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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빗속의 도박

ผู้เขียน: 유리구슬
last update วันที่เผยแพร่: 2026-06-12 14:45:24

차가운 빗방울이 온몸을 사정없이 때렸다.

청담동의 외진 길가. 한채원은 젖은 생쥐 꼴로 터덜터덜 걸었다.

얇은 블라우스는 이미 살죽에 들러붙어 체온을 사정없이 빼앗아 갔고, 치마 밑단에서는 연신 더러운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구두조차 빼앗긴 맨발은 이미 감각이 마비된 지 오래였다. 아스팔트 바닥에 긁혀 피가 흐르는지도 몰랐다.

“하…….”

입을 열 때마다 하얀 김이 뿜어져 나왔다.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휴대폰도, 지갑도, 심지어 입고 있던 코트마저 배정아의 손에 빼앗겼다.

지금 당장 공중전화가 보인다고 해도 누구에게 전화를 걸 수 있을까.

친한 친구들?

그들은 모두 한성그룹의 권력 아래에 있는 이들이었다. 내일 아침, 한채원이 500억 원을 횡령하고 쫓겨났다는 뉴스가 도배되면 그들 중 누구도 제 전화를 받지 않을 터였다.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어.’

채원은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쓰러지면 배정아와 한유라의 뜻대로 되는 것이다. 친어머니의 묘소는 파헤쳐질 것이고, 자신은 평생 횡령범이라는 낙인을 찍힌 채 밑바닥을 전전하게 되겠지.

그 꼴을 보느니 차라리 한강에 뛰어드는 게 나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채원은 죽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죽어야 할 인간들은 자신이 아니라, 제 침대를 더럽힌 강민호와 제 인생을 통째로 훔쳐 간 한유라, 그리고 배정아였으니까.

‘방법을 찾아야 해. 내가 가진 카드가 뭐가 있지?’

걸음을 옮기며 채원은 머리를 미친 듯이 굴렸다.

돈도 없고, 백도 없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지난 10년간 한성그룹의 핵심부에서 일하며 쌓아온 지식과 비즈니스 감각이 있었다.

그리고 상류층의 은밀한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때, 채원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서도진.’

국내 재계 서열 1위인 JS그룹의 핵심, 그리고 냉혈한이라고 소문난 젊은 대표.

채원은 지난달 유럽 지사 인수합병 건을 추진하면서 비공식 라인을 통해 JS그룹 내부의 극비 정보를 접한 적이 있었다.

JS그룹의 창업주인 서 회장이 최근 지병이 악화되면서 후계 구도를 확실히 하라는 압박을 넣고 있다는 정보였다.

조건은 단 하나.

올해 안으로 결혼을 해서 안정적인 가정을 꾸릴 것.

서도진에게는 야심 가득한 사촌 형제들이 줄을 서서 그의 실각을 노리고 있었다. 만약 그가 기한 내에 결혼하지 못하거나, 후계자로서의 흠집이 잡힌다면 JS그룹의 왕좌는 그의 사촌들에게 넘어갈 판국이었다.

‘서도진도 지금 코너에 몰려 있어.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지만, 당장 쓸 수 있는 확실한 패가 필요할 거야.’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채원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미친 짓이라는 건 알았다.

하지만 지금의 한채원에게는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지옥 밑바닥에서 동아줄을 잡으려면, 그 줄이 썩은 줄이든 불타는 줄이든 일단 손을 뻗어야 했다.

쿠우우웅-.

멀리서 고급 대형 세단의 엔진음이 들려왔다.

왕복 2차선의 어두운 도로, 빗줄기를 뚫고 다가오는 차량의 전조등이 채원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차량 번호판의 앞자리. 그리고 독특한 엠블럼.

유럽 지사 미팅 때 얼핏 보았던 서도진의 개인 차량이 분명했다. 그가 청담동의 한 프라이빗 바에서 정계 인사들과 미팅을 가진다는 첩보를 들었던 게 떠올랐다.

“오 마이 갓…….”

채원은 헛웃음을 삼켰다. 하늘이 아직 자신을 버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키이이이익-!!

빗길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마찰음이 고요한 도로를 뒤흔들었다.

블랙 세단의 거대한 차체가 채원의 코앞, 불과 몇 센티미터 거리를 두고 거칠게 멈춰 섰다. 헤드라이트의 강한 불빛이 빗물에 젖은 채원의 얼굴을 적나라하게 비췄다.

차 안에서는 급정거의 충격으로 거친 대화가 오가는 듯했다.

곧이어 운전석 문이 열리고, 정장을 입은 경호원 겸 비서가 우산을 받쳐 들며 허둥지둥 내렸다.

“이봐요! 미쳤습니까? 죽으려고 환장했어요?!”

비서의 날카로운 고함이 빗소리에 묻혀 들려왔다.

채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비서가 아니라, 짙게 틴팅된 세단의 뒷좌석 유리창을 향해 있었다.

“비켜요! 당장 비키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하겠습니다!”

비서가 채원의 팔을 붙잡으려 다가왔다.

채원은 비서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그대로 뒷좌석 문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젖은 손으로 창문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똑, 똑, 똑!

“서도진 대표님! 안에 계신 거 압니다! 잠시 문 좀 열어주십시오!”

“이 여자가 진짜 왜 이래? 김 형사님, 이 여자 좀 떼어내요!”

운전석에 있던 다른 경호원까지 내리려던 그 순간이었다.

지이잉-.

무거우면서도 매끄러운 기계음과 함께, 굳게 닫혀 있던 뒷좌석의 유리창이 천천히 내려갔다.

어두운 차 내부에 홀로 앉아 있는 남자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완벽하게 빗어 넘긴 검은 머리칼, 날카로운 턱선, 그리고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눈동자.

JS그룹 대표, 서도진이었다.

도진은 젖은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채원을 향해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채원의 흐트러진 머리칼, 얇은 블라우스, 그리고 피가 흐르는 맨발에 차례로 머물렀다.

“한성그룹의 한채원 본부장 맞군.”

도진의 목소리는 낮고 침착했다. 빗소리마저 얼려버릴 것 같은 서늘함이었다.

“나를 압니까?”

채원은 이를 부딪치며 물었다. 추위 때문에 턱이 덜덜 떨렸지만, 목소리만큼은 단단하게 내려고 애썼다.

“모르면 바보지. 유럽 지사 건으로 업계가 시끄럽던데. 그런데 그 대단하신 본부장님이 왜 이 밤중에 내 차 앞을 가로막고 로드킬을 당하려 하는 거지?”

도진의 말투에는 은근한 조롱이 섞여 있었다.

비서가 우산을 도진의 창문 쪽으로 받쳐 들며 다급하게 말했다.

“대표님, 이 여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습니다. 사저로 가는 길에 이런 소란이 생겨 죄송합니다. 당장 치우겠습니다.”

“잠깐.”

도진이 손을 들어 비서를 제지했다. 그의 흥미로운 시선이 채원의 눈에 머물렀다.

보통 이 정도 상황에 처한 여자라면 겁을 먹거나 울부짖기 마련인데, 채원의 눈빛은 무서울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말해봐. 내 차를 부수기 전에 무슨 용건인지.”

채원은 빗물을 닦아낼 생각도 하지 않고, 도진을 똑바로 응시했다.

“서도진 대표님, 제안을 하러 왔습니다.”

“제안?”

도진이 핏, 하고 짧은 실소를 터뜨렸다.

“빈털터리에 맨발로 빗속을 헤매는 여자가, JS그룹 대표에게 무슨 제안을 하겠다는 건지 감이 안 잡히는데.”

“당신의 약점을 메워줄 제안입니다.”

그 말에 도진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차가워졌다.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내 약점이라. 재미있군. 계속해봐.”

“지금 서 회장님의 압박으로 결혼 상대를 찾고 계시죠? 사촌들이 당신의 자리를 넘보고 있고, 이번 달 안으로 확실한 카드를 내밀지 못하면 후계 구도가 흔들릴 테니까요.”

도진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JS 내부에서도 극소수만 아는 비밀이었다. 이 여자가 대체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한 본부장, 선을 넘는군.”

“선을 넘는 게 아니라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채원은 한 걸음 더 차에 밀착했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빗물이 차 문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를 이용하세요.”

“뭐?”

“나를 이용해 당신의 후계 구도를 굳히라는 말입니다.”

도진은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내 앞에는 정재계의 쟁쟁한 집안 영애들이 줄을 서 있어. 굳이 너처럼 몰락해 가는 한성그룹의 혼외자를 선택할 이유가 없는데.”

“그 영애들은 당신의 뒤통수를 칠 수 있지만, 저는 아닙니다. 그들은 집안의 이익을 위해 당신을 감시하겠지만, 저는 오직 당신의 방패가 될 겁니다.”

채원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차 있었다.

“게다가 그 얌전한 영애들이 당신의 그 거칠고 야심만만한 사촌들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 구렁이 같은 인간들 틈바구니에서 서 회장님의 마음에 쏙 드는 완벽한 며느리 역할을 해낼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습니다.”

도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채원의 눈빛을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다.

정적 속에서 빗소리만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도진은 시계를 슬쩍 보더니, 이내 차 문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철컥-.

“타라. 차 막힌다.”

그 짧은 한마디에 채원은 안도감을 느끼며 조수석이 아닌, 도진의 옆자리인 뒷좌석 문을 열고 탑승했다.

시트가 젖는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차 안의 따뜻한 온기가 피부에 닿자마자, 참았던 소름이 쫙 돋았다.

도진은 비서에게 창문을 올리라는 신호를 보낸 뒤, 차를 출발시키라고 명령했다.

부릉-.

차가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좁고 밀폐된 차 안, 채원의 몸에서 뚝뚝 떨어지는 빗물로 인해 시트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도진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수건 한 장을 채원에게 던졌다.

“일단 닦아. 내 차 더러워지는 거 싫으니까.”

“감사합니다.”

채원은 수건으로 대충 머리를 털어내고는 다시 도진을 보았다.

“방금 한 제안, 진심입니다. 서 대표님.”

“한채원 본부장. 아니, 이제 본부장이 아니지?”

도진이 냉정한 어조로 팩트를 찔렀다.

“내가 바보로 보이나? 한성그룹에서 방금 500억 원대 횡령 사건이 터졌고, 그 용의자가 너라는 소문이 이미 내 귀에도 들어왔어. 배정아가 널 완벽하게 처내려고 작정한 모양이던데.”

채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소문이 빠르다.

“그거, 조작입니다.”

“조작이든 아니든 상관없어. 중요한 건 넌 지금 아무런 힘도 없는, 쫓겨난 신세라는 거지. 그런 네가 내 방패가 되겠다고? 오히려 내 옷에 똥물이나 튀기지 않으면 다행이겠군.”

도진의 독설은 송곳처럼 날카로웠다.

하지만 채원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인생의 바닥을 찍었다. 더 이상 잃을 체면도 없었다.

“배정아가 저를 횡령범으로 몬 건, 제가 무서워서입니다. 이번 유럽 인수합병을 성공시키면 제가 후계자가 되는 게 확실했으니까요. 제가 무능해서 쫓겨난 게 아니라, 너무 유능해서 아군에게 뒤통수를 맞은 겁니다.”

“유능한 놈은 뒤통수를 맞지 않아.”

“이번엔 제 약혼자였던 강민호가 배신을 했습니다. 제 개인 보안 코드를 넘겼더군요.”

채원의 목소리에 짙은 분노가 섞여 나왔다.

“하지만 전 한성그룹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압니다. 숨겨진 지분 구조, 배정아의 비자금 세탁 경로, 그리고 한유라가 저지른 사학재단 비리까지. 제가 가진 정보만으로도 한성그룹을 뒤흔들 수 있습니다.”

도진은 담배를 꺼내려다 채원의 상태를 보고는 슬며시 내려놓았다.

“그래서? 나한테 복수를 도와달라?”

“제 복수는 제가 합니다. 당신에게는 오직 ‘서도진의 아내’라는 완벽한 타이틀만 요구합니다. 그 대가로 저는 당신의 할아버지가 원하시는 완벽한 손주며느리가 되어 드릴 거고, 사촌들이 감히 당신의 자리를 넘보지 못하도록 최전방에서 싸울 겁니다.”

채원은 몸을 돌려 도진에게 바짝 다가앉았다.

“서 대표님, 당신에게 지금 필요한 건 사랑스러운 아내가 아닙니다. 당신의 비즈니스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적들의 목을 함께 벨 수 있는 파트너죠. 안 그렇습니까?”

도진은 가만히 채원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빗물에 지워진 화장 사이로 드러난 맨얼굴은 창백했지만, 눈빛만큼은 그 어떤 보석보다 단단하게 빛나고 있었다.

욕망과 독기.

그것은 도진 자신도 아주 잘 아는 종류의 감정이었다.

“제안은 흥미롭군.”

도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난 비즈니스를 할 때 감정에 호소하는 인간을 가장 싫어해. 네가 유능하다는 걸 증명해 봐. 당장 내일 아침까지, 네가 한성그룹을 어떻게 무너뜨릴지, 그리고 내 후계 구도에 어떻게 도움이 될지 구체적인 기획서를 내 눈앞에 가져와.”

“휴대폰도, 노트북도 없습니다. 지갑도요.”

채원이 덤덤하게 말했다.

“비서관.”

도진이 앞좌석을 향해 부르자, 비서가 얼른 태블릿 PC와 스마트폰 공기계를 뒤로 넘겼다.

“내 사저로 간다. 오늘 밤 새워봐야 할 거야. 내일 아침 7시, 내 출근 시간 전까지 네 가치를 증명하지 못하면, 넌 그 맨발로 다시 길바닥에 버려질 줄 알아.”

도진의 차가운 경고에도 채원의 입가에는 마침내 아주 작은 미소가 번졌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서 대표님.”

창밖의 빗소리는 더욱 거세졌지만, 차 안의 열기는 두 사람의 위험한 동맹을 예고하듯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한채원은 굳게 다짐했다.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고. 자신을 짓밟은 자들에게 지옥을 선사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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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날 아침.간밤의 폭풍 같았던 텐션은 언제 그랬냐는 듯, 펜트하우스의 공기는 다시 서늘하고 건조하게 가라앉아 있었다.한채원은 완벽하게 세팅된 블랙 수트 차림으로 1층 거실로 내려왔다.다이닝 테이블에는 서도진이 커피를 마시며 태블릿으로 뉴스를 확인하고 있었다. 어젯밤 이성을 잃고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던 남자의 흔적은 단 1퍼센트도 남아있지 않았다.“나갑니까.”채원이 무심하게 묻자, 도진이 태블릿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오전 10시에 JS 본사에서 임원 회의가 있어. 당신은?”“한성건설 재무팀장이었던 박 부장을 만나러 갑니다. 배정아 이사의 차명 계좌 내역을 넘겨받기로 했거든요. 그것만 손에 넣으면 500억 횡령 누명은 오늘 안으로 벗을 수 있습니다.”그제야 도진이 고개를 들어 채원을 쳐다보았다.그의 시선이 채원의 목덜미 쪽에 잠시 머물렀다가, 이내 탁자 위로 떨어졌다. 그는 옆에 놓여 있던 작은 벨벳 케이스를 채원 쪽으로 밀었다.“이게 뭡니까?”“차고 가.”케이스 안에는 군더더기 없이 매끈하게 빠진 블랙 메탈 소재의 스마트 워치가 들어 있었다.“이런 액세서리는 필요 없습니다만.”“내 파트너가 밖에서 객사하는 건 곤란하니까. 어제 한성 본가에서 사촌들을 물어뜯어 놓은 덕분에 당신을 주시하는 눈이 한둘이 아닐 거다. 최소한의 위치 추적과 긴급 구조 신호가 연동되어 있는 기기야. 빼지 말고 차.”어젯밤의 일에 대한 미안함인지, 아니면 철저한 비즈니스적 통제인지 알 수 없었지만 채원은 군말 없이 시계를 손목에 찼다.“다녀오겠습니다.”

  • 완벽한 이혼을 위하여   제7화. 선(線), 그리고 예고 없는 침범

    서울 한남동 유엔빌리지.한강의 야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최고급 펜트하우스의 현관문이 열렸다.“들어와.”서도진의 짧은 축객령 같은 허락에, 한채원은 캐리어 하나를 끌고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수백 평에 달하는 실내는 주인의 성정을 닮아 차갑고 건조했다. 무채색 위주의 최고급 가구들, 먼지 한 톨 허락하지 않을 것 같은 완벽한 대리석 바닥, 그리고 생활감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서늘한 공기까지.사람이 사는 집이라기보다는 거대한 갤러리나 고급 호텔의 스위트룸에 가까웠다.도진은 재킷을 벗어 소파에 아무렇게나 던져두고는, 거실 중앙에 우두커니 서 있는 채원을 향해 돌아섰다.“짐은 그게 다인가?”채원의 손에 들린 것은 기내용 사이즈의 작은 블랙 캐리어 하나가 전부였다.“네. 한성 본가에서 쫓겨날 때 입고 있던 옷과 핸드백, 그리고 김 비서님이 따로 챙겨주신 기초적인 물품 몇 개가 전부입니다.”“대한민국 재계 10위권 안에 드는 한성그룹의 장녀 치고는 처량한 살림살이군.”“이제 장녀가 아니라 횡령범으로 호적에서 파이기 직전이니까요. 쓸데없는 짐이 없는 편이 움직이기 가볍고 좋습니다.”채원의 무덤덤한 대답에 도진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어제부터 느낀 거지만, 이 여자는 동정심을 유발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도진은 걸음을 옮겨 거실 한쪽에 마련된 바(Bar)로 다가갔다. 크리스탈 글라스에 헤네시 한 잔을 따르며 그가 입을 열었다.“이쪽으로 와서 앉아.”채원이 캐리어를 한쪽에 세워두고 소파에 앉자, 도진이 맞은편 1인용 소파에 자리를 잡고 다리를 꼬았다.그는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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