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내가 다시 눈을 뜬 이유: Chapter 1 - Chapter 10

24 Chapters

제1화

“가연아, 나 교통사고 좀 위장해 줄 수 있어? 사망자는 나로 해서.”노윤슬이 절친 이가연에게 전화를 걸어 갈라진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전화기 너머로 이가연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일이야? 고재형 그 자식이 또 너 괴롭혔어?”노윤슬이 고개를 들었다. 고재형의 외도를 목격한 그 순간에 눈물이 이미 다 말라버렸다. 무려 10년 만에 마주한 눈부신 햇살을 바라보며 그녀가 말했다.“나 여길 떠나고 싶어. 이제 내가 기댈 곳은 너밖에 없어.”이가연이 두말하지 않고 바로 수락했다.“보름만 기다려. 우리 오빠가 계약 건 때문에 너의 옆 도시로 갈 거거든. 그때 오빠더러 널 데리고 오라고 할게.”“알았어.”그때 등 뒤로 침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노윤슬이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곧이어 크고 다부진 체격의 남자가 뒤에서 그녀를 꽉 껴안았다.“여보, 미안해. 회사에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어쩔 수 없었어. 다음엔 꼭 병원 같이 가줄게. 아 참, 오늘 진료 결과는 어때? 의사가 뭐래?”고재형의 말에 노윤슬의 기억이 오늘 오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10년 전 노윤슬이 고재형을 구하려다 교통사고를 당해 시력을 잃었다.고재형은 노윤슬에게 다시 빛을 찾아주기 위해 고현 병원을 설립했고 막대한 돈을 쏟아부어 전 세계의 안과 권위자들을 초빙했다. 손상된 시신경을 되살리는 연구에만 수천억 원을 썼다.그 10년 동안 그녀는 매주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무려 521번이나 치료를 받았지만 기적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사실 노윤슬은 진작에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고재형이 무릎까지 꿇으며 애원했고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태어난 후로는 그가 그녀를 설득할 핑계가 하나 더 늘었다.“우리 아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지 않아? 제발 포기하지 마, 응?”게다가 아들의 매년 생일 소원조차 엄마가 다시 눈을 뜨게 해달라는 것이었다.고재형에 대한 사랑, 그리고 아들의 얼굴을 단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다는 그 간절한 집념이 노윤슬을 오늘까지 버티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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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고재형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라는 건지, 아쉽다는 건지 알 수 없는 한숨이었다.“괜찮아. 평생 앞을 못 본다고 해도 내가 널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만 기억해. 내일 병원 안과 쪽에 200억 더 투자할게. 연구 좀 빨리 진행하라고 독촉해야겠어. 지금은 일단 밥부터 먹자. 가자.”그러고는 허리를 굽혀 노윤슬을 번쩍 안아 올렸다.예전 같았으면 달콤하게 느껴졌을 이 행동이 이젠 구역질이 날 만큼 역겨웠다. 노윤슬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식당.“나 엄마랑 같이 앉을래요.”아들 고주율이 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사실은 의자 위에 올라서서 그 여자의 입을 닦아주고 있었다.고주율과 그 여자가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여 앉아 있었다. 그들이 노윤슬과 그 여자를 나란히 앉힐 리가 없었다.이미 자기들끼리 다 정해놓고서 눈먼 그녀 앞에서 뻔뻔하게 연기했다.그 여자가 샤워 가운 차림으로 고재형의 곁에 여유롭게 앉아 있었다. 오히려 노윤슬보다 더 이 집의 안주인 같았다.고재형이 그 여자에게 스테이크를 썰어주고 새우를 까주었으며 고주율이 물잔을 채워주었다.모든 것이 예전과 다를 바 없었다. 유일하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지금의 노윤슬이 그 여자의 눈동자에 일렁이는 질투심을 똑똑히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음식을 씹고 있었지만 모래알을 씹는 것만 같았다. 노윤슬이 새우를 까주는 고재형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불과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다른 여자의 몸을 어루만지던 손이었다.혐오감이 치밀어 올라 속이 다 울렁거렸다.노윤슬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때 그 여자가 아무 거리낌 없이 고재형의 손을 잡고 샤워 가운 밑으로 가져가는 걸 목격했다.고재형이 무의식적으로 손을 빼내려 했지만 여자가 그의 손을 꽉 누른 채 은밀한 움직임을 이끌었다.급기야 여자가 손을 놓았는데도 고재형은 가운 속에 넣은 손을 거둬들이지 않았다.구역질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왔다. 참다못한 노윤슬이 식탁 모서리를 잡고 토하기 시작했다.당황한 고주율이 급히 휴지를 가져왔고 고재형이 노윤슬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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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욕실에서 나왔을 때 고재형이 소파에 앉아 노윤슬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어 이불속에 눕히더니 꽉 끌어안았다.“여보, 오늘 대체 왜 그래? 병원에서 무슨 일 있었어? 나한테 다 말해봐. 난 항상 여보 편이니까.”행여나 고재형이 그녀의 주치의인 주태수에게 전화라도 걸까 봐 대충 얼버무렸다.“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잠을 못 자서 피곤한가 봐.”마침 그때 고재형의 휴대폰이 울렸다.노윤슬에게 숨기지도 않고 바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우리 소이’라고 저장된 번호로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앙큼한 고양이 코스튬을 입은 여자가 침대 위에 무릎을 꿇고 요염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사진이었다.[침실에서 주인님 기다리고 있어.]고재형이 흠칫하더니 이내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윤슬이 재우고 바로 갈게.][지금 오면 안 돼? 어차피 앞을 못 봐서 누가 부축 안 해주면 1층으로 내려오지도 못하잖아. 보고 싶단 말이야.]고재형이 서둘러 화면을 끄더니 노윤슬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여보, 회사에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서재에서 일 좀 처리하고 올게. 먼저 자. 기다리지 말고.”말을 마친 그는 안달이 난 사람처럼 황급히 방을 나갔다.노윤슬이 침대에 덩그러니 누워 새하얀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어쩌면 고재형 역시 그녀가 시력을 회복할 가망이 없다고 단정 지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저렇게 아무런 조심성도 없이 굴 수 있는 거 아닐까?노윤슬이 자리에서 일어나 1층으로 내려갔다. 텅 빈 1층의 우측 침실에서 남녀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임소이, 간도 크다, 너? 윤슬이가 아직 자지도 않았는데 감히 날 꼬셔?”“아무튼 바로 내려왔잖아.”방 문이 꽉 닫혀 있지 않았다. 노윤슬이 열린 문틈 사이로 침대 위에서 살을 섞고 있는 두 사람을 똑똑히 보았다.방의 인테리어가 트렌디하고 화사하게 꾸며져 있는 걸 보면 아무리 못해도 1년 이상은 같이 살았을 것이다.노윤슬이 철석같이 믿었던 행복한 세 식구의 집에 오래전부터 네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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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그 후 며칠 동안은 노윤슬이 진실을 알게 된 날과 다를 바 없이 흘러갔다.세 사람이 함께 집을 나섰고 집에 돌아와서는 노윤슬 몰래 소리 없는 밀회를 즐겼다.고재형은 매일 밤 1층으로 내려가 임소이와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는 새벽이 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침실로 들어왔다.그렇게 노윤슬은 그들의 연기를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나중에는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아예 2층 침실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어느새 노윤슬의 정기 진료일이 되었다.아침에 눈을 뜨자 고재형이 평소처럼 다정하게 굿모닝 키스를 건넨 뒤 노윤슬을 부축해 식당으로 향했다.바로 그때 들키지 않으려 숨죽여 지내던 임소이가 갑자기 헛구역질하기 시작했다.고재형과 고주율의 얼굴이 급변했다. 고재형이 다급히 임소이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고 고주율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만 물었다.“이모, 어디 아파요?”노윤슬이 사색이 된 부자를 보면서 장단을 맞춰줬다.“무슨 일이야?”“도우미 아주머니가 갑자기 토를 했어.”고재형이 급조한 거짓말로 둘러댔다. 그러고는 신빙성을 더하려 허공에 대고 있지도 않은 도우미에게 버럭 화를 내는 치밀함까지 보였다.그가 도우미라고 말했을 때 임소이의 눈빛에 찰나의 질투와 억울함이 스치는 걸 노윤슬은 놓치지 않았다.서둘러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세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이 임소이의 방으로 들어갔다.방 안에서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고주율이 갑자기 환호성을 터뜨렸다. 하지만 누가 들을까 봐 겁이라도 난 것처럼 이내 잦아들었다.잠시 후 세 사람이 다시 방에서 나왔다.고주율이 먼저 다가와 노윤슬의 볼에 뽀뽀했다.“엄마, 유치원 다녀올게요.”고재형도 노윤슬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우리 여보 두고 출근하려니까 발길이 안 떨어지네.”만약 노윤슬이 진짜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상태였다면 저 애틋한 목소리에 속아 고재형이 진짜 아쉬워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러면 그의 입술에 다정하게 키스하며 아이처럼 굴지 말라고 혼내기도 했겠지.“오늘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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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최근 들어 고재형은 노윤슬이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생기를 잃었다는 걸 느꼈다.시력을 잃었음에도 노윤슬은 늘 밝았다. 자연을 느끼겠다며 정원에 앉아 여유롭게 커피를 즐겼고 고주율과 함께 블록 게임을 하거나 뉴스를 봤다. 심지어 가끔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면서 부자를 위해 직접 요리도 하곤 했다.그렇게 씩씩하고 눈부시게 빛나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온종일 침실에 틀어박혀 통유리창 앞에 앉아 하늘만 멍하니 응시했다. 바싹 말라비틀어져 죽어가는 꽃처럼 일말의 생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갑자기 달라진 아내의 모습에 고재형이 초조해하기 시작했다.“윤슬아, 요즘 왜 그래? 진료받을 때 같이 안 가서 화났어? 걱정하지 마. 다음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같이 갈게. 그러니까 나 좀 거들떠봐 줘. 응?”고재형의 목소리에 급기야 울음기마저 섞이기 시작했다.‘날 잃을까 봐 이토록 두려워하면서 대체 왜 딴 여자를 만나? 그것도 모자라 한 지붕 아래에서 두 집 살림을 차릴 생각까지 하다니.’심지어 노윤슬에게 말을 걸기 직전까지도 임소이의 방에 있었다. 입가에 미처 다 닦아내지 못한 여자의 립스틱 자국이 남아있었다.‘내가 앞을 못 본다고 이렇게까지 사람을 기만하고 짓밟아도 되는 거야? 내가 누구 때문에 시력을 잃었는데.’노윤슬이 손을 내밀자 고재형이 재빨리 손을 잡고 얼굴에 가져다 댔다.그녀가 손으로 남편의 짙은 눈썹을 천천히 더듬었다. 열렬히 사랑했던 그 소년의 이목구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그저 조금 더 성숙해지고 어른스러워졌다.하지만 그의 마음이 변해버렸다. 더는 노윤슬이 목숨을 던져서라도 구하고 싶었던 그 소년이 아니었다.펑. 펑. 펑.바로 그때 창밖에서 불꽃놀이가 펼쳐졌다. 까만 밤하늘을 수놓으며 터진 수많은 불꽃이 강물 위로 찬란하게 쏟아져 내렸다.1층 정원에서 고주율이 신이 나서 임소이의 귓가에 대고 말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봤어요? 이모가 여동생 낳아준다고 아빠가 특별히 준비한 거래요.”노윤슬이 쓰디쓴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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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노윤슬은 그제야 깨달았다. 고재형과 고주율이 그녀를 데려온 곳이 다름 아닌 임소이의 생일 파티장이라는 것을.그뿐만이 아니라 고재형의 부모와 친구들까지 전부 모여 있었다.노윤슬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익숙한 얼굴들이 임소이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것이 고재형이 말했던 노윤슬을 기쁘게 해주겠다는 것의 실체였다.두 부자는 노윤슬을 스피커 근처에 앉혀두고는 마실 물과 조각 케이크 하나를 쥐여주었다.“윤슬아, 여기 잠깐만 앉아 있어. 주율이 데리고 가서 인사 좀 하고 올게.”고재형이 임소이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배를 소중하게 감싸 쥐고 입을 맞추는 광경을 노윤슬이 두 눈 뜨고 똑똑히 지켜보았다.고주율 역시 그 옆에서 깡충깡충 뛰며 임소이를 향해 해맑게 외쳤다.“엄마.”고재형의 친구들도 분위기에 맞춰 환호성을 질렀다.“형수님.”고재형이 노윤슬이 있는 쪽을 힐끗 살피더니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대며 사람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눈치를 주었다.“형수님이라니. 윤슬이가 들으면 어쩌려고.”과거 노윤슬이 고재형을 구하려다 크게 다쳤을 때 일주일 동안 그녀의 병상 곁을 지켰던 시어머니 김은혜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고재형을 찰싹 때렸다.“뭐가 무서워서 그래? 들으면 또 어때? 앞도 못 보는 애가 널 떠나서 어딜 가겠니? 지금 우리 소이 배 속에 있는 금쪽같은 손주가 제일 중요하지.”고재형의 친구들도 맞장구를 쳤다.“맞아. 우리 같은 사람들 중에 곁에 여자 여럿 안 둔 사람이 어딨어? 형은 이제 겨우 한 명 만난 건데 이 정도면 노윤슬한테 할 만큼 한 거지.”고재형이 미간을 찌푸리며 엄하게 말했다.“내 와이프는 오직 윤슬이 하나뿐이야. 다들 윤슬이 귀에 안 들어가게 입단속 철저히 해.”사람들이 대충 얼버무리며 대답했다.“알았어, 알았어. 우리 입 무거운 거 알잖아. 어차피 형이 형수님을 집안에만 꽁꽁 숨겨둬서 우리가 마주칠 일도 없는데, 뭐.”사람들은 노윤슬이 시끄러운 스피커 옆에 있어 그들의 대화를 전혀 듣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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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다음 날 고주율이 애교를 부리며 노윤슬의 품으로 파고들었다.“엄마, 유치원에서 체험학습 여행을 가는데 부모님도 같이 오래요. 저 아빠랑 둘이 다녀와도 돼요?”‘이게 바로 임소이가 말했던 고재형이 해주기로 한 보상이겠지.’노윤슬이 고개를 숙였다. 품에 안긴 아들이 그녀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네면서도 임소이를 향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말을 마친 고주율이 잊지 않고 노윤슬의 볼에 얼굴을 비벼댔다.노윤슬이 두 손으로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입이 아빠를 닮은 것만 빼면 노윤슬 판박이였다.고재형이야 자극을 쫓아 바람이 났다 쳐도 고주율은 대체 왜 이러는 걸까?매번 산부인과 의사가 아이의 상태를 설명해 줄 때마다 태어날 아이의 얼굴이 어떨지 수없이 상상하곤 했었다.앞이 보이지 않았기에 임신한 기간 노윤슬은 다른 임산부들보다 만 배는 더 조심스럽게 행동했다.심지어 사고라도 생길까 봐 존엄조차 포기한 채 화장실을 갈 때도 도우미와 동행했다.그렇게 온갖 고생을 다 해가며 열 달을 품어 낳은 아들이 지금 그녀 몰래 상간녀를 엄마라고 불렀다.고주율의 얼굴이 노윤슬과 똑 닮지 않았더라면 누군가 병원에서 아이를 바꿔치기한 건 아닐까 의심했을 것이다.노윤슬의 기나긴 침묵을 눈치챈 고주율이 그제야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엄마?”옆에 있던 고재형도 거들고 나섰다.“책만 보는 것보다 직접 경험하는 게 낫지 않겠어? 게다가 유치원에서 단체로 가는 거라 안 보낼 수도 없고. 네 눈만 멀쩡했어도 같이 갔을 텐데.”그들은 노윤슬이 절대 거절하지 못할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웠다. 고재형은 이미 비서에게 비행기 표를 예매하라고 지시하기까지 했다.겉으로는 의견을 묻는 척했지만 사실상 통보나 다름없었다.노윤슬이 목적지를 확인해 보니 그녀가 시력을 잃기 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유럽 마을이었다.“괜찮아. 다녀와.”출발하기 전 고재형은 집안의 모든 도우미를 불러 노윤슬을 돌볼 때 주의해야 할 사항들을 하나하나 읊었다.“자기 전에 침대 서랍 위에 물 한 잔 떠놓는 거 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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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오늘은 병원 진료 예약이 있는 날이자 노윤슬이 떠나기로 한 날이기도 했다.노윤슬이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마침 고재형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뒤로 고주율과 임소이가 따라 들어왔다.그녀는 고재형이 그녀의 눈 진료를 위해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 최근 들어 노윤슬이 보인 평소와 다른 태도 때문에 꽤 불안해하고 있었으니까.“여보, 나랑 주율이 왔어.”고재형이 노윤슬을 번쩍 안아 들고 거실을 빙글빙글 돌려 했지만 노윤슬이 그를 밀어냈다.가족이 돌아왔음에도 그녀의 얼굴에 기쁜 기색이 티끌만큼도 없었다.고재형이 불안한 목소리로 불렀다.“여보?”“엄마.”고주율이 건축물 모형 장난감을 노윤슬의 손에 쥐여주었다.“엄마 주려고 사 온 기념품이에요. 마음에 드는지 한 번 만져봐요.”노윤슬이 장난감을 옆에 내려놓으며 서늘하게 대꾸했다.“병원 갈 시간이야. 다녀와서 얘기해.”고재형이 다시 그녀를 끌어안았다.“그래. 병원 같이 가줄게.”아이가 그녀의 다리에 매달렸다.“나도 갈래요. 엄마랑 오랫동안 같이 못 있었잖아요.”차에 오르기 전 노윤슬이 마지막으로 별장을 돌아봤다. 그 모습을 본 고재형이 걱정스레 물었다.“왜 그래?”그녀가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아무것도.”고현 병원이 바닷가와 인접한 시 외곽에 자리하고 있었다. 차가 탁 트인 도로를 매끄럽게 달렸다.고주율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아빠가 엄마 병원 같이 가준다고 엄청 서둘러서 돌아왔어요.”노윤슬이 창밖을 내다봤다.“유치원 단체 체험학습이라고 하지 않았어? 마음대로 일찍 돌아와도 돼?”그제야 말실수했다는 걸 깨달은 고주율이 입을 꾹 다물었다. 고재형이 노윤슬의 손을 잡으며 수습에 나섰다.“응. 된다고 해서 우리만 먼저 왔어. 너랑 한 약속은 지켜야지.”‘나를 영원히 사랑하겠다던 약속도 했었지. 절대 배신하지 않겠다고도 했고. 약속을 너무 많이 해서 다 잊어버린 거야?’노윤슬이 더는 뭐라 하지 않았다.차 안에 숨 막히는 정적이 감돌던 그때 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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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고재형이 백미러로 점점 작아지는 노윤슬의 모습을 지켜봤다. 마음속에서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며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차 세우고 당장 돌아가.’고재형이 그 목소리를 털어내려 고개를 저었다. 조금 전 임소이가 갑자기 하혈하여 배가 아프다는 전화를 받았다.‘도로변에서 기다리라고 했으니까 별일 없을 거야. 그래. 괜찮을 거야.’불안감을 애써 짓누르려 했지만 가슴에 커다란 바위가 내려앉은 것처럼 답답했다.맞은편에서 트럭이 달려오는 걸 봤을 때 이 시간에 웬 트럭이 이 길로 다니나 의아해하긴 했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액셀을 끝까지 밟으며 병원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질주했다.고재형과 고주율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임소이는 침대에 누워 한가롭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두 사람이 들어오는 걸 보자마자 임소이가 애교를 부렸다.“여보, 나 목말라. 물 좀 줘.”고재형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임소이에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함부로 부르지 마.”말은 그렇게 해도 몸을 일으켜 물을 뜨러 갔다.“물통이 비었어. 간호사 스테이션에 가서 떠 올게.”그러자 고주율이 손을 번쩍 들며 나섰다.“아빠, 아빠는 소이 이모 옆에 있어요. 내가 가서 물 떠 올게요.”고재형이 아이에게 물컵을 건넸다.“그럼 아빠는 의사 선생님한테 가서 상태가 어떤지 좀 물어보고 올게.”그러고는 소파 위에 휴대폰을 툭 던져두고 병실 문을 열었다. 임소이가 뒤에서 외쳤다.“역시 두 사람밖에 없어. 사랑해.”고재형이 병실을 나가자마자 소파에 던져둔 휴대폰이 진동하며 화면이 밝아졌다.임소이가 몸을 일으켜 고재형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운전기사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통화 버튼을 누르자 휴대폰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말씀하신 위치에 사모님이 안 계십니다. 그보다 이쪽에 교통사고가 났는데...”임소이가 운전기사의 말을 잘라버렸다.“못 찾겠으면 관둬요. 재형 오빠가 지금 나랑 같이 있으니까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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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내가 올라가 볼게요. 엄마 요즘 방에만 있잖아요.”고주율이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하지만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뛰어 내려왔다.“방에 없어요.”급히 달려온 도우미 역시 노윤슬이 들어오는 걸 보지 못했다고 했다.고재형이 애써 억눌렀던 불안감이 다시금 커졌다. 본능적으로 노윤슬에게 전화를 걸려고 휴대폰을 꺼냈는데 그제야 휴대폰이 꺼진 걸 발견했다.“당장 찾아.”그가 휴대폰이 켜지기를 기다리며 사람들을 시켜 별장의 모든 방을 샅샅이 뒤지라고 했다.“윤슬아... 노윤슬...”고재형이 몇 번이나 노윤슬의 이름을 불렀다. 마음속의 불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윤슬이를 길가에 혼자 내버려 두고 오는 게 아니었어. 앞도 보지 못하는 사람인데 만에 하나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어떡해?’그가 휴대폰이 켜지는 화면을 뚫어지게 내려다봤다. 고작 몇 초에 불과한 시간이 그에게는 몇 년처럼 길게 느껴졌다.노윤슬에게 수차례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운전기사에게 전화하려던 그때 누군가 갑자기 별장 대문을 두드렸다.고재형의 눈에 화색이 돌았다.“노윤슬...”하지만 문을 열고 보니 밖에 서 있는 건 제복을 입은 두 명의 경찰관이었다.“안녕하세요. 고재형 씨 되십니까? 아내분인 노윤슬 씨가 해안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셨습니다. 남편분께 계속 전화를 드렸는데 휴대폰이 꺼져 있어 이렇게 직접 찾아왔습니다.”고재형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그는 경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고로 미친 듯이 달려가 차에 올라탔다.‘말도 안 돼. 경찰이 뭔가 실수한 게 틀림없어. 윤슬이가 왜 죽어? 그저 길가에서 딱 10분만 기다리라고 했을 뿐인데. 그 10분 사이에...’고재형이 이 끔찍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고주율도 울부짖으며 뒤따라와 뒷좌석에 올라탔다.아이의 울음소리에 신경이 곤두선 고재형이 소리를 빽 질렀다.“조용히 해!”고재형이 신호까지 무시하며 미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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