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한마디가 떨어지자, 차 안의 공기가 한순간 얼어붙었다.차 안에 있던 강이한과 이유영 외의 모든 사람, 특히 우지와 우현은 숨조차 삼가며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았다.모두가 이유영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기운을 선명히 느꼈다.강이한도 마찬가지였다. 연서라는 사람이 강이한에서 어떤 존재인지, 그 문서를 보게 된 이유영도 잘 알고 있었다.연서는 강이한에게 있어 한지음이나 이온유보다 훨씬 더 중요한 존재였다.그 오랜 세월 동안, 강이한은 오늘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입 밖에 내었다. 그만큼 그 이름은 강이한의 마음속 깊이 봉인된 듯한 존재였다.그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마다 그는 견딜 수 없는 고통에 휩싸였다.그 이름만 떠올려도 그의 가슴은 터질 듯한 고통으로 무너졌다.그리고 지금, 연서의 이름을 다시 언급하자 강이한의 마음은 다시금 옥죄어왔다.연서...“하하.”이유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차가운 비웃음이었다.그 비웃음은 강이한의 가슴을 더욱 답답하게 했다.“유영아...”“강이한, 만약 연서가 아직 살아 있다면, 그 여자가 너에게 날 죽이라고 하면, 너는 그렇게 할 거야?”“...”강이한은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하지만 이유영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한지음을 위해서도 이유영에게 그렇게 잔혹하게 굴었던 강이한이다. 만약 그것이 연서라면? 이유영에게는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이유영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그 태도는 강이한의 숨을 더 답답하게 만들었다.“유영아, 사실은...”“그럴 거야, 맞지?”“아니!”강이한은 고개를 저었다.그러나 그의 부정에도 이유영의 냉소는 더욱 짙어졌다.“한지음을 위해서 넌 강무혁을 감옥에 보냈잖아. 연서는 한지음보다 훨씬 중요한 존재 아닌가?”지금 와서 아니라고? 누가 믿겠는가!강이한은 몸이 굳어버렸다.강이한이 무언가를 말하기도 전에 이유영은 다시 입을 열었다.“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해도 의미 없어.”“홍문동 그 화재에 대해 난 전혀 몰랐어!”이유영이 예전에 말
차에서 내릴 때, 강이한이 자연스레 이유영을 안으려 손을 뻗었지만, 이유영의 단호한 목소리가 먼저 울려 퍼졌다.“우지 씨.”“네, 아가씨.”강이한의 손이 닿기 전, 우지가 서둘러 다가와 이유영의 곁에 섰다. 우지는 이유영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고 차에서 내리도록 도왔다.이유영은 귀를 기울이며, 주변의 적막함과 선선한 바람 속에서 지금이 밤임을 직감했다.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공기는 차갑지 않고 오히려 기분 좋게 부드러웠다. 어디선가 은은한 꽃향기가 풍겨왔다. 어떤 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향기는 달콤하면서도 상쾌했다.입구에서.우지와 우현이 이유영을 부축하며 말했다.“아가씨, 조심하세요. 문턱이 있어요.”문턱? 강이한이 데려온 곳은 대체 어떤 곳일까? 이유영의 마음속에 의문이 떠올랐다.집 안에 들어서자 은은한 나무 향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그리고 은은한 페인트 냄새도 섞여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냄새였지만 기분 나쁘지 않고 오히려 안정감을 주는 향이었다.“선생님, 돌아오셨군요.”집사가 다가와 공손히 강이한에게 인사했다.강이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당분간 여기서 머물 거예요.”“예,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집사는 공손히 대답했다.강이한은 이미 도착 전에 이곳을 정리하도록 지시했던 듯했다.전통 가옥의 집은 제대로 청소하고 정돈해야 비로소 편안하게 머무를 수 있었다.집사는 강이한과 이유영을 방으로 안내했다.우지는 정원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집은 크지 않았지만 아늑했고 작은 정원에는 소나무와 대나무가 심겨 있었다.그 덕분에 공기마저 더 상쾌하게 느껴졌다.이유영은 방 안에 들어와 단단한 나무 의자에 앉으며 손끝으로 그 감촉을 느꼈다.이곳 환경에 궁금했다.“우지 씨.”“네, 아가씨. 물 드실래요?”“여기는 어디예요?”이유영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물었다.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환경은 이유영에게 항상 큰 공포를 주었다. 주변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은 참기 어려웠다.“여긴 전통 가옥이
과거의 강이한에게는 이유영과 함께 이런 여유로운 장소를 찾을 시간이 없었다.이유영은 음식을 특별히 거부하지 않았다. 파리로 돌아갔을 때, 그곳 음식이 전혀 입에 맞지 않았던 기억이 있었다.그 후 서주에 머물던 동안에도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고생했지만, 다행히 박연준이 정성을 다해 챙겨줬다.한지음과 이온유가 없을 때는 강이한의 관심이 온전히 이유영에게 향했었다.하지만 그 둘이 함께 있었을 때는 이유영은 그저 강이한의 남는 관심을 겨우 받을 뿐이었다.이유영은 문득 생각했다.“얼마나 됐지?”이유영의 예기치 않은 질문이 강이한의 가슴을 세차게 조였다.강이한은 이유영의 질문의 의미를 곧바로 알아챘다.“유영아, 미안해.”강이한의 목소리는 낮고 진중했다.강이한은 최근에서야 깨달았다.자신이 얼마나 이유영을 외면해 왔는지를. 연서의 사건이 터진 후, 강이한은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지나간 감정.이 단어는 언제나 무겁게 느껴진다. 문제가 생겼을 때, 사람들은 지나간 감정이 상처를 더 깊게 만들지 않기를 바란다.그러나 그가 이유영과 함께했던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그것은 상처투성이였을 뿐이다.“흥!”이유영은 강이한의 사과에 차가운 냉소로 응답했다.유천의 음식은 대체로 매콤한 편이었다.강이한은 이유영의 눈 상태를 염려해 매운 음식을 철저히 배제했다. 대신 음식을 담백하고 특별하게 준비했는데 그럼에도 맛있는 요리였다.저녁 식사.테이블에는 이유영과 강이한 단둘만이 있었다.“우지 씨는?”이유영은 식당에 들어오자마자 우지와 우현의 부재를 눈치챘다.“장거리 이동으로 피곤했을 것 같아 따로 식사하게 했어.”이유영은 강이한의 대답을 듣고 더 차갑게 굳어갔다.강이한은 이유영의 이런 태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 보였다.“이 국물 좀 먹어봐. 족발이 들어갔지만, 전혀 느끼하지 않아. 너 예전에 이거 먹고 싶다고 계속 말했잖아.”이유영이 우천에서 먹고 싶다고 했던 음식은 아주 많았었다. 다만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었다.이유영은 손을 뻗었다.강이
전생에서 이유영은 손을 뻗기만 하면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곤 했다. 지금의 상황은 어떨까?어둠이 여전히 두렵고 무섭지만, 전생의 기억 탓인지 어딘가 익숙하기도 했다.어둠 속에서 보낸 시간이 길었던 덕분일까? 기본적인 생활은 오히려 이유영이 가장 능숙하게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그런 이유영을 바라보며 강이한의 마음은 아픔으로 물들었다.강이한은 깊은숨을 고르며 조용히 말했다.“내가 참을성이 부족한 게 아니야. 지금은 이런 문제를 다룰 때가 아니야.”“...”“네 눈을 치료하고 나서, 우리 사이의 문제는 네 뜻대로 해결해.”강이한의 말은 하나하나 무겁고 또렷했다.이유영의 뜻대로?“나는 너를 천 번이라도 갈기갈기 찢고 싶을 만큼 증오해.”“좋아. 그럼 내가 칼을 네 손에 쥐여줄게. 어때?”그렇게 하면 되는 걸까? 이렇게 하면 이유영이 치료에 협조해 줄까?“...”온몸이 얼어붙은 듯했고 답답했던 가슴은 더욱 숨이 막혔다.강이한의 말은 언제나 마치 주먹을 솜에 내리친 듯 공허하고 숨 막히게 했다.“흥.”이유영이 더는 따지지 않자 강이한은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이유영의 시력 문제였다.다른 문제는 모든 것이 해결된 뒤에 이유영의 뜻에 따라 다시 다뤄도 늦지 않았다.저녁 식사가 끝났다.이유영은 작은 그릇을 내려놓으며 살짝 만족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음식들은 이유영의 입맛에 잘 맞는 듯했다.강이한은 이유영의 표정을 보고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이유영은 사실 음식에 굉장히 까다로운 편이었다. 이유영과 함께했던 시간 동안에도 강이한은 이유영의 입맛에 맞추느라 많은 노력을 했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생각하기만 하면 답답한 마음에 참을 수 없었다.그때 이유영이 물었다.“언제 돌아갈 거야?”이유영의 물음은 여전히 단도직입적이었다. 강이한과 이곳에서 더 오래 머물고 싶지 않다는 뜻을 분명히 전하고 있었다.강이한은 잠시 망설인 뒤,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네 눈이 회복되면, 그때 떠날게.”이유영은
강이한은 조용히 이유영을 방으로 데려다주었다.방 안에서는 이미 우지와 우현이 기다리고 있었다. 강이한이 문밖으로 나가자, 이유영이 차분히 물었다.“연락해 봤어요?”정국진과 임소미와의 연락을 의미했다.“아가씨, 모르셨나요? 우리가 여기로 올 때 강 선생님이 우리의 휴대폰을 전부 통제하셨어요!”이유영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무슨 뜻이에요?”조금 전까지 차분하던 이유영의 표정은 우지와 우현의 말을 듣는 순간 다시 굳어졌다.강이한, 제정신이 아니구나!우지가 말을 이었다.“강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아가씨의 눈이 나아질 때까지는 외부와의 연락을 금지하라고 하셨어요!”이유영은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이 강이한!이게 대체 뭐야? 늘 그랬듯이 언제 어디서든 자기 멋대로 하겠다는 거야?지금 상황에서 강이한이 정말 몰래 이유영을 데려온 거라면 백산 별장 쪽에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게 뻔했다.그렇다면 부모님 쪽은...!이유영이 생각했던 대로였다.아침부터 지금까지, 임소미와 정국진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특히 임소미는 계속해서 긴장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정국진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이때, 여진우가 돌아왔다.임소미는 재빨리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어때? 소식 있어?”‘소식’은 이유영의 행방에 관한 것이었다. 임소미는 하루 종일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애초에 강이한은 그들에게 신뢰를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게다가 강이한이 이유영을 데려갔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임소미와 정국진은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더욱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강이한 옆에 있으면 사건 사고가 생길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 말이다.“없어요.”하지만 여진우가 가져온 소식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그 말은 임소미의 이미 조마조마했던 마음을 더 불안하게 했다.“어떻게 없을 수가 있어?”강이한이 정말 대단한 능력을 갖춘 거라도 된다는 말인가? 사실 강이한이라는 인물은 누구에게나 항상 베일에 싸여 있었다.임소미의 초조함은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여진
임소미가 자리를 비운 서재.정국진은 여진우와 마주 앉아 깊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이번 일, 넌 어떻게 보니?”이유영을 데리고 간 강이한에 대한 이야기였다.여진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이번에는 정말 모든 걸 내던졌네요.”이유영을 위해 강이한은 정말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강이한이 이유영을 데리고 정확히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서주의 상황이 이런 와중에 이유영을 데려간 것을 보면 강이한의 마음속에서 이유영이 차지하는 자리가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둘 사이의 시작은 ‘연서’라는 이름의 여자로 인해 엮였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과정은 완전히 변질되었다.이유영은 이미 강이한의 마음속에서 그 여자의 그림자가 아니었다.정국진은 그 말을 듣고 한숨을 내쉬었다.“업보지.”이게 업보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일이 이 지경까지 왔는데도 두 사람은 끝내 서로를 놓지 못했다. 이러니 앞으로 어떻게 될지...“월이가 하루 종일 엄마를 찾더라.”정국진은 월이의 이야기를 하며 눈빛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강이한이 과거 이온유를 위해 모든 것을 던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 강이한이 서주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유영을 데리고 치료를 받으러 갔다고 해도 아버지로서 강이한을 용서하기는 쉽지 않았다.“곧바로 찾아내겠습니다.”여진우는 결의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정국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응, 최대한 빨리 찾아야 해.”임소미가 생각했던 것처럼, 정국진 역시 아버지로서 이유영이 강이한과 함께 있는 상황에서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이 앞섰다.이유영은 강이한 옆에서 한 번도 편안했던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그러니 어떻게 마음을 놓을 수 있겠는가?우천시.비가 내리고 있었다.전통 가옥의 지붕에서 떨어지는 빗소리가 밤공기 속에 은은하게 울렸다. 그 빗소리는 묘하게도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했다.우지와 우현은 이유영의 옆방에 있었다. 이유영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즉시 달려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이유영이 처음에는 괜찮다
다음 날 아침, 이유영은 지붕 위에서 여전히 똑똑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밤새 내리던 비는 아직 멈추지 않았다.옆에서 느껴지던 온기 역시 그대로였다. 이유영이 움직이는 기척을 느낀 강이한이 살짝 안으며 말했다.“깼어?”“당장 떨어져!”어젯밤, 도저히 피할 수 없어 잠들었지만, 이 남자는 대체 어디서 이런 뻔뻔함이 나오는 걸까? 이유영이 몸을 움직이려 하자 강이한의 큰 손이 이유영의 손을 단단히 감싸며 태연하게 말했다.“움직이지 마. 춥잖아.”이불 밖으로 팔을 뻗자 싸늘한 한기가 순간적으로 스며들었다.우천시는 여름에 오면 굉장히 쾌적하다고 한다. 전통 가옥은 단열 효과가 뛰어나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했다.강이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있어.”이유영의 짜증과는 반대로 강이한의 목소리에는 묘하게 부드러운 인내심이 배어 있었다.강이한은 마치 오랜 시간 이런 순간을 기다려온 사람처럼 이 시간을 매우 소중히 여기는 것 같았다.하지만 이유영은 속에서 화가 치밀었다.“일어날래? 내가 옷 입는 거 도와줄게!”“우지 씨를 불러.”시야를 잃은 이유영의 성격은 예전보다 한층 더 예민해져 있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여전히 자기 멋대로 행동하고 있었으니, 이유영의 화가 터질 수밖에 없었다.강이한은 태연히 대답했다.“우지와 우현은 나갔어.”나갔다고? 말도 안 돼!우지는 이유영이 강이한과 단둘이 있기를 꺼린다는 걸 잘 알았기에, 늘 둘 중 한 명은 곁에 남아 있으려 했다.“강이한!”그러나 강이한은 이유영의 화난 기색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듯 여유롭게 말했다.“일어나기 싫으면 그냥 나랑 조금 더 누워 있어.”“...”이유영은 비록 자신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강이한의 농담 섞인 말에 자신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은 강이한이 옷을 입혀주는 것을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갑작스러운 상황 같았지만 강이한은 의외로 철저히 준비해 온 듯했다.강이한은 이곳의 기
이곳이 싫어진 이유가 강이한과 함께 있기 때문일까? 한때는 이런 곳에서 강이한과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게 꿈이었던 적도 있었다.“우지를 불러줘!”이유영은 강이한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을 이제는 견딜 수 없었다.이유영은 이 모든 것을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강이한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아까 말했잖아. 우지랑 우현은 네가 좋아하는 음식을 사러 나갔어. 여기 지역은 아침으로 특산 요리가 많거든, 그래서 주방에는 따로 요청하지 않았어.”“...”이유영은 잠시 말을 잃었다.그리고 그저 조용히 앉아 있었다.하지만 이유영의 이 침묵과 순응은 강이한이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이유영은 차라리 말없이 기다리는 쪽을 택했고 절대로 강이한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예전에 아무리 바쁜 아침을 보냈어도 강이한은 이유영이 아침에 어떤 루틴을 따르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내가 화장실까지 데려다줄게.”“필요 없어.”이유영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이러면 몸에 좋지 않아. 그냥 가자.”이유영은 더 이상 강이한과 실랑이를 벌이기 싫어 화제를 돌렸다.“네가 우지 씨와 우현 씨의 핸드폰을 가져갔지, 그렇지?”강이한은 잠시 멈칫했지만 솔직하게 대답했다.“그래.”“부모님께 내가 어디 있는지는 알려드리는 게 맞지 않아?”이유영의 마음속에는 이미 분노가 쌓여 있었다. 어젯밤 우지가 했던 말을 떠올리자, 감정은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을 정도로 터질 것 같았다.강이한은 여전했다. 여전히 타인의 감정은 조금도 배려하지 않았다. 한지음을 위해 이유영에게 어떤 짓까지 했는지, 그 기억은 이제 이유영에게 있어서 더 이상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고통이 되었다.하지만 강이한은 태연하게 말했다.“이미 쪽지를 남겼어. 네가 눈 치료를 받으러 갔다는 건 부모님도 알고 계실 거야.”“...”“치료가 끝나면 집으로 데려다 줄 거야.”이유영은 강이한의 말을 듣고 차갑게 숨을 몰아쉬었다.“그러니까 지금 우리의 모든 행방을 전부 숨겼다는 거잖아?”이유영의 목소리는 분노로 가득
공기가 얼어붙었다.“쾅!”잠시 후, 전화기 너머로 박연준이 탁자를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박연준의 억눌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가서 유영이를 백산 별장으로 데려가.”이유영은 미친 게 분명했다.‘감히 엔데스 셋째 도련님 같은 인물과 술집에 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건가?’정국진이라면 이유영이 엔데스 신우와 가까워지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특히 지금처럼 민감한 시기엔 더욱 반대가 심할 것이다. 박연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고 남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문기원이 급히 박연준을 따라나섰다.“네!”위험한 박연준의 모습에 용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대답했다.강이한이 각막을 이유영에게 이식해 주려고 할 때 왜 박연준이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되는 듯했다.지금 이유영 곁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그녀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과거의 그녀는 마치 강이한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는 천사 같았다. 하지만 혼란을 겪은 이후 그녀는 변했다.거만하고 방탕하게 아무하고도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지금 박연준이 생각했을 때, 이유영은 더 이상 고상하고 단정한 명문가의 며느리가 아니라 그저 자유롭게 떠도는 바람 같은 여자였다.최근 그녀는 서재욱과 엔데스 신우와 모호하기 짝이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서주에서.박연준이 차에 타기 전, 문기원이 그를 붙들었다.“선생님, 선생님!”“비켜.”“오늘 정말 중요한 회의입니다.”문기원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은 서주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기에 이유영을 생각하면 문기원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정말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박연준 곁에 있는 문기원조차 그녀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박연준이 돌아서기를 기다렸다.박연준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눈을 감은 순간, 그의 눈빛 속 날카로움은 잠시 가려졌지만 몸 전체에서 풍겨 나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은 고민에 휩싸일 때마다 이런 방식을 택했다.하지만 결국 이런 방식은 오히려 고민에 잠긴 마음을 더욱 괴롭힐 뿐이었다.한번 마음에 깊이 새겨진 근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었다.“죄송합니다만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그녀의 몸은 항상 술을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예전에 건강이 좋지 않기도 했고 어렵게 다시 찾은 시력인 만큼 그녀는 술과 더욱 멀리하게 되었다.하지만 오늘 진영숙이 백산 별장에서 벌인 일을 생각하니 이유영의 마음속에서는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 감정을 억눌렀다. 그녀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회피하는 것인지 아니면 받아들인 건지 알 수 없었다.남자는 그 말을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깜빡했네요.”남자의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괜찮아요.”“...”“이제 가도 될까요?”“술을 마시지 않아도 즐길 수 있잖아요.”“...”하지만 이유영은 이런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특히 많이 노출된 옷을 입은 여자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녀에게 반항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그녀를 향락의 세계로 이끌었다....한편 박연준은 서주에서 중요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용준의 전화를 받은 그의 가슴이 쿵쾅거렸다.“그쪽은 괜찮아?”진영숙에 관해 묻는 것이었다.이유영이 인정사정없을 거라는 걸 박연준도 알고 있었다.과거 강이한 곁에 있을 때의 이유영을 떠올렸다. 그때의 그녀는 적어도 강이한에게 만큼은 너무 몰아붙이지 않았었다.그래서 진영숙이 아무리 이유영을 괴롭혀도 그녀는 어떻게든 참고 견뎠다.지금은 성격이 점점 더 나빠졌다고 해야 할까? 아예 참는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용준은 진영숙의 현재 상황을 박연준에게 설명했고 이미 좋지 않았던 박연준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회의 끝나고 바로 갈게. 일단 진정시켜.”박연준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일이 있었는데 과연 내가 진정시킬 수 있을까?’“네!”“유영이는
“박연준, 네가 강이한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고 또 이제는 강이한 어머니까지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난 여태 몰랐네.”그 말은 날 선 조롱처럼 들렸다.동시에, 과거 강이한과 박연준의 사이가 이유영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 되새기게 했다.그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유영의 냉정한 말에 박연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다른 일 있어서 먼저 끊을게.”이유여은 박연준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사랑이란 그저 우스운 감정에 불과했다.차는 천천히 백산 별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지혁 씨.”“네.”“지혁 씨는 사랑해 본 적 있어요?”이유영은 지혁을 향해 불쑥 물었다.예전의 이유영은 사랑이란 존재를 믿어 왔지만 지금은 아니다. 누군가를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그토록 반짝이던 사랑이란 단어 뒤편에 어떤 진실이 숨어 있었는지 이젠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의 말을 들은 지혁은 묵묵히 앞을 응시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핸들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이유영은 굳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쾅!”그 순간, 갑작스러운 충격음과 함께 추돌 사고가 발생했다.이유영은 아픈 이마를 짚고 있었고 지혁은 차에서 내려 사고 처리를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차 문이 열렸다.“아가씨.”지혁이 이유영 앞에 공손하게 나타났다.“무슨 일이에요?”“셋째 도련님 차입니다.”“...”그 말을 듣고 그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자꾸 나타나는 셋째 도련님의 존재에 우연한 사고인지 아니면 이미 계획된 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이유영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어떻게 된 거예요?”“셋째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이유영은 이 전설 속의 셋째 도련님을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특히 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밖에서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유영은 몰랐다. 그 아이가 결국 진영숙이 데려온 의사로 인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줄은.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아!”분노가 치밀수록 이유영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고 진영숙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녀는 이유영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놔, 놔 이 미친년아! 악!”“짝!”이유영의 손바닥이 진영숙의 뺨을 후려쳤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말릴 용기를 잃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이유영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다시 한번 움찔하고 말았다.이유영의 행동에 소리 내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숨을 삼켰다. 진영숙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결국 이유영은 진영숙을 놓아주며 말했다.“주제 파악하라는 의미에서 그랬어요. 당신은 할머니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에요.”그렇다. 진영숙은 할머니가 될 자격이 없었기에 이유영도 그녀를 아무 감정 없이 내던질 수 있었다.진영숙의 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머릿속이 멍해진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그 사이 이유영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저년이 감히...”감히 뭐라고?예전엔 강이한 곁에서 순한 토끼처럼 보호받더니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이유영이 밖으로 나왔을 때,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를 감쌌다.그 순간, 가슴속의 억눌린 감정이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지혁은 이유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용준을 밀쳐내고 앞으로 다가왔다.“아가씨.”“가요.”용준은 여전히 당당한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유영의 휴대폰이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박연준이었다.차에 오르자마자 전화를 받은 이유영의 모습은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여보세요.”“어디야?”“풍산.”“유영아...”전화 너머의 남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박연준은 지금 이유영이 강씨 집안을 어떤 태도로 맞서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강씨 집안에서 강이한이 곁에 없는 동안에는 진영숙의 말에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홍문동으로 이사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진영숙이 찾아오면 이유영은 그녀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고 감히 그녀의 말에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도대체 언제부터일까?’아마 강이한과의 이혼을 결심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즈음부터 이유영은 진영숙의 말에 더 이상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그땐 고작 진영숙의 지시를 어기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감히 나한테 손을 대?”한참 뒤에야 겨우 말을 꺼낸 진영숙이 이유영을 노려보았다. 눈빛에는 이빨을 드러낸 짐승 같은 기세가 실려 있었다.이유영은 고작 이런 걸로 화를 내는 진영숙이 가소로웠다.이유영은 아직 다 마시지 않은 따뜻한 물이 담긴 잔을 들고 망설임도 없이 진영숙의 얼굴에 뿌렸다.“앗!”진영숙은 비명을 질렀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손을 댄다는 건 이런 거예요.”이유영은 바닥에 주저앉은 진영숙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퍽!”손에 들고 있던 잔이 손끝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산산조각 났다.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예전의 풍산 사람들이 기억하던 이유영은 언제나 조용하고 온순한 여인이었다. 누가 감히 지금 이유영의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분노로 찬 이유영은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진영숙 역시 이유영을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예전에도 이유영에게 자주 화가 났지만 오늘처럼은 아니었다.진영숙은 분노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유영은 격하게 숨을 들이마신 진영숙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다시 백산 별장에 가거나 우리 가족 근처에 얼씬거리면 그땐 당신 진짜 가만 안 둬.”그 마지막 한마디는 징벌처럼 무겁고 섬뜩할 만큼 냉정했다.월이는 이유영의 세상 전부이자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힘들게 월이를 낳으면서 강씨 가문은 이 아이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아
끊임없이 박연준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던 강이한의 모습을 이유영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두 사람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사이였다.늘 서로를 원수처럼 대했고 그 모습을 본 이유영도 두 사람 사이에 과거의 악연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악연이 한 여자 때문이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 여자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지는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은 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모든 게 이토록 명백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영만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그 7년 동안 강이한은 얼마나 다정했던가?그 친절함 속에 실은 다른 여인을 향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이유영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박연준은 강이한의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었다.이건 과거의 이유영이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일이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다시 실감하고 있었다.“어쨌든 강이한 씨의 어머니잖아요.”조금 전 용준이 한 말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마치 우스운 농담을 듣는 듯했다.“형님이 돌아오신 후에 처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용준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 공손함 속에는 이유영을 절대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었다.이유영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진영숙이 월이를 데려가려 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의 분노는 가슴 깊이 타오르고 있었다.“지혁 씨.”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지혁을 불렀다.지혁은 그녀의 뒤에 있다가 곧장 앞으로 나섰다.“네, 아가씨.”“전 들어가야겠어요.”이유영이 내뱉은 짧은 문장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용준은 지금까지 이유영의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 냉혹함에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네!”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지혁은 곧장 앞으로 다가섰다. 분위기는 마치 폭발할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이유영은 어지럽게 엉킨 현장을 냉정히 바라보며 우아하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용준은 지혁을 막으려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
이유영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그녀는 임소미의 품에 파고들며 가느다란 팔로 어머니의 허리를 꼭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었다.오래전 소은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강이한은 연애 상대론 괜찮지만 결혼은 다르다고.그때 변호사였던 소은지는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맞지 않는 결혼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강이한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소은지는 그녀를 말렸었다. 소은지는 그녀의 결혼을 말렸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결국 소은지의 말은 모두 옳았음이 증명됐다.끝났다고 믿었던 그 관계는 여전히 그녀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때, 등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앞으로는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이유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올랐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뺨을 따라 끝없이 흘러내렸다.예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품어주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모두 혼자 견뎌야만 했다.임소미가 감싸안아 주자 이유영의 마음은 다시금 따뜻함으로 물들어갔다.그리고 이 감정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앞으로는 아무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가 말한 '아무도'는 명백히 진영숙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사람에게서 다시 이런 고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엄마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임소미는 그 말을 반복하듯 속삭였다.오늘 밤, 임소미의 마음속에 일어난 파장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진영숙이 막말을 퍼붓고 손까지 쓰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이 강씨 가문에서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를 임소미는 문득 깨달았다.사모님의 우아한 모습은 진영숙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다.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손부터 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살아야
이유영이 돌아오고 그녀는 진영숙과 임소미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명의 도우미가 진영숙을 붙잡아 끌어내고 있었다.임소미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쳤다.임소미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재빨리 붙잡고 말했다.“너 먼저 위로 올라가.”“무슨 일이 있었어?”이유영이 물었다.정씨 가문에 돌아온 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우아하고 온화한 사람인 만큼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이유영, 넌 누가 너한테 눈을 기증해 줬는지 모르지? 강이한이 네게 빚을 졌다고 하지만 사실은...”“입 다물어!”진영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소미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고 진영숙은 여전히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이유영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엔 전례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도 진영숙은 이유영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 용성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증오가 더욱 깊어진 듯했다.“유영아, 너 먼저 위로 올라가.”“엄마.”“올라가!”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격하게 소리쳤다.임소미가 이런 식으로 이유영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임소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유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진영숙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도우미들의 손을 뿌리치고 이유영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유영, 강이한은 너에게 빚진 게 없어. 강이한은 오히려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너야말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네 눈조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