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장르: 현대 로맨스 판타지 / 막장 복수극 / 계약 결혼 여주인공 (한채원): 한성그룹의 원래 후계자였으나, 계모와 이복동생의 계략으로 모든 것을 빼앗기고 구밀복검하며 돌아온 능력녀. 남주인공 (서도진): 국내 최고 재벌 JS그룹의 냉혈한 대표. 할아버지의 유산 상속 조건 때문에 당장 '말 잘 듣는 아내'가 필요함.
더 보기도어락이 열리는 경쾌한 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낯설게 들렸다.
삐릭- 덜컥.
한채원은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피로가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지만,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한성그룹 전략기획실 본부장으로서 지난 한 달간 매달렸던 유럽 지사 인수합병 건을 마침내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내일 오후 비행기로 귀국해야 했지만, 그녀는 일정을 무리하게 당겼다.
내일은 그녀의 약혼자, 강민호와의 교제 3주년 기념일이었으니까.
“민호 씨, 나 왔어요. 놀랐죠?”
현관에 구두를 벗어두며 조용히 불렀지만, 집 안은 고요했다. 채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민호의 차는 분명 주차장에 있었는데.
거실로 들어선 그녀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옷가지들 때문이었다.
민호의 짙은 네이비 넥타이. 그의 하얀 셔츠. 그리고…….‘……빨간색 레이스 속옷?’
채원의 미간이 차갑게 굳어졌다.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화려하고 장식이 많은 속옷을 즐겨 입지 않았다. 무엇보다 집 안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는 이 낯설고 짙은 향수 냄새.
샤넬 No.5.
그녀의 이복동생, 한유라가 시그니처처럼 뿌리고 다니는 바로 그 향수였다.채원의 심장이 불길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하지만 바닥에 점점이 이어진 옷가지들의 궤적은 정확히 2층, 채원과 민호가 함께 사용하는 침실로 향하고 있었다.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갈 때마다 정체불명의 신음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아, 흣… 오빠, 더…….”
“유라야, 잠깐만… 미치겠네, 진짜…….”채원의 발걸음이 안방 문 앞에서 멈췄다.
문은 아주 살짝 열려 있었고, 그 틈새로 적나라한 파열음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채원은 떨리는 손을 뻗어 문고리를 쥐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차갑게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쾅-!
문이 벽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침대 위에서 엉켜 있던 두 남녀의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채원은 표정 없이 눈앞의 광경을 응시했다.
자신이 직접 고른 최고급 구스다운 이불 위에서, 자신의 약혼자 강민호와 자신의 이복동생 한유라가 벌거벗은 채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채, 채원아…….”
민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황급히 이불을 끌어당겨 자신의 하반신을 가리며 침대 구석으로 물러섰다. 평소 그토록 다정하고 지적이었던 그의 얼굴이 지금은 형편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네가 어떻게… 오늘 안 오고 내일 온다고…….”
“그게 지금 네 입에서 나올 첫 마디니?”채원의 목소리는 스스로가 듣기에도 섬뜩할 만큼 차분했다.
반면, 이불을 가슴팍까지 끌어올린 유라의 반응은 달랐다. 그녀는 잠시 당황하는 듯하더니, 이내 요염하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 언니. 서프라이즈를 하려면 제대로 했어야지. 이렇게 예고도 없이 들이닥치면 어떡해?”
“한유라, 당장 거기서 안 기어 내려와?”채원의 서늘한 일갈에도 유라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히려 민호의 팔짱을 꼭 끼며 뻔뻔하게 맞받아쳤다.
“왜 화를 내고 그래? 언니가 오빠한테 너무 무심했잖아. 매일 회사, 회사, 일, 일! 오빠가 얼마나 외로워했는지 알아?”
“유라야, 그만해…!”민호가 유라를 말리며 채원의 눈치를 살폈다.
“채원아, 오해야. 이건 그냥… 그래, 실수야! 내가 요새 프로젝트 때문에 스트레스도 너무 많이 받고, 술을 좀 마셨더니 제정신이 아니었어.”
“내 침대에서, 내 동생이랑 뒹구는 게 실수라고? 강민호, 넌 쓰레기인 줄은 알았지만 멍청하기까지 하구나.”채원은 천천히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또각, 또각. 하이힐 소리가 적막한 방 안을 날카롭게 갈랐다.
“오빠, 변명할 필요 없어.”
유라가 민호의 어깨에 기대며 채원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어차피 언니도 알잖아? 오빠가 언니 곁에서 얼마나 숨 막혀 했는지. 완벽한 척, 잘난 척하는 한채원 옆에서 껍데기 같은 약혼자로 지내는 거, 진저리난다고 했어. 안 그래, 오빠?”
유라의 말에 민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비겁한 침묵이 모든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채원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지난 3년. 한성그룹의 혼외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본가로 들어온 자신을 유일하게 위로해 주었던 남자. 그 다정함이 모두 가식이었고, 열등감의 발로였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와닿았다.“그래, 알았어. 그 숨 막히는 약혼, 지금 이 순간부터 끝내줄게.”
채원은 미련 없이 돌아섰다.
더 이상 저 더러운 것들과 한 공간에서 숨을 쉬고 싶지 않았다. 역겨움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채, 채원아! 잠깐만 내 말 좀 들어봐!”
민호가 허둥지둥 침대에서 내려와 채원의 손목을 잡으려 했다.
채원은 벌레를 털어내듯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내 몸에 손대지 마. 더러우니까.”
“채원아, 제발……! 우리 곧 결혼이잖아. 주총도 얼마 안 남았는데, 여기서 파혼하면 너도 타격이 클 거 아니야!”그의 입에서 나온 ‘주총’이라는 단어에 채원의 눈동자가 매섭게 빛났다.
결국 이 쓰레기 같은 남자가 두려워하는 것은 파혼 자체가 아니라, 파혼으로 인해 날아갈 한성그룹 사위라는 타이틀과 지분이었다.“걱정 마. 타격은 나만 받는 게 아닐 테니까. 강민호, 너희 집안이 우리 회사에서 따낸 하청 계약들, 내일부터 전부 날아갈 줄 알아.”
채원은 핏기가 가신 민호의 얼굴을 뒤로하고 방문을 나섰다.
“언니! 어디 가! 아직 내 이야기 안 끝났어!”
뒤에서 유라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지만 채원은 무시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머리가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당장 파혼 절차를 밟고, 저 두 인간을 어떻게 매장해버릴지 계산을 시작했다.하지만 1층 거실로 내려온 채원의 발걸음은 다시 한번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일찍 왔구나, 채원아.”
넓은 거실 한가운데.
최고급 가죽 소파에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중년 여성. 채원의 계모이자, 한성그룹의 안주인인 배정아였다.그녀의 곁에는 그룹 법무팀장과 감사팀장이 무거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어머니가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제 개인 사저에는 발도 들이지 않으시던 분이.”
채원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위층에는 바람난 약혼자와 이복동생. 아래층에는 자신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계모와 회사 임원들.
타이밍이 너무 기가 막히게 들어맞지 않는가.
배정아는 들고 있던 찻잔을 테이블 위에 달그락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말려 올라갔다.
“네가 귀국을 앞당겼다는 소식을 듣고 마중을 나왔지. 그리고, 처리해야 할 중요한 문제도 있고.”
배정아가 턱짓을 하자, 감사팀장이 두꺼운 서류 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게 뭡니까?”
“직접 열어 보렴.”채원은 미간을 좁히며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수십 장의 은행 거래 내역서와 해외 페이퍼 컴퍼니의 설립 인가서, 그리고 자금 이체 승인 내역이 빼곡하게 담겨 있었다.서류를 빠르게 훑어 내려가던 채원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이건… 이번 유럽 지사 인수 대금 아닙니까? 이 자금들이 왜 정체불명의 유령 회사로 흘러 들어간 거죠?”
“그걸 왜 나한테 묻니? 승인권자가 바로 너, 한채원 본부장인데.”“네?”
채원은 황당하다는 듯 서류의 맨 뒷장을 넘겼다.
최종 결재란. 그곳에는 분명히 ‘한채원’이라는 그녀의 친필 사인과 함께, 그녀만 소지하고 있는 개인 보안 OTP 승인 코드가 정확히 찍혀 있었다.횡령액 자그마치 500억 원.
“말도 안 돼… 이건 조작입니다! 저는 이런 서류에 결재한 적 없습니다!”
“조작? 감사팀이 일주일 밤낮을 새워 교차 검증한 자료다. 네 IP 주소, 네 보안 코드, 네 필적까지 모든 게 완벽하게 일치해. 네가 회장님 몰래 비자금을 조성하려고 유럽 인수 건을 이용했다는 명백한 증거지.”배정아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채원은 숨을 헐떡이며 서류를 바닥에 내팽개쳤다.“어머니가 꾸미신 짓이군요. 제가 이번 건만 성공시키면 후계 구도에서 유라가 완전히 밀려날 테니까! 그래서 이런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입 닥치지 못해?!”배정아의 날카로운 호통이 거실을 울렸다.
“어디서 감히 어미한테 누명을 씌워! 핏줄이 천박하니 하는 짓도 천박하기 그지없구나. 쥐새끼처럼 회삿돈이나 빼돌리다니!”
“당장 회장님께 연락하겠습니다. 아버지가 이따위 허접한 조작에 속으실 것 같습니까?”채원이 떨리는 손으로 코트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려던 찰나였다.
“수고할 필요 없다. 네 아버지, 한 시간 전에 쓰러지셨어.”
“……뭐라고요?” “네가 500억을 횡령했다는 감사팀의 보고를 받으시고 충격으로 뒷목을 잡고 쓰러지셨다. 지금 VIP 병동에 의식 불명 상태로 누워 계시지.”채원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아버지가 쓰러지셨다고? 유일하게 자신을 지켜주던 바람막이가?그제야 채원은 모든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것을 느꼈다.
위층에서 뻔뻔하게 자신을 조롱하던 유라.
그리고 보안 토큰. 자신의 사생활을 유일하게 공유하고, OTP 카드가 있는 금고 비밀번호를 아는 단 한 사람.“강민호…….”
채원이 이를 악물고 위층을 노려보았다.
계단 중턱에 가운만 걸친 채 서 있는 민호와 유라가 보였다. 유라는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채원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민호는 채원의 시선을 피했다.저 쓰레기 같은 새끼가 자신의 보안 토큰을 빼돌려 배정아에게 넘긴 것이다.
자신이 유럽에 가 있는 동안, 이 완벽한 덫을 짜기 위해서.“이 더러운 인간들… 나 혼자 죽을 것 같아? 경찰에 신고해서 끝까지 파헤칠 거야. 네년들 짓이라는 거, 내가 무조건 밝혀내……!”
“경찰?”
배정아가 콧방귀를 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제 파악을 못 하는구나. 내가 널 당장 구속시키지 않고 이 밤중에 직접 찾아온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니? 넌 내일 아침, 회사 게시판에 횡령 사실을 인정하고 모든 직책에서 물러난다는 사과문을 올리게 될 거다.”
“내가 왜 그딴 짓을 합니까!”
“네가 낳아준 친어머니, 그 불쌍한 여자가 묻혀 있는 수목장. 명의가 내 앞으로 되어 있다는 거 잊었니?”
채원의 숨이 턱 막혔다.
“네가 발악하면, 난 내일 당장 그 여자의 유골을 파내서 길바닥에 뿌려버릴 거다. 그리고 널 횡령죄로 쳐넣어 평생 감옥에서 썩게 만들겠지. 하지만 조용히 입 다물고 모든 걸 뒤집어쓴 채 나가준다면, 최소한 네 어미의 묘자리는 보존해 주마.”
협박이었다. 그것도 채원의 가장 깊은 상처를 헤집는 악랄한 협박.
친어머니의 유골을 인질로 잡힌 채원은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 주먹을 꽉 쥔 채원의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붉은 피가 배어 나왔지만, 그녀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다.“결정해라. 지금 당장 빈손으로 이 집에서 기어 나갈지, 아니면 경찰서로 끌려갈지.”
배정아의 축객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거실 구석에 대기하고 있던 건장한 경호원 두 명이 채원의 양팔을 거칠게 붙잡았다.
“이거 놔! 내 발로 나갈 거니까!”
채원이 발버둥 쳤지만 성인 남성 두 명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그 옷, 네 돈으로 산 거니?”
배정아의 차가운 눈빛이 채원의 캐시미어 코트를 향했다.
“한성그룹의 돈으로 산 모든 것은 두고 가야지. 넌 이제 빈털터리니까.”
경호원들이 채원의 겉옷을 강제로 벗겨냈다. 그녀의 어깨에 매달려 있던 가방도,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도 모두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아, 차 키도.”
유라가 계단을 내려오며 얄밉게 웃었다.
“언니 타고 다니는 포르쉐, 내일부터 내가 탈 거거든.”
채원은 얇은 블라우스와 스커트 차림으로 완전히 무장 해제당했다. 지난 10년간 한성그룹을 위해 피 토하며 일했던 모든 성과와 재산이 단 몇 분 만에 증발해버렸다.
“끌어내.”
배정아의 명령이 떨어지자, 경호원들은 채원을 현관 밖으로 짐짝처럼 던져버렸다.
철퍼덕-!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무릎을 꿇고 쓰러진 채원은 고통에 얼굴을 찡그렸다.
무릎이 까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쾅-!!
그녀의 등 뒤로 거대한 철문이 굳게 닫혔다.
“하… 하하…….”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나왔다.
한성그룹의 정당한 후계자였던 자신이, 한순간에 횡령범으로 몰려 빈털터리로 쫓겨났다. 약혼자에게 배신당하고, 가족에게 버림받았다.우르릉- 쾅!
설상가상으로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던 하늘에서 요란한 천둥소리가 울리더니, 굵은 빗방울이 후둑후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는 이내 폭우로 변해 채원의 얇은 옷가지와 머리카락을 처참하게 적셨다.
“배정아… 한유라… 강민호…….”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가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 속에서, 채원은 닫힌 철문을 노려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눈동자는 절망이 아닌, 시퍼런 독기로 타오르고 있었다.
“반드시… 이 수모, 천 배 만 배로 갚아줄 거야. 너희들 전부 지옥으로 끌고 내려갈 때까지, 난 절대 안 죽어.”
핏물이 배어 나오는 입술을 깨물며, 채원은 쏟아지는 폭우 속으로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완벽한 파멸.
하지만 이것은 끝이 아니었다. 그녀의 진짜 인생은, 그녀의 잔혹한 복수는, 바로 이 비참한 밤부터가 시작이었다.오전 8시. 강남구 테헤란로, 한성그룹 본사 1층 로비.출근하는 직원들로 붐비던 로비의 공기가 일순간 차갑게 얼어붙었다.회전문 너머로 들어선 한 여자의 등장 때문이었다.머리부터 발끝까지 떨어지는 완벽한 핏의 블랙 테일러드 수트.날카로운 스틸레토 힐이 대리석 바닥을 찍어 누를 때마다 일정한 파열음이 로비 전체에 울려 퍼졌다.한채원이었다.불과 얼마 전, 약혼식장에서 파혼당하고 빈털터리로 쫓겨났던 전 회장의 친딸. 그녀가 마치 왕좌를 되찾으러 온 여왕처럼 고개를 꼿꼿이 든 채 게이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어, 어…… 한채원 팀장님 아니야?”“미쳤어. 팀장이 아니라 전무님이었지. 근데 쫓겨난 거 아니었어?”“왜 다시 온 거지? 배 대표님이 가만히 안 둘 텐데…….”직원들의 수군거림이 파도처럼 번져나갔다.채원은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보안 게이트 앞에 섰다.경비 요원이 당황한 얼굴로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죄, 죄송하지만 한채원 씨. 출입증이 없으시면 들어오실 수…….”채원이 무심한 얼굴로 재킷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게이트 단말기에 가져다 댔다.띡-![ 전략기획실 한채원. 출입을 환영합니다. ]맑은 기계음과 함께 굳게 닫혀 있던 유리 차단기가 스르륵 열렸다.그녀가 쫓겨나던 날, 배정아가 차마 시스템에서 삭제하지 못했던 임원용 마스터 출입증이었다.“출입증, 여기 있습니다만.”채원이 차갑게 미소 지으며 굳어버린 경비 요원을 지나쳐 엘리베이터로 향했다.같은 시각. 30층 대표이사실.
오전 8시. VIP 병동 특실.찌익-!정적을 깨고 거친 마찰음이 울렸다. 한채원은 제 손등에 꽂혀 있던 링거 바늘을 망설임 없이 뽑아냈다. 피가 울컥 솟구쳐 하얀 시트 위로 뚝뚝 떨어졌지만, 그녀는 미간 한 번 찌푸리지 않고 알코올 솜으로 지혈을 했다.“뭐 하는 짓이지.”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서도진의 목소리가 바닥으로 날카롭게 내리꽂혔다.그의 손에는 방금 전까지 김 비서에게 지시를 내리던 태블릿 PC가 들려 있었다. 도진은 피가 배어 나오는 채원의 손등과, 이미 환자복을 벗고 셔츠 단추를 채우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번갈아 보며 차갑게 굳어졌다.“퇴원 수속 밟으라고 김 비서에게 지시해 두었습니다.”채원이 무심한 얼굴로 셔츠의 소매를 내리며 대답했다. 양쪽 손목에 두껍게 감긴 붕대 때문에 단추를 채우는 손길이 턱없이 둔탁했다.도진이 성큼성큼 다가와 채원의 손에서 셔츠 소매를 낚아챘다.“의사가 최소 3일은 절대 안정을 취하라고 했을 텐데.”“의사들의 ‘절대 안정’은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방어기제일 뿐입니다. 전 제 몸 상태를 아주 잘 압니다. 걷고, 말하고, 서류에 사인하는 데 아무 문제 없습니다.”“고집 그만 부려, 한채원. 네 양 손목, 어제 다 찢어져서 꿰맸어. 과다출혈로 길바닥에서 엎어지고 싶은 게 아니라면 얌전히 침대에…….”“오늘입니다.”채원이 도진의 말을 자르며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배정아가 미쳐 날뛰며 틈을 보이는 건 오늘 단 하루뿐입니다. 양아치들과 연락이 두절되고, 제 생사를 확인하지 못해 극도의 공포와 혼란에 빠져 있는
의식은 깊은 물속에서 천천히 떠오르듯 돌아왔다.코끝을 스치는 옅은 소독약 냄새.규칙적으로 허공을 가르는 산소 발생기의 백색소음.그리고,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지독한 근육통.한채원은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 올렸다.시야가 흐릿하게 번지다 이내 선명해졌다. 고급스러운 간접 조명이 은은하게 깔린 천장. 그저 넓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거대한 VVIP 병실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채원은 마른침을 삼키려 했지만, 목구멍이 사포로 긁어낸 것처럼 따가워 밭은기침을 내뱉었다.“콜록, 켁……!”그 작은 소리에, 창가 쪽 소파에 앉아 있던 거대한 실루엣이 짐승처럼 기민하게 반응하며 다가왔다.“정신이 드나.”서늘하고도 낮게 가라앉은 저음. 서도진이었다.채원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항상 먼지 한 톨 없이 완벽하게 세팅되어 있던 대한민국의 젊은 황제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몰골을 하고 있었다.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이마를 덮고 있었고, 넥타이는 어디다 풀어 던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채원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구겨진 그의 흰 와이셔츠 소매 끝에 말라붙어 있는 검붉은 핏자국이었다.폐공장에서 그가 삼류 양아치들을 처참하게 짓밟을 때 튀었던 피.그때의 살벌했던 기억이 플래시백처럼 뇌리를 스치자, 채원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찔했다.도진은 채원의 시선이 자신의 소매에 닿은 것을 알아채고는, 말없이 소매를 둘둘 말아 걷어 올렸다.“의사 말로는 다행히 치명상은 없다고 하더군. 무릎 관절 쪽에 타박상이 심하고, 양쪽 손목에 열상이 깊어 봉합 수술을 한 게 전부다. 과
상황은 불과 30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JS그룹 본사 120층, 대회의실.숨 막히는 적막 속에서 내년도 핵심 전략 사업에 대한 임원진의 브리핑이 이어지고 있었다. 단상에 선 기획조정실장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고, 거대한 마호가니 테이블 상석에 앉은 서도진은 서늘한 눈빛으로 스크린의 수치들을 해체하듯 뜯어보고 있었다.“그래서, 리스크 대비 수익률이 고작 4퍼센트라는 겁니까? 그딴 쓰레기 같은 기획안을 들고 내 시간을 뺏으러 온 용기는 가상하군.”도진의 건조한 독설이 회의실을 얼어붙게 만든 바로 그 순간이었다.지이이잉- 지이이잉-!도진의 왼쪽 손목에 채워진 블랙 메탈 워치에서 신경질적인 진동과 함께 요란한 붉은빛이 점멸하기 시작했다.오늘 아침, 한채원에게 강제로 채워 보냈던 스마트 워치와 페어링 된 긴급 SOS 신호였다.도진의 미간이 일그러졌다.그는 브리핑 중이던 임원의 말을 자르고, 즉시 워치의 액정을 터치했다.화면에 정밀한 GPS 지도가 떠오르며, 마포구 합정동의 인적 드문 재개발 구역 한가운데를 붉은 점이 미친 듯이 가리키고 있었다.‘한채원.’그녀는 지금 한성건설 박 부장을 만나러 간다고 했다. 사람이 많은 번화가도 아니고, 철거를 앞둔 폐건물 밀집 지역에서 SOS 신호가 울린다?머릿속에서 최악의 시나리오들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회의 중단해.”도진이 자리에서 거칠게 일어났다.의자가 뒤로 밀리며 바닥을 긁는 날카로운 소리에 임원들이 일제히 기겁하며 그를 쳐다보았다.“대, 대표님. 아직 브리핑이 절반도 끝나지…….”“당장 중단하라고 했습니다. 내 말이 안 들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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