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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os os capítulos de 다시, 나의 이름으로.: Capítulo 11 - Capítulo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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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죽어버린 기억

은호는 말을 끝내자마자 차에 올라탔다. 그리곤 가속 페달을 세게 밟아 그대로 떠나버렸다.남겨진 태리는 그 자리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며 욕을 퍼부었다.“저게 사람이야? 사람이냐고!”“쓰레기 같은 자식! 잡놈! 개보다 못한 자식! 아, 진짜 열받아 죽겠네!”그녀는 옆에 서 있던 연하남의 옷깃을 붙잡았다.“내가 말하는데, 이번엔 유진 절대 안 돌아가! 절대!”남자는 연신 달래듯 말했다.“그래 그래, 맞아. 화 좀 가라앉혀…”하지만,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저 남자는 이미 결과를 확신하고 있는 사람처럼 태연해 보였다.그는 슬쩍 태리를 바라봤다. 순간, 그녀도 유진처럼 한 남자에게 그렇게까지 헌신해 준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쳤다.‘아니지… 아니야.’그는 고개를 저었다. 꿈에서도 감히 그런 걸 바라진 못했다.……차 안에서 은호는 전화를 받았다.기분이 좋지 않은 탓에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무슨 일이야.”“자기, 요즘 완전 보물 같은 가게 찾았어요! 게가 진짜 살이 꽉 찼대요. 마침 내일 토요일이잖아요. 우리 가서 먹을까요? 응?”수아의 밝고 발랄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흘러나왔다. 그가 해산물을 좋아한다는 걸 알기에, 취향에 맞춰 제안한 것이었다.게다가 은호는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아무 연락도 없었다. 그 침묵이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국 자존심을 내려놓고 먼저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예전에는 대부분 은호가 먼저 데이트를 제안했고, 그녀는 수줍게 한 번 사양한 뒤 받아들이면 됐다.하지만 요즘은 달랐다.그가 먼저 연락하는 횟수는 눈에 띄게 줄었고, 메시지도 짧아졌다. 가끔은 읽고도 답을 하지 않았다.이유를 물어보면 늘 같은 대답뿐이었다.“바빠.”지금도 마찬가지였다.“토요일? 바빠. 시간 없어.”“토요일이 안 되면… 일요일은 어때…요?”그녀는 휴대폰을 꽉 쥐었다.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시간 없다니까. 끊는다.”전화는 그대로 끊겼다.끊긴 화면을 바라보는 순간, 수아의 가슴에 불안이 다시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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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절대 너와 결혼하지 않는다

“싫어요.”수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얼굴을 붉히며 살짝 발끝을 들었다.“오빠랑 조금만 더 같이 있고 싶어요.”그녀가 더 다가오기 전에, 은호가 먼저 움직였다.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와아!”주변에서 환호와 탄성이 터졌다.“세상에! 얼마나 사랑하면 저럴까?”“완전 드라마네!”유진은 그 장면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책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아직도… 마음이 아팠다.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놀라울 만큼 차분했다. 거의 무감각에 가까웠다.‘담배를 끊어도 금단 현상이 있는데, 하물며 6년을 사랑했던 사람인데.’유진은 더 이상 머물지 않고 조용히 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가 공부해야 했다.사람들 사이에 서 있던 은호는 문득 무언가 느낀 듯 고개를 돌렸다. 어딘선가 익숙한 뒷모습이 시야 끝을 스쳤다.하지만 그 순간, 수아가 그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의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얽혔다.“뭘 보고 있었어요?”은호는 시선을 거두었다.“…아무것도 아니야.”수아를 기숙사 건물 아래까지 데려다준 뒤 돌아가려 했지만, 수아는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아직 이른데... 조금만 더 같이 있으면 안 돼요?”은호는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주말에 데리러 올게.”가로등 불빛 아래서 그의 얼굴은 역광 속에 더 또렷하게 드러났다. 수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달콤한 유혹이 섞였다.“오빠… 오늘 저, 오빠 집에 가도 될까요?”그 말의 의미는 분명했다.은호는 잠시 멈칫했다.“넌 아직 어려. 조금 더 기다리자.”수아는 놀랐지만 마음 한편이 오히려 따뜻해졌다.그가 자신을 가볍게 대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나 이제 가볼게. 할 일이 있어.”수아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내일 아침에 좁쌀죽 가져다줄게요.”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멍해진 듯 서 있을 뿐이었다.……방 안.컴퓨터 화면이 켜져 있었지만 유진의 타이핑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머릿속에 두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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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네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재벌가의 정략결혼에서는 남자가 밖에 두 번째, 세 번째 여자를 두는 일이 흔했다.집안의 ‘정실’ 자리만 흔들리지 않으면, 밖에서 무슨 짓을 하든 크게 문제 삼지 않겠다는 식이었다. 결국 체면만 지켜지면 되는 일이니까.순희 역시 그런 어머니였다.오늘은 유진에게 사실상 일종의 ‘약속’을 해준 셈이었다.하지만 그녀가 기대했던 유진이 감사하며 고개를 숙이는 장면은 나타나지 않았다.대신 돌아온 것은 차가운 비웃음이었다.“어머님.”유진이 차분히 말했다.“그런 시혜는 다른 사람에게 주세요. 저는 받을 복이 없네요.”그리고 덧붙였다.“그리고 하나 더. 저랑 은호는 이미 헤어졌습니다. 앞으로 다시 마주치게 된다면…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는 게 좋겠네요.”예전의 유진이라면, 은호를 위해 이런 모욕쯤은 묵묵히 참고 견뎠을 것이다.순희는 늘 그녀를 못마땅해했다. 학벌도 부족하고, 유학 경력도 없고, 졸업 후 커리어도 없는 여자. 결국 그녀는 늘 같은 말로 평가받았다.‘내 아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여자.’예전의 유진이라면 미래의 시어머니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썼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은호조차 버렸는데, 그의 어머니가 뭐라고. 대놓고 모욕하는데 참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아, 그리고 어머님.”유진이 미소 지었다.“조언 하나 드릴게요.”순희가 눈을 찌푸렸다.“뭔데?”“앞으로 그렇게 독하게 말씀하지 마세요.”잠시 멈춘 뒤 덧붙였다.“맞을 수도 있거든요.”그리고 덧붙였다.“참고로 ‘원숭이가 관을 썼다’는 말은 ‘목후이관’이라고 합니다. 그런 표현도 좀 배우시죠.”말을 마친 유진은 그대로 돌아서서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순희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지금… 뭐라고 한 거야?”그녀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감히 나한테 저런 식으로 말 해? 우리 장씨 가문에 들어오고 싶지 않은 거야?”옆에서 팔을 붙잡혀 흔들리던 은아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겨우 입을 열었다.“…엄마. 방금 유진이 오빠랑 헤어졌다고 하지 않았어?”순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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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다른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밥은 다음에 먹자. 나 일이 좀 있어서. 다음에 보자.”유진은 도현에게 웃으며 말했다. 그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기에, 거절하면서도 상대의 체면을 세워 주었다.도현은 그녀 손에 들린 보석 상자를 슬쩍 바라봤다. 고급 맞춤 주얼리 케이스였다. 정말 볼일이 있는 것 같았다.“그래요.”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뭔가 더 말하려는 순간 유진은 이미 은호 곁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한 번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잠깐의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순간 매장 안 공기가 묘하게 가라앉았다.도현이 은호의 표정을 살폈다.“…형, 유진 누나가 못 본 것 같네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차라리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은호의 표정이 더 굳어졌다.도현은 헛기침을 하고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생각했다.‘유진 누나, 이번엔 진짜 제대로네.’“손님, 구매하시겠어요?”판매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은호가 차갑게 눈을 들어 올렸다.“사죠. 왜 안 사겠어요?”그리고 덧붙였다.“여기서 제일 비싼 걸로 주세요.”그녀가 원하지 않는다 해도 원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으니까.……모임 장소는 운계로의 한 단독 별장이었다.유진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그녀를 알아본 사람들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예전에는 은호와 함께 이런 자리에 자주 나타났기에 얼굴이 알려져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 이름은 몰랐다.그저 ‘은호의 여자친구.’ 그렇게만 알고 있었다.하지만 최근 두 사람이 헤어졌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유진은 혼자 나타났다.소문이 사실인 듯하자, 사람들의 시선이 더욱 노골적으로 변했다.6년을 함께했지만 결국 버림받은 여자. 이보다 흥미로운 이야기가 또 있을까.하지만 유진은 그런 시선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곧장 태리를 찾아가 보석 상자를 건넸다.“유진, 조금 놀다 가지 그래? 오늘 음식 괜찮아.”“아니야.”유진은 고개를 저었다.“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조심히 들어가.”태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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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내가 그녀를 신경 쓸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유 비서가 유진을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차에서 내리며 감사 인사를 한 그녀는 곧장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대신 옆 골목에 있는 작은 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20분 뒤.양손 가득 장바구니를 들고 건물로 들어서려던 순간, 저녁노을 속에서 걸어오는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민준이었다.해는 이미 서쪽으로 기울어 하늘이 어둑해지고 있었지만, 그의 몸 위에는 아직도 은은한 주황빛 노을이 내려앉아 있었다.원래도 키가 큰 편이었는데, 길게 늘어진 그림자 때문에 더 길어 보였다.민준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묵묵히 걸어오고 있었다. 걸음걸이마저 어딘가 깊은 생각에 잠긴 사람처럼 차분했다.유진이 먼저 말을 건넸다.“또 보네요. 정말 우연이네요.”민준이 고개를 들며 안경을 살짝 밀어 올렸다.“그러게요.”“저녁 드셨어요? 장을 좀 많이 봐서요. 같이 드실래요?”민준은 반사적으로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머릿속에 문득 그녀의 요리가 떠올랐다.잠시 망설이다가,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유진의 집에 들어오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정면 발코니에는 튤립이 예쁘게 피어 있었고, 옆쪽 작은 어항에는 붉은 잉어 두 마리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흰 커튼이 저녁 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렸고, 체리색 나무 테이블과 의자가 공간에 따뜻한 분위기를 더했다.아늑하고 평온한 집이었다.유리 테이블 위에는 대학원 시험 문제집과 참고서들이 펼쳐져 있었다.민준이 무심코 시선을 내려보았다.검은 펜으로 적힌 답이 거의 다 맞다는 걸 알아챘다.“뭐라도 마실래요?”유진이 물었다.“물이면 충분해요.”유진은 따뜻한 물 한 잔을 따라 건넸다.“고마워요.”“오늘 장을 좀 많이 봤거든요. 전골 해 먹기 딱 좋겠더라고요.”그녀가 봉투를 열자 각종 채소와 신선한 소고기, 그리고 수제 미트볼이 나왔다. 냉장고에는 전에 남은 소뼈도 있었다.담백한 소고기 전골을 끓이기에 더없이 좋은 재료였다.그때였다.민준이 시험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객관식 하나 틀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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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평온한 일상, 다가오는 그림자

하지만 유진은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그리고 굳이 알 필요도 없었다. 요즘 그녀의 삶은 오로지 공부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단조롭지만 안정적이고, 또 나름대로 충실한 나날이었다.매일 반복되는 생활은 단순했다. 집에서 도서관으로, 도서관에서 다시 집으로. 두 곳을 오가는 것이 그녀의 하루였다.대부분의 시간은 공부로 채워졌다. 책을 읽고, 문제를 풀고, 노트에 정리하고, 또다시 복습했다. 공부에 지치면 잠깐 쉬었다가 다시 책을 펼쳤다.배가 고프면 직접 간단한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요리하는 시간은 그녀에게 작은 휴식 같은 순간이었다. 부엌에서 재료를 썰고 불을 켜고 냄비를 저어가며 시간을 보내다 보면 머릿속에 가득하던 공식과 문제들이 잠시 잦아들었다.가끔은 조금 넉넉하게 만들어 옆집 이웃에게도 나눠주곤 했다. 그 이웃은 늘 밤늦게까지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늦은 시간 불이 켜진 걸 볼 때면 유진은 자연스럽게 한 접시를 더 챙겨 들고 나가곤 했다.대단한 요리는 아니었지만 따뜻한 음식은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물질적인 면만 놓고 보면 예전보다 분명 부족한 삶이었다. 과거에 살던 그 넓은 별장, 화려한 가구와 넉넉한 생활. 그 모든 것과 비교하면 지금의 집은 작고 소박했다.하지만 그 별장을 떠난 뒤로 유진은 처음으로 느꼈다.숨 쉬는 공기조차 이렇게 가볍고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창문을 열면 들어오는 바람, 늦은 밤 조용한 거리, 혼자만의 공간에서 느껴지는 평온함. 그 모든 것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이었다.그리고 그녀는 지금의 생활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다.“유진, 공부 중이야?”전화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태리였다. 요즘 그녀는 거의 매일 빠짐없이 전화를 걸어왔다.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도서관 구석으로 걸어갔다. 주변 사람들이 공부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응, 공부 중이야.”“오늘 금요일이잖아.”태리가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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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순간 가까워진 거리

민준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실험은 원래 시행착오를 위한 겁니다. 결과만이 전부는 아니죠.”남자는 고개를 저었다.“하지만 데이터가 틀렸다는 건 실험이 틀렸다는 뜻입니다. 같은 문제를 수십 번 반복했는데 일주일이면 충분히 판단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그리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제 생각에는… 더 진행이 안 된다면 손실을 줄이는 게 낫지 않을까요? 다른 방향을 시도해 보는 것도…”민준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안경 너머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실험 실패가 두려운 겁니까?”“아니면 주 교수의 방향이 당신에게 더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그는 안경을 밀어 올렸다.“물리는 하루아침에 결과가 나오지 않습니다. 자기만의 속도와 길이 있죠.”“당신이 멈추자고 한다고 해서 바뀌는 게 아닙니다.”남자는 난처하게 웃었다.“아… 그냥 의견이었을 뿐입니다.”결국 두 사람은 불편한 분위기 속에 헤어졌다.민준이 돌아서자, 유진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오랜만이에요, 이웃님.”두 사람은 나란히 집으로 걸었다.방금 전 실험실에서의 팽팽했던 분위기와는 달리, 골목길에는 저녁 특유의 평온함이 흐르고 있었다. 하나둘 켜지기 시작한 가로등이 길가를 은은하게 밝히고 있었고, 멀리서 들려오는 자전거 벨 소리와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조용히 섞여 들어왔다.바람도 그리 세지 않아 공기는 차분했고, 하루가 서서히 마무리되어 가는 듯한 분위기가 골목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유진은 일부러 아까 상황을 언급하지 않았다. 민준이 누군가와 날 선 대화를 나누던 장면을 떠올렸지만, 굳이 다시 꺼내는 것이 좋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신 가볍게 말을 꺼냈다.“지난번에 설명해 줘서 고마워요. 문제 푸는 게 훨씬 쉬워졌어요.”민준은 고개를 저었다.“당신 이해력이 좋은 겁니다.”그의 말투는 여전히 담담했다. 칭찬인지 아닌지 모를 정도로 무심한 어조였다.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다시 물었다.“요즘 교수님은 뵈러 갔어요?”유진은 두 손을 등 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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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생일 선물

수아는 몇 걸음에 계단을 내려와 학교 정문으로 달려갔다.정문 앞 길가에 세워진 차들 사이에서 은호의 차를 단번에 찾아냈다.남자는 차 앞에 가볍게 기대 서 있었다. 아이보리색 티셔츠 위에 짙은 회색 코트를 걸치고, 선이 깔끔한 검은 캐주얼 바지를 입은 모습은 멀리서 봐도 눈에 띄었다. 대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젊고 활기찬 인상이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볼 정도였다.은호는 벌써 세 번째로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다. 약속 시간은 10시. 이미 몇 분이 지나 있었다.그는 휴대폰을 꺼내 수아의 번호를 찾았다.전화를 걸려는 순간, 부드럽고 향기로운 기운이 뒤에서 달라붙었다.수아가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싸 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많이 기다렸어요?”은호는 고개를 살짝 돌려 그녀를 힐끗 바라봤다. 검은 눈동자는 차분했고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지각이야.”두 손은 여전히 느긋하게 코트 주머니에 꽂혀 있었다.“미안해요. 다음엔 꼭 제시간에 올게요.”수아는 웃으며 말했지만 속으로는 살짝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은호가 더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타.”은호는 그녀의 속내를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굳이 그것을 짚어낼 생각도 없었다.수아는 얼른 조수석에 올라탔다.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녀는 금세 기분이 풀린 듯 끊임없이 이야기를 꺼냈다. 학교 이야기, 친구 이야기, 최근에 본 드라마 이야기까지 쉴 새 없이 이어졌다.은호는 핸들을 잡은 채 앞을 바라봤다. 가끔 짧게 “응”, “그래” 정도로 대답할 뿐이었다.신호등 앞에 멈췄을 때, 수아는 창밖을 보다가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거대한 LED 화면이 보였다. 새로 개장한 조이 랜드 광고였다.그녀의 눈이 반짝였다.수아는 살짝 몸을 기울이며 남자의 옷자락을 잡았다.“자기, 오늘 조이 랜드 갈까요?”“그래.”오늘은 수아의 생일을 보내기 위해 나온 거라 은호에게는 어디를 가든 크게 상관없었다.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last updateÚltima atualização : 2026-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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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문득 떠오르는 그녀

점심을 먹은 뒤, 태리는 동물 공연 티켓 두 장을 사서 신이 난 얼굴로 말했다.“돌고래 보러 가자!”사람들로 가득한 길을 헤치며 두 사람은 남서쪽에 있는 동물 공연장으로 향했다.공연장 안은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져 있었다. 밖의 뜨거운 공기와는 전혀 다른 세계처럼 느껴졌다. 문을 통과하는 순간 시원한 공기가 피부를 감싸며 땀까지 식혀 주었다.유진은 사실 동물 공연에 큰 관심이 있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태리는 달랐다. 그녀는 돌고래를 무척 좋아했고, 공연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아이처럼 들뜬 표정이었다.돌고래가 수면 위로 뛰어오르고 관객석에서 환호가 터질 때마다 태리는 박수를 치며 웃었다.관객 참여 시간이 되자 그녀는 갑자기 카메라를 유진에게 건네며 말했다.“사진 찍어 줘!”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자 유진의 입가에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30분 뒤 공연이 끝났다.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출구로 몰려가기 시작했고, 유진은 가방을 태리에게 맡기고 화장실로 향했다.모퉁이를 돌아 세면대가 있는 공간으로 들어섰을 때,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세면대 앞에서 손을 씻고 있는 여자.수아였다.유진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곧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그녀를 지나쳐 화장실 칸으로 들어갔다.볼일을 보고 다시 나오자 수아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마도 일부러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리라.유진은 여전히 그녀를 무시한 채 세면대로 가서 손을 씻기 시작했다.수도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만 조용히 울렸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공기 속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는 순간 유진의 시선이 수아의 눈과 마주쳤다.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시선을 돌렸다. 마치 완전히 모르는 사람처럼.그때 갑자기 수아가 미소를 지었다.그리고 소매 아래로 살짝 팔찌를 힐끗 보이며 말했다.“유진 언니, 정말 우연이네요.”유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수아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말을 이어갔다.“요즘 잘 지내세요?”유진은
last updateÚltima atualização : 2026-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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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언제까지 화낼 거야

은호는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그 익숙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수아는 그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 역시 겁먹은 얼굴로 그의 팔을 꼭 붙잡고 있었다.“오빠… 나 무서워요. 나 좀 지켜줘…”은호는 무심하게 대답했다.“응.”안은 완전히 어두웠다. 희미한 붉은 조명이 간헐적으로 깜빡일 뿐이었다.수아는 그의 팔에 매달리다시피 하며 한 걸음도 먼저 나가지 못했다.피투성이 얼굴이 반쯤 뜯겨나간 귀신 분장을 한 배우가 나타나자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더더욱 떨어지지 않았다..“꺄아! 오빠… 저거 갔어요?”수아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은호는 대충 등을 두드렸다.“이제 없어.”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 허술한 분장을 왜 사람들이 무서워하는지.유진이라면…그 이름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순간 은호는 잠시 멈칫했다.‘왜 자꾸 떠오르는 거지?’‘이미 헤어지기로 했잖아.’“오빠…?”수아가 고개를 들었다. 남자의 눈에 스친 깊은 표정을 보고 의아했다.은호는 감정을 눌렀다.“계속 가자.”……비명을 지르는 사람은 태리뿐만이 아니었다.용기를 내고 들어왔지만 갑자기 관 속에서 눈을 뜬 작은 좀비 인형을 보자 태리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순식간에 사라졌다. 유진이 잡을 틈도 없었다.유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저 속도면 달리기 대회에 나가도 되겠다.’태리는 출구 방향으로 도망쳤지만 그녀가 지나가자 문이 닫혀 버렸다.남겨진 유진은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주위를 둘러보다가 관 속에 누워 있던 NPC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입에 물고 있던 긴 혀 소품이 툭 튀어나왔다.조금 불쌍했고, 조금 웃겼다.유진은 잠시 침묵하다가 그 혀를 다시 관 안으로 밀어 넣어 주었다.NPC의 눈빛이 말하는 것 같았다.‘당신 참 착한 사람이네요.’이 귀신 마을에는 출구가 세 개 있었다.어둡고 희미한 통로 속에서 유진은 결국 길을 잃었다.10분 정도 돌고 나서 그녀는 생각했다. 여기는 귀신의
last updateÚltima atualização : 2026-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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