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과 첫아내

첫사랑과 첫아내

By:  서이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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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예의 5년의 결혼 생활은 혼자만의 외로운 연극이었다. 아이를 위해 참고 또 참던 그녀는, 언젠가 남편 송기현이 달라질지도 모른다고 자신을 위로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의 첫사랑이 나타났다. 그 순간, 기현의 모든 따뜻함과 미소는 오롯이 그 여자에게로 향했다. 아들도 다른 여자를 ‘엄마’라 부르며, 사예와 함께 있기를 피했다. 그때 사예는 완전히 깨달았다. 이제 이 결혼과 이 가족을 자신이 굳이 지킬 이유가 없었다. 사예는 결심했다. 남편도, 아이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겠다고. 이혼 서류 한 장,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고, 아이의 양육권까지 전부 기현에게 넘겼다. ... 이혼 후, 사예는 일에 몰두했다. 성공이 뒤따랐고, 그녀를 향한 구애도 끝이 없었다. 그제야 알았다. 지난 세월의 희생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하지만, 수많은 구혼자 사이로 전남편 송기현이 나타났다. 그는 사예의 곁을 맴도는 남자들을 하나하나 밀어내며, 결국 그녀를 벽으로 몰았다. 사예는 비웃듯 미소 지었다. “송 대표님, 우린 이미 이혼했잖아요.” 기현은 사예의 목덜미를 가볍게 쥐며 낮게 웃었다. “이혼? 서류에 내가 서명이라도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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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이미 자궁 안에서 태아가 사망했습니다. 보호자분께 연락드려서 수술 동의서에 서명받으세요.”

의사의 말에 한사예는 병상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온몸이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지난달 초였다. 송기현이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와, 평소답지 않게 사예를 붙잡았다.

발코니에서 거실, 그리고 방까지.

처음에 기현은 콘돔을 썼다.

하지만 시간이 길어지자, 기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콘돔을 빼버렸다.

사예는 ‘괜찮을 거야, 배란기도 아니니까’라고 생각했다.

기현은 늘 사예와의 친밀함을 피했고, 둘 사이에 더는 아이 같은 인연은 없다고 말했던 사람이다.

사예 역시 그 말에 상처받으면서도, 어쩌면 기현보다 더 아이를 원치 않았다.

그런데 막상 임신 사실을 들었을 때...

‘그래도... 이번엔 딸일지도 몰라.’

그 생각이 들자 마음 한편이 설렜다.

아들 동우가 늘 자신도 동생, 특히 여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며 조르던 터였다.

‘동우가 좋아하겠지. 같이 놀 수 있는 친구가 생기니까.’

사예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번 일은 나쁘지 않을 거라고 자신을 설득했다.

한 달 동안, 기현은 거의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시간 동안 사예는 매일 고민했다.

‘이 아이를 지켜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리고... 기현 씨에게 어떻게 말하지?’

결국 오늘 산전 검진이 끝나면 기현에게 이야기를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결과는 ‘자궁내 태아사망’이었다.

사예는 상상도 못 한 결말이었다.

낯설고, 잔인한 단어였다.

사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의사의 재촉에 결국 핸드폰을 들어, 기현의 번호를 눌렀다.

하지만, 전화는 연결되자마자 바로 끊겼다.

다시 걸었더니 이번엔 ‘통화 중’이었다.

‘또 방해 금지 모드로 해놨네...’

결국 그녀는 회사 사무실의 기현 전용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뭐야, 또? 나 지금 바빠. 진짜 큰일 아니면 끊어.]

기현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사예는 말문이 막혔다.

‘자궁내... 태아사망이라는데...’

침묵 끝에 전화를 끊고,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10분이 지났을까, 20분이 지났을까?

사예의 눈에서 눈물이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흘러내렸다.

결혼한 지 5년.

사예는 한 번도 ‘행복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버텨온 이유는, 아직은 기현을 사랑하니까... 언젠간 자신도 다시 사랑받을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결혼식 날, 사예는 혼자 신혼방에서 첫날밤을 보냈다.

그리고 동우를 낳을 때도, 기현은 출장 중이었고, 연락조차 닿지 않았다.

그래도 아이가 있으니, 사예도 딱히 이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동우도 벌써 네 살이니까.

그 시간 동안, 기현은 아들의 아버지로서 의무만 다할 뿐, 남편으로서 한 번도 사예에게 웃어준 적이 없었다.

사예의 원망은 서서히 무뎌지면서 기현에 대한 감정도 조금씩 사라져 갔다.

하지만, 수면 아래 있던 감정은 언젠가 떠오르기 마련이었다.

...

사예는 놀랍도록 차분했다. 목소리는 떨리지도, 높아지지도 않았다.

“지금 병원에 잠깐 올 수 있어요? ...우리 아이에게... 문제가 좀 있었어요.”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감정이 섞이지 않은 전달이었다.

기현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곧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아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잠깐의 정적 후, 비웃음 섞인 어조가 이어졌다.

[설마 지난달 그 한 번 가지고 임신했다고? 거짓말도 정도껏 해. 그날 당신 약 먹었잖아.]

기현의 말에 사예는 온몸이 얼어붙었다.

‘약...?’

그날 이후의 기억이 흐릿했다.

기현이 물을 건네며 ‘이거 먹어’라 했고, 사예는 그저 그가 오랜만에 다정하게 대해준 것 같아 ‘이 사람이 아직 나한테 마음이 있구나’ 그렇게 착각했었다.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거야.’

그녀는 자신을 비웃듯 입꼬리가 씰룩였다.

그때, 전화기 너머로 여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기현아, 빨리 와! 모카가 곧 새끼 낳을 것 같아! 계속 울고 난리야, 나 혼자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사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기현의 숨소리, 그리고 그 여자의 목소리.

그제야 머릿속이 선명해졌다.

‘임신했다고 해도, 그 사람은 오지 않겠지. 믿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기현의 짜증 섞인 말이 이어졌다.

[나 진짜 바쁘다. 별일 아니면 끊어.]

뚝!

끊어진 신호음과 동시에 사예의 배가 욱신거렸다.

경련성 통증이 밀려왔지만, 그녀는 그저 허벅지를 꽉 쥐며 웃었다.

‘그런 사람을 믿은 내가 바보지. 이미 끝난 관계에 아직도 뭘 기대하니.’

사예는 며칠째 소식 없던 기현의 행방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는 고애진에게 가 있었다.

그리고 ‘모카’는 애진의 고양이였다.

‘하, 송기현에게 나는 고양이 한 마리만도 못한 사람이구나...’

그때, 어린 동우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터져 나왔다.

[아빠! 빨리 와! 애진 이모가 모카가 전치태반이라는데, 죽을 수도 있대!]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사예는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동우까지, 거기 있구나.’

사예는 천천히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의사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한사예 씨...”

사예는 고개를 들어 담담히 말했다.

“가족 동의 없어도, 수술은 가능하죠?”

젊은 여성 의사는 잠시 말을 잃었다.

조금 전의 통화를 들은 눈빛 속엔 연민이 스쳤다.

“네... 가능합니다. 하지만,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아직 젊으시잖아요. 다시 아이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사예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이 결혼이 어떤 상태인지는, 나 자신이 제일 잘 안다.’

‘동우만 아니었다면, 아마 진작에 끝났겠지.’

사예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그래도... 동우가 있으니까. 그게, 내가 버틸 이유였으니까.’

의사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소리만 병실에 남았다.

사예는 조용히, 손끝으로 배를 쓸었다.

‘잘 가... 내 아이.’

...

다음 날, 사예는 집으로 돌아왔다. 수술을 마치고 몸은 여전히 무거웠다.

의사는 며칠 더 입원하라고 했지만, 사예는 그냥 퇴원했다.

‘이곳에 오래 있을 이유가 없어.’

현관문이 조용히 열리자, 가사도우미 김순자가 놀란 듯 달려왔다.

“사모님, 오셨어요?”

사예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그녀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

“어디 편찮으세요? 얼굴이 많이 안 좋아 보여요.”

사예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그냥... 잠을 잘 자지 못했나 봐요.”

거실에서는 익숙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거 봐, 이게 제일 예쁜 것 같지? 모카 아기들한테 선물할 거야!”

동우는 맨발로 소파 위에 앉아, 태블릿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화면엔 고양이 옷 사진이 가득했다.

‘모카... 또 고애진이네.’

사예의 시선이 잠시 흔들렸다.

‘일주일 만에 보는 얼굴인데... 이렇게 밝은 표정이라니.’

그리웠던 마음이 묘하게 쓰라렸다.

“동우야.”

사예는 천천히 다가가, 팔을 벌리며 아들을 안으려 했다.

하지만 동우는 고개도 들지 않고, 사예의 손길을 피했다.

“엄마, 손에 뭐 묻었어요. ”

무심하게 말하는 목소리에 사예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그냥, 안기기 싫은 거구나.’

그녀는 조용히 손을 내렸다.

“엄마, 오늘은 왜 왔어요?”

동우는 여전히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을 찔렀다.

‘왜 왔냐니... 보고 싶어서 왔는데.’

사예는 잠시 숨을 삼켰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아들의 발밑에 슬리퍼를 내려놓았다.

“발 시려. 이거 신어.”

동우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엄마도 좀 골라봐요. 이거랑 이거 중에 뭐가 예뻐요? 모카가 아기를 다섯 마리나 낳았대요! 털색이 다 금색이래요, 진짜 귀엽대요!”

고양이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눈이 반짝였다.

사예는 억지로 웃으며 태블릿을 들여다봤다.

“이거, 이게 예쁜 것 같아.”

동우는 곧바로 얼굴을 찌푸렸다.

“이건 별로예요. 엄마는 진짜 감각 없어요. 그냥 제가 고를게요.”

순간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사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아이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렇게까지... 나랑 멀어진 걸까?’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결국 사예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아들...”

사예는 조심스럽게 아들 옆에 앉았다.

일주일 동안 제대로 아들에게 챙기지 못한 미안함에, 그녀는 그저 다정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내일 엄마 쉬는 날이야. 우리 같이...”

“엄마, 잠깐만요. 지금 중요한 거 하고 있잖아요.”

동우는 시선을 태블릿에서 떼지 않았다. 목소리는 단호했고, 엄마를 향한 관심은 조금도 없었다.

잠시 후, 동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사예를 살짝 밀어냈다.

“이거 애진 이모한테 주는 깜짝선물이에요. 애진 이모가 좋아할지 모르겠어요. 아, 그냥 아빠한테 물어봐야겠어요. 아빠는 항상 센스가 있잖아요.”

그 말과 함께, 동우는 태블릿을 품에 안고 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쿵!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사예는 본능적으로 아랫배를 감쌌다. 수술받은 자리가 욱신거렸고, 아들의 손에 밀린 그 감각이 묘하게 깊숙이 남았다.

‘그래... 아픈 건 몸이 아니라 마음이야.’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이 아이를 낳을 때, 나는 내 목숨을 걸었는데...’

‘지금은 그 아이와도 이렇게까지 멀어졌구나.’

그녀는 갑자기 동우를 낳던 날이 떠올랐다.

전치태반, 과다 출혈.

의사가 물었다.

“산모님, 아이를 포기하실 겁니까?”

그때 사예는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었다.

“아이를 살려주세요.”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온 건, 오직 ‘동우에게는 엄마가 필요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렇게 버텼는데... 결국 이 아이 마음에서 나는 사라졌구나.’

그녀는 아기를 안고 울며 밤을 새우던 시절이 있었다.

수유 거부, 산후 우울, 불면.

그럼에도 사예는 한시도 아이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때는 처음이라 모든 게 두렵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아이의 숨결이 곁에 있었다.

처음엔 동우가 사예에게 유난히 살갑게 굴었고, 엄마만 찾았다.

그러다 지난 2년 동안, 사예는 숨이 막힐 만큼 힘든 시간을 보내며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녀는 다시 일을 시작하고, 출장이 잦아지면서 ‘조금만, 잠깐만 떨어져 있자’ 그렇게 합리화했는데, 그 ‘잠깐’ 때문에 자신이 아들과 이렇게 멀어질 줄은 몰랐다.

요즘 동우는 기현의 품에 더 익숙했다. 아이가 기현과 함께 있으면 웃고, 사예 앞에서는 무표정했다.

‘나는... 결국 그 사람한테도, 아이한테도 가족이 아니구나.’

“사모님, 괜찮으세요?”

김순자가 다가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사예의 얼굴은 이미 종잇장처럼 하얘져 있었다.

사예는 손을 꼭 쥐었다가 천천히 풀며, 억눌러 담담히 말했다.

“괜찮아요. 오늘 저녁은... 그냥 안 먹을게요.”

그 말을 남기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자, 고요가 집 안을 삼켰다.

...

몸이 좋지 않아, 사예는 방 안에서 한참을 누워 있었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게 스르르 눈을 감았고, 눈을 뜨니 이미 하늘이 어두워져 있었다.

방 안엔 불도 꺼져 있었고, 정적만이 무겁게 깔려 있었다.

‘참, 이상하지. 이렇게 조용하면 더 외로워.’

목이 말라 일어나려던 사예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수술 부위가 여전히 욱신거렸다.

그녀는 벽을 짚고 일어나, 물을 마시려 문을 열었다.

그 순간, 문틈 사이로 웃음소리가 흘러들었다.

밝고, 따뜻하고,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들이었다.

사예가 문을 조금 더 열자, 거실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기현과 동우, 그리고 애진.

세 사람이 식탁에 둘러앉아 있었다.

애진의 모습은 오늘도 완벽했다.

고급스러운 블라우스, 단정한 머리, 정교한 메이크업.

‘참, 하나도 흐트러진 데가 없네.’

사예가 애진이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다. 애진이는 언제나 눈부시고, 마치 화면 속에서 막 걸어 나온 사람 같았다.

기현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 있었다. 그 옆에서 동우는 애진에게 달라붙어 재잘거렸다.

“이모, 이거 봐요! 제가 만든 거예요!”

애진은 환하게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 마치 오래된 가족 사진 속 한 장면 같았다.

‘저기 앉아 있는 세 사람이, 진짜 가족 같네.’

사예는 문가에 선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존재는 이 집 안에서 이상할 만큼 낯설었다.

애진을 바라보는 기현의 눈빛은 따뜻했다. 입꼬리가 부드럽게 말려 올라가 있었다.

‘저런 눈빛, 나한테는 단 한 번도 준 적이 없었지.’

둘이 결혼한 지 오 년이지만, 사예는 자신이 기현의 웃음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이제야 명확히 느껴졌다.

그녀는 벽에 등을 기댔다.

‘그렇게 좋아하던 사람을, 나는 바보같이 아직도 좋아하네.’

처음 결혼할 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송기현은 냉정한 사람이야. 첫사랑을 잊지 못한대.”

그땐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지금은 알았다. 기현의 마음은 한 번도 자신에게 머문 적이 없었다는 걸...

사예는 벽에 기대어 깊게 숨을 들이켰다.

사실, 기현의 집념에는 감탄스러울 만큼의 무언가가 있었다.

애진을 좋아한 지 수 년째이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마음이 흔들린 적이 없었다.

집안 어른들이 송기현이 고애진과 결혼하는 걸 허락했더라면, 아마 그 둘은 이미 오래전에 함께했을 것이다.

사예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애진은 집안도 좋고, 예쁘기까지 한데, 기현은 왜 그토록 사랑하는 애진이 아닌 자신과 결혼한 걸까?

만약 사예가 기현의 마음이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걸 알았다면, 그런 착각 속에 빠져 결혼하진 않았을 것이다.

모든 게 어긋난 인연이었다.

사예는 이제야 깨달았다. 억지로 이어붙인 인연은, 5년을 버텼다 해도 끝내 서로 닿을 수 없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이제... 남편을 놓아줄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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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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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엄마가 출장에서 이미 돌아왔을 시간인데...’동우는 게임기를 잡은 채 고개를 갸웃했다.평소라면 이 시간쯤 엄마가 퇴근해서 옆에 앉아 이것저것 잔소리를 늘어놨을 텐데, 오늘따라 유난히 집이 조용했다.예전에는 사예가 항상 아침 일찍 일어나, 동우와 기현의 아침 식사를 미리 차려두곤 했다.그런데 오늘은 식탁 위가 텅 비어 있었다.‘엄마가 오늘은 어디 간 거지?’김순자는 동우의 작은 표정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동우의 굳어진 얼굴을 보고 바로 눈치를 챘다.“도련님, 사모님이 전화 주셨어요. 오늘은 일이 좀 있으셔서 못 들어오신다고 하셨어요.”“정말요? 안 들어오세요?”동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눈동자가 묘하게 반짝거렸다.뭔가에 대한 기대와 기쁨이 섞인 빛이었다.“그런 것 같아요.”김순자가 미소를 지었다.“그럼 잘됐다! 엄마 안 들어오면 애진 이모가 와서 나랑 같이 자면 되겠다.”동우는 환하게 웃었다.아이는 애진이 옆에 있는 게 좋았다. 애진은 동우에게 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고, 웃게 해주고, 가끔은 게임도 함께하기도 했다.그리고 애진이 곁에 있으면 아빠의 얼굴도 훨씬 부드러워졌다.‘엄마는 그냥 일만 하고, 웃지도 않고, 맨날 잔소리만 하니까... 재미없어.’동우는 생각했다.‘엄마가 출장 오래가면 좋겠다. 그럼 애진 이모가 매일 나랑 있을 텐데.’그런 생각을 하니 입맛이 돌았다.밥 한 숟갈 한 숟갈이 더 맛있었다.‘오늘은 이모한테 연락하지 말고, 그냥 아빠한테 데려와달라고 해야겠다.’식사를 마치자마자 동우는 들뜬 마음으로 거실로 뛰어갔다. TV를 켜고, 제일 좋아하는 만화 채널로 맞췄다.소파에 앉아 두 발을 꼼지락거리며 TV 화면을 바라봤다.그때, 현관문이 열렸다.기현이 들어왔다.동우가 얌전히 앉아 있는 걸 보자,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오늘은 왜 이렇게 얌전해?”기현이 물었다.동우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아빠에게 달려가 손을 꼭 잡았다.“아빠! 오늘 엄마 안 들어온대요. 저 애진 이모랑 같이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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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기현은 끝내 사예의 말을 듣지 않았다.사예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았다.그래서 조용히, 담담하게 말했다.“제 잘못입니다.”기현의 시선이 차갑게 내려왔다.“회사에 있는 이상, 회사 이익을 먼저 생각해야지. 감정 섞인 행동은 필요 없어. 그럴 거면 홍보실장 자리, 다른 사람 줘.”그 말에 사예의 손끝이 떨렸다. 주먹이 단단히 쥐어졌다.‘언제나 그랬지.’‘무엇을 해도 인정받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다 내 잘못이지.’그녀는 숨이 막혔다.‘이렇게까지 버틸 이유가 있을까?’마음 한구석이 서늘하게 비어갔다.사예는 겨우 미소를 지었다.“알겠습니다, 대표님. 그럼 바로 사직서 쓰겠습니다.”그 말에 기현이 살짝 고개를 들었고, 차가운 눈빛이 그녀를 스쳤다.“다른 하실 말씀 있으세요? 없으면 저는 이만...”그녀는 단호했다.이혼도, 퇴사도 이미 마음속에서 정리된 일이었다.더 이상 미련을 둘 이유가 없었다.기현의 얼굴에 냉기가 번졌다.“좋을 대로 해. 스스로 잘 생각하고 결정하면 돼.”사예는 가볍게 목례한 후 문을 향해 걸었다.문을 열자, 바로 앞에 진수란이 커피를 들고 서 있었다.그 표정엔 놀라움보다 즐거움이 먼저 깔려 있었다.사예는 진수란을 그냥 스쳐 지나가려 했다.그러나 진수란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뒤통수를 찔렀다.“결국 잘렸어요? 그럴 줄 알았어요. 한 실장님이야 뭐, 얼굴 하나로 여기까지 올라왔으니까요. 능력 없는 사람이 큰 일 하나 말아먹는 건, 시간문제 아니에요?”사예의 발걸음이 멈추며 천천히 돌아섰다.진수란은 팔짱을 끼며 턱을 들었다.“왜요, 한 대 치기라도 하려고요?”사예는 아무 말 없이 테이블 위에 놓인 컵을 집어 들었다.그리고 그대로 컵을 들어 진수란에게 물을 끼얹었다.“꺄악...!”얼음 섞인 물이 진수란의 얼굴과 옷을 적셨다.순간 주변이 조용해졌다.사예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답답한 마음이 폭발해 버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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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은아 뒤에 서 있던 친구들이 킥킥 웃기 시작했다.누군가는 팔짱을 끼고, 또 누군가는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야, 은아. 너 아까 그 언니가 네 말 제일 잘 듣는다고 하지 않았어? 근데 지금은 아니네?”“설마 지금까지 다 거짓말이었던 거야?”“그래도 사예 언니가 송씨 가문의 며느리에 사모님이잖아. 올케가 사촌 시누이 심부름이나 하다니, 좀 심했지.”친구들의 비아냥에 은아의 얼굴이 굳었다.은아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으며, 비웃듯 사예를 쏘아봤다.“사모님은 무슨 사모님이야. 우리 오빠는 애초에 그 언니를 아내로 인정한 적도 없어.”그 말에 주변 공기가 싸해졌다.은아는 전혀 멈출 생각이 없었다.“그 언니가 우리 집에 시집온 게 대박 터트린 거지. 우리 오빠가 거둬줬으면, 최소한 그 정도 대가는 치러야지. 이 정도 일도 못 하면서 우리 집 며느리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사예는 피식 웃었다.“그럼 네가 대신 해. 그 ‘송씨 집안의 사모님’ 자리, 인제 그만둘 거니까.”그 말을 끝마치자 사예는 은아를 가볍게 밀치고 걸어갔다....식사 자리에서 이소와 만나 늦은 저녁을 함께한 뒤, 사예는 새로 구한 집으로 돌아왔다.배송 기사가 문 앞에 두고 간 상자들이 쌓여 있었다.그녀는 짐들을 간단히 정리한 후 샤워하고 침대에 누웠다.방 안은 낯설 만큼 조용했다.‘드디어, 나 혼자구나.’옆에 두었던 가방에서 명함 한 장을 꺼냈다.권호빈의 명함이었다.사예는 호빈의 연구팀에 큰 관심이 있었다. 정말 함께하고 싶었지만, 마음 한편에는 자신감이 조금 부족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앞으로의 삶을 위해서 시도는 해봐야 했다.기현과의 이혼 후, 사예는 돈을 한 푼도 받지 않았다.아이의 양육권은 기현에게 넘기고, 그녀는 말 그대로 빈손으로 집을 나오려고 했다.사람들은 모두 사예가 돈 때문에 기현과 결혼했다고 생각했다.심지어 사예의 부모조차도 ‘우리 딸이 복이 많아 재벌 집에 시집갔다’라며 자랑스러워했을 뿐, 그 결혼 속에서 사는 사예가 행복한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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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사예는 한참을 제자리에 서서 멍하니 서 있다가 천천히 숨을 고르며 말을 꺼냈다.“이모님, 냉장고에 버섯 좀 남았어요?”“네, 사모님. 지금 가져다드릴게요.”김순자가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잠시 후, 작은 봉지 하나를 꺼내 사예에게 내밀었다.사예는 버섯을 받아 들고 고개를 끄덕였다.“동우한테 버섯 죽 좀 끓여주려고요.”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낮고 부드러웠다.‘그래도 내가 엄마니까... 오늘만큼은 따뜻하게 한끼 해줘야지.’...동우가 손에 색종이를 쥔 채 거실로 나왔다.숙제를 마친 모양이었다.사예는 그를 보며 조심스레 웃었다.“아들, 이리 와. 엄마가 버섯죽 끓였어.”하지만 동우는 그 자리에서 멈춰서더니, 표정이 단번에 굳었다.말없이 소파로 가 앉았다.사예는 조심스레 죽그릇을 들고 다가가 탁자 위에 놓았다.“왜 그래? 기분 안 좋아?”동우는 등을 돌린 채 대답하지 않았다. 입술만 꾹 다물고 있었다.사예는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고애진이 떠나서 그런 걸까?’‘아니면 내가 돌아와서 기분이 상한 걸까?’그녀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아들, 엄마가 요즘 많이 바빴지. 앞으로는 더 자주 같이 있을게. 좋지?”그러자 동우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작은 눈동자가 사예를 향했다.“애진 이모가 저랑 같이 있어 줄 거예요.”그 말에 사예의 손끝이 잠시 멈췄다.‘그래... 고애진이 있으면 나는 없어도 되는구나.’가슴이 서서히 무거워지면서 사예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럼 이건 먹고 자. 금방 식는다.”그녀는 죽그릇을 식탁 위에 조심스레 올려두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방으로 들어온 사예는 옷장 문을 열어 남아 있던 옷가지들을 꺼냈다.화장대 위에는 화장품 몇 개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이것들도 결국 내가 정리해야겠네.’옷을 개며 숨을 고르던 그때, 현관 쪽에서 문 여는 소리가 났다.기현이 집에 들어왔다.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거실을 둘러보았다.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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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사예는 조용히 미소만 지었다. 딱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집안일을 밖에서 떠드는 건 바보짓이야.’‘괜히 웃음거리만 되지.’그래서 그저 사모님들과 예의 바른 인사를 주고받으며 가벼운 대화만 이어갔다.그런데 그 옆에서 동우는 자꾸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아빠랑 엄마 둘은... 그런 사이 아니잖아.’‘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하는 거야?’동우의 어린 얼굴에 짙은 불만이 스쳤다.‘엄마는 언제나 회사 일이 먼저였잖아!’‘나를 안아주는 일보다 회의랑 보고서가 더 중요했잖아!’‘엄마는 우리 가족이 아니야. 애진 이모랑 있을 때가 훨씬 좋아.’그렇게 생각하자, 동우는 더 이상 엄마 옆에 있고 싶지 않았다.사예가 사모님들과 웃으며 이야기하는 틈을 타 동우는 살짝 몸을 돌렸다.그리고 곧장 기현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기현은 이천기 회장과 함께 서 있었다.오늘 자선 만찬의 주최자이자, 협력 사업의 중요한 인물이었다.“저희 이번 사업은 국제 시장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좋은 접근입니다. 비전그룹의 실행력이면 충분히 가능하죠.”두 사람의 대화가 막 깊어지려던 그때, 작은 손이 기현의 다리를 감쌌다.기현이 놀란 듯 고개를 숙였다.동우였다.기현은 자연스럽게 몸을 굽혀 아들을 바라봤다.차가운 눈매에 순간적으로 온기가 스쳤다.“엄마는?”동우는 작은 손가락으로 저쪽을 가리켰다. 멀리서 사예가 사모님들과 웃고 있었다.기현은 잠시 그 방향을 바라보다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어디 가지 말고, 그냥 아빠 옆에 있어.”“아빠, 저... 엄마랑 있기 싫어요.”동우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말했다.기현은 미간을 좁히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왜?”“애진 이모 보고 싶어요.”그 한마디에 기현의 눈빛이 흔들렸다. 사람들이 많은 자리라, 아들을 다그칠 수도 없었다.그는 부드럽게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이따 끝나면, 아빠가 데려다줄게. 알겠지?”“지금은 안 돼요? 지금 보고 싶어요.”동우는 기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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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기현의 가슴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가 분명히 느껴졌다.도대체 마지막으로 이렇게 가까이 닿았던 게 언제였을까,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겉으로 보기엔 사예는 분명 기현의 아내였다.하지만 실상은 남보다도 더 먼 사이였다.사예는 고개를 들어 기현의 시선을 마주했다.천장에서 쏟아지는 조명이 기현의 선명한 윤곽을 비추고 있었다.사예의 손은 본능적으로 기현의 셔츠 깃을 움켜쥐었다.그 천이 사예의 손안에서 구겨져 형태를 잃어갔다.‘이제는 정말 끝내야 하는데...’그렇게 다짐했으면서도, 기현의 심장 소리가 귓가를 두드리고, 특유의 체온과 체취가 사예를 감싸자, 사예는 또다시 이 따뜻함에 기대고 말았다.‘딱 이번 한 번만. 이게 마지막이야.’사예는 자신을 타이르며 기현의 품 안에서 천천히 긴장을 풀었다.오래 바란 것도 아니다. 그저 이 잠깐의 순간만이면 됐다.그때, 애진이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값비싼 장신구로 치장한 채 우아하게 다가왔다.동우는 애진을 보자 눈을 반짝이며 달려가 외쳤다.“애진 이모! 오셨네요!”거의 동시에, 사예의 몸이 밀려났다.기현의 손짓은 아주 미세했지만, 사예는 중심을 잃고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사예는 기현이 아무렇지 않게 옷매무새를 고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을 비웃듯 미소 지었다.‘고애진이 오해할까 봐... 그렇게까지 급했구나.’동우는 해맑게 애진의 손을 잡고 있었다.그 둘의 모습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그 화면이 사예의 시야를 찌르듯 아프게 했다.애진을 바라보는 기현의 눈빛엔 한없는 부드러움이 깃들어 있었다.말 한마디 없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공기가 이미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애진이 고개를 돌려 사예를 향해 미소 지었다.“사예 씨, 여기 계셨네요. 우연입니다.”사예는 애써 웃음을 지었다.“그러게요, 정말 우연이네요.”‘이 자리에 더 있고 싶지 않아... 숨이 막혀.’하지만 사방에서 느껴지는 시선들이 사예의 발목을 붙잡았다.이 순간의 작은 실수조차, 모두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게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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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숨이 막히는 듯한 답답함이 덮치자 사예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거의 도망치듯 연회장을 빠져나와 거칠게 숨을 내쉬고는,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틈을 타 화장실로 들어갔다.차가운 물로 사예의 얼굴을 적시자 그제야 조금 정신이 들었다.‘괜찮아... 괜찮아. 이제 진정해야 해.’사예는 거울 속 창백한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작게 숨을 고르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복도로 나오자마자 정면에서 보이는 풍경에 발이 멈췄다.기현과 애진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동우는 애진 옆에 꼭 붙어 있었고, 애진은 다정한 손길로 동우에게 음식을 먹여주고 있었다.겨우 눌러놓았던 사예의 감정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이건 아니야...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프지.’그 모습은 너무나 평온하고, 따뜻했다.사예는 마치 어둠 속에서 남의 행복을 몰래 훔쳐보는 생쥐 같았다.저 남자는 자기 남편이고, 저 아이는 자기 아들인데...‘그래서 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사예는 고개를 숙였다. 자존심 따위 내세워봐야 아이만 상처 입게 될 것이다.동우는 애진을 좋아했다.그렇다면, 엄마인 자신이 그 마음을 막아서는 안 됐다.‘동우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됐어.’사예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하지만 연회장의 공기는 너무 무거웠다.숨조차 쉬기 힘들 만큼.그녀는 이런 자리에 서 있는 것보다 차라리 실험실에서 하루 종일 시약 냄새를 맡는 게 더 편했다.그렇게 생각하며 사예는 조용히 발길을 돌렸다. 시끄러운 음악과 웃음소리에서 멀어질수록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연회는 점점 끝을 향해 갔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떠나기 시작했다.기현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사예가 보이지 않자, 살짝 찌푸린 얼굴로 직원에게 물었다.“제 집사람 혹시 어디 갔습니까?”“먼저 가신 것 같습니다.”“그래요.”기현은 짧게 답하고는 더 묻지 않았다.그 시각, 사예는 이미 택시를 타고 있었다.도착하자마자 드레스를 벗고, 그녀는 함께 매치했던 보석과 액세서리를 차근차근 정리했다.그리고 심부름 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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