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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Chapters

제21화

제이는 다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머리카락이 별로 없다는 것도, 예쁘지 않다는 것도...그리고 동우가 사예의 아들이라서 오해한 것도...‘잘못을 인정하고 고치면 되는 거야. 이 친구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잖아.’제이는 동우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용서할게.”제이가 이렇게 순순히 말하자, 동우는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 듯했다.작은 책가방을 벗더니 바깥쪽 주머니를 뒤적였다.그러다 손바닥만 한 저금통을 꺼냈다.“여기 내 용돈 모은 거야. 다 너 줄게.”제이는 깜짝 놀라 두 손을 흔들었다. 숨이 약간 가빠질 정도로 당황한 목소리였다.“아니야, 돈 안 받아. 나 진짜 괜찮아. 용서했어.”그러나 동우는 저금통을 제이의 손에 꼭 쥐여주었다.“이거 별로 안 들어있지만, 내 기도랑 축복이 가득 담겨 있어.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 준 건, 다시 돌려받는 법 없어.”제이는 사예를 보았다가 다시 동우를 보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눈동자만 흔들렸다.사예가 그런 제이를 보고 부드럽게 웃었다.“받아줘. 안 그러면 동우 오늘 밤에 잠 못 잘 거야.”“고마워.”제이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 웃음은 울음보다 더 아프게 일그러져 있었다.동우는 살짝 찡그리며 속으로 생각했다.‘이상하게 귀엽다.’그러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사실 너 하나도 안 못생겼어. 웃는 게 더 예뻐.”제이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어릴 적부터 병 때문에 다른 아이들처럼 마음껏 웃을 수 없었고, 외모에 관한 속삭임도 자주 들었다.하지만 오늘, 제이는 두 번이나 ‘예쁘다’라는 말을 들었다!‘거짓말이어도... 왠지 기분이 좋네.’사예는 동우가 먼저 사과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아들의 머리를 살짝 쓸었다.동우는 피하지 않고 살짝 미소 지었다.“동우야, 아주 잘했어.”‘우와, 나 진짜 잘했대!’동우의 마음속엔 작은 새 한 마리가 펄쩍 뛰어오르는 듯했다. 하지만 얼굴에는 티 한 점 없었다. 그저 고개를 꼿꼿이 들고 있었다.사예는 제이에게 다시 한번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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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사예는 차를 몰아 동우를 유치원에 데려다주었다.가는 내내 동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병원에서 그 일 때문에 많이 창피했나 봐.’‘그래도 남자아이라 자존심이 있겠지.’사예도 괜히 더 묻지 않았다.오늘도 연구원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동우를 유치원에 내려주고 나면 바로 복귀해야 했다.이미 약속된 시간은 훌쩍 지나 있었다.유치원 앞에 도착하자, 동우는 조용히 차문을 열었다. 작은 책가방을 메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사예는 그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천천히 출발했다....연구실에 돌아오자마자, 사예는 바로 책상 앞에 앉았다.내일 면접 준비를 위해 호빈이 보내준 자료가 몇천 쪽은 되어 보였다.페이지를 넘기는 속도만큼 시간도 휙휙 지나갔다.그녀는 목이 뻐근해져서 손으로 주무르며 잠시 고개를 들었다.책상 위엔 복사기 열기와 함께 종이 냄새가 가득했다.‘이건 단순한 면접이 아니라 내 연구 인생이 걸린 시험이야.’사예의 눈빛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그날 밤, 사예는 거의 연구소에서 밤을 새웠다....다음 날 아침.사예는 면접 날이라 그런지 유난히 일찍 눈이 떠졌다.오늘만큼은 사예도 아무렇게나 입고 나올 수 없었다. 깔끔하면서도 여성스러운 베이지빛 블라우스에 네이비색 슬랙스를 매치했고, 부드럽게 말린 머리는 단정하게 낮은 포니테일로 묶었다.희고 긴 목선이 드러나면서 전체적으로 차분하고 세련돼 보였다.면접장에는 예정 시간보다 30분 먼저 도착했다.이미 몇몇 지원자들이 와 있었고, 호빈과 연구소 선배들도 그곳에 있었다.“사예, 화이팅. 넌 잘할 거야. 4년 전처럼 우리랑 다시 같이 일했으면 좋겠다.”여자 선배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호빈이 그 옆에서 말을 보탰다.“왕준한 교수님이 벌써 식당 예약해 놨어. 면접 끝나면 다 같이 가자.”“좋아요.”사예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면접관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사예는 긴장된 숨을 내쉬며 잠깐 고개를 숙였다.‘혹시 송기현도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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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사예는 예전엔 이런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밖에서는 나를 아내로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겠지.’그 생각이 들자 마음이 잠시 저릿했지만 금세 가라앉았다.‘이제 와서 뭐 어쩌겠어. 신경 쓸 필요 없어.’면접까지는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다.사예는 혼자 화장실로 향했다.세면대 앞에 서서 찬물로 얼굴을 적셨다.약간의 물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정신 차리자, 한사예.’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에 사예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여기서 뭐 해?”문가에 기현이 서 있었다.그는 문을 닫고, 천천히 다가오며 사예를 내려다봤다.짙게 찌푸린 미간, 그 눈빛에는 놀람보단 냉정한 추궁이 담겨 있었다.사예는 손의 물기를 털고, 휴지로 닦으며 담담히 말했다.“면접 보러 왔어.”“면접?”기현의 얼굴이 단번에 굳었다.“회사에서 일 잘하다가, 왜 여기까지 와서 면접을 봐?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인데?”사예는 미묘하게 미소를 지었다.‘회사에 내가 없는 걸 이제야 알았나.’“나 이미 퇴사했어. 송 대표님은 너무 바쁘셔서 몰랐을 수도 있겠네.”“퇴사?”기현의 목소리가 낮게 떨어졌다.“언제?”사예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눈앞의 남자는 분명 진심으로 몰랐다는 표정이었다.‘정말, 나는 이렇게 존재감이 없구나.’사예는 조용히 고개를 들고, 짧게 웃었다.“그때 직접 말씀드린 것 같은데.”기현이 한발 다가서며 길을 막았다.“임 회장님 건 때문에 그런 거야?”사예는 잠시 생각했다가 고개를 저었다.“그 일만은 아니고.”‘이 사람한테 내 속내를 말해서 뭐 해? 들을 마음도 없을 텐데...’기현이 무심하게 말했다.“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 일은 일이니까.”기현의 말투는 늘 그랬다.상처를 남긴 뒤, 그저 ‘일이니까’라며 지나가는 식.사예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말했다.“전부터 퇴사 생각하고 있었어.”“회사 일 힘들었어?”기현의 질문은 마치 상사가 부하에게 묻는 말투였다. 관심이라기보다 의례적인 확인처럼 들렸다.사예는 짧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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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화

성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입술을 꾹 다문 채, 기현의 표정을 살폈다.사예는 기현의 시선도, 그 존재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그녀는 사람들의 축하 속에서 웃음을 지으며 선배들과 함께 밖으로 나섰다.‘드디어 해냈어. 정말 돌고 돌아 오래 걸렸네.’기현은 그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늘 자신 곁을 묵묵히 지키던 사예였는데, 이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지나가버렸다.그는 왠지 모를 낯섦이 가슴 한편을 찔렀다.“대표님, 한 실장님 벌써 나가셨습니다.”성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기현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낮게 말했다.“그걸 굳이 말할 필요 있나?”성수는 숨을 삼켰다.기현은 이미 무표정으로 자리를 털고 나섰다....밖은 여전히 북적였다.면접이 끝난 뒤에도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사예는 이미 선배들과 함께 식당 쪽으로 이동한 뒤였다.왕준한 교수는 남아 있는 면접 위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곧 시계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아, 식사 약속이 있어서 전 이만 가봐야겠습니다.”그때 한 면접관이 웃으며 붙잡았다.“왕 교수님, 벌써 가시면 섭섭하죠. 오늘 선발된 한 선생님은 교수님 제자라면서요? 훌륭한 스승 밑에 훌륭한 제자 아닙니까.”다른 위원이 덧붙였다.“맞아요, 왕 교수님. 다 같이 식사합시다. 제가 모시죠. 그리고 저도 한 선생님께 여쭙고 싶은 게 몇 가지 있어서요.”왕준한 교수는 손을 내저었다.“에이, 이제 부원장까지 하신 분이 무슨 말씀을. 한 선생 아직 서른도 안 됐어요. 배울 게 뭐가 있습니까.”겸손한 말투였지만, 얼굴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역시 내 제자야. 어디 가서도 빠지지 않지.’그때 옆에서 심국명 부원장이 말했다.“아닙니다, 왕 교수님. 한 선생님 실력은 우리 연구원에서도 다 인정합니다. 제가 기억하기로 대학원 때 연구 주제가 바이러스 유전자 서열이었죠? 지금 딱 우리 연구원이 필요로 하는 인재예요.”그 말에 왕준한 교수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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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화

사예는 사람들의 농담에 그저 멋쩍게 웃었다.‘아휴, 또 이런 분위기네.’사실 사예와 호빈은 대학 시절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선후배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두 사람은 실험이나 공모전 준비할 때 잠깐씩 부딪힌 적은 있지만, 그 외에는 거의 말을 섞은 적이 없었다.‘호빈 선배가 날 좋아한다니,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있나?’그때 한 선배가 장난스럽게 소리쳤다.“호빈아, 너 설마 사예랑 이미 사귀는 거 아니지? 사예는 수준급 미모에 뛰어난 머리까지 겸비한 인재인데, 그런 여친 숨겨두고 있는 거면 진짜 너무했다!”장난이 점점 커지자, 호빈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아니에요. 진짜 아니에요. 그만 놀려요. 전 그냥 사예를 친한 후배로 아끼는 거예요. 괜히 오해 생기겠네요.”사예도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웃으며 말했다.“다들 제발 그만하세요. 이러다 정말 소문 나면 큰일 나요.”그 말에 사람들이 더 크게 웃었고, 농담은 점점 더 가벼워졌다.웃음소리와 장난이 오가는 그 공간에서 호빈과 사예는 그저 난처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하지만 아무도 몰랐다.문 바로 밖, 면접위원들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는걸...그중에는 기현도 있었다.안에서 흘러나오는 대화가 기현의 귀에 그대로 꽂혔다.‘호빈? 대학 선배?’가벼운 웃음소리가 유난히 거슬렸다.기현의 귀 끝이 미묘하게 뜨거워졌다.‘결혼한 지 몇 년인데, 내가 모르는 남자 이름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나오는구나.’사예는 늘 조용했다. 결혼 후에도, 그녀 곁엔 다른 남자가 없었다. 항상 루틴이 일정하고 주변은 단정했다.그런데 지금 낯선 이름이 사예 곁에 떠돌았다.문이 열리며 기현 일행이 들어섰다.문턱을 넘자마자 방 안의 웃음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송 대표님.”누군가가 허둥지둥 일어나 인사했다.자리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심국명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다들 앉아요. 이제 인원 다 모였네요.”그 말에 사람들은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한쪽 구석에서는 여자 연구원들이 작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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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화

고애진은 송기현의 오랜 첫사랑이었다.그리고 여전히 기현이 마음 깊은 곳에 소중히 간직한 여자.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고, 이젠 기현이 그녀를 집에 데려와도 사예로서는 이상할 게 없었다.사예는 마음 한켠이 불편했다. 아주 미세하게 몸을 옆으로 틀었는데, 그 작은 움직임조차 기현은 놓치지 않았다.기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손목의 시계를 매만졌다.남자의 의도적인 행동이 읽히자 사예는 숨이 답답해졌다.‘이 사람의 이런 버릇을 나만큼 아는 사람은 없지.’기현은 짜증이 나거나, 뭔가에 대해 혐오를 느낄 때 이런 행동을 했다.‘역시, 송기현은 나를 정말 싫어하나 봐.’집 안에서는 사예를 대놓고 무시했고, 밖에서는 그조차도 꾸미려 하지 않았다.사예는 굳이 서로 굳이 얼굴 붉힐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둘 다 이혼한 사람, 앞으로도 종종 공식 석상에서 얼굴을 봐야 하는데 관계를 더 망가뜨릴 이유는 없었다.그래서 사예는 옆자리에 앉은 호빈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저 선배랑 자리 좀 바꿔도 될까요?”호빈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그리고 바로 일어나 사예와 자리를 바꿨다.사람들은 사예가 먼저 기현과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송 대표님처럼 잘생기고, 능력 있고, 스캔들도 없는 분이 요즘 세상에 드물죠.”“그런데 한 선생님은 왜 이렇게 멀찍이 떨어져 앉으셨어요? 송 대표님 냉정한 표정에 겁먹으신 거 아니에요?”기현은 언제나 화제의 중심이었다.이 남자의 사소한 행동 하나까지도 이야깃거리가 되었다.사예는 굳이 휘말리고 싶지 않아 담담히 답했다.“송 대표님은 스캔들이 없으시잖아요. 그래서 더더욱 옆자리에 남자가 앉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괜히 오해 사면 안 되니까요.”사예는 몇 마디로 상황을 넘겼다.하지만 기현은 눈을 가늘게 뜨며 호빈을 한번, 그리고 사예를 또 한 번 바라보았다.그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이야기는 점점 흥미로운 방향으로 흘러갔다.“제가 듣기로는 송 대표님한테 대시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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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화

“그러게요, 결혼하신 게 사실이라면 이렇게 아무도 모르게 조용할 수가 있나요?”기현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그는 와인잔을 들고 천천히 한 모금 입에 머금은 뒤, 담담하게 말했다.“아들이 네 살입니다.”그 한마디에 공기가 멎었다.누군가 들고 있던 잔이 덜컥 흔들렸고, 곳곳에서 낮은 탄성이 터졌다.“송 대표님, 아드님이요? 네 살이라고요? 진짜입니까?”“세상에, 그렇게 숨기실 줄이야. 아무도 몰랐잖아요!”“...”사예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잔 속의 술이 넘쳐흘러, 치마에 붉은 얼룩이 번졌다.“괜찮아?”호빈이 급히 휴지를 꺼내 건넸다.사예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를 받아 들었다.“아, 네. 괜찮아요.”기현이 그쪽을 힐끗 바라봤다.짧은 시선, 굳게 다문 입술.남자의 표정은 여전히 냉정했다.사람들은 그 반응이 장난이 아님을 단번에 알아차렸다.“송 대표님, 정말 결혼하신 게 맞습니까? 게다가 아드님이 벌써 네 살이라니요. 아무 소문도 없던데, 사모님이 아주 대단하신 분인가 봅니다.”기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잔을 들고 있을 뿐, 시선은 멀리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왜 지금, 이런 말까지 하는 걸까?’사예는 이해할 수 없었다.기현이 결혼 사실을 숨기는 건 늘 애진을 의식한 탓이라 생각했는데...결국 두 사람은 이혼할 테고, 그때가 되면...기현은 애진에게 당당히 기현의 아내라는 타이틀을 내줄 수 있을 텐데...‘그런데 왜, 지금에 와서 이런다고?’결혼을 인정하는 건 기현에게 아무 이득도 없는 일이다.정확히 말하면, 오히려 자기 발목을 잡는 일이었다.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이젠... 감출 이유도 없어졌다는 건가?’“아이고, 송 대표님 너무하십니다. 결혼 같은 인륜지대사를 아무한테도 말씀 안 하시고, 덕분에 축의금 낼 기회도 놓쳤네요. 다음번 자리에는 꼭 사모님도 모시고 나와주세요. 정말 궁금합니다. 어떤 분이길래 송 대표님을 가정으로 이끌었는지!”사람들의 웃음 섞인 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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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화

사예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그 눈빛은 분명히 기현을 향해 묻고 있었다.기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되물었다.“그 말, 무슨 뜻이야?”차가운 밤공기가 두 사람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얼음 같은 바람에 사예의 머릿속이 조금은 맑아졌다.‘이게 무슨 소용이람. 이미 이혼합의서에 도장까지 찍었는데...’사예는 아이의 양육권을 포기했다. 더 이상 따질 권리도, 붙잡을 이유도 없었다.무엇보다 동우는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다.억지로 데려온다 한들, 아이의 마음에 상처만 남을 것이다.‘그래, 차라리 당신이 키우는 게 나을지도 몰라.’‘그게 그 애한테는 제일 좋은 일일 거야.’기현과의 결혼은 결국 인연이 아니었다.사예는 이제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그저 긴 한숨을 내쉬며 작게 중얼거렸다.“술김에 헛소리 좀 했네. 송 대표님, 너무 진지하게 듣지 마.”기현은 그런 사예를 한참 바라보다가, 눈빛이 차가워졌다.“그 말은 알아듣겠다. 그런데 그 꼴로 집에 가면 애가 뭐라고 생각하겠어.”남자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다.기현은 늘 그랬다. 칭찬 한마디 없고, 모든 말이 비난 일색이었다.‘그래, 당신답지. 나에게 따뜻한 말 한번 한 적 없으니까.’사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미 그 집으로 돌아갈 생각도 없었고, 기현이 그런 말을 하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정말 이혼할 생각이 있는 걸까?’‘아니면... 아직 이혼 서류를 안 본 걸까.’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그 서류... 혹시 봤...”“송 대표님!”성수의 목소리가 두 사람의 대화를 끊었다.그가 급히 달려와 기현 앞에서 숨을 고르며 말했다.사예는 입을 다물고 한발 물러섰다.“무슨 일이지?”기현이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성수가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말했다.차들이 지나는 소리에 묻혀, 사예는 잘 들을 수 없었다.하지만 기현의 표정이 변했다. 그리고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고, 그 시선이 차갑게 사예를 향했다. 거기엔 분명 불쾌감이 섞여 있었다.성수가 말을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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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화

사예는 기현의 눈빛에 담긴 불만을 읽을 수 있었다.‘또 나한테 화난 거야?’‘이번엔 내가 아이를 제대로 챙기지 않았다고 생각하겠지.’기현은 늘 그런 식이었다. 동우가 유치원에서 무슨 일이 있거나, 사소한 문제라도 생기면 결국 사예의 책임으로 돌렸다.사예는 입술을 꼭 다물었고, 반박할 말이 없었다.최근에는 기현이 아이를 훨씬 더 자주 챙긴 것도 사실이었다. 자신이 나서서 돌보려 하면, 동우는 여전히 엄마를 불편해했고, 그럴수록 사예는 점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이젠 나도 내 아들한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모르겠어.’기현의 짧은 한숨이 공기를 가르고, 사예는 조용히 그 비난을 받아들였다.그러고는 동우 앞으로 다가가 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물었다.“배고프지? 밥은 먹었어?”동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벌써 먹었어요. 아직 숙제가 덜 끝나서... 올라가서 할게요.”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동우는 재빨리 계단으로 올라갔다.작은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사예는 허공에 머물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결국, 나에게서 이렇게 도망치듯 사라지는구나.’거실에는 다시 조용함이 내려앉았다.기현은 아무 말 없이 서재로 향했다.남자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사예만 덩그러니 남았다.작은 월셋집에 혼자 있을 땐 편했다.하지만 이 넓은 공간에 혼자 덩그러니 남게 되면,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그래도 동우 곁에는 있고 싶어.’‘내 아들이 나를 피하더라도... 나는 그냥, 옆에라도 있고 싶어.’사예는 조심스레 동우의 방문을 열었다.그곳에서 동우는 작은 상자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아이의 손에는 아기용 젖병이 들려 있었고, 상자 안에는 조그만 새끼 고양이가 있었다.그 고양이는 애진이 동우에게 선물한 아이였다.털이 아직 보송보송했고, 몸집은 손바닥만 했다.한 달도 채 안 된 새끼고양이였다.작은 입으로 ‘야옹’ 소리를 내며 울고 있었고, 동우는 난감한 표정으로 고양이를 바라보고 있었다.‘고애진이 준 거였구나... 그렇겠지.’사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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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화

사예는 그 순간,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작은 방 안에 들리는 고양이의 고른 숨소리와 아이의 웃음소리...‘이 평온함이 영원했으면 좋겠어... 정말로...’그때, 욕실 문이 열렸다.기현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고, 따뜻한 조명이 그의 어깨와 팔 선을 따라 흘러내렸다.문가에 선 남자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며 방 안을 덮었다.그는 아무 말 없이 문틀에 기대섰다.시선은 오롯이, 사예와 동우에게 향해 있었다.어린 아들과 아내가 고양이 옆에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따뜻하고, 낯설게 평화로웠다.기현은 그 장면을 깨뜨리지 않으려는 듯 조용히 숨을 죽였다.그런데 동우가 먼저 아빠를 발견했다.“아빠!”동우는 반갑게 달려가 기현의 손을 잡았다.“아빠, 이거 봐요! 제 고양이에요. 제가 아까 우유도 먹였어요!”아이의 눈동자가 자랑스럽게 반짝였다.기현은 그 눈빛을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짧게 대답했다.“그래, 잘했네. 앞으로도 잘 돌봐야 해.”그 순간, 사예는 무심코 그들을 바라봤다.‘이런 모습, 진짜 오랜만이야.’기현의 입가에 미묘한 웃음이 번졌다.그는 평소처럼 차갑지도, 무심하지도 않았다.아들을 향한 눈빛은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했다.그 모습을 보는 순간, 사예의 마음 어딘가가 묘하게 흔들렸다.‘이게... 우리가 잃어버린 거였나.’하지만 다음 순간, 동우의 한마디가 그 따스함을 무너뜨렸다.“걱정 마세요, 엄마. 이건 애진 이모가 준 고양이에요. 제가 꼭 잘 키울게요.”사예의 손끝이 갑자기 얼었다.‘그래, 잊을 뻔했네. 이건 고애진의 고양이지.’‘내 남편도, 내 아들도... 결국 다 그 여자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어.’사예는 얼른 일어서며 말을 돌렸다.“이제 잘 시간이야. 늦으면 내일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알겠어요, 엄마. 바로 잘게요. 아빠, 엄마, 안녕히 주무세요.”“그래, 잘 자.”기현과 사예는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문이 닫히자, 방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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