เข้าสู่ระบบ오전의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펜트하우스의 다이닝룸.
하지만 한채원의 시선은 창밖의 풍경이 아니라, 테이블 위에 놓인 세 장짜리 서류에 고정되어 있었다.
[ 혼 인 계 약 서 ]
가장 상단에 적힌 다섯 글자가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녀의 망막을 찔렀다.
채원은 천천히 손을 뻗어 서류를 집어 들었다. 최고급 특수 용지의 사각거리는 촉감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불과 어젯밤까지만 해도 길바닥에 버려진 빈털터리였던 자신이, 지금은 대한민국 재계 1위 JS그룹 후계자의 아내 자리를 제안받고 있다.
이 비현실적인 상황 앞에서도 채원의 머리는 무서울 정도로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스윽-.
서류를 넘기는 소리만이 고요한 방 안을 채웠다.
맞은편에 앉은 서도진은 등받이에 깊숙이 기댄 채, 여유로운 눈빛으로 그녀의 표정 변화를 관찰하고 있었다.채원의 시선이 서류의 첫 번째 페이지, 제1조 항목에서 멈췄다.
“제1조. 본 계약의 유효 기간은 서명일로부터 정확히 1년으로 한다. 1년 후, 양측은 합의 이혼 절차를 밟으며, 갑(서도진)은 을(한채원)에게 위자료 명목으로 JS 건설이 보유한 강남의 상업용 빌딩 세 채와 현금 100억 원을 지급한다.”
채원이 건조한 목소리로 항목을 소리 내어 읽자, 도진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위자료치고는 나쁘지 않은 조건일 텐데. 네가 한성에서 쫓겨나면서 잃어버린 자산을 보전하고도 남을 금액이야. 어때, 마음에 드나?”
“돈은 필요 없습니다.”
채원의 단호한 대답에 도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돈이 필요 없다고? 어제 빈몸으로 쫓겨난 여자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제 목표는 한성그룹을 되찾는 겁니다. 위자료 몇 푼 쥐고 떨어져서 편하게 먹고살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당신 차 앞을 가로막지도 않았습니다.”
채원은 서류의 첫 장을 과감하게 넘겨버렸다. 위자료 항목 따위는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확인해야 할 것은, 이 계약이 자신을 얼마나 철저하게 보호하고 또 옭아맬 것인가 하는 부분이었다.
시선이 두 번째 페이지의 핵심 조항들로 향했다.
“제3조. 갑과 을은 철저한 쇼윈도 부부로서, 대외적으로는 서 회장과 대중을 완벽하게 속일 수 있는 잉꼬부부의 역할을 수행한다. 단, 대외적인 일정이 없을 시 철저히 서로의 사생활을 존중하며 어떠한 간섭이나 터치도 하지 않는다.”
“중요한 항목이지.”
도진이 테이블 위로 몸을 살짝 기울이며 깍지를 꼈다.
“난 내 구역에 누군가 함부로 선을 넘고 들어오는 걸 극도로 혐오해. 넌 내 아내라는 타이틀을 달고 공식 석상에서 완벽하게 웃어주기만 하면 돼. 내 개인적인 스케줄, 만나는 사람, 내 사적인 공간에 대해서는 묻지도, 알려고도 하지 마. 그게 내 첫 번째 조건이야.”
“동의합니다. 저 역시 제 사적인 영역에 당신이 개입하는 건 사양이니까요. 사생활 터치 금지. 완벽하게 지켜드리죠.”
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항목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곧,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제4조…….”
채원의 입술이 멈칫하자, 도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낮게 웃으며 직접 조항을 읊었다.
“갑과 을은 본 계약 기간 동안 상대방에게 어떠한 사적 감정도 품지 않으며, 절대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
“네가 서명하기 전에 가장 명심해야 할 내 두 번째 조건이야. 절대, 내게 사랑에 빠지지 말 것.”
도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뼈가 박혀 있었다.
채원은 황당하다는 듯 서류에서 눈을 떼고 도진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잘생긴 얼굴, 완벽한 피지컬, 그리고 대한민국 전체를 쥐고 흔드는 엄청난 재력.
그가 뭇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계약서에까지 이런 유치한 조항을 명시해 놓다니.“서 대표님. 솔직히 말씀드리면, 좀 자의식 과잉 아니신가요?”
채원의 차가운 비아냥에 도진은 전혀 타격을 받지 않은 듯 오히려 어깨를 으쓱했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방어책이라고 해두지. 비즈니스로 만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조금만 친절을 베풀거나 다정하게 굴면 꼭 선을 넘고 착각하는 여자들이 많았거든. 자신과 나의 만남이 운명이라고 믿어버리는 부류들 말이야.”
도진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난 그런 귀찮은 감정놀음에 낭비할 시간이 없어. 내 아내 자리에 앉는 순간, 모든 사람들은 널 떠받들 거고 넌 엄청난 권력을 쥐게 되겠지. 그 달콤함에 취해 진짜 내 여자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지 말라는 경고야.”
“걱정 마시죠.”
채원은 피식 헛웃음을 터뜨리며 볼펜을 집어 들었다.
“저는 지금 막, 가장 믿었던 남자에게 가장 더러운 방식으로 배신을 당하고 온 참입니다. 사랑? 운명? 그런 쓰레기 같은 감정에 알레르기가 생겼거든요.”
“다행이군.”
“오히려 제가 대표님께 똑같은 경고를 돌려드리고 싶네요. 1년 동안 저와 완벽한 부부 연기를 하시다 보면, 저의 유능함과 매력에 대표님이 먼저 빠지실지도 모르니까요.”
채원의 도발에 도진의 눈매가 흥미롭게 가늘어졌다.
“내가? 너한테?”
“네. 그러니까 대표님이나 조심하세요. 저한테 반해서 계약 기간 끝나고도 질척거리시면 곤란하니까요.”
“하, 이거 참.”
도진은 어이가 없다는 듯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처량한 몰골로 자신의 차 앞을 막아섰던 여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당돌하고 오만한 태도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거침없는 태도가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묘한 카타르시스마저 느껴졌다.지금껏 도진의 앞에서 이렇게 눈을 똑바로 치뜨고 받아치는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좋아. 그 엄청난 자신감, 어디 한번 지켜보도록 하지. 계약 조건에 이의가 없다면 그만 사인해.”
도진이 만년필을 턱 끝으로 가리켰다.
하지만 채원은 펜을 잡은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계약서의 마지막 빈 공간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제 조건은 어디 있습니까?”
“조건?”
“네. 사생활 터치 금지,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 전부 대표님의 조건들뿐이잖아요. 이 계약서에는 가장 중요한 ‘제 조건’이 빠져 있습니다.”
도진이 턱을 괴며 물었다.
“네가 원하는 게 아까 말한 그 ‘한성그룹을 되찾는 것’인가? 그건 네가 JS의 안주인이 되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권력으로 해결될 텐데.”
“아니요. 그걸로는 부족합니다.”
채원은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그녀의 눈동자에 시퍼런 독기가 다시 한번 타올랐다.
“단순히 권력을 등에 업는 게 아닙니다. 저는 대표님이 저의 복수에 직접적으로 ‘개입’해주시길 원합니다.”
“내가 어디까지 개입하길 바라는 거지?”
도진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위험한 짐승의 으르렁거림 같았다.
채원은 주눅 들지 않고 또박또박 자신의 요구를 쏟아냈다.
“첫째. 제가 한성그룹의 지분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막대한 자금력. 비공식적으로 전부 지원해 주십시오.”
“둘째. JS그룹 산하의 최고 로펌과 정보망, 감사팀을 제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을 주십시오.”
“셋째. 제가 제 계모와 이복동생, 그리고 전 약혼자를 완전히 짓밟고 매장시키는 과정에서 어떤 수단과 방법을 쓰든… 설령 그것이 JS그룹의 이름에 약간의 흠집을 내는 방식이라 할지라도, 제 뒤를 완벽하게 덮어주십시오.”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도진은 표정을 지운 채 채원을 응시했다.
그녀가 요구하는 것은 단순한 비호가 아니었다. 자신을 완전한 공범으로 만들겠다는 선언이자, JS의 막강한 화력을 자신의 사적인 복수극에 쏟아부으라는 통보였다.“한채원.”
도진의 입술 사이로 서늘한 이름 석 자가 흘러나왔다.
“넌 지금 내게 백지수표를 내놓으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어. 내가 왜 너의 사적인 복수극에 내 막대한 자본과 권력을 쏟아부어야 하지?”
“그야, 제가 대표님의 가장 완벽한 방패가 되어드릴 테니까요.”
채원은 펜을 내려놓고 도진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대표님의 사촌들, 서태진 전무를 비롯한 이사회의 늙은 너구리들. 그들이 대표님을 물어뜯으려 할 때, 저는 뒤에 숨어서 웃고만 있는 얌전한 아내가 되지 않을 겁니다. 제가 먼저 나서서 그들의 목줄을 끊어놓겠습니다.”
“…….”
“저를 위해 투자하십시오. 저에게 칼을 쥐여주시면, 그 칼로 대표님의 적들부터 먼저 도륙해 드리겠습니다. 기꺼이 대표님의 미친 사냥개가 되어드릴 테니, 제 목줄을 잡고 제 복수까지 완벽하게 지원하라는 뜻입니다.”
정적.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팽팽한 정적이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도진은 채원의 눈을 깊숙이 파고들며 그녀의 진심을 저울질했다.
저 지독한 복수심.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배신자들을 찢어발기겠다는 저 날 것 그대로의 갈망.아름다웠다.
얌전하고 고상한 척하는 다른 재벌가 영애들에게서는 평생 찾아볼 수 없는, 피비린내 나는 생명력이었다.도진의 입꼬리가 천천히, 아주 길게 호선을 그렸다.
“미친 사냥개라. 마음에 드는 표현이군.”
도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채원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큰 그림자가 채원의 몸을 완전히 덮었다.
그는 채원의 의자 팔걸이에 양손을 짚고 몸을 숙였다. 두 사람의 얼굴이 당장이라도 코끝이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도진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묵직한 우디 향과 서늘한 체취가 채원의 코끝을 훅 찌르고 들어왔다. 심장이 본능적으로 빠르게 뛰었지만, 채원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좋아.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도진이 채원의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네가 한성그룹을 어떻게 부숴버리든, 그 쓰레기들을 어떻게 요리하든 전폭적으로 지원하마. 내 돈, 내 정보망, 내 권력. 전부 네 마음대로 가져다 써.”
도진의 숨결이 채원의 목덜미를 스치며 지나갔다.
“단, 약속은 지켜라. 내 사촌들의 숨통을 끊어놓겠다는 그 약속. 만약 네가 내 기대를 배신하거나 쓸모없는 존재로 판명 난다면…….”
도진의 큰 손이 채원의 턱을 부드럽지만 억센 힘으로 쥐어 올렸다.
“그때는 네 계모가 아니라, 내가 직접 널 죽여버릴 테니까.”
섬뜩한 살기가 담긴 경고였다. 하지만 채원은 오히려 턱을 쥔 도진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 올리며 도발적으로 웃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남편.”
그 당돌한 호칭에 도진의 눈동자가 일순간 크게 흔들렸다가, 이내 짙은 만족감으로 물들었다. 도진은 잡고 있던 채원의 턱을 놓고 물러났다.
“김 비서.”
서재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김 비서가 즉각 문을 열고 들어왔다.
“네, 대표님.”
“계약서 수정해. 제5조 조항 신설. ‘갑은 을의 한성그룹 경영권 탈환 및 사적 복수에 필요한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무제한 지원한다.’ 이걸로 추가해서 당장 다시 뽑아 와.”
“……알겠습니다.”
김 비서는 경악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서둘러 태블릿을 두드렸다.
잠시 후, 새롭게 인쇄된 완벽한 계약서가 다시 테이블 위에 놓였다.
도진이 먼저 거침없는 필치로 자신의 이름을 휘갈겼다.
사각, 사각.
이어 채원이 만년필을 넘겨받았다.
잠시 서류를 내려다보던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서명란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내렸다.[ 한 채 원 ]
서명이 끝남과 동시에, 두 사람을 얽매는 1년짜리 족쇄이자 완벽한 무기가 완성되었다.
“이로써 거래가 성립되었군.”
도진이 서류를 갈무리해 김 비서에게 넘기며 말했다.
“이제 넌 완벽한 내 아내이자 파트너다. 횡령범 누명은 내 쪽에서 즉각 대응팀을 꾸려서 여론을 뒤집을 테니 넌 신경 꺼. 그것보다 더 시급한 문제가 있으니까.”
“시급한 문제요?”
채원이 묻자, 도진이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칼을 쥐었으니, 첫 번째 사냥을 하러 가야지. 네 머릿속에 있는 그 대단한 복수극의 첫 번째 스케줄이 뭐지?”
채원의 머릿속에 어젯밤, 민호의 입에서 나왔던 단어가 스치고 지나갔다.
[ ‘우리 곧 결혼이잖아. 주총도 얼마 안 남았는데……!’ ]
그리고 한유라가 제 앞에서 지었던 비열한 웃음도.
그 두 쓰레기는 자신이 500억 횡령범으로 쫓겨난 이 상황을 축배 삼아, 내일 당장 그들만의 화려한 파티를 열 계획이었다.
채원의 입가에 차갑고도 잔혹한 미소가 번졌다.
“당장 내일 저녁입니다.”
“내일 저녁?”
“제 이복동생 한유라와, 제 전 약혼자 강민호의 공식 약혼 발표 파티가 열리거든요. 한성그룹 임원들과 VVIP들이 전부 모이는 자리죠.”
그 말을 들은 도진의 눈빛이 흥미로움으로 번뜩였다.
“완벽한 무대군. 죽은 줄 알았던 한성그룹의 전 본부장이, 재계 1위 JS그룹 대표의 약혼녀가 되어 그 자리에 화려하게 부활한다. 아주 짜릿한 등장판이 되겠어.”
도진은 김 비서를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김 비서. 당장 샵에 연락해서 최고급 VVIP 스타일링 팀을 이쪽으로 불러.”
“지금 바로 부를까요?”
“그래. 그리고 샤넬, 디올, 에르메스. 각 브랜드의 이번 시즌 오뜨 꾸뛰르 컬렉션 전부 펜트하우스로 올리라고 해. 드레스부터 구두, 주얼리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도진의 파격적인 지시에 김 비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이내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갔다.
도진은 메이드의 헐렁한 셔츠를 입고 있는 채원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무대에 오르려면 완벽한 갑옷부터 입어야지.”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습니다. 굳이 이렇게 요란하게…….”
“내 아내가 될 여자가 흠집 난 모습으로 대중 앞에 서는 건 용납 못 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내일 파티장에 모인 모든 인간들이 널 보자마자 무릎을 꿇고 싶어지게 만들어.”
도진이 다가와 채원의 젖은 머리카락 한 올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어 넘겼다.
“기대하지. 내일 밤, 네가 어떻게 그 식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지.”
채원은 자신의 머리칼을 스치는 도진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대신, 그 어느 때보다 오만하고 아름다운 미소로 화답했다.“기대 이상일 겁니다. 제가 받은 수모, 정확히 천 배로 갚아줄 거니까요.”
악마와의 계약은 끝났다.
이제, 지옥의 불길을 그들의 발밑에 던져줄 시간이었다.오전 8시. 강남구 테헤란로, 한성그룹 본사 1층 로비.출근하는 직원들로 붐비던 로비의 공기가 일순간 차갑게 얼어붙었다.회전문 너머로 들어선 한 여자의 등장 때문이었다.머리부터 발끝까지 떨어지는 완벽한 핏의 블랙 테일러드 수트.날카로운 스틸레토 힐이 대리석 바닥을 찍어 누를 때마다 일정한 파열음이 로비 전체에 울려 퍼졌다.한채원이었다.불과 얼마 전, 약혼식장에서 파혼당하고 빈털터리로 쫓겨났던 전 회장의 친딸. 그녀가 마치 왕좌를 되찾으러 온 여왕처럼 고개를 꼿꼿이 든 채 게이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어, 어…… 한채원 팀장님 아니야?”“미쳤어. 팀장이 아니라 전무님이었지. 근데 쫓겨난 거 아니었어?”“왜 다시 온 거지? 배 대표님이 가만히 안 둘 텐데…….”직원들의 수군거림이 파도처럼 번져나갔다.채원은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보안 게이트 앞에 섰다.경비 요원이 당황한 얼굴로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죄, 죄송하지만 한채원 씨. 출입증이 없으시면 들어오실 수…….”채원이 무심한 얼굴로 재킷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게이트 단말기에 가져다 댔다.띡-![ 전략기획실 한채원. 출입을 환영합니다. ]맑은 기계음과 함께 굳게 닫혀 있던 유리 차단기가 스르륵 열렸다.그녀가 쫓겨나던 날, 배정아가 차마 시스템에서 삭제하지 못했던 임원용 마스터 출입증이었다.“출입증, 여기 있습니다만.”채원이 차갑게 미소 지으며 굳어버린 경비 요원을 지나쳐 엘리베이터로 향했다.같은 시각. 30층 대표이사실.
오전 8시. VIP 병동 특실.찌익-!정적을 깨고 거친 마찰음이 울렸다. 한채원은 제 손등에 꽂혀 있던 링거 바늘을 망설임 없이 뽑아냈다. 피가 울컥 솟구쳐 하얀 시트 위로 뚝뚝 떨어졌지만, 그녀는 미간 한 번 찌푸리지 않고 알코올 솜으로 지혈을 했다.“뭐 하는 짓이지.”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서도진의 목소리가 바닥으로 날카롭게 내리꽂혔다.그의 손에는 방금 전까지 김 비서에게 지시를 내리던 태블릿 PC가 들려 있었다. 도진은 피가 배어 나오는 채원의 손등과, 이미 환자복을 벗고 셔츠 단추를 채우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번갈아 보며 차갑게 굳어졌다.“퇴원 수속 밟으라고 김 비서에게 지시해 두었습니다.”채원이 무심한 얼굴로 셔츠의 소매를 내리며 대답했다. 양쪽 손목에 두껍게 감긴 붕대 때문에 단추를 채우는 손길이 턱없이 둔탁했다.도진이 성큼성큼 다가와 채원의 손에서 셔츠 소매를 낚아챘다.“의사가 최소 3일은 절대 안정을 취하라고 했을 텐데.”“의사들의 ‘절대 안정’은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방어기제일 뿐입니다. 전 제 몸 상태를 아주 잘 압니다. 걷고, 말하고, 서류에 사인하는 데 아무 문제 없습니다.”“고집 그만 부려, 한채원. 네 양 손목, 어제 다 찢어져서 꿰맸어. 과다출혈로 길바닥에서 엎어지고 싶은 게 아니라면 얌전히 침대에…….”“오늘입니다.”채원이 도진의 말을 자르며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배정아가 미쳐 날뛰며 틈을 보이는 건 오늘 단 하루뿐입니다. 양아치들과 연락이 두절되고, 제 생사를 확인하지 못해 극도의 공포와 혼란에 빠져 있는
의식은 깊은 물속에서 천천히 떠오르듯 돌아왔다.코끝을 스치는 옅은 소독약 냄새.규칙적으로 허공을 가르는 산소 발생기의 백색소음.그리고,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지독한 근육통.한채원은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 올렸다.시야가 흐릿하게 번지다 이내 선명해졌다. 고급스러운 간접 조명이 은은하게 깔린 천장. 그저 넓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거대한 VVIP 병실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채원은 마른침을 삼키려 했지만, 목구멍이 사포로 긁어낸 것처럼 따가워 밭은기침을 내뱉었다.“콜록, 켁……!”그 작은 소리에, 창가 쪽 소파에 앉아 있던 거대한 실루엣이 짐승처럼 기민하게 반응하며 다가왔다.“정신이 드나.”서늘하고도 낮게 가라앉은 저음. 서도진이었다.채원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항상 먼지 한 톨 없이 완벽하게 세팅되어 있던 대한민국의 젊은 황제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몰골을 하고 있었다.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이마를 덮고 있었고, 넥타이는 어디다 풀어 던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채원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구겨진 그의 흰 와이셔츠 소매 끝에 말라붙어 있는 검붉은 핏자국이었다.폐공장에서 그가 삼류 양아치들을 처참하게 짓밟을 때 튀었던 피.그때의 살벌했던 기억이 플래시백처럼 뇌리를 스치자, 채원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찔했다.도진은 채원의 시선이 자신의 소매에 닿은 것을 알아채고는, 말없이 소매를 둘둘 말아 걷어 올렸다.“의사 말로는 다행히 치명상은 없다고 하더군. 무릎 관절 쪽에 타박상이 심하고, 양쪽 손목에 열상이 깊어 봉합 수술을 한 게 전부다. 과
상황은 불과 30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JS그룹 본사 120층, 대회의실.숨 막히는 적막 속에서 내년도 핵심 전략 사업에 대한 임원진의 브리핑이 이어지고 있었다. 단상에 선 기획조정실장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고, 거대한 마호가니 테이블 상석에 앉은 서도진은 서늘한 눈빛으로 스크린의 수치들을 해체하듯 뜯어보고 있었다.“그래서, 리스크 대비 수익률이 고작 4퍼센트라는 겁니까? 그딴 쓰레기 같은 기획안을 들고 내 시간을 뺏으러 온 용기는 가상하군.”도진의 건조한 독설이 회의실을 얼어붙게 만든 바로 그 순간이었다.지이이잉- 지이이잉-!도진의 왼쪽 손목에 채워진 블랙 메탈 워치에서 신경질적인 진동과 함께 요란한 붉은빛이 점멸하기 시작했다.오늘 아침, 한채원에게 강제로 채워 보냈던 스마트 워치와 페어링 된 긴급 SOS 신호였다.도진의 미간이 일그러졌다.그는 브리핑 중이던 임원의 말을 자르고, 즉시 워치의 액정을 터치했다.화면에 정밀한 GPS 지도가 떠오르며, 마포구 합정동의 인적 드문 재개발 구역 한가운데를 붉은 점이 미친 듯이 가리키고 있었다.‘한채원.’그녀는 지금 한성건설 박 부장을 만나러 간다고 했다. 사람이 많은 번화가도 아니고, 철거를 앞둔 폐건물 밀집 지역에서 SOS 신호가 울린다?머릿속에서 최악의 시나리오들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회의 중단해.”도진이 자리에서 거칠게 일어났다.의자가 뒤로 밀리며 바닥을 긁는 날카로운 소리에 임원들이 일제히 기겁하며 그를 쳐다보았다.“대, 대표님. 아직 브리핑이 절반도 끝나지…….”“당장 중단하라고 했습니다. 내 말이 안 들립니까?
다음 날 아침.간밤의 폭풍 같았던 텐션은 언제 그랬냐는 듯, 펜트하우스의 공기는 다시 서늘하고 건조하게 가라앉아 있었다.한채원은 완벽하게 세팅된 블랙 수트 차림으로 1층 거실로 내려왔다.다이닝 테이블에는 서도진이 커피를 마시며 태블릿으로 뉴스를 확인하고 있었다. 어젯밤 이성을 잃고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던 남자의 흔적은 단 1퍼센트도 남아있지 않았다.“나갑니까.”채원이 무심하게 묻자, 도진이 태블릿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오전 10시에 JS 본사에서 임원 회의가 있어. 당신은?”“한성건설 재무팀장이었던 박 부장을 만나러 갑니다. 배정아 이사의 차명 계좌 내역을 넘겨받기로 했거든요. 그것만 손에 넣으면 500억 횡령 누명은 오늘 안으로 벗을 수 있습니다.”그제야 도진이 고개를 들어 채원을 쳐다보았다.그의 시선이 채원의 목덜미 쪽에 잠시 머물렀다가, 이내 탁자 위로 떨어졌다. 그는 옆에 놓여 있던 작은 벨벳 케이스를 채원 쪽으로 밀었다.“이게 뭡니까?”“차고 가.”케이스 안에는 군더더기 없이 매끈하게 빠진 블랙 메탈 소재의 스마트 워치가 들어 있었다.“이런 액세서리는 필요 없습니다만.”“내 파트너가 밖에서 객사하는 건 곤란하니까. 어제 한성 본가에서 사촌들을 물어뜯어 놓은 덕분에 당신을 주시하는 눈이 한둘이 아닐 거다. 최소한의 위치 추적과 긴급 구조 신호가 연동되어 있는 기기야. 빼지 말고 차.”어젯밤의 일에 대한 미안함인지, 아니면 철저한 비즈니스적 통제인지 알 수 없었지만 채원은 군말 없이 시계를 손목에 찼다.“다녀오겠습니다.”
서울 한남동 유엔빌리지.한강의 야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최고급 펜트하우스의 현관문이 열렸다.“들어와.”서도진의 짧은 축객령 같은 허락에, 한채원은 캐리어 하나를 끌고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수백 평에 달하는 실내는 주인의 성정을 닮아 차갑고 건조했다. 무채색 위주의 최고급 가구들, 먼지 한 톨 허락하지 않을 것 같은 완벽한 대리석 바닥, 그리고 생활감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서늘한 공기까지.사람이 사는 집이라기보다는 거대한 갤러리나 고급 호텔의 스위트룸에 가까웠다.도진은 재킷을 벗어 소파에 아무렇게나 던져두고는, 거실 중앙에 우두커니 서 있는 채원을 향해 돌아섰다.“짐은 그게 다인가?”채원의 손에 들린 것은 기내용 사이즈의 작은 블랙 캐리어 하나가 전부였다.“네. 한성 본가에서 쫓겨날 때 입고 있던 옷과 핸드백, 그리고 김 비서님이 따로 챙겨주신 기초적인 물품 몇 개가 전부입니다.”“대한민국 재계 10위권 안에 드는 한성그룹의 장녀 치고는 처량한 살림살이군.”“이제 장녀가 아니라 횡령범으로 호적에서 파이기 직전이니까요. 쓸데없는 짐이 없는 편이 움직이기 가볍고 좋습니다.”채원의 무덤덤한 대답에 도진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어제부터 느낀 거지만, 이 여자는 동정심을 유발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도진은 걸음을 옮겨 거실 한쪽에 마련된 바(Bar)로 다가갔다. 크리스탈 글라스에 헤네시 한 잔을 따르며 그가 입을 열었다.“이쪽으로 와서 앉아.”채원이 캐리어를 한쪽에 세워두고 소파에 앉자, 도진이 맞은편 1인용 소파에 자리를 잡고 다리를 꼬았다.그는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