. 사형수들만 갇혀 있는 그곳에선 죽어 시체가 되는 것 외에 나올 방법이 없다.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곳에 발을 들이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처참한 시체로 발견되곤 한다.전연우는 이미 자리에 앉았고, 도우미들은 두 세트의 그릇과 수저를 식탁에 올려놓았다.장소월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짓누르며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결국 그와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장소월은 고작 몇 입만 깨작거렸다. 전연우가 집어준 반찬은 손도 대지 않고서 말이다.어느덧 시간은 새벽 열두 시가 되어가고 있었다.전연우가 식사를 마쳤을 때, 식탁 위 반찬도 거의 식어버렸다.그가 젓가락을 내려놓은 그 순간 장소월이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약속한 대로 현아 무사히 집에 보내줘. 그러면 앞으로... 나도 어디에도 가지 않고 얌전히 남원 별장에만 있을게. 하지만 내가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일은 강제로 시키지 말았으면 좋겠어.”“난 성세 그룹 안주인이 되고 싶지 않아. 너랑 결혼은 더더욱 싫고.”“마지막으로... 네가 누구와 결혼하든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어.”짧은 자유를 끝으로 다시 집에 돌아오게 된 그녀는 또다시 영혼 없는 인형이 되어버렸다.3층 복도, 별이는 아직 울고 있었다. 하지만 살아있는 시체마냥 뚜벅뚜벅 걷고 있는 장소월의 귀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그녀는 침실로 돌아온 뒤 다시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반지를 발견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니 갑자기 피곤이 몰려와 빠르게 잠이 들었다.깊은 밤 고요한 서재 안, 전연우는 서랍 안에서 담배 한 대를 들고 돈뭉치를 꺼내놓았다.“아주머니가 마땅히 받아야 할 돈이에요.”은경애는 돈을 보고서도 바로 받지 않고 걱
장소월이 조심스레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아직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전연우가 경계심을 느끼는 범위 안까지 접근한다면 그는 분명 깨어날 것이다.그녀가 손을 뻗었다.“전... 전연우?”장소월이 낮게 그를 불렀다.하지만 그때, 돌연 전연우가 눈을 번쩍 떴다. 이어 손이 강력한 힘에 잡혀 끌려가더니 몸 전체가 침대에 널브러졌다. 전연우의 무거운 몸이 위에서 가녀린 그녀를 압박하고 있었다.장소월은 깜짝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겁에 질려있었다. 남자의 미세한 호흡이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전연우, 나 아파. 빨리 일어나.”그는 역시 반응이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장소월은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그의 체온이 무서울 정도로 뜨거웠기 때문이었다.고개를 떨구고 살펴보니 입고 있던 옅은 색 잠옷 치마가 빨간 피로 물들어 있었다. 장소월은 순간 호흡을 멈추었다. 그녀는 그제야 어제 전연우의 목에 생긴 상처가 치료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다.설마 세균에 감염된 건가?어쩐지 반응이 없더라니.“전연우, 빨리 깨어나. 나 아프단 말이야!”“...”“나쁜 놈아! 일어나라고!”장소월이 아무리 소리쳐도 전연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허리를 감고 있는 팔에선 조금도 힘을 풀지 않았다.“영수야, 너 어떻게 돌아온 거야!”그 말에 전연우가 돌연 눈을 뜨고는 고개까지 들고 날카로운 눈동자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의 호흡이 거칠어지니 몸에 찌든 니코틴 냄새가 더더욱 농후해졌다.“가면 안 돼!”그는 괴로움을 애써 참으며 힘겹게 짧은 네 글자를 내뱉었다.그가 키스하려 다가오자 장소월은 어디에서 힘이 솟아올랐는지 바로 그를 옆쪽으로 밀어버렸다. 그가 몸을 누르지 않으니 드디어 정상적으로 호흡할 수 있었다. 전연우는 언제부터인지 그녀의 손목을 꽉 잡고 있었다.그녀는 손을 빼내려 했으나 아무리 발버둥 쳐도 무용지물이었다. 하여 그녀는 전연우가 일부러 아픈 척하는 게 아닌지 의심까지 들었다.몇
배가 고픈 데다 아기들이 발길질까지 하니 더욱 아팠다. “아가들아, 제발 차지 마. 규영 언니랑 미진 언니가 곧 맛있는 거 가져다줄 거야.” 그녀가 배를 쓰다듬으며 아이들을 달랬다. 규영과 미진은 그녀의 애처로운 눈빛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뱃속 두 녀석들이 워낙 시끄럽게 움직이고 있으니 더는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알았어요, 아가씨. 간단히 드실 걸 가져다드릴게요. 여기 앉아서 절대 움직이지 마세요.” 그들은 걱정되는 마음에 거듭 당부했다. 소현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여기 이렇게 많은 언니들이 지켜보고 있잖아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절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게요.” 규영과 미진은 사람들에게 다시 신신당부한 뒤에야 먹을 것을 가지러 자리를 떴다. 지난번 일 이후로 다른 사람은 믿을 수 없게 되어 소현아의 음식은 반드시 그들이 직접 준비해야 했다.소현아는 혼자 소파에 앉아서 작게 아기들과 이야기했다. “아가들아, 소월 이모가 전연우 그 나쁜 놈한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내 전화를 왜 안 받은 거지?” “나 소월이가 너무 걱정돼. 근데 너희가 너무 무거워서 몰래 도망갈 수도 없어.” 그녀에게 돌아오는 답은 점점 잦아드는 태동뿐이었다. 소현아는 아기들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못마땅한 듯 입을 삐죽거렸다. 누군가 문을 열었는지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었다. 얇은 연노랑 잠옷만 입고 있던 소현아는 추위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곧이어 도우미들의 공손한 인사 소리가 들렸다. “효연 아가씨.” 천효연은 거만한 눈빛으로 그들을 훑어 보고는 곧장 위층으로 향했다. “여기 뒀던 내 꽃병은 어디 갔어?” 계단 모퉁이에 있던 꽃병이 사라진 걸 발견한 천효연이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현아 아가씨가 다치실까 봐 잠시 장식품들을 다 치웠습니다.” 소현아?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천효연의 눈동자에 냉기가 스쳤다. “그 바보는 지훈 씨가 방에 가둬놨잖아?” 도우미
엄마와 통화를 마친 뒤, 소현아는 장소월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전연우 그 나쁜 놈이 소월이를 괴롭히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혹시 소월이는 강용 소식을 알지 않을까... 소현아는 강지훈이 강용의 행방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장소월의 당부를 기억하며 감히 묻지 못했다. 통화음이 두 번 울린 뒤 전화가 연결되었다. 상대가 말하기도 전에 소현아는 흥분해서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소월아! 드디어 전화 받았네! 있잖아, 강지훈 그 나쁜 놈이 나 계속 방에 가둬놓고 문밖으로 못 나오게 했어. 나 진짜 답답해 미치겠어!” “널 여기 데려와 같이 놀려고 했는데, 강지훈의 말이 전연우 그 나쁜 놈이 너 안 보낸다고 하더라고. 둘 다 진짜 짜증 나! 내가 간신히 휴대폰 구해서 전화한 거야. 소월아, 그 나쁜 놈한테 말하고 이쪽으로 놀러 와줄 수 있어?” 한참을 떠들었을 때, 저쪽에서 낮고 위험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지훈이 내가 소월이를 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고? 언제 나한테 물어봤는데?” 소현아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몇 초 뒤에야 머뭇거리며 다시 말을 꺼냈다. “전... 전연우 씨? 왜 당신이 전화를 받아요?” 전연우가 차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쁜 놈이 전화를 받아서 많이 실망했나?” 소현아는 겁을 먹고 눈알만 뒤룩뒤룩 굴렸다. “저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잘못 들었어요! 소월이는요? 이거 소월이 폰이잖아요. 빨리 소월이한테 돌려줘요!” 전연우가 말했다. “소월이는 전화 안 받아. 다시 전화하지 마.” “소월이한테 나라고 말해줘요. 소월이가 제 전화 안 받을 리 없어요.”소현아는 다급함을 감추지 못했다. “앞으로 다시는 소월이 찾지 마. 바빠서 너랑 소꿉놀이할 시간 없으니까.” “그리고 강지훈한테 전해. 내게 터무니없는 누명 씌우지 말라고.” 전연우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소현아가 다시 걸어봤지만, 상대는 받지 않았다. “현아 아가씨, 이제 일어나서 운동할 시간이에요.” 규영과 미
소현아는 얼굴에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이빨 자국을 달고서 원망 어린 눈빛으로 강지훈을 바라보았다. 강지훈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내가 소월이한테 전화해도 돼요?” “그쪽에서 받기만 한다면야.” 소현아는 이제 아침에 있었던 불쾌한 일을 까맣게 잊은 듯했다. “저 밖에 나가서 놀고 싶어요!” 강지훈은 단칼에 거절했다. “안 돼.” 신이 나 붕방거리던 소현아는 김빠진 공처럼 순식간에 축 처져버렸다. “하지만 방에만 계속 있는 건 너무 따분하단 말이에요.” “절대 도망 안 갈게요. 여기 아기들도 있잖아요. 그냥 아래층에서 좀 돌아다니게만 해줘요, 네?” 그녀가 지금 머무는 방은 집에 있던 침실을 완벽하게 똑같이 복원한 곳이었다. 소현아는 이곳을 무척이나 좋아했었다.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최근 며칠 동안 줄곧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그녀는 방안을 끝없이 걷고 또 걸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방은 갑자기 창고로 변해버렸고, 아무리 깨려고 해도 도저히 깨어날 수가 없었다. 강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밥을 한입 삼키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연우 그 나쁜 놈도 소월이가 마당에서 그림 그리는 건 허락하던데... 강지훈 씨는 날 침실 밖에도 나가지 못하게 하네. 전연우보다도 더 나빠.” “...” “아래층에서만 놀아. 방을 나서면 규영과 미진이 따라갈 거야.”결국 강지훈이 한발 물러섰다. 소현아의 눈에 다시 별빛이 들어왔다. “음, 당신은 전연우 그 나쁜 놈보다 조금 나아요. 정말 아주 조금.” 아침을 먹고 난 뒤 소현아는 바로 휴대폰을 요구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거의 즉시 연결되었다. “현아니?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명세진의 목소리는 흥분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듯 조심스러웠다.오랜만에 엄마 목소리를 들으니 소현아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엄마,
강지훈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짙은 피비린내를 풍기며 돌아왔다.옆방에서 샤워를 마친 강지훈은 잠옷을 입고 소현아의 방으로 들어갔다.소현아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2.2미터나 되는 퀸사이즈 침대에서 편안하게 팔다리를 쭉 뻗은 채 말이다. 무슨 꿈을 꾸는지 웅얼거리며 입가에 흘린 침을 닦고 있었다.곤히 잠든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강지훈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침대 곁으로 다가간 그는 이불을 끌어다 그녀의 배를 덮어주고는 코를 꼬집었다.“윽...”잠시 후 소현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편한 듯 눈을 떴다.“강지훈 씨 너무 싫어요. 숨을 쉴 수가 없잖아요. 빨리 놔줘요.”침대 곁에 있는 사람을 본 소현아는 두 손으로 그의 손목을 잡고 떼어내려 했다.강지훈이 말했다. “말해 봐.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 제대로 말하면 놔줄게.”소현아는 씩씩거리며 눈을 감고 어쩔 수 없이 입으로 숨을 쉬었다. 가슴이 뻐끔뻐끔 부풀어 오르는 모습이 마치 복어 같았다.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입까지 막아버렸다.몇 초 지나지 않아 소현아는 다시 웅얼거리며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강지훈은 그저 잠시 그녀에게 장난을 치고 싶었을 뿐이지만, 한번 맛을 보니 멈출 수가 없었다.그는 손을 떼어 그녀의 허리에 얹고 반바지를 벗기려 했다.소현아는 필사적으로 바지를 붙잡고 엉덩이를 비틀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다.강지훈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손 놔. 살살할게.”“저 졸려요. 자고 싶으니까 강지훈 씨도 빨리 자요.”그녀는 강지훈이 또 키스하려 할까 봐 입술을 굳게 다물고 낑낑거리며 그를 밀치고는 죽은 척 눈을 감았다.강지훈이 어떻게 하든 소현아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정말로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곤히 잠든 그녀를 바라보는 강지훈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다음 날 아침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 꼭 안겨있었다. 그녀의 코끝에 그의 단단한 가슴이 닿아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어젯밤 일이 떠오른 소현아는 그의 가슴을 힘껏 깨물었다.곧이어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