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뜩 굳어버린 박연준을 바라보던 이유영은 앞에 있는 차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선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말해봐. 이번에는 또 누구 빽으로 협박할 건지. 손 대지 말라고 얘기할 거잖아.”“유영아...”“어차피 눈이 이렇게 됐으니 강서희가 먼저 덤벼들어도 놔줘야 한다는 거야?”박연준은 가슴이 미어졌다.강서희는 강이한에게 늘 경계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강서희가 잡혀간 후 진영숙이 무슨 수를 써도 강이한은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오히려 진영숙이 손을 쓰지 못하게 막았으니 강이한이 허락하지 않는 한, 아무도 강서희를 빼낼 수 없다.‘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나온 거지?’ “말을 못 하네?” 말이 없는 박연준을 보며 이유영은 웃었고, 그 웃음은 더욱 비꼬는 듯했다.그것은 박연준의 가슴을 더욱 조이게 했고 생전 느껴본 적 없는 괴로움이 밀려왔다.“내가 먼저 알아볼게.”“알아내면 어쩔 건데?”박연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유영이 받아쳤다. 어떻게 할 거냐는 이유영의 날카로운 질문과 눈빛은 박연준의 가슴은 더욱 조여왔다.강서희가 파리에 온다는 소식은 박연준에게도, 이유영에게도 충격이었다.아무도 엔데스 가문이 다음에 어떤 수를 쓸지, 이유영과 강이한이 다시 어떤 상황에 처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박연준의 마음은 폭풍 속에 놓인 듯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오랜 시간이 흐른 뒤, 박연준은 이유영을 바라보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유영아, 내가 지금 얼마나 힘든지 알아?”서주와 파리, 어디에 있든지 박연준은 항상 주도권을 쥔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유영을 마주할 때마다, 특히 그들이 수술을 받은 이후로 박연준은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 그녀 앞에서 무기력함을 느꼈다.이유영은 마치 절대 양보할 줄 모르는 사람 같았다.차갑게 모든 상황을 마주하며 날카롭게 몰아붙여 사람을 숨 막히게 만들었다.“무기력하겠지. 나도 그래.”“내가 연준 씨랑 강이한의 그림자에서 얼마나 벗어나고 싶었는지 알아? 두 사람은 단 한 번도 나한테 안정감을 준 적이 없어.”‘힘들다고
마치 이런 방식으로 박연준에게 상기시키는 듯했다.강이한의 세상에서 이온유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그리고 그 아이가 이유영에게 어떤 의미인지를.이온유를 언급하지 않으면 박연준은 아이의 존재를 잊고 있는듯했다. 그녀의 말에 박연준은 순간 숨 막힐듯한 고통이 밀려왔다.이온유는 한지음의 딸이다.이 불편한 진실을 이유영의 세상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에 제3자가 감히 왈가왈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강이한 나 때문에 모든 걸 잃었다고 할 수 있어?”‘모든 걸 잃었다고?’‘진정한 빈털터리가 어떤 건지 모르는 건가?’‘혼자 모든 걸 감당해야 하는 절망감을 알아? 끝없는 심연 속에 빠지는 그 고통을 아냐고.’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그럼에도 다들 강이한과 이유영을 비교했고 모두 강이한의 깊은 마음을 안타까워했다.그렇게 이유영은 강이한의 모든 걸 빼앗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냉혈한으로 남았다.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란 프레임이 씌워졌지만 그닥 나쁘지 않았다.아니, 어쩌면 이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 단호하고 차가워져야만 그 어떤 고통과 아픔을 느끼지 않으니까. “뭐가 됐든 어머님한테 이러는 건 너무 하잖아. 다 알게 됐으면서 왜 이래?”박연준의 목소리에는 긴장감이 담겨있었다.강이한에 대한 진실을 모르고 있다면 그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지만 모든 걸 다 알게 된 상황에서 진영숙과 충돌을 벌이는 게 납득되지 않았다.“지금 연준 씨가 얼마나 역겨운지 알아?”그녀는 마침내 박연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그녀 눈에는 오직 혐오만 가득했다.처음 보는 혐오스러운 눈빛에 박연준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강씨 가문 사람들이랑 똑같이 역겨워。”“너..."“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기분 더러우니까.”그 말을 들은 박연준이 머릿속이 어지러웠다.‘역겨워?’‘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이걸 강이한이 들었다면...’강이한을 향한 이유영의 냉정함과 차가움은 다시 한번 박연준의 인식을 상기시켰다.이유영은 그가 지금껏
지난 몇 년 동안 진영숙이든 강이한이든, 모두 강서희를 빼내려고 별의별 방법을 썼을지도 모른다.‘그런데 왜 지금까지 잠잠하다가 갑자기 나온 거지?’이유영이 오해를 하고 있었다.사실 강이한이 손을 써도 못 나온 게 아니라 모든 일의 진상을 알게 된 후 아예 강서희에게 관심조차 없었다.“엔데스 예준이야.”여진우가 이유영을 보며 말했다.‘엔데스 예준이라니?’ ‘그러니까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너랑 그 사람을 막으려는 거겠지.”예상치 못한 한방에 어안이 벙벙해진 이유영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무슨 의도로 이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설마 파리에 온 거야?” ‘진영숙이 쫓겨나자마자 강서희가 바로 등장하는 게 말이 돼?’만약 강서희가 엔데스 가문에 의해 파리로 왔다면 진영숙은 쫓겨날 필요도 없을 테니 앞으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안 봐도 뻔하다. “응.”엔데스 예준은 이미 파리에 발을 디뎠다.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걸 보면 그 역시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행동하는데 타고난듯하다.“일단 기다려.”이유영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비록 지금은 엔데스 예준이 무슨 의도인지 모르지만 이유영은 그가 자연스레 모든걸 알게 될거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보고 싶었다. 엔데스 가문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한지.“엔데스 예준이 무슨 계획인지 모르니까 너도 조심해.”“응, 알겠어."여진우가 뭘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었던 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강서희와의 악연을 생각하면 사실 둘이 만났을 때 무슨 일이 벌어져도 정상이었다.하지만 이제는 다르다.그녀의 뒤에 정씨 가문이 있으니 더 이상 예전처럼 제멋대로 굴 수 없었고 가문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요즘 따라 유난히 바쁜 여진우는 곧바로 자리를 떴다.이유영은 소파에 앉아 한참 동안 정신을 못 차렸다. ‘강서희... 정말 재주가 있네.’비록 강서희와 엔데스 예준의 연결고리는 모르지만 그녀가 풀려난 건 확실하니 지금껏 미묘했던 파리의 풍향이 완전히 뒤바뀔 거라는 예감
엔데스 신우든 종수든, 모두 이유영이 감정에 대해 완전히 냉담해져 있다는 걸 눈치챘다.마치 그 모든 것들이 자신과 아무 상관 없는 일처럼 절망한 채 철저하게 벽을 쳤다. 어쩌면 지금 이렇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일지도 모른다.“청하시에서 강씨 가문의 문턱은 가장 넘기 힘든 곳입니다.”“특히 강 사모님이 유영 씨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종수는 말끝을 흐렸지만 그것이 뭘 의미하는지 충분히 전달되었다.강이한에게 시집간 이유영이 그동안 어떤 삶을 보냈는지 알 수 있었다.엔데스 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이때 윤민성이 돌아왔다.엔디스 신우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윤민성을 보며 재빨리 입을 열었다. “처리했어?”“네. 강 사모님 측근 중에 눈치가 빠른 사람이 있더군요.”“떠나는 것까지 직접 확인해.”엔데스 신우는 그 어떤 실수도 용납하지 않을 태세였다.특히 오늘 진영숙을 본 후로 그녀가 절대 손 놓고 가만히 당할 스타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반면 이유영은 지금 어떤 상태인가?솔직히 진영숙에게 큰 영향을 받은 건 사실이었다.“알겠습니다.”윤민성이 고개를 끄덕였다.엔데스 신우가 여자 일에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걸 본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들 역시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일을 완벽하게 처리할 생각이었다.윤민성과 종수가 모두 물러나고 홀로 남은 엔데스 신우는 표정이 깊고 어두웠다.머릿속에서 오래된 기억들이 폭발하듯 떠오르며 줄곧 유지하던 차가움이 조금이나마 부드러워졌다....이유영이 백산 별장으로 돌아왔을 때 여진우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심각한 표정으로 기다리는 그의 모습에 이유영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채로 다가갔다. “왜그래? 무슨 일 있어?”‘혹시 진영숙의 일을 알고 있는 건가?”다시 생각해 보면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지만 그때의 행동에 대해 후회는 전혀 없었다.진영숙은 이유영에게 있어서 마치 죽어 마땅한 존재였다. 마음이 싱숭생숭했지만 다시 한번 기회가 온다 해도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여진우가 그녀를 바라보았
엔데스 신우는 그 말을 듣고 눈빛이 어두워졌다.“유영이가 싫다면 앞으로 그 사람들 다시는 못 마주치게 해줄게.”이유영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비로소 엔데스 신우가 강제로 차에 태울 때 주변 사람들에게 진영숙과 그녀의 주변 인물들을 모두 파리에서 쫓아내라고 지시했던 것이 생각났다.‘정말 쫓아낸 건가?’이렇게 강압적이고 제멋대로인 수법은 엔데스 가문의 남자들만이 할 수 있는 짓이다.하지만 이런 방법이 꽤 유용하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유영도 고민해 본 적이 있었으니까.특히 방금의 일 이후로 그녀는 계속 생각했다. 돌아가면 여진우에게 부탁해서 그 사람들을 파리에서 내쫓아버리자고.지겹고 싫증 나서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도 않았다.“고마워요.”마음만 먹으면 이유영도 충분히 취할 수 있는 조치였지만 엔데스 신우가 먼저 선수를 쳤으니 고맙다는 인사 정도는 하고 싶었다.감사 인사를 들은 엔데스 신우는 입꼬리가 올라갔다.“드디어 유영이가 예의를 차리는구나.”진영숙이 나타난 이후로 이유영은 줄곧 감정을 억제하지 못했다. 솔직히 그런 상황에서 예의를 차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디저트랑 차 맛있네요. 잘 먹을게요.”이유영은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경고도 했고 할 말도 다 했으니 이제 엔데스 신우가 어떻게 움직일지 지켜보면 될 일이었다.“가져갈 수 있게 더 준비해 놓을게.”“괜찮아요.”아무리 맛있는 것이라도 이유영은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식욕마저 사라진지 오래였다.엔데스 신우는 그녀의 우울한 모습을 바라보았다.진영숙 앞에서의 강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눈에는 감출 수 없는 슬픔이 가득했다.“유영아.”“네가 정씨 가문의 딸이긴 해도 모두가 널 이용하려는 건 아니야.”‘날 이용하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언제든 이용당할 수 있는 소용돌이 속에서 이유영은 조심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파리는 마치 안개처럼 다음 순간 무엇이 닥칠지 아무도 모르는 곳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경계심을 풀 수 있겠는가?
이유영은 앞에 있는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엔데스 가문 사람들은 신우 씨가 이렇게까지 잘 사는 걸 알고 있나요?” 그 말에 숨겨진 뜻은 깊고 심오했다. 가족들조차도 모를 정도로 너무 깊었다.“지금 나를 여우라고 욕하는 거야?”‘뭐지? 설마 독심술이라도 있나?’“여우? 신우 씨는 여우보다도 더 교활한 것 같아요.” 마치 박연준처럼.박연준이 강이한을 상대로 머리를 굴렸던 그 모든 것, 이유영은 전혀 몰랐다. 배후에 이런 것들이 숨겨졌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그리고 엔데스 신우.이유영의 눈에는 박연준과 마찬가지로 교활한 사람이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거의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엔데스 가문 사람들 중 그가 순진한 척한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알다시피 그들 중에는 착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건 엔데스 신우 역시 꽤 능력 있다는 걸 말해 준다.엔데스 신우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때마침 도우미가 차와 간식을 내왔는데 아주 맛있어 보였다.이유영은 방금 밥을 먹었음에도 또 배가 고팠다.하긴, 레스토랑 입구에서 진영숙과 큰 싸움을 벌였으니 체력이 상당히 소모됐을 것이다. “먹어봐.”이유영이 움직이지 않자 그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됐어요!”비록 배고프긴 했지만 그녀의 방어심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엔데스 신우도 이 점을 눈치채고는 한입 베어 물었다. 동작 하나하나가 우아함 그 자체였다.그리고 나서 남은 반 조각을 이유영의 입에 넣어 줬다.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이유영은 동공이 급격하게 흔들렸다.“독 없어.”남자는 부드럽게 웃었다.진영숙을 처리할 때의 날카로움과 위험함은 조금도 없었다. 어쩌면 이건 엔데스 가문 남자들의 일관된 수법일지도 모른다.앞뒤가 다르다는 건 아마 엔데스 가문 남자들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삼켜.”이유영이 뱉으려는 순간 엔데스 신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침이 묻었잖아요.”“그게 더러워?”남자의 차가운 손가락이 그녀의 입술을 스쳤고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