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걱정 마. 방법이 생기겠지.”강서희는 결국 정상적인 방법으로 처벌할 수 없을 것이다.하지만 이유영도 곱게 강서희를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소은지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친구를 바라봤다.“그래도 네가 이렇게 결심을 내려주니 안심은 되네.”그녀는 친구가 드디어 10년의 사랑을 내려놓고 일어서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며 약간의 위로를 받았다.“은지야.”“응?”“파리에 외삼촌 명의로 된 로펌이 있어. 너 그쪽으로 건너가.”“이유영!”“이 작은 청하시에서 높이 올라가봐야 얼마나 올라가겠어? 네 미래를 위해서라도 그쪽이 더 나아!”소은지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이유영을 바라봤다.아마 이유영은 강이한의 미친 모습을 보고 혹시라도 친구가 다칠까 봐 멀리 보내려는 게 분명했다.그리고 이유영과 강이한의 전쟁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다.“내가 그쪽에 모든 걸 준비해 놓을게. 지금 당장 떠나.”“안 가.”소은지는 고개를 저었다.“네가 안 가는데 내가 거길 왜가?”이유영이 모든 걸 내려놓았다는 걸 알지만 강이한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혼자 두고 갈 수는 없었다.그가 어떤 인간인기 겪어본 사람으로써, 강서희가 얼마나 미치광이인지 아는 사람으로써 절대 친구를 혼자 두고 갈 수 없었다.“너 걱정돼서 못 가. 이러다가 너 쓰러질까 봐.”“그게 무슨 소리야? 몸싸움하는 시대도 아니고.”긴장했던 분위기가 소은지의 말에 조금 풀어졌다.“어쨌든 안 가.”“강성건설 사건이랑 크리스탈 가든 문제가 해결되면 나도 그쪽으로 갈 거야.”이유영은 진지한 표정으로 소은지에게 말했다.“그때 가서 우리 같이 파리에서 살자. 어때?”지금 상황에서 무조건 소은지를 밖으로 내보내야 했다.소은지는 이유영의 눈에서 집착을 보았다.친구를 곤란하게 하기 싫었기에 결국 소은지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그럼 나랑 약속해. 강이한이랑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화해하지 않겠다고!”“그건 걱정 마!”이유영이 웃으며 말했다.한번 죽은 걸로 족했다
공항에서 나온 이유영은 지현우의 연락을 받고 회사로 향했다.안으로 들어가자 진영숙이 벌써 도착해 있었다.“유영아.”이렇게 많은 사고가 발생했는데 진영숙의 호칭은 평소 그 어느 때보다 살가웠다.안내 데스크 직원이 불안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대표님, 이 분이 대표님을 꼭 만나야 한다고 하셔서요.”이유영의 출근 시간은 정해진 게 아니었고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기다린다고 하는 사람을 만나면 굉장히 곤란했다.하지만 상대가 세강의 큰 사모님이었기에 아예 내쫓을 수도 없었다.아무리 안 좋은 기사가 요즘 돌아다니고 있다고 해도 일반 직장인이 재벌을 상대로 강경하게 나갈 수는 없었다.이유영은 괜찮다고 손짓하고는 싸늘한 눈으로 진영숙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오셨죠?”“서희가 너한테 잘못한 걸 알아….”진영숙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전에 본가에서도 너희 둘 사이가 안 좋았던 거 알아. 하지만 그건 내가 처신을 잘못해서 그런 게 커. 서희는 무고해.”“아마 한순간 충동으로 그런 일을 한 것 같은데 이만 용서해 주는 게 어떠니?”이유영은 덤덤한 얼굴로 진영숙을 바라보았다.이렇게 보면 강서희를 향한 진영숙의 사랑도 진짜였다.강서희가 처음부터 세강에서 입지를 굳힐 수 있었던 것도 아마 진영숙의 사랑 덕분이었을 것이다.안타깝게도 강서희는 만족할 줄 모르는 인간이었다.이유영이 세강의 며느리로 있을 때도 강서희는 둘만 있을 때 굉장한 적의를 드러냈다. 그때는 가족이라 까발리기 싫어서 가만히 있었지만 지금은 참아줄 이유가 전혀 없었다.“강서희 집으로 돌아갔을 거예요.”“도… 돌아갔다고?”“네.”“내가 서희 대신해서 사과할게. 이한이랑은 절대 이번 일로 멀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진영숙은 여전히 이유영이 가진 배경에 대해 굉장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기사에서 그렇게 시끄럽게 떠들어대는데도 모르는 척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게 대단했다.‘이런 사람이니까 그 까다로운 노부인 눈에 들었겠지.’이유영이 말했다.“사과는 됐고 정정
진영숙이 원하는 며느리 기준은 강서희가 아끼는 양녀라고 해서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딸처럼 키운 강서희를 며느리로 맞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본가.돌아온 강서희를 본 왕숙은 호들갑을 떨며 그녀를 위해 진수성찬을 차렸다“아가씨, 추웠죠? 뭐라도 좀 드실래요?”“아줌마!”왕숙을 본 강서희는 눈물을 글썽이며 서러움을 토로했다.처음 조사실에서 긴 조사를 받은 그녀는 멘탈이 이미 붕괴된 상태였다.“돌아왔으면 된 거죠. 무사히 돌아왔으면 된 거예요.”왕숙은 안쓰러운 얼굴로 다가가서 강서희를 다독였다.강서희도 처음으로 고용인의 신체적 접촉을 반감하지 않았다. 지금의 그녀는 위로가 필요했다.“괜찮아요. 이제 다 괜찮아요.”왕숙은 구슬픈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강서희를 꼭 안아주었다.집으로 돌아온 진영숙은 강서희를 안고 있는 왕숙의 모습이 어딘가 거슬렸다.진영숙의 신변에서 가장 오래 일한 사람이 왕숙이었지만 처음 보이는 따스한 모습이었다.순간 스치는 생각에 잠깐 등골이 오싹했다. 하지만 진영숙은 이내 그 생각을 포기했다.‘그럴 리 없어. 아줌마는 내가 잘 알아.’진영숙이 헛기침을 하며 안으로 들어가자 강서희는 급기야 왕숙의 품에서 벗어나 진영숙에게로 다가갔다.“엄마!”그리고 무진장 서러운 얼굴로 눈물을 글썽이며 엄마를 향해 손을 뻗었다.진영숙의 양녀로 살면서 많은 일을 격어 보았지만 어젯밤처럼 두려웠던 적은 없었다.아무리 그녀가 준비해온 대사로 넘기려고 해도 확실한 증거와 반복되는 질문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었다.그러고 보니 이유영이 이번에 진짜 작정하고 일을 저지른 것 같았다.강서희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타이밍에 치고 들어온 공격이라 더 충격이 심했다. 그리고 이유영이 어떻게 그 증거들을 수집했는지도 수상했다.하지만 그런 강서희도 강이한의 압력이 없었더라면 그 기나긴 조사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만큼 이유영이 제출한 증거는 확실했다.강이한이 소은지를 가지고 협박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재판까지 갔을 수도
그녀는 줄곧 강서희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엄마, 왜 그런 눈으로 봐?”강서희는 미묘한 진영숙의 눈빛에 소름이 돋았다.진영숙은 뭔가 놓친 것을 찾으려는 듯한 눈빛으로 강서희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강서희는 진영숙이 말이 없자 더 당황스러웠다.“이유영한테는… 사실 나도 사정이 있었어! 이유영이 날 그렇게 만들었어.”당황한 강서희가 횡설수설했다.전에도 엄격한 면이 있었던 진영숙이지만 지금처럼 진지하고 정색했던 적이 없었다.이유영의 진짜 신분이 공개된 뒤로 진영숙은 계속해서 강서희에게 이유영을 건들지 말라고 경고했다.이번에 강서희가 경찰서에 불려간 것도 이유영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퍼뜨렸다가 걸려서 경찰에 넘겨진 것이었다.분명 새로 판 계정이고 ip 관리도 확실하게 해서 문제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쉽게 잡혔다는 게 의아했다.강서희는 지금에 와서야 이유영이 더 이상 옛날에 당하기만 하던 나약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그녀의 주변에는 수많은 인재가 있었고 강서희도 모르는 정보들을 가지고 있었다.강서희는 이유영에게 든든한 지원군이 나타날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기에 처음에 이 일을 설계할 때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깔끔하게 처리했어야 했는데!’강서희는 정국진에게 꼬리를 잡히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그리고 해외로 도망갔는데 여태 연락이 닿지 않는 공범도 떠올랐다. 아직 미납금도 있는데 연락을 끊은 것을 보면 추적을 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지금 강서희가 두려운 것은 이유영이 그를 찾아내서 모든 진실이 드러나는 것이었다.그녀는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진영숙을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다가가서 진영숙의 손을 잡았다.“엄마.”하지만 날이 선 진영숙의 시선은 쉽사리 좋아지지 않았다.“내가 잘못했어! 내가 잠깐 미쳤나 봐!”“왜지? 왜 그랬어?”진영숙이 날이 선 말투로 물었다.“엄마….”갑작스러운 질문에 강서
“아줌마, 그만 얘기해. 다 내 잘못이야!”강서희는 왕숙을 말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 모습을 보면 순한 양이 따로 없었다.하지만 진영숙은 쉽게 속지 않았다.그녀는 더 이상 강서희의 그런 모습에 마음이 약해져 말투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진영숙은 원래 이기적인 인간이었다. 마음에 의심의 불꽃이 심어졌으니 그것을 전부 소멸시키기에는 부족했다.“아줌마는 나가 있어!”싸늘한 목소리에서 위엄이 묻어났다.왕숙은 뭐라도 더 말하고 싶었지만 기세등등한 진영숙의 모습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결국 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강서희를 한번 쳐다보고는 마지못해 밖으로 나갔다.거실에 둘만 남게 되자 강서희는 잘못을 한 어린아이처럼 진영숙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폈다.매번 이런 얼굴을 할 때면 진영숙은 마음이 약해져 체벌을 멈추었지만 오늘은 뭔가 달랐다.진영숙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강서희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엄마!”드디어 진영숙이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서희야, 솔직히 말해봐. 너 네 오빠를 어떻게 생각하니?”“뭐?”예상치 못했던 질문에 강서희가 당황했다.이미 어젯밤 조사실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정신력을 다 소모했기에 지금은 간신히 정신을 붙잡고 있는 상태였다.“묻잖니.”강서희가 답이 없자 진영숙의 눈빛이 더 날카로워졌다.양녀를 아끼는 건 변함이 없지만 그 사랑에도 선이라는 게 있었다. 어릴 때 집으로 데려왔을 때부터 모든 사랑을 주며 키웠건만 그건 강서희를 딸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강서희에게 맞선 자리를 추천할 때도 여느 엄마들처럼 딸을 위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골랐다.세강을 위한 일이기도 했지만 진심으로 강서희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강서희를 며느리로 받아들인다는 얘기는 아니었다.예전에 왕숙이 비슷한 얘기를 꺼낸 적 있을 때도 버럭 화를 냈던 진영숙이었다.이유영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한 결과, 진영숙은 딸의 마음을 어쩌면 한 번도 제대로 들여다본 적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오빠는 좋은 사람
고개를 끄덕이는 그 모습을 보며 진영숙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었다. 그녀는 서늘한 얼굴로 강서희의 손을 쳐냈다.“엄마?”강서희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진영숙을 바라보았다.진영숙은 날이 선 눈으로 강서희를 노려보며 질책했다.“내가 정말 호랑이 새끼를 키웠구나. 그렇지 않니?”“엄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강서희는 당황한 얼굴로 엄마를 바라보았다. 평생 자신을 아껴주고 사랑해 주던 엄마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에 속이 타들어갔다.예전에는 아무리 잘못을 해도 이런 눈으로 자신을 쳐다본 적이 없던 엄마였다.그런 엄마가 예전에 혐오스럽다는 듯이 이유영을 노려보던 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왜 이렇게 된 거지?“엄마!”짝!엄마 소리를 듣자마자 진영숙은 손을 번쩍 들어 강서희의 귀뺨을 때렸다.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이쪽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왕숙이 달려나왔다.“사모님, 갑자기 왜 이러세요?”강서희가 맞는 것을 보고 왕숙은 당황해서 어쩔 바를 몰라했다.“하룻밤을 꼬박 새우고 돌아온 아가씨예요. 이러시면 안 돼요, 사모님!”“은혜도 모르는 년!”진영숙은 욕설을 퍼부으며 당장이라도 강서희를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았다.이미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고 충격으로 이성은 사라진지 오래였다.애지중지 키운 양녀가 자신의 소중한 아들에게 그런 생각을 품었다는 것을 진영숙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어쩌면 예전에 자신마저 강서희에게 속아서 놀아났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더 분노가 치밀었다.“사모님, 잘 보세요. 사모님이 가장 아끼던 서희 아가씨잖아요. 작은 사모님이 아니라!”왕숙은 진영숙이 미쳐서 사람을 잘못 알아본다고 생각했다.예전에는 누구보다 강서희의 말을 들어주고 아껴주었던 진영숙이었다.진영숙의 악한 모습은 거의 이유영을 마주할 때만 드러났다.진영숙은 왕숙의 손길을 뿌리치고 강서희를 손가락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이한이는 네 오빠야!”“내가 널 딸로 거둔 건 너한테 그런 파렴치한 생각을 품으라고 거둔 게 아니란 말이다!
“천천히 설명해 봐요.”이유영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지현우는 다가와서 굳은 표정으로 서류 뭉치를 그녀에게 건넸다.이유영은 보자마자 가슴이 철렁했다. 굳이 서류를 확인하지 않고 지현우의 표정만 봐도 뭔가 잘못 됐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그리고 서류를 확인한 그녀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원자재 교체 증명에 그녀의 친필 사인이 버젓이 있었다.“이게 무슨….”“지난 번에 원자재 문제로 의심 받았던 제품들 생산 일자를 확인해 봤는데 대표님이 사인하고 일주일 후에 생산된 제품들입니다.”이유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그녀는 반복해서 서류를 확인했지만 그녀의 친필 사인이 맞았다. ‘내가 이런 서류에 사인했다고?’그녀는 고개를 들고 지현우를 보며 말했다.“난 이런 서류에 사인한 적 없어요!”이유영은 등골이 오싹했다.전혀 기억에 없는 서류였다.“대표님 글씨가 맞나요?”지현우가 정색하며 물었다.글씨체는 이유영의 것이 분명했으나 그녀는 이런 서류에 사인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교체된 원자재의 가격 차이를 확인해 보면 천문학적인 숫자였다.그것도 시중에서 판매되는 중에 가장 싸고 품질이 안 좋은 자재들만 모아놓은 서류였다.사인도 문제지만 그녀는 전혀 본 적도 없는 자재들이었다.“공장 쪽에서도 대표님께서 왜 이런 서류에 사인했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답변이 왔습니다. 하지만 제품 자체는 우리 공장에서 생산해서 나간 것이 맞습니다.”“그래서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죠?”“회사는 어쩌면 생각보다 더 큰 위기를 맞게 될지도 모릅니다.”지현우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크리스탈 가든의 액세서리는 전부 한정판 제품이었다.생산 수량이 제한되어 있고 세트마다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 브랜드의 제품에 단가가 5천원 도 안되는 자재가 섞인 것이다.중요한 건 이유영의 친필로 사인한 거라 조사가 내려온다면 이유영은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이 서류 내가 사인한 게 아닌 건 확실해요. 어떻게 된 건지 다시 알아봐 주세요.”이유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비록 강이한이 얼마나 비열한 인간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사람을 절박하게 할 줄은 몰랐다.그가 적을 상대할 때 얼마나 잔인한 수법을 썼는지 옆에서 지켜봤지만 그 수단을 자신에게 쓸 줄이야!아마 외삼촌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그녀는 경찰서에 잡혀갔을지도 모른다.이유영은 결국 강이한의 미친 정도를 과소평가했던 것이다.세강그룹.남자는 창가에 서서 먼산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 있었다.그의 주변으로 서늘한 공기가 무겁게 맴돌고 있었다.핸드폰으로 문자를 확인한 조형욱이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대표님. 한지음 씨가 다친 것 같습니다.”“어떻게 된 거지?”그의 목소리에서 긴장감이 묻어났다.그는 어린 한지음이 당한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쓰렸다.오빠인 한지석은 자신을 위하다가 죽었는데 동생인 그녀는 결국 그와 이유영의 사랑 싸움에서 희생양이 되어버린 것이다.강이한은 조형욱을 시켜 최근 한지음에게 접근했던 사람들을 알아보게 했다.이유영과 한지음 사이에는 딱히 밀접한 접촉이 없었다. 다만 이유영의 계좌에서 빠져나간 돈을 받은 사람이 한지음을 찾아가서 협박했을 뿐이었다.온화하고 순종적인 줄로만 알았던 여자가 이렇게 악랄한 사람이었을 줄이야!“앞이 보이지 않아서 욕실에서 나올 때 미끄러졌는데 머리를 세면대에 박아서 피를 많이 흘렸다고 합니다.”“그렇게 심각해?”“네.”뒤돌아선 강이한은 결국 외투를 챙기고 밖으로 나갔고 조형욱이 그의 뒤를 따랐다.강이한의 본가.이유영이 생각했던 대로 교활한 강서희는 결국 그 세치혀로 강이한을 오빠로만 생각한다고 우겼다.그녀는 더럽고 추악한 여자들이 오빠에게 접근하는 게 싫어서 혼내줬을 뿐인데 그런 오해를 받을 줄은 모른다고 말했다.그렇게 겨우 진영숙의 화를 달랠 수 있었다.“사모님, 아가씨는 그런 사람 아니라고 제가 말했잖아요.”왕숙도 옆에서 거들었다.진영숙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강서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결국 표정을 누그러뜨렸다.“서희야.”“응, 엄마.”“넌 내 딸이고 가지지 말아야 할 욕
공기가 얼어붙었다.“쾅!”잠시 후, 전화기 너머로 박연준이 탁자를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박연준의 억눌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가서 유영이를 백산 별장으로 데려가.”이유영은 미친 게 분명했다.‘감히 엔데스 셋째 도련님 같은 인물과 술집에 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건가?’정국진이라면 이유영이 엔데스 신우와 가까워지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특히 지금처럼 민감한 시기엔 더욱 반대가 심할 것이다. 박연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고 남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문기원이 급히 박연준을 따라나섰다.“네!”위험한 박연준의 모습에 용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대답했다.강이한이 각막을 이유영에게 이식해 주려고 할 때 왜 박연준이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되는 듯했다.지금 이유영 곁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그녀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과거의 그녀는 마치 강이한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는 천사 같았다. 하지만 혼란을 겪은 이후 그녀는 변했다.거만하고 방탕하게 아무하고도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지금 박연준이 생각했을 때, 이유영은 더 이상 고상하고 단정한 명문가의 며느리가 아니라 그저 자유롭게 떠도는 바람 같은 여자였다.최근 그녀는 서재욱과 엔데스 신우와 모호하기 짝이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서주에서.박연준이 차에 타기 전, 문기원이 그를 붙들었다.“선생님, 선생님!”“비켜.”“오늘 정말 중요한 회의입니다.”문기원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은 서주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기에 이유영을 생각하면 문기원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정말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박연준 곁에 있는 문기원조차 그녀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박연준이 돌아서기를 기다렸다.박연준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눈을 감은 순간, 그의 눈빛 속 날카로움은 잠시 가려졌지만 몸 전체에서 풍겨 나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은 고민에 휩싸일 때마다 이런 방식을 택했다.하지만 결국 이런 방식은 오히려 고민에 잠긴 마음을 더욱 괴롭힐 뿐이었다.한번 마음에 깊이 새겨진 근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었다.“죄송합니다만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그녀의 몸은 항상 술을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예전에 건강이 좋지 않기도 했고 어렵게 다시 찾은 시력인 만큼 그녀는 술과 더욱 멀리하게 되었다.하지만 오늘 진영숙이 백산 별장에서 벌인 일을 생각하니 이유영의 마음속에서는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 감정을 억눌렀다. 그녀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회피하는 것인지 아니면 받아들인 건지 알 수 없었다.남자는 그 말을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깜빡했네요.”남자의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괜찮아요.”“...”“이제 가도 될까요?”“술을 마시지 않아도 즐길 수 있잖아요.”“...”하지만 이유영은 이런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특히 많이 노출된 옷을 입은 여자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녀에게 반항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그녀를 향락의 세계로 이끌었다....한편 박연준은 서주에서 중요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용준의 전화를 받은 그의 가슴이 쿵쾅거렸다.“그쪽은 괜찮아?”진영숙에 관해 묻는 것이었다.이유영이 인정사정없을 거라는 걸 박연준도 알고 있었다.과거 강이한 곁에 있을 때의 이유영을 떠올렸다. 그때의 그녀는 적어도 강이한에게 만큼은 너무 몰아붙이지 않았었다.그래서 진영숙이 아무리 이유영을 괴롭혀도 그녀는 어떻게든 참고 견뎠다.지금은 성격이 점점 더 나빠졌다고 해야 할까? 아예 참는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용준은 진영숙의 현재 상황을 박연준에게 설명했고 이미 좋지 않았던 박연준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회의 끝나고 바로 갈게. 일단 진정시켜.”박연준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일이 있었는데 과연 내가 진정시킬 수 있을까?’“네!”“유영이는
“박연준, 네가 강이한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고 또 이제는 강이한 어머니까지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난 여태 몰랐네.”그 말은 날 선 조롱처럼 들렸다.동시에, 과거 강이한과 박연준의 사이가 이유영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 되새기게 했다.그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유영의 냉정한 말에 박연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다른 일 있어서 먼저 끊을게.”이유여은 박연준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사랑이란 그저 우스운 감정에 불과했다.차는 천천히 백산 별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지혁 씨.”“네.”“지혁 씨는 사랑해 본 적 있어요?”이유영은 지혁을 향해 불쑥 물었다.예전의 이유영은 사랑이란 존재를 믿어 왔지만 지금은 아니다. 누군가를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그토록 반짝이던 사랑이란 단어 뒤편에 어떤 진실이 숨어 있었는지 이젠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의 말을 들은 지혁은 묵묵히 앞을 응시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핸들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이유영은 굳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쾅!”그 순간, 갑작스러운 충격음과 함께 추돌 사고가 발생했다.이유영은 아픈 이마를 짚고 있었고 지혁은 차에서 내려 사고 처리를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차 문이 열렸다.“아가씨.”지혁이 이유영 앞에 공손하게 나타났다.“무슨 일이에요?”“셋째 도련님 차입니다.”“...”그 말을 듣고 그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자꾸 나타나는 셋째 도련님의 존재에 우연한 사고인지 아니면 이미 계획된 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이유영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어떻게 된 거예요?”“셋째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이유영은 이 전설 속의 셋째 도련님을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특히 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밖에서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유영은 몰랐다. 그 아이가 결국 진영숙이 데려온 의사로 인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줄은.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아!”분노가 치밀수록 이유영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고 진영숙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녀는 이유영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놔, 놔 이 미친년아! 악!”“짝!”이유영의 손바닥이 진영숙의 뺨을 후려쳤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말릴 용기를 잃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이유영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다시 한번 움찔하고 말았다.이유영의 행동에 소리 내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숨을 삼켰다. 진영숙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결국 이유영은 진영숙을 놓아주며 말했다.“주제 파악하라는 의미에서 그랬어요. 당신은 할머니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에요.”그렇다. 진영숙은 할머니가 될 자격이 없었기에 이유영도 그녀를 아무 감정 없이 내던질 수 있었다.진영숙의 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머릿속이 멍해진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그 사이 이유영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저년이 감히...”감히 뭐라고?예전엔 강이한 곁에서 순한 토끼처럼 보호받더니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이유영이 밖으로 나왔을 때,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를 감쌌다.그 순간, 가슴속의 억눌린 감정이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지혁은 이유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용준을 밀쳐내고 앞으로 다가왔다.“아가씨.”“가요.”용준은 여전히 당당한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유영의 휴대폰이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박연준이었다.차에 오르자마자 전화를 받은 이유영의 모습은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여보세요.”“어디야?”“풍산.”“유영아...”전화 너머의 남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박연준은 지금 이유영이 강씨 집안을 어떤 태도로 맞서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강씨 집안에서 강이한이 곁에 없는 동안에는 진영숙의 말에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홍문동으로 이사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진영숙이 찾아오면 이유영은 그녀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고 감히 그녀의 말에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도대체 언제부터일까?’아마 강이한과의 이혼을 결심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즈음부터 이유영은 진영숙의 말에 더 이상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그땐 고작 진영숙의 지시를 어기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감히 나한테 손을 대?”한참 뒤에야 겨우 말을 꺼낸 진영숙이 이유영을 노려보았다. 눈빛에는 이빨을 드러낸 짐승 같은 기세가 실려 있었다.이유영은 고작 이런 걸로 화를 내는 진영숙이 가소로웠다.이유영은 아직 다 마시지 않은 따뜻한 물이 담긴 잔을 들고 망설임도 없이 진영숙의 얼굴에 뿌렸다.“앗!”진영숙은 비명을 질렀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손을 댄다는 건 이런 거예요.”이유영은 바닥에 주저앉은 진영숙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퍽!”손에 들고 있던 잔이 손끝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산산조각 났다.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예전의 풍산 사람들이 기억하던 이유영은 언제나 조용하고 온순한 여인이었다. 누가 감히 지금 이유영의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분노로 찬 이유영은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진영숙 역시 이유영을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예전에도 이유영에게 자주 화가 났지만 오늘처럼은 아니었다.진영숙은 분노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유영은 격하게 숨을 들이마신 진영숙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다시 백산 별장에 가거나 우리 가족 근처에 얼씬거리면 그땐 당신 진짜 가만 안 둬.”그 마지막 한마디는 징벌처럼 무겁고 섬뜩할 만큼 냉정했다.월이는 이유영의 세상 전부이자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힘들게 월이를 낳으면서 강씨 가문은 이 아이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아
끊임없이 박연준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던 강이한의 모습을 이유영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두 사람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사이였다.늘 서로를 원수처럼 대했고 그 모습을 본 이유영도 두 사람 사이에 과거의 악연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악연이 한 여자 때문이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 여자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지는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은 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모든 게 이토록 명백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영만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그 7년 동안 강이한은 얼마나 다정했던가?그 친절함 속에 실은 다른 여인을 향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이유영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박연준은 강이한의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었다.이건 과거의 이유영이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일이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다시 실감하고 있었다.“어쨌든 강이한 씨의 어머니잖아요.”조금 전 용준이 한 말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마치 우스운 농담을 듣는 듯했다.“형님이 돌아오신 후에 처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용준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 공손함 속에는 이유영을 절대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었다.이유영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진영숙이 월이를 데려가려 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의 분노는 가슴 깊이 타오르고 있었다.“지혁 씨.”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지혁을 불렀다.지혁은 그녀의 뒤에 있다가 곧장 앞으로 나섰다.“네, 아가씨.”“전 들어가야겠어요.”이유영이 내뱉은 짧은 문장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용준은 지금까지 이유영의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 냉혹함에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네!”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지혁은 곧장 앞으로 다가섰다. 분위기는 마치 폭발할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이유영은 어지럽게 엉킨 현장을 냉정히 바라보며 우아하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용준은 지혁을 막으려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
이유영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그녀는 임소미의 품에 파고들며 가느다란 팔로 어머니의 허리를 꼭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었다.오래전 소은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강이한은 연애 상대론 괜찮지만 결혼은 다르다고.그때 변호사였던 소은지는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맞지 않는 결혼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강이한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소은지는 그녀를 말렸었다. 소은지는 그녀의 결혼을 말렸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결국 소은지의 말은 모두 옳았음이 증명됐다.끝났다고 믿었던 그 관계는 여전히 그녀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때, 등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앞으로는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이유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올랐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뺨을 따라 끝없이 흘러내렸다.예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품어주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모두 혼자 견뎌야만 했다.임소미가 감싸안아 주자 이유영의 마음은 다시금 따뜻함으로 물들어갔다.그리고 이 감정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앞으로는 아무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가 말한 '아무도'는 명백히 진영숙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사람에게서 다시 이런 고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엄마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임소미는 그 말을 반복하듯 속삭였다.오늘 밤, 임소미의 마음속에 일어난 파장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진영숙이 막말을 퍼붓고 손까지 쓰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이 강씨 가문에서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를 임소미는 문득 깨달았다.사모님의 우아한 모습은 진영숙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다.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손부터 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살아야
이유영이 돌아오고 그녀는 진영숙과 임소미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명의 도우미가 진영숙을 붙잡아 끌어내고 있었다.임소미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쳤다.임소미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재빨리 붙잡고 말했다.“너 먼저 위로 올라가.”“무슨 일이 있었어?”이유영이 물었다.정씨 가문에 돌아온 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우아하고 온화한 사람인 만큼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이유영, 넌 누가 너한테 눈을 기증해 줬는지 모르지? 강이한이 네게 빚을 졌다고 하지만 사실은...”“입 다물어!”진영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소미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고 진영숙은 여전히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이유영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엔 전례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도 진영숙은 이유영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 용성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증오가 더욱 깊어진 듯했다.“유영아, 너 먼저 위로 올라가.”“엄마.”“올라가!”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격하게 소리쳤다.임소미가 이런 식으로 이유영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임소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유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진영숙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도우미들의 손을 뿌리치고 이유영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유영, 강이한은 너에게 빚진 게 없어. 강이한은 오히려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너야말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네 눈조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