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us les chapitres de : Chapitre 11 - Chapitre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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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그제야 울음을 그친 윤가연은 웃으며 서해진의 품에 기대었다. 그러나 눈동자 깊은 곳에서는 교활함이 살짝 스쳤다.외부와 본인 스스로에게 새로운 시작을 증명하기 위해 서해진은 윤가연을 데리고 과시하듯 여러 공식 석상에 활발하게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윤가연에게 가장 비싼 보석을 사주고 최고급 경매장에 데려갔으며 윤가연이 식사를 편하게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레스토랑 전체를 전세 냈다...윤가연도 극진히 써포트하며 남들 앞에서는 사랑스럽고 귀엽게 행동하며 서해진에게 모든 걸 맞춰주는 척했다.그러나 이게 겉으로 보여주기 식이라는 것은 서해진만이 알았다. 이 ‘달콤함’ 뒤에 피로감이 날로만 커져 갔다.윤가연의 요구는 점점 더 심각해지며 정도 또한 지나쳤다.그저께는 전용기가 너무 작다며 불평했고 어제는 요트 위의 샴페인이 지정된 연도 제품이 아니라며 떼를 썼으며 오늘은 서해진이 아주 중요한 글로벌 회의를 취소하고 자신과 함께 아이슬란드로 오로라를 보러 가지 않는다고 큰 소리로 울고불고 난리 치며 심지어 물건을 던지기도 했다.그때마다 서해진은 이른바 ‘목숨을 살려준 은혜’를 떠올리며 타협하고 너그럽게 대했다.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짜증이 치밀어 오르며 그와 동시에 허탈함이 눈덩이처럼 점점 더 커져만 갔다.그러다가 문득 지난 5년 동안 강새롬이 그에게 아무런 요구를 한 적이 없었던 것이 생각났다.항상 조용한 강새롬은 서해진이 집에 돌아오면 미지근한 물 한 잔을 건네줬고 회사 일로 밤을 새울 때면 말없이 야식을 준비해 두었다.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마음속이 이상할 정도로 초조해졌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새 3년이 지났다.윤가연에게 씌워졌던 콩깍지는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점점 마모되어 갔다. 그 사이 윤가연도 점차 본색을 드러냈다. 허영심, 엄청난 낭비벽, 그리고 극심한 감정 기복까지 전부 여지없이...윤가연은 서해진 명의의 가족 카드로 전 세계 곳곳에서 미친 듯이 쇼핑을 했다. 옷장에는 한 번만 입거나 심지어 태그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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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서해진은 순간 손가락이 멈칫했다.지난 3년 동안, 강새롬에 대한 소식을 간간이 들었다.해외 최고 디자인 대학원에 진학했다는 소식, 작품들이 작은 규모로 열리는 전시회에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소식, 조용히 귀국하여 자기 스튜디오를 차렸다는 소식...소식 하나하나가 마치 작은 바늘처럼 서해진의 마음을 찌르며 묘한 초조함과 상실감을 안겨주었다.무의식적으로 늘 조용하고 독립성이 강하던 강새롬과 시끄럽게 떠들며 서해진에게만 기대는 윤가연의 모습을 비교하게 되었다.서해진이 공기처럼 여기며 낡은 신발처럼 내다 버렸던 전처가 낯선 곳에서 점점 눈 부신 빛을 발하고 있는 듯했다.그리고 그 빛은 서해진 눈앞에 있는 ‘새로운 삶’을 점점 더 혼란스럽고 초라하게 비췄다.일주일 후, 3년에 한 번 열리는 최고의 비즈니스 자선 만찬이 성대하게 열렸다. 비즈니스 업계의 VIP들이 전부 한자리에 모였다.서해진은 윤가연을 데리고 만찬에 참석했다.윤가연은 시선을 독차지하기 위해 매우 화려하고 디자인이 복잡하며 작은 다이아몬드가 가득 박힌 드레스를 입었다. 화장은 정교했지만 약간 속되 보였고 언행과 태도에는 의도적으로 자랑하면서 늘 애교를 섞어 행동하는 버릇이 드러나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자주 끌었다.그런 윤가연의 모습에 서해진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볼 때마다 피로감이 몰려드는 느낌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연회장 안을 이리저리 둘러봤다.바로 그때 연회장 입구에서 약간의 소란이 일었다.사람들의 시선이 모인 곳에 청아한 모습이 천천히 드러났다.강새롬이었다.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게 디자인된 달빛 같은 흰색 새틴 원피스를 입은 강새롬은 그 어떤 과한 장식도 없이 날씬하고 우아한 몸매를 완벽하게 드러냈다.검고 긴 머리를 느슨하게 올려 묶어 우아하고 하얀 목과 쇄골이 드러났다. 얼굴은 옅은 화장만 했지만 안색이 매우 좋아 보였고 차분한 눈빛에는 자신감이 차 있었다. 몸 전체에서 절제된 듯하면서도 눈에 띄는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강새롬은 국제 환경 재단의 아트 컨설턴트 겸 협력 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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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서 대표님’이라는 한 마디가 순식간에 두 사람의 거리를 한없이 멀어지게 만들었다.강새롬은 곁에 있던 몇몇 남자들에게 미안한 듯 살짝 웃으며 말했다.“잠시 자리 좀 비우겠습니다.”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그들은 약간 탐색하는 시선과 가벼운 비웃음이 섞인 눈빛으로 서해진을 바라봤다.완전히 낯선 사람 대하는 듯한 강새롬의 태도에 서해진은 순간 화가 치솟았다. 뭐라 더 말을 하려는 찰나 연회장 안의 냉방이 너무 세게 튼 탓에 강새롬이 무의식적으로 팔을 살짝 비볐다.옆에 있던 IT 회사의 젊은 대표가 즉시 알아채고 아주 자연스럽게 팔뚝에 걸쳐 두었던 정장 재킷을 강새롬의 어깨에 걸쳐 주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세요.”잠시 멈칫한 강새롬은 활짝 웃으며 조용히 말했다.“고맙습니다.”자연스러운 두 사람의 대화와 부드럽고 다정한 남자의 시선은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서해진의 심장을 깊숙이 찔렀다.통제할 수 없는 분노와 질투가 순간적으로 서해진의 이성을 삼켜 버렸다. 주먹을 어찌나 꽉 쥐었는지 손등에 핏발까지 섰다. 이 자리에서 상대방에게 주먹을 날리는 무례한 행동까지 할 뻔했다.그날 밤 이후로 서해진은 마음속 불안감이 점점 더 커져만 갔다.강새롬의 냉정하면서도 낯선 사람 대하는 듯한 얼굴, 더 이상 서해진에게만 머물러 있지 않는 그 눈빛, 그리고 그 남자가 강새롬의 어깨에 재킷을 걸쳐 주던 장면이 저주처럼 머릿속에서 반복적으로 재생되었다.완전히 서해진을 무시하는 강새롬의 표정과 더는 서해진 따위 안중에도 두지 않는 그런 태도를 견딜 수 없었다.강한 불만과 본인조차 이해할 수 없는 일종의 소유욕이 발동해 강새롬에게 다가가기 위한 여러 가지 핑계를 찾기 시작했다.막대한 규모의 브랜드 협력 프로젝트를 미끼로 삼아 강새롬의 스튜디오가 직접 책임지고 강새롬 본인이 전반 과정에 반드시 참여하도록 요구했다.프로젝트 스타트업 미팅에 직접 참석해 메인 자리에 앉은 서해진은 시선이 한 번도 강새롬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프로패셔널한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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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매우 흐릿한 조각처럼 흩어진 퍼즐 같은 기억 속, 하나의 장면이 아무런 예고 없이 서해진의 뇌리를 스쳤다.눈부신 자동차 불빛, 극심한 고통, 한 줄기 흐릿하고 애타는 듯한 울먹이는 여자의 목소리가 서해진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따뜻하면서도 떨리는 두 손으로 서해진의 상처를 힘껏 누르고 있었다.그 목소리... 그 느낌... 윤가연의 평소 애교 섞인 음성과는 완전히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이 생각이 뇌리에 스친 순간 스스로도 멍해졌다.‘왜 갑자기 그 장면이 떠오른 걸까?’옆에 있던 윤가연은 멍해진 채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는 서해진의 상태를 민감하게 알아챘다. 그러더니 마치 뭔가 약점이라도 잡은 듯 더욱 처절하게 날카로운 목소리로 울부짖었다.“내가 그때 어쨌는데! 네가 말해 봐! 너 혹시 내가 그때 너를 구한 게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면 진작부터 나 버리고 싶었던 거야? 서해진, 너 진짜 양심도 없어!”윤가연의 소란 때문에 머리가 터질 듯 지끈거린 서해진은 조금 전 머릿속을 스친 의심도 그녀의 울부짖음에 순식간에 묻혀버렸다. 짜증 가득한 얼굴로 손을 흔들며 경호원들에게 윤가연을 일단 강제로 데려가라고 했다.그러나 의심의 씨앗이 한 번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 조용히 뿌리를 내리고 싹이 트는 법...그날 망설임과 함께 머릿속에 그런 생각들이 스친 이후 서해진은 모든 것을 바꿔버린 교통사고의 세부 사항들을 저도 모르게 회상하기 시작했다.생각하면 할수록 윤가연의 과거 설명이 뭔가 모호하고 불합리한 점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했다.항상 본인이 목숨을 걸고 서해진을 구했으며 앰뷸런스가 올 때까지 계속 곁에서 지켰다고 강조했지만 구체적인 세부 사항은 분명히 말하지 않았다. 물을 때마다 울고 떼를 쓰거나 너무 무서워서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식으로 얼버무렸다.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점점 더 강하게 들었다.마침내 더 이상 생각하는 걸로는 끝낼 수 없어 행동에 옮기기로 했다.깊은 밤 가장 신뢰하는 경호원을 불러 엄숙한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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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하나의 끔찍하고도 놀라운 ‘어쩌면...’이라는 생각이 몸속에 독이 핀 것처럼 서해진의 생각까지 점령했다.심장은 미친 듯이 뛰면서 피마저 거꾸로 치솟는 듯했다.마음속에서는 거센 파도가 일었지만 겉으로는 최대한 평온을 유지했다.증거가 아직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강새롬 스튜디오와의 협력 프로젝트는 계속되고 있었다.어느 날, 제품 콘셉트에 대한 깊이 있는 토론 회의에서 강새롬은 새로운 디자인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동양 고전 미학이 지닌 ‘여백’과 ‘호흡’의 가치를 현대 기술 제품 디자인에 녹여내어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는 비즈니스 전문가들에게 심리적 안정감과 여유를 선사하자는 것이었다.명확하고 심오한 설명과 빈틈없는 논리, 메인 주제와 사용자 심리에 대한 통찰력에 크게 공감한 서해진은 꽤 큰 충격을 받았다.이것은 마치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항상 희미하게 인정하고 있었지만 한 번도 표현할 기회가 없었던 생각과 같았다.프로젝터 앞에 서서 자신감 있고 여유롭게 디자인 스케치를 그려나가는 강새롬의 모습은 지혜와 영감이 온몸에서 빛나고 있는 듯했다. 너무 눈부셔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그 순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탄과... 강한 질투가 동시에 밀려왔다.강새롬과 정상적으로 대화하는 남자 팀원들이 부러웠다. 강새롬이 프로패셔널한 태도로 남자 팀원들을 대할 때마다 눈에서 질투가 불타올랐다.그 남자 팀원들이 강새롬의 반짝이는 모습을 마음껏 볼 수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한편 서해진은 강새롬의 세상에서 완전히 차단된 듯했다.그런데 몰래 회사에 와서 서해진과 함께 점심을 먹으려던 윤가연이 회의실 유리 벽 너머로 이 장면을 목격했다.서해진이 복잡한 눈빛으로 강새롬을 집중해 응시하자 순간적으로 위기감이 몰려왔다.극도의 질투와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윤가연의 이성을 앗아갔다.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승부수를 던지기로 결심했다. ‘유서’를 위조하고 자살을 가장하여 가장 극단적인 방법으로 서해진에게 당장 자신과 결혼하라고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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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서해진은 이제야 그때의 모든 일들을 알게 되었다.본인이 끝까지 곁을 지켰다는 윤가연의 말, 목숨을 살려준 은혜 따위는 없었다. 실제 서해진을 살린 건 강새롬의 필사적인 몸부림과 피 묻은 두 손뿐이었다. 윤가연은 그저 뻔뻔하게 강새롬의 공을 가로챘을 뿐이었다.그동안 윤가연이라면 뭐든 걸 양보하고 너그럽게 봐줬던 행동, ‘목숨을 살려준 은혜’에 기반한 죄책감과 책임감은 그저 우습기 짝이 없는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진정한 은인에게 서해진은 어떤 짓을 했을까?강새롬이 윤가연을 조사한다는 걸 알고 교통사고를 조작해 경고했다.경찰서에서 윤가연이 강새롬을 모욕하도록 내버려 뒀고 꺼지라고까지 했다.팥떡을 먹고 싶다는 윤가연의 한마디에 강새롬을 수술대에서 끌어내려 냉동창고에 가두었다.윤가연이 바늘과 고춧물로 강새롬의 등에 ‘그림’을 그리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았다.유리 조각으로 가득한 수영장에 뛰어들라고 강요했다.강새롬 부모님의 회사로 협박까지 했다...그때 했던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장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서해진의 머릿속을 미친 듯이 휘저었다.모든 장면 하나하나가 강새롬의 피와 눈물이 물들어 있었고 서해진의 어리석음과 잔혹함이 새겨져 있었다.‘왜! 왜 그때 자세히 조사하지 않았을까? 왜 윤가연의 허점투성이 변명을 쉽게 믿었을까? 왜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유순해 보이고 심지어 약간 재미없기까지 했던 정략결혼 아내에게 그렇게 용감하고 단호한 면모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엄청난 후회와 자기혐오가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서해진을 완전히 삼켜버렸다.여기까지 생각한 서해진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침대 위에서 아직 의식 없는 척하는 윤가연을 바라보았다. 눈빛이 차가워지더니 점점 분노가 이글거렸다. 그동안 속은 것만 생각하면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윤.가.연!”이를 악문 채 치아 사이로 윤가연의 이름을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었다.윤가연은 옆에서 자는 척하고 있었지만 서해진이 블랙박스 영상을 보는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살기 어린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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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엄청난 고통과 후회가 마치 수많은 개미처럼 순식간에 서해진의 심장을 파먹는 것 같았다. 너무나 아파서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문밖으로 급하게 뛰쳐나갔다. 지금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강새롬을 찾아야 해!’강새롬의 스튜디오 앞, 서해진이 새 아파트 문 앞을 지키고 섰다.늘 도도하고 높은 곳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추호의 흐트러짐이 없던 비즈니스 제왕이 지금은 수염이 덥수룩한 채 구겨진 양복을 걸치고 있었다. 눈 주위가 움푹 패인 채 충혈된 두 눈으로 사무실과 아파트의 모든 출입구를 예리하게 응시하고 있었다.마침내 단아한 강새롬의 모습이 나타났을 때 서해진은 심장이 가슴을 뚫고 나올 듯 쿵쾅쿵쾅 뛰었다.비틀거리며 강새롬 앞으로 달려가 막아섰다. 고열과 조급함에 목소리가 잔뜩 쉬어 부서질 듯 새어 나왔다.“새롬아... 강새롬! 미안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나 이제야 다 알았어...”두서없이 말하며 강새롬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강새롬은 아주 단호하게 피해버렸다.“지금 이런 말 하기에는 너무 늦은 거 알아... 내가 너무 우스워... 내가 멍청했어! 내가 눈이 멀었어! 윤가연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그 여자 때문에 너를 저버렸어... 나를 구한 사람은 너인데 나는...”조용히 듣고 있는 강새롬은 얼굴에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마치 자신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를 듣는 듯했다.말을 마친 서해진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애원하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강새롬은 그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차가운 연못처럼 평온했다.“서해진.”서해진의 풀네임을 부르며 거리를 두는 듯하면서도 예의 바른 태도를 보였다.“어떻게 된 일인지 들었어. 알려줘서 고마워. 나도 덕분에 몇 가지 궁금증이 풀렸어.”잠시 멈칫한 강새롬은 눈빛에 그 어떤 원한이나 원망도 없었다. 오직 완전히 체념한 듯한 모습과... 약간의 연민만 보였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어.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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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강새롬에게 중요한 좋은 소식이 있을 때마다 서해진의 서재에 있는 술장이 열리곤 했다.서해진은 그 누구도 곁에 두지 않았다. 그저 어둠 속에 홀로 앉아 커다란 통유리창 너머로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며 가장 독한 술을 잔에 따라 마셨다.화면 속 강새롬이 시상식에서 자신감 있고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 모습을 보며 낮은 소리로 오래간만에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웃다가 저도 모르게 예고 없이 눈물을 흘리는 날도 많았다. 위스키의 톡 쏘는 매운맛이 목구멍과 심장을 태웠다.그것은 극도로 복잡한 감정이었다. 진심으로 느끼는 자부심, 뼈에 사무친 후회, 되돌릴 수 없는 상실감이 섞여 결국 끝없이 펼쳐진 차갑고 외로운 적막으로 변했다.마치 입 밖에 낼 수 없는 비밀을 지키듯 은밀히 자신의 수완을 발휘하여 강새롬의 앞길에 있는 모든 잠재적인 가시밭길을 헤쳐 나갔다.주제도 모르는 경쟁사가 겨우 일어서기 시작한 강새롬의 스튜디오를 비열한 수단으로 짓밟으려 하면 다음 날 그 회사는 어느 순간 심각한 컴플라이언스 조사에 휘말리게 되었다.중요한 국제 전시회 명단이 몰래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면 곧 주최 측은 거부할 수 없는 압박을 받고 그 이름을 바로잡았다.심지어 강새롬 팀 핵심 멤버의 가족이 의료 난관에 부딪히면 세계 최고의 전문가가 ‘우연히’ 협진 일정을 맞추었다... 이 모든 것이 너무 완벽하게 처리되어 절대 서해진까지 연루되는 일은 없었다.서해진도 더는 강새롬이 고마워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강새롬이 알까 봐 두려워했다. 그저 이런 방식으로 자신이 계속 존재할 이유와 비참하게 속죄할 핑계를 찾고 있을 뿐이었다.시간은 그렇게 빠른 속도로 흘러갔다. 1년, 2년...어느 날, 더 자세한 보고서 하나가 서해진의 책상 위에 놓였다.강새롬의 또 다른 업적 외에도 몰래 찍은 사진 한 장이 첨부되어 있었다.사진 속에서 강새롬은 한 남자와 함께 예술 서점에 나란히 서 있었다. 온화한 기품을 내뿜는 남자에게는 특유의 유머러스함도 느껴졌다. 같은 책을 내려다보며 나란히 서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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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3년의 세월은 많은 것들을 정리하기에 충분했다.강새롬이라는 이름은 이미 디자인계에서 명성 높은, 존경받는 하나의 거목이 되었다.스튜디오 규모는 그때보다 두 배 이상 커졌고 동양 미학과 현대 마인드를 융합한 작품들은 국제 최고 전시장에 잇달아 등장하며 상을 휩쓸었다.강새롬은 더 이상 누구의 부속물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었다. 바로 디자이너 강새롬.하루하루 알차고 평온한 삶을 보냈다.재혼을 함으로써 서둘러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자기 손으로 스스로의 삶을 온전히 통제하는 흐름을 즐기고 있었다.주유찬과의 관계는 안정적이고 편안했다. 서로 비즈니스적으로는 찰떡궁합인 파트너이면서도 일상에서는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진정한 벗이었다. 주유찬의 존중과 이해, 다급해하지 않은 동행은 강새롬에게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평화로움과 안정감을 선사했다.더 나아갈 것인지에 대해서도 강새롬은 조급해하지 않고 지금의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연결고리가 있는 상태를 즐겼다.눈빛은 밝고 매사에 단호했으며 과거의 상처는 시간의 치유 덕에 내면의 단단한 힘과 여유로움으로 바뀌었다. 강새롬의 온몸에서 부드럽고도 눈 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온 세상의 주목을 받는 어느 날 밤, 러틴국.‘디자인계의 오스카’라 불리는 글로벌 연간 디자인 대상 시상식이 열리고 있었다.올해의 베스트 디자이너 최대 유력 후보자인 강새롬은 자신이 디자인한 수묵 산수화에서 영감을 얻은 연회색 롱드레스를 입고 여유롭게 시상식장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카메라의 플래시 세례가 강새롬을 향해 터져 나왔다. 강새롬의 미소와 표정 하나하나에 자신감과 매력이 가득 차 있었다.한편 지구 반대편, 아프리카 대륙의 어느 외딴 마을.가물고 척박한 이곳, 유일한 생기는 얼마 전에 세워진 희망소학교의 펄럭이는 깃발뿐이었다.해가 저물었지만 기온은 여전히 뜨거웠다.심플하지만 깔끔한 사무실, 서해진은 조금 전 재단의 엔지니어들과 새로운 물 자원 탐사 프로젝트에 관한 화상 회의를 마친 참이었다.간단한 흰색 면 셔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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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서해진은 머릿속으로 강새롬이 조명 아래 서서 트로피를 받아 들고 자신감 넘치고 활짝 웃는 모습을 상상했다.그것은 원래 강새롬에게 속해 있어야 할 영광이었다. 그런데 서해진으로 인해 너무나 오랫동안 늦어버렸다.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앞에 스치는 것은 금방 결혼했을 때 서해진을 바라보는 눈빛에 두려움과 기대가 담겨 있던 강새롬의 눈빛이었다. 그리고 별장에서 조용히 저녁 식사를 준비하던 뒷모습, 경찰서에서 절망적으로 흘리던 눈물...마지막으로 서해진을 바라보았을 때 차갑게 얼어붙어 더 이상 그 어떤 감정도 없었던 눈동자까지...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아무런 예고 없이 서해진의 눈가에서 흘러내려 옷깃으로 스며들며 순식간에 사라졌다.다시 눈을 떴을 때 눈동자 속에 있던 격렬한 감정의 파문은 이미 가라앉아 있었다. 그 자리에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듯한 먼 곳에 보내는 마음속 축복과 완전한 체념만이 남아 있었다.서해진은 드디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었다. 강새롬이 마침내 행복을 찾았지만 그 행복이 서해진과는 상관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손을 들어 라디오를 껐다. 잡음이 깔끔하게 멈추고 방 안에는 아프리카의 밤에서만 들을 수 있는 곤충 울음소리만이 울려 퍼졌다.손에 있는 의료 지원기지 건설에 관한 서류를 집어 들고 테이블 램프를 켠 뒤 한껏 집중해서 읽기 시작했다.노란빛이 서해진의 뒷모습을 길게 늘어뜨려 거친 흙벽에 그림자가 비쳤다. 외로워 보였지만 더 이상 몸부림치지는 않았다....또다시 3년이 흘렀다. 햇살이 따사로운 어느 날 오후, 패스턴.강새롬의 스튜디오는 패스턴 센강의 예술적 분위기가 가득한 거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햇살이 커다란 통유리창을 뚫고 쏟아져 들어와 막바지 수정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거대한 디자인 모형 위를 비췄다. 유려한 모형은 동양 특유의 미와 미래 기술이 감각적으로 융합되어 있었다. 이것은 강새롬이 곧 공개할 또 하나의 작품이었다.깔끔한 흰색 정장 투피스를 입은 강새롬은 긴 머리를 위로 올려 묶어 매끈한 이마와 우아한 목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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