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ua Bab 완벽한 이혼을 위하여: Bab 1 - Bab 10

12 Bab

제1화. 완벽한 파멸, 그리고 비 내리는 밤

도어락이 열리는 경쾌한 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낯설게 들렸다.삐릭- 덜컥.한채원은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피로가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지만,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한성그룹 전략기획실 본부장으로서 지난 한 달간 매달렸던 유럽 지사 인수합병 건을 마침내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원래대로라면 내일 오후 비행기로 귀국해야 했지만, 그녀는 일정을 무리하게 당겼다.내일은 그녀의 약혼자, 강민호와의 교제 3주년 기념일이었으니까.“민호 씨, 나 왔어요. 놀랐죠?”현관에 구두를 벗어두며 조용히 불렀지만, 집 안은 고요했다. 채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민호의 차는 분명 주차장에 있었는데.거실로 들어선 그녀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옷가지들 때문이었다.민호의 짙은 네이비 넥타이.그의 하얀 셔츠.그리고…….‘……빨간색 레이스 속옷?’채원의 미간이 차갑게 굳어졌다.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화려하고 장식이 많은 속옷을 즐겨 입지 않았다. 무엇보다 집 안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는 이 낯설고 짙은 향수 냄새.샤넬 No.5.그녀의 이복동생, 한유라가 시그니처처럼 뿌리고 다니는 바로 그 향수였다.채원의 심장이 불길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하지만 바닥에 점점이 이어진 옷가지들의 궤적은 정확히 2층, 채원과 민호가 함께 사용하는 침실로 향하고 있었다.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갈 때마다 정체불명의 신음소리가 귓전을 때렸다.“아, 흣… 오빠, 더…….”“유라야, 잠깐만… 미치겠네, 진짜…….”채원의 발걸음이 안방 문 앞에서 멈췄다.문은 아주 살짝 열려 있었고, 그 틈새로 적나라한 파열음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채원은 떨리는 손을 뻗어 문고리를 쥐었다.그리고 망설임 없이, 차갑게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쾅-!문이 벽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침대 위에서 엉켜 있던 두 남녀의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멈췄다.“…….”“…….”채원은 표정 없이 눈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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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빗속의 도박

차가운 빗방울이 온몸을 사정없이 때렸다.청담동의 외진 길가. 한채원은 젖은 생쥐 꼴로 터덜터덜 걸었다.얇은 블라우스는 이미 살죽에 들러붙어 체온을 사정없이 빼앗아 갔고, 치마 밑단에서는 연신 더러운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구두조차 빼앗긴 맨발은 이미 감각이 마비된 지 오래였다. 아스팔트 바닥에 긁혀 피가 흐르는지도 몰랐다.“하…….”입을 열 때마다 하얀 김이 뿜어져 나왔다.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휴대폰도, 지갑도, 심지어 입고 있던 코트마저 배정아의 손에 빼앗겼다.지금 당장 공중전화가 보인다고 해도 누구에게 전화를 걸 수 있을까.친한 친구들?그들은 모두 한성그룹의 권력 아래에 있는 이들이었다. 내일 아침, 한채원이 500억 원을 횡령하고 쫓겨났다는 뉴스가 도배되면 그들 중 누구도 제 전화를 받지 않을 터였다.‘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어.’채원은 이를 악물었다.여기서 쓰러지면 배정아와 한유라의 뜻대로 되는 것이다. 친어머니의 묘소는 파헤쳐질 것이고, 자신은 평생 횡령범이라는 낙인을 찍힌 채 밑바닥을 전전하게 되겠지.그 꼴을 보느니 차라리 한강에 뛰어드는 게 나을 지경이었다.하지만 채원은 죽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죽어야 할 인간들은 자신이 아니라, 제 침대를 더럽힌 강민호와 제 인생을 통째로 훔쳐 간 한유라, 그리고 배정아였으니까.‘방법을 찾아야 해. 내가 가진 카드가 뭐가 있지?’걸음을 옮기며 채원은 머리를 미친 듯이 굴렸다.돈도 없고, 백도 없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지난 10년간 한성그룹의 핵심부에서 일하며 쌓아온 지식과 비즈니스 감각이 있었다.그리고 상류층의 은밀한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때, 채원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서도진.’국내 재계 서열 1위인 JS그룹의 핵심, 그리고 냉혈한이라고 소문난 젊은 대표.채원은 지난달 유럽 지사 인수합병 건을 추진하면서 비공식 라인을 통해 JS그룹 내부의 극비 정보를 접한 적이 있었다.JS그룹의 창업주인 서 회장이 최근 지병이 악화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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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증명된 가치, 그리고 내밀어진 계약서

새벽 3시.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JS 타워 펜트하우스.게스트룸의 두꺼운 암막 커튼 밖으로는 여전히 거센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방 안을 채우는 것은 오직 태블릿 PC 화면을 두드리는 건조하고도 빠른 마찰음뿐이었다.탁, 탁, 타닥. 탁.한채원은 젖은 몸을 씻어내고 펜트하우스 전담 메이드가 내어준 넉넉한 사이즈의 남성용 셔츠와 바지로 갈아입은 상태였다.메이드가 구급상자를 가져와 피투성이가 된 맨발을 소독하고 붕대를 감아주었지만, 그녀는 상처를 내려다볼 여유조차 없었다.'시간이 없어.'도진이 준 시간은 아침 7시까지. 단 4시간.그 안에 자신이 왜 JS그룹 후계자의 완벽한 아내가 될 수 있는지, 그리고 한성그룹을 어떻게 뒤흔들어 서도진의 적들에게 타격을 줄 것인지 완벽한 기획안을 짜내야 했다.화면을 노려보는 채원의 눈동자에 시퍼런 핏발이 섰다.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고 명석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한성그룹의 숨겨진 지분 구조, 계모 배정아가 관리하는 페이퍼 컴퍼니의 자금 흐름, 그리고 JS그룹 내에서 서도진의 사촌들이 벌이고 있는 권력 암투까지.지난 수년간 전략기획실에서 밤낮없이 일하며 머릿속에 구겨 넣었던 정보들이, 지금 이 순간 생존을 위한 가장 날카로운 무기가 되어 화면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배정아, 네가 날 쫓아내며 완벽하게 이겼다고 생각했겠지.”채원의 메마른 입술 사이로 서늘한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하지만 넌 가장 큰 실수를 한 거야. 내 머릿속에 있는 폭탄을 제거하지 않고 날 밖으로 내던졌으니까.”화면 위로 복잡한 마인드맵과 자금 추적표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피로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배신감과 증오, 그리고 억울함이 지독한 아드레날린이 되어 온몸을 태우고 있었다.반드시 살아남아, 그들을 찢어발길 것이다.같은 시각. 펜트하우스 반대편에 위치한 서도진의 개인 서재.최고급 마호가니 책상 앞에 앉은 도진은, 한 손에 크리스탈 글라스를 든 채 김 비서가 건넨 태블릿 화면을 무심하게 넘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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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악마와의 거래조건

 오전의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펜트하우스의 다이닝룸.하지만 한채원의 시선은 창밖의 풍경이 아니라, 테이블 위에 놓인 세 장짜리 서류에 고정되어 있었다.[ 혼 인 계 약 서 ]가장 상단에 적힌 다섯 글자가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녀의 망막을 찔렀다.채원은 천천히 손을 뻗어 서류를 집어 들었다. 최고급 특수 용지의 사각거리는 촉감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불과 어젯밤까지만 해도 길바닥에 버려진 빈털터리였던 자신이, 지금은 대한민국 재계 1위 JS그룹 후계자의 아내 자리를 제안받고 있다.이 비현실적인 상황 앞에서도 채원의 머리는 무서울 정도로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스윽-.서류를 넘기는 소리만이 고요한 방 안을 채웠다.맞은편에 앉은 서도진은 등받이에 깊숙이 기댄 채, 여유로운 눈빛으로 그녀의 표정 변화를 관찰하고 있었다.채원의 시선이 서류의 첫 번째 페이지, 제1조 항목에서 멈췄다.“제1조. 본 계약의 유효 기간은 서명일로부터 정확히 1년으로 한다. 1년 후, 양측은 합의 이혼 절차를 밟으며, 갑(서도진)은 을(한채원)에게 위자료 명목으로 JS 건설이 보유한 강남의 상업용 빌딩 세 채와 현금 100억 원을 지급한다.”채원이 건조한 목소리로 항목을 소리 내어 읽자, 도진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위자료치고는 나쁘지 않은 조건일 텐데. 네가 한성에서 쫓겨나면서 잃어버린 자산을 보전하고도 남을 금액이야. 어때, 마음에 드나?”“돈은 필요 없습니다.”채원의 단호한 대답에 도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돈이 필요 없다고? 어제 빈몸으로 쫓겨난 여자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닌 것 같은데.”“제 목표는 한성그룹을 되찾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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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완벽한 타격, 그리고 세기의 난입

 서울 도심의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신라호텔 영빈관 다이너스티 홀.대한민국 재계를 주름잡는 VVIP들과 유력 언론사 기자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비는 이곳에서는, 오늘 한성그룹의 경사가 열리고 있었다.화려한 크리스탈 샹들리에 아래, 최고급 샴페인 잔이 쉴 새 없이 부딪치는 소리가 홀 안을 가득 채웠다.“호호, 감사합니다. 우리 유라가 워낙 사람 보는 눈이 까다로워서 걱정했는데, 강 서방 같은 훌륭한 짝을 만나 어미로서 시름을 덜었지 뭡니까.”한성그룹 회장의 후처이자 현재 실세로 군림하고 있는 배정아가 특유의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하객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오늘 약혼식의 주인공인 한유라와 강민호가 다정하게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어머, 배 이사님도 참. 강 본부장님 정도면 한성그룹의 든든한 날개가 되고도 남죠. 두 사람 너무 잘 어울려요.”한 임원의 아내가 아부를 떨자, 한유라가 콧대를 높이며 민호의 팔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그럼요. 오빠는 저한테 과분할 정도로 다정한 사람인걸요.”“유라 네가 더 예쁘지. 오늘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걸.”민호가 유라의 귓가에 대고 달콤하게 속삭였다. 겉보기에는 그림처럼 완벽한 선남선녀의 모습이었다.하지만 하객들 사이에서는 은밀한 귓속말이 독사처럼 기어 다니고 있었다.“근데, 원래 강 본부장 약혼녀는 첫째 딸인 한채원 본부장 아니었나?”“쉿, 목소리 낮춰. 한채원 어제 500억 횡령 터져서 한성 본가에서 빈몸으로 쫓겨났잖아.”“세상에, 진짜야? 어쩐지 얼굴이 안 보이더라니. 그럼 강 본부장은 한채원 버리고 바로 동생으로 갈아탄 거야?”&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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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뱀의 소굴, 그리고 포식자의 증명

 평창동을 오르는 산길.양옆으로 늘어선 수십 년 된 소나무들이 기괴한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 사이를 미끄러지듯 달리는 롤스로이스 팬텀의 뒷좌석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어제는 꽤 볼만했어.”침묵을 깬 것은 서도진이었다. 그는 태블릿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건조하게 입을 열었다.“신라호텔을 발칵 뒤집어놓고도 넌 아주 평온하게 잠들더군. 벼락 맞은 강민호와 한유라의 표정이 아직도 아른거리는데 말이야.”“쓰레기들을 분리수거장에 처넣었다고 해서 죄책감을 느끼거나 흥분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그저 당연한 수순이었을 뿐입니다.”한채원은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고급 저택들을 응시하며 무심하게 대답했다.오늘 그녀의 차림새는 어제의 화려한 오뜨 꾸뛰르 드레스와는 180도 달랐다. 단정하지만 빈틈없이 재단된 화이트 트위드 투피스. 과한 장신구는 모두 배제하고, 오직 도진이 어제 선물한 스위스 하이엔드 브랜드의 심플한 시계만을 찼다.단아하고 우아했지만, 그녀의 등줄기는 칼날처럼 꼿꼿하게 서 있었다.“오늘 갈 곳은 어제 그 삼류들 약혼식장과는 차원이 다를 텐데. 긴장하는 기색조차 없군.”도진이 태블릿을 덮고 채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JS그룹 본가. 내 혈육들이지만, 하나같이 독을 품은 뱀들이 득실거리는 소굴이지. 한성그룹 회장의 혼외자에, 어제 막 500억 횡령범으로 쫓겨난 여자가 내 아내가 되겠다고 나타났으니. 그들이 널 어떻게 물어뜯을지 짐작은 가나?”“뱀들이 독을 품어봤자, 머리통을 짓밟으면 그만입니다.”채원이 도진과 시선을 맞추며 서늘하게 미소 지었다.“걱정 마세요. 대표님 얼굴에 먹칠하는 일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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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선(線), 그리고 예고 없는 침범

 서울 한남동 유엔빌리지.한강의 야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최고급 펜트하우스의 현관문이 열렸다.“들어와.”서도진의 짧은 축객령 같은 허락에, 한채원은 캐리어 하나를 끌고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수백 평에 달하는 실내는 주인의 성정을 닮아 차갑고 건조했다. 무채색 위주의 최고급 가구들, 먼지 한 톨 허락하지 않을 것 같은 완벽한 대리석 바닥, 그리고 생활감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서늘한 공기까지.사람이 사는 집이라기보다는 거대한 갤러리나 고급 호텔의 스위트룸에 가까웠다.도진은 재킷을 벗어 소파에 아무렇게나 던져두고는, 거실 중앙에 우두커니 서 있는 채원을 향해 돌아섰다.“짐은 그게 다인가?”채원의 손에 들린 것은 기내용 사이즈의 작은 블랙 캐리어 하나가 전부였다.“네. 한성 본가에서 쫓겨날 때 입고 있던 옷과 핸드백, 그리고 김 비서님이 따로 챙겨주신 기초적인 물품 몇 개가 전부입니다.”“대한민국 재계 10위권 안에 드는 한성그룹의 장녀 치고는 처량한 살림살이군.”“이제 장녀가 아니라 횡령범으로 호적에서 파이기 직전이니까요. 쓸데없는 짐이 없는 편이 움직이기 가볍고 좋습니다.”채원의 무덤덤한 대답에 도진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어제부터 느낀 거지만, 이 여자는 동정심을 유발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도진은 걸음을 옮겨 거실 한쪽에 마련된 바(Bar)로 다가갔다. 크리스탈 글라스에 헤네시 한 잔을 따르며 그가 입을 열었다.“이쪽으로 와서 앉아.”채원이 캐리어를 한쪽에 세워두고 소파에 앉자, 도진이 맞은편 1인용 소파에 자리를 잡고 다리를 꼬았다.그는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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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쥐덫, 그리고 사냥개의 이빨

 다음 날 아침.간밤의 폭풍 같았던 텐션은 언제 그랬냐는 듯, 펜트하우스의 공기는 다시 서늘하고 건조하게 가라앉아 있었다.한채원은 완벽하게 세팅된 블랙 수트 차림으로 1층 거실로 내려왔다.다이닝 테이블에는 서도진이 커피를 마시며 태블릿으로 뉴스를 확인하고 있었다. 어젯밤 이성을 잃고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던 남자의 흔적은 단 1퍼센트도 남아있지 않았다.“나갑니까.”채원이 무심하게 묻자, 도진이 태블릿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오전 10시에 JS 본사에서 임원 회의가 있어. 당신은?”“한성건설 재무팀장이었던 박 부장을 만나러 갑니다. 배정아 이사의 차명 계좌 내역을 넘겨받기로 했거든요. 그것만 손에 넣으면 500억 횡령 누명은 오늘 안으로 벗을 수 있습니다.”그제야 도진이 고개를 들어 채원을 쳐다보았다.그의 시선이 채원의 목덜미 쪽에 잠시 머물렀다가, 이내 탁자 위로 떨어졌다. 그는 옆에 놓여 있던 작은 벨벳 케이스를 채원 쪽으로 밀었다.“이게 뭡니까?”“차고 가.”케이스 안에는 군더더기 없이 매끈하게 빠진 블랙 메탈 소재의 스마트 워치가 들어 있었다.“이런 액세서리는 필요 없습니다만.”“내 파트너가 밖에서 객사하는 건 곤란하니까. 어제 한성 본가에서 사촌들을 물어뜯어 놓은 덕분에 당신을 주시하는 눈이 한둘이 아닐 거다. 최소한의 위치 추적과 긴급 구조 신호가 연동되어 있는 기기야. 빼지 말고 차.”어젯밤의 일에 대한 미안함인지, 아니면 철저한 비즈니스적 통제인지 알 수 없었지만 채원은 군말 없이 시계를 손목에 찼다.“다녀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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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사냥개의 분노, 그리고 요동치는 심장

 상황은 불과 30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JS그룹 본사 120층, 대회의실.숨 막히는 적막 속에서 내년도 핵심 전략 사업에 대한 임원진의 브리핑이 이어지고 있었다. 단상에 선 기획조정실장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고, 거대한 마호가니 테이블 상석에 앉은 서도진은 서늘한 눈빛으로 스크린의 수치들을 해체하듯 뜯어보고 있었다.“그래서, 리스크 대비 수익률이 고작 4퍼센트라는 겁니까? 그딴 쓰레기 같은 기획안을 들고 내 시간을 뺏으러 온 용기는 가상하군.”도진의 건조한 독설이 회의실을 얼어붙게 만든 바로 그 순간이었다.지이이잉- 지이이잉-!도진의 왼쪽 손목에 채워진 블랙 메탈 워치에서 신경질적인 진동과 함께 요란한 붉은빛이 점멸하기 시작했다.오늘 아침, 한채원에게 강제로 채워 보냈던 스마트 워치와 페어링 된 긴급 SOS 신호였다.도진의 미간이 일그러졌다.그는 브리핑 중이던 임원의 말을 자르고, 즉시 워치의 액정을 터치했다.화면에 정밀한 GPS 지도가 떠오르며, 마포구 합정동의 인적 드문 재개발 구역 한가운데를 붉은 점이 미친 듯이 가리키고 있었다.‘한채원.’그녀는 지금 한성건설 박 부장을 만나러 간다고 했다. 사람이 많은 번화가도 아니고, 철거를 앞둔 폐건물 밀집 지역에서 SOS 신호가 울린다?머릿속에서 최악의 시나리오들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회의 중단해.”도진이 자리에서 거칠게 일어났다.의자가 뒤로 밀리며 바닥을 긁는 날카로운 소리에 임원들이 일제히 기겁하며 그를 쳐다보았다.“대, 대표님. 아직 브리핑이 절반도 끝나지…….”“당장 중단하라고 했습니다. 내 말이 안 들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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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포식자의 간호, 그리고 쥐새끼의 발악

 의식은 깊은 물속에서 천천히 떠오르듯 돌아왔다.코끝을 스치는 옅은 소독약 냄새.규칙적으로 허공을 가르는 산소 발생기의 백색소음.그리고,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지독한 근육통.한채원은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 올렸다.시야가 흐릿하게 번지다 이내 선명해졌다. 고급스러운 간접 조명이 은은하게 깔린 천장. 그저 넓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거대한 VVIP 병실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채원은 마른침을 삼키려 했지만, 목구멍이 사포로 긁어낸 것처럼 따가워 밭은기침을 내뱉었다.“콜록, 켁……!”그 작은 소리에, 창가 쪽 소파에 앉아 있던 거대한 실루엣이 짐승처럼 기민하게 반응하며 다가왔다.“정신이 드나.”서늘하고도 낮게 가라앉은 저음. 서도진이었다.채원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항상 먼지 한 톨 없이 완벽하게 세팅되어 있던 대한민국의 젊은 황제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몰골을 하고 있었다.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이마를 덮고 있었고, 넥타이는 어디다 풀어 던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채원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구겨진 그의 흰 와이셔츠 소매 끝에 말라붙어 있는 검붉은 핏자국이었다.폐공장에서 그가 삼류 양아치들을 처참하게 짓밟을 때 튀었던 피.그때의 살벌했던 기억이 플래시백처럼 뇌리를 스치자, 채원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찔했다.도진은 채원의 시선이 자신의 소매에 닿은 것을 알아채고는, 말없이 소매를 둘둘 말아 걷어 올렸다.“의사 말로는 다행히 치명상은 없다고 하더군. 무릎 관절 쪽에 타박상이 심하고, 양쪽 손목에 열상이 깊어 봉합 수술을 한 게 전부다.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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