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다시, 나의 이름으로.: Chapter 41 - Chapter 50

93 Chapters

41화. 비 오는 시험날

고개를 들자, 남자의 턱이 그녀의 머리에 닿을 듯 아슬아슬하게 가까워져 있었다.그의 팔이 받쳐주고 있지 않았다면, 거의 그의 품에 안긴 것이나 다름없는 거리였다.유진은 그제야 상황을 깨닫고 황급히 두 걸음 물러났다.민준은 목울대를 한 번 굴린 뒤 손을 거두며, 드물게 한마디 덧붙였다.“…하이힐은 넘어지기 쉬워요. 플랫슈즈가 더 낫습니다.”유진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가, 잠시 후에야 입을 열었다.“고마워요.”한참을 기다려도 사람이 나오지 않자, 안에서 들려오는 기척에 태리가 의아한 듯 소리쳤다.“유진? 너야?”유진은 바깥을 한 번 돌아본 뒤 말했다.“저 가볼게요. 다음에 봬요.”“네.”민준은 주먹을 살짝 쥐었다가, 그대로 돌아서 계단을 올라갔다.아래층에서 두 사람의 대화가 희미하게 들려왔다.“왜 이렇게 늦었어?”“좀 일이 있었어.”“우리 오빠 만났어?”태리는 그가 이 근처에 산다는 것만 알았을 뿐, 두 사람이 이웃이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유진은 담담한 표정으로 가볍게 답했고, 태리도 더 묻지 않았다.대신 어디서 밥을 먹을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결국 태국 음식점으로 정했다.식사를 하던 중, 태리는 지난 소개팅 이야기를 꺼냈다.“진짜 하나같이 다 양아치 같은데다 콧대는 하늘을 찌르고… 그런 한심한 재벌 2세들, 누가 좀 한 번에 다 날려버리면 안 되나?”갑자기 소개팅을 보기 시작하자, 주변에서는 모두 웃음거리로 삼고 있었다.억지로 나온 남자들도 태도는 하나같이 별로였고, 말을 돌려 하긴 했지만 결국은 조신하게 집안일이나 하라는 식이었다.태리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자기 능력도 없으면서, 세상 사람들이 다 자기들처럼 빈둥거리며 사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그래서 홧김에 걔들 더러운 일 다 까발렸어.”태리가 코웃음을 쳤다.같은 세계에 사는 사람들끼리, 누가 어떤 인간인지 모를 리 없었다.유진은 그 말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그래서 요즘 뉴스가 그렇게 시끄러웠구나.”어느 집안은 불륜이 터지고, 또 어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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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같이 먹을까요

유진은 그녀의 말을 이해한 듯 옅게 미소 지었지만, 굳이 반박하지는 않았다.은아가 물었다.“기억하기로는 언니 학부도 한영대였지? 이번에는 어디 지원하려고?”“그대로 한영대.”“학술 석사? 전문 석사?”“학술 석사.”“전공은?”“생물학.”은아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자신이 지원한 방향과 같았다.“지도교수는 정했어?”유진은 숨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응. 심수희 교수님.”“누구? 심수희 교수?”“응.”은아는 예전에 심 교수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유진의 모습을 떠올리며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언니… 설마 교수님 집 가서 청소 좀 도와줬다고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유진은 잠시 멈칫했다.“…그건 오해야.”“오해든 뭐든…”은아는 말을 이었다.“심수희 교수는 생물학 분야 최고 권위자야. 엄격하기로도 유명하고. 요즘은 박사 위주로 받다 보니까 석사는 거의 안 받아. 자리도 아주 적고.”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그 밑으로 들어가는 건 정말 어려워. 사실 나도 이번에 심 교수님으로 지원했거든.”“언니가 오해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말해줄게. 아직 시간 있을 때 다른 교수로 바꾸는 게 나을 거야. 결과 나오기 전까지 다른 교수랑 컨택해볼 수 있잖아.”나름대로 진심을 담은 조언이었다.“고마워.”유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먼저 갈게.”그렇게 말하고는 돌아섰다.은아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이게 끝이야?”……오후 5시 지하철에 겨우 몸을 실었다.따뜻한 바람이 흘러나오자 얼어붙었던 손가락이 조금씩 풀렸다.가방 속에서 휴대폰이 울렸다.장갑을 벗고 화면을 확인한 순간, 유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목소리도 한결 밝아졌다.“네, 교수님.”전화기 너머로 심 교수의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시험은 어땠어?”부담을 주지 않는 가벼운 안부였다.“음… 아는 건 다 썼어요.”“그럼 됐지. 네 시험은 내가 걱정 안 한다.”교수는 웃으며 말했다.유진은 학부 시절, 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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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한밤의 침입자

토요일, 날씨가 좋았다.두터운 구름 사이로 따스한 햇살이 실처럼 스며들었다.유진은 아침 조깅을 하며 가볍게 땀을 흘렸고, 집에 돌아와 샤워를 마친 뒤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미리 사둔 약을 챙겨 택시에 올라 심수희 교수의 집으로 향했다.“교수님, 이 약은 하루 세 번 드셔야 해요. 요즘 날씨가 추워서 냉장 보관은 안 하셔도 되고요, 드시기 전에만 따뜻하게 데우시면 돼요.”심 교수는 두려운 것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유일하게 싫어하는 게 있었다. 바로 한약 냄새였다. 쓰기만 한 것이 아니라 냄새까지 고약했다.그녀는 검고 탁한 약물을 바라보다가 말없이 한 발짝 물러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버텨보려는 듯 입을 열었다.“꼭… 마셔야 해?”“당연하죠.”유진이 단호하게 말했다.“아주머니께도 부탁해놨어요. 하루 세 번 꼭 챙겨 드시도록요. 빠뜨리시면 안 돼요.”심 교수의 표정이 순식간에 무너졌다.“알았어…”제자의 정성이 담긴 일인 만큼, 마시지 않을 수는 없었다.아이처럼 싫은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유진은 몰래 웃음을 삼켰다.“약이 좀 쓰니까, 오는 길에 녹두떡도 사 왔어요.”“약 드신 다음에 하나씩 드시면 덜 쓰실 거예요.”방금까지 인상을 쓰던 사람이 금세 환하게 웃었다“이거면 괜찮지.”가벼운 대화가 끝나자, 심 교수가 본론을 꺼냈다.“내년에 한영대 생물학과에서 실험팀을 하나 꾸릴 예정이야. 이미 세 명은 정해졌고, 두 자리만 남았어.”“조건은 두 가지야. 성적과 종합 평균이 우수해야 하고, 실험 과목에서 A를 최소 두 번 이상 받아야 해.”실험팀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치고는 꽤 까다로웠다. 유진은 조금 놀란 기색을 보였다.그녀의 반응을 눈치챈 심 교수가 덧붙였다.“이 팀에 들어가면 기말에 가산점이 붙어. 우수 팀원은 바로 박사 과정으로 진학할 수도 있고, 셀렌 바이오테크 회사에서 오퍼를 받아 연구소에 들어갈 수도 있어.”셀렌 바이오테크는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손꼽히는 기업이었다.자체 연구소는 업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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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혼자만 끝내지 못한 사람

은호는 그대로 굳어버렸다.“너…”유진은 그날 별장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노골적인 공포와 경계가 서려 있었다.“움직이지 마! 나한테서 떨어져!”“유진…”은호의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그날은 내가…”“그만!”“그냥 가. 우리 사이에 더 할 얘기 없어.”“유진…”남자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몸은 굳은 듯 움직이지 못했다.“미안해. 내가 잘못했어.”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우리 이제 그만 싸우자, 응? 내가 그런 말 하고… 그런 행동 한 거… 다 잘못했어…”“나, 나는 그냥… 너무 보고 싶어서… 순간적으로…”그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오늘 온 건… 너랑 같이 돌아가고 싶어서…”“돌아가?”유진이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가서 뭐하게? 네 애인 있는 집에 들어가서, 첩이라도 되라는 거야?”은호는 이를 악물었다.“네가 돌아오기만 하면, 나 바로 수아랑 헤어질게.”유진은 고개를 저었다.“……거절할게.”“유진…”그가 다시 다가서려는 순간, 유진은 재빨리 몸을 돌려 침실로 뛰어 들어갔다.쾅!문이 세게 닫혔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밖이 조용해진 뒤에야, 그녀는 조심스럽게 나와 상황을 확인했다.그리고, 은호가 벽에 기대앉은 채 그대로 잠들어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아침, 해가 떠올랐다.유리창을 통과한 햇살이 실내를 부드럽게 채웠다.소파에 웅크리고 있던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은호는 눈을 뜨자마자 머리가 어지럽게 울려, 본능적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어지러움이 조금 가라앉은 뒤에야 그는 몸을 일으켜 미간을 짚으며 주변을 둘러봤다.낯선 공간.좁은 구조.깔끔하긴 했지만, 그의 눈에는 여전히 초라하고 답답하게 느껴졌다.그때, 유진이 침실에서 나왔다.은호가 고개를 들다, 차갑게 가라앉은 검은 눈과 마주쳤다.“…유진?”유진은 의자에 앉으며 무표정하게 말했다.“어젯밤에 무슨 짓 했는지 기억나?”은호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역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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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예상 밖의 남자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도현은 곧장 휴대폰을 꺼내 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유진 누나, 요즘 잘 지내요? 할 말이 좀 있는데요…”용건을 설명하자, 전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그녀가 무엇을 망설이는지 짐작한 도현은 곧장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누나, 걱정 마요. 이번엔 제가 쏘는 거고, 그냥 밥 한 번 먹는 거예요. 은호 형은 절대 안 부를게요.”“…그래.”그제야 유진이 승낙했다.전화를 끊은 도현은 어깨를 으쓱했다.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중에 ‘우연히 마주치는 일’이 생긴다면, 그건 자기 책임이 아니었다.효성이 자연스럽게 말을 받았다.“그럼 내가 은호한테 연락할게.”“좋아요, 그렇게 하죠!”도현은 벌써부터 들떠 있었다.둘이 다시 이어지기만 하면, 자신이 일등 공신이었다.……화창한 날씨, 맑게 갠 하늘.도현은 미리 레스토랑 ‘아리안’에 자리를 예약해 두었다.예전에 자주 오던 곳이라, 이름만 들어도 유진은 쉽게 찾아올 수 있었다.문을 들어서자마자, 둘러볼 틈도 없이 도현이 이미 손을 흔들며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직원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은 유진은 가방을 내려놓고 맞은편에 앉았다.“유진 누나, 시험 끝났다면서요? 축하해요!”“이미 메뉴는 다 시켜놨어요. 다 누나 좋아하는 것들로요. 이따 한잔하면서 제대로 축하하자고요!”도현은 다른 친구들만큼 집안이 대단하진 않았지만, 성격만큼은 가장 좋았다.예전에 몇 번 도와준 일을 계기로, 둘의 인연도 조금씩 쌓여왔다.“고마워. 네 마음은 항상 알고 있었어.”도현이 웃었다.“오랜만에 봤다고 왜 이렇게 어색해요? 우리 사이에 무슨 감사까지 해요?”그가 종업원에게 손짓하자 음식들이 순서대로 나오기 시작했다.“도현? 여기서 보네?”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도현이 고개를 들었고, 다음 순간 웃음이 그대로 굳었다.효성 뒤쪽을 힐끗 바라봤다.…은호 형은?약속했던 ‘우연한 만남’은?왜 사람이 바뀌었지?“…어, 진짜 우연이네!”도현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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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우연을 가장한 설계

외항로를 지나가던 순간, 하늘 위에 수천 대의 드론이 정렬된 채 떠 있었다.정교하게 배열된 채, 형태를 바꾸며 끊임없이 움직이는 빛의 군집.짧은 10여 분 공연이지만, 비용은 수천만 단위부터 시작하는 드론 쇼였다.현장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고, 마침 전망 좋은 자리에 운 좋게 차를 세운 효성은 앞유리 너머로 그 장면을 흥미롭게 바라봤다.유진도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순간, 빛으로 만들어진 장면에 넋을 잃었다.“여기 드론 몇 대나 있는 것 같아?”효성이 물었다.“그걸 어떻게 알아.”“맞춰볼 수 있지.”“모르겠네.”효성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나는… 딱 100대?”“왜?”“청혼할 때 장미꽃을 100송이 선물하기도 하잖아.”그 순간, 하늘 위 드론들이 움직이며 밤하늘에 글자를 만들어냈다.‘Marry me’유진은 놀란 눈으로 물었다.“어떻게 청혼인 걸 알았어?”효성은 턱으로 앞쪽 전망대를 가리켰다.정장을 입은 남자가 장미를 들고 서 있었다.“대단하네.”유진은 진심으로 감탄했다.예전에는 효성을 그저 가볍게 노는 부잣집 도련님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전혀 달랐다.세심하고, 관찰력이 뛰어나고, 전문적인 면도 있었다.식사 자리에서 그녀의 전공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는 자연스럽게 셀렌 바이오테크의 주가 흐름도 언급했다.짧게 몇 마디였지만, 그 안에서 드러난 실력은 확실했다.유진은 직감했다. 이 남자, 금융 쪽으로는 상당히 위험할 정도로 능력 있다.곰곰이 생각해보면, 은호와 그의 친구들 중에 돈을 못 버는 사람은 없었다.…역시. 그들의 세계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했다.그래서, 지금이라도 깔끔하게 빠져나온 건 잘한 선택이었다.“저기 앞이 우리 집이야. 데려다 줘서 고마워.”차는 골목 입구까지만 들어갈 수 있었다.유진은 차에서 내렸고, 효성은 더 따라가지 않았다.지금 관계로는 집 앞까지 바래다 줄 정도는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그는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차를 몰고 떠났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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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한 자리에 모인 남자들

유진은 종이봉투를 들고, 두 사람은 함께 학교로 향했다.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유진은 효성이 확실히 박학다식하다는 걸 깨달았다. 어떤 주제를 꺼내도 그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받았다.말투는 조급하지도 느리지도 않았고, 태도는 온화하고 단정했다. 함께 있는 시간이 꽤 편안하게 느껴졌다.한참을 돌아다니다가 돌담을 지나던 순간 유진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고, 익숙한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민준이었다.그는 막 수업을 마치고 실험실로 향하던 중이었다. 무심코 고개를 들다가 유진의 웃음 띤 눈과 마주쳤다.그는 순간 멈칫했고, 곧 그녀 옆에 서 있는 효성을 보았다.“이렇게 만나네요. 방금 수업 끝났어요?”유진이 먼저 말을 건넸다.민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지금 실험실 가는 길이에요. 유진 씨는요?”“친구한테 학교 구경시켜주고 있었어요.”유진은 자연스럽게 소개를 이어갔다.“이쪽은 효성이고요.”말을 마친 뒤, 그녀는 효성을 향해 말했다.“이쪽은 서민준 교수님.”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부딪혔다.효성은 티 나지 않게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손을 내밀었다.“서 교수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민준도 그의 손을 맞잡았다.“반갑습니다.”서 씨 가문과 반 씨 가문은 모두 상류층 가문 출신으로, 같은 사회적 범위에 속해 있었기에 서로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 정도 들어본 적 있었지만, 실제로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은근한 긴장감이 흘렀지만, 유진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단지 악수 시간이 조금 길다고만 생각했다.민준은 다시 한 번 그를 바라본 뒤 먼저 손을 놓았다.“저는 이만 실험실로 가보겠습니다.”유진은 그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효성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물었다.“너, 저 사람이랑 친해?”유진은 길게 설명하고 싶지 않아 짧게 답했다.“그냥… 적당히.”효성은 더 묻지 않았다.……그날 밤.유진은 또다시 효성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오늘 학교 구경 같이 해줘서 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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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친구와 전 여자 사이

그는 순간 몸이 굳어버렸고, 반사적으로 수아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냈다.수아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해 인상을 찌푸렸고, 그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다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유진을 발견했다.은호는 미간을 찌푸리며 효성에게 물었다.“유진도 초대한 거야?”“그럼, 다 친구잖아.”효성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왜 미리 말 안 했어?”효성은 어깨를 으쓱했다.“바빠서 깜빡했지. 말 안 했다고 뭐 문제가 돼?”그쪽에서 유진도 은호를 발견했지만, 단 한 번 눈길을 준 뒤 곧 시선을 돌렸다.그녀는 이번에 와서 축하만 전하고 바로 떠날 생각이었다. 책을 읽고 자료를 찾아야 해서 이런 모임에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없었다.그렇게 마음먹은 그녀는 곧장 효성에게 다가갔다.“생일 축하해. 해마다 오늘 같은 날을 맞이하길 바라. 이건 내가 준비한 선물이야. 비싼 건 아니니까 부담 갖지 말고 받아줘.”그녀는 선물 상자를 꺼내 건넸다.효성은 그것을 받으며 낮게 웃었다.“좋은 말 고마워.”그는 오늘의 주인공답게 여러 사람을 상대하느라 이미 몸에 약간의 술기운이 배어 있었다.“이렇게 좋은 날인데, 한 잔 같이 할까?”술을 든 웨이터가 다가오자 그는 와인 한 잔을 집어 들었다.“내가 먼저 마실게.”그는 단숨에 들이켰고, 그 모습을 본 유진도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한 잔을 비운 뒤, 그녀는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를 뜨겠다고 말했다.효성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아직 이른데? 파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잖아, 벌써 가려고?”유진이 난처해 보이자 그는 말을 바꿨다.“그럼 이렇게 하자. 케이크 자를 때까지만 있다가 가.”“알겠어.”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한 잔의 술이 생각보다 빠르게 올라왔고, 실내 난방도 너무 강했다. 잠시 서 있었을 뿐인데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효성이 다른 손님들을 응대하고 있는 사이, 그녀는 직원에게 길을 물어 아치형 문을 지나 정원 쪽으로 걸어갔다.은호는 유진의 뒷모습을 보며 얼굴이 굳어졌다. 아까도 제대로 얼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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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무너진 관계

“그리고 너도!”그는 유진을 향해 돌아섰다.“진짜 뻔뻔하네. 꼬셔도 하필 쟤를 꼬셔? 이제 만족했어?”그 말을 듣는 순간, 유진의 가슴속에서 분노와 억울함이 동시에 치밀어 올랐다. 애초에 아무 이유 없이 휘말린 건 자신이었는데, 대체 자신이 뭘 잘못했다는 건가?은호의 거친 추궁에도 불구하고, 효성은 소름 끼칠 만큼 침착했다.그는 콧등의 상처를 만지며 입꼬리를 차갑게 끌어올렸다.“우리가 뭐 했는지… 다 봤잖아?”은호는 무표정하게 말했다.“그래서, 해명할 생각은 없어?”“뭘 해명해? 내가 유진을 좋아한다는 거? 내가 유진을 쫓아다닐 거라는 거?”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유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은호는 분노로 눈이 충혈된 채 주먹을 들어 다시 효성을 향해 휘둘렀다.“개자식! 좋아한다고? 쫓아다니겠다고? 네가 뭔데!”효성은 주먹에 맞아 고개가 옆으로 꺾였지만, 곧바로 유진을 자신의 뒤로 끌어 보호했다.“왜? 안 되나?”마치 그녀를 품 안에 감싸 지키는 듯한 그 행동이 다시금 은호를 더욱 자극했다.은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씩 내뱉었다.“당연히 안 되지!”“그 말을 무슨 자격으로 하는 건데? 이미 과거가 된 전 남자친구?”은호의 눈빛이 번뜩였다.“내가 끝났다고 해야 끝난 거지,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하, 네가 먼저 말했잖아. 헤어지자고 한 것도 너였고, 그때 우리 다 같이 있었어. 벌써 잊었어?”“좋아.”은호는 비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이걸 노리고 있었던 거냐?”효성의 얼굴에 잠깐 죄책감이 스쳤다.“미안, 먼저 놓은 건 너니까…”“그래도 네가 쫓아다녀도 된다는 뜻은 아니야! 야, 그렇게 눈이 없어? 토끼도 자기 굴 근처 풀은 안 먹는다는 말, 몰라?”“은호, 진정해. 요즘 세상에 남녀가 만나고 헤어지는 건 흔한 일이야. 네가 유진과 헤어졌다고 해서, 유진이 평생 다른 남자 못 만나는 건 아니잖아.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생기겠지.”그 말에, 은호의 머릿속에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유진이 다른 남자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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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처음으로 무너진 날

그러나 다음 순간, 다른 한 손이 그의 손목을 가로막으며 허공에 멈춰 세웠다.“뭐야?”효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상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유진은 중얼거리듯 말했다.“민준 씨… 어떻게 여기…”그 순간, 그녀는 거의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민준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머물렀다.“괜찮아요?”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네…”하지만 목소리는 콧소리가 짙게 섞여 있었다.괜찮을 리가 없었다.민준이 말했다.“마침 제 차가 여기 있으니, 데려다줄까요?”“네… 부탁드릴게요.”그는 그녀를 감싸듯 어깨를 감싸 안고 떠날 준비를 했다.유진은 자신이 절벽 끝에 매달린 작은 돌 같다고 느꼈다. 떨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다가, 민준이 나타난 그 순간에야 비로소 발을 디딜 곳을 찾은 기분이었다.“민준 씨, 여긴 어떻게 오신 거예요?”이 저택 옆에는 고급 호텔이 있었고, 그는 학술회의에 참석하러 와서 잠시 바람을 쐬러 나왔다가 우연히 이 상황을 마주한 것이었다.“잠깐 일이 있어서요.”“잠깐!”효성이 뒤쫓아왔다.“서 교수님, 장소 잘못 찾은 거 아닌가요? 학술회의는 옆 건물이고, 여긴 제 개인 저택입니다.”민준이 걸음을 멈췄고, 유진도 함께 멈췄다.효성이 말했다.“제 손님은 제가 직접 보냅니다. 서 교수님이 신경 쓸 필요 없어요.”민준이 돌아서며 담담히 말했다.“그럼, 그 손님 본인 의사는 물어봤나요?”유진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저, 교수님이랑 갈게요.”효성은 말을 잇지 못했다.“유진…”“가요.”민준이 말했다.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거기 서!”유진이 두 남자 사이에 서 있는 모습을 보며, 은호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유진, 어디 가려는 거야?”“집에.”“하… 집이라고? 저 남자 집이겠지!”은호는 민준을 가리키며 비웃었다.“넌 그렇게까지 싸구려야? 남자 없으면 못 살아?”“우리 헤어지기 전부터 이미 뒤에서 딴 놈들이랑 붙어먹고 있었던 거 아니야? 유진, 진짜 대단하다.”“그렇게 깔끔하게 떠난 이유가 있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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