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다시, 나의 이름으로.: Chapter 31 - Chapter 40

93 Chapters

31화. 과거와 미래의 갈림길

7월 초, 기온이 점점 올라가면서 기상청은 폭염 경보를 발령했다.35도를 웃도는 더위가 일주일째 이어지는 가운데, 민준의 실험은 수차례 계산과 검증을 거친 끝에 드디어 진전을 보였다.겨우 짬이 난 그는 지친 몸을 이끌고 7층까지 올라와, 잠시라도 눈을 붙이려 했다.그때, 맞은편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문을 열려던 손이 멈췄다.그는 돌아서서 닫혀 있는 맞은편 문을 바라보더니, 조용히 다가가 노크했다.“유진 씨, 집에 있어요?”대답이 없었다.한 번 더 두드렸다.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었다.잠시 망설였다.신고를 해야 하나 고민하던 순간.찰칵.문이 열렸다.유진은 문 뒤에서 몸만 살짝 내민 채, 문틈만 겨우 열어 둔 상태였다.“무슨 일이세요?”표정은 평소처럼 담담했다.갑작스러운 노크에 응답한 것뿐인 듯, 목소리에도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민준은 느꼈다.지금 그녀는 괜찮지 않다.마치 수분을 잃어 말라가는 장미처럼.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유진이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봤다.그때 그가 입을 열었다.“지난번에 논문 쓴다고 했죠? 진행은 어때요?”유진이 답했다.“보름 전에 다 써서 투고했어요. 지금은 복습하면서 결과 기다리는 중이에요.”민준은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제가 가지고 있는 논문이 하나 있는데,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관심 있으면 한번 볼래요?”유진의 눈이 살짝 커졌다.“네?”……20분 후, 민준의 집.유진은 소파에 앉아 종이 논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눈빛이 점점 달라졌다.그 논문은 생물 서열을 주제로, 생물의 초기 변화값을 분석하는 내용이었다.주제 자체는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접근 방식이 독특했고, 검증 방식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참신했다.모든 것이 새로운 결론과 새로운 방법이었다.하지만 이처럼 혁신적인 연구일수록 방대한 데이터가 필요했다.유진이 물었다.“이거… 직접 쓰신 논문이에요?”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대학교 2학년 때 준비했던 겁니다.”유진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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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돌아오겠대?

아침 러닝을 마치고 샤워까지 끝낸 유진은 발코니를 지나 오다가 잠깐 멈췄다. 초록색 다육식물들 사이에 분홍빛 화분 하나가 새로 놓여 있었다.그녀는 손가락으로 살짝 톡 건드려 보았다.말랑하고 통통한 잎을 보자, 괜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그때, 책상 위에서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화면에 뜬 이름은 도현.유진은 의아한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도현? 이 시간에 웬일이야? 무슨 일 있어?”“유진 누나, 요즘 어때요?”“그럭저럭. 너는?”…기회다.도현은 바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저는… 좀 안 좋아요.”유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어디 아파?”“요즘 밤새고 술도 좀 마셔서 그런지… 위가 안 좋아요.”“근데 이상하게 아무것도 먹고 싶지가 않고… 누나가 끓여준 그 위에 좋은 죽만 계속 생각나요…”“진짜 너무 먹고 싶어서요...”“…혹시… 가능할까요?”은호 이야기는 꺼낼 수 없으니, 돌려서 말할 수밖에 없었다.유진은 잠시 생각했다.은호를 통해 알게 된 사이였지만, 그와는 별개로 도현과도 꽤 오래 알고 지낸 사이였다.게다가 위가 안 좋다니… 그녀는 시계를 한 번 확인했다.“… 가능해. 지금 장 보러 나갈 거니까, 점심쯤 와서 가져가.”“진짜요? 와아! 감사합니다 누나! 사랑해요!”“누나 최고다! 그럼 나중에 연락 드릴게요!”유진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정오가 조금 넘은 시간.도현은 유진이 보내준 주소를 따라 차를 몰고 대학교 근처까지 왔다.골목을 몇 번이나 돌아서야 겨우 도착했다.차를 세우고 나무가 늘어선 길을 지나 건물 앞에 섰다.7층. 엘리베이터 없음.그는 고개를 들어 올려다봤다.“…와…”5분 후, 숨이 턱까지 차오른 채 겨우 문 앞에 도착했다.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거의 반 죽은 상태였다.유진이 문을 열어주고, 바로 물부터 한 잔 따라줬다.“괜찮아? 그렇게 힘들어?”도현은 숨을 몰아쉬며 손을 저었다.“너무 힘들어요… 누나, 이런… 외진 곳은 어떻게 찾았어요?”사실 ‘낡았다’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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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닿지 않는 목소리

도서관.유진은 문제지 두 세트를 연달아 풀었지만, 둘 다 마지막 문제에서 계속 막혔다.한참을 계산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문득 비슷한 유형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떠올랐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료실로 가서 관련 문제와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몇 분 만에 자료를 찾는 데 성공했고, 자리로 돌아가려던 순간 옆에 꽂힌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유전자 서열의 재조합과 융합’민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책을 꺼냈다.몇 장 넘겨보자 눈빛이 달라졌다.이 책의 핵심 관점이 자신이 생각하던 방향과 본질적으로 매우 유사했다.페이지를 더 넘길수록 점점 더 깊이 빠져들었다.그녀는 완전히 몰입한 상태였다.그때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진동했다.화면에 카카오톡 메시지가 떴다.[태리: 나 어디 있는지 맞혀볼래?]유진은 처음엔 장난인 줄 알고 웃으며 답하려다, 문득 떠올렸다.[유진: 설마 학교 왔어?][태리: 빙고!]……도서관 밖.유진은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나무 아래 서 있는 태리를 발견했다.“갑자기 웬일이야?”“근처 왔다가 들렀어. 맛있는 거 가져왔어.”태리가 들고 있던 봉투를 살짝 들어 보였다. 맛있는 냄새가 은은하게 퍼졌다.“전달했으니까 난 간다.”유진이 물었다.“같이 먹고 가는 거 아니야?”태리는 손을 휘저었다.“너 주려고 가져온 거야. 난 바빠.”그러다 한숨을 내쉬었다.“요즘 프로젝트 때문에 죽을 맛이야. 3일 동안 겨우 8시간 잤어.”“이제 막 눈 떴는데, 또 부르네. 진짜 사람 살려라…”태리는 디자이너였다.1년에 몇 건 안 되는 프로젝트만 맡았지만, 하나하나가 규모가 커서 바쁠 땐 거의 쉬지를 못했다.이번에도 갑작스럽게 투입된 상황이었다.“근데 이번 일, 장 씨랑도 관련이 좀 있어.”그녀가 눈을 굴리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궁금하지 않아?”“안 궁금해.”유진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그리고 우산을 그녀 손에 쥐여줬다.“바쁘다며. 햇볕 조심해.”태리는 웃으며 유진을 바라봤다.‘아직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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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돌아보지 않는 여자, 따라가는 남자

고요한 밤.전화기 너머에서 잠꼬대처럼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유진, 나 아파.”거의 잠꼬대처럼 들릴 만큼, 힘없이 흔들리는 음성이었다.그 순간, 유진의 가슴이 본능적으로 쿵 하고 내려앉았다.은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억지로 버티고, 고집 세고, 입도 험한 사람.술을 마시다 위가 망가지는 것도, 일에 치여 끼니를 거르는 것도 늘 반복되던 일이었다.그 시절, 유진은 그의 몸을 돌보느라 애를 많이 썼다.하루 세 끼를 챙기고, 한의원까지 찾아가 배운 지압까지 직접 해주며 오랜 시간 공을 들여 그의 위를 겨우 회복시켰다.그런데 돌아온 건 ‘귀찮다’는 말.가끔은 짜증 섞인 얼굴로, ‘너 왜 우리 엄마 같냐?’라는 말까지.거의 잊고 있던 기억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하지만, 순간적으로 올라온 연민은 금세 가라앉았다.유진은 담담하게 말했다.“나 의사 아니야. 많이 아프면 병원 가.”차가운 목소리였다.은호의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네가 끓인 죽이… 먹고 싶어.”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침묵.은호도 침묵했다.서로 말은 없지만 팽팽하게 맞서는 공기.결국 그녀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은호는 한동안 휴대폰을 든 채 그대로 멈춰 있었다.간호사는 그가 잠든 줄 알았다가, 얼굴을 보고 흠칫했다.표정이 너무 좋지 않았다.“도련님…?”은호는 휴대폰을 돌려주고 눈을 감았다.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다음 날 새벽.하늘이 막 밝아올 무렵 유진은 눈을 떴다.그리고 곧바로 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위는 좀 괜찮아? 죽 더 먹을래?”도현은 깊이 자고 있다가 전화를 받았다.처음엔 스팸인 줄 알았지만 유진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벌떡 일어났다.“누나!”“누나 죽 진짜 맛있었어요! 순식간에 다 먹었어요. 계속 생각나요…”유진은 굳이 사실을 따지지 않았다.몇 시에 오면 되는지 시간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그녀와 은호는 이미 끝난 사이였다.지금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가 전부였다.……며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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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끝이라는 대답

지석은 역시 심 교수님이 눈여겨볼 만한 학생이었다.유진과 전공 방향은 달랐지만,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의외로 맞닿아 있는 지점이 많았다.이야기가 깊어질수록 유진도 점점 즐거워졌다.지금 그녀는 대학원 시험을 준비 중이었다.기본 개념은 대부분 이미 익혔지만, 현재 전공 분야의 최신 연구 흐름까지는 아직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그건 논문을 꾸준히 읽고 쌓아야 하는 부분이라, 단기간에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그 점에서는 현역 대학원생인 지석이 훨씬 앞서 있었다.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은호였다.주먹이 저절로 꽉 쥐어졌다.자기에게는 그렇게 냉정하게 굴면서, 아무리 부탁해도 병원에는 한 번도 오지 않던 그녀가 다른 남자 앞에서는 저렇게 웃는다?가슴이 뒤틀렸다.……집 안.유진은 한 상 가득 음식을 차려냈다.매콤한 것, 담백한 것, 달콤한 것, 종류도 다양했다.지석은 눈을 크게 떴다.“이거… 우리 둘이 먹기엔 너무 많은 거 아닌가요?”유진이 웃었다.“도와준 게 많잖아요. 이 정도는 해야 감사 표시죠.”지석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사실 그렇게 많이 도운 것도 아닌데요… 오히려 유진 씨가 훨씬 빠르게 따라오던데요.”함께 공부하면서 그는 확실히 느꼈다.유진은 단순히 잘하는 수준이 아니었다.응용도 빠르고, 이해도도 높아서 한 번 설명하면 다시 말할 필요가 없었다.“공부 도움도 있지만.”유진이 덧붙였다.“논문 자료 찾는 거 도와준 것도 크고… 무엇보다 학생만 열람 가능한 원문 자료까지 볼 수 있게 해준 게 제일 고마워요.”지석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시험 준비하면서 논문까지 같이 보고 있었어요?”그제야 이해가 됐다.왜 심 교수가 그렇게까지 그녀를 아끼는지.……식사가 끝난 뒤, 지석은 잠시 앉아 있다가 어느새 밤이 깊어진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그를 배웅하며 쓰레기도 함께 버리러 나갔다.“오늘 진짜 맛있었어요. 감사합니다.”“별말을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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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집착의 방식

방 문을 열자마자 은호는 거의 미친 사람처럼 안으로 들어갔다.옷장을 거칠게 열어젖히고, 곧바로 유진 전용 드레스룸으로 향했다.명품 가방, 옷, 그가 선물했던 시계와 액세서리들까지, 전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하나도 빠짐없이.그의 시선이 한쪽에 놓인 체리 팔찌에 멈췄다.숨이 거칠어졌다.눈빛이 거칠게 번들거렸다.그건 사귄 지 3년째 되던 해, 그가 해외에서 직접 사온 생일 선물이었다.Cherry.‘cherish’와 비슷한 발음.‘소중히 여기다’라는 의미.…그녀는,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그때의 그녀는 그걸 손에서 놓지 않았다. 늘 차고 다녔다.그런데 이것마저 남겨두고 갔다.마치 그를 향한 마음까지 전부 버린 것처럼.은호는 그대로 침대에 주저앉았다.그제야 깨달았다.유진은 한 번도 감정적으로 굴었던 적이 없었다.그녀가 했던 말들은 전부 진심이었다.정말로, 그와 끝내려는 거였다.……“쾅!”아래층에서 소리를 들은 아주머니가 놀라 뛰어 올라왔다.문 앞에 도착하자 마침 드레스룸에서 나온 은호와 마주쳤다.그의 얼굴은 폭풍 직전처럼 어두웠다.“도련님…”부르기도 전에 그는 그대로 지나쳐 내려갔다.아주머니가 안을 들여다보자 숨이 턱 막혔다.진열장이 산산이 부서져 있었고, 택도 떼지 않은 옷들이 바닥에 널려 있었다.보헤미안 스타일 카펫 위는 완전히 난장판이었다.방금 전까지 주방 정리하고 쉰 죽까지 치웠는데 이젠 이걸 또 정리해야 한다니.“…내 인생 뭐냐 진짜…”……요란한 조명.싸구려 음악.노출이 심한 남녀들이 무대 위에서 춤을 추고 있다.그 한 켠에서 은호는 혼자 술을 들이키고 있었다.위스키 한 병.잔에 따르지도 않고 그냥 들이붓듯 마셨다.마시는 게 아니라 쏟아내는 것처럼.어둠 속에서 반쯤 드러난 얼굴.차갑고 날카로운 분위기 때문에 오히려 더 위험하게 매력적이었다.지나가던 여자가 다가왔다.“오빠, 혼자 마시면 재미없잖아! 같이 마실까?”몸을 기울이자 깊게 파인 가슴골이 훤히 드러났다.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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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선을 넘은 순간

가는 내내, 처음 몇 마디를 나눈 것을 제외하면 두 사람은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오늘 민준이 몰고 온 건 평소 타던 차였다. 그녀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챈 듯, 속도를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유지하며 배려하듯 일정하게 달렸다.별장 단지에 도착하자 입구의 경비원이 유진을 보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아가씨, 오랜만이네요. 출장 다녀오셨어요?”유진은 옅게 미소만 지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민준은 그녀의 옆모습을 한 번 바라봤지만 더 묻지 않았다.두 사람은 말없이 별장 앞까지 도착했고, 민준이 차를 세웠다.“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책만 옮기고 바로 나올게요.”말을 마친 유진은 곧장 차에서 내렸다.“도와줄까요?”그녀는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책이 많지 않아서 혼자 할 수 있어요.”그렇게 말하고는 그대로 별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초인종을 누르자 안에서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나가요, 나가요!”문을 열고 그녀를 본 순간, 반가움 가득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아가씨! 드디어 돌아오셨네요!”유진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물건 좀 가지러 왔어요…”“왔어?”말이 끝나기도 전에, 잠옷 차림의 은호가 2층에서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막 잠에서 깬 듯한 얼굴에 비웃는 기색이 스쳐 있었다.“혼자야? 그거 다 들 수는 있고?”그는 커피잔을 들고 차갑게 내려다봤다.“그냥 가져가면 되는 거잖아. 옮길 수 있냐 없냐는 내 문제고.”담담하게 답한 유진은 곧장 서재로 향했다.그를 스쳐 지나가자, 은호도 조용히 뒤따라왔다.서재에는 이미 책들이 분류되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고, 유진은 준비해온 큰 자루를 꺼내 책을 한 권씩 조심스럽게 담기 시작했다.그 동안 은호는 옆 캐비닛에 기대 선 채, 그녀가 땀을 흘리면서도 끝까지 도움을 청하지 않는 모습을 차갑게 지켜보고 있었다.10분쯤 지나자 짐 정리가 끝났다. 자루 입구를 단단히 묶고 끌고 나가려던 순간, 그때까지 아무 말도 없던 은호가 갑자기 폭발했다.그는 낮게 욕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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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연고

은호 역시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는 곧바로 주먹을 치켜들고 민준을 향해 반격했다.“나를 쳐? 네가 뭔데?”은호는 욕을 내뱉으며 주먹을 휘둘렀다.“내가 얘랑 뜨겁게 붙어 있을 때, 어디 있었는지도 모를 놈이…”민준은 그의 주먹을 그대로 막아냈다.은호가 분노에 이성을 잃은 것과 달리, 그는 훨씬 침착하고 이성적으로 보였다. 다만, 그 눈에 서린 싸늘한 기색만 빼면.“그럼 너는?”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다.“헤어지고도 질질 끌며 집착하는 전 남자친구? 아니면… 강간범?”한 마디 한 마디가 날카로운 칼날처럼 은호의 급소를 파고들었다.“죽고 싶어?”은호는 힘을 주며 주먹을 빼내려 했지만, 민준은 그의 손을 꽉 붙잡은 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그만해요!”그때, 유진이 정신을 완전히 차리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떨리는 손으로 민준이 덮어준 외투를 여미며, 은호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민준을 향해 말했다.“민준 씨, 미안해요. 이런 모습을 보여드려서…”민준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신고할까요?”유진은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그냥 가요.”“알겠습니다.”민준은 그녀의 선택을 존중했다. 타인의 감정 문제에 깊이 개입하고 싶지도 않았다.“이건 제 책이에요. 제가… 지금은 힘이 없어서, 좀 옮겨주실 수 있을까요?.”민준은 몸을 굽혀 한 손으로 자루를 번쩍 들어 올리고, 다른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며 함께 밖으로 나갔다.은호는 그 자리에 서서 두 사람이 떠나는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을 참지 못하고 발치에 있던 장식 화분을 걷어찼다.……차 안에서 유진은 백미러에 비친 별장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바라봤다.6년이라는 시간.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었다.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 그녀는 미래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함께 집을 꾸미고, 정원을 가꾸고, 사소한 일들을 쌓아가며 살아갈 것이라 믿었다.하지만 이렇게 떠나게 될 줄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이제 그 별장은 더 이상 그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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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거절

집에 들어오자마자 유진은 가장 먼저 책이 담긴 자루를 정리했다.책을 하나하나 꺼내 제자리에 꽂고 나니 온몸에 땀이 흥건히 배어 있었다.샤워를 마치고 거실로 나오자, 테이블 위에 놓인 연고가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그것을 집어 들고 뚜껑을 연 뒤, 전신 거울 앞에 서서 면봉으로 가슴과 허리의 멍든 곳에 조심스럽게 발랐다.차갑고 시원한 감촉과 함께 은은한 박하 향이 퍼졌고, 통증도 금세 가라앉았다.아직 시간은 이른 편이었다. 원래는 책을 좀 읽어볼 생각이었지만, 하루 종일 쌓인 피로 탓에 머리가 지끈거려 결국 힘없이 침대에 몸을 눕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이 잠들었다.……한밤중.유진은 악몽에 시달렸다.꿈속에서 은호는 악귀처럼 달려들었고, 아무리 뿌리쳐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 공포는 너무도 생생해서, 그녀는 옷깃을 꽉 움켜쥔 채 눈을 번쩍 뜨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밤은 여전히 깊었지만, 더 이상 잠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휴대폰을 집어 들어 곧장 태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계속 연결되지 않았다.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꽉 쥔 채 일어나던 순간, 옆집 발코니에 아직 불이 켜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잠시 망설이다가, 그녀는 결국 민준의 카카오톡을 열었다.[주무세요?]한참 동안 답장이 오지 않았다.눈꺼풀이 다시 감길 듯 말 듯할 때쯤, 휴대폰이 가볍게 진동했다.[네.]유진이 한 박자 늦게 화면을 확인하자, 곧이어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창밖을 보세요.]유진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봤다.고요한 밤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촘촘히 박혀 반짝이고 있었다.[정면에 꺾인 모양처럼 보이는 거 보여요? 그게 쌍둥이 자리예요.]휴대폰이 연달아 진동했다.[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쌍둥이 형제는 황금 알에서 태어났어요. 형은 태어나자마자 전쟁과 홍수를 불러온 재앙 같은 존재였고, 동생은 사랑의 신에게 축복받은 인간의 수호자였죠.][형은 동생을 질투해 여러 번 죽이려 했지만, 동생은 끝까지 형을 이해했고, 결국 희생이 필요할 때 스스로 희생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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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이미, 다른 길 위에 있다

“드디어 생각 바꾼 거야?”승우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이제 수도승 노릇은 그만둘 생각이야?”그의 짓궂은 말에도 은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눈꺼풀조차 까딱하지 않았다.“그냥 상황에 맞춰 놀아주는 거지. 처음도 아니잖아.”승우는 손뼉을 치며 친구가 드디어 제자리로 돌아온 것처럼 기뻐했다.“그래, 이제야 정상으로 돌아왔네. 바로 준비해줄게. 완전 깔끔한 애로, 뒤탈 없게.”전화를 끊고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주소 하나가 도착했다.[아리아나 1080][내가 오래전부터 찍어둔 애야. 아직 경험도 없고, 너 줄게]은호는 입꼬리를 비틀며 외투를 집어 들고 밖으로 나갔다.짙은 밤.짧고도 값비싼 시간이었다.……다음 날.승우는 목욕가운 차림으로 옆방에서 나왔다.전날 술을 과하게 마신 탓에 눈을 뜨니 이미 한낮이었다.아리아나는 승우 집안의 사업이라, 그가 묵는 방은 일반 아파트 세 채를 합쳐놓은 것보다 넓은 최고급 스위트룸이었다.하품을 하며 머리를 대충 쓸어 넘긴 그는, 목이 말라 레드 와인을 한 잔 따라 들고 거실로 나왔다.막 나오자마자 한 여자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드러난 어깨 위로 여러 군데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고, 묘하게 상상을 자극했다.여자는 은호를 바라보며 애처롭고 원망 어린 눈빛을 보냈지만,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돈을 건네고 그대로 내보냈다.은호는 고개를 들어 승우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리고 천천히 담배에 불을 붙였다.“그 눈빛 못 봤냐? 나 같으면 넘어갔겠다. 넌 왜 아무 반응이 없어? 여자 다루는 법 좀 알아야지”은호는 싸늘하게 웃었다.“돈 주고 끝난 거래야. 뭐가 불쌍해.”“그렇긴 하지.”승우는 잔을 들어 올렸다.“한 잔 할래?”“안 마셔.”이 시간부터 술을 마시는 건 승우 같은 술꾼이나 할 법한 일이었다.담배 끝이 손가락 사이에서 붉게 타올랐다. 그는 깊게 한 모금 들이마신 뒤, 천천히 연기를 내뿜었다.밤을 보냈음에도 그의 표정에는 개운함이 전혀 없었다.승우는 눈을 굴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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