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이제 당신을 버릴 차례: Chapter 11 - Chapter 20

30 Chapters

제11화

남우는 외투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 나가기 전, 영은을 한 번 바라보았다.“잠깐 나갔다가 올게. 맑음이 잘 봐.”영은은 딸의 천진한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그리고 몸을 낮춰 아이 앞에 앉아, 두 손을 맑음의 어깨 위에 올렸다.“맑음아, 은희 아줌마랑 보미도 아빠 사랑이 필요하대. 아빠는 원래 우리 맑음이랑 즐겁게 놀고, 동화책도 읽어 줄 수 있었는데...”“이제 그 사람들을 만나러 가야 해서 우리 공주님 곁에 계속 있을 수가 없네.”그리고 일부러 잠깐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앞으로는 아빠한테 너무 매달리지 않는 게 좋을까?”맑음은 그 말에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엄마, 아빠 뺏기기 싫어.”영은은 자연스럽게 맑음을 품에 안고 등을 토닥였다.“우리 착한 딸, 아빠를 뺏기기 싫으면 네가 더 열심히 붙잡아야 해. 더 예쁘고 더 착하게 굴어야 아빠가 널 더 좋아하지.”“안 그러면 아줌마가 아빠를 데려가서 다시는 안 돌아올지도 몰라.”맑음의 작은 몸이 가늘게 떨렸다.아빠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이는 금방 혼란에 빠졌다.맑음은 영은의 옷자락을 꽉 쥐고 울먹였다.“엄마, 아빠 뺏기기 싫어. 아빠가 계속 나랑 있었으면 좋겠어.”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아이는 점점 더 크게 울었다. 숨이 꼬일 정도로 어깨가 들썩였다.영은은 맑음의 눈물을 닦아주며 계속 달랬다.“우리 귀요미. 네가 더 귀엽고 더 말 잘 들으면 아빠는 반드시 너를 더 좋아할 거야. 그러면 아줌마한테 빼앗기지 않아.”맑음은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얼굴에는 서러움이 가득했다.‘아빠를 꼭 붙잡아야 해!’‘그 은희 아줌마에게 빼앗기면 안 돼!’“그런데 엄마, 아빠가 맑음이만 좋아하면 보미 언니는 어떡해? 언니도 아빠 보고 싶을 텐데.”영은은 속이 답답해졌다.‘이 아이는 왜 이런 때까지 남을 걱정하는 거야?’“우리 맑음이는 너무 착해서 탈이야. 은희 아줌마가 너를 죽이려고 했던 거 잊었어? 그 사람들은 네가 행복한 걸 싫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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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남우는 은희의 말을 듣고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은희를 내려다보는 눈빛에는 숨길 생각조차 없는 냉기가 어려 있었다.그는 턱을 살짝 들었다. 목소리는 얼음장을 긁는 것처럼 차가웠다.“이제 가식 좀 그만 떨어. 어떻게든 보미를 나한테 안 보여 주려고 버티는 이유가 뭔데? 결국 나를 붙잡아 두고 그 틈에 영은이를 내쫓으려는 거잖아.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데, 그렇게 쉽게 네 뜻대로 될 것 같아?”그리고 말을 끊었다가 더 낮게 덧붙였다.“허황된 꿈은 이제 그만 깨시지.”은희는 허탈하게 웃었다. 서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정말 허세에 착각이 지나치네. 지금 내가 원하는 건 딱 하나야. 너랑 완전히 헤어지는 것. 다시는 엮이지 않는 것.”맞았다. 그녀는 강해져야 했다. 스스로 그 아름답고도 잔인한 꿈을 잘라 내야 했다.남우가 반박하려 입을 열자, 민영순이 매섭게 말을 끊었다.민영순은 남우를 노려보며 큰소리로 꾸짖었다.“입 다물어! 당장 은희한테 사과해. 네가 이 아이 마음을 이렇게 다 망가뜨려 놓고도 여기서 고개를 들고 말대꾸할 낯이 있어?”‘내가 언제 고은희 마음을 망가뜨렸다는 거야?’남우의 생각은 그랬다. 오히려 독하고 냉정한 쪽은 은희였다.‘예전에는 영원히 보미를 보여 주지 않겠다고 큰소리치며 딸을 볼모로 삼더니, 지금도 똑같네.’‘6년 전에도 그랬잖아.’‘나와 결혼하기 위해 약까지 쓰고, 목적을 이루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어.’‘그렇게 속을 알 수 없는 여자의 마음에 내가 어떻게 상처 입힌다는 거지?’하지만 혀끝까지 올라온 말은 민영순의 창백한 얼굴을 보는 순간 멈췄다.민영순은 가슴을 꼭 붙잡고 있었고, 두 손은 떨리고 있었다. 핏기 없는 얼굴은 금세라도 쓰러질 사람처럼 보였다.남우는 결국 말을 삼켰다.민영순은 한참 숨을 고른 뒤에야 거친 숨 사이로 말했다.“정말 나까지 쓰러뜨려야겠니? 내 심장이 네 고집을 받아 줄 만큼 튼튼한 줄 알아? 네가 또 이러면 나 진짜 쓰러진다.”남우는 이를 악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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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민영순은 금세 흐뭇하게 웃었다. 마음 졸이던 걱정도 조금은 풀린 듯했다.그녀는 헛기침하고 입을 열었다.“아이고, 봐라. 젊은 부부 싸움이 뭐 그리 오래 가겠니? 밤도 늦었는데 둘 다 그만 고집부리고 방에 들어가서 쉬어라.”은희와 남우는 거의 동시에 눈을 크게 떴다. 이어 한목소리로 반박했다.“안 됩니다!”둘 다 동시에 거절할 줄은 서로도 몰랐다. 특히 남우는 기분 나쁜 듯 미간을 찌푸렸다.은희가 남우의 손길을 거절한 게 벌써 두 번째였다.두 번까지는 몰라도 세 번은 넘지 말아야 했다. 밀고 당기기도 정도가 있는 법이었다.민영순의 얼굴은 곧장 어두워지면서 다시 가슴에 손을 올렸고, 숨이 가빠졌다.“너희 둘, 정말 나 죽는 꼴을 봐야 속이 시원하겠니? 내 심장이 이런 일을 몇 번이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민영순의 상태가 나빠지는 것을 막으려면 두 사람은 더 버틸 수 없었다.결국 둘 다 굳은 얼굴로 방을 향해 걸어갔다.방에 들어서자마자 은희는 남우와 거리를 두었다. 온몸이 경계로 바짝 굳어 있었다.마치 남우가 위험한 낯선 사람이라도 되는 듯했다.은희는 두 팔을 가슴 앞에 모은 채 차갑게 말했다.“나한테서 떨어져. 손도 대지 마.”남우의 입꼬리가 비틀렸다.“걱정 마. 지금 네 몸 상태, 건드리기만 해도 쓰러질 것 같은데 나도 굳이 만지고 싶진 않아.”은희는 그의 조롱을 못 들은 사람처럼 넘겼다. 곧장 침대 쪽으로 가 뻣뻣하게 누웠다.등을 돌리고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단단히 감쌌다....밤이 깊었다.은희도 너무 지쳐 있었다. 이 많은 일을 겪는 동안 제대로 잠든 적이 없었다.방 안은 조용했다. 두 사람의 옅은 숨소리만 희미하게 오갔다.얼마 뒤, 은희는 몸 안에서 이상한 열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피부가 따갑게 달아오르고 온몸이 견디기 어려울 만큼 답답했다.볼이 뜨겁게 달아올랐고, 숨이 가빠졌다.남우도 그 낯선 열기에 시달리고 있었다. 의식은 조금씩 흐려졌고, 몸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그는 본능처럼 은희에게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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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은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난간을 꽉 붙잡은 채 어떻게든 정신을 붙들어야 했다.그러나 몸 안에서 올라오는 열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그녀는 발코니 위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 참기 힘든 열기 때문에 몸에 힘이 빠지고, 다리는 계속 떨렸다. 조금만 방심해도 그대로 무너질 것 같았다.그때 발코니 문이 열리고 남우가 모습을 드러냈다.은희는 상처 입은 사람처럼 그를 경계했다.“밖에서 버티지 말고 들어와.”그 목소리는 쉰 듯 낮았다.지난 6년간 하남우의 아내였던 은희는 그가 극한까지 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녀는 난간을 더 세게 움켜쥐고 소리쳤다.“다가오지 마! 한 발만 더 다가오면 나 여기서 뛰어내릴 거야!”남우는 은희의 반응이 이토록 격할 줄 몰랐다.‘이것도 밀당인가?’“방 안엔 지금 아무도 없어. 더는 아무 짓 안 해. 들어와. 할머니 걱정하게 만들지 말고.”은희는 남우의 말을 믿어도 되는지 살피듯 한참 그를 바라보았다.둘 사이에 팽팽한 침묵이 흘렀다.그런데도 남자의 작은 숨소리마저 은희의 몸을 더 뜨겁게 만들었다.은희의 몸은 자신을 배신하고 있었다.남우를 향한 오랜 사랑이 며칠 만에 사라질 리 없다는 사실이 잔인하게 드러났다.‘못났다, 고은희. 정말 못났다.’그녀는 속으로 자신을 욕하며 아주 천천히 난간에서 손을 떼었다.흔들리는 걸음으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더는 버틸 수 없었다. 이 남자와 좁은 공간에 더 오래 있으면 정말 무너질 것 같았다.방에 들어오자마자 그녀는 욕실로 향했다. 차가운 물로 몸의 열기를 식혀야 했다.수도꼭지를 틀자 차가운 물이 뜨거운 피부 위로 쏟아졌다.차가운 물이 닿자 흐릿하던 의식이 서서히 맑아졌다. 몸 안의 열도 조금씩 가라앉았다.샤워를 마친 은희는 목욕가운을 걸치고 욕실 밖으로 나왔다.젖은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하얀 목덜미를 타고 내려온 물은 목욕가운의 깃을 적셨다.남우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손은 주먹처럼 쥐어져 있었고,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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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민영순은 손을 크게 내저으며 곁의 고용인들에게 명령했다.“당장 아이를 병원으로 데려가. 지금 바로 병원으로 보내. 여기서 저 여자가 시간 끌게 두지 마.”고용인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머뭇거렸다.“내 말도 거역하겠다는 거냐?”호통이 떨어지자 고용인들은 몸을 떨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다가갔다.그 고용인들은 영은의 품에서 맑음을 떼어 냈다.아픈 데다 놀란 맑음은 크게 울었다. 작은 손을 허공에 휘저으며 목이 찢어져라 외쳤다.“엄마! 엄마!”영은은 아이를 다시 빼앗으려 발버둥 쳤지만, 몇몇 고용인이 그녀를 단단히 붙잡았다. 영은의 손톱이 고용인들의 팔에 상처를 냈다.“내 아이 데려가지 마! 돌려줘! 돌려줘!”울부짖느라 목소리는 갈라지고 거의 나오지 않았다.민영순은 그 모습을 보고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똑똑히 들어라. 오늘부터 자네는 우리 집 문턱을 넘지 마라. 또 수작 부리면 그때는 정말 가만두지 않겠다.”말을 마친 민영순은 몸을 돌렸다.‘내가 저런 여우 하나를 못 다룰 줄 알고?’‘무슨 일이 있어도 저 여자가 은희와 남우의 결혼을 망치게 둘 수는 없어!’영은은 울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남우를 찾고 있었다.하지만 남우는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얼마 뒤, 계단에서 한 사람이 내려왔다.영은은 남우인 줄 알고 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나타난 사람은 남우가 아니었다.그토록 미워하는 은희였다.은희는 차분한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왔다.“소영은 씨, 눈치가 있으면 그만 가요. 여기서 더 추해지지 말고요.”영은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곧 감정을 정리하고, 다시 가엾고 약한 얼굴을 만들었다.그녀는 눈물 어린 눈으로 은희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은희 씨, 저는 정말 은희 씨 남편을 빼앗으려는 게 아니에요. 맑음이가 걱정돼서 그래요. 아이가 아프잖아요. 제발 하 대표가 맑음이를 한 번만 보게 해 주세요. 맑음이는 아빠가 필요해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영은의 몸이 휘청였다.털썩-곧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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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할머니, 맑음이는 어떻게 됐습니까? 어디로 데려가셨습니까?”딸이 관련된 일이라 남우의 얼굴이 바로 변했다.그러나 이토록 뻔한 이간질에도 민영순은 차갑게 웃기만 했다. 그 정도 수법은 민영순에게 너무 얕았다.“아이가 아프다니 당연히 병원으로 보냈다. 내가 아이를 학대하기라도 하겠니?”민영순은 잠깐 말투를 낮추었다가, 곧 비꼬듯 덧붙였다.“오히려 이 여자가 우리 집안 앞에서 소란을 피우며 집안 망신을 시켰지. 초대받지도 않은 사람이 제 발로 들어왔으니, 하씨 집안은 자네를 환영하지 않는다. 지금 나가지 않으면 자네에게도 내가 직접 벌을 내리겠다.”영은은 무릎 꿇은 남우와 등에 남은 매 맞은 흔적을 보았다.속으로는 은근히 기뻤다.‘하남우... 나 때문에 벌받은 거야.’그녀는 민영순의 경고를 무시한 채 울먹였다.“남우야, 미안해... 나 때문에...”남우는 이를 악물고 통증을 견디며 낮게 말했다.“내 걱정은 하지 마. 너는 나가.”“싫어. 맑음이가 있는 곳에 나도 있을 거야. 난 맑음이 엄마잖아. 아이 곁을 지켜야 해.”민영순은 뻔뻔한 여자를 많이 보아 왔다.영은은 바로 그중 하나였다.‘버티겠다고?’‘그런 여자 다루는 법 정도는 나도 잘 알고 있지.’민영순이 옆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사람 불러! 이 여자 붙잡아. 벌을 내려라!”고용인들이 급히 들어왔다. 더는 꾸물거릴 수 없었다.영은은 눈을 크게 뜨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했다.하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끝까지 떠나지 않았다.“회장님, 제가 잘못했다면 벌은 받겠습니다. 하지만 제발 맑음이만은 제게 돌려주세요.”민영순은 불쾌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더 말하지 않고 손짓했다.매질이 시작됐다.영은은 통증에 온몸을 떨고 식은땀을 흘렸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비명을 삼켰다.한차례 매질이 끝났을 때, 영은은 거의 숨만 붙은 사람처럼 바닥에 늘어졌다.옷에는 피가 번졌고, 머리카락은 얼굴에 달라붙어 형편없이 흐트러졌다.고용인들은 조금의 정 없이 영은을 밖으로 끌어냈다. 아무렇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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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우리 맑음이를 아빠가 왜 버려? 아빠가 이렇게 왔잖아.”말을 마친 그는 뒤늦게 무언가를 떠올린 듯 차갑게 말했다.“고은희, 맑음이한테서 떨어져.”“아빠, 아줌마 혼내지 마. 아줌마 나한테 잘해 줬어.”영은이 평소 맑음 앞에서 은희를 ‘아줌마’라고 부르며 험담했기 때문이었다.아이가 아무렇지 않게 아줌마라고 부르자, 남우는 낮게 비웃었다.은희는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병실에 처음 들어왔을 때 아이가 경계했던 것도 이해했다.영은은 분명 은희에 대해 많은 험담을 했을 것이다.맑음이 은희를 무서워하는 건 자연스러웠다.그러나 은희는 어른들의 싸움을 아이에게 옮기는 짓은 하지 않았다.맑음도 결국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였다.남우는 그 이야기를 더 이어 가지 않았다. 곧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돌렸다.“맑음아, 다 나으면 아빠가 네가 제일 좋아하는 장난감 사 줄게. 좋지?”맑음은 울음을 멈추고 금세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은희는 그 따뜻한 부녀의 대화를 듣고 가슴 한쪽이 저릿해졌다.더는 이곳에 있을 수 없었다.그녀는 아무 말 없이 병실을 나갔다.남우는 맑음을 재우고 침대에 다시 눕힌 뒤, 조심스럽게 이불을 덮어주었다.그제야 소리 죽여 병실 밖으로 나왔다.문을 나서자 은희가 아직 가지 않은 것이 보였다.‘역시 나한테 할 말이 있었어.’‘여기까지도 결국 밀고 당기기였다는 거지.’남우는 다가가 헛기침했다.“날 기다린 이유가 뭐야?”그는 은희가 제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할 것으로 생각했다.그래서 이번에는 바로 받아 주지 말고 조금쯤 애태워야겠다고까지 마음먹었다.“할머니가 지금 우리 일에 너무 신경 쓰고 계셔. 할머니를 더 자극하지 않으려면, 앞에서는 서로 잘 지내는 척을 해 줬으면 해. 딱 할머니 앞에서만.”‘할머니 때문에 화해한 척?’남우는 속으로 웃었다. 핑계가 너무 조잡했다.“내가 널 용서해 주길 바란다면 이런 말 한마디로는 부족하지.”그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은희는 이마를 짚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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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하지만 차갑고 선명한 전송 실패 표시가 떴다. 은희는 아직도 남우를 차단하고 있었다.남우는 불쾌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곧 다른 번호로 은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네 말대로 할게.]보낸 뒤 그는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러나 다음에 나타난 것도 익숙한 실패 표시였다.“고은희, 정말 말이 안 통해.”그는 낮게 욕하며 핸드폰을 의자 위에 던졌다.곧 다시 핸드폰을 집어 들고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 네 핸드폰으로 고은희에게 문자 보내. ‘네 말대로 할게.’ 한 글자도 틀리지 말고.”그 시각 은희는 낯선 번호로 온 문자를 받았다.내용을 보자마자 남우가 비서를 시킨 것임을 알 수 있었다.남우의 생각을 알았으면 됐다. 답장 보낼 생각은 없었다.그녀는 핸드폰을 옆에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다시 보지 않았다.남우는 은희의 답장을 기다렸다. 밤새워 기다렸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결국 분에 못 이겨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그 뒤로 남우와 은희는 민영순 앞에서만 다정한 부부인 척했다.민영순은 두 사람이 그럭저럭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을 보며 크게 안도했다.시간이 흐르자 두 사람의 일에 예전만큼 깊이 개입하지도 않았다....이날 하진그룹 회의실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남우는 차가운 얼굴로 각 부서 책임자의 보고를 들었다. 손에 쥔 펜은 서류 위를 오가며 주요 대목에 표시를 남겼다.마케팅팀 본부장이 신규 시장 확장 계획을 보고하던 중, 남우가 말을 끊었다.“리스크 평가가 부족합니다. 잠재 경쟁사에 대한 대응 전략도 너무 보수적입니다. 계획 전반을 다시 조정해야 합니다.”그때 회의 테이블 한쪽에 앉아 있던 하세준이 코웃음을 쳤다.“형, 내가 보기엔 꽤 괜찮은 계획 같은데. 굳이 그렇게 흠잡을 필요 있어? 시장 환경은 언제든 바뀌잖아. 너무 공격적으로 나가면 오히려 회사가 위험해질 수도 있어.”남우의 눈빛이 바로 차갑게 가라앉았다.그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회사에서는 ‘대표님’이라고 불러. 회사 발전에는 앞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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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남우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감정을 가라앉힌 뒤 전화를 받았다.“할머니, 무슨 일이세요?”[네가 회사에서 세준이와 다퉜다는 말을 들었다. 둘 다 하씨 집안 핏줄인데 무슨 일이든 대화로 풀어야지. 남들이 알면 웃음거리 된다.]‘말 전하는 건 빠르네.’“할머니, 오해하신 겁니다. 세준이는 회사 경영권을 노리고 있습니다. 제 눈으로 회사가 흔들리는 걸 뻔히 두고 볼 수는 없어요.”민영순은 잠시 말이 없었다.[네가 회사에 많이 애쓴다는 건 안다. 그래도 시간을 내서 세준이와 제대로 얘기해 봐라. 집안이 안에서부터 갈라지면 하진그룹이 흔들린다.]남우는 관자놀이를 눌렀다.“알겠습니다. 시간을 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지난번 민영순에게 매를 맞은 뒤, 영은은 줄곧 청월힐스에 있는 집에서 몸을 추스르고 있었다.맑음이 열이 내린 뒤 남우는 아이를 다시 영은 곁으로 돌려보냈다.그 일 이후로 남우는 청월힐스의 집에 거의 가지 않았다.효찬이 바로 옆집에 있는데도, 영은은 가까운 곳을 두고 굳이 하씨 집안 본가까지 찾아와 소란을 피웠다.남우가 그 의도를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아이의 생명을 빌미로 삼았다는 사실은 남우에게도 불쾌했다.영은은 그런 남우의 생각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녀는 부드러운 소파에 기대 핸드폰 화면을 천천히 쓸어 넘겼다. 몸은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그러나 은희에 대한 증오는 더 커졌다.영은은 입술을 깨물고 세준에게 전화를 걸었다.곧 전화기 너머에서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이게 누구예요? 소영은 씨가 갑자기 나한테 전화를 다 하네요?]영은은 속에서 치미는 역겨움을 눌러 삼키고 일부러 가련한 목소리를 냈다.“전무님, 제가 부탁할 일이 있어요. 요즘 고은희의 행동이 너무 지나쳐요.”그녀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모두 털어놓았다.세준은 비웃듯 말했다.[그쪽이 부린 그런 여우 같은 수작은 민영순 눈에는 너무 뻔해요. 통할 리가 없죠.]“장난하지 말아요.”영은은 이를 악물었다.“전무님이 맑음이를 납치해요. 가능하면 반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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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남우와 다정한 부부인 척 지내는 동안에도 은희는 예전처럼 수애를 통해 많은 작곡 의뢰를 받았다.다만 이번에는 반드시 의뢰인이 누구인지 먼저 확인해야 했다.지난번 같은 일이 또 생기면 안 됐다.하지만 지난 의뢰는 워낙 좋지 않게 끝났다.이번에도 수애에게 한바탕 혼날 가능성이 컸다.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은희는 전화를 걸었다. 손끝은 무의식적으로 책상 위를 톡톡 두드렸다.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수애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뚫고 나올 듯 커졌다.[은희 씨, 드디어 연락했네! 지난번 은희 씨가 써 준 악보 원고, 의뢰인이 엄청 만족했어. 계속 나한테 은희 씨 또 연결해 달라고 난리야. 은희 씨 실력 진짜 더 좋아졌더라!]은희는 멍해졌다.‘지난번 악보에 만족했다고?’‘그럴 리가 없었을 텐데...’그녀는 악보를 찢어 버렸고, 5억이라는 거액의 위약금까지 떠안게 됐다.어느 쪽으로 봐도 만족할 상황이 아니었다.“언니, 정말이야? 혹시 다른 의뢰인이랑 착각한 거 아니고?”수애가 관리하는 작곡가는 은희뿐이 아니었다. 헷갈렸을 가능성이 더 커 보였다.수애는 시원하게 웃었다.[아니야, 착각 아니야. 의뢰인이 만족했다면 그게 제일 큰 칭찬이지. 은희 씨는 그냥 계속 잘해. 앞으로 일 많이 들어올 거야.]은희는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하남우가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지?’“언니, 그 의뢰인하고 직접 얘기할 수 있을까?”[당연하지. 잠깐만.]수애에게 연락처를 받은 은희는 곧 전화를 걸었다.통화가 연결되자 차분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네, 진효찬입니다.]“저예요, 효찬 씨. 수애 언니한테 들었어요. 지난번 악보가 마음에 드셨다고요. 이번 의뢰도 그 사람 쪽인가요, 아니면 효찬 씨 개인 의뢰인가요?”은희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효찬의 말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은희 씨, 이번엔 제 개인적인 부탁입니다. 며칠 뒤 저희 할머니 생신이거든요. 음악을 무척 좋아하시는 분이라, 할머니를 위한 곡을 하나 부탁드리고 싶습니다.]그는 잠시 덧붙였다.[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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