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내가 다시 눈을 뜬 이유: Chapter 11 - Chapter 20

24 Chapters

제11화

고재형이 다시 눈을 뜬 곳은 병실 안이었다.“우리 윤슬이는?”고주율이 옆에 앉아 소리 죽여 흐느꼈다.“엄마 죽었어요.”고재형이 벌떡 일어나 앉아 아들을 사납게 쏘아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표정을 바꾸고 주삿바늘을 뽑아 던지더니 웃으며 침대에서 내려왔다.그가 허리를 숙여 고주율을 품에 안았다.“말도 안 되는 소리. 엄마는 아직 길가에서 우리가 데리러 오길 기다리고 있어. 얼른 출발해야지. 안 그러면 엄마가 화낼 거야.”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고재형의 모습에 겁에 질린 고주율이 우는 것조차 까먹고 말았다.그때 병실 문이 열리더니 임소이가 들어왔다. 깨어난 고재형을 본 임소이가 웃으며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드디어 깼구나.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고재형이 무표정한 얼굴로 임소이를 밀어냈다.“우리 여기까지만 하자. 나 윤슬이를 데리러 가야 해.”임소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고재형의 입에서 노윤슬의 이름이 흘러나온 순간 두 눈에 증오가 스쳤다.‘눈먼 노윤슬을 왜 이렇게 사랑하는 거야? 게다가 이젠 죽었는데. 나랑 헤어지겠다고? 내 뱃속에 오빠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걸 잊었어?’뱃속의 아이 생각에 임소이가 마음속의 원망을 억누르고 다정하게 말했다.“오빠, 노윤슬 이미 죽었어. 어제 오빠 눈으로 똑똑히 봤잖아. 그리고 시신도 벌써 다 화장했어. 우리 이제 남들 눈치 안 보고 떳떳하게... 악!”고재형이 임소이의 뺨을 가차 없이 내리쳤다. 그러고는 바닥에 넘어진 임소이의 배를 짓밟고 핏발이 선 두 눈으로 말했다.“누구 마음대로 화장을 해?”고재형의 이런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임소이가 사시나무 떨듯 떨며 더듬거렸다.“오빠랑 주율이가 다 쓰러졌잖아. 경찰이 빨리 처리하라고도 했고. 이미 죽었는데 뭘 할 수 있겠어? 그래서 그냥 장례식장에 화장해달라고 했지.”고재형이 발끝에 힘을 실어 임소이의 배를 짓눌렀다. 하얗게 질려가는 임소이의 안색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누가 네 멋대로 결정하라고 했어?”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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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대표님, 전 물품 보관 전문 업체의 직원입니다. 사모님이 저희 회사에 서류 봉투 하나를 보관해 두셨습니다. 위탁인께서 고인이 되신 터라 계약 규정에 따라 사모님이 지정해 두신 분께 직접 전달해 드리러 왔습니다.”고재형이 멍한 눈으로 눈앞의 남자를 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서류 봉투를 받았다. 열어보니 USB 메모리 하나가 전부였다.다급히 노트북을 찾아 USB를 꽂았다. 안에 몇 개의 음성 파일이 들어있었다.‘윤슬이가 대체 언제 이런 걸 맡겨뒀지? 이 안에 윤슬이가 나한테 하고 싶었던 말이 들어있나?’고재형이 손을 떨면서 음성 파일을 클릭했다.그러나 기대했던 노윤슬의 맑고 고운 목소리가 흘러나오지 않았다.“네 남편 고재형이 오늘 아침에도 내 침대에서 뒹굴다가 일어났어...”“나 임신했어...”“오늘 성당 신부님 앞에서 재형 오빠랑 키스했어...”고재형의 얼굴이 순식간에 핏기가 가시며 창백해졌다.‘다 알고 있었어. 언제 알았지?’고재형이 스스로를 채찍질하듯 음성 파일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빠짐없이 들었다.노윤슬은 그에게 단 한 마디의 유언도 남기지 않았다. 남편이 바람을 피운 걸 알고 더는 그와 말하기 싫었던 것일까?고재형이 가장 오래되었으면서도 분량이 가장 긴 음성 파일을 열었다. 시끄러운 배경 음악이 들리는 것으로 보아 임소이의 생일 파티가 열렸던 날임이 분명했다.평소 별장에서는 임소이가 노윤슬에게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도우미들을 시켜 철저히 감시하고 차단했었다.그러나 그날은 고재형이 노윤슬을 잔혹한 진실의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다.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노윤슬의 마음속에 남아있던 그를 임소이가 싹 다 짓밟아버렸다.고재형이 임소이의 방으로 쳐들어갔다.임소이가 그를 보자마자 가여운 표정을 짓더니 품에 안기면서 그의 손을 아랫배 위에 얹었다.“오빠가 어제 내 배를 밟아서 밤새 배가 너무 아파 한숨도 못 잤어. 오늘 아침에 하혈도 했단 말이야. 빨리 어루만져줘.”임소이가 고재형의 손을 잡고 그녀의 몸을 더듬게 했다. 임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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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오... 오빠, 내가 잘못했어. 난 우리 아이를 위해서 그런 거야. 우리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사생아로 살게 하고 싶지 않아서... 제발 아이를 봐서라도 한 번만 용서해주면 안 돼?”임소이가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이 남자가 다시금 그녀에게 마음이 약해지기를 간절히 바랐다.그러나 고재형이 피도 눈물도 없는 남자라는 걸 잊어버렸다. 더군다나 임소이는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노윤슬을 건드렸다.그가 손에 힘을 더 주었다. 임소이의 얼굴이 점점 시뻘게지더니 기괴하게 일그러졌다.“아빠, 뭐 하는 거예요? 소이 이모 배 속에 내 여동생이 있단 말이에요.”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방 안으로 뛰어 들어온 고주율이 온 힘을 다해 고재형을 밀어냈다. 임소이가 그제야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고재형이 침대 아래로 내려가 고주율을 걷어찼다.“이 여자가 네 엄마한테 모든 걸 다 말해버렸어. 그런데도 감싸고 돌아? 윤슬이가 대체 무슨 죄를 지어서 너 같은 아들을 낳았는지.”고주율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임소이를 쳐다봤다.‘말도 안 돼. 이모는 단지 아빠를 사랑할 뿐이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했었어. 그런데 왜 엄마한테 다 말했지?’목을 부여잡고 가쁜 숨을 몰아쉬던 임소이가 눈앞의 부자를 번갈아 보더니 갑자기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그 눈먼 여자를 길바닥에 버리라고 했어? 노윤슬을 죽인 건 두 사람이면서 왜 죄 없는 나한테 화풀이를 하는 건데?”임소이의 시선이 고주율과 고재형에게 차례로 닿았다.“내가 주율이한테 일부러 잘해준 건 맞아. 그래야 오빠랑 가까이할 수 있으니까. 그 유치원 교사가 된 것도 돈 많은 남자 하나 꼬시기 위해서야.”“내가 꼬리 친 건 인정해. 하지만 나를 데려다주겠다는 핑계를 대며 차 안에서 참지 못하고 날 가진 건 누구지? 그리고 엄마가 앞을 못 본다고 창피해하면서 날 엄마라 불러대던 건 또 누구였고?”“그 여자한테 말한 게 뭐가 어때서? 내가 이렇게 기고만장하고 겁이 없었던 건 다 두 사람 때문이야. 내가 저지른 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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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안녕하세요, 대표님. 주태수입니다. 사모님께서 이번 주에 진료받으러 오지 않으셔서요. 기적적으로 시력을 되찾으셨는데 치료 효과를 유지하려면 반드시 꾸준히 치료를 받으셔야 합니다.”순간 고재형은 심장이 멎어버린 것 같았다. 머릿속에 주태수가 했던 기적적으로 시력을 되찾았다는 한마디가 메아리처럼 맴돌았다.“방금 뭐라고 했어요?”고재형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주태수는 고재형에게 얘기하지 않은 걸 가지고 뭐라 할까 봐 다급히 해명하기 시작했다.“보름 전 사모님께서 진료를 받으시던 중에 기적적으로 시력을 되찾으셨어요. 저희가 대표님께 알리려 했는데 사모님께서 직접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다며 한사코 만류하셨거든요.”“평소 대표님이 사모님을 워낙 아끼고 지극정성으로 대하셔서 저희도 사모님의 뜻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어요. 혹시 사모님께서 아직 말씀하시지 않으셨나요?”주태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고재형이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진실을 믿을 수도 없었고 무엇보다 믿고 싶지 않았다.만약 노윤슬이 임소이의 도발을 귀로만 들은 것이라면 훗날 그가 죽어 저승에서 만났을 때 변명할 여지라도 있었다. 그 모든 게 임소이가 지어낸 거짓말이었다고 발뺌하면 그만이었다.하지만 노윤슬이 이미 앞을 볼 수 있게 된 상태였다면...고재형이 지난 보름 동안 노윤슬의 일거수일투족을 뒤쫓기 시작했다.병원으로 가서 그날의 진료 과정을 CCTV 영상으로 확인했다. 화면 속 노윤슬은 남편에게 직접 이 기쁜 소식을 전해줄 거라며 세상을 다 얻은 듯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그날 아내를 데리러 갔던 운전기사에게 전화를 걸어 노윤슬이 병원을 나선 직후 곧장 회사로 향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고재형이 중요한 회의가 있다며 노윤슬을 속이고 사무실에서 임소이와 뒹굴고 있을 때 노윤슬이 문밖에서 그 광경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었다.보름 동안 노윤슬은 남편과 아들, 그리고 임소이가 한 가족처럼 화목하게 지내던 모습을 가만히 지켜만 봤다.그날 무릎을 꿇고 임소이의 부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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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노윤슬에게는 아주 오래전부터 패션 디자이너라는 꿈이 있었다. 만약 과거에 고재형을 구하다가 시력을 잃지 않았더라면 진작 세계적인 예술 디자인 대학교의 입학 통지서를 품에 안고 꿈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을 것이다.어그러진 삶을 바로잡기에는 지금도 늦지 않았다.다만 노트북 화면에 가득한 두서없는 정보들을 보고 있자니 노윤슬은 머리가 다 터질 것만 같았다.게다가 이가연이 옆에서 계속 방해 공작을 펼쳤다.“이 학교 되게 유명한 것 같은데? 여기도 나쁘지 않아.”노윤슬이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도와달라고 불렀어. 방해가 아니라.”이가연이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내가 이런 걸 알 리가 없잖아. 우리 오빠 머리 진짜 좋으니까 오빠한테 분석해 달라고 해.”노윤슬이 고개를 들어 맞은편 소파를 쳐다봤다.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가 흐르는 남자가 고개를 숙인 채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이 남자가 바로 이가연의 오빠 이기성이었다.노윤슬과 이가연이 둘도 없는 절친이라 이기성과도 꽤 친했다. 만날 때마다 오빠라고 부르곤 했다.이기성은 어릴 때부터 전형적인 엄친아의 정석이었다. 학업 성적은 물론이고 능력까지 출중해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가업에 뛰어들었다.그리고 5년 만에 그룹의 절대적인 실권을 장악했다.성격이 무뚝뚝하고 오만해서 이기성이 웃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당시 노윤슬은 고재형으로부터 도망쳐 그녀를 영영 찾지 못하게 하겠다는 일념뿐이었다. 하지만 막상 떠나고 나니 정작 갈 곳이 아무 데도 없었다.그때 노윤슬의 손을 잡아준 이가 바로 이기성이었다. 이기성이 그녀를 전용기에 태워 해외에 머물던 이가연의 곁으로 데려다주었다. 노윤슬을 기꺼이 거두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신분까지 만들어줬다.게다가 노윤슬이 공항에 발을 딛자마자 그녀를 위해 구한 안과 전문의가 기다리고 있었다.하지만 워낙 어릴 때부터 무서워하던 오빠라 이가연이 그에게 물어보라고 했을 때 덜컥 겁이 났다.“아니야, 됐어. 그냥 혼자 찾아볼게.”그런데 태블릿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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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노윤슬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어른과 아이의 모습을 보자마자 머플러로 얼굴을 가린 채 몸을 돌려 발걸음을 재촉했다.하지만 한발 늦었다. 뒤에서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윤슬아.”“엄마.”고주율이 달려와 노윤슬의 다리를 붙잡고 울음을 터뜨렸다.“엄마, 살아 있어서 너무 다행이에요. 어떻게 우리를 버릴 수 있어요?”노윤슬이 무표정한 얼굴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질문을 어떻게 이렇게 뻔뻔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미안한데 사람 잘못 봤어.”고재형이 고개를 저었다.“아니, 잘못 볼 리가 없어.”그가 밤낮으로 그리워한 사람을 어찌 잘못 알아보겠는가?사실 고재형이 노윤슬의 가짜 죽음을 알게 된 건 그야말로 우연이었다.노윤슬이 세상을 떠난 후 고재형은 술로 정신을 마비시키며 살았고 고명철이 회사의 모든 압박을 짊어졌다.고명철이 여기저기 술자리를 전전하며 고객을 설득하고 협력을 구하다가 결국 어느 날 새벽 뇌경색으로 쓰러져 입원하게 되었다.결국 참다못한 김은혜가 고재형을 고명철의 병상 앞으로 끌고 가 뺨을 거세게 내리쳤고 고재형은 그제야 조금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그는 브랜드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해 거액을 들여 톱스타를 광고 모델로 섭외했다. 그런데 그 배우가 닷새 전 노윤슬과 같은 패션쇼에 참석했던 것이었다.사실 사진 속 노윤슬을 처음 봤을 때 고재형도 잠시 의심했다.‘윤슬이 이미 죽었어. 유골함이 아직도 안방의 침대 서랍에 놓여 있는데 패션쇼에 나타났다는 게 말이 돼?’고재형이 그 사진을 하루 종일 들여다보았다. 조명이 어둡고 얼굴도 절반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그는 노윤슬임을 확신했다.그 후 고재형이 인터넷에서 모든 패션쇼 사진을 뒤졌고 마침내 한 단체 사진에서 그녀의 온전한 모습을 찾아냈다.고재형이 가슴을 부여잡았다.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노윤슬이 어떻게 죽음을 위장해 도망쳤는지, 어떻게 F국까지 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가 죽지 않았고 살아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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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노윤슬이 낡았지만 닳지 않도록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던 자료들을 떠올렸다가 저도 모르게 옷자락을 꽉 쥐었다.“정말이야?”이가연이 평소의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싹 거두고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당연히 정말이지. 너 부담 주려고 꺼낸 얘기는 아니야. 어차피 너 지금 싱글이잖아. 우리 오빠한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다면 오빠한테도, 너한테도 기회를 줘 봐. 만약 전혀 아니라면 오빠한테 확실하게 말해줬으면 좋겠어. 오빠가 마냥 미련 붙잡고 세월만 보내지 않게.”차 안이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경찰서에 도착한 노윤슬과 이가연이 30분쯤 대기한 끝에 고재형 부자와 이기성이 나란히 밖으로 나오는 걸 봤다.노윤슬과 이가연이 얼른 그에게 다가갔다.고재형이 그동안 매일같이 술에 절어 지낸 탓에 몸이 만신창이가 돼버렸다. 쌍방 폭행이라고는 하지만 실상은 이기성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은 것에 가까웠다.이기성에 비해 고재형의 부상이 훨씬 심각해 보였으나 노윤슬은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스쳐 지나갔다.“기성 오빠, 괜찮아?”이기성이 노윤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괜찮아. 두 사람 걱정하게 만들었네. 이제 집으로 가자.”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지켜보던 고재형은 씁쓸함이 밀려왔지만 다시 한번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윤슬아, 제발 기회를 줘. 우리 얘기 좀 하자, 응?”노윤슬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그대로 차에 올라타 자리를 떠났다.이씨 가문 별장으로 돌아와 식사를 마친 후 이가연은 남자친구와 영상 통화를 하겠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거실에 두 사람만 어색하게 앉아 있었다.이기성의 입가가 파랗게 멍든 걸 본 노윤슬이 구급상자에서 연고를 꺼냈다.“약 발라줄게.”“그래.”이기성이 선뜻 대답하며 노윤슬의 앞으로 얼굴을 내밀었다.노윤슬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긴장한 나머지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고 손이 떨려 연고를 그만 이기성의 입술에 묻히고 말았다.“미... 미안.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노윤슬이 티슈를 꺼내 그의 입술을 닦아줬다. 부드러운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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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이기성은 고재형과 고주율이 확실하게 귀국하도록 네 명의 경호원을 붙여 비행기에 태웠다.창밖으로 점점 작아지는 건물을 내려다보며 고재형은 속으로 굳게 맹세했다.‘언젠가 반드시 다시 돌아올 거야.’적어도 이기성의 말이 맞는 게 하나 있었다. 임소이도 정리하지 못했으면서 무슨 낯짝으로 노윤슬에게 용서를 구한단 말인가?전에 김은혜는 고재형이 임소이의 뱃속에 있는 아이를 해칠까 봐 깊숙이 숨겨두었었다.김은혜가 알려준 임소이의 출산 예정일을 사실 그다지 신경 쓰진 않았으나 대략 한 달쯤 남았다는 건 기억하고 있었다.고재형과 고주율이 노윤슬을 찾으러 F국으로 갔다는 소리를 듣고 노윤슬이 돌아와 임소이의 자리를 빼앗을까 봐 수를 써서 예정일보다 앞당겨 낳은 게 분명했다.이제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왔으니 김은혜도 임소이를 숨길 이유가 없었다. 임소이가 입원한 병원을 찾아내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고재형과 고주율은 곧장 병원으로 달려갔다.병실 안, 김은혜가 아이를 어르고 있었고 임소이가 침대에 누워 김은혜를 어머님이라 부르며 살갑게 굴고 있었다.고재형을 본 순간 임소이의 얼굴에 즉각 화색이 돌았다.“여보, 아이 보러 왔어?”어찌나 상냥한지 얼마 전 고재형의 손에 죽을 뻔했다는 사실조차 잊은 듯했다.김은혜가 아이를 안고 고재형과 고주율에게 다가갔다.“재형아, 네 아들 좀 봐봐. 엄청 예뻐.”고재형이 쳐다보지도 않고 아이를 낚아채 바닥으로 내던지려 했다.화들짝 놀란 임소이가 비명을 질렀고 김은혜가 온 힘을 다해 그의 팔을 붙잡고서야 겨우 참사를 막을 수 있었다.그녀가 아이를 품에 꼭 안고 고재형의 뺨을 거세게 내리쳤다.“미쳤어? 얘 네 친자식이야.”고재형의 두 눈에 광기가 가득했다.“윤슬이 죽지 않았어요. 윤슬이한테 용서를 빌어야 하는데 이 아이랑 임소이가 존재하면 안 돼요.”김은혜가 잠시 충격에 휩싸였다.“뭐? 윤슬이가 살아 있다고?”그녀는 노윤슬의 시력이 회복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그녀의 눈에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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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임소이가 거액을 들여 아이와 고재형의 친자 확인 검사를 몰래 의뢰한 뒤 친구더러 라이브 방송 장비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한창 산후조리 중이라 몰골이 초췌했지만 그럼에도 최대한 가련한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애썼다.모든 준비를 마친 후 임소이가 카메라에 창백하고 부어오른 얼굴을 들이밀었다. 손을 떨며 친자 확인 결과지를 카메라 앞에 보여주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저는 고현 그룹 고재형 대표의 약혼녀 임소이입니다. 오늘 이렇게 라이브를 켠 건 우리 아이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예요.”임소이가 포대기에 싸인 아이를 카메라 앞으로 안고 와 흐느꼈다.“이 아이가 태어난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아빠인 고재형은 자기 자식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어요. 여기 고재형과 아이의 친자 확인 결과지가 있습니다. DNA 일치율이 99.99%예요.”“처음엔 저와 결혼하겠다며 저만을 사랑한다고 맹세해서 이 아이를 낳았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부인하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 아이를 바닥에 던져 죽이려고까지 했어요.”방송을 보던 시청자들은 처음에 그녀가 누군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다가 6개월 전 남의 가정에 끼어들었던 불륜녀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분노했다. 뻔뻔스럽게 자신을 약혼녀라 칭하다니.댓글 창에 내연녀 임소이를 향한 비난이 쇄도했고 아이에게는 죄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내연녀의 아이면 사생아지. 같이 죽어버려.][맞아. 남자도 똑같지 않아? 쓰레기 남녀가 세트로 죽었으면... 그리고 저 상간녀를 엄마라고 부르는 애도 같이.][보아하니 저 여자 돈 뜯어내려고 아이를 이용해서 불쌍한 척하는 거네.][어쨌거나 아이는 아무 잘못이 없어.]의견이 갈리는 댓글들을 보고도 임소이는 아무렇지 않았다. 어차피 목적은 달성했으니까.그녀가 뭐라 더 말하려던 그때 방송이 돌연 중단되었다.복도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고재형이 병실 문을 거칠게 걷어차고 들어왔다. 임소이가 아이를 안고 그에게 의기양양하게 웃었다.“오빠, 난 여전히 오빠를 사랑해. 진심으로 오빠의 아내가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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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임소이가 멍한 눈으로 품속의 아이를 내려다보았다.아이가 마지막으로 울었던 게 언제였던지, 마지막으로 젖을 물린 게 언제였던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그녀 때문에 아이가 숨 막혀 죽어버렸다.임소이가 아이의 시신을 끌어안고 고씨 가문 부자를 올려다봤다. 그들의 얼굴에 잠깐이지만 기뻐하는 기색이 스쳤다.고재형이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여기서 완전히 끝내자. 약속한 10억 원에 별장 하나 더 줄 테니까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임소이가 매정한 부자를 노려봤다. 그녀가 이 지경이 된 게 모두 저들 때문이었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건 분노뿐이었다.10억?보통 사람들에게는 큰돈일지 몰라도 사치스러운 생활에 익숙해진 임소이에게는 푼돈에 불과했다. 그동안 고재형이 사준 명품 시계와 가방 하나가 수억 원을 호가했다.더구나 재벌 사모님으로 긴 시간을 살아서 남 밑에서 일하며 푼돈을 벌어 생계를 이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그렇다면 돈 많은 남자를 만나는 방법뿐이었다. 그런데 임소이와 고재형의 일이 소문이 날 대로 나서 그녀를 받아줄 남자가 없었다. 그리고 명예가 바닥까지 떨어진 임소이가 자기 남자에게 들러붙는 걸 용납할 사모님도 없었다.고재형을 떠나면 그녀의 삶은 끝이기에 어떻게든 그를 잡아야 했다. 그녀가 원하던 화려한 삶을 줄 사람은 고재형밖에 없었다.힘들게 아이를 낳아 아이로 결혼을 강요한 것도 그 때문이었건만 이젠 가장 쓸모 있었던 아이마저 임소이의 손으로 죽여버렸다.임소이가 미친 사람처럼 아이의 시신을 껴안고 고현 그룹 앞에서 울다 웃기를 반복했다.고재형과 고주율이 F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다시 몸을 실었다. 마침내 모든 방해물이 제거되었다. 이젠 노윤슬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게 되었다....한편 F국.노윤슬이 이기성과 이가연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그녀의 이름을 내건 의류 브랜드를 론칭했다.과감한 색상과 독창적인 디자인 감각이 돋보인 그녀의 첫 번째 의상이 패션계에서 큰 화제를 모았고 동시에 전 세계 의류 디자인 공모전 주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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