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달이 지는 밤, 옛 꿈을 지우다: Chapter 1 - Chapter 10

21 Chapters

제1장

평소 늘 겁에 질려 있던 그녀의 얼굴에는 날카로운 바위에 베인 깊은 상처가 남아 있었다.김서월의 어머니 유씨는 딸의 소식을 듣고 충격을 이기지 못해 끝내 미치고 말았다.이현은 김서월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직접 어의를 불러오고 귀한 약재까지 내려주었다.김서월의 모습을 바라보던 이현은 김수정의 손을 잡고 말했다."수정아, 다친 사람이 네가 아니라 다행이구나. 아니었다면 그 역적들을 뼈도 못 추리게 만들었을 거야."이현의 목소리에는 안도와 애틋함이 가득했지만, 이내 미안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하지만 이런 일이 벌어진 이상 조정에서도 철저히 조사할 것이니 우리의 혼례도 미뤄질 수밖에 없어."김수정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기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고 있습니다."그런데 무려 삼 년이나 지났다.황자의 목숨을 구한 공으로 김서월은 집안에서 가장 천대받던 서녀에서 온 경성이 칭송하는 여인이 되었다.폐하가 친히 치하했고, 황후마마도 수많은 하사품을 내렸다.명문가 부인들까지 앞다퉈 그녀와 친분을 맺으려 했다.그녀의 얼굴에 남은 흉터도 어의의 정성 어린 치료 덕에 말끔히 아물었다.반면 한때 경성에 이름을 떨쳤던 승상부의 적녀 김수정은 유씨의 광증에 시달리며 점점 빛을 잃어 갔다.유씨는 발작할 때마다 김수정을 때리고 욕했다.펄펄 끓는 탕약을 여러 번 그녀의 흰 손등에 쏟아부었고, 흉한 화상 자국은 하나둘 늘어만 갔다.유씨는 방 안의 비녀와 찻잔마저 무기 삼아 김수정을 향해 던졌다.김수정은 이현과 자신을 대신해 은혜를 갚는 셈이라 여기며 이 모든 것을 묵묵히 견뎠다.하지만 불행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조정을 좌우지하던 김수정의 외가인 임씨 집안은 하루아침에 적과 내통해 반역을 꾀했다는 누명을 쓰고 멸문의 화를 당했다.그녀의 어머니는 친정의 비보를 듣고 울화가 맺힌 채, 몇 달 동안 병상에 누워 지내다 끝내 세상을 떠났다.김수정의 든든한 버팀목도 그렇게 무너졌다.그녀가 어머니의 빈소를 지키는 동안 이현은 단 한 번만 찾아왔다.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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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석가산 뒤의 목소리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늦가을 찬바람이 얇은 옷깃을 파고들어서야 김수정은 정신을 차렸다.그녀는 몸을 돌려 처소로 향했다. 그 걸음에는 어느 때보다도 굳은 결심이 담겨 있었다.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았다. 더는 이곳에 허비할 수 없었다.막 자신의 거처에 들어서는 순간, 익숙한 그림자가 다가왔다.이현이었다.그녀가 돌아오자, 이현은 삼 년 전 상국사에서처럼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수정아, 어디 다녀온 것이냐? 밤바람이 차가운데 몸도 약하지 않느냐."이현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려 했다. 하지만 김수정은 티 나지 않게 몸을 피했다.이현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눈빛에 잠시 당혹감이 스쳤지만, 이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네 마음이 상했다는 건 안다. 첩으로 들이려는 것도 내 본심은 아니다. 모두 어쩔 수 없는 방편일 뿐이야."이현의 목소리는 늘 그랬듯 부드러웠다."걱정하지 마라. 우리는 십수 년을 함께 자라온 사이가 아니냐. 지금은 그저 세간의 입을 막기 위한 것뿐이니 소란이 잠잠해지면 네게 마땅한 지위와 영예를 돌려주마."예전 같았으면 김수정은 아직도 이현의 마음속에 자신이 남아 있다고 믿으며 감동해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그 다정한 말들이 그저 우스꽝스럽게만 들렸다."전하께서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목소리에는 원망도 기쁨도 담겨 있지 않았다. 마치 남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담담했다."피곤해서 이만 쉬고 싶습니다."이현이 준비해 온 말들은 그녀의 담담한 한마디 앞에서 힘을 잃었다.그는 낯설게 변한 그녀의 눈빛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눈앞의 김수정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했다.그는 입을 열어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김수정은 이미 그의 곁을 지나쳐 갔고 그를 홀로 남겨 두었다.......다음 날, 경성에서 가장 이름난 달향각에서는 대공주 이선이 다례를 열었다. 경성의 이름난 아가씨들이 모두 모였다.그중 가장 주목받는 이는 당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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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김수정의 말은 찬물을 끼얹은 듯했다.김서월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늘 묵묵히 참기만 하던 김수정이 대놓고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몰랐다.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사람처럼 눈물이 고운 뺨을 타고 흘러내렸고, 어깨도 가늘게 떨렸다."언니, 저는 하루도 어머니를 걱정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제가 전하를 빼앗았다고 생각해서 화가 난 것도 알아요. 하지만 어머니는 아무 잘못도 없잖아요.""지난 삼 년 동안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돌본 것도 언니였잖아요. 그런데 저를 원망한다고 해서 어머니께까지 화풀이를 하시다니..."김서월은 눈물까지 흘리며 몇 마디 말만으로 능숙하게 자신을 피해자로 만들었다.사람들의 분노는 다시 김수정을 향했고 비난을 쏟아냈다."은혜도 모르는 사람이네요! 김서월이 목숨 걸고 자객들을 유인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살아 있었겠습니까? 유씨가 왜 미쳤는데요! 이제 와서 두 모녀를 모욕하다니, 참 독하기도 하네요!""삼 년 전엔 착한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은혜도 모르는 독한 계집이었네요! 내가 눈이 멀었지..."김수정은 사람들 한가운데 서서도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한때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을 바라보며, 낯설고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때 또렷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모두 그만하라."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이현이 굳은 얼굴로 걸어오고 있었다.그의 뒤를 따르던 대공주 이선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조금 전까지 목소리를 높이던 아가씨들과 도련님들은 곧바로 입을 다물었고, 모두 고개를 숙여 예를 올렸다.이현은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사람들 사이를 가로질러 김수정과 김서월 사이에 섰다.김서월은 이현을 보자 의지할 곳을 찾은 듯 더욱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곁으로 다가가 몸을 기댄 채 소매를 붙잡고 흐느꼈다."전하, 언니를 탓하지 마십시오. 다 제 잘못입니다. 제가 언니를 화나게 했습니다.""네 잘못이 아니다."이현은 평소보다 한층 부드러운 표정으로 다정하게 그녀의 손을 토닥이며 달랬다.이현은 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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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김수정이 돌아온 지 한 시진(時辰)도 채 지나지 않아, 하인들이 우르르 들이닥쳤다.김서월은 달향각에서 성이 차지 않았던 아가씨들과 도련님들까지 데리고 김수정을 비웃으러 왔다.사람들은 낡고 스산한 거처를 훑어보며 수군거렸고, 이따금 비웃기까지 했다.유씨는 건장한 할멈 둘에게 양팔이 붙들려 끌려 나왔지만, 입에서는 여전히 두서없는 욕설이 쏟아져 나왔다.처마 아래 서 있는 김수정을 보자, 유씨의 흐릿한 눈에 광기 어린 증오가 번뜩였다.그녀는 붙잡고 있던 손을 뿌리치고 김수정을 향해 달려들었다."이 계집! 네가 내 딸 인생을 망쳤어! 내 딸 혼사를 망쳐 놨어! 죽어! 죽어 버려!"유씨의 날카로운 비명이 뜰 안에 울려 퍼졌고, 손톱은 김수정의 얼굴을 향해 뻗어 왔다.김수정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뿐, 피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손톱이 얼굴에 닿기 직전, 이현의 호위가 재빨리 나서 유씨의 허리를 붙들고 뒤로 끌어냈다.유씨는 계속 발버둥 치며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었다.구경하러 온 아가씨들은 입을 가린 채 김수정을 가리키며 수군거렸고, 눈빛에는 조롱이 가득했다."쯧쯧, 삼 년이나 돌봤는데도 이렇게까지 증오하다니.""그러게 말입니다. 팔자도 사납죠. 어머니도 잃고, 외가인 임씨 집안도 몰락했는데 이제는 유씨 하나조차 품지 못하는군요."비웃음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김서월은 눈물을 닦는 척하며 이현의 곁으로 다가갔다."전하, 어머니부터 모시고 가요. 더는 언니를 자극하지 마십시오."이현은 무표정한 김수정을 바라보며 남아 있던 연민마저 사라지고 짜증만 남았다.이현이 차갑게 손을 휘젓자 사람들은 이내 빠져나갔고, 거처는 순식간에 고요해졌다.김수정은 처마 아래 서서, 삼 년 동안 유씨가 머물렀던 텅 빈 방을 바라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마치 가슴속에 쌓여 있던 응어리를 모두 내뱉은 듯했다.삼 년 동안 유씨의 욕설과 물건이 깨지는 소리, 한밤중에 울부짖는 소리가 밤낮없이 이 작은 처소를 가득 채웠고, 그녀를 숨 막히게 만들었다.이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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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전서구의 다리에 묶인 작은 대나무 통을 본 김수정은 잠시 멍해졌다.그녀는 다가가 통을 풀어 종이 한 장을 꺼냈다.익숙한 필체를 보는 순간, 묻어 두었던 기억이 한꺼번에 밀려왔다.그때는 그녀가 아직 임씨 집안의 외손녀이자, 김씨 집안의 적녀로 이름을 떨치던 시절이었다.궁에 근무하는 이현과 언제든 소식을 주고받고 싶어, 그녀는 이현을 졸라 직접 전서구를 길렀다.그는 웃으며 말했다."앞으로 어디에 있든 언제든 서로 서신을 주고받을 수 있을 거야."언제부터였을까. 달콤한 추억과 그리움을 전하던 비둘기는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기억은 두터운 먼지 속에 잠겨 희미했고, 끝없는 고통과 피로만이 남아 있었다.밤이 깊어지자 찬 기운도 한층 짙어졌다.김수정은 정리한 짐을 다시 잠가 두고 막 불을 끄려는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수정아, 나다."이현의 목소리였다.김수정은 겉옷을 걸친 뒤 잠시 망설이다가 문을 열었다.이현은 문밖에 서 있었고, 달빛 아래 그의 곧은 모습이 드러났다.그러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피로와 옅은 초조함이 어려 있었다."왜 답장을 하지 않느냐?"문이 열리자마자 그는 곧장 물었다.그제야 김수정은 오후에 날아왔던 비둘기와 무심코 탁자 위에 올려둔 쪽지를 떠올렸다.그녀의 건망증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이제는 이런 일조차 금세 잊어버릴 정도라니.김수정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가 아직도 화가 나 있다고 여긴 이현은 점점 더 짜증이 치밀었다.그래도 그는 꾹 참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수정아, 네가 아직도 오늘 일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건 안다."이현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김수정은 또다시 아무렇지 않은 듯 몸을 피했다.그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순간 표정이 굳었지만, 이내 손을 내렸다.그는 못 본 척 말을 이었다."우리는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며 수많은 일을 겪어 왔는데 아직 내 마음을 모르겠느냐?내가 서월이를 들이는 건 살려준 은혜를 갚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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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서월아, 어제 일로 마음고생이 많았지.수정이는 사람이 많이 변했으니,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말아라. 모든 일이 정리되면, 네 진심을 결코 저버리지 않겠다..."편지에는 이현이 김서월을 달래고 마음을 전하는 내용뿐 아니라, 임씨 집안을 향한 반감도 담겨 있었다.임씨 집안이 있는 한 김수정은 결코 자신만 바라보며 살아갈 여인이 될 수 없다는 걸 끊임없이 일깨워 주었다.그의 마음이 향한 사람은 오직 김서월뿐이었다.그뿐만 아니라 편지에는 지난 삼 년 동안 김수정이 점점 이상해졌다는 불평과 그녀를 깎아내리는 말까지 적혀 있었다."승상이 어릴 적부터 너만 아끼고, 적녀인 수정이에게는 무심했던 것도 이해가 가는구나.그땐 나도 그녀가 안쓰럽다고 여겼다.지금 생각해 보니, 그저 스스로 미움을 살 만한 성격이었던 것이지.친아버지에게조차 외면받는 사람이 어찌 정상일 수 있겠느냐?"......김수정은 편지를 끝까지 읽어 내려갔고, 꽉 움켜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그녀는 분노를 참지 못한 채 편지를 구겨 화로 속에 던져 넣었다. 종이는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그때 초록이 문을 열고 들어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가씨, 다 처리됐습니다. 성남 전당포 사장 전씨가 몇 가지 물건은 아가씨께서 직접 확인하셔야 한다고 했습니다."김수정은 마음속 감정을 억누른 채 짧게 답한 뒤, 초록과 함께 망토를 걸치고 승상부 측문으로 조용히 빠져나갔다.전당포 안채.전씨는 망설이는 표정으로 비단 함 하나를 김수정 앞으로 밀었다."아가씨, 다른 물건은 괜찮습니다만 이 금비녀만큼은..."그는 함을 열어 정교한 모란 문양이 새겨진 금비녀를 꺼냈다. 비녀 끝에는 아주 작은 '수' 자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아가씨의 이름이 새겨진 물건입니다. 이런 사적인 물건은 전당포 규정상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게 즉시 녹여 버립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그 비녀는 김수정이 열다섯 살 생일을 맞았을 때 이현이 선물한 것이다.그는 직접 그녀의 머리에 비녀를 꽂아 주며 귓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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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각 집안의 도련님과 아가씨들이 좁은 방을 가득 메운 채 김서월의 상태를 걱정하며 이것저것 물어보고 있었다.하인 차림의 사내가 바닥에 무릎 꿇은 채 두 호위에게 제압당하고 있었다.사내는 김수정을 보자 구세주라도 만난 듯 목이 터져라 외쳤다."아가씨, 제발 살려 주십시오! 아가씨!"김수정은 미간을 찌푸린 채 그를 바라봤다."누구냐? 나는 너를 본 적도 없다."하인은 곧바로 소리쳤다."저를 모르다니요!"방 안에 모여 있던 도련님들과 아가씨들도 저마다 한마디씩 보태며 김수정의 죄를 기정사실로 몰아갔다."저 사람은 분명 아가씨 찻집의 하인인데 어찌 모른다고 할 수 있습니까?""발뺌할 생각은 마십시오! 아가씨 말고 누가 그런 독한 짓을 하겠습니까."하인은 김수정이 인정하지 않자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바로 저분입니다! 김수정 아가씨가 시킨 일입니다! 은자 오십 냥을 주면서 달향각에서 서월 아가씨의 명예를 더럽히라고 했습니다!"김수정은 사내를 한 번 훑어본 뒤 차갑게 말했다."그 찻집은 이미 내 것이 아니다.""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십시오!"상서 집안 아가씨가 곧바로 날카롭게 반박했다."경성에서 그 찻집이 아가씨의 어머니가 남긴 혼수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팔았다고 하면 누가 믿는단 말입니까?""맞아요."다른 이도 곧바로 맞장구쳤다."그때 상국사 일은 서월 아가씨가 사람을 구했다는 것도 다들 대강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 사내는 어째서 세세한 내용까지 줄줄 꿰고 있는 겁니까? 당사자가 뒤에서 시키지 않았다면 대체 어디서 들었냐 말입니까?""어쩜 저리 마음씨가 독할 수가 있죠!""셋째 황자께서 예전엔 그토록 아끼셨다니, 참 안타까울 따름입니다!"순식간에 비난과 욕설이 파도처럼 김수정을 덮쳐 왔다.김수정은 더 이상 변명하지 않았다. 어떤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하지만 모두의 눈에 그 침묵이 곧 인정처럼 보였다.바로 그때, 침상에 누워 있던 김서월이 천천히 눈을 떴다.김서월은 눈을 뜨자마자 사람들에게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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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김수정이 의원을 나설 무렵에는 이미 해가 기울어 있었다.그녀는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길모퉁이를 돌아서려는 순간, 새까만 마차 한 대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눈앞에 멈춰 섰다.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건장한 사내 두 명이 뛰어내렸다.그들은 한마디 말도 없이 김수정을 붙잡아 마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다.김수정은 비명을 지를 틈조차 없었다. 입과 코가 틀어막히더니 곧 눈앞이 캄캄해졌다.마차는 덜컹거리며 한참을 달렸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김수정은 거칠게 마차에서 밀려나 텅 빈 방 안으로 내던져졌다.잠시 뒤,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김수정은 힘겹게 눈을 떴다.이현이었다. 그는 높은 곳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그의 뒤로는 상궁들과 시녀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이현은 이미 화려한 비단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조금 전까지 얼굴에 서려 있던 초조함과 걱정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대신 정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싸늘한 냉기만이 남아 있었다."김수정, 남의 명예를 더럽히는 게 그렇게 좋았느냐?오늘은 본왕이 사람을 시켜 너를 대낮에 납치해 며칠 동안 자취를 감추게 하겠다. 네 명예가 짓밟히고 정절이 더럽혀지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똑똑히 맛보아라!"이현은 음산한 눈빛으로 뒤에 있는 상궁들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 "여기에 갇혀 있는 동안 가만히 있을 생각은 마라.저들은 궁에서 나온 교양 상궁들이다. 잘못을 저지른 종친 여인들을 가르치던 자들이지. 황자부에 시집오기 전까지, 웃어른과 부군을 어떻게 모셔야 하는지 저들이 똑똑히 가르쳐 줄 것이다. 네 고약한 성질머리도 이번에 단단히 고쳐지겠지." 이후 며칠은 김수정에게 악몽과도 같은 시간이었다.그 교양 상궁들은 겉으로는 상처 하나 남기지 않으면서 사람을 괴롭히는 온갖 수법을 알고 있었다.그들은 자수 바늘로 그녀의 손끝을 한 땀 한 땀 찔러 댔다.또 깨진 사기 조각 위에 무릎을 꿇은 채, 뜨거운 차를 수없이 올리게 했다. 조금이라도 말을 듣지 않으면 찬물에 적신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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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백마에 올라탄 이현의 얼굴에는 기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어째서인지 초라한 상단을 보는 순간, 그의 마음 한구석에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이 맴돌았다.그의 외침과 함께 징과 북소리가 순식간에 멎었다.마차 안에 숨어 있던 초록은 곁에서 깊이 잠든 김수정을 바라보며 손바닥에 식은땀이 맺혔다. 심장은 금방이라도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듯 거세게 뛰었다. 그녀는 입을 꽉 틀어막은 채 감히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하지만 선두에 서 있던 표사는 몹시 침착했다. 그는 앞으로 한 걸음 나와 이현을 향해 예를 올렸다."전하, 저희는 비단을 다른 지역으로 운송하는 상단입니다. 감히 전하의 혼례 행차를 막아선 죄,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이현의 날카로운 시선이 표사와 굳게 닫힌 마차 안을 훑었다.그는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몇 마디 더 캐물으려 했다.곁에 있던 하인이 급히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재촉했다."전하, 혼례 시각이 다 되어 갑니다. 이런 일로 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폐하와 황후마마께서 궁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하인의 말에 이현은 생각을 거두었다.오늘은 그와 서월의 혼례를 올리는 날이었다. 아마 괜한 생각이었을 것이다.그는 마지막으로 그 상단을 한 번 더 바라본 뒤 손을 휘저으며 차갑게 말했다. "가자."혼례 행렬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요란한 징과 북소리도 다시 울려 퍼졌고, 침묵에 잠긴 그 상단과 스쳐 지나갔다.흥겨운 혼례 악대 소리가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초록은 온몸의 힘이 풀린 채 마차에 기대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그들은 무사히 경성을 빠져나갔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밖에서 들려오는 고함 소리에 김수정은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김수정이 천천히 눈을 뜨자 코끝에는 은은한 약초 향이 감돌고 있었다."아가씨, 깨어나셨군요!"초록이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서둘러 따뜻한 물 한 잔을 내밀었다.김수정은 물잔을 받아 들고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 걸쳐진 깨끗한 옷을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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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며칠째 억누르던 불안감이 다시금 치밀어 올랐다.이현은 즉시 몸을 일으켰다. 김서월에게 말 한마디 건넬 틈도 없이 사람들을 이끌고 김씨 집안으로 달려가, 곧장 김수정이 머물던 처소로 향했다.그는 문을 거칠게 걷어찼다. 그러나 방 안은 이미 말끔히 정리되었고 탁자 위에는 먼지 한 톨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사람은 어디 있느냐?"차가운 이현의 목소리가 마당에 울려 퍼졌다.김씨 집안 하인들은 겁에 질린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감히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했다.집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전하, 혼례 당일 행렬이 찾아왔습니다. 전하의 명을 받고 아가씨를 모시러 왔다고 하기에... 저희도 감히 막지 못했습니다."행렬이라고?이현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그제야 거리 모퉁이에서 마주쳤던 상단이 떠올랐다.그는 바로 눈앞에서 김수정을 놓치고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걷잡을 수 없는 후회와 분노가 한꺼번에 밀려왔다."당장 찾아라!"이현은 뒤에 있던 호위들을 향해 고함쳤다."그 상단이 어디로 갔는지 모조리 조사해라! 경성을 샅샅이 뒤지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찾아내라!"호위들은 곧바로 명을 받고 움직였다. 순식간에 셋째 황자부의 사람들이 총동원되었다.하지만 하루 동안 샅샅이 수색한 끝에 돌아온 보고는 이현을 절망에 빠뜨렸다."전하, 저희가 추적한 결과 며칠 전 경성을 떠나 남쪽으로 향한 것은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경성 경계를 벗어난 뒤로는 행방을 전혀 찾을 수 없었습니다."이현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저택으로 돌아왔다. 가슴속은 답답함과 초조함으로 가득했다.마당을 가득 메운 붉은 비단 장식을 바라보던 그는 처음으로 그것들이 눈에 거슬렸다.김서월은 화려한 옷차림에 직접 끓인 인삼차를 들고 다가왔다. 얼굴에는 단정하고 온화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전하, 다녀오셨습니까. 안색이 좋지 않으신데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차를 끓여 왔으니 따뜻할 때 드십시오."평소 같았으면 그런 다정한 모습에 마음이 놓였을 것이다.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김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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