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달이 지는 밤, 옛 꿈을 지우다: Chapter 11 - Chapter 20

21 Chapters

제11장

김서월은 떠난 김수정이 오히려 떠나기 전보다 더 깊이 이현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그녀는 명분도 얻었고, 지위도 얻었으며, 모든 이의 부러움을 받았지만 정작 그 사내의 마음만은 얻지 못했다.그녀를 바라보는 이현의 눈빛은 실망으로 가득했다. 심지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물건을 보듯 무감각해져 있었다.낮 동안의 그는 다정하고 자상한 황자 부군이었다.하지만 밤만 되면 그는 김수정의 망령에 사로잡힌 사람 같았다."안 돼. 절대로 이대로 둘 수는 없어."그녀는 이런 삶을 살기 위해서 어렵게 김수정을 이현의 곁에서 몰아낸 것이 아니었다.김서월은 다시 침상에 앉았고 흔들리는 촛불이 벽에 그녀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그리고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한 가지 독한 계략이 서서히 떠올랐다.한 사람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떠올리는 모든 이가 역겨워할 만큼 더럽고 추악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또다시 깊은 밤이었다.이현은 달향각의 가장 좋은 객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빈 술단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충혈된 눈과 술에 절은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무의식적으로 한 사람의 이름을 중얼거리고 있었다."수정아, 대체 어디 있는 것이냐..."그가 술에 취해 정신이 흐릿해진 순간, 객실 문이 조심스레 열렸다.김서월은 수수한 차림으로 걱정과 초조함이 담긴 얼굴을 한 채 빠르게 방 안으로 들어섰다."전하, 어째서 또 이렇게 많이 드신 겁니까."그녀는 부드럽게 말하며 이현을 부축하려 했다.하지만 이현은 짜증스럽게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흐릿한 눈빛은 김서월을 향해 있었지만, 마치 그녀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는 듯했다.김서월의 가슴은 쓰라렸지만,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그녀는 소매에서 따뜻한 손수건을 꺼내 그의 입가에 묻은 술자국을 세심하게 닦아 주었다."전하, 이제 그만 드십시오. 언니의 행방에 대한 단서를 찾았습니다."그녀는 기쁜 기색을 감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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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장산은 이현이 믿지 않자 이를 악물고 말을 이었다.그는 고개를 들어 조목조목 말했다."전하께서는 모르실 겁니다. 전하께서 둘째 아가씨를 황자비로 맞이하겠다고 하신 뒤부터, 아가씨께서는 완전히 달라지셨습니다.아가씨께서 신분을 낮춰 첩이 될 생각은 없다며 전하께서 정을 저버리셨다고 원망하시는 걸 들었습니다. 바로 그 무렵부터 낯선 사내가 밤마다 아가씨의 처소를 드나들기 시작했습니다."이현의 표정이 흔들리자 장산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그들은... 그들은 이미 염치를 모른 채 내통하고 있었습니다!그 후 아가씨께서는 그 사내와 함께 멀리 떠날 결심까지 굳히셨습니다. 부인께서 남겨 주신 혼수는 물론, 자신의 명의로 된 전답까지 몰래 처분해 은표로 바꾼 뒤 전부 그 사내에게 넘겨주셨습니다!"장산의 말은 독을 바른 비수처럼 이현의 가슴을 후벼 팠다.'신분을 낮추기 싫다고? 심지어 혼수까지 팔아 치웠다고?'이현은 혼례 전 김수정의 이상했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점점 차갑고 낯설게 변해 갔고 심지어 달향각에서는 사람들 앞에서 그를 대놓고 거스르며 체면까지 구겨 버렸다.'설마... 그때 이미 다른 사내에게 마음을 주었단 말인가? 그녀의 냉담함은 상처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내를 품고 있어 나를 안중에 두지 않았던 것인가?'"전하..."그때 김서월이 기다렸다는 듯 슬픔과 안타까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녀는 소매 속에서 곱게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 이현에게 내밀었다."이것은... 얼마 전 전당포에서 우연히 찾아온 것입니다. 전당포 사장이 언니께서 직접 맡기셨다고 하더군요. 여기에는 언니의 수결도 남아 있습니다."이현은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받아들었다.그것은 전당 문서였다.전당 문서에 적힌 것은, 그에게 너무도 익숙한 모란 금비녀였다. 그것은 김수정이 열다섯 살 생일을 맞았을 때 그가 직접 선물한 것이었다.그녀가 분명 보물처럼 아끼며 나무 함 깊숙이 간직하고 있을 것이라 믿었다.하지만 현실은 김수정이 다른 사내를 위해 고작 오십 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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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장

그날 이후, 이현은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듯했다.그는 더 이상 술집에서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지 않았고, 서재에 틀어박혀 있지도 않았다.그는 다시 정무에 힘을 쏟았고, 대신들과 담소를 나누었다. 심지어 김서월을 먼저 챙기고 함께 식사를 하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 주기까지 했다.그는 훌륭한 부군이자 완벽한 황자 역할을 해냈다.하지만 진실을 마주한 그날 밤, 그의 영혼이 이미 죽어 버렸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그는 좋은 부군 노릇을 하는 법을 익혔다. 그녀가 불평하면 다정하게 달랬고, 애교를 부리면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는 그녀에게 황자비로서 누려야 할 체면과 영광을 줄 수는 있었지만, 그녀가 원하던 사랑만은 줄 수 없었다.이현의 몸은 이 뜰에 남아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멀어져 가는 그 마차를 따라 떠난 지 오래였다.김서월도 이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이현이라는 사람만 손아귀에 쥐고, 셋째 황자비 자리를 지킬 수 있다면 그녀는 최후의 승자였다.이제 그녀는 마침내 바라던 것을 손에 넣었고 경성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귀부인이 된 것이다.한때 그녀를 업신여기던 아가씨들은 이제 그녀 앞에서 몸을 낮췄고, 감히 넘볼 수 없던 권문세가의 부인들마저 앞다투어 그녀의 환심을 사려 했다.부군은 높은 권세를 누리고 있었고, 가끔 냉담할 때가 있긴 해도 겉으로는 충분히 그녀를 아껴 주었다. 이런 삶은 예전의 그녀가 감히 꿈도 꾸지 못했던 것이었다.이날 궁에서 북방의 대승을 기념하는 연회가 열렸다.이현은 김서월과 함께 연회에 참석했다. 금빛 찬란한 궁전에서 아름다운 음악이 울려 퍼졌고, 흥겨운 가무가 이어졌다.김서월은 화려한 궁중 예복을 차려입고 이현의 곁에 기대 앉아 사방에서 쏟아지는 부러운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그녀는 눈앞의 화려한 광경과 지금 자신의 지위를 떠올리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곧 벌어질 일을 생각하니 입가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술자리가 무르익을 무렵, 노릇하게 구운 사슴고기 요리가 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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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

황궁 연회에서 전해진 경사는 하룻밤 사이 도성 전체에 퍼져 나갔다.이튿날 아침, 수많은 하사품이 셋째 황자부로 끊임없이 들어왔고, 김서월의 창고를 가득 채웠다.금은과 옥 장신구부터 비단과 견직물, 귀한 약재와 진귀한 골동품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보기 드문 진품이었다. 이는 황실이 첫 황손을 얼마나 중히 여기는지를 보여 주었다.뒤이어 경성의 명문가 아가씨들과 귀부인들이 앞다투어 축하를 전하러 찾아왔다.저마다 정성껏 준비한 후한 예물을 들고 와 김서월의 곁을 에워싼 채, 연신 듣기 좋은 덕담을 건넸다."황자비마마께서는 참으로 복이 많으십니다. 황실의 첫 황손이니, 앞으로 누리실 영화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그러게 말입니다. 황자비마마 안색이 이토록 좋으신 것을 보니, 분명 건강한 세손을 품고 계실 겁니다."김서월은 쏟아지는 아첨을 들으며 속으로 한껏 우쭐해졌다.그녀는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올린 채 모두의 시선을 만끽했다. 예전에는 자신을 깔보던 이들이 이제는 비위를 맞추느라 애쓰는 모습을 보니 속이 다 시원했다.'김수정, 보고 있느냐? 네가 그토록 애를 써도 손에 넣지 못했던 것들이 이제는 모두 내 것이 되었다.'뒤뜰은 떠들썩했지만, 앞뜰은 고요하기만 했다.이현은 홀로 앞뜰의 서재에 앉아 있었다.김서월의 처소에서 간간이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와 담소가 귓가를 스쳤다.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가슴 한구석이 쓰리도록 아려 왔다.한때는 그도 이런 모습을 상상한 적이 있었다.김수정과 아이를 낳고 함께할 미래…. 하지만 이제 그는 다른 여인과 아이를 갖게 되었고 백년해로하며 자손들과 살아갈 사람도 더는 김수정이 아니었다.걷잡을 수 없는 슬픔과 허망함이 그의 마음을 집어삼켰다.어느덧 밤은 깊어지고 하객들도 모두 돌아갔다.떠들썩하던 황자부도 마침내 고요를 되찾았다.이현은 업무를 마치고 처소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그때 하인이 찾아왔다. 유씨가 찾아와 지금 황자비의 처소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고 전했다.유씨의 광증은 김서월이 혼사를 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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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장

뼛속까지 스미는 한기가 이현의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김서월 모녀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철저히 덫에 걸린 어리석은 먹잇감에 불과했다.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그의 가슴속에서 들끓었고 이성을 모조리 태워 버릴 듯한 기세였다.이현은 안으로 뛰어들어 그들의 거짓을 폭로하지 않았다. 그렇게 끝내기에는 너무 쉬운 일이었다.그는 복수를 결심했다. 정점에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똑똑히 맛보게 해 줄 생각이었다.그날 밤 이후, 이현은 다시는 김서월의 처소를 찾지 않았다.그는 모든 암위와 세력을 동원해 조용히 김서월이 김수정의 도주를 조작한 과정과 그 모든 증거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김서월은 그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그녀는 여전히 아이를 품은 기쁨과 더 큰 권세를 손에 넣을 미래에 취해 있었다.이현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도 회임한 뒤 그의 조심스러운 배려로 여겼다. 아니면 조정의 업무가 바쁜 탓이라 생각했다.김서월은 의심은커녕,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완벽한 삶을 마음껏 즐겼다.그녀는 매일 늦잠을 즐기고, 진귀한 보물들을 구경하며, 각 집안의 귀부인들에게 아첨을 받는 것이 일상이었다.김서월은 자신의 인생이 마침내 완벽한 정점에 올랐다고 믿었다.그날도 황후는 사람을 보내 귀한 태교 약재와 눈부시게 화려한 촉금(蜀錦)을 하사했다.김서월은 기쁜 나머지 가장 화려한 촉금을 든 시녀와 함께 옷감을 골라 달라며 들뜬 마음으로 이현의 서재를 찾았다."전하, 전하! 이것 좀 보십시오!"목소리가 사람보다 먼저 들려왔다. 그녀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황후마마께서 방금 하사하신 운하금입니다. 이걸로 겉옷을 지으면 예쁘겠지요?"서재 안에서 이현은 창가에 서서 등을 보인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김서월의 목소리에도 그는 평소처럼 돌아보지 않았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김서월의 미소가 순간 굳어졌다.그녀는 시녀를 물린 뒤 조심스레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그녀는 조심스레 뒤에서 그를 안으려 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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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장

"사랑?" 이현은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말을 들은 사람처럼 헛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놓았고, 김서월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그의 웃음에는 처연함과 허탈함이 배어 있었다. "네가 사랑한 건 본왕이 아니다. 셋째 황자비의 자리였고, 이 끝없는 부귀영화였겠지!"그는 몸을 일으켰다."나는 네게 황자비의 자리도 주고, 최고의 부귀영화도 주고, 네가 원하던 모든 것을 다 주었다! 그런데도 왜 만족하지 못했느냐?어째서 너에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던 수정이까지 그런 악독한 계략으로 짓밟아야 했느냐?"이현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이미 그녀가 바라던 모든 것을 안겨 주었는데도, 김수정이 사내와 야반도주했다는 거짓말까지 꾸며 내 끝내 두 사람 사이의 마지막 인연마저 끊어 버렸다. 결국 김수정은 누명까지 뒤집어쓴 채 떠나야 했다.김서월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내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바닥에서 몸을 일으켜 눈물을 훔쳤다.얼굴에는 독기가 서렸고, 곧 미친 듯이 쏘아붙이기 시작했다."왜요? 이제 와서야 마음이 아프신 겁니까? 처음에 김수정을 속이고 저와 몰래 정을 나눈 사람이 누구였죠? 상국사에서 벌어진 일을 함께 꾸민 사람은 또 누구였고요? 저를 황자비로 만들겠다며 김수정을 끝까지 몰아붙인 사람은 전하였습니다!"그녀는 손가락으로 이현을 가리키더니 악을 쓰며 소리쳤다."어찌 모든 죄를 저에게만 뒤집어씌울 수 있습니까! 먼저 변한 건 전하였습니다! 먼저 김수정을 저버린 것도, 제게 마음을 준 것도 전하였습니다! 제가 속인 게 아니라, 전하가 어리석었던 겁니다! 결국 전하도 저와 다를 바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김수정을 입에 올릴 자격도 없습니다!""닥쳐!"김서월의 마지막 한 마디는 독침처럼 이현의 가슴에 깊숙이 파고들었다.'그래. 서월의 말이 맞아.'사람을 잘못 본 것도 그였고, 어리석기 짝이 없었던 것도 그였으며, 무엇보다 가장 사랑했던 여인을 끝없는 나락에 밀어 넣은 것도 바로 그였다.김서월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따귀처럼 이현의 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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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장

김수정은 경성을 떠난 뒤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정처 없이 떠돌던 끝에, 그녀는 외조부가 남긴 기행록을 따라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외조부가 글로 남긴 장대한 산하와, 저마다 다른 풍경과 사람들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싶었다.마차는 천천히 길을 나아갔고 지난 삶의 고단함과 아픔을 바퀴 아래 흩어 버리는 듯했다.그 여정 속에서 그녀는 온초운을 만나게 되었다.그 역시 상단과 함께 길을 떠난 무리 중 한 사람이었다. 흰옷을 단정히 차려입은 그는 옥처럼 온화한 기품을 지녔고, 눈가에는 늘 옅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처음 만났을 때 그는 혼자 마차 앞에 앉아 있는 김수정을 보고, 밤공기가 차다며 조용히 깨끗한 겉옷을 건네주었다.그 뒤 김수정이 낡은 기행록을 펼쳐 들고 오래도록 바라보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호기심이 생긴 온초운은 무슨 책인지 조심스레 물었고, 김수정이 외조부가 남긴 풍경과 동경을 이야기해 주자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아가씨께서 말씀하신 곳이 추풍도(秋風渡)라면, 늦가을이면 단풍이 들불처럼 번져 하늘마저 붉게 물듭니다.그리고 경호월(鏡湖月)은 보름달이 뜨는 밤, 작은 배를 타고 호수 한가운데까지 나가야 비로소 하늘의 둥근 달과 물결에 부서지는 달빛을 함께 볼 수 있지요."그는 외조부의 기행록에 적힌 풍경을 모두 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욱 생생하게 그 모습을 들려주었다.두 사람은 시와 글에서 시작해 산천과 지리, 세상사는 이야기까지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함께 있으면 화제는 좀처럼 끊이지 않았다.김수정이 자유를 동경한다는 말을 들어도 온초운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누구보다 깊이 공감하며 그녀를 응원해 주었다."만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만 리를 걷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그런 뜻을 품고 길을 나설 용기를 가진 아가씨가 저는 참 존경스럽습니다."온초운의 격려에 힘입어 김수정은 자신의 기행록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더는 외조부의 시선에만 머물지 않았다.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자신의 마음으로 느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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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장

김수정은 외조부의 기행록에 남겨진 모든 곳을 둘러본 뒤,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미련도 마침내 내려놓을 수 있었다.무엇보다 온씨 집안 사람들의 따뜻한 보살핌 덕분에, 눈앞에 펼쳐진 강남의 풍경은 그녀에게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그 순간, 한 가지 생각이 조용히 마음속에 싹텄다.이곳에 머물고 싶었다.조용한 집 한 채를 구해 이곳에 정착하며 살아가고 싶었다.그 마음을 온초운에게 털어놓자, 그의 미소는 한층 더 깊어졌다."좋습니다."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잠시 뒤, 온초운은 더 과감한 제안을 했다."수정 아가씨의 기행록은 정말 훌륭합니다. 서점에 맡겨 책으로 내는 건 어떻겠습니까? 아가씨가 보고 느낀 세상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면 분명 큰 사랑을 받을 겁니다."'책을 낸다고?'김수정은 순간 멍해졌다.경성에 있던 시절, 여인이 책을 낸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명문가 아가씨들의 재능이란 결국 사내를 기쁘게 하기 위한 장식처럼 여겨질 뿐이었는데, 서점에 책으로 진열되어 사람들의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김수정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었다."저는... 자신이 없습니다.""어째서 안 된다는 겁니까?"온초운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김수정을 바라봤다."수정 아가씨, 스스로를 믿으셔야 합니다. 세상에는 평생 좁은 세상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들은 아가씨처럼 세상을 직접 보고 느껴 본 적이 없습니다.아가씨가 보고, 듣고, 느낀 세상을 사람들과 나누십시오. 아가씨의 글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그들의 세상을 조금 더 넓혀 줄 수 있습니다."그의 말은 잔잔하던 그녀의 마음에 던져진 작은 돌멩이 같았다.고요했던 마음에 물결이 끝없이 번져 나갔다.그래. 왜 안 된다고만 생각했을까.이제 그녀는 더 이상 가문이나 사내에게 기대어 살아야 하는 김수정이 아니었다.이제 그녀에게는 자신의 생각이 있었고, 스스로 걸어갈 두 발이 있었다. 그녀가 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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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장

어느 날, 온초운은 김수정을 데리고 이야기를 들으러 찻집을 찾았다.이야기꾼은 마침 사와 운군이 경호월에서 함께 달을 감상하는 대목을 들려주고 있었다.실감 나는 입담에 사람들은 모두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그때 옆자리의 한 선비가 감탄하듯 입을 열었다."이 책의 운군은 사를 참으로 극진히 아끼는군. 내가 보기엔 두 사람은 단순한 벗이 아니라 분명 남다른 마음이 있었던 게 틀림없네."곁에 있던 사람들이 곧바로 맞장구를 쳤다."맞는 말일세! 마음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 긴 여정을 함께하고, 저렇게 살뜰히 챙길 수 있었겠나? 정말 천생연분이 따로 없구먼!"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던 김수정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온초운을 향해 장난스럽게 말했다."제 생각에는 다들 너무 앞서가신 것 같습니다."온초운은 말없이 찻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려 김수정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더없이 맑고 진지했다."아닙니다. 그분들의 말이 맞습니다. 저 수정 아가씨를 연모하고 있습니다."김수정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온초운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책 속 이야기는 일부 꾸며 낸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운군이 사를 향한 마음만큼은 모두 제 진심입니다.처음 아가씨를 만난 그날부터 제 마음은 이미 아가씨를 향하고 있었습니다.함께 길을 걸을수록 아가씨의 재능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고, 어떤 어려움에도 꺾이지 않는 강인함에 감탄했습니다. 무엇보다 세상을 자유롭게 바라보는 그 마음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수정 아가씨를 연모합니다. 부디 제가 아가씨의 진정한 운군이 되어, 앞으로 모든 길을 함께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그의 고백에는 화려한 말이 없었지만 그 진심은 김수정의 마음을 울렸다.김수정은 함께 걸어온 지난날을 하나씩 떠올렸다.가장 힘들고 절망했던 순간 먼저 손을 내밀어 준 사람도, 앞날의 두려움에 머뭇거리던 그녀에게 다시 빛을 준 사람도 그였다. 온초운과 그의 가족이 건넨 따뜻한 마음은 김수정에게 다시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는 기쁨을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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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장

김수정과 온초운의 혼례는 소박하지만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다.경성의 번거로운 예법도, 화려한 격식도 없었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가족과 지인들의 진심 어린 축복뿐이었다.혼례를 올리는 날, 시녀 초록은 김수정의 머리를 단장해 주다가 끝내 눈시울을 붉혔다."아가씨, 이제야 고생 끝에 행복이 찾아왔네요."'그래. 이제야 행복이 찾아왔다.'혼인 후의 나날은 평범하면서도 행복했다.온초운은 혼인 전과 다름없이 김수정을 다정하게 아끼고 존중했다. 그의 부모 역시 그녀를 친딸처럼 보살폈다.김수정은 마치 어머니와 외조부가 살아 계시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매일 책을 읽고 글을 쓰며 꽃과 나무를 가꾸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경성에서의 지난날은 어느새 말끔히 잊은 지 오래였다.하지만 어렵게 되찾은 그 평온은 예상치 못한 손님의 등장으로 산산이 무너지고 말았다.어느 평범한 오후, 김수정은 뜰에서 꽃가지를 다듬고 있었다. 그때 한 사내가 하인들의 만류를 뿌리친 채 미친 듯이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그의 비단옷은 먼지로 뒤덮여 있었고, 두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하지만 김수정을 보는 순간, 그의 눈빛은 벅찬 기쁨과 깊은 고통으로 가득 찼다."수정아! 드디어... 드디어 널 찾았다!"사내는 쉰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며 한 걸음씩 다가왔고 떨리는 손을 내밀어 그녀를 끌어안으려 했다.김수정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깜짝 놀랐다.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선 그녀는 낯선 사내를 경계하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도련님,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그녀는 그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그 한마디에 이현의 가슴 가득 차올랐던 그리움과 벅찬 기쁨은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이현은 그 자리에 굳은 채, 낯설기만 한 그녀의 맑은 눈동자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봤다.'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정말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고?'"수정아, 나다! 이현이라고!"그는 다급히 말을 이었다."내가 잘못했다. 이제야 모든 걸 알게 됐어! 나와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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