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us les chapitres de : Chapitre 11 - Chapitre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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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어머니 장영주의 말대로, 아파트에 남아 있는 것은 전부 양수원의 것이었다.강하임은 자기 물건을 모두 정리해서 버리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떠날 준비를 해 둔 사람 같았다.양수원의 온몸에서 식은땀이 났다. 그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장영주도 당황해 아들을 붙잡고 계속 물었다.“너희 싸운 거 맞지? 하임이는 몸도 그렇게 불편한데, 네가 왜 조금 더 맞춰 주지 못했어? 왜 그렇게 속상하게 만들었어?”“이 추운 날 그 애가 어디를 가겠니? 빨리 생각해 봐! 하임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네가 장인어른 장모님 앞에서 한 맹세를 어떻게 책임질 거야?”“빨리 전화해서 사과해. 잘 말하면 하임이는 마음이 약해서 분명히 너를 용서해 줄 거야. 멍하니 있지만 말고!”지금의 양수원에게 그 말들은 날카로운 칼과 같았다. 마음 가장 깊고 부끄러운 곳을 곧장 찔렀다.그리고 입술이 떨렸다. 급하고 뜨거운 숨 사이로... 자신만 들을 수 있는 생각들이 흘러나왔다.강하임과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강하임은 불만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다만 혼자 모든 것을 견뎠을 뿐이었다.강하임은 일부러 사라진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그에게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강하임은 양수원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사과해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그 문장들이 주문처럼 양수원의 마음을 감았다. 조금씩 조여들다가 풀 수 없는 매듭이 되었다.남은 평생을 다 써서 노력해도 풀 수 없을 매듭이었다.20년 넘게 알고 지낸 사람 중 강하임을 양수원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강하임은 용감하고 단호했다. 한 번 마음을 정하면 뒤돌아보지 않았다.아무 말 없이 떠나기를 선택했다면, 다시는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3년의 결혼 생활, 20년 넘는 정은 모두 ‘꼭 가야 해?’라는 말 속에 멈춰 있었다.그 말은 양수원에게 꼭 귀국해야 하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었다.둘 사이의 모든 것을 끝내기로 결정했느냐고 묻는 말이었다.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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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양수원의 기억 속에서 12월의 마지막 나흘은 너무 느리게 지나간 듯하면서도, 또 순식간에 흘러갔다.그는 혼자 생각나는 곳을 전부 돌아다녔다. 강하임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병원에 갔을 때, 의사는 강하임이 마지막으로 혼자 진료를 보러 온 것이 한 달쯤 전이었다고 했다.회복할 가능성이 없다는 말을 들은 뒤, 강하임은 다시 병원에 나타나지 않았다.양수원은 두 사람이 예전에 자주 걷던 오래된 골목과 상점가에도 갔다. 낯익은 가게 주인은 강하임이 마지막으로 왔을 때 혼자였다고 말했다.주인이 남편은 왜 같이 오지 않았느냐고 묻자, 강하임은 가볍게 웃으며 다섯 글자만 말했다고 했다.“곧 헤어져요.”양수원은 학교에도 다시 갔다. 경비원은 얼마 전 다리가 불편한 여학생이 휠체어를 타고 혼자 학교를 둘러봤다고 했다.이팝나무에 새겨져 있던 학창 시절의 고백은 사라졌고, 나무껍질에는 아물어 가는 상처만 남아 있었다.양수원은 강하임과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도 찾아갔다. 친구들은 강하임이 사라지기 전 함께 밥을 먹자고 불렀다고 했다.그 자리에서 강하임은 취기가 오른 채 웃으며 이상한 말을 많이 했다. 모두 앞으로 잘 살라고, 자신을 다 잊고 떠올리지 말라고...양수원이 아는, 강하임이 갈 만한 모든 곳에는 그녀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들려준 이야기는 놀랍게도 다 같았다.강하임은 혼자 왔다. 오래 멍하니 있었고,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많이 남겼다.마치 영원한 작별 인사를 하려고 준비해 온 사람처럼.그 점이 양수원을 가장 이해할 수 없게 만들었다.‘하임이 내 마음이 흔들린 것을 알고 떠나려 했다면, 이혼하자고 말하면 되잖아!’‘왜 불편한 몸으로 그렇게 많은 곳을 다니며 수많은 작별을 남겼을까?’‘하임이 미워하고 떠나보내고 싶었던 대상은... 나뿐이잖아.’창밖에는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양수원의 마음에도 눈이 내려 온통 하얗게 덮인 듯했다.그는 핸드폰을 꺼내 창밖의 눈을 찍어 강하임에게 보냈다.[여보, 며칠째 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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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구청에서 전화가 걸려 왔을 때, 양수원은 막 서재에 들어와 프린터 옆 서랍을 열려던 참이었다.어디서 강하임을 찾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문득 그녀가 예전에 버킷 리스트를 썼던 것이 떠올랐고, 그곳에서 단서를 찾으려 집 안을 뒤지던 중이었다.하지만 수화기 너머의 말을 듣자, 서랍 손잡이를 잡은 그의 손이 세게 굳었다.[양수원 씨 맞으시죠? 지금 시간 괜찮으시면 서구청 민원실로 와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배우자이신 강하임 씨 관련해서 확인할 일이 있습니다.]‘구청?’그 말이 나오자 양수원의 숨이 흐트러졌다.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불안이 밀려왔다.그는 신발도 제대로 갈아 신지 못한 채 서둘러 차를 몰고 나갔다.도착해 주변을 둘러보니 왠지 낯이 익었다.차에서 내려 건물 입구에 다다르자, 지난번 이곳에서 강하임을 만났던 일이 떠올랐다.그때 그는 강하임에게 여기서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고, 그녀는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다.같은 장소로 다시 돌아오고 나서야, 양수원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곧 알게 될 일들이 그날과 관련되어 있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심장이 빠르게 뛰고,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그는 주먹을 꽉 쥐며 ‘구청에서 강하임의 행방을 찾았다’는 이야기일 거라고 어림짐작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불안을 누르기 위해서였다.건물 밖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겨우 감정을 가라앉히고 안으로 들어갔다.직원은 양수원의 이름을 확인한 뒤 작은 상담실로 안내했다. 이어 자료 한 뭉치를 넘기며 몇 가지를 물었다.“강하임 씨 배우자 맞습니까?”“네, 남편입니다.”“아직 이혼하지 않으셨고요?”“이혼하지 않았습니다.”그 대답을 들은 직원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작게 중얼거렸다.“지난번에는 이혼할 예정이라고 하셨는데, 아직도 처리가 안 됐네...”양수원의 심장이 목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그는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이미 이혼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강하임이 자신과 이혼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사라지기 전까지 강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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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사후 절차?’‘무슨 사후 절차?’‘중증 우울증?’‘반년 전 의사가 우울증은 많이 회복됐다고 진단서를 써 줬는데...’양수원이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머릿속을 빙빙 돌았다.그는 그 말들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려 애썼지만, 직원은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어제 S국에 있는 조력 사망 기관에서 사망 확인 서류가 도착했습니다. 대사관 쪽 확인도 마쳤고요. 서류 내용은 사실입니다. 양수원 씨가 강하임 씨의 유일한 법적 가족이시니 협조 부탁드립니다.”사망 확인이라는 말을 듣자 양수원의 머릿속에서 큰 폭발음이 난 것 같았다.“사, 사망이요?”직원은 그의 목소리에 담긴 충격을 듣고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네. 배우자이신 강하임 씨가 15일 전 이곳에 말소 관련 서류를 남기고 가셨고, 어제 저희가 S국에서 조력 사망 절차를 마쳐 사망하셨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연락드린 겁니다. 모르고 계셨나요?”단어 하나하나는 전부 들렸다.하지만 한 문장으로 이어지자, 양수원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하임이 죽었다고?’‘나에게 화가 나서 집을 나가고, 일부러 사라진 것 아니었나?’‘왜 죽은 거지?’양수원은 터무니없는 소식을 받아들일 수 없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그럴 리가 없어요. 최근에 생일이 지났고, 하고 싶다는 것도 많이 적어 놨는데 어떻게 죽어요?”“부모님께 꼭 잘 살겠다고 약속했어요. 제 아내가 그 약속을 어길 리 없잖아요.”“첫눈을 보러 가자고도 했어요. S국에는 눈도 안 왔는데, 어떻게 그냥 떠나요?”그는 자기 머리카락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고통으로 얼굴 근육이 떨렸고, 구청 직원의 사망 확인을 뒤집을 증거를 찾으려 계속 말을 쏟아 냈다.하지만 말할수록 목소리는 갈라지고 낮아졌다. 끝내 처절한 숨소리만 남았다.마지막에는 양수원도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말한 것들이 강하임이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오히려 마지막 희망을 꺼뜨리는 바람이 되었다.그는 20가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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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양수원은 아주 길고 긴 꿈을 꾸었다.꿈속에서 그는 4살로 돌아가 있었다. 옆집에 새로운 가족이 이사 왔고, 자신보다 3개월 어린 여자아이를 알게 되었다.여자아이는 포니테일로 얌전히 머리를 묶고 조용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누구보다 씩씩한 그 여자아이를 좋아했다.그 여자아이는 양수원을 끌고 놀이터로 내려가 그네를 탔다. 양수원이 온 힘을 다해 밀어도, 더 세게 밀어 달라며 하늘까지 날아가고 싶다고 말했다.그 여자아이는 몰래 용돈으로 과자를 많이 사 와 양수원에게 절반을 나눠 주었고,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것이라고 했다.말썽을 부리다 어른들에게 들키면, 그 여자아이는 용감하게 앞으로 나서서 모든 책임을 졌다. 혼이 나도 절대 양수원의 잘못을 일러바치지 않았다.양수원은 매일 그 여자아이 꽁무니를 따라다녔다. 골목 입구에서 끝까지,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아이에서 소년과 소녀로, 평생 친구로 지내자던 사이에서 손을 잡고 결혼식장으로 들어가는 부부가 되기까지.강하임은 양수원을 위해, 무한한 가능성이 있던 미래를 망설임 없이 포기했다.양수원도 모든 친척과 친구들의 축복 속에서 평생 강하임만 사랑하겠다고 맹세했다.그는 그것이 두 사람의 아름다운 결말이라고 생각했다.동화 속 사랑은 늘 거기서 끝난다.오래 함께 자란 두 사람이 온갖 어려움을 이겨 내고 부부가 되는 순간, 모두가 그것을 해피엔딩이라 불렀다.하지만 양수원이 사는 세계는 영화도, 소설도 아니었다. 살아 숨 쉬는 현실이었다.그는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주인공이 아니었고, 기적 같은 힘도 없었다.그래서 인생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계속 앞으로 흘러갔다.꽃과 풍선, 축복과 사랑으로 가득했던 예식장은 어느새 벗어날 수 없는 울타리가 되었다.결혼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감옥이었다.평생 계속될 거로 믿었던 사랑과 다정함은 반복되는 일상에서 천천히 닳아 빛을 잃었다.사랑이 닳아 없어진 자리에는 다른 감정들이 고개를 들었다.그를 괴롭히고 밤마다 잠들지 못하게 하던 죄책감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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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S국의 첫눈은 1월 초가 되어서야 내렸다.양수원은 공항 밖으로 나와 바닥을 덮은 하얀 눈을 오래 바라보았다.이 나라에 오는 것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그와 동시에 마지막이 될 것이다.강하임의 유골을 받으면 곧장 떠날 생각이었다. 다시는 이곳에 발을 들이지 않을 것이다.차가운 바람을 오래 맞은 뒤에야 양수원은 발을 떼어 눈길 속으로 들어갔다.그는 택시를 잡아 주소를 말했다.앞좌석의 운전기사는 선해 보이는 외국인이었다. 양수원이 조력 사망 기관으로 가겠다고 하자 놀란 눈빛이 스쳤다.“그곳은 조력사망을 하는 곳인데, 정말 가시는 게 맞나요? 아직 젊어 보이는데, 왜 생을 끝내려고 하세요?”양수원은 목울대를 움직였지만 대답하지 않았다.운전기사의 말이 선의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대답할 힘이 없었다.양수원은 고개를 숙이고 못 알아들은 척했다.운전기사는 한 번 더 그를 돌아보고 한숨을 쉬더니 차를 출발시켰다.내비게이션의 거리는 조금씩 줄어들었다.하지만 양수원의 마음은 더 세게 조여 들었다. 스펀지처럼 비틀리고 짓눌리다가, 마침내 잘게 부서져 흩어지는 듯했다.양수원의 마음에도 눈이 내리는 것 같았다. 음산하고 차가워 뼛속까지 시린 듯했다.차가 멈추자 그는 지폐 뭉치를 건넸다. 거스름돈을 주려는 기사를 손짓으로 말리고 문을 열었다.프런트 직원이 먼저 다가와 예약한 절차가 있는지 물었다.밝은 로비와 곳곳에 놓인 안내문을 보자, 양수원에게 심한 어지럼증이 밀려왔다.그가 쓰러질 듯 휘청거리자 직원이 빠르게 붙잡고 도움이 필요한지 물었다.이어서 몸을 굽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 입에 넣었다.공항에서 쓰러졌을 때 승무원이 양수원의 주머니에 넣어 둔 사탕이었다. 제때 먹으라고 당부했었다.하지만 그는 먹을 수 없었다.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음식이 입안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썩은 맛이 나는 것 같았다.사탕에서도 쓴맛밖에 느껴지지 않았다.한참 지나자 눈앞의 어둠이 천천히 걷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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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직원은 15분쯤 지나서 나왔다. 뒤에는 또 다른 사람이 함께 있었다.두 사람의 빈손을 보자, 불안이 다시 양수원의 마음을 덮쳤다.그는 의자를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나 몇 걸음을 내디뎠다.“유골은요?”두 직원은 양수원의 목소리에 담긴 다급함을 알아들었다. 서로를 바라본 뒤,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죄송합니다, 양수원 씨. 기록을 확인해 보니 부인께서 임종 전에 유해 처리 방식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저희는 그 유언에 따라 유골을 처리했습니다. 헛걸음하시게 된 것 같습니다.”그 말을 듣자 양수원은 몸을 지탱하던 마지막 숨마저 흩어지는 기분이 들었다.그는 주먹을 꽉 쥐고 이를 악물었다. 힘겹게 손을 들어 그들이 들고 있는 서류를 가리켰다.직원들은 양수원의 안색이 너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지금의 절망을 이해하면서도 서류 안의 내용이 그를 더 자극할지 걱정했다. 망설이며 거절했다.“양수원 씨, 아내분은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본인 몸부터 잘 돌보셔야 합니다. 하늘에서 아내도 그걸 바라실 거예요.”두 사람이 보내는 연민 어린 눈빛 속에서, 양수원은 서류에 어떤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지 어렴풋이 짐작했다.그리고 눈에 짙은 슬픔이 차올랐다. 그래도 그는 끝까지 그 문서를 받아 펼쳤다.하얀 종이에는 서로 다른 세 가지 질문이 인쇄되어 있었다.하지만 답은 모두 같았다.“No.”단순한 대답이 양수원의 눈앞에서 겹쳤다.억지로 눈을 크게 뜨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긴 영어 문장이 놓여 있었다.단어 하나하나는 모두 알고 있었지만, 머릿속으로 들어오자마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그는 눈을 감았다가 뜨고, 다시 감았다가 또 떴다.그러나 아무리 해도, 그 문장을 이해할 수 없었다.친절한 직원은 양수원이 알아듣지 못한다고 생각했는지 번역 앱으로 문장을 옮겨 그 앞에 내밀었다.이번에는 또박또박한 모국어 문장을 보고서야 양수원은 그 유언의 뜻을 이해했다.“제가 죽으면 바로 화장해 주세요. 유골은 묻지 않아도 됩니다. 첫눈이 오는 날 아무 곳에나 뿌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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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강하임의 장례식에 온 사람은 많지 않았다. 모두의 마음은 무거웠다.누구도 그녀가 그렇게 조용히 생을 끝낼 줄은 몰랐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만나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의 강하임은 평소와 전혀 다름없는 모습이라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전혀 알 수 없었다.빈소에는 영정사진과 국화만 가득 놓여 있었다.시신도, 유골도 찾을 수 없었고, 마지막으로 입었던 옷 한 벌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남은 것은 흰 국화와 노란 국화뿐이었다.영정 앞에 놓인 14인치 사진 한 장만이 이 장례식의 주인이 누구인지 증명하고 있었다.너무 쓸쓸한 장면에 사람들은 당황했고, 결국 하나둘 물었다.“우리는 하임이 마지막 가는 길이라도 배웅하려고 왔어. 화장했다면 유골은 어디 있어?”“생전에 입던 옷이나 물건이라도 가져올 수 없었나?”“...”그 질문들 앞에서 양수원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이렇게 오래 함께했는데도, 그는 강하임과 관련된 어떤 물건도 남기지 못했다.이 영정 사진마저 S국 기관에서 받아 온 유일한 것이었다.사진 속 차분한 얼굴을 볼 때마다, 양수원은 그 사진을 찍던 날의 일을 떠올렸다.그날 자신이 조금만 더 신경 썼다면, 강하임이 주민등록 말소 상담을 하러 갔다는 걸 알 수 있었을까? 영정 사진을 찍었다는 걸 알 수 있었을까?돌이킬 수 없는 곳에 와서야, 양수원은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알았다.그는 말 못 할 마음을 완벽하게 잘 숨겼다고 믿었다. 강하임은 알아차리지 못할 거로 여겼다.하지만 두 사람은 너무 오래 함께했다. 눈을 한 번 깜빡이는 것만으로도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만큼 익숙했다.양수원이 곳곳에서 강하임을 외면하고, 몇 번이고 혼자 남겨 두고, 눈앞에서 다른 여자와 웃고 떠드는 것을.강하임이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었다.그녀는 모두 알고 있었으니, 다만 양수원이 직접 고백해 주기를 기다렸다.그런데 양수원은 자기 환상에 빠져 있었다. 강하임이 보여 준 싸늘함과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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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그날부터 양수원은 집 안에 자신을 가두고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다.가끔 찾아오는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누구의 연락에도 답하지 않았다.방 곳곳에는 그가 비운 술병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그는 술로 신경을 마비시켜야만 간신히 숨을 쉴 수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스러운 삶을 그렇게 이어 갔다.1월 21일, 오랫동안 조용하던 현관문을 누군가가 갑자기 두드렸다.양수원은 숙취에서 깨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텅 빈 눈으로 벽에 드리운 빛과 그림자를 바라보며 멍하니 있었다.문밖의 사람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두드렸다. 한 차례, 또 한 차례. 멈출 기미가 없었다.양수원은 들었지만 듣지 못한 사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오후가 되어서야 그는 뼈만 남은 몸을 겨우 일으켜 현관으로 걸어갔다.3시간이나 문을 두드린 예나혜는 인내심이 거의 바닥나 있었다. 분을 풀듯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그래서 문이 갑자기 열렸을 때, 힘을 거두지 못한 그녀는 그대로 안쪽으로 넘어질 뻔했다.양수원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앞을 막아 예나혜와 거리를 벌렸다. 그녀를 바라보는 눈에는 냉담함만 있었다.“무슨 일이야?”예나혜는 오래 보지 못한 사이 양수원의 태도가 이렇게 달라져 있을 줄 몰랐다. 눈에 불만이 빠르게 스쳤다.하지만 곧 표정을 다듬고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오빠, 나 계속 연락했는데 통화 안 되더라. 괜찮은 거야?”양수원은 눈을 내리깔고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말투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예의 바르고 멀었다.“괜찮아. 돌아가. 앞으로도 연락하지 말자.”그 말을 듣자 예나혜는 곧바로 다급해졌다. 바로 양수원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지금 너무 힘든 거 알아. 그래서 온 거야. 옆에 있어 주고 싶어서. 나 밀어내지 마.”예나혜의 손이 닿자 양수원은 전기에라도 닿은 사람처럼 급히 손을 빼냈다.곧 이어 몇 걸음 물러서서 어두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목소리는 차가웠다.“네 걱정 필요 없어.”“오빠 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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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양수원은 그렇게 흥분해 상처 주는 말을 쏟아내는 예나혜를 처음 보았다.기억 속의 예나혜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늘 활발하고 예의 바르며, 막 사회에 나와 세상에 첫발을 디딘 사회 초년생 특유의 생기가 넘쳤다.손짓과 말투, 밝게 반짝이던 눈에서 그는 지난 시절의 아름다움을 엿보곤 했다.사람들은 강하임에게 닥친 불행을 안타까워했다.그리고 그 안타까움 끝에는 언제나 양수원을 향한 시선이 있었다.모두가 그에게 책임을 지라고 말하고 있었다.양수원이 짊어진 것은 자신과 강하임의 미래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도덕적 비난과 감시도 함께였다.그 교통사고 뒤로 그는 편안하게 잠든 적이 없었다. 끝없는 악몽에 시달리거나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양수원은 강하임을 떠나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책임을 피하려고 한 적도 없었다.사고 전에도 그랬고, 사고 뒤에는 더 그랬다.다만 세상일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강하임은 잇따른 불행에 무너졌고, 양수원도 변해 버린 현실을 견디지 못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늪으로 빠져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멈춰 버린 듯한 결혼 생활과 반복되는 하루 속에서, 양수원은 문득 밝았던 젊은 시절을 그리워했다.18살 이전의 강하임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모든 것을 그리워했다.그가 끌렸던 건 예나혜라는 사람 자체가 아니었다.그녀 곁에 있으면 자신이 아직 살아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멈춰 버린 듯한 결혼 생활 속에서, 그것은 오래 잊고 있던 감각이었다.예나혜와 함께하는 짧은 시간만이 양수원에게 마음의 짐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었다.그는 이 일이 드러나면 얼마나 큰 파장이 생길지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강하임이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생각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그럼에도 불안과 죄책감, 후회 뒤에는 늘 잠깐의 즐거움을 훔치고 싶다는 마음이 남았다.예나혜를 만나러 갈 때마다 양수원은 마음속으로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다짐했다.수많은 마지막을 지나고 나자, 그는 무뎌졌다. 중독된 사람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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