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다시, 나의 이름으로.: Chapter 21 - Chapter 30

93 Chapters

21화. 은호에게 보내는 사진 한 장

은호는 순간 말문이 막힌 듯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 예상하지 못한 대답을 들은 듯, 잠깐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럼 언제 다시 추가할 거야?”말투는 최대한 평온하게 유지하려 한 것 같았지만, 어딘가 날카로운 기운이 묻어 있었다.유진의 속눈썹이 가볍게 떨렸다.그리고 조용히 말했다.“…다시 추가 안 할 것 같아요.”그녀의 목소리는 예상보다 훨씬 담담했다.은호의 기분이 갑자기 거칠어졌다. 그녀의 고개 숙인 모습을 보며 이유 없이 짜증이 치밀었다.“언제까지 삐질 건데? 내 인내심 시험하지 마.”말투에는 노골적인 불쾌함이 담겨 있었다.유진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은호를 바라보며 비웃듯 입꼬리만 살짝 올렸다.그 순간, 뒤쪽에서 사람들이 다시 밀려들기 시작했다.몰려드는 인파에 둘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벌어졌다.은호는 다시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누군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수아였다.멀지 않은 곳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며 질투로 속이 끓던 그녀가 억지로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온 것이다.그녀는 그의 팔을 꼭 끌어안았다.“오빠… 우리 나가요. 여기 너무 어둡고 무서워…”“아까 넘어질 뻔했어요… 오빠도 안 보이고…”“나 무서워… 나 버리지 말아줘…”떨리는 목소리는 누구라도 보호해 주고 싶게 만들 만큼 애처로웠다.마침 그때 출구 쪽에서 직원의 목소리가 그게 울려 퍼졌다.“장치 오류가 해결되었습니다! 관람객 여러분은 질서 있게 퇴장해 주세요!”직원의 안내가 반복되자, 어지럽던 분위기가 조금씩 정리되기 시작했다.질서가 잡히자 혼란은 생각보다 빠르게 가라 앉았다.유진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은호도 수아의 팔을 떼어내고 그녀를 따라 나갔다.“오빠, 기다려!”수아는 이를 악물며 뒤따랐다.……출구 앞.태리는 이미 밖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안에서 갑자기 화재 경보가 울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유진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거의 뛰어들 뻔했다.직원들과 주변 사람들이 겨우 말렸다. 말리지 않았다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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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미안하다 친구

은호는 수아와 함께 서양식 레스토랑에서 촛불 아래 저녁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식탁 위에는 따뜻한 노란빛의 촛불이 흔들리고 있었고, 와인잔에 담긴 붉은 와인이 잔잔하게 흔들렸다.휴대폰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수아는 갑자기 어두워진 그의 표정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무슨 일이에요?”은호는 속으로 화를 꾹 눌러 참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휴대폰을 열어 채팅창을 확인했다.그리고 짧게 답장을 보냈다.[은호: 나랑 무슨 상관인데.]채팅창을 보고 있던 효성은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올렸다.[효성: 이번에는 진짜로 유진이랑 완전히 헤어진 거야?]은호는 메시지를 힐끗 보고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손가락으로 보내는 글자는 태연했다.[은호: 그래. 뭐 문제 있어?][효성: 없지. 내가 무슨 의견이 있겠어.]그리고 거기에 항복하는 이모티콘까지 덧붙였다.[효성: 그럼 다른 사람이 유진 쫓아다녀도 신경 안 쓰겠네?]그때 승우가 갑자기 채팅에 끼어들었다.[승우: 뭐야, 설마 네가 쫓아다니려고?]효성의 눈빛이 살짝 가라앉더니 움직이는 이모티콘 하나와 함께 대답했다.[효성: 응응.][도현: ㅋㅋㅋㅋㅋㅋ][승우: 역시 너답다.]하지만 채팅방에 있던 누구도 그 말을 진심이라고 믿지 않았다.은호 역시 그 이모티콘을 보고 대수롭지 않게 답장을 쳤다.[은호: 그래, 그럼 한번 해봐.]목적을 달성한 효성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다만, 은호가 나중에 후회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자기, 오늘 내 생일을 이렇게 행복하게 만들어줘서 고마워요.”밤 아홉 시.은호는 수아를 기숙사 아래까지 데려다줬다.캠퍼스 안은 이미 어둑어둑해졌고, 가로등 불빛이 젖은 바닥 위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수아는 그의 손을 붙잡은 채 좀처럼 놓지 않았다.“이렇게 바로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아쉬워요.”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작은 송곳니 두 개를 드러냈다. 그리고 그의 얼굴 가까이 다가와 장난스럽게 입술을 내밀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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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2미터의 거리

두 사람이 룸에 있던 시간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태리는 반 병을 마시자마자 그대로 곯아떨어졌다.유진도 술을 마셔 차를 운전할 수 없었다.그래서 대리운전을 불러 태리를 아파트까지 데려다준 뒤, 자신은 다시 택시를 타고 자취방으로 향했다.가는 도중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시간도 늦은 탓에 택시 기사는 골목 입구까지만 데려다주겠다고 했다.유진은 우산이 없었다. 언제 그칠지도 모르는 폭우였다.결국 비를 맞고 뛰어갈 생각이었다.그때였다.“유진 씨.”뒤에서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자 빗속에서 우산을 쓴 민준이 걸어오고 있었다.“비 맞으면서 뛰어갈 생각이에요?”오늘 그는 셔츠 대신 조금 캐주얼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래서 평소보다 훨씬 부드러운 분위기였다.유진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럴 생각이었으니까.“이 우산 써요.”민준은 우산을 그녀 손에 억지로 쥐여주었다.유진이 눈살을 찌푸렸다.“그럼 민준 씨는요?”사실 그녀가 하려던 말은 같이 써도 된다는 것이었다.“전 가게에서 하나 빌릴게요.”말을 마치자 그는 길 건너 백반집으로 달려가 사장에게 접이식 우산을 하나 빌려왔다.유진은 눈을 깜빡였다.저 가게 사장은 성격이 괴팍해서 단골 손님에게도 무뚝뚝하다고 소문이 자자했다.그런데 어떻게 우산을 빌린 걸까?“예전에 저 집 전기 배선에 문제 생겼을 때 지나가다가 내가 고쳐준 적 있거든요.”민준은 대수롭지 않게 설명했다.마침 비가 조금 약해진 틈에 그는 우산을 펼치고 빗속으로 걸어 들어갔다.유진은 그의 등을 잠시 바라보다가 뒤따라갔다.낡은 아파트 단지라 가로등도 원래 어두웠지만, 오늘은 비까지 내려 더 희미했다.갑자기 번개가 번쩍이고 나무가 거센 바람에 요란하게 흔들렸다.유진은 우산 손잡이를 꽉 쥐고 걸음을 재촉했다.빗줄기가 쏟아지는 골목길을 두 사람은 앞뒤로 걸었다.유진은 어느 순간 깨달았다.자신과 민준 사이의 거리는 늘 2~3미터 정도로 유지되고 있었다. 너무 멀지도, 그렇다고 너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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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새로운 공부 파트너

평일 아침 지하철은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로 붐볐다. 사람들이 밀려들고 밀려나며 객차 안 공기는 뜨겁고 답답했다.유진이 사람들 사이에서 겨우 빠져나왔을 때는 정말로 납작하게 눌려버릴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다행히 재빨리 움직여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예전에 교수님 집에 왔을 때 이미 출입 등록을 해둔 덕분에 이번에는 경비가 바로 통과시켜 줬다.초인종을 눌렀다.하지만 문을 연 사람은 교수님이 아니었다.남학생이 “어?” 하고 그녀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무언가 떠올린 듯 말했다.“아, 당신이네요?”지석은 자료를 가지러 온 길이었다.벨 소리를 듣고 문을 열러 나왔는데, 유진을 보는 순간 어딘가 낯이 익다고 느꼈다.그리고 곧 기억이 떠올랐다.예전에 학교 정문에서 어떤 여학생이 달려와 그의 팔을 붙잡고 교수님의 병세를 묻던 일이 있었다. 지금도 그때 그녀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초조해 했던 표정이 기억났다.그게 바로 눈앞이 이 사람이었다.유진도 잠시 멍해졌다가 그를 알아봤다.말을 하려던 순간 안에서 교수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유진 왔니?”지석은 몸을 옆으로 비켜 길을 열어 주었다.“교수님.”유진은 길에서 사 온 떡을 들고 현관으로 들어와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마침 잘 왔다.”노안경을 쓴 심 교수가 손짓했다.“자료를 하나 찾고 있었는데, 내가 제대로 찾은 건지 좀 봐 줄래? 맞게 찾은 건지 모르겠어서.”유진은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다가갔다.책상 위에는 유전자 서열 분석과 관련된 영어 원서 한 권이 놓여 있었다.생물정보학 분야의 확장 영역에 해당하는 책이었다.“너 기억력 좋잖아.”심 교수가 말했다.“이 시리즈 중에 유전자 검사만 따로 다룬 책이 하나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네?”유진은 특별히 기억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다만 중요한 내용은 유난히 또렷하게 기억하는 편이었다.심 교수가 말한 책은 마침 이틀 전 도서관에서 넘겨본 적이 있었다.책장을 쭉 훑어보던 그녀의 눈이 갑자기 반짝였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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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유진을 의식하다

원래 7시에 맞춰둔 알람이 울렸지만, 수아는 좀처럼 일어나지 못했다.희미하게 울리는 알람 소리를 몇 번이나 무시하며 뒤척이다가, 결국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번뜩 눈을 떴다.시계를 확인한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늦었어…!”허둥지둥 침대에서 내려온 그녀는 머리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 급하게 옷을 갈아입었다.결국 늦을 뻔한 상황이 되자 두 사람은 허둥지둥 뛰어서 도서관까지 달려왔다.숨이 턱까지 차올라 목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지만, 멈출 수도 없었다.엘리베이터에 겨우 도착했을 때, 수아는 한 손으로 벽을 짚고 헐떡였다.그때 옆에서 유진이 담담하게 물었다.“몇 층 가?”수아는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2층…”말을 하면서도 숨이 끊길 듯 이어졌다.숨이 턱까지 차올라 체면도 없이 헐떡이고 있는 수아는 여유로운 유진과 대비되자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두 사람은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그 순간 수아는 무언가 깨달은 듯, 유진이 들고 있는 대학원 시험 준비 자료를 보고 표정이 묘해졌다.“언니도 도서관 와서 공부해요?”잠시 뜸을 들이다가 물었다.“설마… 대학원 시험 준비하는 거예요?”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표정 역시 담당했다.수아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요즘 재학생들도 그렇게 많이 떨어지는데… 졸업한 지 몇 년이나 된 사람이…”그녀는 말을 흐리다가 비웃듯 덧붙였다.“설마 진짜 붙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그제야 유진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내가 붙을지 말지는 나중 문제고.”잠시 시선을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그쪽이 말한 떨어지는 재학생… 그거 네 얘기야?”순간 수아의 표정이 무너질 뻔했다. 가슴 깊은 곳을 정확히 찌르는 말이었다.그녀는 현재 3학년이었다.취업 생각은 없었고, 이제 막 대학원 준비를 시작한 참이었다.아직 1년이나 남았으니 급할 것도 없다고 생각해 왔다.같은 기숙사에는 이미 체계적으로 계획을 세워 공부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수아는 늘 ‘나중에 하면 되지’라는 태도로 공부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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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사랑 대신 조건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은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넓고, 환하고, 고급스러운 공간.미국식 인테리어에 회갈색과 흑백 통이 어우러져 절제된 분위기 속에서도 은은한 사치를 드러내고 있었다.대학 2학년 때 예술 감상 수업을 들은 덕분에, 벽에 걸린 그림이 김환기 화가의 작품이라는 것도 알아볼 수 있었다.주변에 놓인 장식품들도 하나같이 값비싸 보였고, 심지어 눈에 잘 띄지 않는 쓰레기통에도 ‘LV’ 로고가 박혀 있었다.거실을 지나자 잘 가꿔진 실내 정원이 나왔다.옆에는 전용 홈시어터와 헬스장이 있었고, 구석에는 골프채 세트도 놓여 있었다.이 별장 단지에는 전용 골프장까지 있다고 들었다.그녀는 손등을 살짝 꼬집었다. 이곳은 그녀가 알던 세계가 아니었다.은호를 만나기 전까지, 그녀가 본 가장 비싼 물건은 같은 학교 친구가 들고 다니던 에르메스 악어가죽 켈리백이었다.한정판 디자이너 제품으로, 중고 시세만 6,500만 원이었다.그런데 이 집에는 그 ‘H’ 로고가 곳곳에 넘쳐났다. 열쇠고리, 실내화, 라이터까지…만약… 자신이 계속 은호 곁에 남아서, 그와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게 된다면…이 모든 걸 다 가지게 되는 걸까?대저택, 명품 가방, 기사 딸린 차, 그리고 가정부들까지…은호는 수아가 멍해진 걸 눈치채지 못했다.좁쌀죽은 꽤 걸쭉하게 끓여져 있었지만, 그는 한 숟갈만 한 숟갈만 뜨고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수아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왜 더 안 먹어요? 맛없어?”“방금 퇴근하면서 먹고 와서.”그는 담담하게 답했다.“지금 배 안 고파. 나중에 먹을게.”수아는 웃으며 말했다.“그래도 맛없다고 하면 나 상처받아요. 나 요리 처음이란 말이야. 좀 봐줘요.”수아는 볼을 감싸며 맑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은호는 가볍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오늘 수업 없었어? 시간 남아서 죽까지 끓이고.”“기말 가까워서 수업 거의 없어요. 나 대학원 준비하려고 오늘 도서관에 갔었어요.”수아는 자연스럽게 말했다.“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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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여러 명 중 하나

공부를 마친 유진은 도서관 밖에서 지석과 헤어졌다.지석은 예전에 대학원 시험에서 필기와 면접 모두 1등을 했던 만큼, 준비 방법에 대한 노하우가 풍부했다. 그는 자발적으로 중요한 포인트도 짚어 주었다.유진은 원래 식사라도 대접하려 했지만, 지석이 갑자기 룸메이트의 전화를 받아 다음 날 다시 만나기로 하고 먼저 떠났다.6월의 날씨는 이미 초여름의 더위를 머금고 있었다.후끈한 열기를 맞으며 집에 돌아온 유진은 에어컨을 틀고 나서야 겨우 숨이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냉장고를 열고 요리를 하기로 했다.브로콜리 마늘 볶음, 아스파라거스 고기 볶음, 갈비탕.누구를 굶기더라도 자기 자신만큼은 굶길 수 없었다. 어떤 걸 줄이더라도, 식사는 절대 줄일 수 없었다.요리를 마친 뒤, 문 밖에서 미세한 소리가 들렸다.민준이 돌아온 줄 알고 문을 열었지만, 보이는 건 청소 아주머니였다.“아가씨? 무슨 일이에요?”유진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다음 날, 약속한 시간에 맞춰 도서관에 도착했다.이번에는 유진이 지석을 위해 아침을 챙겨왔다.어제 그가 사 준 아침 값을 받지 않았으니, 오늘은 자신이 챙기는 게 공평했다.지석은 머리를 긁적이며 조금 어색해했다.“가… 감사합니다. 너무 신경 쓰신 거 아니에요?”유진이 늘 앉는 자리는 창가 쪽이었다. 햇빛이 잘 들고 사람도 적어 공부하기 좋았다.그런데 고개를 돌리는 순간, 수아가 보였다.오늘은 혼자였다.일부러 이 자리를 고른 건지, 유진은 굳이 생각하지 않았다.그저 조용히 책과 문제지를 꺼내 풀기 시작했다.오히려 멀지 않은 곳에 앉은 수아 쪽이 집중을 못 했다. 몸을 뒤척이며 자꾸만 유진을 힐끗거렸다.유진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책장을 넘겼다.집중한 옆모습은 고요하면서도 아름다웠다.수아조차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지금의 유진은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그래서일까.헤어진 뒤에도 은호가 잊지 못하는 이유가.수아는 펜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그날 귀신의 집에서, 자신을 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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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나만의 의사

남자의 손이었다.손가락 마디가 또렷하고 길어, 보기 좋게 아름다웠다.유진의 시선이 살짝 옆으로 기울어지며 그의 장바구니 안이 보였다.전부 즉석식품이었다.유진의 시선이 이번에는 자연스럽게 위로 올라갔다.마침 그 손의 주인도 고개를 내려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유진이 웃으며 말했다.“저녁, 설마 이런 걸로 때우는 건 아니죠?”민준이 가볍게 헛기침했다.“가끔 너무 늦게 집에 들어오면 배달 시키기도 귀찮아서 그냥 대충 먹어요.”그리고 덧붙였다.“제가 계산해봤는데, 이 정도면 하루에 필요한 단백질, 비타민, 탄수화물은 충분히 충족됩니다.”그가 진지하게 설명하는 모습에, 유진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역시 교수님답네요. 과학적인 계산과 정밀한 통제로 모든 걸 다 고려하셨네요.”그러다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그럼 따뜻한 집밥이랑 이런 간편식이 동시에 앞에 있으면, 뭐 고르실 거예요?”민준은 잠시 말이 없었다.답은 너무 뻔했다.따뜻한 밥이 있는데 굳이 간편식을 고를 사람은 없었다.유진이 장난스럽게 웃었다.“그래서 말인데요, 교수님. 저녁은 제가 할게요. 대신 보답으로 한 가지만 도와주시면 돼요.”……30분 후.민준은 도마 위의 생선을 보며 잠시 멈췄다.“…이거 손질하기 좀 까다로워 보이네요.”유진이 가볍게 헛기침했다.“원래는 마트에 생선 손질해 주는 분이 계신데, 오늘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간단하게만 해주셨거든요. 혹시 힘드시면…”민준은 말없이 소매를 걷고 안경을 벗었다.“해볼게요.”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사실 생선은 얇게 포를 떠야 양념이 더 잘 배는데, 그게 귀찮아서 그녀는 살짝 게으름을 부린 거였다.그런데 막상 민준이 부엌에 서 있는 모습을 보니, 물리학자를 붙잡아 생선을 손질시키는 게 너무한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5분 후, 유진은 방금 떠낸 생선회를 보며 생각을 바꿨다.두께와 크기가 거의 완벽하게 일정했다.이건 재능이었다.“이 정도면 괜찮아요?”민준이 손을 닦으며 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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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다

전화기 너머에서, 유진은 잠시 멍해졌다.머릿속에는 사진 속에서 은호와 수아가 손을 잡고 웃고 있던 장면이 떠올랐다.그리고 담담하게 말했다.“아프면 병원을 가. 난 의사가 아니야.”말을 마치자마자 전화를 끊었다.마치 상대가 정말 아무 상관없는 타인인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였다.은호는 이를 꽉 깨물었다.온몸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그는 그대로 휴대폰을 벽에 내던졌다.쾅!핸드폰이 산산조각 나버렸다.옆에 있던 아주머니는 얼어붙었다.“…?”그건 자기 핸드폰이었다.유진의 말에 속이 뒤집힌 은호는 분이 치밀어 오르면서, 오히려 위 통증이 더 심해졌다.그는 이를 악물고 오기로, 그리고 자존심으로 버티듯 곧장 2층으로 올라가 방에 틀어박혔다.‘정말 자기가 없으면 못 살 줄 아나?’웃기지도 않는다.아주머니는 망가진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방금 통화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저렇게 착한 아가씨를… 어떻게 저렇게까지 밀어낼 수가 있지…’……오후.청소를 마친 아주머니는 떠나기 전에 방문을 두드렸다.“도련님?”아무 대답도 없었다.아직 화가 덜 풀렸나 싶어, 별 생각 없이 돌아섰다.같은 날 오후.여동생 은아가 차를 몰고 별장에 도착했다.익숙하게 지문으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오빠, 엄마 명령 전달하러 왔어.“이번엔 진짜 괜찮은 집안 아가씨야, 콜롬비아 박사래!”“…오빠? 있어?”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전화를 걸었다.그런데 벨소리가 바로 옆에서 울렸다.고개를 내려보니 휴대폰이 거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폰이 집에 있으면, 사람도 있어야 정상인데…’잠시 생각하던 그녀는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오빠? 안에 있어? 엄마가 같이 식사하자고 했잖아. 들려?”한참을 두드렸지만 반응이 없었다.이상하네…은아는 불안한 표정으로 아주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도련님 계속 집에 계셨어요. 얼굴도 안 좋아 보였고, 위염이 도진 것 같았는데… 계속 조용하더라고요. 설마 안에서 쓰러진 건 아니겠죠?”그 말을 듣자마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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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유진은 같이 안 왔어?

유진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먼저 냉장고를 확인했다.어제 사 온 재료가 아직 꽤 남아 있었다. 메뉴를 금세 정했다.소고기 감자조림, 새콤달콤한 돼지갈비, 토마토 달걀볶음, 그리고 간단한 야채 볶음까지.야채를 씻고 썰어내는 손놀림은 익숙하고 능숙해서 요리를 전혀 못 하는 지석은 그 모습에 적잖이 놀랐다.“요즘 사람들은 대부분 배달 시켜 먹거나 밖에서 먹잖아요. 이렇게 직접 요리하는 사람은 점점 드문 것 같아요.”유진은 가볍게 웃었다.“사람마다 사는 방식이 다르죠. 저는 그냥 이런 게 익숙해서요.”지석은 그녀가 바쁘게 움직이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주변을 한 번 둘러봤다.집은 크지 않았지만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곳곳에 세심하게 신경 쓴 흔적이 느껴졌다.거실 한쪽에는 작은 책장이 있었는데, 책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대부분 전공서적이었고, 그중 하나는 조금 이질적으로 보였다.물리학 관련 책이었다.여자 혼자 사는 집을 이렇게 둘러보는 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그는 더 이상 시선을 두지 않았다.잠시 후, 따끈한 밥과 함께 요리가 하나둘 식탁 위에 올라왔다.향긋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지석은 돼지갈비를 한 입 먹었다.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와… 진짜 맛있어요! 요리 엄청 잘하시네요!”평소 기름지고 짠 배달 음식에 익숙해져 있던 그에게는 거의 충격적인 맛이었다.아니, 감동에 가까웠다.유진은 그의 과장된 반응에 웃음을 터뜨렸다.“맛있으면 많이 드세요.”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오늘 진짜 감사합니다.”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눈을 살짝 떨며 말했다.“이렇게 요리도 잘하고, 사람도 괜찮고… 남자친구가 되면 진짜 행복하겠네요…”유진이 뭐라 답하기도 전이었다.쾅쾅쾅!갑자기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유진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먼저 드세요. 제가 나가볼게요.”문을 열자 은아가 다짜고짜 그녀의 손을 붙잡고 끌어당겼다.유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봤다.“병원 가야 해. 우리 오빠 입원했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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