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당신이 없는 세상 참 좋다: Chapter 11 - Chapter 20

24 Chapters

제11화

직원은 문우빈을 힐끗 보고는 정중하게 거절했다.“죄송합니다, 고객님. 승객 정보는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제 아내입니다!” 문우빈은 눈이 붉어진 채 소리쳤다. “아내와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급한 일이 있으시면 본인께 직접 연락해 보시는 수밖에 없습니다.”“전화를 껐다고요!”“그렇다면 죄송하지만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문우빈은 사람들이 오가는 공항 한가운데 서서 처음으로 거대한 막막함을 느꼈다.마치 방향을 잃은 사람처럼 대합실을 몇 바퀴나 돌았다. 전광판에는 세계 여러 도시로 향하는 항공편이 계속 바뀌어 올라왔다.고가은이 어디로 갔는지 몰랐기에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도 몰랐다.결국 문우빈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고가은이 없는 집은 마치 얼음창고처럼 차갑게 느껴졌다.예전에는 문우빈이 아무리 늦게 들어와도 거실 어딘가에는 그를 위한 불빛이 남아 있었다.이제는 캄캄했다.그가 불을 켜자 창백한 조명이 텅 빈 집을 더 공허하게 비췄다.문우빈은 술장 앞으로 가서 독한 술 한 병을 열고 병째 들이켰다.알코올이 목구멍을 태웠지만, 마음속의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마시던 도중 그는 욕실로 뛰어가 토했다.바닥에 무릎을 꿇고 속이 뒤집히도록 토했다.고개를 들자 거울 속 자신이 보였다. 눈은 붉게 충혈되었고 턱수염은 지저분했다. 마치 버려진 개처럼 초라한 모습이었다.그는 왼손 약지에 남은 희미한 반지 자국을 내려다보았다.반지를 빼 던지려고 했지만 막상 그러려고 하니 손가락이 굳어졌다. 결국 차마 놓지 못하고 손 안에 꽉 쥐었다. 금속이 살을 누르면서 아팠다.핸드폰이 울렸다.진채원이었다.[오빠, 나 혼자 집에 있으니까 너무 무서워... 오늘 밤 와서 같이 있어 주면 안 돼?]문우빈은 전화기에 대고 소리쳤다.“꺼져! 다 꺼지라고!”핸드폰을 던져 부숴버린 뒤, 술병마저 깨뜨리고는 거실에 있는 부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부숴버렸다.결국 잔뜩 어질러진 잔해 속에 주저앉은 채 벽에 걸린 웨딩 사진을 올려다보았다.사진 속 고가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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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그 말은 날카로운 칼처럼 문우빈의 흐릿한 속내를 정확히 찔렀다.문우빈은 그 자리에서 굳은 채 안색이 조금씩 창백해졌다.정하린은 그런 문우빈을 바라보다가, 문득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가은이가 떠나기 전에 저한테 말했어요.” 정하린은 목소리를 낮췄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가 잔인할 만큼 정확했다. “문 대표가 찾아오면 전해 달래요. 마음이 죽은 것보다 더 큰 슬픔도 없다고요. 이제 문 대표에게는 미워할 힘조차 남지 않았다고요.”문우빈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비틀거리다 차가운 벽에 등을 부딪쳤다.마음이 죽은 것보다 더 큰 슬픔도 없다는 건 미워할 힘조차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그러면 나는... 가은이에게 미움을 받을 자격마저 잃은 건가?’정하린은 마지막으로 문우빈을 힐끗 바라본 뒤 돌아서서 가 버렸다.문우빈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두 다리에 감각이 사라질 때쯤에야 겨우 발을 옮겨 차로 돌아갔다.문우빈은 집으로 가지 않았다. 그 텅 빈 집으로는 도저히 돌아갈 수 없었다.차는 목적지도 없이 도시를 떠돌다 결국 강변에 멈춰 섰다.그는 차 안에 앉은 채 검은 빛 강물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에는 정하린이 던진 말이 끝없이 맴돌았다.‘지금 미친 사람처럼 가은이를 찾는 게, 갑자기 가은이를 사랑한다고 깨달아서예요? 아니면 늘 곁에 있던 사람이 사라져서, 그 빈자리에 익숙하지 못해서예요?’‘나는 가은이를 사랑했나?’문우빈은 알 수 없었다.다만 이 한 달 동안, 그는 영혼을 잃은 사람처럼 살았다.밥을 먹을 때면 고가은이 매일 다른 반찬을 곁들여 차려 주던 아침상이 떠올랐다. 잠자리에 들 때면 자신의 품 안으로 파고들던 온기가 떠올랐다. 밤늦게까지 일할 때면, 책상 위에 조용히 놓아주던 따뜻한 우유 한 잔이 떠올랐다.집 안의 모든 구석에 고가은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주방에는 국을 끓이다 덴 손으로 남긴 작은 자국이 있었고, 서재 책장에는 고가은이 몰래 넣어 둔 위장약과 손글씨 메모가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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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일기는 그 지점에서 한동안 끊겨 있었다.다음 기록은 유산하던 날이었다.글씨가 심하게 흔들려 있었다. 어떤 부분은 물에 번진 듯 흐릿했다.[내 아이가 잃었다. 남편은 말했다. 내가 진채원을 밀지 않았다면 나를 가두지 않았을 거라고. 진채원은 혈액 응고 장애가 있어서 그 한 번에 목숨이 위험할 뻔했다고. 남편은 보상하겠다고 했다.][문우빈, 내 사랑도, 아이의 목숨도, 당신에게는 그토록 값어치 없는 것이었구나.]그 페이지 마지막 줄은 종이를 뚫을 듯 깊게 눌려 있었다. 절망으로 떨리는 글씨였다.[나... 정말 더는 버티지 못할 것 같아.]일기는 거기서 끊겼다.그 뒤로는 빈 페이지뿐이었다.문우빈이 마지막 장까지 넘기자, 그 안에서 구겨진 종이 한 장이 떨어졌다.그는 종이를 주워 펼쳤다.초음파 검사 결과지였다.날짜는 유산하던 바로 그날.흐릿한 초음파 사진 속에는 작은 생명의 모습이 어렴풋이 담겨 있었고, 아래에는 ‘임신 12주 추정’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뒷면에는 말라붙은 눈물 자국과 아주 작은 글씨가 남아 있었다. 힘이 다 빠진 손으로 마지막 기운을 짜내 쓴 것 같은 글씨였다.[아가, 미안해. 엄마가 지켜 주지 못했어. 또 미안해. 엄마가 너를... 너를 사랑하지 않는 아빠가 있는 세상으로 데려오면 안 됐어.]문우빈은 그 문장을 바라보았다. 눈을 크게 뜬 채 천천히 숨이 막혔다.보이지 않는 손이 심장을 붙들고 뒤트는 것 같았다. 숨을 쉬지 못한 그는 허리를 숙이면서 거의 쓰러질 뻔했다.죄책감만은 아니었다.너무 늦게 찾아온, 가슴을 찢는 아픔이었다.시야가 까맣게 흐려지면서 귀가 먹먹해질 만큼 아팠다.그날이 떠올랐다. 고가은은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백지처럼 핏기 없는 안색에, 눈동자는 텅 비어 있었다.그가 말했었다. “퇴원하면... 다시 아이를 갖자.”고가은이 말했다. “당신은 아이 목숨을 어떻게 보상해서 갚겠다는 거야?”그때 문우빈은 몰랐다.이제야 알았지만 너무 늦었다.문우빈은 차가운 책장에 등을 기댄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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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고가은이 고개를 들었다. 문우빈인 걸 확인하자, 얼굴에 남아 있던 웃음이 깨끗하게 사라졌다.남은 것은 차갑고 무심한 표정, 노골적인 짜증뿐이었다.“문우빈 씨?” 그녀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평온했고,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무슨 일이시죠?”‘문우빈 씨...’이 호칭이 바늘처럼 문우빈의 심장에 박혔다.그가 입을 열었지만 목이 바싹 말라붙었다.“너를 찾으러 왔어... 나랑 돌아가. 우리 얘기 좀 하자.”“우리 사이는요...” 고가은은 낯선 사람을 보듯 바라보았다. “이혼신고가 처리된 날부터 더는 할 얘기가 없어요.”“문우빈 씨, 비켜 주세요. 늦었습니다.”말을 마친 그녀가 문우빈을 지나치려 했다.문우빈은 다급하게 여자의 손목을 붙잡았다.손끝에 닿은 피부는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 온기가 오히려 문우빈의 마음을 더 흔들었다.“미안해, 가은아.” 남자의 목소리는 거칠게 쉬어 있었다. 거의 애원에 가까웠다. “내가 잘못했어. 너무 많이, 말도 안 되게 잘못했어... 봐, 결혼반지도 가져왔어. 우리 다시 시작하자. 제발.”그는 주머니에서 그 반지를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렸다. 먼지처럼 낮은 자세로 고가은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고가은은 고개를 숙여, 노을 아래 차갑게 빛나는 반지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웃었다.비웃음이 가득한 웃음이었다.“문우빈.” 그녀가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눈빛은 칼날처럼 선명했다. “당신은 아직도 내가... 당신이 돌아와 미안하다고 한마디만 하고 반지나 하나 내밀면,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내가 고가은이라는 이유만으로, 평생 당신 없이는 못 살 줄 알았어?”문우빈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면서 그녀의 손목을 쥔 손마저 떨렸다.“아니야, 그런 뜻이...”“너무 늦었어.” 말을 자른 고가은은 힘주어 손을 빼냈다. 마치 더러운 것에 닿았다는 듯한 동작이었다.“당신의 사과도, 반지도, 당신이라는 사람도.” 이어 또박또박 말했다. “이제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다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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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그 말을 끝으로, 고가은은 일어섰다. 다시는 문우빈을 쳐다보지 않고, 길가로 나가 택시를 잡아타고 떠났다.문우빈은 차가운 바닥에 누운 채 그녀가 떠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산 채로 찢기는 것처럼 온몸이 떨렸다.몸의 고통은 고가은의 말이 남긴 상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자신이 처음으로 그녀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녀를 밀어낼 때는 자신이 어떻게 될지조차 생각하지 않았다.오직 하나만 생각했다. 고가은에게 아무 일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하지만 그녀는 제대로 바라봐 주지도 않았다.고가은은 말했다. 문우빈의 피가 역겹다고.그리고 그녀를 위해 죽더라도 돌아보지 않겠다고.문우빈은 눈을 감았다. 피와 먼지에 섞인 눈물이 눈가를 타고 흘렀다.그는 왼팔이 골절되어 깁스를 했고, 오른쪽 다리도 심하게 타박상을 입어 목발을 짚어야 했다.의사가 입원을 권했지만, 문우빈은 거부했다.퇴원 절차를 밟고서, 목발을 짚은 채 절뚝거리면서 호텔로 돌아갔다....다음 날, 문우빈은 다시 고가은의 회사 건물 아래에 나타났다.팔에는 깁스를 한 데다 다리는 절뚝거렸고 안색은 창백했다. 그래도 그는 고집스럽게 그 자리에 서서 건물 출입구만 바라보았다.고가은이 걸어 나왔을 때, 문우빈을 봤지만 걸음은 조금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를 아무 의미 없는 장애물처럼 그저 훑어보기만 하고 지나갔다. 그대로 아무 표정 없이 돌아서서 지하철역을 향했다.문우빈은 이름을 부르고 싶어서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그는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며 멀리서 뒤따랐다.떨어지지 않는 그림자처럼 우스운 모습으로.사흘째 되는 날, 그는 붉은 장미 한 다발을 품에 안고 회사 아래에서 기다렸다.고가은은 나와서도 보지 않고 지나쳤다.문우빈은 꽃다발을 안은 채 따라붙으면서 그녀에게 건네려고 했다.“가은아, 네가 제일 좋아하던...”고가은은 멈춰 서서 돌아보았다. 눈빛은 얼음장 같았다.“당신은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이야?”“다시는 귀찮게 하지 말라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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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문우빈의 머릿속에서 무엇인가 폭발했다.‘착화 보조제...’‘진채원의 방...’그날 밤이 떠올랐다. 진채원은 무섭다며 하룻밤 묵고 싶다고 했다.고가은은 말했다. “손님방은 1층 맨 안쪽 방이야. 침구는 깨끗한 걸로 갈아놨어. 자고 싶으면 자.”그녀는 그렇게 평온했고, 아무 상관없다는 태도였다.문우빈은 그때 고가은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철이 들었다고 여겼다.이제 와서 돌아보니, 그건 철이 든 게 아니었고, 마음이 죽은 것이었다.슬픔보다 더 큰 것은... 마음이 죽는 일이었다.[또 있습니다...]비서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발코니에서 있었던 사건도 당시 현장에 있던 일부 직원들에게 확인했습니다.] [몇몇 직원들이 진채원 씨가 먼저 고가은 여사님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고, 잠시 뒤 갑자기 손을 뻗어 여사님을 밀었다고 했습니다.][여사님은 떨어지면서 진채원 씨 손목을 붙잡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놓았다고 합니다.][진채원 씨는 대표님께 여사님이 자신을 끌고 같이 죽으려 했다고 말했지만, 현장에 있던 사람들 말은... 전혀 다릅니다.]비서가 그 뒤에 무슨 말을 더 했는지, 문우빈은 제대로 듣지 못했다.그는 핸드폰을 든 채 낯선 이국의 거리 한복판에 서 있었다. 귓속이 윙윙 울렸고 시야가 까맣게 흐려졌다.진실은 가장 잔인한 칼날이 되어 그를 갈기갈기 베었다.그토록 자신이 지키려고 했던 사람, 순수하고 착하지만 조금 제멋대로라고 믿었던 진채원은 알고 보니 사악한 독사였다.반대로 그가 무시하고 외면하면서 상처를 주고, 지옥으로 밀어 넣은 고가은이야말로 자신이 애지중지하며 귀하게 지켜야 했던 사람이었다.문우빈은 눈이 멀었고 어리석었다.무엇보다 잔인했다.이제야 정신을 차렸고 이제야 모든 것을 알았다.하지만 너무 늦었다.모든 것이 너무 늦었다.그는 온 마음으로 자신을 사랑했던 고가은을 잃었다.문우빈은 전화를 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영혼이 빠져나간 조각상처럼.찬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치면서 얇은 외투 자락을 흔들었다.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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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문우빈은 아주 오랫동안 무릎을 꿇은 자세를 유지했다.두 다리가 저리면서 감각이 사라질 때까지, 찬바람에 온몸이 차갑게 식을 때까지.그제야 바닥을 짚고 일어서려고 했다.하지만 다친 다리와 오래 무릎을 꿇고 있었던 탓에, 몇 번을 시도해도 일어날 수 없었다.결국 그는 거의 기어가듯 옆에 쓰러진 목발을 주웠다. 온몸의 힘을 짜내서야 겨우 일어섰다.목발을 짚고서 절뚝이며 돌아섰다.굽은 등은 마치 늙은 노인의 모습과도 같았다.어두운 밤공기가 남자의 모습을 삼켰다.문우빈은 귀국했다.이전처럼 무너지고 흐트러진 모습은 아니었다. 그는 다시 정장을 갖춰 입고 빈틈없이 정돈된 문창그룹 대표로 돌아왔다.하지만 눈 밑 깊은 곳에는 모든 것을 파괴할 듯한 차가운 기운이 가라앉아 있었다.회사로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진채원에 대한 증거를 모두 정리하는 것이었다. CCTV 캡처, 화재 잔여물 검사 보고서, 목격자 진술서까지 전부 파일로 묶어 진채원의 아버지에게 보냈다.덧붙인 문장은 간단했다.[두 집안의 오랜 인연을 봐서 두 가지 선택할 길을 드립니다. 하나. 즉시 진채원을 폐쇄형 정신요양병원에 보내 치료받게 할 것...둘, 제가 경찰에 신고할 것. 이 증거만으로도 최소 10년은 감옥에서 보내게 될 겁니다. 선택하십시오.]메일을 보낸 그날 오후, 진 회장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지만 문우빈은 받지 않았다.진 회장이 직접 문창그룹 본사로 찾아왔지만, 로비에서 경비에게 막혔다.결국 문우빈의 비서가 내려와 무표정하게 전했다.“대표님께서 뵙고 싶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돌아가셔서 따님을 잘 관리하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과는 감당하셔야 한다고요.”문창그룹 로비에서 두 시간을 서 있던 진 회장은, 결국 고개를 숙인 채 돌아갔다.다음 날, 문우빈은 진씨 집안에 대한 전면적인 사업 압박을 시작했다.일주일도 되지 않아 진씨 집안의 핵심 프로젝트 몇 개가 잇달아 흔들렸다. 자금줄이 막히면서, 파산 직전까지 몰렸다.막다른 길에 몰리자, 진 회장은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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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문우빈은 발 아래에 매달린, 한때 자신이 지키고 받아줘야 한다고 믿었던 여동생처럼 함께 자란 진채원을 내려다보았다.이제는 낯설고 역겨울 뿐이었다.그는 가볍게 발을 움직여 진채원의 손을 떼어 냈다.“오늘부터...” 곧바로 돌아서서 더는 진채원을 보지 않았다. “너와 나는 끝이야.”“계속 정신병원에 있게 해. 다시 진채원이 내 앞이나 고가은 앞에 나타나면.”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목소리는 얼음장 같았다. “그때는 후회가 뭔지 알게 해줄게.”진채원은 바닥에 주저앉아 남자의 단호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날카롭게 웃기 시작했다. 처참한 웃음소리가 귀를 찔렀다.“고가은은 이미 떠났어! 고가은은 오빠를 버렸다고! 문우빈, 정신 차려! 그 여자는 절대 오빠를 용서하지 않아!” “오빠가 이런 걸 해도 그 여자는 몰라! 알아도 신경 안 써! 고가은은 오빠를 미워해! 평생 용서하지 않을 거야!”문우빈이 걸음을 멈추더니 뒷모습이 살짝 굳어졌다.진채원이 말한, 고가은은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말이 독이 묻은 칼처럼 문우빈의 가장 여리고 피투성이인 상처를 찔렀다.휘청거리던 문우빈은 옆의 벽을 짚고서야 겨우 몸을 세웠다.돌아보지도 않고 더 말하지도 않았다.그저 등을 곧게 펴고 천천히 그곳을 떠났다.등은 곧게 폈지만, 고독하고 황량한 기운이 묻어 있었다....진채원과 진씨 집안을 처리한 뒤, 문우빈의 몸도 무너졌다.위출혈이었다. 비서가 억지로 병원에 보냈다.검사 후 의사의 표정은 무거웠다.“장기간의 정신적 스트레스, 심각하게 불규칙한 식사와 수면으로 위 점막 손상이 큽니다. 반드시 입원 치료와 안정이 필요합니다.”문우빈은 병상에 누워 새하얀 천장을 바라보았다. 눈동자는 텅 비어 있었다.그는 적극적인 치료를 거부한 채 최소한의 약물과 수액으로 버티겠다고만 했다.비서는 보다 못해 여러 번 설득했지만, 문우빈은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결국 비서는 집에서 낡은 핸드폰 하나를 가져와 문우빈에게 건넸다.“대표님, 예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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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비서는 전화를 쥔 채 병실 안을 바라보았다. 기억과 수액에 기대 겨우 버티는... 말라 버린 눈으로 텅 빈 곳만 바라보는 남자를 보면서 목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1년 뒤.고가은은 뛰어난 업무 성과를 인정받아 본사의 지시로 귀국했다. 중요한 국제회의의 통역 업무를 맡기 위해서였다.회의 장소는 도심 최고급 컨벤션센터였다.문우빈이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회의 중이었다.비서가 귓가에 대고 몇 마디를 전하자, 그가 쥐고 있던 만년필이 멈췄다. 만년필 펜촉이 문서 위에 길게 선을 그어 버렸다.문우빈은 한참 침묵하다가 손을 들고 회의를 계속하라고 신호했다.하지만 남은 회의 내내 그는 분명히 집중하지 못했다. 시선은 자꾸 창밖으로 흘렀다.회의가 끝나자, 그는 사무실에 틀어박혀 담배 한 갑을 통째로 태웠다.그런 뒤 회의장 직원 한 명을 몰래 매수했다....회의 당일, 문우빈은 회의장 가장 뒤쪽,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그림자 속에 자신을 숨겼다.가까이 다가갈 용기는 없었다. 고가은을 방해할 수도 없었다.그저 그렇게 몰래, 멀리서 한 번만 보고 싶었다.회의가 시작되자, 고가은은 동시통역사 중 한 명으로 투명한 통역 부스 안에 앉았다.그녀는 단정한 남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머리는 깔끔하게 묶었고, 헤드셋을 낀 채 무대 위 발언을 집중해서 들었다. 손가락은 키보드 위에서 빠르게 움직였고, 입술은 멈추지 않았다. 정확하고 유려한 통역이 음향 장치를 타고 회의장 전체에 전달됐다.자신감 있고 침착한 모습은 그야말로 눈부셨다.문우빈은 탐하듯 바라보았다. 한 번도 눈을 떼지 않았다. 고가은의 모습을 영혼에 새기려는 사람처럼.심장 근처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밀려왔다.견딜 수 없을 만큼 아팠지만, 동시에 스스로 벌을 받는 듯한 이상한 만족도 있었다.‘나를 사랑했던 이 여자... 원래 이렇게 빛날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내가 없어도, 이렇게 잘 살 수 있는 사람이구나.’회의는 하루 종일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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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구급차 안에서 의료진은 급히 상처를 지혈하고 생체 신호를 확인했다.고가은은 옆에 앉아 있었다. 손과 외투에는 문우빈의 피가 묻어 있었다. 끈적하고 따뜻했으며, 피비린내가 진하게 났다.그녀는 들것 위에 누운 남자를 바라보았다. 얼굴은 새하얗고 두 눈은 감은 채였다. 표정은 거의 없었지만, 단단히 다문 입술만이 아주 희미하게 긴장을 드러냈다.문우빈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계속 웅얼거렸다.“가은아... 미안해...”“아이야... 미안해...”“가지 마... 나 버리지 마...”목소리는 부서져 있었고, 죽음에 가까운 절망이 묻어 있었다.고가은은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보았다. 빠르게 뒤로 밀려나는 밤 풍경 사이에서 그녀의 옆얼굴은 차갑고 단단해 보였다.병원에 도착하자, 문우빈은 곧바로 수술실로 들어갔다.수술실 불이 켜졌다.고가은은 복도 긴 의자에 앉았다. 손과 외투의 피는 이미 말라서 짙은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그녀는 핏자국을 닦지도 않은 채 조용히 앉아서, 굳게 닫힌 수술실 문을 바라보았다.시간이 흐르고 또 흘렀다.수술실 문이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표정은 무거웠다.“환자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한 곳은 비장에 닿았고, 다른 한 곳은 장을 관통했습니다. 출혈도 많아서 상황이 낙관적이지 않습니다.”“게다가...” 의사는 잠시 멈추고 고가은을 바라보았다. “환자의 생존 의지가 매우 약해 보입니다. 이대로면 위험합니다.”고가은이 눈을 들어 의사를 보았다.“가족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당신은 환자의...” 의사가 조심스레 물었다.“전처입니다.” 고가은은 평온하게 말했다.의사는 잠깐 멈칫했지만 곧 말을 이었다.“지금 두 분 관계가 어떻든, 가능하다면 환자를 격려해 주십시오. 살고자 하는 의지를 끌어내야 합니다. 현재는 그 의지가 환자가 버티는데 가장 큰 변수입니다.”고가은은 오래 침묵했다.의사가 그녀가 거절할 거라고 생각할 만큼 오래.그러다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알겠습니다.”의사와 뒤늦게 도착한 문우빈의 심리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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