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삼백 년 세월 동안 상국사(相國寺)의 향불은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었다. 김수정은 셋째 전하 이현과 나란히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녀는 두 눈을 감은 채 간절히 빌었다. '부디 곁에 있는 이와 평생을 함께하며 백년해로하게 해주십시오.' 그때 절 문밖으로 흑의인들이 들이닥쳤다. 차가운 검끝이 일제히 이현을 겨눴다. 위기의 순간, 김수정의 이복여동생 김서월이 몸을 던져 자객들을 다른 곳으로 유인해 갔다. 호위들이 절벽 아래에서 김서월을 발견했을 때, 그녀의 온몸은 상처투성이였고 덩굴에 걸린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건진 상태였다.
View More"갑시다."온초운은 눈앞의 사내가 위험할 정도로 집착하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더는 상대하지 않고, 아직도 어리둥절해하는 김수정을 감싸 안은 채 집 안으로 향했다.그러고는 하인들에게 이현을 내쫓으라고 명했다.이현은 김수정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도, 이미 다른 사람과 혼인했다는 현실도 받아들이지 못했다.하인들에게 붙잡혀 끌려가면서도, 그토록 찾아 헤매던 김수정이 다른 사내의 품에 안긴 채 점점 멀어지는 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김수정을 데리러 달려온 초록은 이현의 얼굴을 보는 순간 멈칫하더니,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초록은 방으로 돌아와 사람들을 모두 물린 뒤,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울먹이며 말했다. "아가씨! 방금 그 사람... 셋째 황자 이현입니다! 예전에 아가씨의 정혼자셨습니다! 그분이...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온 거죠?"초록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다급히 지난 일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어쩌면 좋습니까. 이제 아가씨께서 계신 곳을 알았으니 절대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겁니다. 경성에 있을 때도..."김수정은 처음 듣는 이야기들에 머릿속이 하얘졌다.무슨 일인지 물어보려던 그때, 문밖에서 온초운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걱정하지 마십시오."온초운은 멀리 가지 않았고, 마침 초록의 말을 듣게 되었다.그는 방으로 들어와 초록에게 일어나라고 손짓한 뒤, 김수정의 곁으로 다가가 차갑게 식은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온초운의 눈빛은 한없이 단단하면서도 따뜻했다."그가 누구든, 과거에 어떤 인연이 있었든 지금 당신은 제 부인입니다. 제가 있는 한 누구도 당신을 해치지 못할 겁니다."김수정은 온초운의 흔들림 없는 눈빛을 바라보다 안도한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온초운은 안심하라는 듯 미소를 지어 보인 뒤, 곧장 서재로 가 아버지를 찾았다.자초지종을 들은 온초운의 아버지는 곧바로 붓을 들어 급한 상소를 써 경성으로 보냈다.상소에는 단 한 가지, 황실 종친이 신하의 부인을 빼앗으
김수정과 온초운의 혼례는 소박하지만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다.경성의 번거로운 예법도, 화려한 격식도 없었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가족과 지인들의 진심 어린 축복뿐이었다.혼례를 올리는 날, 시녀 초록은 김수정의 머리를 단장해 주다가 끝내 눈시울을 붉혔다."아가씨, 이제야 고생 끝에 행복이 찾아왔네요."'그래. 이제야 행복이 찾아왔다.'혼인 후의 나날은 평범하면서도 행복했다.온초운은 혼인 전과 다름없이 김수정을 다정하게 아끼고 존중했다. 그의 부모 역시 그녀를 친딸처럼 보살폈다.김수정은 마치 어머니와 외조부가 살아 계시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매일 책을 읽고 글을 쓰며 꽃과 나무를 가꾸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경성에서의 지난날은 어느새 말끔히 잊은 지 오래였다.하지만 어렵게 되찾은 그 평온은 예상치 못한 손님의 등장으로 산산이 무너지고 말았다.어느 평범한 오후, 김수정은 뜰에서 꽃가지를 다듬고 있었다. 그때 한 사내가 하인들의 만류를 뿌리친 채 미친 듯이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그의 비단옷은 먼지로 뒤덮여 있었고, 두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하지만 김수정을 보는 순간, 그의 눈빛은 벅찬 기쁨과 깊은 고통으로 가득 찼다."수정아! 드디어... 드디어 널 찾았다!"사내는 쉰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며 한 걸음씩 다가왔고 떨리는 손을 내밀어 그녀를 끌어안으려 했다.김수정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깜짝 놀랐다.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선 그녀는 낯선 사내를 경계하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도련님,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그녀는 그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그 한마디에 이현의 가슴 가득 차올랐던 그리움과 벅찬 기쁨은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이현은 그 자리에 굳은 채, 낯설기만 한 그녀의 맑은 눈동자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봤다.'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정말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고?'"수정아, 나다! 이현이라고!"그는 다급히 말을 이었다."내가 잘못했다. 이제야 모든 걸 알게 됐어! 나와 함
어느 날, 온초운은 김수정을 데리고 이야기를 들으러 찻집을 찾았다.이야기꾼은 마침 사와 운군이 경호월에서 함께 달을 감상하는 대목을 들려주고 있었다.실감 나는 입담에 사람들은 모두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그때 옆자리의 한 선비가 감탄하듯 입을 열었다."이 책의 운군은 사를 참으로 극진히 아끼는군. 내가 보기엔 두 사람은 단순한 벗이 아니라 분명 남다른 마음이 있었던 게 틀림없네."곁에 있던 사람들이 곧바로 맞장구를 쳤다."맞는 말일세! 마음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 긴 여정을 함께하고, 저렇게 살뜰히 챙길 수 있었겠나? 정말 천생연분이 따로 없구먼!"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던 김수정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온초운을 향해 장난스럽게 말했다."제 생각에는 다들 너무 앞서가신 것 같습니다."온초운은 말없이 찻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려 김수정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더없이 맑고 진지했다."아닙니다. 그분들의 말이 맞습니다. 저 수정 아가씨를 연모하고 있습니다."김수정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온초운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책 속 이야기는 일부 꾸며 낸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운군이 사를 향한 마음만큼은 모두 제 진심입니다.처음 아가씨를 만난 그날부터 제 마음은 이미 아가씨를 향하고 있었습니다.함께 길을 걸을수록 아가씨의 재능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고, 어떤 어려움에도 꺾이지 않는 강인함에 감탄했습니다. 무엇보다 세상을 자유롭게 바라보는 그 마음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수정 아가씨를 연모합니다. 부디 제가 아가씨의 진정한 운군이 되어, 앞으로 모든 길을 함께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그의 고백에는 화려한 말이 없었지만 그 진심은 김수정의 마음을 울렸다.김수정은 함께 걸어온 지난날을 하나씩 떠올렸다.가장 힘들고 절망했던 순간 먼저 손을 내밀어 준 사람도, 앞날의 두려움에 머뭇거리던 그녀에게 다시 빛을 준 사람도 그였다. 온초운과 그의 가족이 건넨 따뜻한 마음은 김수정에게 다시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는 기쁨을 알
김수정은 외조부의 기행록에 남겨진 모든 곳을 둘러본 뒤,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미련도 마침내 내려놓을 수 있었다.무엇보다 온씨 집안 사람들의 따뜻한 보살핌 덕분에, 눈앞에 펼쳐진 강남의 풍경은 그녀에게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그 순간, 한 가지 생각이 조용히 마음속에 싹텄다.이곳에 머물고 싶었다.조용한 집 한 채를 구해 이곳에 정착하며 살아가고 싶었다.그 마음을 온초운에게 털어놓자, 그의 미소는 한층 더 깊어졌다."좋습니다."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잠시 뒤, 온초운은 더 과감한 제안을 했다."수정 아가씨의 기행록은 정말 훌륭합니다. 서점에 맡겨 책으로 내는 건 어떻겠습니까? 아가씨가 보고 느낀 세상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면 분명 큰 사랑을 받을 겁니다."'책을 낸다고?'김수정은 순간 멍해졌다.경성에 있던 시절, 여인이 책을 낸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명문가 아가씨들의 재능이란 결국 사내를 기쁘게 하기 위한 장식처럼 여겨질 뿐이었는데, 서점에 책으로 진열되어 사람들의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김수정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었다."저는... 자신이 없습니다.""어째서 안 된다는 겁니까?"온초운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김수정을 바라봤다."수정 아가씨, 스스로를 믿으셔야 합니다. 세상에는 평생 좁은 세상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들은 아가씨처럼 세상을 직접 보고 느껴 본 적이 없습니다.아가씨가 보고, 듣고, 느낀 세상을 사람들과 나누십시오. 아가씨의 글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그들의 세상을 조금 더 넓혀 줄 수 있습니다."그의 말은 잔잔하던 그녀의 마음에 던져진 작은 돌멩이 같았다.고요했던 마음에 물결이 끝없이 번져 나갔다.그래. 왜 안 된다고만 생각했을까.이제 그녀는 더 이상 가문이나 사내에게 기대어 살아야 하는 김수정이 아니었다.이제 그녀에게는 자신의 생각이 있었고, 스스로 걸어갈 두 발이 있었다. 그녀가 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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