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화려한 빌딩 숲과 저택을 뒤로하고 내려온 남쪽의 작은 바닷가 마을.은주가 어린 시절 자랐던 보육원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마을 언덕 끝자락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었다.오래된 2층 콘크리트 건물의 겉벽은 매서운 해풍에 깎여 옅은 페인트칠이 여기저기 벗겨져 있었다.하지만 마당으로 불어오는 바람에서는 비릿하면서도 상쾌한 바다 냄새와 푸근한 흙향이 섞여 밀려들었다.그녀가 마지막 2년을 보냈던 최종우의 숨막히는 대저택과는 다르게 사람 냄새 나는 공기였다.은주는 손에 자그마한 옷가방 하나만을 들고 보육원 정문을 걸어 들어왔다.그녀를 맞이해 준 것은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 옷이나 화려한 보석 상자가 아니었다.마당에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뛰어놀던 아이들의 자지러지는 웃음소리와, 구둣발 소리 대신 공기를 채우는 고소한 된장찌개 냄새였다.은주는 아무런 신분 위장도, 위조된 이름도 쓰지 않았다.자신을 묶어두었던 대기업 사장의 안주인이라는 사모님 타이틀도, 최종우가 만들어준 화려한 가면도 모두 서울의 저택에 미련 없이 내던져두고 왔다.오롯이 '노은주'라는 제 진짜 이름 세 글자로 보육원 보조 교사 일을 시작했다."은주 선생님, 아이들 저녁 먹기 전에 손 씻는 것 좀 도와주세요.""네, 원장님. 지금 가요."은주는 헐렁한 슬랙스에 물감이 묻은 앞치마 차림으로 아이들의 삐뚤빼뚤한 글짓기를 도와주고, 마당의 낙엽을 쓸어내렸다.아침 일찍 일어나 걸레로 마룻바닥을 문질러 닦고, 아이들의 작아진 옷가지를 바느질해 주었다.아이들과 대충 둘러앉아 뜨거운 국물을 삼키는 것만으로도 가슴 안쪽이 따뜻해졌다.조그만 아이의 손을 잡고 동네 어귀를 한 바퀴 돌 때면, 지난 2년 동안 저택의 화려한 감옥 안에서 느꼈던 지옥 같은 압박감이 거짓말처럼 옅어졌다.하지만 소박한 일상으로 돌아왔다고 해서 몸에 새겨진 흔적까지 완전히 지워진 것은 아니었다.아이들을 안아 올려 옮기거나, 허리를 숙여 빨래 대야를 들어 올릴 때면 아랫배 깊은 곳에서 뻐근하고 알싸한 통증이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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