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남극보다 차가운 결혼: Chapter 11 - Chapter 20

20 Chapters

제11화

비행기가 구름 위로 올라갔다.한동안 흔들리던 기체가 안정을 되찾자, 나는 창밖에 겹겹이 쌓인 구름을 바라보았다.답답하게 막혀 있던 마음도 처음으로 시원하게 트이는 것 같았다.주서언은 아마 USB 속 내용을 확인했을 것이다.그리고 내가 어떻게 그런 비밀을 알게 됐는지, 상상조차 하지 못하겠지.그가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오기 위해 어떤 수단을 썼는지, 또 회삿돈을 어떤 식으로 빼돌렸는지는 너무나 은밀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세상에 드러난 적이 없었다.평생 회사 일이라고는 해 본 적 없는 내가 찾아낼 수 있는 자료도 아니었다.실제로 내가 찾아낸 것도 아니었다.임지영이 귀국한 뒤, 나는 내가 완벽한 사랑과 가정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이 한낱 신기루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나는 여러 번 괴로워했고, 따져 물었고, 싸우다 결국 무너졌다.그 사이 우리 관계의 금은 점점 더 깊어졌다.하지만 세상에 영원히 감출 수 있는 비밀은 없었다.머지않아 누군가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나에게 자료를 전부 건넸다.“주서언 부회장님 아내 맞으시죠? 남편 외도 때문에 많이 힘드실 겁니다. 이 자료를 들고 신고하시면 주서언 부회장은 끝입니다.”“사모님께서도 재산분할에서 상당한 몫을 가져가실 수 있고요. 전부 사모님께 돌아갈 겁니다.”카페 안에서 나는 안경 너머로 계산이 가득한 남자를 바라보았다.“왜 저를 도와주시는 거죠? 아니면, 이 일에서 당신은 어떤 역할을 하는 건가요?”남자는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저는 마흔이 넘었습니다. 그 회사에서 십수 년을 버텼고요. 원래 주서언이 앉아 있는 부회장 자리는 제 자리여야 했습니다. 경쟁이야 실력으로 이기는 거라고 하지만, 그 사람 방식은 너무 비열했습니다.”“요즘 신고는 실명으로 해야 합니다. 저는 앞으로도 이 업계에서 살아남아야 하니, 가장 가까이에 있던 사람이 나서는 게 제일 적절하지 않겠습니까.”“그러니 사모님, 잘 생각해 보세요. 제 인내심이 그리 길지는 않습니다. 원치 않으시면 다른 사람을 찾아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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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임지영 때문이었다.임지영은 주서언이 마음 깊은 곳에서 끝내 놓지 못한 집착이었다.주서언은 끊임없이 임지영에게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 했다.정해진 길만 따라가서는 언제 성공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걸 깨닫자, 그는 결국 지름길을 택했다.죽도록 일한 것도 사실이었다.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하지만 어떤 사정이 있다고 해도, 잘못은 잘못이었다.임지영에 관한 자료는 익명의 메일로 받았다.메일의 IP 주소는 해외였다.메일을 보낸 사람은 임지영 때문에 상처받은 한 남자의 아내였다.그 여자는 임지영을 향한 혐오를 숨기지 않은 채 모든 것을 폭로했다.임지영이 상간녀였으면서도 당당하게 남의 남편을 제 남자친구라고 불렀다는 이야기.심지어 약혼녀 행세까지 하며, 온갖 수단을 동원해 그 자리를 차지하려 했다는 이야기.이야기는 소름 끼칠 만큼 세밀했다.임지영은 상식이 무너졌다고밖에 볼 수 없는 짓을 수없이 저질렀다.함께 첨부된 사진과 영상은 임지영이 그런 짓을 한두 번만 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그랬던 임지영이 다시 귀국해서 내 결혼까지 망치려 한다는 걸 알고, 그 여자는 통쾌하다는 듯 말했다.[이 자료가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요. 저는 그 여자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편하게 사는 꼴을 못 보거든요.]도움은 됐다.내가 떠나기로 한 바로 그날.요즘의 주서언이 눈이 멀고 마음까지 흐려져 그런 여자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떠올릴수록, 나 역시 한때는 눈멀고 마음이 흐려진 사람이었던 것 같았다.주서언이 해 온 일들까지 떠올리고 나자, 오래도록 나를 붙잡을 줄 알았던 상처도 내 마음속에서 힘을 잃고 작아졌다.앞으로 주서언과 임지영 쪽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지켜볼 생각이었다.필요하다면 뒤에서 힘을 보탤 마음도 있었다.하지만 지금 내게 더 중요한 일은 내 인생의 원래 궤적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서율시에 도착한 다음 날.나는 김연희 교수님을 찾아가 시험을 봤다.그리고 회의실에서 교수님이 답안을 채점하고 결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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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그래도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이번 평가를 통과하지 못한 건 아쉽습니다. 하지만 제 인생의 시험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포기하지 않겠습니다.”김연희 교수님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어떻게 포기하지 않겠다는 건데?”“교수님 연구실에서 신입 연구원 충원이 있을 때마다 모집 공지가 올라온다는 걸 봤습니다. 다음 모집 때 다시 지원할 수 있도록 준비하면서 기다리겠습니다.”“그렇게 단호해? 그때 대학원 포기하고 남자친구 따라 떠날 때도 네가 참 단호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다시 돌아가 그 사람을 찾을 생각은 없어?”“없습니다.”나는 낮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어떤 벽은 직접 부딪쳐 봐야 나와 맞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저는 다시 돌아가지 않겠습니다.”“제가 정말로 포기했고, 또 잃어버렸던 것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았습니다. 이제는 하나씩 다시 찾아오고 싶습니다.”나 자신도 되찾고 싶었다.김연희 교수님은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우리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잠시 정적이 흐른 뒤, 교수님이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필기시험은 첫 단계였고, 방금 면접도 통과했어.”“채영아, 우리 연구실 합류를 환영한다.”일이 이렇게 뒤집힐 줄은 몰랐다.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교수님, 정말 제가 통과한 건가요?”“그래.”김연희 교수님은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안타까움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은 흐뭇함이었다.“대학 때부터 나는 네가 마음에 들었어. 재능이 있다고 봤지. 내 눈이 틀리지 않았네.”“7년이나 비워 두고도 한 달 만에 여기까지 따라왔잖아. 이런 일은 아마 너라서 가능했을 거야.”“하지만 너무 쉽게 돌아오게 하면 이 기회가 얼마나 소중한지 네가 모를 것 같아서, 면접을 하나 더 넣었다.”“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해.”나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감사합니다, 교수님.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연구실로 돌아온 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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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성한그룹의 본부장, 성재윤이었다.성재윤은 젊었지만, 눈매와 분위기에서 숨기기 어려운 귀티가 배어 나왔다.전체적인 인상은 차갑고 단정했다.그런데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이상할 만큼 온기가 어려 있었다.“죄송합니다, 채영 씨. 혹시 우리가 어디서 본 적이 있습니까?”성재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그렇게 물었다.나는 조금 놀랐다.낮고 예의 바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것이 가벼운 수작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정말 궁금해서 묻는 말이었다.그래서 나도 어쩔 수 없이 성재윤을 조금 더 자세히 바라보았다.자세히 보니 더 잘생겼다.하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이렇게 눈에 띄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다면, 내가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나는 정중하게 대답했다.“본부장님, 아마 없을 겁니다.”작은 해프닝은 그렇게 지나갔다.연구실에서 수행한 1차 프로젝트 결과에 성한그룹은 매우 만족했다.양측은 중요한 일정과 방향을 다시 확인했고, 프로젝트는 계속 진행되기로 했다.회의가 끝난 뒤, 동료들이 참지 못하고 이야기를 꺼냈다.그때 나는 알게 되었다.성재윤 본부장이 바로 성한그룹의 차기 후계자라는 것을.성재윤은 졸업 후 현장 업무부터 시작해 본부장 자리까지 올라왔다고 했다.평소에는 차갑고 사무적인 성격이라, 업무 외의 일은 좀처럼 입에 올리지 않는 사람이라고도 했다.“이상하긴 하다. 진짜 닮은 사람을 봤다고 해도, 성재윤 본부장 성격에 회의 중에 굳이 그런 걸 물어볼 사람은 아닌데.”“맞아. 성재윤 본부장, 공사 구분 엄청 철저하잖아. 혹시 채영 씨한테...”“말도 안 돼. 성재윤 본부장은 이미 약혼녀도 있어. 게다가 워낙 사생활이 깔끔해서 스캔들도 하나 없잖아.”“...”다들 원래 지나치게 수다스러운 사람들은 아니었다.곧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잠깐 이야기하다가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나 역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성재윤은 내게 한마디 물었을 뿐이고, 이후에는 정상적으로 업무를 진행했다.게다가 약혼녀가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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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나는 완전히 어리둥절해졌다.‘왜 나를 찾는 거지?’그렇게 얼떨떨한 채 연구실 입구로 나가자, 우아한 중년 여성이 고급 세단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나를 보자마자 그녀는 곧장 차에서 내렸다.“나는 오미정이야. 네 엄마 친구였어.”그녀는 내 손을 잡더니 몇 번이고 나를 살폈다. 이내 눈가가 젖어 들었다.내가 놀란 표정을 짓자, 그녀는 애써 감정을 눌렀다.“미안해. 갑자기 이러면 놀라겠지. 이름이 채영 맞지? 지금 시간 괜찮니? 아니면 네가 편할 때 같이 밥이라도 먹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모가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아.”엄마의 친구라면, 나는 시간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팀장에게 양해를 구한 뒤, 나는 오미정 여사의 차에 올랐다.차 안에서 나는 빠르게 사정을 알게 되었다.오미정 여사는 정말로 내 엄마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보육원에서 함께 자란 두 소녀는 서로에게 의지했고, 서로를 지켜 주었다.각자 입양되던 때, 연락 수단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약속했다.10년 뒤, 보육원 앞에서 다시 만나자고.“네 엄마는 약속을 정말 잘 지키는 아이였어. 분명히 갔을 거야. 그런데 내가 못 갔어.”“그때 양부모가 나를 방에 가둬 놓고, 시골의 나이 많은 남자에게 돈을 받고 시집보내려 했거든. 그래서 나는 멀리 도망칠 수밖에 없었어.”오미정 여사는 눈물을 머금은 채 그 시절을 이야기했다.처음에는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그러다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 두 사람은 함께 성한그룹을 일으켰다.삶이 안정된 뒤, 오미정 여사는 내 엄마를 찾으려 했다.하지만 내 아버지에게서 돌아온 말은, 찾던 사람이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뿐이었다.아버지는 엄마의 성장 배경을 알고 있었다.어쩌면 보육원 출신 친구라면 가난한 친척 같은 사람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돈을 뜯으러 온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그래서 아버지는 선을 그었다.엄마가 나를 낳았다는 사실을 숨겼고, 오미정 여사와도 완전히 연락을 끊었다.결국 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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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오미정 여사는 놀라 성재윤을 바라보았다.“지금 뭐라고 했니? 내가 영이를 딸로 삼겠다는데, 네가 왜 반대해?”성재윤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저는 외동아들로 살고 싶습니다.”“어머니가 채영 씨를 챙기시는 건 저도 찬성합니다. 하지만 가족으로 들이는 건 안 됩니다.”오미정 여사는 어이없고 민망한 얼굴로 명품 가방을 움켜쥐었다.그 우아한 귀부인의 분위기가 하마터면 무너질 뻔했다.나는 얼른 오미정 여사를 붙잡았다.재벌가에서는 이런 문제에 민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양녀가 생긴다는 건, 성재윤에게 재산을 나눠 가져야 할 누군가가 생긴다는 뜻일지도 몰랐다.그렇게 생각하면 성재윤의 반대도 이해할 수 있었다.그 뒤로 나는 나를 아껴 주는 어른 한 명을 얻게 되었다.그 외에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매일 프로젝트와 자기 계발에 집중했고, 하루하루가 충실했다.조금 여유가 생기자, 그제야 주서언 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들여다볼 여력이 생겼다.내가 떠난 그날 밤, 주서언과 임지영의 키스 영상이 공개됐다고 들었다.생각해 볼 것도 없이 임지영이 스스로 짠 판이었다.그런데 의외였다.USB를 통해 주서언은 임지영의 진짜 모습을 알았을 텐데...그런데도 위기를 막기 위해 임지영과 혼인신고를 했다.임지영이 어떤 사람이든, 주서언은 그렇게까지 그녀를 사랑하는 걸까?그럴 사람 같지는 않았다.주서언에게 주렁주렁 매달린 시한폭탄들을 떠올리자, 문득 한 가지 추측이 스쳤다.‘앞으로 벌어질 일은 더 볼만하겠구나.’...반년 뒤, 프로젝트가 정식으로 완성됐다.우리는 언론을 초청했고, 이 성과는 주요 지면에 실릴 예정이었다.하지만 다른 사건이 모든 관심을 빼앗아 갔다.호람시 광호그룹 부회장 주서언이 법망을 피해 해외로 달아났다는 뉴스였다.주서언은 대부분의 재산을 개인 명의로 빼돌렸다.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강 조망 고급 아파트였다.매매가 90억 원.주서언은 계약금과 일부 잔금만 낸 뒤, 그 집을 담보로 수십억을 끌어냈다.그 돈을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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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영이야, 나야.]그날 나는 해외 번호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전화기 너머로 주서언의 조금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내 시간이 많지 않아. 짧게 말할게. 네가 나 때문에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알아. 네가 가지고 있던 자료로 나를 압박한 것도 원망하지 않아.][하지만 나는 정말 내 마음을 확인했어.][나는 진심으로 널 사랑해.][뉴스 봤겠지. 지금 나는 해외에 있어. 하지만 돈은 많아. 나한테 와 줄래? 아무도 우리를 모르는 곳에서 조용히 살자.][네가 말했잖아. 내가 있는 곳이 집이라고. 나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나는 맹세할 수 있어. 앞으로는 정말 너만 사랑할게.]우리는 오래 함께했다.주서언이 이렇게 길게 자기 마음을 털어놓은 적은 거의 없었다.그 10년 동안 주서언이 이런 진심의 절반만 보여 줬더라면, 나는 얼마나 감격했을까?하지만 주서언은 어떻게 이렇게 많은 일이 있었는데도, 모든 것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어떻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앞으로 사랑하겠다는 한마디로 지난 고통을 덮으려 하는 걸까?“너한테 가지 않을 거야. 나는 지금 내 삶이 좋아.”“더 큰 이유는... 내가 이제 널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야. 내가 바르고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라고 믿었던 주서언은 오래전에 사라졌어.”“내가 원하는 건 이제 네가 줄 수 없어. 넌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고, 그럴 자격도 없어.”전화기 너머는 오래도록 조용했다.그럴 만도 했다. 내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그의 심장에 박혔을 것이다.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전부 사실이었다.그렇게 침묵이 이어졌고, 경찰이 내게 OK 신호를 보낸 뒤에야 나는 전화를 끊었다.처음 주서언에게서 전화받자마자, 나는 곁에 있던 동료에게 경찰에 신고해 달라고 부탁했다.내가 그토록 오래 들어주고, 천천히 말을 이어 간 것은 전부 시간을 끌기 위해서였다.일부러 가장 직설적인 말들만 골랐다.입 밖에 내는 순간, 그것들이 주서언에게 어떤 상처가 될지 알고 있었다.우리는 10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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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정숙하세요.”재판장의 단호한 목소리에 법정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래도 임지영에게는 스스로 진술할 기회가 주어졌다.임지영은 눈물과 콧물로 얼굴이 엉망이 된 채 입을 열었다.“저는 정말 억울해요. 주서언과 저는 친구일 뿐이었어요.”“그때 키스도 게임 때문에 한 거지, 진짜가 아니었어요. 어릴 때부터 주서언이 저를 좋아했지만 저는 계속 거절했어요. 같이 자란 친구들이 다 증언해 줄 수 있어요!”“나중에 여론이 그렇게 커지니까, 오해받는 게 안타까워서 의리로 혼인신고를 해 준 게 전부예요.”“우리는 가짜 부부였어요! 그런데 주서언이 저한테 더러운 누명을 씌우고, 죄와 빚을 전부 떠넘기려 한 겁니다.”“저는 너무 착해서 저 악마를 도와준 것뿐이에요. 이제야 주서언이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봤어요. 저는 이혼할 거고, 모든 일은 저와 관계없습니다!”임지영은 초췌한 얼굴로 계속 눈물을 흘렸다. 목소리마저 가늘게 떨렸다.모르는 사람이 보면 어느 정도 동정이 생길 만한 모습이었다.주서언은 차갑게 웃더니 변호인에게 눈짓했다.곧 변호인이 증거 자료를 제출했다.“임지영 씨는 친구라는 이름으로 귀국했지만, 처음부터 제 가정을 깨뜨릴 생각이었습니다. 오랫동안 불륜을 이어 온 사람입니다.”사진과 영상이 하나씩 제시됐다.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었지만, 내용은 추악했다.목에 있는 작은 점은 영상 속 여자가 임지영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었다.임지영이 당황해 소리쳤다.“가짜야! 전부 가짜야!”“법정에 제출된 증거는 이미 감정 절차를 거쳤습니다.”차가운 한마디에 임지영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주서언은 다시 말을 이었다.“임지영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된 뒤, 저는 조용히 임지영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귀국 후 임지영의 목적은 제 아내를 밀어내고, 제가 이룬 모든 것을 차지하는 것이었습니다.”“저와 혼인신고를 한 뒤, 제가 부정한 수입에 대해 넌지시 말할 때마다 임지영은 단 한 번도 말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찬성했습니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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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나는 법정에는 나가지 않았다.주서언이 나를 보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조금 놀랐다.그리고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내가 경찰에 단서를 제공했다는 것을...그래서 자신이 국내로 송환됐고, 이제 수감생활을 앞두게 됐다는 것도.그런 상황에서도 나를 원망하거나 증오하지 않을 수 있을까?나는 한동안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마침 오미정 여사에게서 저녁을 먹으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우리 영이 또 말랐네. 이따 꼭 많이 먹어야 해.”오미정 여사는 만날 때마다 내가 말랐다고 했다.나는 그제야 알았다.가족의 눈에는 언제나 내가 말라 보일 수 있다는 것을.어릴 때 나는 다른 아이들이 늘 걱정하는 부모의 사랑 속에 자라는 모습을 보며 늘 부러워했다.그때마다 생각했다. 엄마가 살아 있었다면, 나도 누군가의 보물이었을 거라고.오랜 시간이 지난 뒤, 마침내 나를 이유 없이 사랑해 주는 누군가를 만났다.엄마가 하늘에서 본다면 분명 기뻐하고 안심할 것이다.평소 성강석 회장과 성재윤은 일이 많았다. 내가 찾아가면 대부분 오미정 여사와 둘이 시간을 보냈다.그런데 오늘은 성재윤도 있었다. 심지어 약혼녀 차은서까지 데리고 왔다.나는 예의 있게 인사했다.차은서는 내 인사를 받았지만, 계속 몰래 나를 바라보았다. 표정도 어딘가 묘했다.내 시선이 닿으면 얼른 눈을 돌렸다.이상했지만, 이유를 알 수 없어 그냥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저녁을 먹은 뒤, 나는 오미정 여사와 함께 정원을 걸었다.그때 그네 쪽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성재윤과 차은서였다.“성재윤 씨가 좋아하는 사람이 채영 씨죠?”“맞습니다.”“그럼 우리 사이는요?”“채영 씨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고, 채영 씨 마음도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당분간은 지금처럼 유지하는 게 어떻겠습니까?”“그래요.”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그제야 차은서가 계속 나를 그런 눈으로 바라본 이유를 알 것 같았다.성씨 집안과 차씨 집안은 혼인을 약속한 사이였다.차은서 역시 부족함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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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무슨 오해인데?”차은서의 체면을 봐서인지, 오미정 여사는 일단 구두를 내려놓았다.그리고 내 어깨를 붙잡고 균형을 잡은 채 재빨리 신발을 다시 신었다.네 사람은 정원 한쪽의 돌로 된 벤치에 마주 앉았다.모두의 표정이 무거웠다.차은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저와 성재윤 씨는... 가짜 약혼이에요. 저는 여자에게 끌리는 사람이고, 성재윤 씨는 본인이 여자에게 마음이 생기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서로 협력하기로 한 거예요. 각자 집안의 압박을 피하려고요.”“뭐?”오미정 여사의 목소리가 떨렸다.그때 오미정 여사의 표정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가혹한 운명을 마주한 사람 같았다.“아들아, 네가 성씨 집안의 대를 끊겠다는 말보다는 차라리 네가 못된 놈이라는 쪽이 더 받아들이기 쉬운 것 같다.”“아니, 그것도 안 돼.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네. 못된 놈은 더더욱 안 되지.”성재윤이 이마를 짚었다.“그 말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좋아하는 여자가 없었고, 일하는 게 더 재미있다고 느꼈을 뿐입니다.”“그래서 언젠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결혼해 그 사람의 인생까지 묶어 두느니, 차은서 씨와 서로 돕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그런데 그날 채영 씨를 봤습니다.”늘 침착하던 성재윤의 귀가 희미하게 붉어졌다.“처음 만났을 때 제 반응에 저도 의아했습니다.”“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라고 해도, 업무 자리에서 바로 그런 질문을 하는 건 제 성격상 맞지 않았습니다.”“왜 그랬는지 저도 몰랐습니다. 그때는 제가 그만큼 흔들렸던 겁니다.”“이후 하루하루 함께 일하면서 알게 됐습니다. 그게 첫눈에 반했다는 말일지도 모른다고요.”“그래서 채영 씨, 채영 씨는 제가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여자입니다. 우리 성씨 집안의 가훈은 한 사람만을 끝까지 지키는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살 겁니다.”나는 여전히 멍한 채였다.오미정 여사는 뒤늦게 상황을 이해했다.“어쩐지 그때 내가 영이를 딸로 삼겠다고 하니까 네가 그렇게 반대하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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