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서.이곳에 오는 건 소은지에게 있어서 처음이었다.차갑고 무미건조한 분위기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소은지는 예전에 많은 사람들을 도와 상대를 이곳에 보내기는 했지만 본인이 사건에 직접적으로 연루되어 경찰서로 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하지만 그 결정을 후회하지는 않았다.엔데스 명우와의 일이 있었던 후, 소은지는 가정 폭력을 행사하는 남자들에게 더욱 처참한 결과를 안겨주지 못해 아쉬워했을 뿐이다.“직계가족은?”경찰이 차갑게 물으면서 종이에 글을 적어 내려갔다.소은지는 그 말을 듣자마자 차갑게 굳어버렸다.할머니가 돌아간 이후, 소은지의 세상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그 여자는...게다가 그 여자는 얼마 전에 죽지 않았는가.이제 소은지의 세상에는 아무도 없었다.“없어요.”그렇게 얘기하는 소은지의 눈빛은 텅 비어 있었다. 마치 아무것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말이다.차갑기만 했던 경찰은 약간 누그러진 표정으로, 동정심 가득한 눈빛으로 소은지를 쳐다보았다.하지만 소은지는 동정할 대상이 아닌, 폭행 사건의 가해자였다....파리.이유영은 엔데스 신우 옆에서 바빠서 죽는 줄 알았다. 엔데스 현우가 떠난 뒤 모든 부담은 엔데스 신우가 떠안게 되었다.파리 내부의 모순은 몇 년간 이어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며칠 사이에 모두 사라져 버렸다.몸이 힘들긴 하지만 마음은 한결 편했다.씻고 침대에 누운 이유영은 유리창에 비치는 엔데스 신우의 실루엣을 보면서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이때 이유영의 전화가 진동했다.“여보세요.”비너스 타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 소은지의 전화인 줄 알았던 이유영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소식에 깜짝 놀랐다.“폭행이요?”소은지가 폭행을 했다는 것이었다.‘은지가 왜...’청하에서 오랫동안 알고 지내면서, 이유영은 소은지가 기가 센 여자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폭행은... 소은지가 사람을 폭행하는 건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래서 이유영은 그 사건의 가해자가 소은지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이마를 짚은 이
74번이라는 이름으로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던 기억은 여전히 굴욕적인 상처로 소은지의 가슴에 남아있었다.눈을 크게 뜬 소은지는 그 장면을 똑똑히 바라보았다.비너스 타운에 온 뒤로 소은지는 파리에서 있었던 일을 잊으려고 애썼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지금의 소은지에게 파리의 변화는 중요하지 않았다.하지만 이 장면을 눈앞에서 보고 있자니 잊고 싶었던 기억들이 머릿속으로 밀려 들어와 소은지의 이성을 좀먹었다.짝.뺨을 때리는 소리가 산에 울려 퍼졌다.소은지는 언제 이 남자 곁으로 온 것인지도 몰랐다. 다만 남자의 주먹이 다시 여자한테 닿기 전에 저도 모르게 이 남자의 뺨을 내치고 말았다.차가운 바람이 몰아쳤다.하지만 이 공간은 너무도 조용해서 서로의 호흡이 들릴 정도였다.남자는 흉포한 표정으로 소은지를 보면서 물었다.“넌 또 어디서 온 거야. 남의 가정사에 끼어들지 말고 꺼져!”퍽.말을 마치기 무섭게 소은지가 남자의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술에 취해 정신이 몽롱했던 남자는 갑작스러운 주먹 공격에 정신을 못 차리고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이윽고 소은지는 멈추지 않고 남자의 얼굴에 주먹을 박아 넣었다.어느새 눈밭을 물들인 피가 소은지의 얼굴에까지 튀었다.소은지는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 기억이 소은지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가져다준 것인지. 청하에서 소은지는 여자를 때리는 남자를 가장 증오했다. 그중에서도 가정폭력을 행사하는 남자는 더욱 최악이었다.소은지가 맡았던 가정폭력 연관의 재판도 거의 50회 이상이었다. 하지만 가정폭력 현장을 눈앞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그만, 그만해요! 이러다가 죽겠어요!”여자는 소은지가 남자를 거의 죽일 기세로 때리는 것을 보고 소은지를 안고 말렸다.“...”이 여자는 지금 남자가 죽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하지만 이 남자는 여자를 때릴 때 그런 생각을 했었을까?그 생각에 소은지는 더욱 화가 났다.“경찰에 신고할 거야! 감히 나를 때려?”
비너스 타운의 외곽.소은지는 앉아서 밖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흰 눈이 펑펑 내려서 하늘을 뒤덮을 정도였고 길에도 많은 눈이 쌓여있었다.주방에 돌아가서 확인해 보니 냉장고 속의 식재료가 거의 다 거덜이 났다. 이 눈은 거의 2주일 동안 지속되었다.이곳에 오기 전에 소은지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비너스 타운은 1년 사시절 봄처럼 따뜻하다고 했다. 소은지는 그 글을 쓴 사람이 봄과 겨울을 착각했나 생각할 정도였다.밖에서는 눈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창가에 가서 밖을 내다보자 제설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소은지는 얼른 옷을 갈아입고 나갈 준비를 했다.소은지는 조심스레 눈길 위를 운전했다.타이어가 눈 위를 밟는 뽀득뽀득 소리가 들렸왔고 소은지는 또 속도를 낮추었다.한 번도 이런 길을 운전해 본 적이 없었기에 조심해야 했다.하지만 아무리 조심해도 결국 사고가 났다.한 사람이 갑자기 차 앞에 나타났고 소은지는 그대로 브레이크를 확 밟았다.끼익.쿵.급정거에 타이어가 미끄러지며 그대로 무언가를 박아버렸다.속도가 느려서 몸에 큰 충격은 없었지만 머리는 멍했다.소은지는 차 앞에 누워있는 사람을 보면서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그리고 천천히 차에서 내려 하얀색 보닛 위에 붉은 손자국이 남은 것을 보고 긴장해서 숨이 떨렸다.그리고 얼른 바닥에 쓰러진 사람 옆으로 와서 물었다.“저기요, 괜찮으세요? 일어나봐요.”소은지는 그녀를 안아 일으킨 후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려고 했다. 하지만 피로 물든 차가운 손이 소은지의 손목을 잡았다.소은지가 고개를 숙이자 여자가 숨넘어갈 것 같은 말투로 얘기했다.“경찰서는 싫어요...”“그게...”“병원도 싫어요...”여자는 겨우 말을 이었다. 소은지는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었다.‘병원에 안 가면 어디로 가야 하지?’소은지가 심호흡한 뒤 물었다.“지금 상태는 어때요?”“난 괜찮아요.”두꺼운 옷을 입은 여자가 힘겹게 소은지의 품에서 일어나더니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그리고 경계하듯 사방을 둘러
그 순간 소은지는 바닥에 두껍게 깔린 눈을 보면서 담담하게 얘기했다.“응, 알아.”이유영은 그 말에 바로 소은지의 뜻을 이해했다. 할리 가문에서 이 소식을 공개한 것은 바로 소은지에게 알리기 위함이다.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소은지는...소은지 전화기 너머의 이유영이 얘기했다.“난 지금 잘 지내고 있어. 그 사람들이 없어서 행복해.”이유영은 소은지의 목소리에서 그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네가 행복하면 그걸로 된 거야.”이유영은 더 말하지 않고 소은지를 응원해 주었다.이유영은 항상 그랬다.소은지가 행복하다고 생각되면 다른 건 모두 중요하지 않았다.소은지는 너무 많은 일을 당했으니 이유영은 그런 소은지가 가장 중요했다.“그럼 이만 끊을게.”소은지가 이유영에게 얘기했다.이유영에게 전화를 건 것은 그저 이유영에게 소은지가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다.나무로 만든 집에 돌아온 소은지는 모닥불을 보면서 두꺼운 외투를 천천히 벗었다. 그리고 우유 한 잔을 부었다.소은지는 이곳의 우유 향을 아주 좋아했다....엔데스 명우는 계속해서 소은지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소은지는 정말 이 세상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아무리 애를 써도 소은지의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하선희의 장례식에도... 소은지는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 점에 모두 실망했다.하지만 하선희의 장례식이 지난 후, 파리에는 놀라운 소식이 전해져왔다.바로 엔데스 현우가 모든 것을 엔데스 신우에게 넘겨버리고 사라졌다는 것이다.어디로 간 것인지는 아무도 몰랐다.엔데스 명우는 그 소식을 듣고 가슴이 미칠 듯이 아파졌다.이유영은 엔데스 신우와 돌아가려고 했다. 엔데스 신우가 이 소식을 알려주었을 때, 이유영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엔데스 신우를 쳐다보았다.“엔데스 현우가 떠났다고요?”“응.”“모든 걸 신우 씨한테 넘기고?”“응.”“...”엔데스 현우는 이번에 떠나서 영영 돌아오지 않을 생각 같아 보였다.“뭐하려느고 그러는
하선희는 소은지의 집에서 2개월 정도 살았다. 그동안 계속 소은지가 집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하지만 소은지는 돌아오지 않았다.하선희는 마지막으로 수술실에 들어갔고 영원한 잠에 들게 되었다.소은지는 결국 하선희에게 미련을 남겨주었다.할리 민상은 하선희의 유골을 들고 파리로 돌아왔다.장례식 시간을 확정한 후 할리 민상은 바로 이유영에게 알려주었다.“만약 은지가 너한테 연락하면 알려줘. 장례식은 20일이라고.”바로 일주일 뒤였다.이렇게 오래 기다리는 것을 보니 할리 가문에는 소은지가 이 소식을 듣고 와주었으면 하는 것 같았다.이유영이 고개를 끄덕였다.“만약 저한테 연락한다면 제가 알려줄게요.”소은지가 이유영과 연락하지 않는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지금 온 세상에 하선희의 죽음이 알려졌다.이유영은 소은지가 그 소식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만약 소식을 듣고 나서도 아무 말 하지 않는다면 그건 소은지가 영원히 할리 가문을 만나지 않겠다는 것이다.즉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뜻이다....“할리 가문 쪽을 주시하고 있어.”엔데스 명우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진이형에게 얘기했다.할리 가문에서 하선희의 사망 소식을 공개한 것은 바로 소은지가 이 소식을 접하길 바랐기 때문이다.그리고 소은지가 하선희의 마지막 모습을 배웅해 줬으면 하기 때문이었다.진이형이 고개를 끄덕였다.“네.”공기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엔데스 명우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차가운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왜 아직도 찾지 못한 거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건 맞나?’엔데스 명우의 머릿속으로 그와 소은지가 함께했던 시간들이 지나갔다.즐겁지는 않은 기억들이다.‘설선비...’설선비의 모든 것은 설선비가 손수 망가뜨린 것이다.그런데 엔데스 명우가 무슨 자격으로...“진이형.”“네.”“소은지, 아마 날 죽도록 싫어하겠지?”엔데스 명우가 의미심장하게 물었다.진이형이 미간을 찌푸렸다.그동안 많은 사람들은 엔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연이은 실망이었다. 소은지는 일부러 숨은 것이다. 그들의 행적은 쉽게 알 수 있었기에, 소은지가 그들을 피해 숨는 것은 더욱 쉬웠다.소은지는 이제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다른 한편.그동안 엔데스 현우는 아주 바빴다. 소은지의 행방을 알고 싶었던 사람들은 모두 이유영에게 전화를 했지만 유독 엔데스 현우만은 하지 않았다.엔데스 현우는 미친 듯이 일에 몰두했다.“지금 엔데스 명우와 할리 가문에서 모두 소은지를 찾느라 혈안이 되어있어.”몇 개월이 지났다.그동안 대체 소은지는 어디에 있었느냔 말이다.어쩌면 소은지는 이미 하선희의 건강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파리는 은지의 실망과 절망으로 가득한 곳이야. 나라도 돌아오지 않겠어.”그리고 이곳의 사람들에게 행방을 알려주는 것도 싫었다.“하선희 씨의 병이 위독하대.”“항상 그랬던 거 아니었어?”하선희는 항상 위독한 편이었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지 않고 소은지를 찾아왔던 것을 생각하면 하선희가 얼마나 권세에 미쳐있는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그러니까 몸 상태가 더 위독해지지.’마음마저 편히 쉬지 못하니까 말이다.“어젯밤, 응급실에 실려 갔는데 아직도 나오지 못하고 있어.”“...”하지만 이번의 상황은 전과 또 달랐다.이유영이 미간을 찌푸리고 여진우를 보면서 물었다.“설마 너도 내가 은지가 어딨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유영아.”여진우는 이유영을 보면서 얘기했다.“어쩌면 이번이 하선희 씨한테는 마지막일지도 몰라.”하선희는 오직 자기 딸을 보고 싶은 마음 하나로 버텨왔다. 드디어 딸을 찾았고 만나보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 딸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니... 마음을 접기 더욱 어려울 것이다.하선희는 이미 소은지에게 상처를 주는 짓을 많이 했다.그러니 지금 후회한다고 해도 후회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그런데 하필 또 이때 소은지가 사라지다니.소은지는 영원히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할리 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