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화창한 패스턴과는 정반대로 스윈의 한적하고 고급스러운 요양지는 일 년 내내 맑고 쌀쌀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서해진은 호숫가에 있는 한 채의 별장에 머물고 있었다. 환경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지만 텅 빈 듯한 공간이 왠지 모르게 숨이 막혔다.아프리카를 떠난 후 이곳에서 ‘조용히’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남들은 서해진이 업적을 이뤘으니 이제 물러나 삶을 즐기는 줄로 알고 있었다.하지만 실제 이것은 서해진에게 기한 없는 유배와 같았다.비정상적으로 말을 하지 않으면서 점점 무뚝뚝해졌다. 종종 온종일 말을 몇 마디 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관자놀이에 흰 머리카락이 더 많이 자랐고 눈가에는 풀리지 않는 침묵과 피로가 깃들어 있었다.호숫가에 몇 시간씩 앉아 멍하니 차가운 호숫물만 바라봤다. 텅 빈 듯한 눈빛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손에는 항상 재무 잡지 한 권이 놓여 있었다. 표지에는 가끔 강새롬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사진 속 강새롬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사진을 반복해서 들여다보며 손가락으로 무의식적으로 사진 속 강새롬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심장은 마치 둔기에 반복해서 맞은 듯 답답할 정도로 아파서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후회는 마치 뼛속에 깊이 박힌 악성 종양처럼 밤낮으로 그를 갉아먹었다.속으로 수없이 되뇌었다. 만약 그때 단 한 번이라도 강새롬을 보았더라면, 만약 조금만 더 일찍 진실을 알았더라면 만약... 안타깝게도 인생에 ‘만약’이란 없었다.하늘을 찌를 듯한 부와 최고의 권력을 손에 쥐고 있었지만 실제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했고 목숨까지 걸며 그를 구해줬던 여자를 잃어버렸다.반면 강새롬에게 준 것은 끝없는 상처와 모욕뿐이었다.이런 자각이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악몽이 되어버렸다.비서가 가끔 강새롬에 관한 소식을 전해주곤 했다. 그녀가 점점 더 잘살고 있다는 것, 곁에 적절한 사람이 생겼다는 것...강새롬을 위해 기뻐해야 했다. 그러나 강새롬이 정말로 행복하며 그
서해진은 머릿속으로 강새롬이 조명 아래 서서 트로피를 받아 들고 자신감 넘치고 활짝 웃는 모습을 상상했다.그것은 원래 강새롬에게 속해 있어야 할 영광이었다. 그런데 서해진으로 인해 너무나 오랫동안 늦어버렸다.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앞에 스치는 것은 금방 결혼했을 때 서해진을 바라보는 눈빛에 두려움과 기대가 담겨 있던 강새롬의 눈빛이었다. 그리고 별장에서 조용히 저녁 식사를 준비하던 뒷모습, 경찰서에서 절망적으로 흘리던 눈물...마지막으로 서해진을 바라보았을 때 차갑게 얼어붙어 더 이상 그 어떤 감정도 없었던 눈동자까지...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아무런 예고 없이 서해진의 눈가에서 흘러내려 옷깃으로 스며들며 순식간에 사라졌다.다시 눈을 떴을 때 눈동자 속에 있던 격렬한 감정의 파문은 이미 가라앉아 있었다. 그 자리에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듯한 먼 곳에 보내는 마음속 축복과 완전한 체념만이 남아 있었다.서해진은 드디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었다. 강새롬이 마침내 행복을 찾았지만 그 행복이 서해진과는 상관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손을 들어 라디오를 껐다. 잡음이 깔끔하게 멈추고 방 안에는 아프리카의 밤에서만 들을 수 있는 곤충 울음소리만이 울려 퍼졌다.손에 있는 의료 지원기지 건설에 관한 서류를 집어 들고 테이블 램프를 켠 뒤 한껏 집중해서 읽기 시작했다.노란빛이 서해진의 뒷모습을 길게 늘어뜨려 거친 흙벽에 그림자가 비쳤다. 외로워 보였지만 더 이상 몸부림치지는 않았다....또다시 3년이 흘렀다. 햇살이 따사로운 어느 날 오후, 패스턴.강새롬의 스튜디오는 패스턴 센강의 예술적 분위기가 가득한 거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햇살이 커다란 통유리창을 뚫고 쏟아져 들어와 막바지 수정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거대한 디자인 모형 위를 비췄다. 유려한 모형은 동양 특유의 미와 미래 기술이 감각적으로 융합되어 있었다. 이것은 강새롬이 곧 공개할 또 하나의 작품이었다.깔끔한 흰색 정장 투피스를 입은 강새롬은 긴 머리를 위로 올려 묶어 매끈한 이마와 우아한 목선이
3년의 세월은 많은 것들을 정리하기에 충분했다.강새롬이라는 이름은 이미 디자인계에서 명성 높은, 존경받는 하나의 거목이 되었다.스튜디오 규모는 그때보다 두 배 이상 커졌고 동양 미학과 현대 마인드를 융합한 작품들은 국제 최고 전시장에 잇달아 등장하며 상을 휩쓸었다.강새롬은 더 이상 누구의 부속물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었다. 바로 디자이너 강새롬.하루하루 알차고 평온한 삶을 보냈다.재혼을 함으로써 서둘러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자기 손으로 스스로의 삶을 온전히 통제하는 흐름을 즐기고 있었다.주유찬과의 관계는 안정적이고 편안했다. 서로 비즈니스적으로는 찰떡궁합인 파트너이면서도 일상에서는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진정한 벗이었다. 주유찬의 존중과 이해, 다급해하지 않은 동행은 강새롬에게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평화로움과 안정감을 선사했다.더 나아갈 것인지에 대해서도 강새롬은 조급해하지 않고 지금의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연결고리가 있는 상태를 즐겼다.눈빛은 밝고 매사에 단호했으며 과거의 상처는 시간의 치유 덕에 내면의 단단한 힘과 여유로움으로 바뀌었다. 강새롬의 온몸에서 부드럽고도 눈 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온 세상의 주목을 받는 어느 날 밤, 러틴국.‘디자인계의 오스카’라 불리는 글로벌 연간 디자인 대상 시상식이 열리고 있었다.올해의 베스트 디자이너 최대 유력 후보자인 강새롬은 자신이 디자인한 수묵 산수화에서 영감을 얻은 연회색 롱드레스를 입고 여유롭게 시상식장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카메라의 플래시 세례가 강새롬을 향해 터져 나왔다. 강새롬의 미소와 표정 하나하나에 자신감과 매력이 가득 차 있었다.한편 지구 반대편, 아프리카 대륙의 어느 외딴 마을.가물고 척박한 이곳, 유일한 생기는 얼마 전에 세워진 희망소학교의 펄럭이는 깃발뿐이었다.해가 저물었지만 기온은 여전히 뜨거웠다.심플하지만 깔끔한 사무실, 서해진은 조금 전 재단의 엔지니어들과 새로운 물 자원 탐사 프로젝트에 관한 화상 회의를 마친 참이었다.간단한 흰색 면 셔츠를
강새롬에게 중요한 좋은 소식이 있을 때마다 서해진의 서재에 있는 술장이 열리곤 했다.서해진은 그 누구도 곁에 두지 않았다. 그저 어둠 속에 홀로 앉아 커다란 통유리창 너머로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며 가장 독한 술을 잔에 따라 마셨다.화면 속 강새롬이 시상식에서 자신감 있고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 모습을 보며 낮은 소리로 오래간만에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웃다가 저도 모르게 예고 없이 눈물을 흘리는 날도 많았다. 위스키의 톡 쏘는 매운맛이 목구멍과 심장을 태웠다.그것은 극도로 복잡한 감정이었다. 진심으로 느끼는 자부심, 뼈에 사무친 후회, 되돌릴 수 없는 상실감이 섞여 결국 끝없이 펼쳐진 차갑고 외로운 적막으로 변했다.마치 입 밖에 낼 수 없는 비밀을 지키듯 은밀히 자신의 수완을 발휘하여 강새롬의 앞길에 있는 모든 잠재적인 가시밭길을 헤쳐 나갔다.주제도 모르는 경쟁사가 겨우 일어서기 시작한 강새롬의 스튜디오를 비열한 수단으로 짓밟으려 하면 다음 날 그 회사는 어느 순간 심각한 컴플라이언스 조사에 휘말리게 되었다.중요한 국제 전시회 명단이 몰래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면 곧 주최 측은 거부할 수 없는 압박을 받고 그 이름을 바로잡았다.심지어 강새롬 팀 핵심 멤버의 가족이 의료 난관에 부딪히면 세계 최고의 전문가가 ‘우연히’ 협진 일정을 맞추었다... 이 모든 것이 너무 완벽하게 처리되어 절대 서해진까지 연루되는 일은 없었다.서해진도 더는 강새롬이 고마워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강새롬이 알까 봐 두려워했다. 그저 이런 방식으로 자신이 계속 존재할 이유와 비참하게 속죄할 핑계를 찾고 있을 뿐이었다.시간은 그렇게 빠른 속도로 흘러갔다. 1년, 2년...어느 날, 더 자세한 보고서 하나가 서해진의 책상 위에 놓였다.강새롬의 또 다른 업적 외에도 몰래 찍은 사진 한 장이 첨부되어 있었다.사진 속에서 강새롬은 한 남자와 함께 예술 서점에 나란히 서 있었다. 온화한 기품을 내뿜는 남자에게는 특유의 유머러스함도 느껴졌다. 같은 책을 내려다보며 나란히 서 있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엄청난 고통과 후회가 마치 수많은 개미처럼 순식간에 서해진의 심장을 파먹는 것 같았다. 너무나 아파서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문밖으로 급하게 뛰쳐나갔다. 지금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강새롬을 찾아야 해!’강새롬의 스튜디오 앞, 서해진이 새 아파트 문 앞을 지키고 섰다.늘 도도하고 높은 곳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추호의 흐트러짐이 없던 비즈니스 제왕이 지금은 수염이 덥수룩한 채 구겨진 양복을 걸치고 있었다. 눈 주위가 움푹 패인 채 충혈된 두 눈으로 사무실과 아파트의 모든 출입구를 예리하게 응시하고 있었다.마침내 단아한 강새롬의 모습이 나타났을 때 서해진은 심장이 가슴을 뚫고 나올 듯 쿵쾅쿵쾅 뛰었다.비틀거리며 강새롬 앞으로 달려가 막아섰다. 고열과 조급함에 목소리가 잔뜩 쉬어 부서질 듯 새어 나왔다.“새롬아... 강새롬! 미안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나 이제야 다 알았어...”두서없이 말하며 강새롬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강새롬은 아주 단호하게 피해버렸다.“지금 이런 말 하기에는 너무 늦은 거 알아... 내가 너무 우스워... 내가 멍청했어! 내가 눈이 멀었어! 윤가연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그 여자 때문에 너를 저버렸어... 나를 구한 사람은 너인데 나는...”조용히 듣고 있는 강새롬은 얼굴에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마치 자신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를 듣는 듯했다.말을 마친 서해진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애원하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강새롬은 그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차가운 연못처럼 평온했다.“서해진.”서해진의 풀네임을 부르며 거리를 두는 듯하면서도 예의 바른 태도를 보였다.“어떻게 된 일인지 들었어. 알려줘서 고마워. 나도 덕분에 몇 가지 궁금증이 풀렸어.”잠시 멈칫한 강새롬은 눈빛에 그 어떤 원한이나 원망도 없었다. 오직 완전히 체념한 듯한 모습과... 약간의 연민만 보였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어. 우리
서해진은 이제야 그때의 모든 일들을 알게 되었다.본인이 끝까지 곁을 지켰다는 윤가연의 말, 목숨을 살려준 은혜 따위는 없었다. 실제 서해진을 살린 건 강새롬의 필사적인 몸부림과 피 묻은 두 손뿐이었다. 윤가연은 그저 뻔뻔하게 강새롬의 공을 가로챘을 뿐이었다.그동안 윤가연이라면 뭐든 걸 양보하고 너그럽게 봐줬던 행동, ‘목숨을 살려준 은혜’에 기반한 죄책감과 책임감은 그저 우습기 짝이 없는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진정한 은인에게 서해진은 어떤 짓을 했을까?강새롬이 윤가연을 조사한다는 걸 알고 교통사고를 조작해 경고했다.경찰서에서 윤가연이 강새롬을 모욕하도록 내버려 뒀고 꺼지라고까지 했다.팥떡을 먹고 싶다는 윤가연의 한마디에 강새롬을 수술대에서 끌어내려 냉동창고에 가두었다.윤가연이 바늘과 고춧물로 강새롬의 등에 ‘그림’을 그리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았다.유리 조각으로 가득한 수영장에 뛰어들라고 강요했다.강새롬 부모님의 회사로 협박까지 했다...그때 했던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장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서해진의 머릿속을 미친 듯이 휘저었다.모든 장면 하나하나가 강새롬의 피와 눈물이 물들어 있었고 서해진의 어리석음과 잔혹함이 새겨져 있었다.‘왜! 왜 그때 자세히 조사하지 않았을까? 왜 윤가연의 허점투성이 변명을 쉽게 믿었을까? 왜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유순해 보이고 심지어 약간 재미없기까지 했던 정략결혼 아내에게 그렇게 용감하고 단호한 면모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엄청난 후회와 자기혐오가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서해진을 완전히 삼켜버렸다.여기까지 생각한 서해진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침대 위에서 아직 의식 없는 척하는 윤가연을 바라보았다. 눈빛이 차가워지더니 점점 분노가 이글거렸다. 그동안 속은 것만 생각하면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윤.가.연!”이를 악문 채 치아 사이로 윤가연의 이름을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었다.윤가연은 옆에서 자는 척하고 있었지만 서해진이 블랙박스 영상을 보는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살기 어린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